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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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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의 詩, 詩人의 비평,- 립장을 바꿔보다...
2016년 10월 28일 21시 39분  조회:3134  추천:0  작성자: 죽림
 
비평가의 시, 시인의 비평
 
 
우리 문학사상 처음으로 시인의 역할과 비평가의 역할을 바꾸어보는 기획 특집을 마련했다. 

시와 비평은 원칙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양자는 이질적인 것으로 분리되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있다. 비평은 시에게 논리를 강요하고 시는 비평의 논리를 뛰어넘으려 한다. 이번 기획 특집으로 마련한 <비평가의 시, 시인의 비평>은 시와 비평의 자유로운 코드전환으로 시의 생산적 가치가 증폭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등단(평론) 50주년을 맞이한 이어령 평론가의 최초의 자작시 2편과 함께 실린 유종호, 김화영, 방민호, 김춘식, 김용희 평론가의 ‘특별한’ 시와 이가림, 이하석, 장석원, 변의수, 김민정 시인의 ‘독특한’ 비평(산문)은 시와 비평의 즐거운 소통이 된다. 

시인과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동호 교수는 총론에서 “비평가의 시는 호사가들의 관심거리가 아니며, 그것은 시인의 비평과 동질의 창작물로서, 시심을 가다듬는 것은 시인만이 아니라 비평가에게도 적용된다.”며 시와 비평의 행복한 만남을 바란다.

입장을 달리하여 보내준 비평가의 시와 시인의 비평은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창작의 논리와 비평의 감성이 아름답게 조화되어 하나가 되어 나가야 하는 당위성을 전해준다     ― 편집자

<비평가의 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외 1편

                          이    어    령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들을 놓아 
헤엄치게 하였을 때  
저 은빛 날개를 만들어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였을 때 
하나님도 손뼉을 치셨습니까.
아! 정말로 하나님  
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
  
사람들은 지금 시를 쓰기 위해서
발톱처럼 무딘 가슴을 찢고 
코피처럼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나이다.   
 
모래알만한 별이라도 좋으니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아닙니다. 하늘의 별이 아니라  
깜깜한 가슴속 밤하늘에 떠다닐 
반딧불만한 빛 한 점이면 족합니다.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묻은 이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도끼 한 자루 
 
 
보아라. 파란 정맥만 남은 아버지의 두 손에는
도끼가 없다. 
지금 분노의 눈을 뜨고 댓문을 지키고 섰지만 
너희들을 지킬 도끼가 없다.
어둠 속에서 너희들을 끌어안는 팔뚝에 힘이 없다고
겁먹지 말라.
사냥감을 놓치고 몰래 돌아와 훌쩍거리는
아버지를 비웃지 말라. 
다시 한 번 도끼를 잡는 날을 볼 것이다.
 
2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호모사피엔스가 태어날 때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던 최초의 돌도끼. 
멧돼지를 잡던 그 도끼날로 이제 너희들을 가로막는 
이념의 칡넝쿨을 찍어 새 길을 열 것이다. 
컸다고 아버지의 손을 놓지 말거라 
옛날 나들이 길에서처럼 아버지의 손을 꼭 잡거라 
그래야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차린 저녁상 앞에 앉을 수 있다.
등불을 켜놓고 보자 
너희 얼굴 너희 어머니 그 옆 빈자리에 
아버지가 앉는다. 
수염 기르고 돌아온 너희 아버지의 
도끼 한 자루 

이어령   1934년 충남 온양 출생. 1956년 《문학예술》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데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한민국 맹호훈장,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 수상.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이화여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상임고문. 저서로 『흙속에 저 바람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소설 『장군의 수염』 『암살자』 『환각의 다리 무익조』 등과 다수의 희곡, 시나리오가 있음.  
 
자목련 아래서    외 1편

                                                                                                                 유    종    호

한 열흘 활짝 열려 있기 위하여
한두 이레 선짓빛 되다 말기 위하여
그러다 별수없이 꽃 누더기 되기 위해
삼백예순 날을 기다렸다
말하지 말라
아침 이슬 구차한 이승
없었던 듯 스러지기 위하여
그 어느 그믐이나 기막히는 보름밤
슬그머니 떨어지는 황홀을 위하여
삼동을 견디었다 이르지 말라
흔들리며 보채는 먼발치 아지랑이
헐벗은 갈대며 나뭇잎의 술렁임
한겨울 눈맞이의 떨리는 설레임을
어찌 너희가 안다 하느냐
속 터지는 온몸의 외침이 다가 아닌걸

언제나 비가悲歌
 
 
백양나무를 시간의  나무라 부른 옛 부족이 있었다
갈잎나무 잎사귀 거죽이 한밤처럼 검푸르고
뒤쪽은 대낮같이 희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부족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필시 삼세 번 멸망하고 말았으리라
나무 잎새에서 역사를 추려내는 시인 부족을
사방 오랑캐가 가만둘 리 없으므로
세상은 항상 개판이었고 역사는 언제나 비가悲歌이므로
무참한 무참한 서사敍事이므로
 
유종호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서울대 문리대 졸업. 미국 뉴욕주립대 대학원에서 공부. 1957년 이후 비평활동을 해왔음. 연세대 특임교수. 저서 『유종호 전집』 전 5권 외에 『시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다시 읽는 한국시인』 『나의 해방전후』와 시집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2004)가 있음. 
 
뫼동에 돌아와서    외 1편
―― 1995년 5월 4일 일기
  
                                                                                                                    김    화    영

추운 계절 객지에 혼자 쓰는 방이 너무 호젓해 고향에 가 머물다가 뫼동에 돌아오다. 겨우내 나 없는 사이 마당의 잔디 위에 쌓였던 눈송이들, 저 혼자 서슬 푸르게 날이 서 있다가 내 돌아오니 약은 놈들은 다 떠나고 이른 봄 어리숙한 녀석들 여리고 하얀 꽃이 되어 잔디밭 가득 내려앉아 있다. 하루 종일 봄빛을 이마로 들이받으며 창 밖에서 노닥거리던 고것들 해 저물녘 문 열고 내다보면 모두 서쪽으로 돌아앉아 딴청부리며 꽃잎을 오무렸다 폈다 한다. 나도 모르는 척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쓰다가 그리워 창밖을 보니 그중 가장 작은 놈 이쪽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가 내 간절한 그리움에 붙잡힌다. 아유 간지럽단다, 간지럽단다, 해도 덜 져서 아직은 밝은데. 
 
고추잠자리에 대하여
 
 
황토길 저 혼자 흐르다가 
잠시 멈춘 삼거리 
사람들 모두 산으로 사라지고
가을볕이 모시적삼같이 비치는
고추잠자리 
외로움을 빨갛게 황홀로 태우며 난다 
그 번뜩임의 순간 속에
한 생애의 은유가
주변의 모든 햇빛과
별빛을 모아 풍경을 만든다
날지 않고 어찌
저 여린 생을 비추랴 
간지럼 타듯 
산과 숲과 강이 가벼워지고
고추잠자리 날개에 
그림자 없는 날빛이 튄다
낮에 숲을 술렁거리게 하던
사람들 어느새 다 내려가고
빈 황토길 위에 고추잠자리 떼
자 우리 차례다 소리치듯
분주히 난다.
이제 떠날 시간인데
잔치는 끝나지 않네
혼자 낯선 곳에 와 있는 가을볕의 
이 거대한 한 페이지
아직은 넘기지 말고
어두워지기 전에 
고추잠자리 같은 뜨거운 몇 글자  
날개의 투명을 넘어 흐린 눈으로 읽는다.
벌써 저만큼 멀어져가는 사람
문득 뒤돌아보다가 잠시 
눈발 그치고 비워진 풍경이 된다.

김화영   1942년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1965년 월간 《세대》지에 시로 등단. <四季> 동인(황동규, 정현종, 박이도, 김현, 김주연). 저서 『행복의 충격』 『문학 상상력의 연구』 『소설의 꽃과 뿌리』 등 다수.
 
