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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교과서 편찬"과 김조규시인
2016년 11월 11일 22시 48분  조회:3911  추천:0  작성자: 죽림
 

김조규 시작품의 원전비평

 

  1. 김조규 약력

 

  김조규는 1914년 1월 20일 평남 德川郡 太極面 豊田里(나중엔 태극면 전역이 寧遠郡으로 편입 변경됨)에서 金明德목사의 7남 5녀 중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자란 그는 향리에서 소학교를 나오자 평고보(平高普)를 다니던 맏형 東奎를 따라 평양에 나왔다. 그리고 숭실중학을 거쳐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1937년에 졸업했다.

  김조규는 숭전을 나오자 일본 유학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낙인이 찍혀있어서 도강증(渡江證)을 얻을 수 없었다고 한다.

  김조규는 전문학교 시절에 거의 해마다 「메이 데이」나 광주학생사건 기념일을 전후해서 평양 경찰서에 1주일간씩 예비 검속되었었다. 일본 경찰에서는 소위 불온학생으로 간주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장로교 목사이며, 3.1운동에 연루되어 한때 옥살이를 한 아버지의 전력(前歷)도 문제였었고, 더욱이 호적등본을 뗄 때마다 나타나는 형제들의 이름 「東○朝定鮮興復安旺平泰靈能」을 보고 도강증을 발급하는 경찰서에서 민족주의 불온사상이 호적등본상에서도 나타나 요시찰 가족이란 딱지를 붙여 놓았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김조규는 성진에 있는 普新學校(카나다 선교부서 설립)에 1937년 봄에 교사로 부임, 평양을 떠났고, 그 후 다시 일경의 감시의 눈을 피하여 1939년 만주 간도(間島)로 건너가 조양천(朝陽川)농업 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했다. 그 무렵, 1941년인가 김조규의 나이 29세에 24세인 金賢淑과 결혼했고 다시 신경(新京-지금의 長春)에 있는 만선일보(滿鮮日報) 편집국에서 국장에 시인 박팔양, 소설가 安壽吉 등과 함께 편집기자 생활을 했다.

  1945년 해방되기 3개월 전에 만주에서 돌아와 평양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조선어 교과서 편찬이 시급하다고 생각한 김조규는 소․중․고등학교 교과서 편찬 작업에 뛰어들었고, 다시 <조선신문> 편집국, <소비에트신보> 편집국에서 편집일을 보다가 예술대학 교수가 되었다. 6.25동란이 일어나자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소환되어 소위 인민군의 남진을 따라 경북 영천지구 전투까지 종군했다. 이 무렵에 쓴 작품들이 시집 《이 사람들 속에서》에 수록된 듯하다. 인천 상륙을 전후해서 급거 평양으로 돌아갔으나 유엔군의 북진으로 고향인 덕천을 거쳐 압록강변 혜산진까지 간 것으로 안다.

  김조규의 문학적 편력은 해방후에 평양에만 머물러 있었다는데서 그 실상을 자세하게 알기 어렵다. 그는 산문시 「猫」와 「午後」, 「疲困한 風俗」, 「海岸村의 記憶」, 「孤獨」 등의 수작을 발표했는데 1937년 崔載瑞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지식인의 자의식을 내면적인 세계로부터 관찰한 수법을 주로 구사한 심리주의적 경향의 시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거의 같은 시기에 성진에서 교편생활을 할 때 쉬르 리얼리즘의 동인지 「斷層」과 「맥(貘)」의 멤버로서 작품 발표를 해왔다.

