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승용차 바닥에는 지폐 수백만원이 깔려 있을 수 있다. 일부 골프장이나 공원 잔디밭에 수백억원어치 지폐가 흙과 뒤섞여 있기도 한다. 어떤 건물은 아예 콘크리트 벽에 지폐를 채워 넣었다. 모두 폐(廢)지폐다. 매년 수백t의 폐지폐가 재활용 업체를 거쳐 차 바닥 마감재나 잔디 성장 촉진제, 콘크리트 보강재 등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한국은행이 재활용 업체에 넘기는 폐지폐 분량이 크게 늘면서 그 재활용 분야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2010년 재활용된 폐지폐는 총 415t에 액면가 1조3900억원이었으나 작년 총 560t, 3조3400억원어치로 크게 늘었다. 중량에 비해 액면가가 크게 는 것은 2007년과 2009년 각각 집중 발권한 1만원권과 5만원권 지폐가 수명을 다해 폐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화성에 있는 A 재활용업체는 폐지폐로 자동차 바닥에 깔리는 방진(防振)·방음(防音) 패드를 만든다. 지폐를 갈아 아스팔트와 혼합해 압착한 뒤 자동차 좌석과 트렁크 바닥 규격에 맞는 패드로 만들면 자동차 공장에서 차 프레임에 붙이게 된다. 섬유질인 지폐가 푸석푸석한 아스팔트 입자 사이를 접착제처럼 연결해 줘 패드가 쉽게 부스러지는 걸 방지한다.
승용차 기준으로 차 한 대에 보통 패드 5㎏이 들어가는데, 이 중 5%인 250g 정도가 폐지폐로 이뤄져 있다. 1000원·5000원·1만원·5만원권 지폐 4종이 골고루 섞였다고 치면 액면가로 약 412만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 패드의 실제 가격은 차 한 대당 1000원이다. 이 업체가 만든 패드는 현대·기아·쌍용 등 자동차 공장에서 연간 1800만 대의 자동차 바닥에 부착된다.
울산에 있는 B 업체는 연간 200t의 폐지폐를 받아 잔디 성장을 돕는 보조재와 콘크리트 강도를 높이는 보강재를 만들고 있다. 이 회사는 잘게 잘린 폐지폐를 고운 흙처럼 분쇄해 조경업체에 파는데, 조경업체들은 이 지폐 가루를 잔디 씨앗, 비료, 물과 함께 섞어 골프장이나 공원 땅에 뿌린다. 지폐의 섬유질이 수분을 보존하고 강한 햇볕으로부터 씨앗을 보호해 줘 발아를 촉진한다고 한다. 이후엔 거름이 돼 잔디 성장을 돕는다.
2010년까지 폐지폐를 공급받았던 경기 안성의 C 업체는 지폐 분말과 플라스틱을 섞어 연간 수만장의 건물 바닥재를 만들었다. 가로·세로 각각 50㎝인 이 합성 바닥재 한 장엔 지폐만 5㎏이 함유돼 있었다. C 업체 측은 "섬유질인 지폐를 섞으면 플라스틱 강도가 보다 세지는 효과가 있다"며 "서 울 금융감독원 건물을 비롯해 전국 수백 곳 공공·상업 건물에 수십~수백 장의 바닥재를 깔았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폐지폐를 잘게 잘라 소각하거나 화학공장에서 용해시켰으나 이 비용이 만만치 않자 재활용업체에 무상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박종남 한국은행 발권기획팀 과장은 "폐지폐를 언제부터 재활용 업체에 넘겼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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