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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잊지 말아야 할 청년문사 - 송몽규
2016년 02월 19일 04시 24분  조회:5863  추천:0  작성자: 죽림

 

 

1. 소개

 

그들은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나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고, 거의 평생을 동반자로서 살아갔다. 그들은 같이 일본에 유학했고,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건, 같은 죄목으로 얽혀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같은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옥사했다. 두 사람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생과 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은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 크게 자리 잡고 있다."-《윤동주 평전》

宋夢奎.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사촌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으로서 어린 시절 같이 자라고, 학업과 유학을 함께 했으며, 윤동주와 함께 잡혀가 똑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 필명으로 몽규(夢奎)를 우리말로 풀어쓴 "꿈별" 등이 있다. 이 본명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가명으로는 '고문해(高文海)'가 있다. 아명은 '한범'으로 어린 시절 송몽규를 알던 사람에게는 '한범이'로 불리는 일이 많다.

1917년 9월 28일 생이며, 1945년 3월 7일 해방을 몇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본적지는 함경북도 경흥(慶興)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출생지는 만주 간도성(間島省) 화룡현(和龍縣) 지신촌(智新村) 명동둔(明東屯). 지금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내 길림성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이다.

성격이 부끄럼 많고 조용한 윤동주와는 대조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쉽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거의 모든 생애를 함께 한 형제 같은 인물. 다만 윤동주와는 달리 그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윤동주 평전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그 당시 어려서부터 성적을 보면 송몽규, 윤동주, 윤영선, 문익환 자신이 항상 선두 그룹이었는데, 그 중에서 운영선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자신은 윤동주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고, 윤동주는 또 자신보다 송몽규가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몽규를 보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뒤집어보면 현재는 내가 뒤진다는걸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2. 생애

 

2.1. 출생

 

송몽규의 아버지는 북간도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5세 때 충청도에서 연해주로 가다가 함경북도 경기군 웅기읍 우상동에 머물러 가문을 일으켰으며, 송창희는 서울에 유학을 다녀왔다. 송씨 문중은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송몽규의 삼촌 손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1920년 전사, 송창근은 일본-미국으로 유학하여 1931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몽규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의 딸로서, 윤동주의 아버지인 윤영석(永錫, 1895-1962)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信永,1897-?)으로 그녀는 윤동주의 고모가 된다. 송창희는 25세 때 명동에 왔는데, 체격과 인물이 뛰어나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큰 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자기 큰 딸과 선을 보게 하여 결혼시켰다고 한다. 송창희는 윤장로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쳤다.

송몽규는 1917년 파평 윤씨 가문에서 친정집에 와있던 윤하현 장로의 큰딸 신영에게 9월 28일 태어났다. 이후 12월 30일 이 집안의 외아들 영식의 가족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석 달을 차이 두고 윤동주와 함께 태어나, 다섯 살이 될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윤창식이 따로 집을 구하고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송몽규의 동생으로는 여동생 한복(1923년생), 남동생 우규(1931년생)가 있다.

 

2.2. 학업

 

“윤동주는 문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송몽규는 연설을 잘했으며, 정치적 리더십이 두드러져 장래 희망을 일찌감치 독립군으로 정해놓고 있었다.”-문익환 평전

1925년, 8살 나이로 같은 마을의 또래였던 윤동주, 문익환,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 선생에게 사사 받았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고 리더쉽이 강한 인물로,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 등을 공연하는데 주도했고,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문예지를 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서 수입해온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윤동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김신목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에서 '인민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송몽규가 큰 일을 했다고 한다.

1929년 봄, 그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몽규 역시 고작 12살 나이에 송창희 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다부진 성격이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윤동주와 함께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20여리의 등교길을 매일 함께 다녔다고 한다. 룡정으로 이사하면서 1932년 4월에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송몽규는 윤동주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으로 18세 나이로 꽁트 《숟가락》을 써서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다. 아명인 송한범으로 실렸다. 윤동주보다 이른 나이였으며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1934년부터 문해(文海)라는 호를 썻다. 글(文)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송몽규가 문학에 품고 있었던 큰 뜻을 짐작케 한다. 송몽규는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는데 사용했는데,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이 도장이 찍힌게 몇 권 있다고 한다.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은 민족주의자였는데, 송몽규는 이때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졌다고 한다.

