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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련수, 27세의 짧은 생애에 근 250여편의 문학유고 남기다...
2016년 11월 10일 22시 03분  조회:3714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조로부터 본 심련수의 류랑의식을 두고

김성호 
 

  심련수는 27세라는 그 짧다란 생애에 근 250여편의 문학유고를 남겼다. 그중 시조가 모두 87편이 된다. 그의 시조는 다시 려행시조와 일반시조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려행시조가 69편이고 나머지는 일반 시조이다.

그가 남긴 시조작품속에서 우리는 심련수의 류랑의식의 흔적을 얼마든지 찾아볼수 있다. 디아스포라적의식에 안받침된 그의 류랑의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것은 바로 오늘의 중국조선족의식형성의 본질문제이다.

아래에 심련수의 시조작품의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이 문제를 짚어보려한다.

1.

  시조란 한반도에 고유한 민족시가형태의 하나로서 단가, 또는 시절가라고도 불리여왔다. “시조는 향가의 3분단형식과 락구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3국시기에 발생한 정형시행태로서 대개 6구 3련으로 이루어졌으며 3.4조 혹은 4.4조 운률조직을 기본으로 하여 3련의 첫머리에 감탄사를 붙이는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시조는 단가로 불리울만큼 아주 짧은것이 특징인바 그만큼 시조는 우선 다른 한 속성으로의 간이(简易)성을 나타내고있다. 하지만 시조 역시 하나의 시형식의 쟝르인만큼 그저 6구의 말마디들을 세줄 세워놓아서 되는것은 절대 아니다. 시조도 엄연히 시적인 형태의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 이리하여 시인들의 경우 그것이 짧다는 의미에서 다른 시형태에 비하여 간이성을 나타낼뿐이다.

  심련수는 문학 지향인이였으며 그의 유작들을 보면 그는 당시의 유일한 조선문신문인 “만선일보”에 몇수의 시들을 이미 발표한적이 있을만큼 시인에 더 가까웠다. 시인 지망생인 심련수는 고교졸업을 앞두고 수학려행을 할 당시 그가 늘 써오던 일기를 접고 시조를 떠내는것으로써 일기를 대체한다. 1940년 5월 5일부터 5월 22일까지 18일동안 그는 “일만리 려정을 답파하고서”라는 제목으로 려행의 순서에 따라 시조작품을 써냈다.

먼저 “떠나는 길”이라 제목을 단 려행시조중의 첫 시조는 5월 5일 집을 떠나면서 자신이 이미 4년간 살아가면서 정을 붙인 고장의 자연과 작별인사를 하며 떠나는 작품이다.

“해란아 갔다오마 반만리 먼길을 사년간 먹은 정도 적다곤 못하겠다

갈 길이 멀고머니 쉬여쉬여 가련다. 모아 뫼 꼭대기 우에 푸른빛 열벗으니 돌아올 그때에는 록음아 깊어라. 산과 물 다 구경하고 돌아와 비겨 볼게.”

심련수네집은 그 당시에 중국 길림성 연변내에 있는 룡정의 세전이벌의 가장 웃쪽에 자리하고있었는데 그 집의 뒤로는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고 거기서 머리를 들어 북쪽을 바라보면 바로 모아산이 굽어본다. 심련수는 중국조선족의 문화의 요람이라고 할수 있는 해란강에 어느덧 저도몰래 정이 든다. 그리하여 해란강과 대화하는 형식의 시조를 지었는데 그 대체적인 의미는 반만리 먼길을 수학려행을 떠나는데 너무 급히 아니고 “쉬여쉬여” 갔다가 올것이니 그 사이에 “푸른빛 열벗고”있는 모아산은 록음이 깊어질것이니까 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이 고장의 산과 물들과 비교하여 보겠다고 하는것이다. 강과 산이라는 이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리하여 자주 어디론가로 떠나기를 즐기는 심련수의 류랑적인 의식이 여기서도 얼마간 발로되고있다.