무당개구리야, 당나귀야    외 1편

                                                                                                                 김    춘    식

이런 이야기 하나,
어깨에는 몹시도 무거운 짐이 있었는데
그 짐은 솜처럼 가볍다가도
잠시 마음을 놓으면 
금세 두 어깨를 땅 밑으로 꺼뜨릴 듯 무거워지는 거지
그거 아나,
불안과 초조로 
날개를 만드는 짐 말이야
마음이 무거워지면
어깨의 짐은 가벼워지네
그때, 두 눈은 비로소 똑바로 앞을 보지
편안한 자의 눈은 땅밑으로 고꾸라지는데
땅 밑 나락에는 
이상하게 평안이 없네
공포와 불안이 어깨 위의 무게를 
순식간에 녹여버리는데
그때, 내 앞에는 
잠시 소금 덩어리로 굳어버린 아름다운 여자가 모습을 나타내지
말린 고기 한 점 입에 넣어 주며
그녀는 말한다네
무당개구리야!
당나귀야!
그러면, 마음은 몹시 포근해져
잠이 쏟아지려고 하는데, 
그때 순식간에 어깨에는 두 마리의 코끼리가 
올라타고 앉아
아주 느리고 늘어지는 가락의 피리를 부는 거야 
그러면 소금 여인은 코끼리를 사납게 채찍으로 때리며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한다네
무당개구리야!
당나귀야!
그러면,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순간 아 백년이 지났구나, 또 아 천년이 지났구나 하고 탄식을 뱉어내는 거지
그리고, 내 굽은 어깨의 그림자가 길게 언덕을 타고 오를 때쯤이면, 내 이마 위에 뭔가 깊고 사연 있는 주름이 길게, 셀 수 없이 접혀 있다는 걸 알게 되지
 
비슬번히 인생을 보내다
 
 
유유자적하는 마음을 위해, 그는 
그날 하루를 허비하기로 작정한다. 그것은 일종의 
상상과 같아서 정신은 
저절로 흡족한 분위기에, 한껏, 부풀어 간다. 책이 
커다란 벽처럼 서 있는 도서관을 끼고, 담벼락을 지나
할 일 없는 한가한 오후를 
나무 위에서 
보내기로 한다. 그것은 평평한 가지에 그물침대를 걸고 
부드러운 바나나가 
입안에서 천천히 녹는 느낌을, 바람에게
전해주는 일이다. 
그러나 소란은 언제나 있는 법,
아이얍, 하앗낫―두울, 기합이 휴식을 방해하리라.
비슬번히 누워 바나나를 까던 손이  
동작을 멈추고
비슬번한 눈은 허공을 응시하리라. 나무에
등을 비비며 맨손체조를 하는 사람들이 
공터를 가득 메울 즈음
그의 손은 쑥스러움에 또 비슬번히 뒤통수를 긁는다.
 
그물침대 아래 서서, 그는 
한동안, 비슬거리며 
팔짱을 끼고 몽타쥬된 화면처럼 
단속적으로 공터의 이곳 저곳을 오간다. 비슬번히, 
당신들은 무슨 산을 악으로 깡으로 다니시오,
소리 좀 치지 마시오, 중얼중얼하고는 또 비슬번히,
그의 자리로 돌아간다. 모두가 닮은꼴인 사람들 
규칙적인 동작을 바라보며 
그 사람들이 비슬번한 그의 적일 것이라,
추측한다. 비슬번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다 그는
카라멜 하나를 까서 입에 넣는다. 침을 모아서
오물거리며 단물을 씹어 내다가 그때  
금빛 거미가 한 마리 
나뭇잎 사이로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리고
비슬번히 거미를 바라보다
입술 사이로 달고 끈끈한 카라멜침을, 고름처럼
길게 늘어뜨리기 시작한다. 침은 순식간에 커다란 
주머니들을 만드는데 이제 그 주머니가 주렁주렁
입술에 달라붙어, 그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비슬번히, 
앉아 있을 수밖에. 
비슬번한 표정 위로
추억의 나이테가 사라지고
머리 속 가득 
금빛 거미의 환상이 들어찬다. 이제 비슬번한, 
표정 그대로, 굳어버려
그는, 비슬번 주머니가 되어버린다.  
 
김춘식   199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 현재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로는 평론집 『불온한 정신』, 연구서 『미적 근대성과 동인지 문단』 『한국문학의 전통과 반전통』 『근대성과 민족문학의 경계』 등이 있음.
 
괭이 1    외 1편

                                                                                                                     방    민    호

남모르는 
내 작은 반지하방에 
괭이 한 마리 살고 있었네
나 외롭고 
괭이도 외로워
우리 서로 정 깊은 동무였네
외출에서 돌아오면 
괭이는 내 품에 안겨들어 
야웅, 소리 내고 
제 볼을 내 가슴에 부비고 
장난 그리운 아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네
나밖에 모르고 
하루 종일 나 없는 빈 방 지키며 
나만 기다린 내 괭이, 
나도 녀석의 목덜미 만져주고, 등허리 쓸어주고, 여린 발톱마저 애무해 주다 보면 
시간은 나와 내 괭이 옆에 영원히 멈춰 서 있을 줄 알았는데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나만 알던 내 반지하방은
나만 기다리던 내 괭이는
내 괭이 위해 노란 수선화 안고 돌아와
내 괭이와 같이 그 긴 여름 장마 빗소리 밤새 듣던 나는 
어디로 다 사라져 버렸을까 
 

괭이 2 
 
 
한밤에 
괭이가 
나를 내려다본다 
윙윙 
울고 있는 
냉장고 위에서 
나를
한밤에
내려다본다   
파란 
눈빛으로 
그때 내가 
벽 속에 묻어버린 
 
털빛 검은   
내 괭이 
한밤에 
살아나 
나를 내려다본다 
잊었느냐고 
소리 없는 
목소리로 
한밤에 돌아와 
쓰러져 있는 내게  
묻는다 
잊었느냐고 
살아 
있느냐고  
 
방민호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94년부터 평론 활동 시작. 비평집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문명의 감각』 등이 있다. 2000년 《현대시》로 시 등단.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옛사람    외 1편

                                                                                                                     김    용    희

눈꽃이 한번 피고
지는 사이
눈꽃을 한번 바라보다
눈길을 가만히 거두는
사이
옷에 물이 들었다
저녁이 작은 숨소리를 내고
지나가고
눈꽃
흰 가시가
저녁빛을 조금씩 찢어
세상 모든 모서리가 서서히
허물어지려 했다
눈꽃은 반짝이며 잠잠히
상처를 나에게 내밀어 
보여 주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았는데도
저녁이 왔다
슬프지도 않게 조금씩
조금씩 
저녁이 내렸다
 
 
무사 어머니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
있잖아요
저마다 길들이
하나의 오름을 향해 모여들듯
어머니
가슴에 묻혀 있잖아요
가슴에 돌고 있는 햇빛과
가슴에 돌고 있는 수액과
세상으로 걸어내려가는 모든 길들이
이곳에 있잖아요
세상 사나운 말들도 이곳에 와
우물 속에다 하는 말처럼
우물 속에 빠지는 울음처럼
제 몸 한 바퀴 다 돌고 나가면
그만이잖아요
어머니 앞섶 옷고름 한번 풀었다 닫으면
뒷창이 펄럭 하고 열렸다 닫히면
그런데 그 둥근 입술
따뜻한 밥숟가락 
놓여 있던 자리 어머니
가슴 수술하던 날
칼금 하나 긋고 말았네요
등짝에 긴 칼 하나 꽂고 어머니
가슴에 칼자국 무사처럼 누워 있네요 
가슴 속 새집 뜯어내자
마른 나뭇잎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어머니
그러나 
무림에서는 칼자국이 많아야 고수라는데 
하늘 깊은 우물 메워 몸에 길 하나 
내었으니  
허기 지친 칼바람 속에
붉은 가슴 진설하고 어머니
무사 어머니
병실에 누워 계시네 
 
 
김용희   1964년 출생. 1992년 계간 《문학과사회》로 평론 등단. 200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필명 : 김운영). 문학평론집 『천국에 가다』 『페넬로페의 옷감짜기- 우리시대 여성시인』 『순결과 숨결』 등. 

