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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북간도"가 낳은 시인이다...
2016년 11월 14일 23시 17분  조회:4717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동시연구
                                                              
                                  김만석
 
 
  윤동주는 북간도가 낳은 시인이다.  윤동주는 초기 동시창작으로부터 시작하여 문단에 소문 없이 등단하였다가 세상을 뜬 먼 후날에 와서 이름을 날린 시인으로 그 영예 세상에 떨치고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동시에 대한 연구가 우리 중국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별로 진행되지 못하고있다. 있다면 한국의 김수복씨가 쓴《윤동주의 동시세계, 김수옥이 쓴 <<윤동주 시세계>> 등 몇 편이 있을뿐이다.
  본 론문에서는 북간도가 낳은 우리의 동시인 윤동주에 대하여 우리의 나름대로 연구하면서 그의 동시에 대한 사상예술적 평가를 내리고 그의 문학사적의의를 밝히려 한다.
 
 
                           윤동주의 동시학습과 그 창작
 
  윤동주는 1925년 8세 때 명동학교에 입학했는데 1928년부터 당시 서울에서 간행된《어린이》와《아이생활》잡지를 구독하면서 동요동시에 대하여 남다른 흥취를 가지였었다.
   5학년에 이르러서는 학급의 친구들과 함께 등사판 문예지《새명동》을 꾸리면서 아직은 어설프지만 그래도 제딴의 자작동시를 창작하여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은진학교에 입학해서부터는 윤동주는 정지용, 윤석중, 강소천, 박영종 등의 동요동시를 탐독하면서 동요동시를 깊이 파고들며 학습하였다.
  그때 정지용(1903―?)은《언어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과 시적 줄 고르기에 류다른 공고감을 보인 시인이였다》.1) 정지용은 1935년 10월 27일에《정지용시집》을 출간했는데 윤동주는 이 시집을 1936년 3월 19일에 구매하였다. 이 시집에는《해바라기씨》로부터《별똥》까지 도합 16수의 동요가 수록되였는데 윤동주는 이런 시들에 대하여 파고들며 학습하였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 1학년 때부터 윤석중(1911.5―?)의 동요동시에 심취했었다. 윤석중은 1932년에 조선 최초의 창작동요집《윤석중동요집》을 출간했었다. 그는 정형에 의한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자유시로서의 동시창작에 발 벗고 나서서 1933년에 두번째 작품집인《잃어버린 댕기》를 출간하였다. 한국 리재철교수는 이 동시집을 한국의 최초의 동시집으로 인정하고있다 윤동주는 바로 이《잃어버린 댕기》에 심취되여 동시학습을 다그쳤던것이다.
   윤동주는 강소천(1915.9.16―1963.5.6)의 동요동시집《호박꽃초롱》도 학습했다. 그때 강소천은 벌써 7.5조, 3.4조의 전통적 운률에서 벗어나 동시로서의 참신한 리듬과 직관적인 표현미를 보여주면서 훌륭한 동시들을 써내였다.
   윤동주는 박영종(1916.1.3―1978.3.24)의 동시집《나루터》에도 무척 흥취를 가지고 지꿎게 달라붙어 학습하였다. 박영종은 그때 재래의 정형률에 구애되던 동요형태를 완전히 벗어나서 시적동시 개척에 앞장서 나간 동시인이였다.
  이와 같이 윤동주는 선배시인들과 동시대 시인들의 동요동시작품을 학습하면서, 특히는 동시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고 동시창작의 기법을 장악함으로써 금후 동시창작에서의 리론적 토대와 예술적 기교를 굳건히 다지게 되였다.
  이런 창작적 기량을 닦은 윤동주는 1935년 3월, 18세 때 룡정중앙교회 주일학교 유년학부에서 나 어린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윤동주가 어린이들 속에 들어가서 그 당시 어린이들의 생활을 체험할수 있는 좋은 기회로 되였다.
   윤동주는 기독교를 신앙하는 가정에서 태여 났고 또 기독교를 숭상하는 터이라 기독교에서 설교하는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자신을 무장할수가 있었다.
  마태복음 제18장 제3장에는《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하리라》라고 씌여져있다.
  기독교의 이 사상은 윤동주의 행동의 지침으로 되였다. 하여 윤동주는 어린이로《회귀》하여 어린이들 속에 들어가 동심세계에서 살게 되였다. 이것은 그가 동시를 쓸수 있는 생활적 토대를 마련해준것으로 된다.
  이렇게 되여 그는 동시창작으로부터 시작하게 된것이다. 지금까지 윤동주에 대한 연구재료에 의하면 윤동주의 첫작품은 1934년 12월 24일에 쓴《초 한대》, 《삶과 죽음》,《래일은 없다》등으로 되고있다. 이 가운데서《래일은 없다》가 윤동주가 쓴 첫 동시로 된다.
  윤동주는 1935년 9월, 평앙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되여 공부하면서부터 시창작에 몰두하였다. 그로부터 7개월간(1935.9-1936.2) 그는 동시《조개껍데기》,《고향집》,《병아리》,《오줌싸개지도》,《기와장 내외》,《양지쪽》등을 써냈다.
   평앙 숭실중학교가 페교되여 룡정에 다시 돌아와서 광명중학 4학년에 편입된 1936년부터 윤동주는 동시창작에서 본격화하였다. 이 시기 윤동주는 동시《참새》,《해비》,《비자루》,《비행기》,《봄》,《무얼 먹고 사나》,《굴뚝》,《호주머니》,《사과》,《눈》,《닭》,《편지》,《가을밤》,《버선본 》등 많은 작품을 써냈다.
  1937년에는 동시《울다》,《반디불》,《할아버지》,《만들기》,《나무》등을 썼다. 그런데 이 기간에 윤동주는 성인시 15수나 썼다. 보는바와 같이 윤동주는 이때로부터 동시창작이 성인시창작보다 그 수량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동시《귀뚜라미와 나와》,《해바라기 얼굴》,《아기의 새벽》,《해빛, 바람》,《산울림》,《아우의 인상화》등을 써냈다.
  1939년에는 산문《달을 쏘다》를 썼고 1941년에는 동시《못자는 밤》과《눈감고 가다》를 썼었다.
    이런 작품들 가운데서《병아리》(《카톨릭소년지》1937.2),《비자루》(《카톨릭소년지》1936.12),《고향집》(《카롤릭소년지》1936),《오줌싸개지도》(《카톨릭소년지》1937.1),《무얼 먹고 사나》(《카톨릭소년지》1937.3),《거짓부리》(《카톨릭소년지》1937.10),《산울림》(《소년》1939),《달을 쏘다》(《조선일보》1939.1) 등을  발표하였다.
   상술한바와 같이 윤동주는 짧디 짧은 8년간의 창작생활 가운데서 도합 116수(편)의 작품을 창작했는데 그 가운데서 아동문학작품으로는 동시 35수, 산문 1편이 들어있다. 그리고 잡지와 신문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동시 7수와 산문 1편으로 알려지고있다.
 
