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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리론은 하나의 울타리로서 늘 시인을 괴곱게 한다...
2016년 10월 21일 20시 50분  조회:4617  추천:0  작성자: 죽림

시론(詩論)

​/남현

 

 

시에 대한

많은 이론이

나를 괴롭혔다.

 

하나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나를 벗어날 수 있을 때,

그때 몇 편의 시가

나를 이야기해줄 수 있을는지.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는지.

 

[출처] 시론|작성자 남현

 





이규리 시인의 '나의 시 이렇게 쓴다' - 속의 말 받아쓰기 


1.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받아 적는 것

시도 사랑처럼 우연히 찾아올 때 가장 행복하다.
우연히 오는 시는 힘들지 않고 의도적이지 않으므로 내 속의 말을 받아
적기만 하면 된다. 우연히 오는 시라고 해서 마냥 우연만이겠는가? 여
기서 우연이란 인공적이지 않다는 표현에 더 가깝다. 어떤 촉발된 생각
에 우연히 맞닥뜨려 오는 이미지나 문장들을 받아 적을 때 행복하다.
자동기술이란 말이 있듯이 내 속의 말을 내가 쓰지않고 그냥 받아 적는
것,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2. 죽도록 외로워라

그러나 말이 쉽지 이렇게 쉽게 쓰이는 행복한 경우는 드물다
우선 외로워야 한다. 외로움의 경지는 성서와 백석이 먼저 말한 바, "
외롭고 높고 쓸쓸함"의 자리이다. 결핍이 외로움을 낳는지, 외로움이
결핍이 되는지 그 둘의 길항 역시 시를 쓰는 동인이 된다. 그래서 자
꾸 주변을 기웃거려야 한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어떤 소통에는 도움이
되나 작업은 철저히 자기 혼자의 일,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다.

 

 

3. 현장성의 중요성

내 속에 있는 것들로 어떤 한계에 봉착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질경우, 신
선한 자극을 위해 밖을 떠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잘 놀아도 좋고 취
해도 좋지만 심각하지 말며 의도하지도 말며 다만 시적 반경을 벗어나지
는 말아야 한다.

4. 시에 대한 깨달음이 삶에 대한 깨달음으로

하나의 작품을 써 놓고 퇴고하는 과정에서 전보다 추가된 항목이 있다면
이 시에 발견이 있는가 깨달음이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시를 쓰는 일,
시를 쓰는 삶이 그렇지 못한 삶보다 나은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 출처 : 『詩하늘』200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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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는 곳의 가득함/신달자

 

빈 공간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혹은 그것이 가능한지 잘 모른다. 그러나 텅 비어있는 단순한 공간을 통해 사람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은 시의 어떤 새로운 방법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 사람의 아주 작은 무늬까지 표현할 수 있거나, 보이지 않는 틈 사이의 사유까지 불러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너무나 나 자신의 삶에 밀착된 소재에 엉겨붙어 나 자신의 내면에 집착한 시들에 비해 좀 여유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랬었다. 자신의 등뼈같이 자리잡은 상처들을 향해 머리를 휘저어내어 더는 피곤한 싸움은 이젠 작별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시들을 보면 그 시에 애정이 가면 갈수록 글의 소재들이 큰 몸짓으로 클로즈업되어 있는 것을 본다.

 좀 멀리서 바라보고 싶다. 그래서 아주 작게 내가 바라보는 앵글 속에 모든 소재를 축소시켜 오히려 멀어 그리움을 갖는 시를 쓰고 싶다.

 낮은 목소리와 조용한 몸짓으로 그러나 사물이나 사람은 더 옹골차게 바라볼 수 있다면 시적 상상력의 힘은 커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헉헉대는 숨소리도 삭이고 피해의식의 원망 같은 인간적 감정을 가능한 달래서 몸 밖으로 내보내고 싶다.

 비어 있지만 가득찬 멀리 있지만 내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성의 기법이 지금 생각하는 새로운 시의 모습이지만 자칫 너무 싱겁거나 이 사람 저 사람 손대는 어떤 도(道)의 느낌이 나면 그것은 내가 지향하는 방향은 아니다.

 역시 사람냄새가 나 삶의 현장이 감지되는 시가 나는 좋다. 읽으면 물컹거리는 것이 온몸에 느껴지는 시를 좋아했지만 그렇게 즉흥적으로 다가오는 시가 아니라도 서서히 바닥에서부터 느낌이 달아오르는 그런 맑고 깊은 시가 지금은 그립다.