<시인의 비평>

『님의 침묵』 또다시 읽기

                                                                                                                      이    가    림

“실천에 옮길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마치 대가인 양 너스레를 떨기란 아주 쉽다. 시 한 편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1백 가지 시학이 있다.” 이 같은 볼테르의 가시 돋친 지적에는 문학비평가들의 수다스럽기 그지없는 지루한 ‘설명’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깔려 있다. 이것은 또한 시 한 편을 해석함에 있어서 자신의 문학관과 세계관을 송두리째 담은 하나의 시학이 요구됨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깊고 예리한 역동적 텍스트 ‘읽기’가 진정한 동화(identification)의 비평행위, 즉 의미생성 작용에 참여하는 매우 중요한 창조행위가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씌어진 만해萬海 한용운에 관한 연구서 및 논문, 평론의 수가 7백여 편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다시 읽기’를 시도하게 되는 것은 『님의 침묵』이라는 텍스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다의성 (polysémie)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님의 침묵』에 수록되어 있는 88편의 작품들 중 긴장된 미학적 구조의 결정체로 볼 수 있는 시가 10여 편 정도에 불과하다는 냉혹한 평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 한용운은 김소월, 윤동주, 이육사, 이상화 등의 이름과 더불어 한국현대시사의 새벽을 연 눈부신 성좌임에 틀림없다. 그는 “혁명가와 선승禪僧과 시인의 일체화”라는 삼위일체의 모습을 하나의 생애 속에 구현한 전인적 인격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엄정한 의미에서, 시적 텍스트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시인 자신의 인간적 위대성을 충실히 설명하는 것만으로 완수되는 것은 아니다. 『님의 침묵』이 일제 식민지 시대의 질곡桎梏과 암흑 속에서 태어난 “망국亡國민족의 울분과 광복의 굳은 종교적 신념이 곁들여진 절규”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그러한 해석은 자칫 시작품의 참다운 내재적 의미를 은폐하거나 신성화, 추상화할 우려가 있다고 하겠다. 
 
만해 시의 평가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인 ‘님’의 해석에 따른 여러 가지 주장들이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암호처럼 해독하는 경향”을 띠고 있음을 흔히 볼 수 있다. “그의 임은 불타佛陀도 이성도 아닌, 바로 일제에 빼앗긴 조국이었다. 조국을 도로 모시고 싶은 지정일념至情一念은 그의 마음 안에 기도의 제祭를 모셔놓고 갈구의 심현心絃을 섬세한 가락의 주문呪文으로 읊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태용은 님의 정체를 “불타도 이성도 아닌, 바로 일제에 빼앗긴 조국”으로 한정하여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님’이라는 보다 깊은 상징적 의미를 교조주의적으로 단순화시킨, 관용화慣用化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만해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님에 대한 논의가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님’을 ‘빼앗긴 조국’과 ‘민족’, ‘불타佛陀’ 또는 ‘중생’의 표상으로 보거나, 아니면 형이상학적 다양한 신비성을 포함하고 있는 ‘불교적 진리’로 보는 도식적인 유추적 결정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조지훈이 그의 「한용운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민족과 불佛을 일체화한 님의 가없는 사모思慕”가 만해의 세계에 일관하는 기본 요소인 것은 사실이나, “민족 운동가로서, 불교 사상가로서, 근대 시성詩聖으로서 삼각三角의 정상에 우뚝 솟은 첨탑이요, 불멸의 인간상”이라는 생애의 고결함을 그대로 시작품의 내부체계를 이루는 원리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한용운의 ‘님’ 해석 문제를 둘러싼 몇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① “그러나 이 시집(『님의 침묵』)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님의 정체는 결코 단순한 애인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님’은 어떤 때는 불타도 되고, 자연도 되고, 일제에 빼앗긴 조국이 되기도 하였다. ‘님’이 갖는 의미는 그만치 형이상학적 다양성의 신비를 띠고 있었다.”(조연현)

② “만해에게 있어서, ‘님’이란 다름 아닌 생명의 근원이었고, 영혼에의 극지였으며, 또한 삶을 위한 신념의 결정結晶이었다.” (인권환)

③ “‘님’은 한자리에 놓여 있는 존재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움직이는 부정의 변증법에서 의미를 갖는 존재의 가능성이다.” (김우창)

④ “‘님’이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성이자 시인이 잃어버린 조국과 자유요 또 불교적 진리이자 중생이기도 하는 것―그 모든 것이면서 그것이 그때그때 중첩되어 보이기도 하는 것―그것은 가장 이상적인 사고방식이며, 존재의 참모습에 대한 가장 온당한 일컬음인 것이다.”(백낙청)

⑤ “『님의 침묵』은 이별을 통해 만남을 이루는 소멸과 생성의 변증법적 원리에 바탕을 둔 것이며, 또한 세속적 사랑의 종교적 승화에 대한 이념적 동경을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김재홍)

⑥ “선생의 증득證得은 민족운동과 서정시로서 표현되었으며, 선생의 문학을 일관한 정신은 또한 민족과 불佛을 일체화한 임의 가없는 사모였다.” (조지훈)

⑦ “문학 이전의 생명적 요소, 자타自他가 합일하는 공空의 경지에서 홀연히 오득悟得한 전체이며 일부인 것, 그가 일생을 통해 ‘길러 왔던’ 모든 것, 문학이며, 혁명이며, 중생이며, 조국의 근대화이며, 또는 자연이기도 한 인생의 일체一切가 그의 ‘님’이었다.”(신동문)

⑧ “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찬송해야 할 모든 대상과 깨달음을 뜻한다.” (송욱)

⑨ “님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그리워하는 대상이다.” (고은)

⑩ “열반의 경지에 들게 하는 참다운 무아無我”(오세영)

위에 인용한 다섯 명의 주요 비평가들(①에서 ⑤까지)과 다섯 명의 시인들(⑥에서 ⑩까지)의 견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대체적으로 만해의 ‘님’이 조국, 민족, 중생, 불타, 애인 등의 의미체로서 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집 『님의 침묵』 속에 208번이나 등장하는 ‘님’이란 말을, ‘님’=빼앗긴 조국, ‘님’=불타, ‘님’=중생, ‘님’=애인이라는 등식만으로 편리하게 설명하려는 만해 이해의 경직성을 경계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적 텍스트에 대한 일정한 접근은 상상체계(한 시인의 삶과 작품 사이에는 서로 독립하면서 동시에 대응하는 기술체계를 이룬다)로서의 작품 구조 자체를 지탱하고 있는 요소의 해명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님’이 ‘길 잃은 양’(독자)임을 추출해 낸 이어령의 『님의 침묵』 분석(「기호의 해체와 생성」,『시 다시 읽기』, 문학사상사, 1995)은 철저하게 기호론적인 접근, 순수한 시적 층위에서 면밀하게 해부한 놀랍고 획기적인 비평적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종래의 ‘님’의 의미 분석을 일거에 뒤집는 독창적 접근으로서 만해시 이해의 새 지평을 열 수 있는 도약대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님’을 주제로 한 ‘만남과 이별의 현상학’을 가장 계시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작품 「님의 침묵」은 만해 자신이 「군말」에서 말한 것처럼,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보편적 사랑의 형이상학을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님의 침묵」이란 시는 ‘믿음 속의 의문’(e.d. 록스타인rockstein 교수가 한용운과 잉그마르 베르히만 ingmar bergman의 세계를 비교분석한 글에서 한 말), 만남과 헤어짐의 변증법, 긍정과 부정의 역설구조를 계시적으로 형상화환 한용운적 사랑의 원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작품이다.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인 이 시는 본질적 근원으로서의 표상체 즉 ‘님’을 그리워하는 참다운 의미에서의 연가이다. 
 
다시 말하면 ‘님’ 즉 조국, ‘님’ 즉 불타, ‘님’ 즉 애인이라는 직접적 결정론에 의해 한정되는 ‘님’의 성격을 벗어나는 보다 본질적인 근원으로서의 사랑을 ‘관능적’ 차원에서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해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근원으로서의 ‘님’이 의미하는 바는 “그 때를 벗기면 그 밝은 것이 도로 나타나서 전과 같이 호래호현胡來胡現, 한래한현漢來漢現 하게 되는” 물의 성性 즉 우주의 모든 현상이 지니고 있는 참다운 생명의 법성法性을 가리킨다. 
 
결국 만해의 상상체계의 핵심적 축軸을 이루고 있는 ‘님’은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항구적인 근원(본연의 법성)의 상징을 대상화한 것이며, 「님의 침묵」은 그러한 본질적 근원으로서의 ‘님’이 부재하는 시대에 있어서의 ‘존재론적 갈증’을 외쳐부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움을 노래한 사랑의 절규로 볼 수 있다.

