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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어처구니"를 만드는 시인 - 한영남
2016년 11월 11일 23시 08분  조회:4502  추천:0  작성자: 죽림

글이 곧 그의 얼굴인 시인
―한영남의 특집 인상
장춘식

  글을 통하여 한영남이라는 이름을 안건 꽤 오래 되였지만 정작 만나본것은 최근의 어느 문학상시상식장에서였다. 시상식이 끝나고 뒤풀이를 하면서도 그는 줄곧 문학을 이야기하고있었다. 조금은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요즘 문학인의 모임치고는 보기 드문 풍경이였다. 그만큼 그는 문학에 푹 빠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짙게 받았던것이다. 이번에 쓴 글들을 읽어보니 그런 인상이 어느 정도 현실로 느껴지기도 한다.
  옛사람들도 시언지(詩言志: 시는 뜻을 표현한다)라고 했으니 글속에 글쓴이의 사상이나 성격, 기호, 의식 등 개인적인 모습이 나타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영남처럼 글이 곧 그 얼굴인 시인은 그리 흔치 않은것 같다.
  나는 한영남에 대해 잘 모른다. 최근에 한번 만난 외에는 작품도 별로 읽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창작소감 《바람아 불어라 나는 간다》를 읽으면 그냥 일문지하(一文之下)에 인간 한영남, 그리고 시인 한영남을 다 알아버린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글속에 글쓴이의 성실성과 진지함이 배여있다는 말이 되겠다. 문학의 길에 들어서서 한 시인으로, 작가로 성장하는 동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모든 스승과, 친구와 문우들, 그리고 문학사조들, 선배문인들이 두루 거론됨으로써 오늘의 시인 한영남이 있게 되기까지 그에게 밑거름이 되고 자양분이 된 모든 요인들을 솔직담백하게 고백하고있는것이다.
  그러한 성실성과 진지함은 수필에서도 잘 드러난다. 《애연가의 정조》에서 한영남은 《애연가들은 나름대로 스스로 <정조>를 지키는게 대개 상식이다. 비싸든 싸든 나는 이 담배만 핀다는 고집을 내세우고 열심히 한가지 담배만을 선호》한다고 하고는 자기만의 흡연습관을 자백한다. 《남들이 중시를 돌리지 않던 이른바 새로운 담배들을 찾아다녔다.》는것. 어쩌면 수집가적인 취미인지도 모르지만 새로 나온, 혹은 남들이 보지 못한 《담배를 호주머니에 넣고 친구들이 모인 장소에 갔다가 척 내놓으면 모두들 첨 보는 신기한 눈매로 담배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들의 눈길을 바라보는 나는 무슨 큰일이나 한것처럼 속이 후련해나기도 했다.》는것이다. 담배의 맛보다는 담배에 관련된 문화에 애착하고있다는 말로 리해해도 무방할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흡연습관은 혹 희신염구(喜新厭舊) 즉 낡은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한다는 비난을 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일까? 한영남은 《담배에 대한 배신은 상상할수도 없다./그리고 담배에 대한 정조는 절대로 지키지 않는 반면 내 삶의 정조는 꾸준히 지키면서 살아갈 작정이다./시에 대한 내 애정만큼이나 담배를 사랑하니깐.》 라고 수필을 끝맺는다. 담배에 대한 사랑과 시에 대한 애정을 등치시킨 반면에 흡연습관에서의 희신염구와 삶에 대한 정조지키기는 대조시킨다. 앞의 창작소감과 연관시켜 생각해보면 한영남에게 있어 시 혹은 문학과 삶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할수가 있다.
