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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추적추적 오는 아침 詩]- 련쇄 사랑사건
2016년 05월 24일 07시 28분  조회:4904  추천:0  작성자: 죽림
 
까치밥
- 김승기(1960~ )


 
기사 이미지
빈 가지에 달린

누구의 빨간 심장 하나


어느 허기진 살림살이

한 두어 평, 넓어지겠다


제 부리에 묻은 선혈(鮮血)의 따듯함을

 

 


모르는 어리석음도


언젠가 누굴 위해 저렇게

제 심장 내걸 날

있을 테지



누군가 허공에 남겨 둔 까치밥은 굶주린 자를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것으로 “허기진 살림살이”가 넓어진다. 놀랍게도 사랑은 감염이 잘되어서, “따듯함을 모르는/ 어리석음”도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하는 존재가 된다.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위해 허공에 “제 심장”을 내거는, 이 ‘연쇄 사랑사건’이야말로 희망의 도화선이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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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별들아
- 이승훈(1942~ )


 
기사 이미지
시시덕거리며 노는 별들아. 닥닥거리며 엄마 찾아 달려가는 아기 별, 감자 먹고 방에서 자는 아빠 별, 여름밤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였네. 너희는 볕만 내리쬐는 더위는 몰라. 밤하늘이 온통 수박밭이고 참외밭이야. 몰래 들어가 수박 따 먹고 참외 따 먹는 밤, 시시덕거리며 노는 별들아.

 

 




일하는 인간(Homo Faber)이 성과와 효율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한다면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은 자유와 무(無)목적성, 그리고 상상력을 중시한다. 궁극적으로 ‘문화’를 이끄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놀이다. 그리고 모든 노동은 최종적으로 놀이의 상태를 꿈꾼다. 경쟁과 효율의 이데올로기 앞에 “시시덕거리며” 자유롭게, 대가 없이 “노는 별들”은 늘 혐의가 된다. 문화의 풍요와 부재가 공존하는 시대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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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이영혜(1964~ )

기사 이미지
수심(愁心)만 가득한

수심(水深)을 알 수 없는 저수지 한 가운데

달이 빠졌다


저 달덩이가

 

 

다 가라앉을 때까지

나 평생

파문을 끌어안고 살리라



시는 이미지로 말한다. 르장드르(Legendre)의 말마따나 “우리 사이에서 우리는 (이미) 이미지인 것이다”. “저수지” “달덩이”의 두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만나 이루는 “파문”을 보라.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심(愁心)”은 존재를 늘 파문 상태에 놔둔다. 근심이 완전히 가라앉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죽음이라는) 종점의 시간에나 가능하다. “평생 파문을 끌어안고 살리라”는 선언은, 근심을 아예 존재의 일부로 삼음으로써 그것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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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김승희(1952~ )
 

어둠의 아이들과 햇빛의 아이들이
흑색 금색 창을 들고
사유의 들판에서 싸움을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것을 편들지 않으리.
죽음과 생을
모조리 나의 심장 속에 놓아 먹이리.

그러나 그때에는 달랐었다.
내가 아직 내 말(馬)의
고삐쥔 손을 느끼지 않았을
그때에는,

더 이상 생각지 말아라.
지금은 빛나고 휘날리는 金색의 깃발.
그러나 곧
정적이 와버리는 것을.

어렸을 때 시간은 신비 그 자체이고, 삶을 비옥한 꿈의 대지로 가꾼다. 어떤 악에도 물들지 않아 옳은 행동만을 일삼는 어린 인류는 천진무구한 채로 시간이란 말[馬]의 고삐를 틀어쥐고 달린다. 시간은 “금색의 깃발”로 나부꼈다. 나이가 들면 시간의 고삐를 틀어쥘 수가 없다. 순간들의 연쇄는 질서를 잃은 채 엉킨다.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제멋대로 달려가는 시간들! 누구나 시간이란 유한자원을 까먹으며 나이를 먹는다.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유한자산을 강탈하고, 노화와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닿으면서 생의 주기라는 원을 닫는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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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뽑혀 나와 부르르 떠는 배추
그렇다 분수처럼 절정에서 꺾이는 것
전율은 솟구친 몸이 떨어질 때 오는 거다.