  그는 45년 해방이 되자 국어 교과서 편찬에 착수하면서 한편 그해 10월경에 문화운동단체로 崔明翊(소설가) 兪恒林(소설가) 文學洙(화가) 金承久(희곡작가) 등과 함께 평양예술문화협회(회장 최명익)를 결성했다. 그리고 김조규가 중심이 되어 《관서시인집》을 그 이듬해인 46년 1월경에 발행했는데 바로 여기에 「現代修身」 등5편의 시가 실려 있다. 당시를 시인 이활(李活)씨는 회고하기를 “쉬르 리얼리즘의 대표적 작품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관서시인집》은 공산주의자들의 비판대상이 되었다. 공산주의 문학평론가들에 의하여 ������쉬르 리얼리즘의 준동을 봉쇄하자������라는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관서시인집》에 수편의 시를 수록했던 黃順元은 그 뒤에 월남했고 김조규와 몇 사람은 자아비판을 강요받아 이를 받아들임으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2월에 평양지구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위원장 김사량)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그리고 당국에 의해 평양예술문화협회가 강제 해산되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병합되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산하의 평남문학동맹으로 탈바꿈되었다. 문예총의 위원장에 카프 출신의 韓雪野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 무렵, 김조규도 최명익도 그리고 유항림 모두 닭 쫓던 강아지처럼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허망한 나날을 보낸 듯하다. 그리고 일체 침묵 속에서 관망해 보자는 생각인지 서로 조심하며 왕래조차 삼가는 듯했다. 그는 이때가 가장 마음의 갈등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김조규에게는 운명의 날이 왔다. 46년 초에 국어교과서 편찬사무실에서 일보고 있던 때였다. 소련군 장교가 탄 지프가 나타나서 그를 강제로 동승시켜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곳은 평양역전에 있는 평양매일신문 사옥이었다. 사정인즉, 소련군 사령부에서 기관지를 발행할 터이니, 편집 일을 맡아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택(적산가옥)과 굉장히 후한 월급을 약속하면서 회유했다. 편집국장엔 소련군 소좌인가 한 林河라고 하는 희곡을 쓴다는 사람이었다.

  김조규는 평양의 중심가인 대중극장 옆에 있는 연화리 1백번지의 적산가옥으로 이사했다. 국어교과서 편찬에서 손을 떼고 <조선신문> 편집국에서 일하게 됐다.

  김조규는 사실 이 때부터 정치적 실세인 소련 출신의 문학인등의 비호를 받으면서 점차 사회주의 사회에 적응해갔고, 사상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한다.

  趙基天과 김조규는 특별한 사이였다. 조기천은 소련군 장교로서 점령군의 위세를 갖고 평양에 들어왔다. 그는 소련서 문학을 전공하고 시를 쓴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북쪽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자리잡게된 것은 김조규와의 관계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말의 문학적 표현 능력을 가지지 못한 조기천은 소련의 시인 마야꼽스키나 이사꼽스키의 박진감과 격조 높은 시풍을 본받아 그것을 우리말로 표기했을 때 초기에는 너무나 서투르고 보잘것없었던 것 같다. 조기천은 조선신문사에 있는 김조규에게 시 원고를 가지고 와서 추고를 당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조규는 조기천의 시 초고를 거의 대부분 개작하다시피 우리말로 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조선신문>과 <로동신문> 등에 발표해 왔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인 「두만강」 「을밀대의 노래」 「네거리에서」 그리고 1947년에 발표된 그 유명한 장편서사시 「백두산」 등은 김조규의 추고를 거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백두산」은 김일성의 반일투쟁 내용을 주제로 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조기천은 일약 북쪽의 최고의 시인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 때문에 북한 권력의 핵심 인물들인 소련 출신 인사들의 비호를 받게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련 출신의 평론가 鄭律, 희곡작가 林河, 시인 조기천 등등의 도움으로 성분에 있어서 지주 출신이며 장로교 목사의 아들인 그가 공산주의 사회에서나마 살아 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월북한 이태준도 《소련기행》, 중편소설 《농토》, 단편 《먼지》 등 주옥 같은 작품을 썼으나 평론가 안함광, 한효 등에게 ������소시민적 부르조아 근성에서 나온 사소설������이라고 무섭게 매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소련 출신의 시인, 작가군의 비호속에서 면면히 그 자리를 지켜간 것으로 안다.