  그러한 문학=삶의 이미지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주인공이 문학에 인생을 맡긴 남성으로 설정되여있는것이다. 《여기까지 써놓고나서 그는 이게 소설이 될수 있겠냐고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래서 이웃에 앉은 동료인 선미양한테 틈을 타서 슬쩍 보여주며 의견을 들었다.》 소설에 나오는 이런 문장들도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그런데 이런 소설의 분위기는 《그런데 언젠가 쓰기 시작했던 소설이 하나 미완성으로 남아있길래 그걸 정리하면 될듯 싶어서 다시 읽어보았다. 그래서 완성된게 <섬둘레 가는 길>이다.》라는 《창작소감》의 술회와 맞물려 작가가 지금 소설을 쓰고있음을 독자에게 반복 각인시켜준다. 이런 서사기법은 한영남이라는 작가 본인의 삶과 문학의 일치성을 강조하는 의미 외에 문학은 곧 삶의 표현이라는 객관적인 의미를 독자에게 일깨워주는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소설은 그렇게 독자에게 고백하고나서 다시 기자인 작가 한영남의 직업적인 삶과 연결시킨다. 자신이 작성한 톱기사가 부장이나 총편집선에서 부정되였을 때 뚫린 구멍을 메꾸는 자신만의 비결, 즉 《톱기사2세》 비법을 흥미진진하게 소개한다. 그러던 작가는 주인공의 이름 정신팔을 여러번 들먹이며 《강원도》라는 나먹은 신참 기자와 술을 마시며 제법 심각한 이야기를 나눈다. 《강원도》의 두루뭉실 삶의 법칙과 섬을 탈출하려는 정신팔의 탈출욕구가 그것이다. 그러나 섬을 탈출하고싶어하는 정신팔의 탈출욕구는 섬을 탈출해봐야 또 섬일뿐이라는 《강원도》의 지적에는 힘없이 무너진다. 그래서 아마 소설 제목이 《섬둘레 가는 길》로 되여있는지도 모른다. 기껏 답답한 삶을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알고보니 자신이라는 섬과 다른 사람이라는 또다른 섬이 근접한 《섬둘레》에 위치한 상태라는것이다. 그리고 소설에는 《어처구니들의 이야기1》이라는 부제목이 달려있다. 우리 삶의 참모습이 그러하다는 말로 리해해도 무방할것이다. 어디 가서 돈벌이하며 굴러다니다가 나이 들어 멋부리며 편히 살고자 신문사 기자가 되여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신문사 상하 모두를 매수하는, 《시시한 인간》 《강원도》지만 그래도 원칙있고 지조있게 산다고 자부했던 자신이 어딘가 통하는데가 있어 만취하도록 술을 마신다는것. 이것은 우리의 현재 삶이 그렇고 그렇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현재 그렇게 돌아가고있는 우리 사회의 인생관이 투영된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삶을 달갑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 《담배와 더불어 묻어나온 라이터는 분명 어떤 노래방 전화번호가 또렷하게 밝혀져있는 선미양만치나 예쁘장하고 말숙한 새 라이터였다.》라는 결구의 표현에서 우리는 이점을 확인할수 있다. 일회용라이터를 달포나 쓸 정도로 변해버린 정신팔이라는 주인공이 다시 헤픈 정신팔이로 되돌아갔기때문이다.
  사실 소설의 앞부분에 나오는 주인공의 헤픈 씀씀이에 대한 긴 묘사는 일종의 장치라 할수 있다. 《그는 돈이란 필요이상도 필요이하도 아닌 존재로 알고있었다.》는 표현은 주인공의 순수에의 지향성을 드러낸것이고 일회용라이터를 달포나 썼다는것은 그런 순수에의 지향이 흔들린다는 말이 될것이다. 소설의 이야기가 그 라이터이야기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인공은 그 낡은 일회용라이터를 잃어버리고 새 일회용라이터를 얻는다. 《강원도》의 두루뭉실 론리에 끌려가는것 같다가 다시 순수에의 지향을 되찾아가는것이다.
  이른바 시장화사회에서 문학인이 겪는 갈등은 세속적인 삶과 순수에의 지향간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런 문학인의 심적인 갈등을 직접 드러낸것이 이 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갈등을 객관화시키지 못한것이다. 한영남이 시인이기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것인지도 모른다. 주제의식을 사건속에 용해시지 못하고 기본적으로는 서술자의 심리적인 고백을 통해 표현한것이다. 거기에 다분히 시적인 구조와 은유의 결합이 가미됨으로써 전체적으로 소설이라기보다는 산문으로 쓴 서사시라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작가의 숙제가 될것이다.
  그러나 앞의 이야기로 되돌아와서 보면 한영남은 원래 그런 시인인지도 모른다. 글이 곧 그의 얼굴인 시인, 혹은 글속에 그 자신이 통채로 드러나는 시인이 한영남인것이다. 얼마전에 만났던 한영남의 인격과 여기 올라온 글 세편에서 나는 그것을 확인할수가 있었다.