 그러기 위해서 문을 열고 다시 문을 열고 나아가는 길의 모색이 필요할 것 같다. 사람의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자연 속으로 비어있으나 수시로 변하는 장소들을 멀리 바라보는 일은 역설적으로 그들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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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고 싶은 시

           - 문정희

세상의 시간이 2000년으로 넘어가고 있을 때 나는 고려와 조선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생이라는 특수 신분과 성의 영역에 갇혀 그녀들이 남긴 빼어난 시작품마저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조선의 여성시인들을 우리의 고전문학 속의 소중한 시인으로 인양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작업을 하는 동안 결국은 누구보다도 먼저 나 자신이 왜곡된 시간의 바위를 뚫고
나와 푸른 창공으로 인양되고 있음을 보았다. 최근 초고속 정보화 시대가 열리면서 툭하면 제기되었던 활자매체로서의 문학의 존립 여부나 시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구심도 깡그리 사라졌다. 결국 마음껏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일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 동안 나는 시를 쓸 때 그 내용과 형식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이 고민했었다. 어떤 명분으로도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을 서둘러 발표하는 것을 경계했었다. 물론 자유시를 제일 많이 썼지만 [아우내의 새]를 통하여 자유혼을 그리고 싶을 때는 가차없이 장시를 택했고, [도미]나 [나비의탄생] 등 설화를 통한 주제의 형상화에는 시극도 시도했었다. 대전엑스포 개막식 공연을 위한 주제의 형상화에는 시극도 시도했었다. 대전엑스포 개막식 공연을 위한 [구운몽]을 쓰며 창극에 대한 공부도 했었다. 내용면에서는 인간의 슬픔과 억제당한 자유와 침묵 그리고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 최근에는 문명비평적인 작품도 몇 편 썼었다. 앞으로 쓰고 싶은 작품이 많지만 어떤 작품이 태어날 것인지 나도 궁금해 죽겠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모습을 말할 수 없듯이 지금 심정이 그렇다. 다만 지금까지 쓰던 것과는 다른 주제와 형태를 쓰고 싶을 뿐이다. 바꾸고 변하고 왕창 멋지고 싶다.

 고백하자면 최근에 나는 한밤중에 혼자 펄펄 뛰고 좋아하는 일이 가끔 있다. 곤히 잠든 사람들을 모두 깨워 '나 득음했다'고 큰소리로 소리치고 싶은 것 말이다. 성급하게 우려해보았던 문학의 위기는 아마도 문학의 호기일지 모른다. 거품과 가짜와 미숙이 판치는 세상이니 진짜란 더욱 돋보이고 귀중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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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용기 있는 질(質)의 관리를 꿈꾸며 


예술 작품에 있어서 답습과 반복이란 있을 수 없다. 새로운 것이 아닌 것, 이미 길들여져 낯익은 것은 말장 무효인 것이다.
 
‘나의 이렇게 쓴다’라고 말할 만한 특별한 비법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가령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비법을 결코 나의 시작법으로 계속해서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단연코 다시 깨뜨리고 깨뜨려야 마땅한 것이다. 

 

 


기실 나는 나만의 시작법 대신 오히려 늘 의문과 회의를 갖고 있다. 그저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이 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 내가 취하고 있는 이 시어와 형식은 과연 적당하며 얼마나 독특하고 새로운가 하는 의문을 끝없이 제기해 보는 것이다. 

연전에 만난 친구인 조각가 캐롤 파커스 양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그녀의 모습은 여러 의미로 예술가로서의 한 상징이며 그녀가 남긴 수북한 파편은 화두처럼 난해하고 신선하게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벌써 이 년 전의 일이다. 캐롤은 폭설이 하얗게 내린 한국의 산야를 깁스를 한 다리를 절뚝이며 돌아다녔다. 

조각가인 그녀는 한국의 도자기를 배우기 위해 울브라이트의 기금을 받아 내한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조각에 새로운 영역을 첨가하기 위하여 한국의 백자 기법을 배우기로 한 것이다. 

일본을 제쳐두고 한국을 택한 것까지는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한국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유명한 경기도 일대의 도요지를 모두 헤맸지만 대강 겉모습만 보여줄 뿐 그 이상은 아무도 자기만의 비법이라고 선뜻 가르쳐 주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적어도 몇 백년 동안을 독특한 예술로서 전승되어 온 예술이기에 그녀가 기대하기로는 최소한의 것만이라도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재료나 기법상의 체계는커녕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도 이론적 규명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것이었다. 더구나 기가 막힌 것은 모두가 자기만의 비법이라고 신비 속에 묻어 둘 뿐 쉽게 공개하지 않으려는 데는 서양인인 그녀로서는 어떻게도 이해가 안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몇 달이 지나도록 스승은커녕 제대로 된 가마 한번 구경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날마다 눈쌓인 한국의 산야를 헤매다가 그만 미끄러져 다리에 깁스까지 한 것이었다. 

