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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소학교시절의 윤동주
윤동주는 1925년, 만 8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윤동주의 소학교 1학년때 동창생이자 외사촌동생이며 시인인 김정우(한국)씨는 나의《나라사랑》23집에 실린《윤동주의 소년시절》이라는 글에서 윤동주의 모습을 이렇게 썼다.
《동주랑 같이 학교에서 1학년때 국어공부를 한 이야기인데 당시 교과서는〈솟는 샘〉등사본이였다.〈가〉자에〈ㄱ(기윽)〉하면〈각〉하고〈가〉자에〈ㄴ(니은)〉하면〈간〉하여 천자문을 외우듯이 머리를 앞뒤로 저으며 랑랑한 목소리로 암송하던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명동소학교시절은 윤동주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수 있다. 윤동주의 28년 일생에서 꼭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살았다는것외에도 그의 인격 및 시적감수성의 기본이 형성된 곳이기때문이다.
윤동주의 일생에서 명동시절처럼 아름답고 풍요한 시절은 없었다. 자연환경도 그렇겠지만 가정환경 그리고 시국의 상황까지도 그러했다.
명동의 자연환경은 시인 김정우씨의 글에 잘 묘사되였다.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다. 동, 북, 서쪽으로 원만한 호선형구릉이 병풍인양 마을뒤를 둘러있고 그 서북쪽에는 선바위라는 3형제바위가 창공에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면서도 서북풍을 막아주고있다. 이 3형제바위는 명동사람들의 공원이기도 하다. 동쪽으로 뻗어오던 장백산맥이 오랑캐령인 오봉산과 칼바위산이란 날카로운 산들을 원점으로 하여 서남쪽으로 지맥이 이루어지면서 마을정면에는 고산준령이 첩첩이 뻗어 선바위를 스쳐간다.
봄이 오면 마을 야산에는 진달래, 개살구꽃, 산앵두꽃, 함박꽃, 나리꽃, 할미꽃, 방울꽃들이 시새여 피고 앞강가 우거진 버들방천에는 버들강아지가 만발하여 마을은 꽃과 향기속에 파묻힌 무릉도원이였다. 여름은 싱싱한 전원의 푸르름에 묻혀있고 가을은 원근 산야의 단풍과 무르익은 황금색 전답으로 황홀하였다.
겨울의 경치는 더욱 인상적이였다. 산야에는 나무의 앙상한 가지들이 삭풍에 울부짖고 은색 찬란한 설야엔 옥색 얼음판이 굽이굽이 뻗으며 선바위골로 빠지는 풍경은 실로 절경이였다. 폭설이 내리는 날엔 노루떼, 메돼지떼들이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오고, 그런 날에는 온마을이 흥분의 도가니속에 들뜨군 했다. 박달나무팽이돌리기, 썰매타기, 스케트타기, 매를 가지고 꿩사냥하는것을 구경하러 따라다니기 등 명동촌의 겨울은 지울수 없는 추억들이였다…
동주의 집은 학교촌에 소속되여 있었으며 잘사는편이였다. 그 당시 벼농사를 하는 집이란 그 마을에서 몇호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중에 동주네 집도 끼워있었다. 그의 집은 학교촌입구의 첫집이였다.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기슭에 교회당이 있고 그 교회당옆으로 두채의 집이 있는 앞집이였다. 그의 집은 정남향 큰 기와집으로 후면과 좌우에는 그리 크지 않은 과수원이 있고 뒤문으로 나가면 그의 시〈자화상〉에 영향이 되였다고 하는 물맛으로 유명한 수십길도 더 되는 깊은 우물이 있다. 우리는 동주랑 같이 과수원울타리로 되여있는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먹고 물을 길어 입을 닦기도 했으며 그 우물속을 들여다보고 소리치며 그 메아리를 듣군 하였다…》
이런 자연환경속에서 자라고있던 윤동주의 어릴 때 학교생활은 어떠했을가? 윤동주의 소학교 4학년때 담임선생님이였던 한명준목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요.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 하하! 본래 재주가 있는 아이였어요. 공부도 잘하는 축이였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을 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 도는거예요… 동주 할아버지가 그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어요. 밭이 많았거든요. 늘 말을 기르고있었고 나다닐 때 그걸 타고 다녔지요. 그리고 아들을 동경류학도 시켰었고…》
그러고 보면 명동소학교시절 윤동주의 모습이 선명하다.말을 타고 다니는 부자집로인의 장손으로서 마음이 여리고 공부를 잘하던 소년이였다.
