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은 예리한 통찰력이 있어야...
[19강] 시의 소재(2)
마주보는 찻잔
- 백승우-
우리 서로
마주보는 찻잔이 되자
각자의 빛깔과 향기는 인정하면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아줄 수 있는
꾸밈없는 순수로 서로를 보는
블랙의 낭만도 좋겠지만
우리 딱 두 스푼 정도로 하자
첫 스푼엔
한 사람의 의미를 담아서
두 번째엔 한 사람의 사랑을 담아서
우리 둘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은 슬픔이
모두 녹아져 없어질 때까지
서로에게 숨겨진 외로움을 젓는
소중한 몸짓이고 싶다.
쉽게 잃고 마는 세월 속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조금씩
식어가고 있겠지만
그 때는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
모자람없는 기쁨일 테니
우리 곁에 놓인 장미꽃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우리를 부러워할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서로를 마주보는
찻잔이 되자
각자의 빛깔과 향기는 인정하면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아줄 수 있는....
서로에게 숨겨진 외로움을 젓는....
언제까지나 서로를 마주보는 찻잔이 되자
강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세영. 장부일님은 시의 소재를
1)정서를 소재로 하는 시
2)현실을 소재로 하는 시
3)관념을 소재로 하는 시 로 나누었습니다.
어제도 말하였지만 시의 소재는 너무도 많은데
그 들을 이렇게 셋으로 나누면 아마 모두가
이 범주 안으로 들어오겠지요.
이 분류에 따라 연구해보고자 합니다.
1.정서를 소재로 하는 시
시의 소재 가운데 비교적 흔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마도 정서를 소재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서정시의 본질은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써 표출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감정은 추상적
이거나 우연한, 설명할 수 없은 그 무엇이 아니
라 시인이 일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쉽습니다.
일단의 서정시들이 정서를 소재로 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2.현실을 소재로 하는 시
정서를 소재로 하는 시도 그 정서가 현실의 생활
에서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에 현실을 소재로 한다
고 볼 수 있으므로 이렇게 분류하는 것이 어쩌면
무리일 수도 있으나 일단 두 분의 분류를 따르기
로 합니다. 이 분들의 주장은 "시인은 시를 쓸 때
자기가 가진 중심사상을 표현해내는 중심소재를
가지는데, 이 때 중요한 것은 시인이 현실과 정서
가운데 어느 것에 주된 관심을 기우리느냐 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임영조님의 <넥타이>를 예시로 올려 봅니다.
이른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 목을 맨 올가미가
온종일 나를 끌고 다닌다
사무실로 거리로
찻집으로 술집으로
또 무슨 식장으로 끌고 다닌다
서투른 근엄을 위장해 주고
더러는 나를 비굴하게 만들고
갖가지 자유를 결박하는 끈
도대체 누굴까?
이 견고한 줄로
내 목을 거뜬히 옭아 쥔 者는...
답답해라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이후
나는 아무런 줄도 잡지 못하고
불안한 도시 안개 속을 헤매는 羊
제발 정신 좀 차려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하면서
뒤틀린 넥타이를 고쳐 매지만
나는 다시 고분고분 길들여진다
낯선 시간 속으로
바쁘게 끌려가는 서러운 노예처럼
이 시를 잘 읽어 보면, 우리가 흔히 접하는 넥타이
에 대한 것들을 여러가지 비유적 언어를 써서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넥타이의 이중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넥타이는 남성들의 유일한 장식물입니다. 물론
요즘 젊은이들이야 여자들처럼 귀걸이도 하고
목걸이도 하는 시대가 되긴 하였지만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넥타이는 장식물이라기
보다는 남들에게 격식을 갖추기 위한 목적이 훨씬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부득히 격식을 갖추어야하는 처지,
소위 불루 칼라와 대비해서 칭하여지는 화이트
칼라 즉 사무직 근로자들을 일컫는 것이 됩니다.
그들에게 넥타이는 직업 혹은 직장을 상징합니다.