그녀는 한해를 꼬박 절뚝이며 고생 아닌 고행을 한 끝에 결국 백자의 감촉에다 서양식의 조형적 표현을 가한 독특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녀는 도자기에는 끝없는 사막이 펼쳐져있는가 하면 어떤 것에서는 흰옷 입은 성자가 멀리서 가물가물 걸어오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케롤 파커스양의 감동은 미국 문화원에서 열린 그녀의 전시장에서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떠나기 하루 전날, 자신의 작품을 한 점도 팔지 않고 버티던 그녀는 결국 단 한 점만을 남기고는 전부를 아주 깨끗이 깨뜨려버린 것이었다. 

너무나 놀라서 만류하는 친구들에게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에게는 언제나 용기 있는 질의 관리(Quality control)가 필요해!' 그녀가 떠난 후, 우리는 수북한 파편으로 남은 그녀의 작품들을 보면서 그녀가 이곳에서 얼마나 백자에 몰입했고,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가를 생각하고 조용히 전율했다. 

나는 다시 나의 시작법을 생각해 본다. 
나만의 비법이라고 하면서 오랫동안 답습과 반복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그런 작품을 전시장에 내놓고 관객에게 감탄을 강요하고 섣불리 값을 매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구나 나는 얼마나 용기있게 '쿠알리티 콘트롤'을 하고 있는가. 
시는 때로 영감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는 해도 결국은 언어 예술이다. 
그리고 언어란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호이다. 
그러므로 시작법도 세울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시작법에 따라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시는 나의 망루이다. 시를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시를 통하여 세상을 이해할 뿐이다. 그리고 시를 통하여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오늘도 나는 쓰고 또 쓴다. 그리고 버리고 또 버린다. 
그것은 나의 시작법이면서 아울러 내 존재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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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험적 시창작론 >>/ 최영철
                             
                                     - 제1장 -

 다른 모든 일도 그렇지만 시를 쓰는 데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나는 시를 잘 쓸 수 있다'정도로는 안되고 '나는 시를 잘 쓴다'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습작시절에는 자기 시의 어줍잖음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의 완벽함에 곧잘 절망한다. 그래도 자신감을 가지자. 안되면 매일 아침 '나는 정말 미치도록 시를 잘 쓰는 놈이야'하는 자기 최면을 반복해도 좋다. 그러나 자만심은 금물이다. 자신감은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만 필요한 강정제 같은 것이다. 일단 다 쓴 작품에는 일이 끝난 뒤 거시기가 스르르 풀이 죽듯이 기가 죽어 있어야 한다. 그것을 긍휼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다.

 출판 일을 하다 보면, 가끔 대학노트 몇 권 분량의 시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천재시인들이 있다. 하루에도 수십 편을 갈겨 쓰며 집에는 이만한 분량의 작품이 또 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떠벌린다. 이런 시인일수록 자기 시가 한국시사를 바꾸어 놓거나 출간만 하면 공전의 대히트를 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만이다. 자기 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흥에 겨워서 계속 써 갈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천재시인들에게는 약도 없다. 계속 천재로 착각하며 살도록 내버려두는 방법뿐이다. 그 천재시인 출판사 문을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아, 천재는 외로워.'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자신감은 없고 자만심만 있는 엉터리 시인인지 모른다. 아니 나는 아직 그런 알량한 자만심조차 없다. 쓰기 전이나 쓰고 나서나 내 재능에 대한 의심 때문에 주눅이 든다. 그러나 이런 의심조차도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기나 했을까.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계속 턱걸이하며 낙방의 쓴잔을 마시고 있을 때 가장 나를 괴롭힌 것이 '나는 도대체 시를 쓸 재주나 있는 놈인가?'하는 의문이었다. 그때마다 나의 자문자답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했다. 10년을 하면 사법고시라도 붙을 판인데 돈도 명예도 안 되는 시인 자격증 하나 못 따는 걸 보면 글렀구나 싶다가도, 사법고시에 되는 것보다 시인이 되고 싶었으니 이런 초지일관이면 뭐가 되도 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재능이란 말의 뜻을, 하고자 하는 일에 집착하는 능력이라고 새롭게 정의 해 버렸다. 즉, 재능은 그 분야의 특별한 재주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여받는 것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것 때문이라면 추위와 굶주림도 참을 수 있고 멸시와 외로움의 고통도 참을 수 있는 것, 그것 이외에는 세상 모든 것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것, 이런 경지가 바로 천부적인 재능이 부여된 경지라고 나는 믿기로 했다.