명동소학교시절의 윤동주네 학급은 문학소년반이라고 할수 있었다. 김정우시인의 회상록을 펼쳐보면 이렇게 씌여져있다.
《명동소학교때 동주는 벌써 서울에서 소년, 소녀들을 위한 월간잡지를 구독했다. 동주에게는 고종사촌이며 동갑인 송몽규란 친구가 있었다. 그도 역시 문학소년이였다. 몽규는〈어린이〉라는 잡지를, 동주는〈아이생활〉이라는 잡지를 서울에서 부쳐다 읽었다. 동네아이들은 그들이 다 읽은후 빌려서 읽었다. 두 소년이 서울에서 월간잡지를 구독해 읽는다는것은 당시 벽촌에서 큰 일이 아닐수 없었으며 그것이 마을에 큰 영향을 주어〈삼천리〉같은 월간잡지가 청년들사이에 널리 보급되였다.
5학년이 되면서 동주와 몽규의 발기로 우리들도 월간잡지를 등사하여 발간할것을 결정하였다. 원고를 모아 편집을 끝내고 잡지명이 결정되지 아니하여 당시 우리의 담임선생이며 존경하는 한명준목사님을 찾아가서 자문을 청했더니 우리를 칭찬하시며〈새 명동〉이라 하면 좋을것이라 하여〈새 명동〉이라는 이름으로 몇호 발간하였다.
우리가 명동학교를 졸업할 때 우리 반이 문학소년반이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학교에서는 졸업기념으로 우리에게 파인(巴人) 김동환의 시집〈국경의 밤〉을 나누어 주었다…》
윤동주는 1931년 3월 15일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했다. 졸업동기는 14명, 졸업후 윤동주는 명동에서 동쪽으로 10여리 떨어진 대립자(大粒子)에 있는 중국사람이 꾸리는 소학교 6학년에 입학하였다. 졸업동기중에서 윤동주, 송몽규, 김정우 그리고 다른 동료 1명, 이렇게 모두 4명이 입학했는데 김정우가 도중에 퇴학하고 나머지 3명은 날마다 10리길을 걸어다니며 1년을 통학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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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가계
윤동주의 고향 중국 길림성 룡정시 지신향 명동촌(당시에는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이라고 했음)은 조선 함경북도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와 중국 룡정시의 삼합진을 지나 오랑캐령을 넘어 룡정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회령에서 북으로 40리, 지신진소재지에서 7리, 북쪽의 룡정에서 남으로 30리 상거하고있다.
《명동(明东)》이란 동쪽에 있는《조선을 밝게 하자》는 의미로서 장재, 이호동, 동구, 룡암, 수남, 풍악, 중영상, 하촌, 성교촌, 교우촌 그리고 건너 서쪽의 대, 소사동 등 10여개 마을을 합친 총칭이다.
1881년, 청정부에서 연변에 대한 봉금령을 해체하게 되자 이를 전후로 조선의 이주민들이 이곳에 들어와 상술한 크고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당지의 중국인 지주 동한 3형제의 땅을 소작하고 살았었다. 1899년, 김약연을 중심으로 하는 전주 김씨가문 31명, 김하규를 중심으로 하는 김해 김씨가문 63명, 문병규를 중심으로 하는 문씨가문 40명, 남종구를 중심으로 하는 남씨가족 7명과 그 먼저 명동에 들어와서 동지주와 토지구매, 이사 등을 교섭하던 김항덕 등 142명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1899년 2월 18일, 조선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자동촌을 거쳐 명동으로 이주하였다.
김약연은《맹자》에 정통하였고 김하규는《주역》에 정통하였고 한북학회의 함북도 지회장이였다. 남도천은 학문이 깊어 함경도에서 서울에 추천하였으나 벼슬을 거절하였다. 하여 사람들은 그의 본명《종구》라고 부르지 않고 남도천이라고 불렀는데 김약연의 은사였다.