  * <도라지>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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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한영남(現 흑룡강민족출판사 편집) 
          김영수(연변대학 조문학부 조선문학 석사연구생) 
          리범수(연변대학 조문학부 비교문학 석사연구생) 
          최 강(前《연변문학》시편집) 
시간: 2004년 4월 
장소:《연변문학》월간사
 

   최강(사회자): 네, 반갑습니다. 오늘 우리 조선족청년시인들의 창작경향에 대해 좀 론의해볼가 합니다. 보시다싶이 요즘 우리 《연변문학》에 청년시인들의 작품이 돋보입니다. 신인들도 많이 나오고있지요. 물론 다 빼여나게 잘 쓴 작품이라고 말할수 없지만  그래도 훌륭한 작품이 적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세분은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두각을 드러내고있는중이라 할수 있겠죠. 한영남시인은 시도 많이 썼고 상도 많이 탔고 또 김영수씨와 리범수씨는 시창작뿐만아니라 리론탐구에서도 열의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여러 분들의 보귀한 말씀 듣고싶습니다.

    한영남: 근간에 발표된 청년시인들의 시를 보면 나름대로 젊음의 곤혹, 아픔, 절망 같은것을 잘 다루고있는줄로 압니다. 그러나 여유롭고 멋스런 선비정신, 한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한 지꿎은 장인정신 등이 부족한듯합니다. 저희가 볼바엔 요즘 우리 청년시인들이 지나치게 자기의 일상에만 안주하는것 같습니다. 좀 높이 서서 멀리 바라보면서 거창한 문제, 이를테면 우리 시대의 아픔이라든가 더 나아가서는 평화문제, 환경문제 등 굵직한 주제들도 다뤘으면 합니다.  
 

    리범수: 저는 현재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전반 중국시에 대한 시각전이와 그에 따른 새로운 시학과 미학의 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아직 우리 시에서 뚝 부러지게 론의된적도 없는 우리 말의 구두어도입도 한번 깊이 있게 짚고넘어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론의에서 우리 20, 30대가 한몫해야 되겠지요.  
 

    김영수: 현재 우리 청년시인들의 시는 사회변혁기와 가치관의 혼돈이라는 시대적환경속에서 주제탐구와 형식탐구에서 나름대로 심각성을 보여주고있을뿐만아니라 또한 참신성을 보여주고있다고 생각됩니다. 날로 치렬해지는 인간삶의 내적고민과 아픔을 솔직하게 읊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수박 겉핥기식 혹은 소일거리로밖에 안보이는 음풍영월, 혹은 개인적인 아픔과 고민, 감상과 고독 같은것을 그 어떤 인간의 근원적인 고민과 매치시켰다기보다는 본능적인 발설에 그치고만 아쉬움이 없지  않아있습니다.

    최강: 그러니깐 세분의 얘기는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 청년시인들의 협소한 안광을 세계적인 범위로 넓히자는 얘기겠죠. 저도 동감입니다. 우리는 자신만의 아픔 혹은 랑만에만 너무 빠져있습니다.  
 
     
한영남: 시는 또한 무엇보다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읽히는 시, 먹히는 시가 되지 않으면 시에 대한 모든것을 운운하기조차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기교, 언어 등 형식적인 면에서 새롭고, 모가 나고, 엉뚱하고, 남이 하지 않는것에 대해 대담히 탐구해야 될줄로 합니다. 요즘 청년시인들이 맹목적으로 기교상에서 한국, 중국, 서구의 기법을 그대로 답습하고있는데 이러면 안되지요. 시란 가슴에 와닿아 진한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란 고루한 관념을 깨는 반역의 맛, 해탈의 맛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시단에 이런것이 적은 유감도 없지 않아있습니다.
 