  1947년 12월에 김조규시집 《東方》이 출판되었는데 제1부는 「歷史의 再建」 제2부는 「大地의 抒情」으로 나누어 있었다. 당시 평론가의 한 사람이 비평하기를 ������대지의 서정과 같은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 나약한 소시민적 형식주의 잔재를 버리고 「역사의 재건」으로 나가는 사상 개변이 이 시인에게 절실히 필요하다������는 요지의 비평을 가한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1948년인가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소련군사령부 기관지인 <조선신문>은 폐간되고 그 대신 타블로이드판 20면 쯤되는 주간 신문 <소비에트 신보>에서 계속 편집을 보다가 예술대학교수로 옮겨간 후 6.25까지는 대학교수로서 머물러 있었다. 이때 그와 교분이 두텁고, 술좌석을 같이한 인사들 중에 이태준, 양명문(당시 예술대교수), 길진섭(서양화가), 김정수(조각사), 박화순(중앙통신주필) 등이었고, 이태준과의 각별한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 6.25종군이후 평양으로 돌아와서 1952년부터 수년간 <조선문학>과 <문학예술>의 책임 주필을 했고, 그 무렵 중국과 오스트리아에 국제회의 대표로서 참석한 바도 있다. 이태준이 1956년 숙청될 때 함께 숙청되어 이태준은 흥남비료공장 벽보(대자보) 편집장으로 쫓겨갔고 김조규는 양강도 혜산진 벽지중학교 교사로 좌천되면서 60년까지 집필 금지령속에서 지냈다는 후문을 들었다. 그 후 1963년경부터 문화대학,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역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0년에 집필 금지령이 해제되어 창작활동이 허용되었으며, 혜산진 창작실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조선문학> 등에 때때로 작품을 발표하고 후배 양성을 해왔다. 시집 《東方》(1947, 조선신문사 발행), 《이 사람들속에서》(1951.발행), 《전선》, 《파초》, 《김조규 시선집》(1960. 조선작가 동맹 출판사) 등과 동시집 《아이들이 바닷가에 모여 든다》(1960. 아동도서 출판사 발행), 종군수기 《그는 살아 있다》, 가극 《푸른 소나무》, 평론집 《시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낸 듯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으로는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없다.

 

  2. ������金朝奎詩集������에 대하여

 

  소재영(蘇在英)의 서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고인 육필로 편집된 김조규시집 〈暗夜行路〉를 그대로 세상에 내어놓지 못하고, 여기 〈金朝奎詩集〉에 가려 뽑은 작품들은 해방 이전의 작품들로 한정하였으며 일차적으로 김태규시인의 정리작업을 거쳐 이를 바탕으로 권영진교수와 신종호강사가 편집과 교정작업까지를 맡아 수고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두 가지 사실이다. 즉 여기 편찬한 김조규의 시작품들에는 “고인 육필로 편집된 김조규시집 〈暗夜行路〉”의 내용들이 포함되며 그러니까 시집에서 원 발표지가 명기되지 않은 것은 시인의 육필 원고였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한 가지 사실은,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발간된 〈金朝奎詩集〉은 시인 김조규의 동생 김태규시인의 일차적 정리작업을 거쳐 권영진교수와 신종호강사의 편집, 교정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3. 원전과 〈金朝奎詩集〉의 관계

 

  전부는 아니지만 필자가 김조규 시작품의 원전을 확인한 43편의 작품과 현재 한국에서 간행된 〈金朝奎詩集〉의 해당 작품들을 비교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원전이 1회만 발표된 작품의 경우, 시집에서는 기본적으로 원전의 내용을 사용하되 표기법과 띄어쓰기 등에서만 현대의 문법 규범에 따라 수정하였다. 그리고 일부 행, 연 구분이 바뀐 것들이 있으나 그것도 당시 신문 지상에 발표된 작품 중 활자 배판의 원인으로 행, 연 구분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부분만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東光》30호. 1932.1.