그들은 모두 실학파들이였는데 벼슬길이 막혔다고 실망하지 않고 벼슬을 위해서가 아니라《글을 모르면 남에게 천시당한다.》,《아는것이 힘이다.》라고 하면서 량반귀족 못지 않게 학문을 닦았고 리론보다 실천을 귀중히 여겼다. 때문에 그들은 비록 유학을 배워도 손수 농사, 집짓기를 하면서 후대들을 공부와 로동이 결합된 인간으로 양성하기에 힘썼다.
또한 그들은 인민대중이 자기의 손으로 생존환경을 개선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도록 인도하면서 단결된 공동체의 힘으로《밝은 조선》을 건설할 인재를 육성하는데 모를 박았다. 즉 집단적으로 토지를 사들여 제일 좋은 10분의 1의 토지를 학교밭으로 내놓고 서당을 꾸리였다. 김약연은 장재촌에서 규암제서당을, 김하규는 대사촌에 소암제서당을, 남도천은 중영촌에 한함서재를 꾸리고 인재를 육성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이렇듯 1899년에 142명이 집단이주한후 그들을 핵심으로《새 조선인마을》이 뿌리를 내렸다. 윤동주네 파평 윤씨가문은 이민단이 명동에 들어간 이듬해인 1900년에 명동에다 땅을 사고 이주해 들어왔다. 조선 종성으로부터 1886년에 자동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가 왜 명동으로 이사왔는지 그 리유는 확실치 않지만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1900년에 중국 산동성으로부터《의화단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은 화북지방으로 퍼졌고 동쪽으로는 연변에까지 퍼졌다. 당시 연변에는 큰부채골, 삼원봉, 팔도구 등 세곳에 천주교성당이 있었는데 모두 의화단 단원들의 손에 의해 불탔다. 관군들의 토벌작전 역시 같이 진행되여 의화단을 쫓는 붉은 군복차림의 관병들이 총을 쏘며 명동에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의화단사건》이 일어났을 때 명동사람들은 사태를 보아 여차하면 두만강을 건너 다시 조선으로 피신하려고 모두 두만강변인 자동으로 갔다고 한다. 그때 윤씨가문의 사람들이 명동사람들과 가까이 접촉했는데 그것이 이주의 계기로 되였을 확률이 크다.
자동의 많은 재산을 정리하여 명동으로 들어온 윤동주네는 명동에서 가장 잘사는 축에 속했다. 당시 명동으로 이주해온 윤씨네 인원은 모두 18명이였다.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씨 내외와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4명의 아들들의 가족과 친척 두 집이 합하여 그만한 규모를 이루었다.
윤동주의 개인사를 놓고 볼 때 윤씨가문의 명동으로의 이주를 하나의 운명적인 전기로 꼽게 된다. 이주해온 10년만에 윤영석이 명동처녀 김룡과 결혼하여 윤동주를 낳게 되기때문이다.
김룡은 이민단의 주역중의 한분인 김약연학자의 이복누이동생이였다. 김약연의 생모는 그 하나만을 낳은채 일찌기 별세하였다. 계모로 심씨가 들어와 3남 1녀의 소생을 두었다. 김룡은 외동딸이였다. 이민하기전에 김약연의 부친이 이미 별세하고 이모만 생존하였다. 김약연은 계모를 모시고 자기 내외와 아들 둘, 딸 하나 그리고 결혼한 남동생 내외와 미혼인 남동생 둘, 녀동생 하나로 이루어진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넜던것이다.
이민 당시 김룡의 나이는 8살이였다. 후날 김룡은 도량이 넓고 인품과 재능이 있어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녀는 명망이 있는 학자집안의 출신답게 처신 역시 조신했다.
윤하현(1875―1947년)장로의 아들 윤영석(1895―1965년)은 1910년에 김룡(1891년―1948년)과 결혼하였다. 김룡은 딸을 하나 잃은후 다시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결혼한지 8년이 되는 해에 임신하였는데 그해 겨울 즉 1917년 12월 30일에 아주 준수하고도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윤씨댁의 장손이였다.
윤씨가문의 장손의 출생은 아주 큰 경사였다. 윤영석은 크게 기뻤다. 가문에서는 아기의 아명을《해환》이라고 지었다. 이 아이가 후날 조선민족시인이라는 큰 이름을 얻은 윤동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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