1999년 여름에 한국에 초청되어 백담사의 만해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엘리자베트 앙드레스(elisabeth andres) 교수(프랑스 툴루즈대)의 「만해에 있어서의 종교적 형이상학의 양상」은 우선 서구인, 다시 말해서 프랑스인의 선입견 없는 객관적 관점으로, 우리가 보지 못했거나 보았더라도 스쳐 지나갔던 측면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노장사상을 비롯해서, 기독교, 불교, 힌두교, 수피즘 등에 관한 20여 권의 저서를 내놓은 바 있는 학자답게, 단지 불교철학에만 기대지 않고, 보다 거시적인 비교종교학적 차원에서, 만해 시가 함축하고 있는 비의적秘義的인 의미를 파헤쳐 보여주었다. 이것은 만해의 문학이 한국이라는 국경을 넘어서 서구인들에게도 시적 울림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 하나의 좋은 예이기도 했다. 

특히 시인의 세 개의 이름, 한용운, 만해, 봉완이라는 이름에 착안하여, 세 가지 각도에서 그 특징적 양상을 분석함으로써 전인적全人的 풍모로서의 시인의 전체상을 묘사한 것은 퍽 재미있는 독창적 시도라 할 수 있었다. 시인의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 그리고 창조적 자아 사이의 간극을 빈틈없이 좁혀, 어떻게 어두운 시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정의로운 행동을 통일적으로 밀고 나갔는가를 밝힌 것은 퍽 인상적이었다.

앙드레스 교수는 ‘님’의 의미를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을 극복함으로써 다다를 수 있는 초월적 자아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 붙여지는 찰나에 이미 ‘절대적인 님’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도道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비추어, 일종의 모순어법으로 표현된 만해의 ‘님’이 지니는 형이상학적 의미, 그리고 사랑의 의미를 풀어냈다. “말해질 수 있는 도는 ‘절대적인 도’가 아니다. 이름지어질 수 있는 이름은 ‘절대적인’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名可名 非常命”라는 『도덕경』 첫줄에 나오는 유명한 말을 이용하여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군말」) 또는 “사랑을 ‘사랑’이라 하면 벌써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사랑의 존재」)라는 만해의 시가 갖는 특이한 모순된 역설 구조를 깊이 있게 분석했다.

나의 불역시집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le front contre la fenetre, paris, l'harmattan 출판사, 1997)의 해설을 쓴 바 있는 앙드레스 교수의 이같은 분석에 동의하여, 나 또한 ‘님’의 의미를 ‘존재’이면서 비존재(non-être)인 하나의 통일체로 보고자 한다. 영원하고 불변하고 절대적인 도에 이름을 붙일 수 없듯이, 하나이면서 여럿인 ‘님’, 개체이면서 전체인 통일체로서의 절대에 우리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님’에 이름이 주어졌을 때, 그것은 이미 진실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이며 동시에 보편적 자아(moi)인 ‘님’은 그 참된 이름을 모르기에 이름 붙일 수 없는 비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존재’는 이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절대적인 ‘비존재’라는 만물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난다. 결국 만해의 ‘님’은 이름 붙일 수 있는 ‘존재’와 이름 붙일 수 없는 ‘부재’ 또는 ‘비존재’의 야누스적 통합체라 할 수 있다.  
 
이가림   1943년 만주 출생.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빙하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순간의 거울』 『내 마음의 협궤열차』 등.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인하대 프랑스문화학과 교수. 
 
새로움에 대한 경계와 애정의 교차  

                                                                                                              이    하    석

요즘 들어 문학평론가들의 일들이 산더미 같을 것이라 여긴다. 점검해야 할 텍스트들이 엄청나다. 올 봄에 우수문학도서 선정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그 대상이 되는 지난해 4분기의 시집 양이 너무 많아서 놀랐다. 문학나눔위에서 집계한 것이 2백 권이 넘는다. 이 집계에서 누락된 것까지 포함하면 더욱 많을 것이다. 줄잡아 연간 1천 권 이상의 시집들이 출간되는 셈이니, 10년이면 1만 권이 훨씬 넘는다는 얘기가 된다. 
 
이 정도라면 문헌들을 정리하는 일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아니 아예 이 가운데 반 이상, 또는 10분의 9가 관심 밖으로 밀려날 것이란 생각도 든다. 황동규 선생의 시(「태평가」)의 한 구절인 ‘도처철조망到處鐵條網/개유검문소皆有檢問所’를 빌려서 말한다면 ‘도처시인/개유시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텍스트들의 거대물량 앞에 선 문학평론가들의 자세는 사뭇 커보이기도 하고, 사뭇 난감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문학평론가라 해서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는 시집들을 일일이 다 챙긴다는 생각 자체가 넌센스다. 사회의 모든 게 그렇지만 문단에도 묘한 걸름막이 있어서 이 많은 시집들이 그 때 그 때 걸려져버리기도 한다. 그 걸름막에서 걸러지지 않고 살아남는 시집들은 기실 얼마 되지 않으니 그것들만 신경을 쓰고 챙기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혹여 문학평론가가 그 걸름장치의 장본인이 될 수도 있다면 그건 아주 큰 권력이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어쨌든, 거대 물량 공세의 문학판 속에서의 괜찮은 ‘문학작품 가려내기’가 여러 가지로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그런 가운데 문학평론가들에 대한 불만이 어느 때보다 많이 쏟아지는 듯하다. 무엇보다 물량의 양이 크다 보니, 그것들을 일일이 점고할 수 없는 상황이라 대충 문단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는 작품들만 건성으로 집적되는 일이 있지 않은가 하는 혐의가 있다. 
 
또한 이른바 ‘식구의식’, 곧 자신이 관여하는 문예지나 문학단체에 국한하여 작품을 읽고 마는 편협성에 함몰해 있는 게 아니냐는 혐의도 있다. 우리 식구를 감싸는 문학은 칭찬 일변도가 되기 쉬우며, ‘주례비평’이나 ‘골목비평’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아냥소리도 듣는다. 
 
우리 문단의 일각에서는 이런 일들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면도 불식돼야 할 중요한 문제지만, 더욱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문학평론가들이 애정결핍이거나 애정과잉 현상 때문에 문학의 현실을 종종 곡해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점이 두드러진 예가 최근 시집들을 내기 시작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대한 평단의 반응일 것이다. 이른바 <미래파> 문학에 대한 논쟁이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주목을 받기 시작한 몇 몇 젊은 시인들의 어법이 종래에 비해 새롭고, 낯설다는 것 때문에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시끌벅적하다. 
 
황병승, 장석원, 김민정 등은 물론 올들어 김언, 김행숙, 이장욱 등 이른바 미래파 시인들의 활동폭이 계속 넓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이들의 작품들이 환상과 전복, 엽기스러운 말의 구사와 묘사 등을 보이는 등 새로운 언어구사에다 그런 경향이 최근 1, 2년 사이에 젊은 세대들 사이에 꽤 많이 나타나면서 집중적으로 관심을 끌고 주목을 받게 되자, 평론가들이 아연 긴장하고 달려든 것이다. 
 
지난해 《문예중앙》 봄호에서 평론가 권혁웅에 의해 <미래파>라는 말이 처음 쓰인 이후 이 말이 지칭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후 이런 경향의 시인들이 늘어나자 ‘드디어’ 평론가들의 반발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들을 옹호하는 이들도 당연히 있으나 수적으로 열세인 듯하다. 

<미래파>라는 말이 나온 지 거의 1년만인 올 여름 각 계간지 여름호 특집들, 예컨대 《시작》과 《문예중앙》의 관련 특집, 《창작과 비평》의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 《작가세계》의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 세계 비판」, 《실천문학》의 「2000년대, 새로운 감각의 문학」 특집들이 그러한 반발과 우려들을 담고 있다. 