 

2.3. 독립군 투신

 

돌연 송몽규는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남경으로 떠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한인반으로서는 2기생. 임시정부 김구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장개석에게 지원을 받아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던 학교로서, 10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군사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개석은 이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송몽규는 '왕위지'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은진중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1]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같은 시기에 송몽규와 함께 은진 중학교 선배를 통해서 점조직으로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때 잡지를 만들었는데 김구가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중국의 재정지원 중단으로 반이 해체되자 학교를 떠났다. 1935년 11월에는 중국의 제남지구(濟南地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는데, 1936년 3월, 산동성 성도 제남(濟南)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 이래로 일제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송몽규는 강제귀국 조치를 당하고, 1936년 6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등의 혐의로 본적지 함북 웅기경찰서(雄基警察署)에 구금되었으며,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8월 말 무렵 석방되었다. 이 떄부터 경찰의 요시찰인물이 된다.

이후 송몽규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특고월보』에서는 송몽규가 1936년 3월에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권유로 자수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1936년 특고경찰이 작성한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따르면 송몽규가 체포된 시간과 장소는 '1936년 4월 10일, 제남'으로서, 북간도 대랍자에서 일경에 자수했다고 기록된 '1936년 3월'과는 다르다.

『사상월보』에 실린 판결문에는 송몽규가 1936년 4월 부터 본적지 옹기경찰서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는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명시된 체포 시기, 정황과 일치한다.

송옹규는 송몽규가 일경에 잡혀서 본적지로 압송되는 현장을 우연하게 목격하였다. 이 역시 자수설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일 송몽규가 집안 어른들 권유에 따라서 자수를 해서 압송되었다면 본가에서 연락이 가서 압송 때부터 뒷바라지를 시작했을 것인데, 정작 옹기 본가 사람들은 송몽규의 압송 현장을 우연히 보고서야 체포되었다는걸 알게 되었고, 무슨 사건으로 체포된건지 전혀 몰라서 집안 어른들이 알아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2.4. 학업 재개

 

1937년 4월, 용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고도 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간도에 있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를 졸업했다고도 한다. 조선족 신문에서는 전자, 국가보훈처 국립유공자 보훈록에서는 후자로 쓰고 있다. 본인은 은진중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8년 4월에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윤동주와 나란히 합격하였다. 경제적으로 유망한 학교에 들어가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희전문 문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연희전문은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기 때문에 사촌 간이 나란히 합격했다는 것은 크나큰 경사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의 8월에 송몽규는 시 《밤》을 적어서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또한 연희전문에서는 1932년에 창간된 문과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文友)》를 이어받아 문예부장으로서 활동했다. 문우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필명 '꿈별'로 '《하늘과 더불어》'[2]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이 때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문우에서 함께 발표하였다. 편집인은 일본유학을 함께 하게 된 강처중(姜處重).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
 

송몽규는 자신들이 참가하게 된 문우 마지막 호에서 안타까운 심경이 가득한 후기를 남겼다.

대학에서 송몽규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한국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쓰게 하여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데 있다고 보았고, 민족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2월 부터 동급생 윤동주,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인잡지 간행, 문학작품 품평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2년 12월 27일 연희전문에서 2등으로 졸업하였고, 1942년 봄에 윤동주와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떠나면서 도항증명서를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윤동주는 후에 이 때의 감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드러내었다.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합격했으며, 윤동주는 릿쿄대학에 들어갔다가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하여 송몽규와 재회했다.

42년 10월 부터 43년 7월 까지, 도지샤 대학의 윤동주와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 기회를 노려서 민족의 독립을 기획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는 활동을 했다.

