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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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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2016년 04월 07일 06시 05분  조회:4591  추천:0  작성자: 죽림

그 남자의 방


몸에다 무수한 방을 가진 남자를 알고 있다
햇살방 구름방 바람방 풀꽃방

세상에, 남자의 몸에 무슨 그리도 많은 방을!

그 방 어느 창가에다 망상의 식탁을 차린 적 있다

안개의 식탁보 위에 맹목의 주홍장미 곁에

내 앙가슴살 한 접시 저며내고 싶은 날이 있었다

그의 방을 기웃대다 도리어
내 침침한 방을 그에게 들키던 날
주름 깊은 커튼 자락 펄럭, 따스한 불꽃의 방들 다 두고
물소리 자박대는 내 단칸방을 그가 탐냈으므로

 

내게도 어느 결에

그의 것과 비슷한 빈 방 하나 생겼다
살아 꿈틀대던, 나를 달뜨게 하던
그 많은 방들 실상, 빛이 죄 빠져나간 텅 빈 동공
눈알 하나씩과 맞바꾼
어둠의 가벼운 쭉정이였다니, 그는 대체
그동안 몇 개의 눈을 나누었던 것일까
그 방의 창이 나비의 겹눈을 닮아 있던 이유쯤
더 이상 비밀이 아니구나, 저벅저벅 비의 골목을 짚어가던
먼 잠속의 물발자국 소리도 그의 것이었구나

 

 

 

 



예감

 


왜 가슴보다 먼저 등 쪽이 따스해 오는지, 어떤 은근함이 내 팔 잡아당겨 당신 쪽으로 이끄는지, 쉼표도 마침표도 없는 한단락 흐린 줄글 같은 당신 투정이 어여뻐 오늘 처음으로, 멀리 당신이 날 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 했습니다 우주로의 통로라 이른 몇번의 전화는 번번이 그 외연의 광대무변에 놀라 갈피없이 미끄러져내리고, 더러 싸르락싸르락 당신의 소리상자에 숨어 있고 싶던 나는 우물로 가라앉아버린 별, 별이 삼켜버린 우물이었지요 별들은 불안정한 大氣를, 그 떨림의 시공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반짝임을 얻는 생명이라지요 벌써 숨은 별자리라도 찾은 듯한 낯선 두근거림, 어쩌면 당신의 지평선 위로 손 뻗어 밤하늘 뒤지더라도* 부디 놀리지는 마시길, 단호한 확신이 아닌 둥그렇게 나를 감싼 다만 어떤 따스함의 기운으로요

*지평선 위로 손 뻗어 밤하늘 뒤지다 -朴碩在

 

 

 

 

 

거울 속의 벽화


대합실 장의자에 걸터앉아 심야버스를 기다린다

왼쪽 벽면에 붙박인 거울을 본다

거울의 얼굴엔 마치 벽 속에서부터 시작된 듯한

뿌리 깊은 가로금이 심어져 있다

푸른 칼자국을 받아 두 쪽으로 나뉘어진 물상들

잘못 이어 붙인 사진처럼

하나같이 접점이 어긋나있다

 

그녀의 머리와 목은 어깨 위에 서로 비뚜름히 얹혀있다

곁에 앉은 남자의 인중 깊은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멈춰선 톱니바퀴처럼 비끗 맞닿아있다

그 무방비한 표정 한 끝에 아슬하게 매달린 웃음을

훔쳐보던 내 눈빛이, 스윽

균열의 깊은 틈새로 날개꼬리를 감춘다

물병에 꽂힌 작약, 소스라치게 붉다

일그러진 둥근 시계판 위에서

분침과 시침이 포개 잡았던 손을 풀어버린다

 

이 모든, 아귀가 비틀린 사물들 뒤에서

아카시아 어둔 향기가 녹음의 휘장 속에 어렴풋 속을 보이고

그렇게 조금씩 제 각도를 비껴나고픈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의 초상이 벽 속에 있다

 

 

 

 

상사화

 

살 밖의 뼈가 어둡다고


달팽이는 저녁이슬 하나씩 깨물어 먹는다


살 밖의 뼈가 어둡다고


숲은 간이 싱싱한 어린 참나무를 찾고 있다


꽃대궁은 이미 뜨겁다


잎은 혼례에 늦는 신부를 데려오느라 아직 피지 않고 있다


살 밖의 뼈가 어둡다고


멀리 동구 밖 홰나무는 말울음 소리를 낸다

 

 

 

 

(甁)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그들은 늘 그의 오른쪽에 앉는다

아내 투정도 아이의 까르륵 웃음도

여름날 뻐꾸기 울음소리도 빗소리도 모두

그의 오른쪽 귓바퀴에 앉는다, 소리에 관한 한

세상은 그에게

한바퀴로만 가는 수레다

출구 없는 소리의 갱도

어둠의 내벽이, 그의 들리는 귀와 들리지 않는 귀 사이에

 

그의 비밀은 사실, 들리지 않는 귀 속에 숨어 있다

전기를 가둬두던 축전병처럼, 그의 왼쪽 귀는

몸에 묻어둔 소리저장고

길게 목을 뺀 말 모자를 푹 눌러쓴 말 눈을 뚱그렇게 뜬 말 반짝반짝 사금의 말 진흙의 말 잎과 뿌리의 말, 세상 온갖 소리를 집어삼킨 말들이 말들의 그림자가 그의 병 속에 꼭꼭 쟁여져 있다

그것들의 응집된 에너지를 품고 그의 병은

돌종처럼 단단해져간다


한순간, 고요한 폭발음!
소용돌이치며 팽창하는 소리의 우주가 병 속에, 그의 귓속에 있다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 오라 했음을 알겠다

 

 

 

 

 

 

 

 

류인서(1960~ )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2001년 계간 <시와 시학>에 〈꽃 진 자리〉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20대에 등단한 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문단에 나온 셈이다. 40대 후반을 막 넘어서 50대로 들어서는 이즈막에 류인서는 두 번째 시집 《여우》를 냈다. 첫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2005)를 낸 지 네 해만이다. 그의 시는 “백 개의 눈 백 개의 혀를 가진 꽃”(<알리바이>)이다. 기억의 영지에 파릇하게 돋은 이야기들을 품은 이 시들은 낯설고 기이하고 아름답다. 시인은 민담·설화·동화·영화·소설의 젖을 빨고 그 자양분으로 상상세계를 꽃피운다. 거기서 얼음접시, 물배꼽, 유리구두, 접시거미, 그늘하숙, 울음더위, 종이거울, 그늘나비, 고담시, 세상의 동쪽 끝방, 깜빡죽음 저 나라, 구름 난전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삶의 지루함과 비루함을 견디려는 유희 본능이 빚은 것들. 시인은 누추한 기억들, 그 천일 야화에 상상의 도금을 입힌다. 그것은 “추억의 봉합사로 감쪽같이 꿰매 붙여 다시없는 변종품으로 세간”에 내놓는 것, “일종의 도굴 프로젝트”이자 “일종의 연금술”(〈추억 마케팅〉)이다.

1960년 대구 출생
2001년『시와 시학』등단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학
시집<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여우>등

대구한의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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