 

고추 마늘 온갖 양념을 한 통속에 비벼서
덥고 춥고 맵고 짠맛을 한꺼번에 겪는 것
세상의 눈치 살피며 풀 죽을 수 있는 거다.

 

입 안에서 씹힐 때 마지막 숨 거두며
다섯 번을 죽어서야 맛을 내는 배추처럼
몇 번을 까무러쳐야 시 한 편이 되는 거다.

 

///김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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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뼈만 남은 고검 한 자루를 본다
피투성이 시간들 녹슬어 떡이 돼있고
첩첩한 어둠 한 가운데
무명 장수의 미라처럼 눕혀져 있지만
그의 뼈 속 어딘가 시퍼런 날이 숨어 있다.

 
///이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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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치꽃 아욱꽃 ―박용래(1925∼1980) 

상치꽃은 
상치 대궁만큼 웃네. 

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잔 한잔 비우고 
잔 비우고 

배꼽 
내놓고 웃네. 


이끼 낀 
돌담 

아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다는 

시인의 이름 
잊었네.
 


아욱 잎은 국 끓여 먹고, 상추 잎은 생것을 쌈으로 먹고. 먹을거리로만 그 잎을 보아 온 사람들은 상추와 아욱도 꽃이 핀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기 쉬우리. 때는 한여름, 해는 저의 긴 날을 늘어지는 걸음으로 지나고 있었을 테다. 마루에 앉아 ‘잔 한잔 비우고/잔 비우’며 건너다보는 마당 텃밭에 ‘상치꽃은/상치 대궁만큼 웃네.//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웃네. 남겨진 대궁마다 함초롬히 상추꽃 아욱꽃, 화자가 보기 좋은 높이로 피었으리.

화자는 ‘배꼽/내놓고 웃네’. 자기 집에 있는데 무더운 날에 옷을 대충 걸친들 어떠랴. 화자는 러닝셔츠를 가슴께로 훌떡 걷어 올리고 있을 테다. 어쩌면 웃통을 벗고 있을지도. 상추와 아욱도 ‘배꼽/내놓고 웃네’. 꽃은 식물의 배꼽, 씨앗의 근원이라네. 꽃이 없으면 세대에서 세대로 어찌 이어지리. 그러니 상추와 아욱의 꽃은 임부의 자랑인 불룩한 배인 것, 그 배꼽인 것. 꽃 핀 텃밭을 정답게 완상하며 술을 마시는 나른한 흔쾌함이 ‘이끼 낀/돌담’부터 편치 않은 정조로 바뀐다. 하루 이틀 전까지 이어졌을 장마에 이끼 무성해진 돌담은 볕이 안 들어 축축하리라. 그 위로 저물어가는 하늘 동편에 실낱같은 달이 뜨고, 문득 ‘이즈러진 달이/실낱같다는’ 시구가 떠오르는데 그 ‘시인의 이름’ 떠오르지 않고. 어떤 부분은 더 선명하고 어떤 부분은 더 가물가물한 명정 상태에서 왠지 화자의 기분이, 술 잘 마셔놓고, 자욱이 가라앉는 듯.

박용래의 시들은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세계를 담는 게 미덕인 시의 전범으로 삼을 만하다. 독자는 그 간결한 시들이 우아하게 이끄는 정답고 소박한 세계에서 가슴 아릿한 원초적 향수에 젖어든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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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希望) ―전봉건(1928∼1988) 

아름다운 
어느 한 아름다운 날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가슴께에서 
꽃과 사과이고 싶은 것은 
꽃바구니의. 

달빛에 씻긴 이슬을 
이슬 머금은 배추가 진주(眞珠)처럼 아롱지며 트이는 아침을
푸른 바다 어리는 비둘기의 눈동자를 
태양(太陽)이 웃으며 내려오는 하늘… 그 눈부신 계단에 핀
진달래를 
또 신문(新聞)이 음악(音樂)처럼 뿌려지는 거리를 
생각하는 것은. 

여기 
무수히 검은 총(銃)알 자국 얼룩진 
나무와 나무 사이 
눈이 깔린 밤 
… 여기에서. 