 그때는 그랬는데, 재능도 세월 따라 닳아 없어지는 모양이다. 지금은 그 믿음이 조금밖에 없다. 그 시절은 시 때문에 겪는 고통이 즐거웠는데 이제는 그 고통이 조금씩 고통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요즘 나는 반성하고 있다.

 


<요점정리>

1.자신의 재능을 추호도 의심해 본 일 없는 천재시인들은 이제
  부터 자신의 재능을 열심히 의심하라.

2.자신의 재능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나 같은 어중개비 시인들
  은 매일 아침마다 '나는 시를 너무 미치도록 잘 쓴다'는 최면
  을 걸어라. 그 최면이 통하지 않으면 계속 절망하라. 시 때문
  에 절망하는 한 당신은 누구보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시인
  이다. 

                       - 제2장 -
시 창작 강좌 같은 데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씨뿌릴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비애을 느낀다. 우선 내가 지독히도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내 체형이 숏다리이기 때문이고, 남에게 시를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할 만큼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더럽게 '시를 못 쓰기 때문이다. 되지도 않는 말을 한참 떠들다가 말문이 막힐 대는 수강생 중에 누가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린다.

 '야, 그만해라. 너는 뭐 짜다라 잘 쓰니.'
 그러나 나도 할말은 있다. '시는 배우는 게 아닙니다. 배워서 쓰는 시는 엉터립니다. 배워서 쓰는 시는 자기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대충 주워섬기고 나는 단에서 내려온다. 이것이 우둔한 강의를 은폐하는 비법이다.

 나는 순전히 혼자서 시를 썼다. 그 흔한 문예반도 백일장도 한번 해보지 않았다. 시 잘 쓰는 법에 대한 책을 읽은 적도 없다. 유치한 대로 써 나가다 보니 그런대로 최영철적인 언어와 최영철적인 어법이 자리를 잡았다. 남의 시의 장점을 흉내내고 고운 말을 달달 외우기라도 했다면 내 시가 지금처럼 험악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시 잘 써서 100점 받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 시는 몸 전체에서 우러나는 것을 받아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는 소설처럼  작업이 될 수 없다. 


 시를 잘 쓰려는 노력보다 무엇을 쓸 것인지에 대해 노력하는 게 좋다. 자기 몸 전체가, 생의 편편들이, 웅웅거리는 가슴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주목하는 게 좋다.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주로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좋다. 남들이 무수히 쏟아놓은 애찬과 탄식의 언어를 동어 반복할 것이 아니라 많고 많은 시인 중에 '내가 또 있어야  하는'이유를 빨리 찾는 게 좋다. 그것이 자기 것이며 자신이 가장 잘 서낼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주제에 어울리는 것이다. 고상하지도 않으면서 고상한 시를 쓰는 시인들이 우리나라에는 너무 많다.

<요점정리>
1.시는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몸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
  라. 그래도 시가 안되면 자기 몸에 이상이 있는 것.

2.시를 알기 전에 자신의 주제부터 알아라. 자기 주체가 성스러
  우면 성스러운 시를, 자기 주체가 상스러우면 상스러운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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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 위하여

 

(1)단어 하나가 떨어져 온다. 가령 한밤중 같은 때라든가 새벽 무렵 같은 때 나는 손을 벌려 그 단어를 받는다. 책상 한 귀퉁이에 늘 놓여져 있는 붉은 색 바구니에 나는 그것을 집어넣는다. 하긴 요즘은 그런 순간이 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순간은 말하자면 아주 재수가 좋을 때이다.

 그러니까 한때는 상당히 재수가 좋았다. 늘 단어가 공중에서 떨어졌고 나는 그것을 받느라 바빴었다. 내 바구니도 쉴새없이 자기의 등을 열고 그것들을 제 몸속에 집어넣느라고 애를 먹곤 했다.


 때로는 단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단어가 줄줄이 이어져 마치 하나의 작은 마당이 내려오는 것처럼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물론 아주 재수가 좋을 때이다.