넥타이를 매고 다님으로써 다른 사람들로 부터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는다는 긍정적인 측면보다
남들의 이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어쩔 수 없
이 넥타이를 매야한다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는 넥타이는 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줄"로 둔갑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넥타이가 상징하는 바
를 염두에 둔다면 넥타이에 의해서 자유를 구속 당
하는 상황은 일에서 소외된 소시민의 일상을 구체
적으로 형상화한 것을 볼 수 있겠지요.
오세영님의 해설을 읽어보지요.
"시인의 예리한 통찰력에 의해 제시된 넥타이의
양면성보다 우리의 눈길을 더 끄는 것은 일에서
소외된 소시민인 시인의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
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대목이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몇 번씩 다짐"하지만 그는 다시 길들여
진다. 현실적으로 소외를 극복할 방안을 찾을 수
없으므로 시인은 자기가 일의 노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가 처한 비극적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시에서 일의 소외를 야기
하는 사회 모순에 대한 소시민의 비판의식이 체
념으로 끝을 맺는 매우 사실적이고 진솔한 소시민
의식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체념적 소시민의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시인은 일상사인 직장인의 생활을 소재로
선택하였으며, 직장인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넥
타이를 시의 소재로 삼은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가 시를 쓸 때는 내가 현실적으로 늘 접하는 매
우 친숙한 소재를 잘 관찰하여, 깊은 의미를 끌
어내면 이와 같이 유용한 소재가 되어 여러분도
훌륭한 시를 쓰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선배 시인은 어떻게 소재를 잡았는가 또
한 번 들어보는 기회를 갖겠습니다.
한기팔 시인의 견해입니다.
"한편의 시를 얻는 일은 사물과의 충실한 애정과
내적 교섭이 없이는 비롯되지 않는다.
사물이란 곧 시로 접근시켜 주는 시의 소재로써
끊임없이 시인과의 교감과 내적 교섭을 통하여
시 가운데 군림하게 된다.
빈 뜰에
바람이 인다.
의미성을 부여하기 앞서 의미성을 암시하는 내적
충동의 대상으로서 다음에 오는 소재의 행위를 유
발시키에 된다.
뜰. 바람의 구체적인 형태가 어떤 행위에 의한 의
미의 암시적인 면을 보여주게 되는가.
빈 뜰에 바람이 이는 그런 상황만으로는 이는 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새 울음
하늘을 날데
헐린 돌담에
가을비
칭얼대는 날
마을 밖에
빈 집을 보러 간다.
여기서 우리는 몇개의 소재가 주는 암시성을 발견
하게 된다. 죽은 새 울음. 헐린 돌담, 빈 집의 처
절한 비애와 접근하게 된다. 이 시는 <가을비>라는
나의 졸시의 전부다. 가을비와 죽은 새, 헐린 돌
담, 빈 집과는 어떤 연계성을 지니게 되는가. 나의
경우 이와같은 소재들은 의도적으로 동원시키지는
않는다. 체험적 근거를 제시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집결되어지는 것이다.
죽은 새 울음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비답지 않게 내리는 가을비의 이미지가 보얀 하늘의
죽은 새의 울음으로 비쳤을 뿐이다. 이를 [하늘이
뽀얗게 내리는 가을비]라고 해봤자 아무런 시의
새로움을 발견해내지 못한다. 이 시를 쓰기에 앞서
문득 떠오를 상황의식을 적어보기로 한다.
어렸을 무렵 우리 동네에 봉탕할망이라는 노파 한
분이 계셧다. 물론 그의 집은 마을 밖에 거의 허물
어진 채 지극히 초라하고 음산한 모습으로 빈 집
마냥 놓여 있었다
누구던지 그 집 앞을 지나칠 때면 소름이 끼쳐지고
마음이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다. 우리 또래의 어린
것들의 울음소리도 저기 몽탕할망 온다 하면 거의
가 울음 소리를 끊곤 했다
더욱이나 질척질척 비가 오는 날이면 이상한 비명
소리를 내며 그 노파는 마을을 쏘다니곤 했다. 지
금은 마을 밖, 오솔길 모퉁이에 잡초 우거진 임자
없는 무덤 하나가 거의 헐린 채로 비를 맞고 있다.