그날로 심련수는 일행과 함께 두만강역에 이른다. 아마 오후에 룡정을 떠났을것이고 또 국경을 드나들어야 하는 수속 등, 어쨌든 그들은 두만강역에서 하루밤 묵어가는데 여기서 또 하나의 시조가 나온다. “국경의 하로밤”이라는 이 시조에는 그가 밤을 지새우려는듯 잠 못 이루는 처지와 그 원인은 바로 우리 선조들이 살길 찾아 두만강을 건느거나 아니면 나라를 잃고 독립을 위해 싸우러 이 강을 건너면서 “울더냐 웃더냐 응”하고 묻는다. 심련수의 류랑의식속에는 바로 강렬한 민족의식이 잠재되여있었다는 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류랑은 본인이 주동이 되여 나다니느냐 아니면 모종 원인의 핍박에 의해 나가느냐의 두 종류로 나눌수 있을것이다. 많은 경우 류량의 길에 나서는 사람들은 째지게 가난하여 더는 먹고입는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어 살아나가기 위하여 떠가거나 아니면 모종의 정치적원인의 박해로 고향을 떠나가야 하는 사람, 혹은 뜻하지 않은 범죄행위때문에 도망을 가야 하는 사람 등, 어쨌든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하여 수동적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그 다수를 차지한다. 심련수는 부모를 따라 생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하여 처음에 로씨아의 울라지보스토크의 연해지구에 갔다가 후에 중국의 흑룡강성 신안진으로 오며 나중에 길림성의 연변지구인 룡정시교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가정을 따라 여러곳으로 이사하면서 떠돌았을뿐만아니라 그 자신도 만주벌을 돌아보거나 혹은 일본에 류학을 갔었고 돌아와서는 룡정에 왔다가 다시 흑룡강 녕안으로 가는 등 거의 일생을 류랑성이 강한 생활을 하게 된다.

수학려행을 떠난 그 이튿날인 5월 6일에는 동해에 이른다. 이튿날 5월 7일날 심련수 일행은 원산을 거쳐 온정리에까지 이동한다. 그 사이에 그는 시조 “원산부두에서”, “동해 북부선 차안에서”, “외금강역", “온정리”, “구만물상”, “온정리의 하로밤” 등 여섯수의 시조를 써낸다. 여기까지는 수학려행을 떠나고 주로 차에 앉아 이동하면서 밖을 내다보며 느낀바를 적었고 다시 온정리에서의 투숙상황을 시조로 표현하였다면 그 다음날인 5월 9일의 시조는 그 량이 많은것이 특징이면서 그가 써낸 14수의 시조는 주로 금강산을 유람한 과정과 그 느낌을 토로한다. 심련수는 여기서 그 경치로 유명한 옥류동, 비로봉, 구룡연 등에 대한 정취를 시조로 마음껏 토로한다.

“물이 구슬같고 바위빛 비단같애/ 물이 흘으는 것 이 구슬로 뵈여진다”는 “옥류동 맑은 물에 두 손을 잠그고서/ 마음껏 량껏 마셔 물 배래도 채웠노라”고 옥류동을 노래하더니 물이 떨어져서 무지개가 서는, “세상에서 맑고도 흰” 구룡연은 “그림보다 나은것”이여서 이를 잠간만 보고 어찌 떠날수 있겠는가고 아쉬워한다. 그리고 비사문은 “극락 가는 길이 이같은가 하나이다”라고 표현하였고 비로봉에 대해서는 “말만 듣고 그리던” 비로봉에 오래있고싶다고 토로한다.

5월 10일에는 금강산에서 금강산 전철을 타고 서울로 온다. 이날의 시조는 금강산을 떠나서면서 지은 시조가 있고 금강산에서 전철을 탄다는 시조와 한강을 읊은 시조가 있으니 그날로 서울에 당도했다고 볼수 있다. 그 이튿날 본격적으로 서울을 구경하는데 이날 남긴 시조는 6수다. 그것들로는 “남대문”, “북악산”, “서울의 밤”, “경복궁”, “경회루”, “덕수궁” 등이다. 여기서 주목해볼만한 시조는 “서울의 밤”에서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서울서 밤을 자니 서울 밤 보곺어서/ 거리에 나서니까 서울 말씨/ 옷도 조선옷이요 말도 다 조선말이더라.// 거리엔 흰옷이 조선옷 흰빛이요/ 얼골은 조선 얼골 모습도 조선 모습/ 눈을 귀를 다 뜨고 듣고 보고 하엿쇠다.”

그때 심련수의 감상은 해외에서 나서 자랐거나 해외에서 오래동안 생활해온 사람이 처음 서울에 와서 느끼는 그런 감상과 아주 비슷했을것이다. 타민족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다가 순 우리 말을 하는 한민족뿐인 세상에 들어서게 되면 남달리 민족의식이 새로워지는것이다. 심련수는 바로 그런 새삼스러운 의식속에서 이를 재확인했을것이다. 이것은 바로 심련수의 류랑의식속에 뿌리를 내린 민족의식의 체현인것이다.