 떨어져 내리는 것이 하나의 흐릿한 이미지만일 때도 있다. 어떤 동사라든가, 또는 어떤 명사도 아니며 어귀도 아닌 희미한 어떤 그림 같은 것, 그것은 아주 낯선 어떤 것일 때도 있고, 낮에 보아 두었던 어떤 상황의 변형된 그림이거나 또는 지난 어떤 꿈속의 흐린 그림이거나 또는 오래 전에 읽은 어떤 신문 같은 것의 얘기들 속에서 나의 공중으로 옮겨온 그런 것들이다.
 
 어느 날, 나는 나의 그 붉은 색 바구니의 뚜껑을 연다.
 
 단어 하나가 잡혀 온다.

 어귀 하나가, 또는 이미지 하나가 잡혀 온다.

 그것은 나의 원고지 위로 올라온다.

 이리저리 그것을 끌고 다닌다.

 항상 내 오른손의 능력이 보잘것없음에 툴툴대면서 또는 절망하면서, 
 
 그것들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또는 말하지 않으며 말할 때까지, 또 몇 개를 더 꺼내 온다. 그것들이 저희끼리 무슨 대화인가를 하도록 지켜본다.

 아, 말이 없는 말을 하여라, 너희 스스로 정하여라. 그림을 그려라, 너희 스스로, 너희 스스로.

(2)이런 방법도 있다. 사진 찍기다.

 나는 사진사이다. 사진사는 피사체가 되는 어떤 대상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객관적 거리의 감각을 주는 이 방법과 아주 내 마음에 든다. 사진만 잘 찍어 놓으면 사진 속의 인물들 대상들은 스스로 말하리라. 그리고 그것은 또 내가 할 수 있는 세상에의 참여의, 어쩌면 가장 비이기적인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매일 사진을 찍는다.
학교엘 가면서, 시장에 가면서, 강의하면서, 신문을 보면서, 밥을 먹으면서, 짧은 여행지에서, TV뉴스를 보면서 나는 가능한 한 그날 만난 모든 상황들, 인물들을 선명히 사진찍기를 바란다.

 여자들의 사진을 찍고, 대자보들과 흐린 날씨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찍고, 또는 리어카에 누워 있는 배추들과 상인을 찍고, 덤프트럭을 찍고, 도시의 거리에 엎드려 있는 운동화, 아기고무신, 죽은 고양이의 시체를 찍는다.

 사소한 모든 것들, 작은 것들을 찍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필름째로 내 단어 바구니의 한 켠에 넣어둔다.
 그것들의 원고지 위의 인화작업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지곤 한다.

 제일 먼저 인화하려고 점찍었던 것이 제일 나중에 인화되는 수도 있고, 개중에는 아직 손대지 않은 것 ― 아니 손대지 못한 것도 있다. 인화할 계기가 오지 않은 것이다. 더 좀 묵혀야 한다. 하긴 그러다 그것들의 빛이 아주 바래버릴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내 바구니에 단어와 함께 쌓인 현실의 필름들이 많으면 나는  괜히 희망에 쌓인다. 마약 같은 희망에 말이다.

 그래서 그 보이지 않는 필름들을 밤새도록 들여다보고만 있을 때도 많다. 그런 날은 단어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밤만 보내 버린다.

 버릇이다. 아, 참 쓸데없는 버릇이다.


(3) 그러고 보니 들여다 보기도 많이 했구나.

 아파트의 옥상에서 하루 종일 아파트의 뒷켠에 펼쳐져 있는 어느 대학교의 숲을 들여다보던 때가 생각난다. 그후에도 며칠 더 나는 숲을 들여다보러 옥상으로 올라가곤 했다.

 그때 시를 한편 쓰기는 했다. 동요같은 시를.
 그러나 들여다보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면 눈을 깜빡거린 다든가 하는 식의 우리는 그렇게 사물을 철저히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육안으로는 말이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곳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 때는 할 수 없다. 의식적으로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나쁜 상태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깊은 강물 같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다. 눈을 깜빡이지 않도록 애쓰면서, 나는 그 강물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다. 내 생각의 가지에 맞는 어귀라든가 단어 하나가 걸리기를 기다리면서.

 낚싯줄에 무엇인가 걸려 올라온다. 그러나 그것은 개펄의 흙덩이거나 라면 봉지거나 무슨 병조각 같은 것일 때가 많다. 좋은 게 걸려 올라오면 내 바구니에 담을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서서, 그 생각을 자꾸 말하고 싶어 안달한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나의 그림을 위하여 ― 그럴 때 나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림을 의식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 내가 써보고 싶은 생각을 하나하나 백지 위에 풀어 놓는다. 길을 그리고, 사람을 그리고 그림을 달아나지 않도록 책상 앞에 붙인다. 온힘을 다하여 그림에 매달린다. 용을 쓰며 턱걸이를 하는 학생처럼.
 