 
                              윤동주가 추구한 동시형태
 
   윤동주는 1936년 12월 24일《래일은 없다》로부터 동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6년에 동시창작의 고조를 형성하면서 왕성기를 보이다가 1937년부터 동시창작의 저조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1년에《못자는 밤》을 끝으로 동시창작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한국의 평론가 김수복씨는 1934년부터 1936년 사이를 윤동주 시창작의 습작기2)로 보고있다. 이 론리에 따르면 윤동주는 많은 동시를 창작초기도 아닌 습작말기에 쓴것으로 된다.
   이런 특수사정에 처한 동시인 윤동주와 그의 동시를 어떻게 실사구시적이고도 과학적으로 평가할것인가? 이것은 우리 앞에 엄숙한 과제로 제기되고있다.
  윤동주는 무엇때문에 동시창작부터 시작한 시인인데 점차 동시창작수량이 줄어들게 되였는가? 이것은 마땅히 먼저 풀어야 할 문제로 된다.
  윤동주는《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며 살려고 한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이였다. 때문에 그는 깨끗한 동심에 살면서 동시부터 쓰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러나 그가 산 시대, 일제 치하의 사회현실은 그에게 많은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제기하였다. 무엇때문에 나서 자란 고향에서 쫓겨나야 하는가? 무엇때문에 사랑하는 제 나라를 빼앗겨야만 하는가? 무엇때문에 자랑스러운 우리 말을 쓰지 못하게 되는가? 세상은 참으로 참혹한 세상이였다. 하여 그는 괴로왔고 고민하였고 갈 길이 막막하여 방황하면서 고독을 느끼였던것이다.
   이런 현실과 그런 현실이 제기해준 복잡한 문제로 하여 윤동주는 골머리를 앓게 되였다. 하여 윤동주는 천진한 아이들 사유방법대로 제기된 문제들을 사고할수 없게 되였으며 또 동심 그대로 사회현실을 반영하는데 만족할수가 없게 되였다.
   게다가 나이를 한살 두살 먹고 점차 높은 학교에 진학하여 새로운 지식을 배우면서부터 그는 그 당시 조선에까지 파급되여 온 현대파시와 접촉하게 되였다. 그러다가 윤동주는 성인시에서 자기의 시창작의 출로를 찾은것이였다.
   하여 그는 당시 다른 동시인들과는 달리 동시인으로부터 점차 성인시인으로 자기의 모습을 바꾸게 된것이였다.
  필자는 바로 윤동주가 성인시인으로 탈바꿈하기전인 동시인으로 동시를 창작한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하려 한다.
  윤동주는 선배시인들과 동시대 시인들의 창작경험을 비판적으로 학습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탐구적인 노력을 하였던것이다. 특히 그가 추구한 시형태들에서 그의 의식적인 탐구와 노력이 완연히 드러나고있다.
  첫째, 자유동시형태를 추구한 윤동주
  윤동주는 정지용의《줄 고르기》동요를 배웠지만, 결국은 정형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동시를 창작한 윤석중의 편에 섰다. 당시 강소천도 전통 운률에서 뛰쳐나와 동시로서의 참신한 리듬감을 보여주었고 박영종도 재래의 정형률에 구애되던 동요형태를 벗어나 시적동시 개척에 앞장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1937년 김영일과 박영종은 함께 자유시론을 들고 나와 <<동시는 우선 시로 되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하여 윤동주가 동시창작을 한 시대는 자유동시를 갓  창작하는 시대였다. 이것은 동시창작에서의 혁신의 바람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재래의 동요의 전후절, 대구, 후렴 등의 전형적 요소들이 동시창작에서 배제되고《미문(美文)의식에 사로 잡힌 말장난과 정형틀의 고정된 형식으로 반복되던 그러한 따분한 창작3) 》에서 혁신파들은 해탈되여 나왔다. 윤동주도 바로 그런 형태를 멀리하고 혁신의 물결에 뛰여 들었던것이다.