������金朝奎詩集������ 숭실대학교 출판부,1996.8

[詩選外]붉은해가 나래를펼때

  ―濃霧속에보내는노래―崇實中學四年 金朝奎

 

미끈미끈한안개가 누리를 덮은아츰에

터질듯한 가슴을 아츰안개속에 풀어헤치고

붉은火焰이 오르는듯한 눈瞳子를 하날로向하야

핏줄이 서리여 피덩이가툭툭 튀여나오도록

나는 힘찬노래를 이겨레의 잠든生命을 向하야 부르나니

친구여 노래와함께 鍵盤에손구락을 눌러라

 

안개끼인 오늘아츰 나의聲帶에서 떨치는노래는

屍體를 옴기는者의 부르는구슬픈 輓歌가아니며

오늘아츰 이겨레의 잠든生命을 向하야 부르는 노래는

내음새나는 頹廢詩人이 부르는 데까단의 노래가아니다.

이는 가슴속에서 깊이깊이 끌어나오는 우렁찬 ××의노래

鎔鑛爐붉은 쇠물같이 뜨겁고도 씩씩한웨침이니

친구여 그대들도 이불을박차고 沈黙을깨치리라

  ◇

靈氣를잃은 눈瞳子와같이 몽농한 이아츰에

濃霧속으로 보내는 이노래는

비록 伴奏없는 외마디 소리가 흘러나와도

구름장너머로 남모르게 먼동이틀때에는

사나운 즘생의 發惡같은 싸이렌이 이를伴奏하리니―

오늘아츰 부르는노래는 여름밤 모기소리같이 가느다란소리가 흘러나와도

東녁하늘에 붉은해가 나래를 펼때에는

濃霧속에서니러날 아우성소리가 이와合唱하리니

친구여 고개를 들고이러나 拍子와마추워 노래를 불러라

 

 

 

  붉은 해가 나래를 펼 때

      ―濃霧속에 보내는 노래―

 

미끈미끈한 안개가 누리를 덮은 아침에

터질듯한 가슴을 아침 안개 속에 풀어 헤치고

붉은 火焰이 오르는 듯한 눈瞳子를 하늘로 向하여

핏줄이 서리어 핏덩이가 툭툭 튀어 나오도록

나는 힘찬 노래를 이 겨레의 잠든 生命을 向하여 부르나니

친구여 노래와 함께 鍵盤에 손가락을 눌러라.

 

안개끼인 오늘 아침 나의 聲帶에서 떨치는 노래는

屍體를 옮기는 者의 부르는 구슬픈 輓歌가 아니며

오늘 아침 이 겨레의 잠든 生命을 向하여 부르는 노래는

내음새나는 頹廢詩人이 부르는 데카당의 노래가 아니다.

이는 가슴속에서 깊이깊이 끓어 나오는 우렁찬 ××의 노래

鎔鑛爐 붉은 쇳물 같이 뜨겁고도 씩씩한 외침이니

친구여 그대들도 이불을 박차고 沈黙을 깨치리라

 

靈氣를 잃은 눈瞳子와 같이 몽롱한 이 아침에

濃霧 속으로 보내는 이 노래는

비록 伴奏없는 외마디 소리가 흘러나와도

구름장 너머로 남모르게 먼동이 틀 때에는

사나운 짐승의 發惡 같은 싸이렌이 이를 伴奏하리니―

오늘 아침 부르는 노래는 여름밤 모기소리 같이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와도

 

東녘 하늘에 붉은 해가 나래를 펼 때에는

濃霧속에서 일어날 아우성 소리가 이와 合唱하리니

친구여 고개를 들고 일어나 拍子와 맞추어 노래를 불러라.

 

표기법, 띄어쓰기 차이 외에 원작품의 마지막 연을 두 연으로 나눈 차이를 보임.