    리범수: 맞습니다. 저의 천박한 견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조선족시는 지난 90년대부터 줄곧 한국시에만 매여 놀아난것 같습니다. 이로부터 중국시에 대한 무관심과 자체의 관성(慣性)적인 부진상태를 초래했다고 봅니다. 물론 다각도의 정보안테나가 발달된 일부 시인들은 한국시와 중국시를 두루 섭렵하기는 했습니다만 절대 다수의 시인들은 언어의 친절감때문인지, 여하튼 한국시 일변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감을 줍니다. 여기에 남들이 씹다 단물이 빠진 껌이나 주어 씹고있는듯한 우스운 광경도 벌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중국이란 이 땅덩어리우에서 사는만큼 분명 나름대로의 시적대상이 있고 특징이 있는줄로 압니다. 결코 한국적인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중국적인것, 중국 조선족적인것이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결코 레루를  둥둥 떠서 내달리는 일본의 신간센같은 자석렬차는 아니잖습니까. 
    한마디로 우리 조선족시는 한국시의 《실황록화》에 연연하고 자신의 생존현장인 중국시단의 《생방송》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한국시가 우리에게 힌트하는바는 많겠지만 주로 《모국어(母語)와의 친밀한 접촉》정도로 머무르는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수: 현재 우리 청년시단을 놓고보면 가장 큰 문제는 시인은 시인대로, 독자는 독자대로 놀아나는것입니다. 시인과 독자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제가끔 놀아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기성시인들의 시는 직설적이고 서술적인데 치우치고있는것 같습니다. 정감의 진실성은 돋보입니다만 그것이 너무 세련되였다는 점에서 역시 회의적일수밖에 없습니다. 외려 투박하고 서툴고, 간단하여서 그 정감이 가슴에 와닿는 시어들의 투명함과 떨림을 직설로 수용하기보다는 모든 상상력의 세포에 동원되는 참신한 이미지로 감정의 떨림과 내면 령혼의 흔적을 담박하게 말하는 서술행위가 한편의 아름다운 시를 만드는데 유조하다고 생각됩니다.  
    분명 시인은 무수한 독자들이 아! 하고 감탄사를 내지른채 그뒤로는 침묵만이 잠잠히 감돌게 하는 그런 시를 써야 한다고 봅니다. 중국의 문론대저인 《시대서(詩大序)》에서 말하다싶이 시란 말로써 안될 때 탄식하고 탄식이 모자라서 노래하게 되고 노래가 시원치 않아 손과 발을 놀리며 춤을 추면서 표현하는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고대비평가 종영(鍾嶸)은 또 시란 천지인을 감동시키고 귀신도 울리게 하는 심명(深冥)한 그 무엇이라고 표현하고있습니다. 

    최강: 그러니깐 맹목적으로 한국시를 답습하는것을 배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고 또 감동적인, 령혼이 살아숨쉬는 시를 써야 한다는 얘기가 되겠죠?      

    김영수: 네, 례를 들면 《연변문학》 2003년 2기에 발표된 리미옥의 시를 보면 가슴을 찡― 울립니다. 시 《초련(初戀)》에서는 우리 매개인의 추억속에 한번쯤은 있는 맑고 순수한 첫사랑의 감정을 두줄의 시구로 전개시켜 함축성과 그 시적이미지의 참신성이 돋보입니다. 이미지의 선택에서 이 시는 잎새, 말이 없는 잎새를 남성에, 이슬을 녀성적인 이미지로, 특히 울면서 굴러간다는 동적인 요소와 함께 투명하면서도 순결한 이슬의 그 아름다움이 지극히 녀성적인 이미지와 통한다는 면에서 이 시는 아름다운 면이 있다고 할수 있죠. 
    그리고 시 《감》도 역시 《초련》처럼 매력을 과시하고있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생의 종지부를 찍은 한겨울추위의 한복판에 빨갛게 상기된 홍시 하나가 대롱대롱 나무가지에 매달려있습니다. 이 감에 한번 심상치 않은 눈길을 돌려보면은 예로부터 우리는 녀인의 부끄러움을 홍시나 혹은 잘 익은 사과알에 비유되기도 하는 전통적인 이미지에 매료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빠알간 감, 감의 부끄러움을 녀성의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해도 되죠. 부끄러움은 언제 봐도 순결하고 지극히 미묘한 감정을 동반하죠. 이런 의미에서 가치관과 륜리관의 혼란을 겪는 조선족사회에서 우리는 홍시같은 부끄러움을 가진, 한파가 몰려와도 겨울 한복판에 아름답게 매달려있는 부끄러움의 정조관을 기대해보아야 하지 않겠는냐는 무언의 뜻을 이 시는 시사해주고있습니다.     

    최강: 지금 우리 청년시인들은 시를 많이 쓰고있고 또 발표도 부지런히 하고있는데 서구의 시에 대해 료해가 적다고 생각됩니다. 영수씨는 서구의 시리론과 시를 많이 공부했잖아요. 이 방면에 대해 좀 얘기해볼가요. 

