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자학과 혹사에 거는 기대
전성호
1
“나는 대체로 나를 늘 깔보고 기시하고 또 압제한다. 무한정 자학(自虐)에 비근한 혹사로 아픔의 못에 몰아붙인다. 미궁 같은 수렁에 빠뜨려놓고 구세주도 자신이고 장본인도 스스로임에 대견스럽다. 대개 이런 이중시련속에 나의 프로필이 정면으로 등신상에 조합된다.”
이것은 지금 한창 우리 문단의 중견문인으로, 문학활동가로 자리를 다져가고있는 한 사람인 정호원선생의 말이다. 글욕심도 많아 1978년 《연변문예》 10월호에 처녀작으로 시작품을 발표하여서부터 수필, 소설, 희곡, 민담, 평론, 가사 등 여러 쟝르를 다루었고 게다가 아동문학에까지 손을 뻗치다보니 지금까지 1000여편(수)에 달하는 작품을 발표하고도 성차지 않아 계속 자기를 혹사하고있는 정호원선생이다.
선생은 자기가 이처럼 여러가지 쟝르에 손을 뻗쳤기에 “평생을 한우물만 판 사람에 비해 아직 히트템포가 더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자기가 이렇게 다양한 쟝르를 자유자재로 다뤄온것을 자기의 하나의 우세로 점찍는다. 금후의 힘찬 도약을 위한 밑거름으로 되리라는 확신일것이다.
정호원선생의 스스로의 이 확신을 필자는 믿는다. 그것도 그럴것이 선생은 한 보통농민으로부터 소학교 교원, 중학교 교원, 방송국 기자, 문화국 창작원, 신문사 특약기자 등으로 자기를 부단히 가꾸어왔고 지금은 연변인민방송국 문학부 주임, 연변작가협회 산문창작위원회 주임,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회원, 한국해외문화교류회 중국측 리사 등 무거운 직무를 맡아 수행하는 정력자이고 한얼패상, 연변일보문화상, 향토수필상, 화신문화상, 정음상, 라지오문학상, 송원컵 대상, 국제언론 1등상, 해외동포문학평론 우수상, 한국농촌문학상 등 53차의 문학, 문화 대상을 수상함과 더불어 또 《어휘묘사실용수첩》(공저), 《호랑이를 이긴 산토끼》, 《함경도사람》, 《구제비둥지》, 《달나라계집》, 《음달골무꽃》, 《진달래혼취》, 《연변방송가요 700수》(공저) 등 저서를 출판한 실력자이기때문이다.
2
여느 문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호원선생의 문단데뷔과정도 살펴보면 혼신을 불태운 그 열기가 가슴에 와닿는다. 선생의 수필 “처녀작 후작”을 읽어보면 농촌에서 농업로동에 종사했던 선생은 “4인방”이 꺼꾸러지자 곧 필을 잡고 농촌의 새로운 면모를 보도하는 통신보도를 쓰는것으로부터 착수하여 글을 썼는데 그러던중 “영동 4대 국가에 닭알을 적극 판매”가 《연변일보》에 발표된것이 계속 문학에 정진하게 된 계기가 되였고 리상각시인이 당시 《연변문예》에서 시편집으로 있으면서 선생의 첫 시작품을 발표시킨것이 그 시작으로 되였다. 처녀작을 발표하기 위하여 선생은 “깜빠니아식 빠포스(pafos)를 전부 동원했”는바 “읽고는 쓰고 구상하고 긁적거리고 지우고 새로 수정하고…” 하는 일들을 반복하였고 “자전거를 타고 하우동에서 개산툰 선구촌까지 달려가 심정호시인을 만나고 룡정문화관, 연변인민출판사를 방문”했으며 “덕신공사의 리덕산, 박춘식을 모시고 향토시인의 모습을 흉내냈다”고 한다.
자기의 문학입문과정을 소개하는 적지 않은 문인들의 글을 더러 읽어봤는데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총명하였고 또 어떻게 문장능력이 돋보였다는 등, 그런 글들에는 어딘가에 자신을 과시하고 신비화하는 내용과 색조들이 슬쩍 혹은 짙게 비껴있었다. 하지만 정호원선생의 이 수필을 읽어보면 글재간이 별로 없이 그저 농촌청년의 열정 하나만으로 물덤벙술덤벙하였던 흔적이 너무도 솔직하고 진하게 안겨온다. 또 통신보도와 문학문체를 구별하지 못하였던 그 유치함도 가식없이 드러난다.
작가는 아무튼 글로 말하는 사람이다. 문단 내지 사회적인 직위가 높든낮든 상관이 없이 작가는 작품으로 사회에 서고 력사에 남는다. 이를 두고 정호원선생은 “작가는 기록하는 사람이고 만드는 사람이고 지탱과 견지로 리드하는 인테리이다. 자기의 주어진 환경 내지 숙명을 그라프로 그리고 꿈으로 해몽하고 현실로 추진하는 과정이 성장 거듭나기이다.”고 말한다.
여기서 문학에 대한 정호원선생의 견해를 밝힌 수필 “문학장사군”을 떠올려본다.