   윤동주가 창작한 35수의 동시 가운데《기와장 내외》(1936.3.20),《참새》(1936.1.2),《굴뚝》(1936.9) 등 몇 수가 7.5조이고 나머지는 모두다 격식적인 정형률에서 완전히 해탈된 자유동시들이다.
  이렇게 볼 때 윤동주는 자유시형태를 추구한 혁신적인 동시인이라고 할수가 있는것이다.
  둘째,화적인 동시를 추구한 윤동주
   윤동주는 당대 현실에 발붙이고 서서 아이들의 정서세계를 서사적 화폭으로 직관화한 동시인이였다. 다시 말하면 요적동시(谣的童诗)보다는 짤막한 이야기를 담은 화적동시(话的童诗)를 추구한 동시인이였다.
  윤동주가 숭상한 윤석중은 자유동시를 추구했지만 현실세계를 떠나 초현실적인 꿈의 세계를 그리였다. 하여 윤석중은《의식적으로 슬픈 현실을 슬프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였다.》4)
  윤동주는 윤석중의 자유동시형태를 따오고 초현실적인 창작태도는 배격하였다. 윤석중도 진공 속에서 산것이 아니라 1930년대라는 특정된 일본 치하의 식민지사회에서 산것만은 사실이였다. 하기에 그가 아무리《초현실적인 락천적사상》을 동시에 표현하려 했지만《허수아비》,《대낮의 바다가》,《모래성》,《휘파람》과 같은 현실 참여적 작품을 쓰지 않을수가 없었던것이다.
  윤동주는 바로 이런 현실 참여의식이 반영된 윤석중의 작품에 더 흥취를 가지였다. 그리하여 정지용의《말》이거나 박영종의《나루터》같은 시 옆에 윤동주는 연필로《꿈 아닌 현실이 표현되였기에 좋은 작품이다》5) 라고 썼다.
   여기서 혁신적인 동시인 윤동주의 비판적의식이 드러난다. 그는 선배시인들의 작품을 무작정 답습한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했던것이다. 그가 쓴《거짓부리》,《만돌이》,《굴뚝》,《버선본》,《비자루》등은 바로 이런 화적동시(话的童诗)에 속한다.
  동시《만돌이》는 전형적인 화적동시이다. 시적주인공 만돌이가 시험치기 전날 요행을 바라면서 길가에서 돌 다섯개를 주어가지고 전봇대를 향해 뿌려 맞히는것으로 자기를 안위하는 동심의 세계를 그려낸것이다.
  당시 이런 화적동시는 요적동시를 배격하면서 동시인들이 개척한 새로운 시형태였다. 윤동주도 바로 이런 동시쓰기에 발 벗고 나섰던것이다.
   셋째, 시적대상에 대한 소묘적 처리와 서정의 결합을 추구한 윤동주
  화적동시를 쓰던 그 당시, 동시인들은 정형동시에서 해탈한것으로 하여 거뿐한 심정이였지만 서사적 이야기에 점차 염오감을 느끼고 시적대상에 대한 간단한 소묘적인 처리에 서정성을 가해주는 그런 시들을 추구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바로 윤동주가 숭상한 정지용이 사물에 대한 가벼운 소묘를 하였다. 그런데 정지용은 그런 소묘를 민요풍에 담아 요적동시로 썼던것이다.
   윤동주는 정지용의 소묘적인 방법을 따오고 민요적인 정형동요형식을 배격하고 자유동시형태를 취하였다. 이런 작품으로는《오줌싸개지도》,《조개껍데기》,《누나》와 같은것들이다.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이것은 동시《오줌싸개지도》의 전문이다. 시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동생이 오줌을 싼《요》라는 이 시적대상을 소묘적으로 그려놓고 그것을 기발하게<<지도>>라고 오묘하게 처리하고있다. 엄마는 왜서 세상 뜨고 아버지는 왜서 만주땅으로 갔느냐? 이것은 현실에 대한 예술적인 반영이 아닐수가 없다. 이렇게 윤동주는 꿈 아닌 그 당시 어린이들의 생활 그대로를 서사적 화폭으로 소묘하면서 거기에 서정을 부여하여 새로운 동시를 추구했던것이다.
  넷째, 감각적 이미지동시를 추구한 윤동주
  윤동주는 점차 참신한 감각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시적형태도 추구하였다.
  그가 숭상한 정지용은 1930년대에 이르러 참신한 감각적 이미지와 섬세하고도 독특한 언어구사에 의한 현대시 창작에서 일정한 성과를 올리고있었다.
  박영종은 참신한 시어로 이미지창조에서 시적돌파를 추구하였다.
  김영일은 찰나적, 즉물적인 감수성을 살리면서 감각적 이미지창조로 시를 새로운 차원에 끌어올리려 애를 썼다.
   윤동주도 이런 시대적 영향을 받아 객관사물에 대한 직관적인 소묘로부터 객관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방향에서 노력해 보았다.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들은
산울림
 