     김영수: 19세기 후반기 구라파 공업문명의 악과인 세기말 정서가 만연되였던 그 시대 《영원한 고독의 운명감》을 느끼면서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시집 《악의 꽃》에서 사회동란과 폭력, 물욕이 살판치던 당시 프랑스의 타락상을 풍자하면서 극히 모순적인 내심정감을 기록하였죠. 때문에 후세의 평론가들은 그를 두고 《보들레르는 랭정한 눈길로 타락된 사회와 인생들을 바라보았다.》고 평가하지요. 특히 빅또르·유고는 보들레르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당신의 시구절속에는 말못할 전률과 떨림이 있는데 이는 마치 선량한 어미승냥이가 고통을 호소하는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청년시인들은 거개가 아픔이 적습니다. 우리는 서구의 시인들에게서 아픔을 배워야 합니다.

     한영남: 영수씨의 말에 동감입니다. 한국, 중국, 서구에 초점을 맞추고 맹목적으로 따라 하지 말고 그들에게서 자양분을 흡수해야 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한국의 젊은 세대, 중국의 젊은 세대, 서구의 젊은 세대와 비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세대차이로 오는 어떤 우월감(?)때문에 허황한 만족감에 사로잡힐 우려도 있습니다. 그리고 40대를 비롯한 선배님들의 시를 전반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는 취할바가 못됩니다. 그들한테도 나름대로의 아픔, 고통, 절망 등이 있는것으로 우리와 표현방법이 다를따름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젊은 시인들로서 그 분들의 한두수의 약간 서투른 시를 가지고 그 분들을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최강: 저도 동감입니다. 지금 우리 시단의 가장 큰 문제는 현실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중의 삶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이른바 시를 기교놀음으로만 보고 글장난에만 정신을 팔고있습니다. 이런 시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예리하게 파헤치지 못할뿐더러 독자들에게 아리숭한 감만 줄뿐입니다.  
    모더니즘경향이 있더라도 얼마든지 읽혀지거나 아까 영수씨의 말처럼 독자들에게 찡 하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거죠. 모더니즘속에 너무 깊숙히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독자를 잃게 돼요. 약간 난해한것 같으면서도 쉽게 안겨오고 또 쉽게 씌여진 시인것 같으면서도 무게가 있는, 령혼이 살아숨쉬는 그런 시들이 좋죠. 
 

     김영수: 이런 립장에 서서 시를 바라볼 때 시에 있어서의 지나친 기교주의는 그리 대단한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19세기 후반기에 나온 상징주의수법이나 20세기 모더니즘사조에서 후기 상징주의수법이나, 초현실주의에서의 자동기술법, 미래주의수법과 포스트모더니즘(后現代主義) 사조에서의 각종 문학류파의 기교나 수법은 실은 서방문학사조에서 부정의 부정의 력사적발전을 거치면서 현단계 인간삶의 진실을 반영하기 위하여 동원된 하나의 수단일뿐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강: 그렇겠지요. 현재 미술계에서도 이러한 론란이 일고있는데 미술대학을 나온 저는 학생때 이와 흡사한 일에 봉착했더랬습니다. 아마 2학년때로 기억되는데 어느 한 학생이 멋을 부리며 스케치, 수묵화, 유화같은 기초적인 미술습작공부는 잘하지 않고 곧바로 추상적인 그림을 그려 비평을 받던 일을 말입니다. 그때 백발의 교수님은 이런 훈계를 하시더군요.《모든 추상파화가들은 처음부터 추상파 그림을 그린게 아니다. 추상화를 하기전 엄청난 정력과 시간을 들여 사실주의습작을 거쳐서 달관에 이른 다음에 추상파를 그렸다. 추상파화가로 소문난 피카소나, 헨리ㆍ무어도 다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때문에 훌륭한 추상파그림을 그릴수 있었다.》 
    때문에 우리 청년시인들도 마찬가지로 기초를 든든히 다진 다음 모더니즘적인 시를 써야 한다고 봅니다. 
    범수씨는 중국시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 현재 중국시단엔 어떤 경향들이 있습니까?