 이런 때 나는 정말 비참하다. 눈물이 흐른다. 그러면서 사전을 찾는다. 별로 성공한 기억은 없지만 비상탈출구 같은 것이 될 때는 있다. 단어를 만나는 것이다. 나는 단어와 껴안는다. 그리고 얼른 내 바구니에 집어넣는다.

 그러다 그것이 내가 그전에 많이 쓴 낯익은 단어임을 알아버리고 다시 슬픔에 빠지긴 하지만, 그래서 기껏 그린 그림이 내가 이미 많이 그렸던, 그래서 익숙해진, 상투화된 그림임을 알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밤은 행복하다.


 (4)그것이 어떤 단어들의 집합이거나 구절들의 집합이거나 서툰 필름이거나 그것들이 그래도 괜찮게 이어지도록 나는 끝없이 소리내어 읽는다. 단어들이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 가도록 나는 끝없이 중얼거린다.
 
 말하지 않으면 말할 때까지, 그것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종이 위에 설 때까지 내 바구니는 그럴 땐 열어 두어야 하리라. 소외감을 느끼는 단어는 스스로 바구니 속으로 다시 들어가리라. 

 그렇게 나는 오늘도 부질없는 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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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 강하고 깊고 단순하게

 

 제가 쓴 시 중에 「寫眞師」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아마 70년대 초에 썼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시는 제가 시를 인식하는 방법 모두를 보여 주고 있는 듯해서 여기 서두에서 
한번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처음엔 버릴 것부터
    잘라가면서
    나중에야 나무의 美學을 손질하는
    園丁의 
    剪枝作業처럼.

    시야에 비친 풍경 속에서 寫眞師는
    먼저
    버릴 것부터 생각한다.


    버리고 버리고 버리다가
    결코
    버릴 수 없는.

    그 一瞬 交感을 영상에 담으면
    나머지 공허한 虛像의 풍경들이
    울음 우는 
    카메라의 저 바깥 外界.