나는 <가을비>를 소재로 한 이 시에서 문득 이와
같은 영상을 더듬었던 것이다.
하나의 소재만을 가지고 시가 되어지지는 않는다
그 소재의 행위와 시인의 내적 교감과 교섭이 체
험적 근거로 이루어 질 때 곧 바로 시와 연결되
어지는 것이 나의 예다.
그런 교감과 체험적 근거가 곧바로 시가 되어 나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시인은 오래 참고 견디어야
할 것이다.
나의 경우 하나의 소재를 접하게 되면 거의 한달
이건 두달이건 시로써 마무리가 되기까지에는 그
것에 매달려 악전고투 지극히 오랫동안을 신음하
지 않으면 안된다.
가령 그 소재에 의해서 문득 첫 행이 생각 나서
수첩에 적어 두고 오래 오래 다음 행을 찾아 시적
에스프리에 접근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게 된다.
시의 소재란 시적 애스프리를 일깨우는 동기유발의
가장 원초적인 대상이 되므로 소재의 빈곤은 시의
빈곤과 직결될 수 밖에 없다."
인용이 좀 장황하였습니다만, 선배들의 이야기는
아무 곳에서나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론 보다도 훨씬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좋은 시들을 읽으며 오늘 강의도 마치겠습니다.
송재학님의 <흰뺨검둥오리>입니다.
그 새들은 흰뺨이란 영혼을 가졌네
거미줄에 매달린 표정 없는 고요에서 흰색까지
이 늪지에선 흔하디 흔한 맑음의 비유지만
또 흰색은 지느러미 달고 어디나 갸웃거리지
흰뺨검둥오리가 퍼들껑 물을 박차고 비상할 때
날개 소리는 내 몸 속에서도 들리네
검은 부리의 새떼로 늪은 지금 부화중,
열 마리 스무 마리 흰뺨검둥오리가 날아오르면
날개의 눈부신 흰색으로 늪은 홀가분해져서
장자를 읽지 않아도 새들은 십만 리쯤 치솟는다네
흰뺨검둥오리가 떠메고 가는 것이 이 늪을 포함해서
반쯤은 내 영혼이리라
지금 늪은 산산조각나기 위해 평팽한 거울,
수면은 그 모든 것에 일일이 구겨지다가 반듯해지네
뒤돌아서서 논우렁이 잡던 사람들 둘레로
다시 시작하는 동심원은
아주 가볍다네
오세영님의 <홈페이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늘 사용하고 있는 홈페이지도 이렇게
시의 소재가 되는구나하는 것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패스워드를 바꾸어버렸구나
두드려도 이미 열리지 않는 문,
길은 아무데도 있다는데
길은 이제
막혀버렸다. 제 방으로 가는 길......
잠시 채팅을 즐기는 동안
어느 해커가 훔쳐 달아나버렸을까,
그 아름다웠던 날의 황홀.
간신히 피시 투우울에 들어가
지워진 파일을 되살리려 애쓰지만
떠오르는 명령어는 "에러"다.
누구의 집인가.
잠시 윈도우를 들여다 본다.
까르르 피는 한 가족의 웃음꽃과
밖으로 울리는 한 소절의
피아노 화음.
너인 듯 네가 아니다.
찾아도 찾아도 얽히기만 한
인터넷 경로,
그 어느 빈 방 창밑에 앉아
잃어버린 첫사랑을 탐색한다.
귀뚜라미 우는 가을 밤에 홀로
컴퓨터 키 보드를 두드린다.
=========================================================
367.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 마광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마 광 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덕지덕지 마른 한 파운드의 분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자처럼
적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성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
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 안고 싶다
현실적으로
진짜 현실적으로
마광수 시집 <사랑의 슬픔> 중에서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