     리범수: 중국시단이라는것이 워낙 넓은 편이라 여기서는 제가 관심을 가졌고 흥미를 느꼈던 시인과 그들의 활동에 대해 몇가지 언급해보지요. 최근 4, 5년간 중국시단을 보면 좋게 말하면 퍼그나 흥성했다고 할수 있고 나쁘게 말한다면 시끌벅적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반봉(盤峰)론쟁이라는것이 있는데 최근 중국시단의 움직임을 말하자면 이 반봉시회를 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반봉시회란 1999년 4월 북경 시교에 위치한 평곡현 반봉호텔에서 열린 《밀레니엄: 중국시가창작형세와 리론연구토론회(世紀之交: 中國詩歌創作態勢與理論硏討會)》를 지칭한것입니다.  
    여기에서 소위 《민간립장(民間立場)》과 구어시(口語詩)를 고취하는 시인들이 80년대 중기와 90년대에 걸쳐 득세했던 이른바 《학원파(學院派)》와 《인테리습작(知識分子寫作)》에 대한 반발로서 도전을 걸었습니다.  
    이 론쟁은 줄곧 《관방(官方)언어립장》의 변두리에 있었던 《민간립장》의 추종자들과 그들의 상응한 미학적, 창작적 주장이 보다 당당하게 중국어시단에 등장하는 계기로 되였습니다. 이 회의를 도화선으로 하여 그뒤 거의 1년동안 여러 문학지를 통해 진행된 쌍방의 론쟁을 《반봉론쟁》이라 이름하는데 이는 80년대의 《몽롱시론쟁》에 뒤이은 중국 당대문학사에서의 획기적인 사변임에는 관련인사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고있습니다. 이 론쟁으로 하여 중국시단은 지금 《민간》과 《지식분자》량대진영으로 뚜렷이 갈라져 충돌하고있으며 각 진영내부에서도 일부 문제를 둘러싸고 아직 론란을 계속하고있는 실정입니다. 
    다음은 구어시에 관해서 좀 얘기할가요. 구어시는 이미 지난 80년대 중국문단에서 발생, 전개된것으로 결코 새로운 설법이라고는 할수 없습니다. 단지 새로운 시대에 맞춘 새로운 해석이 따르고있을뿐입니다. 
    《쉽게 씌여진 시》라고 해서 결코 구어시인것이 아니며 구어시라고 해서 무절제하게 쓴다는것은 아닙니다. 주변사물에 대한 별로 개의치 않는듯한 시각으로 시구를 컨츄럴해나가면서 나중에 읽고보면 거기에 시인이 세계와 인생에 대한 평소의 잔잔한 고민이 묻혀있고 우리 삶의 현실적인 공동한 감수가 사탕수수의 단즙처럼 슬슬 배어나오는 시, 읽는 과정에 눈동자와 혀바닥 내지 대뇌피질까지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러한 시가 바로 구어시의 전범이 아닌가 합니다. 혹시 거기에 진지함이나 엄숙성이 결여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을 가볍게 대하는데는 결국은 독자 자신의 마음가짐의 탓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영남: 우리 청년시인들은 시공부, 특히 시적사유와 시어면에서 공부를 좀 더 해야 된다고 봅니다. 나 자신은 특히 시어에 대해 각별한 놈입니다. 시어라는 매개물로 독자와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시는 다른 쟝르보다 해독이 어렵습니다. 하기에 특히 시어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한마디로 《어렵게 씌여져서 쉽게 읽혀져야 한다.》는 말을 다시 곱씹어봅니다. 

     최강: 네, 저도 동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정보화시대입니다. 우리 문학도 인터넷을 떠날수 없다고 생각되는데 여러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리범수: 현재 문학은 물론 모든것이 인터넷을 떠날수 없다고 봅니다. 지금 중국시단에는 인터넷문학과 《하반신(下半身)》운동이라는것이 있는데 지난 90년대말 중국인터넷업계의 흥기에 힘입은 수많은 문학사이트의 출두는 반봉론쟁의 진행마당을 전통적인 지면(紙面)매개체로부터 사이버공간으로 그 령역을 확장하도록 추동하였습니다. 그 과정에 서로 다른 경향의 시인들이 자체의 문학사이트와 BBS(論壇)를 제작하고 또 이를 거점으로 자신들의 미학창작견해를 력설하고 그에 따르는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하고있습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것들로는 《시강호(詩江湖)》,  《당(唐)》,  《고무(橡皮)》,  《시생활(詩生活)》, 《양자강의 악어(揚子鰐)》,  《계선(界線)》 등등이 있습니다. 우리 문단에도 《연변문학》, 《연변작가협회》, 《우리 동네 문학동네》, 《료동문학》 등 문학관련사이트들이 있질 않습니까. 허나 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인터넷접속에 많이 뒤떨어져있는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자신의 작품을 올려 타인과 서로 교류하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아마튜어작가들도 미숙한 시나마 실어 기성작가들의 비평과 가르침을 받는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모든 기성작가들이 그러했듯이 데뷔전에는 누구나 다 아마튜어작가들입니다. 기성작가들은 컴퓨터가 없는 시대에 살면서 원고지에 펜을 날려 시를 써오질 않았습니까. 요즘도 그때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쓰는 도구가 다를뿐이죠.