 
오 두 마리 
버들강아지 꼼지락이는 은(銀) 목걸이를 생각하며, 
꽃바구니의 꽃 그리고 
사과이고 싶은 것은… 당신의 
가슴께에서. 

구름도 
지구(地球)도 
인간(人間)도 
생활(生活)도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다 함께 그리운 내가 
전쟁(戰爭)의 숯검정이 자욱이 얼어붙은 
내 눈시울 속에 
서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 겨울날 아지랑이처럼 
아스라이 서 있는 
까닭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의 소용돌이인데 겨울이 오고, 탄흔 무수한 ‘나무와 나무 사이/눈이 깔린 밤’, 깨어 있는 한 병사가 있다. 방한복이나 제대로 입었을까. 어쩌면 닳아진 군복과 군화, 배도 고플 테다. 떠나지 않는 공포와 고통이 병사에게 ‘아름다운/어느 한 아름다운 날을’ 절절히 떠오르게 한다. ‘꽃바구니’ 같았던 사랑의 시간, 아 너무도 그리운, 눈에 삼삼한 ‘당신의 가슴께’ ‘꽃과 사과’! 달콤한 안식과 평화의 그런 날이 다시 올까. ‘푸른 바다 어리는 비둘기의 눈동자’ 같은 그날이. 소중한지 모르고 흘려보내던 일상이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다 함께 그리운’ 병사다. ‘구름도/지구도/인간도/생활도’! 신문도 참 오래 못 보았구나. 신문 파는 소년들이 손님을 부르는 외침으로 들썩거리던 거리, 시내 한복판의 소요며 분답도 평화의 그것인 양 어찌나 가슴 저리게 그리운지 ‘신문이 음악처럼 뿌려’진단다. ‘전쟁의 숯검정이 자욱이 얼어붙은’ 병사의 눈시울에 이 모든 것이 꿈인 듯 ‘아스라이’ 들어선다. 

시 속의 병사는 시인 자신일 테다. 시인은 살아남아 시를 쓰는데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병사, 전쟁이 끝난 뒤에도 욱신거리는 이 상흔이 전봉건의 많은 시에 담겨 있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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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마을을 지나며 ―김남주(1946∼1994)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옛 마을 풍경의 서늘한 아름다움이여, 시인의 서늘한 시선이여. 10년이나 투옥 생활을 하도록 시대의 억압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온몸으로 ‘전사(戰士)의 시’를 쓴 ‘시의 전사’ 김남주. 격정적으로 독설을 분출하던 그 뜨거운 심장에서 이리 지순한 서정이라니. 시인 김남주에 대한 평가는 이념적 평가만이 아니라 예술적 평가도 엇갈린다. 그의 시가 예술에 미달한다고 평가하는 이들은 시에 정치가 전면에 내세워져 있으며 시어가 사납다는 이유를 든다. 하지만 그의 시는 마디마디 장단이 딱딱 맞으며 리드미컬하다. 과격한 언어로 펼쳐지는 그 서사에 동의하건 반대하건 거기 뛰노는 맥, 줄기찬 가락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다. 

 
‘저렇게 많은 별이 있구나 하늘에는/그것도 모르고 갑석이 마누라는 일만 하는구나/늦도록 밤늦도록 아이고 허리야/허리 한번 못 펴고 손톱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저렇게 많은 논과 밭이 있구나 땅에는/그것도 모르고 바보 갑석이는 고향을 뜨자는구나/지게질을 해도 서울로 가서 하자고/품팔이를 해도 대처에 가서 하자고//저렇게 많은 학교가 있구나 도시에는/그것도 모르고 재순이 아버지 갑석이는/재순이를 공장으로 내모는구나/열 살 먹은 막내까지 내모는구나//저렇게 많은 불빛이 있구나 강 건너 마을에는/그것도 모르고 재순이네는 다리 밑에 자리를 까는구나/마침 겨울이라 함박눈이 와서 그들을 덮어주는구나.’(시 ‘재순이네’) 김남주는 약소국이었던 나라의 사회주의자답게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농촌과 도시에서 착취당하며 사는 힘없이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시인이 그토록 격렬하게 쟁취하고자 한 것은 이 하나,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조선의 마음’이었나. 