 

  보는 바와 같이 표기법, 띄어쓰기에서는 현대의 규범에 따라 많이 수정했다. 이는 현재 통상적으로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음, 연 구분에서의 수정은 특별한 의미가 없는 듯하다. 오히려 필자의 견해로는 원문 그대로 두어도 무방할 것 같다.

  이에 비하면 원전이 2회 이상 발표된 경우에는 선택할 때 얼마간의 고민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 이 경우에 속하는 작품 3편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도록 하자.

《新人文學》1935.04

〈朝鮮中央日報〉1935.6.19

 

  街路樹

 

三月

지금 街路樹의 乳房이 보-햐케 보푸러올은다

  ---○---

街路樹야

네가 머-ㄴ 湖水가 플은언덕에 그대로 자랐든들

물속에 잠긴 네머리채를 귀여운 魚族들이 빛겨주었으리라

네가 幽久한 森林---깊은 산속에서 마음대로 컷든들 黃金빛 꾀꼬리와 나어린 山새들이 네靑春을 노래하였으리라

때로는 암사슴들의 惡意없은 히롱도 있고,

  ---○---

그렇나 街路樹야

지튼黃昏의 悠久한 瞑想, 그것도 지금은 하나 아득한 追憶이 않이냐

山中을 떠나 길거리에서 떨기 여러해---

自動車의 「싸이렌」에 五色빛 네젊은꿈은 깨어젔고

掃除夫의 「하사미」에 네풀은 마음의 날개는 꺾이웠거니

街路樹야 文明은 너를 하나 無脈한 畸形兒로 만들었고나

  ---○---

드높은 「삘딩」의 抑壓에 네어린 넋은 얼마나 떨었니

車夫의 챗직에 네 보드런 살결은 얼마나 찢어젔니

맑은 大空이 그리워 울창한 密林이 그리워,

아하 시냇물과 山토끼와 微風이 그리워

街路樹야 濁한 저자 네거리에서 약한 네마음은 얼마나 울었니

  ---○---

街路樹 아아 戰慄하는 내마음아

(人間은 너의 畸形않인 畸形을 좋와하드라)

三月---屋上時計의 時針이 조은다

마슬에는 버들피리소리 넘처 흘으렸만

너는 오늘도 文明의 濁音속에서 떨고섰고나

  ―昭和十年, 3,

 

 

 

 

 

 

 

 

  街路樹

 

찬별이 흘으는 都會의 밤하늘

매서운 긔운이「데파-트」陳列窓에 서리운다

  ---○---

街路樹야

네가 湖水ㅅ가 풀은언덕에 그대로 자랏든들 湖面에 어리운 네모양이 얼마나 아름다웟겟니 네가 기픈森林ㅅ속에서 마음대로 것든들

귀여운 山ㅅ새들이 네품속에 깃들이지 안헛겟니

풀벌레는 네靑春을 노래하고, 微風은 네 머리채를 쓰다듬고,

때로는 사스미들이 네그늘 미테서 작란치고---

  ---○---

그러나 이寂寞한 친구야

지튼黃昏에 찻저드는 깃새---그것도 지금은 하나 아득한 옛追憶이 아니냐

山中을 떠나 길거리에서 울기여러해---

自動車의 警笛에 네아름다운 꿈은 깨어젓고

牛車의채직에 네보드런 皮膚는 傷處를 바덧거니

街路樹야 都市文明은 너를 하나 無한 畸形兒로 만드럿고나

  ---○---

左右「삘띵」의 抑壓에 네어린넉슨 긔 못폇지

道路掃除夫의 「하사미」에 네마음의 풀은날개는무참이도 꺾이웟지

맑은 大空이 그리워, 울창한 수풀이 그리워, 아하 시냇물과 꾀꼬리와 비둘기와 山토끼와 杜鵑이와 부헝이와 솟족새가 그리워

街路樹야 濁한 저자네거리에서는 너는 얼마나 울엇니

  ---○---

街路樹---아아 네거리에 홀로선 내마음아

(人間은 너의 다스린 畸形을 좋와하드라)