평론가들이 이처럼 중요 문학지들을 통해 일정 세대의 문학경향에 대한 논쟁을 집중적으로 벌이고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여겨진다. 이들 젊은 시인들의 시들이 해독의 어려움을 느낄만큼 종래 볼 수 없었던 언어코드를 드러낸 게 아닌가, 그래서 그런 것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문단의 기우가 크기 때문일까? 어떤 면에서는 이런 관심이 젊은 일군의 시인들의 활동이 그만큼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특집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그것은 ‘시대적 징후’이며, ‘새로운 감각의 문학’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고 여기는 듯하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들의 문학에서 환상과 전복의 세계와 언어구사를 보이며, 엽기적인 묘사와 무의식을 드러나며, 독해하기가 어려울 만큼 난해하다고 꼽는다. 그래서 이들과 코드가 다른 세대들은 이들의 문학이 자칫 말장난이나 환상적 말놀이로 여겨진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들 세대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들의 어법은 종래의 시들과 ‘다를 뿐’, 말장난이나 환상으로 치부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진지한 문학이라 주장한다. 심지어는 ‘시적 주체와 세계가 엇갈리는 비정상적인 불행한 서정시’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의 문학에 대한 평론가들의 진단은 차갑고 냉정하다. “기껏 이 시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며 개인적 고민에 몰두하는 편협성이라 꼬집는다. 또는 ‘시인들 스스로 소통 불능의 자폐적 성채로 들어가는, 일종의 내국망명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은 어느 때나 있어온 것처럼―80년대 해체적인 시의 실험이 대두됐을 때에도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었는데, 그 지적이 희한하게도 대개 위의 지적들과 비슷했다―새로움에 대한 경계의 시선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앞세대와 뒷세대 간에는 종종 소통불능, 또는 불유쾌한 소통의 양식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이해와 화합을 위한 징검다리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문학은 기존의 문학에 편입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젊은 시인들에 대한 기존의 평론가들의 지적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충분히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 

문제는 최근 대두되는 새로운 시적 경향들이 단순히 몇몇 젊은 시인들의 개인적 작업에 머무르지 않고, 집단적 움직임을 보인다는 데 있다. 그 경향들에 대해 공감하는 이들이 계속 나타나면서 그것이 하나의 특징으로 굳어지고, 새로운 시경향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문학은 우리 문학이 갖는 새로운 경험을 보여주며, 젊은 감각으로 맞닥뜨리고 호흡하는, 우리 현실에 대한 새로운 대응의 한 중요한 양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박수연의 말처럼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은 문학사적 사건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들 시인들의 작품들을 과거 문학의 잣대로 재단할 것이 아니라 이들 시인들의 독특한 현실 드러내기의 징후들을 인정하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의 한 단면이며, 그리하여 그것이 한국문학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는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과거의 잣대로 현재 진행형의 문학을 재단하는 것은 애정결핍이기 전에 우리 문학의 중요한 흐름을 곡해하고 오해할 우려가 크다. 
 
문학평론가의 할 일이 “이 불행한 시대의 한가운데서 문학이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무력한 증상들을 세심히 따라 읽고 그것의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며, 그것의 공과功過를 따져 헤아리는 것”(김영찬, 『비평극장의 유령들』)이라면 더더욱 그런 새로움에 대한 경계 못지 않게 애정도 필요한 것이다. 그 태도가 우리 문학의 매듭을 확실히 하면서 새롭게 확장시키는 태도이기도 한 것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이하석   1948년 경북 고령 출생. 197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투명한 속』 『김씨의 옆얼굴』 『우리 낯선 사람들』 『측백나무 울타리』 『금요일엔 먼데를 본다』 『녹』 『것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
 
비평과 해석학적 중독
―― 해석이 상징이라면, 비평은 또 다른 상징의 생성이다
    
                                                                                                                       변    의    수

비평은 약호의 사전서가 아니다. 하지만, 비평은 종종 사전이 되고자 애를 쓰며 시 텍스트로 하여금 사전적 약호 체계의 산물일 것을 주문하는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젊은 시인들의 자의적 상징의 시편들에 대한 비평을 접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다시 인다. 시인은 질료적 기호체로서의 텍스트를 만들 뿐이지 의미 자체를 만들지 않는다. 

20세기 초엽 카시러는 표현적 또는 재현적 상징보다 순수 의미작용의 상징을 가장 수월한 단계로 보았다. 카시러의 순수 의미작용이란 소쉬르가 언어 기호학의 제1의 원리로 삼았던 ‘자의적(arbitrary)’ 결합의 방식 그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카시러의 ‘순수 의미작용으로서의 상징’이 뒤샹이 행하였듯 눈 치우는 삽에다 「부러진 팔에 앞서서」와 같은 전혀 무관한 자의적 제목을 붙이는 식의, 시적 기호체의 작품 제작방식에까지 사유를 진전시켰던 건 아니다. 
 
하지만 수학이나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시나 예술 역시 자의적 구성의 상징 기법은 보편화되고 있으며, 시·예술에서의 그러한 자의적 상징의 기법은 자의성의 기호에 대한 헤겔의 헌사처럼 ‘낯선 의미를 혼으로서 부여’하는 새로운 문명의 이식과도 같은 충격을 전해 준다.

실은, 현대 예술은 20세기 초엽의 뒤샹, 그리고 그 이전 19세기 중엽 이후의 인상파 화가들, 시에서는 말라르메에 이르러 이미 자의적 구성의 상징 세계로 들어섰다. 그때 이미, 예술은 텍스트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접촉자의 자의적 구성의 상징 그것에 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작품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는 엄격히 말해 ‘상징 생성’의 매개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텍스트에 대한 비평적 해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텍스트에 대한 기호학적 해석 다시 말해 시작의 양식과 그 문법들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진다. 

자의적 상징의 텍스트에 있어서는 더욱이 그러하다. 비평에 있어서 의미의 생성이 있었다면 그것은 온전히 비평가 사적 개인의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평의 경우, 재구성1)되지 않는 텍스트의 자의성을 질책한다. 
 
그러나, 의미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의미는 지식이나 추론적 이성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상학자는 먹구름의 데이터를 읽고서 비가 올 시기와 그 양을 추정한다. 그러나 어부는 하늘의 먹구름을 읽고서 폭풍우의 시기와 그 강도를 짐작한다. 시를 읽고 접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감각적이고 실존적 차원의 일이다. 

의미의 생성에 있어선, 자의적 상징의 텍스트를 접할 경우 비평자 역시 한 사람의 독자에 다름 아니다. 이때 비평가의 주요한 임무는 텍스트(기표적 표상체)에 대한 기호학적 관심 즉, 기표적 표상체에 관한 문제이고, 의미의 생성은 독자의 몫으로 돌려져야 한다. 
 
특히, 자의적 상징에 있어서 텍스트를 의미체적 사전이나 하나의 진리와 같은 것으로 다루고자 한다면, 그것은 수사적 태도의 해석학적 중독 현상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시 텍스트를 구성하는 시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해당하는 문제이다. 시인은 ‘의미’마저 형식으로 표상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자기 전경화’(텍스트를 객관화시키기보다 작가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현상)에 빠질 수 있다. 

해석은 또 다른 창조적 상징 생성의 행위이다. 상징은 동일성(사전적 약호와 텍스트의 의미에 관한) 비교에 의한 확인과 그런 유의 믿음 같은 것이 아니다. 상징은 사전 밖의 세계에 대한 직관적 통찰의 획득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추론적 해석의 비평에 대해 그러한 상징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비평적 해석에서도 그와 같은 비약적 직관을 요구하는 까닭에서이다. 적어도 비평가로서의 해석은 단순한 동일성 확인에 관한 비교적 차원의 확인을 넘어서는,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이지 않는 기슭을 향하여 던져지는 다리’와 같은 직관적 상징의 해석을 소망하는 것이다.    
                                     
                                          표상

                                       
                                          상징       
      
                      표상체                       재표상        

※ 동일화의 표상 즉, 상징은 표상, 표상체, 재표상의 관계망을 이룬다. 표상은 시인 내부에서 생성되어 의식에 기호화되어 있는 관념, 표상체는 소위 이르는 텍스트이고, 재표상은 독자나 비평가의 표상(상징) 행위이다. 위 세 영역은 공·시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의 연결물로서 상징의 각 다른 면들이다. 

추론2)과 단정 행위는 원관념이 제공되지 않은 미지에의 상징 행위이다. 그 연결물이 해석이라는 비평의 작업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비평은 미지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또 하나의 상징 생성의 행위인 것이다. 
 
알고리듬적 진행의 작업이나 주어진 약호들에 대한 기술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의적 상징의 텍스트는 의미에 대한 지시체가 아니라, 의미를 생성하게 한다. 상징은 표상되는 순간에 의미가 생성된다고 한 헤겔이나 에코 등의 언급은, 우리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시의 텍스트가 사전이 아닌 그 이상의 어떤 것임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시의 텍스트가 개성을 상실하고 있다지만, 비평 역시 이미 그러한 지 오래다. 시인은 정독을 소망한다. 그러나, 비평 역시 1회용 포장지로 전락된 지 오래다. 매너리즘에 빠진 시의 경우 하나의 원형이 예견된다. 비평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락은 하나의 개념을 상징한다. 그러나, 진부한 용어들 위에서는 시선이 머물 곳이 없다. 
 