인류사회진화의 력사를 더듬어보면 계급사회에 들어서면서 초기의 락후한 물물교환으로부터 시작하여 화페의 산생까지를 이끌어온 “교환”은 새롭게 “상업”이라는 하나의 업종을 배태시켰는데 “상업”의 출현은 분명 문명의 한획을 긋는 인류의 커다란 진보를 의미한다. 하건만 력대로 우리 백의민족 문인(량반)들이 구축한 가치세계에서는 “상업”은 “기생”이나 “백정”과 더불어 천대의 대상으로 치부되면서 글 읽는 선비와 물건 파는 장사치 사이에는 범접할수 없는 높다란 담이 엄엄하게 쌓여있었다. 고결한 인격의 선비는 글밖에 몰라야 하고 장사에는 어두워야 한다는것이 그 골자이다.
이에 일찍 반기를 들고 나온 백의민족문인이 있으니 그가 바로 《허생전》을 쓴 조선시대 유명한 실학파문인인 연암 박지원이다. 그는 자기의 이 소설에서 10년을 작정하고 남산밑에서 공부를 하던 허생이라는 선비가 가난에 못이겨 공부를 중단하고 장안의 변부자를 찾아가 10만냥을 빌어 장사로 치부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한후 변부자에게 20만냥을 돌려줬다는 이야기를 엮고있다. 이처럼 박지원은 선비를 장사치와 련계시켰다. 하면서도 그후 허생은 다시 장사에서 손을 뗐고 가난한 오막살이를 하는 선비의 원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번에 정호원선생이 엉뚱하게도 문학을 장사에 비기고 문학을 하는 사람을 장사하는 사람에 비겨서 필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아무튼 지금 200만명도 되지 않는 우리 중국조선족의 사정으로 볼 때 문학을 하여 부자로 된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호원선생은 문학인을 일러 “사상성, 예술성, 취미성으로 인간교류목적의 취지밑에 문명정감을 장사하며 형상발굴의 전업을 경영”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면서 도부장수나 장돌뱅이의 궤변처럼은 약꾀를 부릴수 없는 고뇌를 썼는데 “특정된 제약의노릇인지라 통속푸념처럼 갈수록 수미산인 격”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계속하여 “인건비가 눅은건 문인이다. 이는 전환기의 잠시적 침체와 좌절이다. 도의상의 대의를 어겨 그릇되는 탈선까진 아직 시기상조인듯싶다. 탕개를 조이고 단속으로 자중할 때다. 푼전의 영리를 탐심하는 시정배는 수단방법을 불문한다. 문학이 장사라 하여 무질서한 산업매개로 령락되면 궁극적으론 민족도태를 초래한다. 동류업종 장사군이지만 물질과 정신의 이질구별점에선 차원이 다른 특수행업인줄 안다. 그러므로 문학은 고도의 정품정상화를 강조할 의무적당위성이 있다. …동포문학의 출로는 판매교역보다는 전통보급, 속성발전의 기초우에서 세계와의 대화인거다. 겨우 먹고 살아가는 일을 비하정사(鼻下政事)란다. 인생, 생활이 비참함을 비풍참우(悲风惨雨)란다. 기아선상을 용케 이겨온 동포문학이 이제 또 겪는 제2차 춘궁기(春穷期)는 존엄의식이 고갈되는 정신 고초기(枯草期)이다. 일종 시련과 곤혹인 점검이다. 작가 시처위(时处位)가 일심단합해 불모이동(不谋而同)처럼 공맹을 결성해야겠다. 겨레의 운명을 살피고 격변기 이중력사의 기록자로까지 된 현역작가라면 그러한 각오가 깃들었으리라! 문학장사군의 새 사명을 감안할 때 동포사회의 사속지망(嗣续之望) 또한 밝은것이 아니랴…” 하고 우리 민족문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지적하였다.
3
일찍 나뽈레옹은 “장군이 되려는 포부가 없는 병사는 좋은 군인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말을 하였다.
이 말의 당위성여부는 별도로 치고 기왕 몸에 “작가”라는 칭호를 달았고 문학의 길에 들어섰은즉 후세에 명작을 남겨보려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줄로 안다.
정호원선생의 경우도 다름아닌것 같다. 선생은 지금 어떻게 하면 후세에 명작을 남기겠는가 하는 문제로 퍽 고민을 하고있는상싶다.
“나는 죽음의 그 뒤끝에 이어질 나의 미래를 겨냥한다. 그래서 가끔 내 화장터의 굴뚝연기와 함께 나래칠 지향의 연장선이 비행하는 날개짓을 자주 만난다. 여직 몇권의 책을 발간했다면 그것은 시작도 아니다. 몇십권을 묶었다. 자비출판의 시장화라는 걸림돌에 의해 도서품질이 희비극으로 염량세태를 겪는다. 명작처럼 몇백년, 몇천년 세월이 흐른 뒤에도 생존가치가 예술적으로 여전할 작품생명을 잉태한다. 짓는다. 전주른다.”
이것이 정호원선생의 말이다. 진정한 작가라면 한번 품을 법한 야심이다.
물론 군인으로 되였던 사람은 너무도 많은 반면 장군으로 된 사람은 너무도 적은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라는 이름을 띤 문인은 력대로 많았지만 후세에 남겨지는 명작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한번 “명작”을 창작하겠다는 야심마저 없는 작가에게는 다시 더 기대할 여지조차 없게 되는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정호원선생이 늘 자신을 깔보고 기시하고 압제하면서, 또 무한정 자학하고 혹사하고 아픔으로 몰아붙이면서 가슴속에 품는 그 야심에 찬사를 보냄과 더불어 선생의 훌륭한 작품의 산생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2008년 7월 12일
<<연변문학>> 2008년 8월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