밤---찬기운이 틈새기마다 스며든다

文明의 輝煌한 빗갈은 네에게 순간의 安息조차 안주누나

  ---○---

街路樹야……

너는 언제나 悠久한 原始林의 靜寂을 안어보겟니

너는 언제나 고요한 山中의瞑想을 불러보겠니 子正---塔上時計의 時針이 업서젓다

「네온」빗 네그림자는 한층더 눈물겹구---

  ―一九三五年 街路樹詩篇―

  街路樹

 

찬 별이 흐르는 都會의 밤 하늘

매서운 기운이 데파트 陳列窓에 서리 운다

 

街路樹야

네가 湖水ㅅ가 푸른 언덕에 그대로 자랐던들 湖面에 어리운 네 모양이 얼마나 아름다웠겠니

네가 깊은 森林 속에서 마음대로 컸던들 귀여운 山새들이 네 품 속에 깃들이지 않았겠니

풀벌레는 네 靑春을 노래하고, 微風은 네 머리채를 쓰다듬고,

때로는 사슴들이 네 그늘 밑에서 장난치고……

 

그러나 이 寂寞한 친구야

짙은 黃昏에 찾아드는 깃새…… 그것도 지금은 하나 아득한 옛 追憶이 아니냐

山中을 떠나 길거리에서 울기 여러 해……

自動車의 警笛에 네 아름다운 꿈은 깨어졌고

牛車의 채찍에 네 보드런 皮膚는 傷處를 받았거니

街路樹야 都市文明은 너를 하나 無詠한 畸形兒로 만들었구나

 

左右 빌딩의 抑壓에 네 어린 넋은 기를 못폈지

道路 淸掃夫의 하사미에 네 마음의 푸른 날개는 무참히도 꺾이었지

맑은 大空이 그리워, 울창한 수풀이 그리워,

아하 시냇물과 꾀꼬리와 비둘기와 山토끼와 杜鵑이와 부엉이와 소쩍새가 그리워

街路樹야 濁한 저자 네거리에서는 너는 얼마나 울었니

 

街路樹……아아 네거리에 홀로 선 내 마음아

(人間은 너의 다스린 畸形을 좋아하더라)

밤…… 찬 기운이 틈 새기마다 스며든다

文明의 輝煌한 빛깔은 너에게 순간의 安息조차 안 주누나

 

街路樹야……

너는 언제나 悠久한 原始林의 靜寂을 안아보겠니

너는 언제나 고요한 山中의 瞑想을 불러보겠니

子正……塔上 時計의 時針이 없어졌다

네온 빛 네 그림자는 한층 더 눈물겹구나……

  ―1935. 街路樹詩篇―

 

 

《朝光》63호 1941.1

������在滿朝鮮詩人集������ 1943.

 

  延吉驛 가는 길

 

벌판우에는

갈잎도 없다. 高粱도 없다. 아무도 없다..

 

朔風에 너울대는 후죽은한 衣裝이여

 

俳優들의 무어-ㄴ한 그림자 사러지는 적은 뒤ㅅ扉口

大題 「偉大한人生劇」의 華麗한 看板이

또 내일을위하야 敬虔히 搬入되다.

 

鐘樓 넘어로 하늘이 묺어져

黃昏은 싸늘하단다.

바람이 외롭단다.

 

머얼리 停車場에선 汽笛이 울었는데

나는 어데로 가야하노?

 

호오 車는 떠났어도 좋으니

驛馬車야 나를 停車場으로 실어다 다고

 

바람이 유달리 찬 이저녁

머언 포풀라길을 馬車우에 홀로

 

나는 외롭지 않으련다. 조금도 외롭지 않으련다.

  (庚辰十一月)

  延吉驛가는길

 

벌판우에는

갈잎도 없다 高粱도 없다 아무도 없다.