비평이 비평가라는 사전적 주석가의 기술에 그치고 말 수 없듯, 시문詩文 또한 주석가의 해설을 요구하는 고생대의 화석 같은 죽은 낱말의 나열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비평가에게 있어서 시인은 의미의 생성자가 아닌, 시문 즉, 예술의 문법을 창조하는 자이다. 

우리는 칸트를 비롯하여, 시 형식의 문법이 천재의 개념과 관련지어져 결코 학습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언급됨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수사적 의미로 한정되어야 한다. 시·예술은 학습되어질 수 있고, 학습되어져 왔으며, 교실에서의 얘기와는 달리 과학사와 마찬가지로 (근대 이후 과학의 발전속도와 논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예술의 창조적 기술과 기능은 줄곧 축적되고 발전되어 왔다. 
 
하지만, 이 비효율적 현상은 비의식의 예술을 학문이라는 의식 세계의 순금으로 변성시켜야 할 장인, 비평가인 연금술사들의 무관심에 많은 부분 그 책임이 있다. 

예술은 비의식3)의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4)이라는 것도 실은 비의식의 결과물일 뿐이지만, 비의식이 얕은 곳에서 의식과 의도적 기호물이 생성되지는 않는다. 고래는 연못의 물고기가 아니다. 새로운 시문법은 깊은 비의식 속에서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러나 시인들은 고대의 철학자가 조롱한 바 있듯, 그들은 말을 하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때가 많다. 어떤 보석 같은 광휘를 발하는 어문들을 쏟아내어 놓고도 정작 자신은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선 분별하지 않는다. 

예술이 충분히 학습되거나 축적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사실은 그곳에 있다. 그러한 시인, 예술가들의 무관심과 맹문을 대신하여 시·예술을 밝은 의식계로 인도해내어야 하는 책무가 비평가에게는 있는 것이다. 사후추론적 논의들인 수사학과 논리학이 시·예술을 창작케 하고 훌륭한 논리를 구사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류와 미망 속에서의 착오의 과정은 줄이게 한다. 사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다음 세대들을 위하여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이다. 사후추론적 해석의 작업으로서의 비평이 한갓 사전적 정의의 기록과 재단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상징

                            
                                                
      
                        기호                           대상      
  
* ‘동일화 표상’의 기능으로서의 상징은 기호에 의미의 형식으로 투사되어 내재한다. 뿐만 아니라 상징 없이 기호는 생성되지 않으며 상징은 기호 없이 생성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상징과 기호는 다른 그 둘이 하나라 할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기호와 상징을 표상하는 ‘대상’은 아주 다른 세계의 것이다. 대상은 다름 아닌 존재 그것으로서 현상과 실체의 양면을 띠고 있다. 

기호와 대상, 그리고 상징과 대상의 관계를 점선으로 나타낸 이유는, ‘대상’은 상징이나 기호의 의미적 쌍으로서 대응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간혹 기호의 삼원소를 제시하면서 기호는 의미를 통해 간접적으로 대상을 지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호나 상징이 지시하는 ‘대상’ 그것은 단순한 대상 그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 또는 ‘존재자’ 그것이다. 의미의 미끄러짐은 단순한 개념적 윤전에서가 아니라 현상과 본질 즉, 실체를 향하여 기투되어야 한다. 

상징과 기호5)는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다. 우리는 통상 현상으로부터 비롯하여 상징을 생성하고 기호를 표상하지만 상징과 기호의 텍스트는 실체를 지향한다. 상징물로서의 시·예술의 텍스트는 과학이나 마찬가지로 존재와 세계에 대한 재귀적 물음의 기호작용이다. 비평의 세미오시스 역시 기호의 대상은 실체적 본질에 바탕해야 함은 말할 것이 없다. 

은유와 시는 촛점적 과학이 제시하지 못하는 존재론적 인식과 성찰을 유도한다. 과학이 초점적 추상화의 철학을 추구한다면, 시·예술로서의 은유와 상징은 실체적 존재론의 인식을 추구한다. 은유는 형식논리의 입장에서는 기만이나 거짓이다. 그러나 모순적 현상의 내부에 은유는 통일적 참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시적 은유의 힘과 본질은 거기에 있다. 

자연의 세계로 나침반을 돌려놓을 수 없는 현금에서 은유는 신화의 훌륭한 대유물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서사보다도 찰나적 통찰이 더 힘을 발휘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좌뇌적 사유에 의존하는 과학 못지않게 은유는 더 깊은 비의식의 자연에 닿아 있는 때문이다. 비평이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다면 비평이야말로 한낱 공소한 수사적 유희에 그치고 말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시가 하나의 감추어진 사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평 역시 약호들의 체계물로서의 사전 그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때 과연 사전의 겉표지와 시 텍스트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비평은 참고서가 아닌, 원전으로서의 법문法文으로 또 하나의 상징 행위를 요구하는 상징 작용이어야 한다. 
 
상징은 사전적 조회照會나 그 어떤 수사학적 또는 알고리듬적 전개의 산물이지 않다. 상징은 비의식의 직관과 통찰의 산물이다. 비의식의 시·예술의 도식을 의식의 빛으로 투사해내어야 하는 이유를 오늘의 비평계는 인식해야 한다.
  
   
1) 텍스트를 통한 새로운 상징의 생성 행위.

2) 추론은 도식적 양태의 상징으로, 도식적 상징에는 형식․변증의 논리규칙, 문법, 함수관계, 알고리듬 등 여러 약호적 체계의 표상 유형을 들 수 있다. 도식을 ‘표상’이라고 하였지만 도식의 표상은, 질료적 기호로 재현되는 자연적 상징 등과는 달리 우리의 내부에 직관의 양식으로 자리한다. 현상 이면의 본질의 한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비의식은 창조적 정신작용 즉, 상징을 생성하는 정신계 또는 그 작용이다. 무의식은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사용되는 용어이고, 그것도 창조적 정신 기능이 아닌 개인적 콤플렉스의 이상 징후와 관련하여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 점은 프로이트는 말 할 것도 없고 칼 융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지, 칼 융은 집단무의식의 경우 신화소적 상징의 생성처로 보고 있으나, 그 점을 제외한다면 칼 융이 집단무의식을 창조적 정신작용으로 지시하였다고 볼 근거가 없다. 
 
한편, 쉬르레알리슴의 자동기술과 관련하여 연구자들은 한결 같이 ‘무의식’과 결부지우나 그것은 처음부터 무의식의 성격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윌리엄 제임스 등 철학에서의 ‘무의식’ 개념 역시 상징 또는 창조적 사고 기능의 원천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분트는 심리학을 의식의 문제로 한정하기까지 하였으며 칸트, 피어스, 카시러 등은 상징의 생성과 관련하여 무의식에 관하여선 외면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4) 비의식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비의식에서 진행된 상징생성을 위한 신경․생리적 신호작용의 결과물을 기호적 표상으로 나타내는 정신작용이라고 간략히 말할 수 있다.

5) 기호 생성 작용(semiosis)의 이면엔 상징의 기능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도식(가추법 등)을 기호로 환원시키고자 한 피어스의 노력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라이프니츠의 보편문법의 논의를 이어받은 카시러는 ‘사실의 논리’는 ‘기호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거나 그와 하나를 이룬다고 생각하였으나(1923) 카시러는 기호와 상징을 분리(1944)시켰다는 점에 있어서 라이프니츠와 피어스보다도 진전된 사고를 가졌다고 할 것이다. 피어스가 ‘사고-기호’라고 하였듯 피어스는 상징(사고)과 기호를 하나로 보았으나 사고와 기호의 상보적 생성에서만이 아니라 사고로서의 상징은 텍스트로서의 기호에 투사된다는 점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기호와 상징은 분리적인 것이면서 또한 하나이기도 하다.
 
변의수   1955년 출생.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먼 나라 추억의 도시』 『달이 뜨면 나무는 오르가슴이다』. 
 