서울의 구경을 마치고는 그들은 잇따라 송도라 불리웠던 개성에 가서 선죽교를 돌아보면서 충신인 정몽주를 잠시 그리면서 “사람이 충신이야 못된다 치드래도/ 그이와 같은 뜻이야 못 가질것 무엇이냐/ 마음에 느낀바 있거든 실행해 보소이다”라고 읊는다. 개성에서 하루를 지내고 심련수 일행은 평양에 도착하게 된다. 이것이 5월 13일 일이다. 평양에 있는 동안에 심련수는 시조 6수를 남긴다. 그중 “대동강”이라는 시조가 그의 력사적인 민족의식을 토로하여 깊은 인상을 남긴다. 련시조로 된 이 시조는 아래와 같다.

“단군의 오신 길에 물 흘러 이 강이 되니/ 강물이 고흔것은 더 말할것 없어라/ 주몽님 이곳에서 큰일을 하셨겠다.// 강가에 수양버들 실바람에 날라어서/ 강산을 찾아든 손 갈줄을 모르나니/ 어차피 이 하로도 저물도록 놀오보자// 작은 배 찾아가서 이 몸을 부탁콧/ 가만히 누어서 흐름에 맡겨두니/ 릉라도 맑은 기슭을 소리없이 지내더라.// 류경의 사나이가 꿈에 낫다 꿈에 죽음/ 남아야 이제는 너도 새일군 되어보렴.”

이렇게 대동강이며 을밀대 부벽루를 돌아보고 기자릉을 가보는 등 부지런히 돌아다니다가 5월 14일에는 청천강을 경과하면서 신의주를 지나 압록강에 이른다.

3.

시조는 짧음으로서의 그 간이성특징외에도 현장성의 특징도 갖고있다. 려행시조의 경우 그 현장성이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심련수의 려행시조도 역시 례외는 아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곳을 떠돌아다닌다는 점에서는 려행이나 류랑 및 부단한 이주는 비슷한 점이 있다.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망향의식과 함께 민족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하지만 자신이 살고있는 고장은 영원히 살아야 할 곳이 아니라 어느 때고 또 떠나야 할 곳이라 여기에 참다운 주인의식이 결여된다.

시조의 현장성특징 덕분때문에 우리는 심련수의 려행시조를 따라 아주 명백하게 당시 그의 수학려행의 로정을 따라가 볼수 있는것이다. 한반도의 수학려행을 마친 심련수 일행은 그 시기에는 다른 한 나라였던 만주국까지 려행하게 된다. 일본침략자들은 20세기 30년대초에 중국에 전면적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친다. 그들은 1931년에 심양에서 9.18사변을 조작해낸 이후, 청나라의 말대황제였던 부의를 부추켜 중국의 동북에다 괴뢰정권을 만들어낸다. 이 나라가 위만주국이다. 위만주국에는 지금의 료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3성이 포함되는데 심련수일행은 이 동북 3성에 대한 수학려행을 마저 끝낸다.

한반도에서 중국의 료동반도에 들어선 심련수는 5월 15일과 5월 16일에 “대련항시”, “려순”, “료동반도의 하로”, “황해”, “련경선 밤차” 등 다섯수의 시조를 남긴다. 그들은 대련 등지를 구경하고 대련-북경행 렬차를 타고 심양으로 이동을 하는중이였다. 심양에 와서 역시 이틀을 묵는데 이때 즉 만주땅에 들어서서 심련수의 시조창작은 량적으로 현저하게 줄어든다. 심양에 있는 사이에 그가 남긴 시조는 마찬가지로 아주 적어 모두 3수뿐이다. “봉천”, “북릉”과 “봉천성 우에서” 등이다.

심양의 려행을 마치고 심련수일행은 계속하여 신경(장춘)을 거쳐 할빈으로 가는데 신경의 시조는 한수가 있고 할빈에 가서는 4수의 시조를 남긴다. “할빈 역두에서”, “로천공원묘지”, “송화강”, “끼다야쓰카의 밤” 등인데 이 시조들의 특점은 바로 거개 련시조라는것이다. 그중 “끼다야쓰카의 밤”은 무려 12련이나 되게 길다.