 바로 이런 시입니다.
사진사가 한 절묘한 영상의 순간에 한편 작품의 탄생을 위하여 그의 총체적 영감과 지혜를 바치듯이, 그리고 그 나머지 피사체 영상들을 모두 버리듯이, 제가 처음으로 한 작품과 만나는 순간은 역시 그렇게 절묘하게 다가오는 한순간일 수 밖에 없습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당신은 언제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되느냐는 질문을 하신다면, 그것은 제가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어느 현실적 체험의 한 순간이거나 또는 책이나 TV, 신문 등을 보다가 문득 만나게 되는 사물과의 간접적 만남의 경우이거나 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을 그런 순간에 어찌하여 당신은 감동하면서 그것이 시의 소재가 된다고 판단하느냐고 묻고 싶으시겠지요?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뭐라고 객관적일 수 있는 답을 드리기가 어려운 것이, 그런 순간에 대한 해석은 너무나도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관성의 배후랄까 또는 밑바탕에는 저의 개인적인 체험과 미적 감각, 사물에 대한 인식 체계, 심지어는 저의 성격까지도 작용할 것이 분명하므로 이런 개별성을 두고 뭐라고 더 이상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제 저는 한 작품의 탄생의 계기가 될 수도 있는 모티프Motif와 만나게 된 셈인데요. 이때 저는 대상(사물)이 뿜어내는 이미지 중에서 제가 작품으로서 다루고자 하는 어떤 주제를 생각해 내게 됩니다. 마치 어느 떠들썩하고 화려한 축제의 현장에 뛰어든 사진사가
축제의 전장면 중에서도 자신의 언어가 될 만한 장면에다 렌즈를 들이대고는 그 작품의 중심 주제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요?
 대체로 이런 극적인, 행복한 만남이 있을 경우 지체없이 작품을 써내려갔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저의 첫 시집 『우울한 샹송』이 만들어진 1969년 이전까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 대상과의 만남이 주었던 현란한 이미지와 몇 개의 관련된 표현들을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아 숙성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말하자면 한 편의 작품으로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보다 신중해졌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더욱 기능적으로 변모되었다고나 할까요, 어떻든 그때부터 제 마음 속에 떨어진 한 톨의 시의 씨앗은 한 편의 작품으로 태어나기까지 하루든 이틀이든 열흘이든, 아니면 아주 몇 달이든, 제가 원하는 모습의 시로 만들어지기까지 형태와 빛깔과 향기의 배합을 조종받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는 되도록 선명하게 작품의 형태를 드러내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모호한 것이 싫습니다. 저는 정확하지않은 상태가 두렵습니다. 저는 제가 감동받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제 작품이 때로는 정교하게 찍은 사진 같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표현했다는 표현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사진처럼 있는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사물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려면 시가 제일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명하게 작품의 형태를 드러내고 싶다는 표현은 시라는 농축된 형식 속에 최선의, 최대의 표현을 담고 싶다는 말입니다. 매우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작품의 운명이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될 때 갖는 한계의 자유를 매우 유효적절하게 통제해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저는 ‘선명한 이미지 표출’로 나타내고 싶습니다.
 저는 간결함이 주는 미학의 힘을 더러 목판화에서 찾곤 합니다. 나무를 재료로 하는 목판화는 다른 판화 기법에 비해 단순하면서도, 칼맛이 주는 선묘의 질감이 심장에 와 닿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 故 오윤이나 요즘의 이철수, 이상국 등이 보여주는 단순명료한 묘사 기법은 그것이 생략해 버린 다른 대상들까지도 떠올리게 만드는, 건강한 힘을 느끼게 해 줍니다. 굳이 화면에 가득차게 설명이 들어 있을 필요도 없고 복잡다단한 관념이 무겁게 들어서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표현이 단순하면서도 엄격할수록 더 크나큰 공명이 오는 것을 저는 시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선명한 시의 구조 속에 담기는 내용들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있겠지요. 묵은 향내가 번져야 할 그 내용이 설익고 떫고 비릿한 내음을 풍긴다면 곤란하겠지요. 표현되는 말과 내용이 충분히 자신의 것이 되도록 기다리면서 갈고 닦는 기간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물론 내용에 따라서는 단 한 시간만에 써질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요.
 한 편의 시를 이루고 난 후에도 이따금씩 보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고치는 일이 있음은 물론입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짜임새는 되어 있는지, 표현이 미숙한 부분은 없는지, 관념이 너무 노출되어 있어 튀지나 않는지, 묘사가 지나치게 평이하거나 상투적이어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미흡하지나 않는지. 이미지 묘사에 지나쳐버려 드라이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지, 더욱 생략해야 할 부분은 없는지 등등입니다.
 어쩌면 이런 과정 자체는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대부분 유사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시인마다 서로 다른 작품이 나오게 되는 것은 각 시인의 지적, 정서적, 체험적, 그리고 생득적 편차에서 오는 결과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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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선명한 이미지의 시를

                  - 노향림


 어느덧 한 세기의 벼랑을 건너  뛰었다. 너무 먼 길을 돌아나오다 갑자기 건너뛴 듯한 느낌이다.그 길로 누군가 나를 떼민 듯 험하고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철저한 차단된 그 길에서 나는 용케도 빠져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한 세기가 왔다고 놀라고 기뻐하기도 전에 언제나 누군가 나를 등 떠민 듯한 외길. 시인이 가야 할 그 소로(小路)에선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오로지 외길로 가는 그 길에서 자아와 부딪친다. 아무리 외로워도 나는 흔들리지 않고 그 길을 가련다.

 이미지를 통해서 바라본 나의 세계를 일 년에 단 몇 편의 시를 쓴다 해도 시의 본질에 다가가 확실하고 서늘한 시를 쓰리라. 푸르스름한 흰빛의 하늘에 투명한 햇빛같이 널어놓은 언어의 빨래들이 말라갈 때 나의 시는 빛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쨍쨍한 햇빛같은  시를 쓰기 위해선, 벼랑에서 느끼는 위기의식, 도저히 들어갈 수 없게만 느껴지는 막막한 공간, 그 미로가 내 시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생생하게 나의 사물이 살아 움직이며 제 역할을 다해줄 때내 긴 불면의 밤 끝엔 희미한 미소가 떠오를 것이다. 묘사시로서의 밑둥이 튼튼히 받혀질 것이다. 앞으로도 묘사시로 나아갈 것이다. 한 번도 그 성과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남과 비교해 보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일테지만 최소한 나의 시적 성과 운운해보지는 않겠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오로지 캄캄한 미로 해치듯 나의 사물을 찾아 한땀 수를 놓듯 가고 있을 것이다.