단추, 그 아름다운 불구들을 위하여
―― 잡설에 기대어
    
                                                                                                                            김    민    정

가족오락관이라는 프로그램 중 이구동성이라는 코너가 있다. 주장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귀가 찢어질 듯 때려 부수는 음악으로 쩌렁쩌렁한 귀마개를 쓰고서 벌이는 게임. 사회자 허참 아저씨가 주장에게 단어 하나를 보여준다. 온고지신. 주장은 한껏 입을 벌려 또박또박 발음해준다. 옹고집전? 다음 주자가 다음 주자에게 한껏 입을 벌려 또박또박 발음해준다. 온두라스? 다음 주자가 마지막 주자에게 한껏 입을 벌려 또박또박 발음해준다. 아하, 오므라이스! 땡 소리와 함께 귀마개를 벗더니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뭘, 난 분명 그렇게 들었다니까.

오독이라는 이름의 고독을 느낄 때마다 나는 내 시 속으로 더 깊이 침잠하는 데서 쾌락을 찾는 듯싶다. 상처가 있었던가. 물론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 또한 상처를 준 적 왜 없었겠는가. 그래서 나는 사람이든 시든 기대란 걸 모른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든 시든 빨리 포기하는 법을 익힌 지 오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든 시든 제3의 손을 어디 앞치마의 포켓이나 후드점퍼 끝에 달린 모자 속 같은 데다 슬쩍 넣어둘 줄 안다. 심장이 아닌 심장 너머에 저 살 궁리로 꼬물거리는 신경다발의 건강함, 나는 사람이든 시든 그것이 사랑임을 믿는다. 

사랑이 밥은 안 먹여줘도 영정사진 들 놈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손쉬운 치질이라더니 수술실로 들어가자마자 아빠는 마취 쇼크로 침대 밖으로 퉁겨져 중환자실로 옮겨진다. 부정맥이라는 병명을 안고 퇴원한지 며칠이 지났을까. 아빠는 스물셋 청년기의 증명사진을 커다랗게 확대해 거기에 대고 아침저녁으로 절을 해대기 시작한다. 
 
무언의 종용, 슬쩍슬쩍 엉덩이를 들썩이며 언제나 이 자리를 박찰까 타이밍을 재고 있는 나는 지금 맞선 자리에 앉아 있다. 어쩌다 시를 알아 시를 썼고 그러다 시인이 되어 이제 겨우 시집 한 권 근근 펴낸 나, 올해로 데뷔 7년째이지만 여전히 시인이라는 호칭에는 에그, 하는 동종의 닭살이 돋는 나…… 작가시라고 들었습니다. 네? 작가는 무슨요, 시 써요 살짝. 제 주변에서 시인은 처음 봅니다. 네? 처음은 무슨요, 천지에 널렸는데. 책은 다음에 사인해서 선물로 주실 거죠? 네? 선물은 무슨요, 보면 토하실 거예요. 그 순간 난데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야, 난데 뭐 하나만 묻자. 친하게 지내는 소설가 선배의 급한 호출을 받고 보니 수화기 너머로 왁자지껄 뒤엉킨 목소리들이 면면으로 떠오른다. 있잖아, 시 쓰는 ○○○는 미래파냐, 아니냐? 뭐야, 짜증나게. 맞선 남자가 힐끗 날 쳐다본다. 
샐쭉 웃으며 나는 전화기를 들고 잠시 자리를 피한다. 갑자기 그 얘기가 나왔는데 사람들이 궁금하다고 하잖니. 근데 왜 그걸 나한테 물어? 넌 잘 알 거 같아서. 버럭 할 만한 일은 아님에도 가시에 살 찔린 것처럼 돋아난 성깔을 참지 못하는 나, 내키는 대로 말을 내뱉고 만다. 그게 무슨 계야? 내가 자진해서 들기를 했어, 아님 계주기를 해, 앞자리 타먹고 튄 년도 아닌데 왜들 싸잡아 난리야.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알아, 성질내서 미안한데 무슨 파든 아니든 그거 따질 시간 있으면 시나 제대로 읽으시라고 해. 그 순간 뚜뚜 걸려 들어오는 또 한 통의 전화,

‘비평가의 시 비평이나 논지에 공감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비평 글을 부탁드립니다.’라는 게 청탁의 요지란다.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아니 그래도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시를 그렇게들 읽었다는데 내가 뭐라고 해요,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어요. 왜 그래도 미래파 얘기 많이들 하잖아요. 시인들이 언제 입 모아 인정한 적 있어요? 만국의 시인이여 단결하라, 도 아니고 참. 오, 그거 좋네요. 쓸 깜냥도 못 되면서 무기라곤 펑크 낼 거예요, 하는 협박과 으름장과 나몰라 도망뿐이면서 김민정, 너는 왜 거절을 모르는 거니. 
 
잘 속고 잘 속죄하나 잘 속이지 못하고 잘 솎아내지 못하는 나, 어떤 식으로든 변명으로밖에 들릴 리 없는 이 빤한 글을 쓰고 있는 건 그럼에도 나는 미래로 가는 차, 어쨌든 나아감을 믿는 바퀴쪹로 구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여기서 또 만나는구나, 미래여. 징글징글하구나, 미래여. 하지만 나는 과거로가 아니라 아무도 누워 본 적 없는 내 무덤가, 내 관 속을 향해 덜 마른 콘크리트 위를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미래 아닌가.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전화벨 소리,

민정 씨, 무슨 일 있으세요? 답을 주는 물음에 겨워 나는 급작스럽게 써야 할 원고가 있다는 핑계로 맞선 남자와 헤어진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이런저런 글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내 시에 대한 얘기인데 도통 이해가 안 가는 이 문맥은 대체 뭐라니. 선생님, 선배님, 오빠 언니들아, 무식해서 그러는데요 제 시가 정말 그런가요. 돌아오는 것은 말없는 웃음, 그리고 쉬잇 손가락으로 입을 가로막는 침묵. 
 
그래도 간간 발견하는 맑은 눈과 넉넉한 품성의 따뜻한 글 속에서 내게 공부를 더했으면 하는 바람의 말, 알아듣고 고맙게 메모한다. 사유의 깊이나 체계가 없어 내 시는 시가 될 수 없다는 도로 아미타불의 말, 부끄럽지 않아 계속 딴청이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시, 이거다 하는 시, 그건 대체 어떤 시란 말인가. 그걸 좇아 교복을 입고 흰 양말을 신고 단발머리에 머리핀을 꽂고 학교에라도 가봐야 하나. 난 오늘은 콩밥, 내일은 팥밥, 모레는 보리밥, 글피는 찹쌀밥, 그글피는 약밥, 아 잡곡밥도 먹어야 하는데 매일매일 식성을 달리하는 내 도시락은 누가 싸주려나. 그 순간 낯선 번호의 계속되는 울림, 한 남성잡지의 편집자 왈, 요즘 시에 대한 내 생각을 듣고 싶단다. 낸들 아나요. 하지만 벌써 나는 그가 보낸 이메일을 열어 질문지를 읽고 있다. 새로운 시라니, 음, 새로운 시라. 
 
나는 지껄인다. “이를테면 ‘새로운’이라는 말에 토를 다는 것부터 젊은 시인들의 시는 시작되지 않을까 해요. 난 유난스럽지 않은 솔직함을 무기로 할 뿐인데 그게 차이라면 차이랄까요. 견자처럼 풍경의 쌍안경을 걸친 척, 똑똑한 척, 착한 척, 만능인 척, 이렇게 도포자락에 붓 쳐대는 일종의 ‘척’을 하지 않고 모자라고 바보 같고 일종의 병신이다 싶은 치부까지 낱낱이 드러내는 거, 그러니까 착지할 모래더미를 걱정하지 않고 일단 ‘이다’라는 말씀으로부터 미끄러지기를 즐겨하는 대책 있는 대책 없음이라고나 할까요. 
 
바라건대 저는요, 우리라는 색색의 단추를 한 코트에 달아버리는 멍청한 바느질들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감각 있는 솜씨라면 모를까, 그래서 봐줄만하다면 모를까, 그거 하나도 고마운 일 아니거든요. 단추, 우린 그저 아름다운 불구들일 뿐이잖아요. 그 순간 지웠으나 기억인 낯익은 번호의 울림,
 
우린 왜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던 걸까. 내가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애정이 없어서였을까, 넌 내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어. 내가 진실한 탓이었겠죠. 
 