鐘樓넘어로 한울이 묺어저

黃昏은 싸늘하단다.

바람이 외롭단다.

머얼리 停車場에선 汽笛이 울었는데 나는 어데로 가야하노!

 

호오 車는 떠났어도 좋으니

驛馬車야 나를 停車場으로 실어다다고

바람이 유달리 찬 이저녁

머언 포풀라길을 馬車우에 홀로.

 

나는 외롭지 않으련다.

조곰도 외롭지 않으이다.

 

 

 

 

 

 

 

 

 

  延吉驛 가는 길

 

벌판 위에는

갈잎도 없다. 高粱도 없다. 아무도없다.

 

鐘樓 너머로 하늘이 무너져

黃昏은 싸늘하단다.

바람이 외롭단다.

 

머얼리 停車場에선 汽笛이 울었는데

나는 어데로 가야 하노?

 

호오 車는 떠났어도 좋으니

驛馬車야 나를 停車場으로 실어다 다고

 

바람이 유달리 찬 이 저녁

머언 포풀라 길을 馬車 위에 홀로.

 

나는 외롭지 않으련다.

조금도 외롭지 않으련다.

  -庚辰 11月

 

 

 

 

 

 

 

 

 

 

 

 

 

������在滿朝鮮詩人集������1941.간도藝文堂

������滿洲詩人集������ 1941. 길림제1협화회

 

  胡弓

 

胡弓

어두운 늬의들窓과 함께 영슬프다 山 하나 없다 둘러보아야 기인地平線 슬픈葬列처럼 黃昏이 흐느낀다.

저녁이 되여도 눈을 못뜨는 이마음의 들窓과

胡弓의 줄만 골으는 暝目한 이 마음의 思想과

胡弓

아픈 傳說의 마디 마디 불상한 曲調

기집애야 웨 燈盞을 고일줄 몰으느뇨?

늬노래 뭇고 어둠이 점점 걸어오는 데 오호

胡弓 어두운 들窓을 그리는 記憶보다도

저녁이면 燈불을 받드는 風俗을 배워야 한다.

어머니의 가장노래란다

일어버린 南方에의 鄕愁란다

밤새 늣길려느뇨?胡弓

(저기 山으로 가거라 바다로 黃河로 나려라)

어두운 늬의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胡弓

 

어두운 늬의들 窓과함 영 슬프다.

山하나 업다 들어보아야 기인 地平線

슬픈 葬列처럼 黃昏이 흐느다.

저녁이 되어도 눈을 못는 이마을의 들窓과

胡弓의 줄만 골으는 暝目한 이마을의思想과

胡弓

아픈 傳說의 마디 마디 哀然한 曲調

기집애야 웨 燈盞을 고일줄 몰르느뇨?

늬노래 듯고 어둠이 점점 걸어오는데 오호 胡弓

어두운 들窓을 그리는 記憶보다도

저녁이면 燈불을 밧드는 風俗을 배워야 한다.

������������어머니의 자장 노래란다.

������������일허버린 南方에의 鄕愁란다.

밤새 늣길려 느뇨? 胡弓

(저기山으로 가거라 바다로 나려라 黃河로흘너라)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 영 슬프다.

      庚 辰 三 月

 

 

 

  胡弓

 

胡弓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山 하나 없다 둘러보아야 기인 地平線

슬픈 葬列처럼 黃昏이 흐느낀다.

저녁이 되어도 눈을 못 뜨는 이 마을의 들窓과

胡弓의 줄만 고르는 暝目한 이 마을의 思想과

胡弓

아픈 傳說의 마디 마디 哀然한 曲調

 

기집애야 왜 燈盞을 고일 줄 모르느뇨?

늬 노래 듣고 어둠이 점점 걸어오는데 오호

胡弓 어두운 들窓을 그리는 記憶보다도

저녁이면 燈불을 받드는 風俗을 배워야 한다.