김남주 같은 사람은 드물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불의가 없는 세상, 이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을 갖고 있더라도 대개는 행동으로 나서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주의자는 항상 패배하게 마련이다. 김남주가 꿈꾼 세상은 오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세상을 꿈꾸고 꾸준히 써왔기 때문에 반 발짝이라도 그 세상에 다가갔을 것이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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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는 풍경 ―안주철(1975∼ )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원일 때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 
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 
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 
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 
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 병일 때 
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
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릴 지를 때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 
이런 때 
나와 엄마는 꼭 밥을 먹고 있다  


///구멍가게는 누구나 수시로 드나들게 개방된 공간이다. 눈에 거슬리는 손님을 맞는 스트레스도 여간 아닐 테다. 이문이 많이 남는 물건을 얼른 사 가는 손님만 있으면 좋으련만, 동네 어느 집에 집들이라도 온 사람이 드문드문 그럴까, 코흘리개와 모주꾼이나 들락거린다. 종일 가게를 열고 있어도 장사가 별로이니 물건도 변변히 갖춰 놓지 못한다. 그러니 모처럼의 번듯한 손님도 그냥 나가버리고, 악순환이다. 아이스크림 하나 사러온 아이는 얼른 골라들지 않고 전기 닳게 냉장고 문을 오래도 열고 들여다본다. 사내들은 딸랑 소주 두어 병 사서는 평상에서 우렁우렁 오래도 떠들며 마시고 있다. 살림집에 ‘엄마’가 낸 구멍가게, 밥은 당연히 가게에 딸린 방에서 먹을 터. 코앞에서 펼쳐지는 단작스러운 장사, 외면할 수 없이 드러나는 제 가족의 생활 밑천에 화자는 울컥해서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에 대한 ‘엄마’의 즉각적인 대답은 아들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이놈아, 지금 네 목구멍에 넘어가는 밥이 어디서 난 줄 아느냐!’ 생의 구질구질함에 속이 꽉 막혔을 화자는 외려 후련하고 정신이 번쩍 났을 테다.  

이런 구멍가게가 변두리 옛날 동네에는 아직 남아 있다. 시인은 대한민국의 빈곤을 모르는 첫 세대라는 1970년대생, 빈곤이 한층 싫고 힘들었을 테다. 이 시가 담긴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은 가난한 집에서 1막을 시작한 생은 2막도 3막도 똑같이 지리멸렬 이어지고, 그렇게 인생이 끝나리라는 비관적 세계관을 유머러스하고 서글프게, 또 냉소적으로 보여준다.

독자 여러분께 작별인사를 드려야겠다. 오래도록 지면을 허락해준 동아일보에 감사드린다. 즐겁고 알찬 시간이었다. 여러분도 그러했기를!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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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열대
이기철(1943∼ )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거기 슬플 것 다 슬퍼해 본 사람들이
고통을 씻어 햇볕에 널어두고
쌀 씻어 밥 짓는 마을 있으리
더러 초록을 입에 넣으며 초록만큼 푸르러지는
사람들 살고 있으리
그들이 봄 강물처럼 싱싱하게 묻는 안부 내 들을 수 있으리

오늘 아침 배춧잎처럼 빛나던 청의(靑衣)를 물고
날아간 새들이여
네가 부리로 물고 가 짓는 삭정이 집 아니라도
사람이 사는 집들
남(南)으로만 흘러내리는 추녀들이
지붕 끝에 놀을 받아 따뜻하고
오래 아픈 사람들이 병을 이기고 일어나는
아이 울음처럼 신선한 뜨락 있으리