5월 20일날 하루를 할빈에서 보내고나서 할빈을 떠나서 목단강으로 오는 기차에서 “빈완선 차중에서”라는 시조를 남기고 5월 21일 목단강에 들려 시조 “목단강”이라는 시조 한수를 짓고 목단강에서 룡정으로 나오는 차에서 5월 22일 “려행은 오늘이 끝이다”와 “수학려행을 마치고”, “낯익은 품속의 사랑”, “룡정 역두에서”라는 4수의 시조를 끝으로 수학려행의 전반 과정을 총결한다. 여기서 “려행은 오늘이 끝이다”는 시조는 2련으로 되여있는 간단한 시조인데 뒤돌아보니 “두줄기 쇳대뿐”인 기차레루가 생각나고 “산을 뚫고 지나서 반만리 얽어있다”로 개괄하고 마는데 이때 심련수는 마지막으로 수학려행을 마치면서 총화를 지을 생각을 따로 한것이라 짐작된다. 이리하여 그는 “수학려행을 마치고”라는 꽤나 긴 련시조를 짓는다. 여기서 심련수는 비단 수학려행만을 되돌아본것이 아니라 중학생시절의 4년을 총화한다. “4년간 서창에서 지쳐진 우리들이”로 시작되는 이 련시조에서 심련수는 “돌아서 보면은 온 길이 아득해라/ 생각해 보면은 기억이 몽롱해라/ 연기와 안개를 통해 보는 그림 같으다”고 하고는 수학려행을 통해 민족의 력사의식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고 “전화는 뭇질렀다 모든 문화 다 뭇질러/ 사람도 죽엇고 문화도 죽어졌다면/ 그 싸움 후에는 다시 나지 않게 할것이다”며 안타까운 그 현실에 울분을 토하면서 “사람아 가소서 님이여 가소서/ 세월은 흘렀고 문물도 변했더이다/ 려로에 얽힌 꿈자시 송두리째 벗었도다” 하면서 이번의 수학려행에서 지난날 꿈꾸어오던 장래의 리상의 꿈이 깨졌다고 한탄을 하고 나중에 끝으로 장식없는 룡정의 품에 다시 돌아왔는데 여기서 “마음이 편한 곧에다 내 집을 짓고 싶쇠다”며 시조를 마무리한다.

4.

시조는 역시 시적쟝르의 일종으로 보는것이 마땅할것이다. 하기에 시조에는 반드시 시적인 요소가 다분해야 하며 시상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면서 시조는 정형시형태를 이루면서 그리 길지 않게 된것은 시조가 세상에 금방 나올 때와 나와서 오래동안은 창으로 불러지면서 읊어지지는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심련수가 살아가던 그 세월에는 시조가 불려지는것보다 읊어져왔던것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이리하여 심련수의 시조에는 련시조들이 적지 않고 명시조라고 이를 시조들은 별로 없어도 그 시조들을 통해 심련수가 적지 않은 곳을 려행하면서 떠돌아다닌 그 흔적들을 얼마든지 찾을수 있는것이다. 총 88편의 시조에서 69편이 수학려행을 할 시기 전문적으로 지은 시조라면 나머지 얼마 발견되지 않은 19편의 시조들을 살펴보면 거개가 산천경개를 읊거나 계절이나 기후, 아니면 어느 특정한 장소를 노래한것들이다.

시조 “벽공”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어서 다시 음미해보게 한다. “가거라 마음껏 뉘 아니 막으리니/ 류랑은 즐겁도다 구속 없어 좋을세라/ 사해의 그 우에는 가린것이 없으리라.” 이 시조에서 읊조리듯이 그 어떤 구속도 싫어하는 심련수에게는 류랑을 즐기는 의식이 아주 강하게 자리잡고있으며 그 류랑의식속에서 심련수의 일생은 거의 “류랑”으로 채워진다. 심련수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함도 객사를 하니 바로 1945년 8월 8일 해방을 일주일 앞두고 녕안에서 룡정으로 도보로 돌아오던중 왕청현 록도, 춘양 일대에서 관동군 소속의 위만주국 마희산부대(나중에 토비로 전락하며 후에 숙청됨) 병사의 무정한 총알을 받게 되는것이다.

심련수는 우리 중국조선족으로 놓고 말하면 제2세이다. 제1세대들도 극도의 가난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류랑의식의 작용을 받아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왔다면 제2세대들로 역시 그 유전자속에 류랑의 의식을 싹틔워놓았을것이며 그들의 후대들인 우리도 역시 류랑의식의 지배속에 있다고 말할수 있겠다. 지금 중국조선족은 세계의 어느 나라에나 거의 다 가있는 실정이다. 디아스포라 즉 온 세계에 흩어진 유태인들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디아스포라의식과도 련관되는 우리들의 류랑의식은 주인의식이 결여되여 확대재생산을 하려는 의도에 아주 린색하고 재산을 잘 모으려 하지 않으며 있으면 다 소비를 하는 등 경향의 페단이 존재하는가 하면 글로벌의식에서는 그 누구보다 앞장을 설수 있는 장점도 있다.

하여튼간에 우리는 심련수의 사상의식속에 잔존하던 그의 류랑의식에 대해 잘 총화하고 그와 같은 선배들이 남겨준 문화유산에서 훌륭한것은 계승 발전시키고 그릇된것은 삼가면서 금후의 글로벌시대를 보다 훌륭하게 맞아야 할것이다. 중국조선족의 현대의식속에도 그 영향을 미친 심련수의 류랑의식은 바로 글로벌의식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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