그러고 보면 넌 참 독해. 내가 약한 건 몰랐을 테죠. 도통 줄지 않을 것 같던 첫사랑의 부채 따위가 점차 종잇장처럼 가벼워지는 걸 보니 내 시 또한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번잡스럽고 그래서 신이 나며 그래서 두렵다. 그러니 여타의 평론가들이 우려한 대로 파벌 개념을 좇아 그걸 즐겨할 시간적 여유가 내게 단 1분 1초라도 있겠는가. 
 
맨 처음 시가 내게로 와 시를 만날 수 있었듯 앞으로 그렇게 쓰고 읽고 결국에는 파지처럼 버려질 운명으로 나는 시를 살아갈 것이다. 그거면 족하지 뭘 더 바라겠는가. 어쨌거나 나는 입 닥치고 쓰기나 하련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이면 될 것을 역시나 이번에도 너무 길어졌다. 아아, 정말이지 시라는 진정한 시의 신은 대체 언제쯤 내게 들르실지.

* 허수경의 시 구절에서 변형

김민정   1976년 인천 출생.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it's a blue world

                                                                                                                      장    석    원

  미래
시가 사라지고 있다. 사라진 시는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시를 둘러싸고 과거, 현재, 미래가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인다. 시를 포위하고 협박하는 서정과 다른 서정을 거절하는 진부하고 편협한 언어 때문에 시와 시인은 강탈당하여1) 자기 모멸에 빠지고 있다. 기묘한 풍경이다. 근대 이후에 수입된, 출몰한 ‘서정’이라는 개념…… 나는 서정을 인정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서정시가 아니라 시이고 권력이다.

  현재
이근화의 시 「공놀이」(『칸트의 동물원』, 민음사, 2006)를 읽는다. 시의 전문이다.
아이들 공놀이를 하고 거짓말같이 공이 떠오르고 엄마는 멀리 그늘에서 고구마의 어린순을 다듬고 손끝에 핏물 곱게 들고 나팔꽃 지지배배 몰래 울고
지나갈 비가 지나고 거짓말같이 옷이 마르고
공원에는 시작되는 연인들 끝나는 연인들 쌍을 지어 날아오르고 못 본 척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출 수 있는 아이들 멈추지 않고 자라고 또 자라서, 내 오랜 엄마는 어둡고
팬지는 차갑게 웃고 지고
공놀이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공원에 공놀이하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엄마와 연인들이 있다. 공원에서 엄마는 고구마의 어린순을 다듬는 중이고, 나팔꽃은 지지배배 우는 중이고, 팬지는 차갑게 웃고 지는 중이다. 공놀이하는 아이들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다. 그들이 던진 공이 ‘거짓말같이’ 떠오른다. 연인들의 사랑은 시작과 끝이 반복된다.
 
 아이들은 놀다가 그대로 멈출 수 있는 듯하다. 무미건조한 풍경을 시인은 무연히 바라본다. 공놀이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라고 시인은 묻는다. 우리는 시인의 물음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시인의 공원에서 사라질 듯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풍경을 바라본다. 시인 앞에 연인들, 아이들, 나팔꽃, 팬지, 엄마가 있다. 
 
시인은 지금 이 모든 것들을 눈앞에 둔다. 시인은 풍경을 이루는 낱낱을 일일이 호명하고 배치한다. 시를 창조하는 시인은 시의 전권을 쥐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서정시’이다. 시의 발화자는 ‘나’이고, ‘나’는 타자의 언어를 소유할 수 없다. 유리 너머의 풍경이다. 우리는 균질화된, 평면의 대상을 바라본다. 주체 ‘나’의 언어와 타자의 언어 사이에 아무런 권위와 위계가 없는 다성의 세계2)가 아니다.

‘나’의 엄마는 ‘멀리’ 있다. 나팔꽃은 ‘몰래’ 운다. 시인은 목전의 모든 대상들과 거리를 유지한다. 먼 곳에서 거짓말 같은 세계를 바라본다. 시인은 나팔꽃이 몰래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시작되는 연인과 끝나는 연인을 구분한다. 아이들이 연인들을 못 본 척한다는 것도 안다.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자라고 또 자라”날 것까지 안다. 
팬지꽃이 ‘차갑게’ 웃다가 진다는 것도 시인은 잘 안다. 모든 사물들을 시인은 자신의 언어로 규정하고 묘사하고 설명한다. 그리고 시인은 “내 오랜 엄마”를 시의 전면에 내세운다. 
 
화자 ‘나’가 드러나지 않는 시에 갑자기 ‘내’를 사용하면서 시인은 슬쩍 시에 개입한다. 시인과 시인의 엄마는 얼마동안 이곳에 있었을까. 시인은 엄마를 사랑했던 것일까. 시인은 ‘멀리’ 있는 엄마를 떠날 수 있을까. 시인은 엄마와 연결되어 있고, 시인은 다가올 미래를 관할하고, 시인은 이 무연한 사물들 때문에 ‘몰래’ 울고, 시인은 못 본 척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보고 있고, 시인은 떠날 수 있지만 떠날 수 없다. 
 
달라지지 않는다. 이 현재 속의 현실 속에서 시인은 ‘지나갈 비’가 지난다고, 옷이 ‘거짓말같이’ 마른다고 말한다. ‘내 오랜 엄마’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자라고 또 자라서” 공원의 연인이 될 것임을, ‘지나갈 비’처럼 곧 떠나갈 것임을 알기 때문에 ‘멀리’ 그늘 속에서 고구마의 어린순을 다듬는다. 
 
이 균제된 풍경을 다스리는 시인은 ‘서정시’를 의식하지 않는다. 이 시는 ‘서정’시일까? 시일까? 이 시는 주체가 세계를 기획하는 시의 본원적 특성을 잘 드러낸다. 주체가 세계를 관장하면서 주체의 단일한 언어로 시를 구성하는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의 마지막에서 시인은 ‘나’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공놀이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과거
공놀이하던 아이들, 막 연애를 시작하거나 끝낸 연인들이 떠났다. 지나갈 비가 지나갔고, 거짓말같이 옷이 말랐다. 시인은 공원에 남아 있는데,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거짓말같이 떠올랐던 공과 거짓말같이 말라버린 옷. 엄마 역시 거짓말같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아니 “내 오랜 엄마”는 과거의 그곳에서 여전히 고구마순을 다듬고 있지는 않을까. ‘내 엄마’의 손끝에 핏물이 곱게 들어 있음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 의해 과거의 공원과 현재의 공원이 ‘거짓말같이’ 연결된다. 
 
“그저 화자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을 관찰하고 있을 뿐”인데, “게다가 그 풍경들은 서로 응집력 있는 연관성을 보여주지도 않음으로써 이질적이고 모호한 풍경으로 남아 있”는가. 이근화의 시는 “소수의 시인들만이 전유하는 외계어들로 가득 차 있어서 최소한의 소통과정조차 가로막”3)는 시가 아니다. 
 
과거에 의해 소환당한 현재가 영원으로 치닫는 광경을 독자는 목격하게 된다. 시를 읽으려고 노력하는 독자들은 소통을 거부하는 시인들의 시라고 해서 왜 소통을 거부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모른다고 시를 거부할 수 있는가.

눈앞의 모든 사물을 가로지르는 시간의 흐름을 거짓말 같다고 인식하는 시인은 그 거짓말 같은 시간의 흐름을 관할하는 창조자이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응축시킨다. 아이와 연인과 ‘나’와 ‘내 오랜 엄마’가 소멸되다가 튀어오르는 공처럼 다시 생의 순간으로 복원된다. 영원히 반복되며 소멸하지 않을 이 순간의 이미지를 나는 이 시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이근화는 “모든 것을 제 느낌과 깨달음과 전언에 귀속시키는 서정의 권위”4)를 지니고 있지 않다.

이장욱이 넓히려는 ‘서정’의 새로운 권역과 하상일이 지키려는 ‘서정’의 보수적 권역 사이에서 이근화의 시는 ‘다른 서정’을 발산하는 “매력적인 서정”(이장욱)이 되기도 하고, “모든 것이 그저 공놀이와 같은 가벼움으로 치환될 뿐 심각한 고민이나 걱정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판단되기도 한다. 
 
나는 비평의 관점에 따라 동일한 작품이 아주 다르게 평가되는 야릇한 광경을 지켜본다. 이근화의 「공놀이」는 이장욱에게 읽혔는데, 「공놀이」에 대한 이장욱의 평가 때문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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