저녁의 고전적인 옷을 벗기고
처녀의 발등 같은 흰 물결 위에
살아서 깊어지는 노래 한 구절 보탤 수 있으리
오래 고통을 잠재우던 이불 소리와
아플 것 다 아파 본 사람들의 마음 불러 모아
고로쇠 숲에서 우는 청호반새의 노래를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말로 번역할 수 있으리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지그시 경락을 짚는 듯, 마음의 줄을 누르고 튕긴다. 아프고 시원하고 몽롱하다. ‘남(南)으로만 흘러내리는 추녀들이/지붕 끝에 놀을 받아 따뜻하고’ ‘오래 아픈 사람들이 병을 이기고 일어나는/아이 울음처럼 신선한 뜨락’, ‘청의(靑衣)를 물고 날아가는’ 듯한 청호반새…. 이토록 생생한데, 이게 한갓 꿈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으면서 좋은 꿈을 꾸는 것 같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참으로 실감나는 꿈! ‘슬플 것 다 슬퍼해 본 사람들’ ‘아플 것 다 아파 본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화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인의 꿈! ‘처녀의 발등 같은 흰 물결 위에/살아서 깊어지는 노래’다.

이기철의 다른 시 ‘멱라의 길1’에는 ‘지상에서 얻은 병 모두 쓸어 저 강물에 띄우겠네’라는 구절이 있다. 멱라는 고대 중국 초나라의 시인 굴원이 조국이 패망의 길에 들어선 것에 울화가 치밀고, 비통해 몸을 던졌다는 강이다. 그걸 염두에 두고 읽으니, 운율도 아름다운 이 서정시에서 지사적 아픔과 비관도 설핏 느껴진다. ‘일생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일생이 노역(勞役)과 상처 아문 자리로 얼룩져 있어도/상처를 길들이는 마음 고와서 아름다운 사람은 있다’(시 ‘멱라의 길1’에서). 멱라를 ‘건너가야’ 닿을 수 있는 그곳이련가.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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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가정식 백반 ―안성덕(1955∼ )

식탁마다 두서넛씩 둘러앉고 외따로이 외톨박이 하나,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내와 나를 반 어거지로 짝 맞춰 앉힌다 놓친 끼니때라 더러 빈자리가 보이는데도 참, 상술 한 번 기차다 소문난 게 야박한 인심인가 싶다가 의지가지없는 타관에서 제 식구 아닌 낯선 아낙이 퍼주는 밥을 꾸역꾸역 우겨넣으며 울컥 목이 멜지도 모를 심사를 헤아린 성싶다고 자위해본다 정읍 시외버스터미널 뒷골목 소문난 밥집 어머니뻘 늙은 안주인의 속내가 집밥 같다 잘 띄운 청국장 뚝배기처럼 깊고 고등어조림의 무 조각처럼 달다 달그락달그락, 겸상한 두 사내의 뻘쭘한 밥숟가락 소리 삼 년 묵은 갓김치가 코끝을 문득 톡, 쏜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심지어는 반찬 투정을 하며 먹었던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타관 생활을 하는 사람은 절감할 테다. 한밤에도 배달시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번창한 외식문화 속에서 어머니가, 기혼 남자의 경우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담긴 ‘집밥’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요즘이다. ‘가정식 백반’은 세상을 사는 원동력이 밥이라는 어머니의 다습은 마음이 담긴 ‘집밥’을 표방하는 메뉴다. 화자는 끼니때가 돼도 밥 먹자는 사람이 없는 타관, 소도시의 시외버스터미널 뒷골목에서 밥집에 찾아든다. ‘소문난 밥집’은 옥호이기도 할 테다. 그런데 빈자리도 많건만 밥집 안주인이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내와 나를/ 반 어거지로 짝 맞춰 앉힌다’. 이런 야박할 데가! 밑반찬을 따로 담아내기도 아깝고 식탁을 하나라도 덜 치우려고 그러는가. 나, 손님을 허술히 보는구나. 마침 배도 많이 고파 예민할 화자는 기찬 상술로만 느껴져 기분이 상하다가, 얼른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니야, 혼자 밥 먹는 외로운 심사를 헤아린 처사일 거야. 어쨌거나 ‘겸상한 두 사내’는 끝내 ‘뻘쭘’ 하지만, 밥상이 모든 걸 용서한다. 잘 띄운 청국장이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 무 조각이 달기도 한 고등어조림, 코끝을 톡 쏘는 맛의 삼 년 묵은 갓김치! 비록 돈을 받는 밥집이지만, 안주인의 속내는 지나가는 길손도 불러 앉혀 함께 참을 먹는 논둑 아낙의 그것일 테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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