 이미지의 확실한 제시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근원적으로 느끼는 위기의식, 불행감, 쓸쓸함 등이 오히려 내겐 풍성한 시적 대지인 것이다. 때로 모성을 발휘해 해학과 유머 혹은 자연친화적인 시를 쓴다면 그 세계는 얼마나 풍성할 것인가. 나는 근본적으로 나의 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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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다고 의식하는 것만큼 시의 탄생을 방해하는 것이 또 있을까?
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


내게 굳이 시작법이 있다면 다음과 같다.


시적인 정황을 발견하여 심상이 발동하고, 이어서 타당한 논리가 떠올랐을 때 가장 먼저 내가 품는 생각은 '시를 쓰겠다'는 결의가 아니라 '시가 되겠군'하는 판단이다.
판단이 섰으면 일단 아무 형식이나 계획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태도로 다양한 에스키스를 충실하게 언어로 그려서 남겨 둔다.
그리고 나서 시간을 두고 차츰차츰 그 언어들을 매만지다가 어느 시점에 도달하여 그것을 읽는 것만으로 애초에 품었던 심상을 환기시킬 수 있는 정도가 되면 일시 중단한다.
여기까지가 1차 퇴고이다.
이 과정에서 시를 쓴다는 의식은 시의 탄생에 방해만 될 뿐이다.
1차 퇴고를 마친 시는 일단 세상에서 말하는 시의 요건들을 갖추고 있으므로 문예지에 발표하거나 시집을 묶어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는 1차 퇴고를 마친 그 시편 속의 언어들이 계속하여 내 영혼을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내가 애초에 겪었던 심상보다 한 차원 높은 심상을 겪게 해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내 손을 거쳐 태어난 시편은 모두 <내가 내일 죽으면 내일까지, 오십년 후에 죽으면 오십년 뒤까지> 퇴고의 숙명에 놓이게 된다.

 


1991년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면>이라는 제목으로 내 시 쓰는 과정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둔 적이 있다.

 

말라붙은 족제비의 썩은 꼬리같은 붓도 
숯검댕이와 잎사귀를 어설피 갈아 만든 물감도 
과학의 잔재주로 수십 번 태어난 도화지조차 없으나 
연필 하나 종이 뭉치 약간이면 나는 언제나 
거침없이 다채로운 언어를 쏟아 
상상해낼 수 있는 모든 의미를 긁어 모아 
때로는 고풍스러운 풍경화를 그려 
때로는 타인의 이해에 연연하지 않는 
구토나 배설 후에 오는 쾌감을 주는 
현미경에 비추이는 세균의 분열과도 비슷한 
숨막히도록 역겨운 일상에 저항하기 위한 
오직 나만의 세계인 추상화를 그려 
고고하여 늘상 외로운 음악에게 선사한다. 
음표 없이 그려지는 악보 위에 수를 놓는다. 
그림같은 노래들이 태어나거나 말거나 
현학적인 감상자들이 만족하거나 말거나
 
 

 나는 스물다섯살에 정립해 놓은 나의 시작법을 평생 고수하련다. 맙소사! 어설프게 무엇 좀 알았다고 '시를 쓴다'는 생각을 갖다니! 나는 결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나를 통해 태어나게 할 것이다. (2005년 3월 16일 새벽 유용선 적음)

시를 위한 덕담

 

                        유용선


어느 젊은 시인이 
문예지에 시를 하나 싣는데 
그쪽 사정 봐준답시고 
고료를 받지 않았다나 봐.


그랬더니 이번엔 
또 다른 어느 젊은 시인이 
너는 자존심도 없느냐 
타박을 놓았던 게지.


편당 3만원 때문에 
의좋았던 두 사람 쌈질을 하였는데 
고료 받아야 시 파는 놈이나 
고료 안 받고 시 내놓는 놈이나 
시 팔 놈 
시 팔 놈 

판 놈은 더 많이 팔고 
못 판 놈은 앞으로는 꼭 팔라고 
시 팔 놈 
시 팔 놈 
마주보며 덕담을 하더란다. 

[출처] [2009] 시를 위한 덕담|작성자 유용선

 

 

 

[출처] [創] 나의 詩作法|작성자 유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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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 장르적인 경계를 깨는 문사 - 조광명 2016-11-11 0 3567
1808 김철 / 장춘식 2016-11-11 0 3899
1807 "조양천"과 김조규 2016-11-11 0 3422
1806 "국어 교과서 편찬"과 김조규시인 2016-11-11 0 3551
1805 "만주"와 유치환 2016-11-11 0 3576
1804 {자료} - "두루미 시인" - 리상각 2016-11-11 0 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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