…어머니의 자장 노래란다.

…잃어버린 南方에의 鄕愁란다.

밤새 느끼려느뇨? 胡弓

(저기 山으로 가거라 바다로 나려라 黃河로 흘너라)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庚辰 3月―

 

 

 

 

 

  1) 街路樹:

  ������新人文學������이 잡지이고 ������朝鮮中央日報������가 신문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朝鮮中央日報������의 것이 나중 발표된 것이 분명한 듯하며, 작품 기본적 주제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나 시구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탤릭으로 표시한 부분이 변화된 시구인데, ������신인문학������의 세 번째 연의 일부 내용을 마지막 연에 옮겨오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구가 들어서는 등 불어난 시구와 내용도 상당히 많다. 보다 세련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따라서 ������김조규시집������에서 ������조선중앙일보������의 것을 완성본으로 한 것은 정확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新人文學������ 것(이하 ①로 표시)의 첫 연은 “三月/지금 街路樹의 乳房이 보-햐케 보푸러올은다”로 되어있는데, ������朝鮮中央日報������의 것(이하 ②로 표시)은 “찬별이 흘으는 都會의 밤하늘/매서운 긔운이「데파-트」陳列窓에 서리운다”로 완전히 다른 시구로 되어있다. ①이 엽기적이고 애매 모호한 표현인데 비해 ②는 차고 처량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제2연에서는 ②의 제2행에서 “머-ㄴ”이 탈락되었으나 특별한 의미는 없어 보인다. 제2연의 다음 부분 시행들은 원래의 이미지들을 기본적으로 사용하면서도(상당 정도 첨삭이 있다) 반문구를 2구 사용하여 보다 강한 느낌을 준다.

  제3연에서는 원래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으나 “無脈”이 “無詠”으로 오식되었는데 시집에서는 그 오식을 그대로 써서 아쉬움을 남긴다. 제4연도 비슷한 상황인데 원작의 제3연의 제5행을 옮겨오고 원작 제4연의 제2행은 ②의 제3연의 제5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원작의 제5연을 ②에서는 내용을 첨가하여 2연으로 나누었다.

  이 밖에도 어휘나 표현 면에서 바뀐 것이 상당 정도 보이며 이런 참가되었거나 바뀐 표현이나 시행으로 하여 ②는 ①보다 강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원작의 기본적인 주제와 이미지들을 살리면서 많은 첨삭을 거쳐 의미가 한결 뚜렷해지고 강해졌다 하겠다. 따라서 시집에서 ②를 완성판으로 선택한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고 보여진다.

 

  2) 延吉驛 가는 길:

  ������在滿朝鮮詩人集������의 것이 나중 것인 듯 ������朝光������의 것보다 정제되었다. 완성본에서는 행 구분을 ������朝光������의 것을 따랐고 1연과 2연의 각 한 행씩을 ������朝光������의 것을 따랐다. 시인 본인에 의해 원고가 정리된 적이 있다는 김태규 시인의 증언을 참조해보면 혹 시인 본인에 의해 수정된 것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시인의 새로운 창작이라 볼 수가 있겠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在滿朝鮮詩人集������의 것을 그대로 완성본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조광������ 게재분에서 이탤릭으로 표시한 부분은 ������在滿朝鮮詩人集������이나 시집에서 모두 삭제된 내용들이다.

 

  3) 胡弓:

  세 텍스트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마을”과 “마음”인데 작품의 전반적 정서의 흐름으로 보아 “마음”이 더 적합한 것 같은데 완성본에서는 ������滿洲詩人集������의 “마을”을 따라 아쉽다. 그리고 완성본에서는 다른 두 게재본은 단연으로 되어있는데 비해 완성본에서는 2연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이런 연 구분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밖에 표현 면에서 몇 곳 수정된 것이 발견되지만 큰 차이는 없다.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총체적으로 보아 ������金朝奎詩集������을 완성본으로 보아도 대과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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