 

2.5. 체포와 사망

 

1943년 7월 10일,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7월 14일 체포되었다.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944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44년 4월 13일에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였으며, 일본이 머지 않아 패전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서 대세를 몰아 조선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절명했으며, 3월 7일 송몽규 역시 사망하여 순국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의문사는 생체실험으로 옥사.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으며, 윤동주의 비문을 지었던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라는 비문을 썼다.

 

3. 사후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 송몽규의 조카가 되는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송몽규의 일생도 함께 정리하였다. 그 동안 무덤의 위치가 잘못 알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었으나,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수록된 증언 덕분에 올바른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 4월에 송몽규의 묘는 윤동주가 묻혀 있는 용정으로 이전하여 윤동주의 묘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사후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4. 송몽규 전집

 

송몽규의 작품은 거의 남지 않았는데,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 연희전문에 문우에 발표한 《하늘과 더불어》,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밤》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문단이 곧 송몽규 전집(…)이다.

- 술가락 -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3]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하늘과 더불어 -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 殘滓만
쓰디쓴 追憶의 反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이 없어 孤獨스럽지 않아도
故鄕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하련다.

- 밤 -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5. 대중문화

 

윤동주의 「이런 날」(1936. 6. 10)에서 언급되는 '형'이란 송몽규를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사이 좋은正門의 두돌긔둥끝에서
五色旗와 太陽旗가 춤을추는날,
금(線)을 은地域의 아이들이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乾燥한學課로
해ㅅ말간 倦怠가 깃들고
‘矛盾’ 두자를 理解치 하도록
머리가 單純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頑固하던 兄을,
부르고 싶다. -1936년 6월 10일
― 윤동주 이런 날


윤동주를 주제로한 59편의 시를 엮어 '윤동주의 빛'이라는 시집을 낸 이탄 시인이 해당 시집 내에 송몽규라는 시를 적어놓은 것이 있다.

송몽규
이 탄

항상 윤동주의 뒤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윤동주의 앞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윤동주의 조용한 얼굴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송몽규는 독립군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의 그림자는 남겨놓고 떠났다
학교는 그럭저럭 윤동주와 맞먹었어도 생각하는 것, 그것을 옮기는 것은 송몽규였다
실천자, 그는 혼자 돌아다니는 윤동주를 나무라지 않았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고종사촌의 아들 송몽규도
일본에 와 있었다
송몽규의 그림자는 넓고 넓었다
그는 그 안에서
쓰러진 벼농사를 일으켜 세우고
물을 대주는 일도 해야 했다
신작로에 말없이 백힌
돌 하나
그 돌 하나만이라도
뽑아서 뾰족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의 힘을 누를 것인가
아세아에서 누가 일본에게 덤벼들 것인가
벌은 날아다니는 곤충
개미는 애써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곤충
이 두 곤충의 삶을 비교하여
벌은 벌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 만해의 부릅뜬 언어, 조선독립의 이유서
벌은 일본이고 개미는 조선일지라도
각기 살아가야 한다
벌이 어떻게 개미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송몽규의 생각도 이러했으리라
벌은 하루 종일 꿀을 모아야 하지만
저 허리가 잘록한 개미, 기어다니는 개미는 개미대로 즐거워야 한다
송몽규의 온몸은 이런 생각으로 차 있었다
이런 투로 그의 그림자는 그림자로 가득했다
윤동주의 뒤
윤동주의 앞
항상 그림자 안에서 지냈다
윤동주는 그림자만 보아도 뜻을 알았다
그 뜻에 다치거나
그 뜻에 흠집이 생기거나
그 뜻에 동티가 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림자에 더 첨가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림자를 잘 보관시키도록 해야 했다
마당에 서 있는 사철나무
껌껌해도 볼 수 있는 사철나무
항상 빛을 잃지 않은 사철나무의 뜻을 새삼
나무만큼 알았다
저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떠 있다
사철나무나 저 별들은 변하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
하나가 동적이면
하나는 정적이다
윤동주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두 사람이 같았다
하나는 그림자, 하나는 그림자에 싸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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