     최강: 윤동주, 김소월 등 시인들도 다 20대에 이름을 날렸잖았습니까. 범수씨는 20대 신진시인으로서 기성시인들에게 바라는 말 몇마디 해주시죠.  

     리범수: 시인을 론할 때 시인의 년령구분 즉 출생시대를 그 눈금자로 하고 있는것이 중국문단의 현황입니다. 이른바 《70년대후》, 《80년대》가 바로 그러한것이지요. 현재 《민간파》의 중견시인들 자신부터 신세대들의 등장에 대해서는 자생자멸과 적자생존의 립장을 취하고있는듯합니다. 즉 평론가나 유명시인의 의도적인 부추김따위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치고있다는것이죠. 《제3대(第三代)》의 저명한 시인 우견(于堅)은 《위선적인 문학의 보모(保姆)》, 《아닌 보살을 떠는 암탉》과 같은 비유를 사용하여 신인추천에 대해 조롱하는 어투였으며 《중간세대(中間代)》의 대표시인 이싸(伊沙)는 《추천하느냐 않느냐?》는 그야말로 하나의 《허위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으므로 스스로 알아할 일이라고 외면하는 태도입니다. 게다가 인터넷이라는 자유로운 발표공간은 우선 물리적으로 신인등단의 발붙임을 위해 조건을 창조해주었습니다. 많은 신세대시인들이 우에서 언급했던 문학사이트나 홈페이지를 통해, 또는 그들 스스로가 꾸린 《민간잡지(民刊)》를 통해 성장하고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것을 사실적으로 증명해줍니다. 우리 《연변문학》도 자신의 사이트를 갖고있질 않습니까. 앞으로 편집선생님께서는 월간지는 물론 사이트를 통하여 꼭 신인들 양성에 힘써주길 바랍니다.

    최강: 알겠습니다. 요새 문학이 대가 끊긴다는 상황에서 저희도 범수씨의 제안을 달갑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기성시인들도 후배사랑에 힘을 아끼지  않을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한영남시인님, 신진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요?
 

    한영남: 시를 평생의 작업으로 여기지 않고 그냥 투기적으로 사기적으로 또는 일시 충동으로 여기고 한두수를 써서 발표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그들과 나란히 젊은 시인의 행렬에 서는걸 철저히 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시를 사랑한다면 언제라도 마주앉아 술을 마셔줄 용기가 있습니다. 젊음을 믿습니다.  


    최강: 앞으로 계속 좋은 시를 부탁드립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세분, 고맙습니다. 

<연변문학> 2004년 5기 참조.

파일 [ 2 ]

 
 


 
 
 

전체 [ 1 ]

1   작성자 : 그림쟁이 최강
날자:2008-07-04 23:35:31
당시 우리는 맥주집에서 자취방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자주 시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그러던차 편집부에서 지면을 할애하여 청년시인좌담특집을 제공했고 5.4청년절을 눈 앞에 두고 우리는 총편실에 모여 언성을(?) 높히며 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렸다. 두시간 내내 있은 좌담은 끝났고 시편집였던 나는(석화편집님은 한국 유학중) 편집해서 5월호에 등재했는데 신진시인들의 긍정과 중견, 원로시인 몇분의 아낌없는 찬상을 받았다. 올해가 2008년이니 지금으로부터 바로 4년전 일이다. 지금은 각자 자신의 길을 걷느라고 다망(?)한지 모이기 무척 힘들다. 한영남시인은 대련으로, 범수는 연변대학교 교수로, 영수는 청도대학교 교수로 가있다. 언제면 넷이 또 만나서 중국시단에 대해, 조선족 시단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울수 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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