까치가 울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이것은 동시《산울림》의 전문이다. 산울림이라는 청각적 감각세계를 까치를 매체로 하여 펼쳐 보이고있다. 까치가 울고 까치가 듣는 산울림, 산울림의 여운을 살리려 생략부호까지 쳐준 윤동주의 추구는 실로 의도적인것이다. 이런 시는 형식이 간결하고 느낌이 찌르는듯하여 시적이미지가 산뜻하고도 날카로운것이 그 특징으로 된다.
  윤동주가 쓴 이런 시들로는《산울림》(1938.5),《반디불》(1937),《나무》(1937) 등이 있다. 하지만 윤동주는 동시창작을 너무 일찍 마무리 지었기에 이런 형태의 동시는 그렇게  많이 쓰지 못하였다.
  다섯째, 상징동시를 추구한 윤동주
  윤동주는 환상과 의인화방법을 도입하여 당시 어린이들의 서정세계를 상징적으로 그리면서 상징동시형태도 추구하였다.
   일제침략자의 고압적 탄압 속에서 우리의 작가 시인들은 창작자유가  없었다.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 반항도 사람 나름이였다.
  윤석중과 같은 동시인은 현실을 떠난 초현실적인 꿈나라에서 이른바 동심을 노래했다면 박영종은 동화적인 환상으로 상징적인 동시를 썼던것이다.
  윤동주는 바로 꿈 아닌 현실을 반영할것을 주장한 시인이였다. 그는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반영하던데로부터 동화적이며 우회적인 방법으로 상징동시로 현실을 반영해보았다.《귀뚜라미와 나와》(1938),《참새》(1936.1.2),《해바라기 얼굴》(1938) 등은 이 부류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들은 대개 동식물을 시적대상으로 삼고 거기에 사회현실을 굴절적으로 비껴 담으면서 상징적동시 형태를 취한것들이다. 이것은 동시인으로서 예술적인 반항의 한 수단이였으며 또한 윤동주가 추구한 시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여섯째, 철리적인 동시를 추구한 윤동주
  윤동주는 점차 소박하고도 간결한 시어와 짧고도 깔끔한 시 형식을 취하면서 애써 철리적인 내용을 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당시 박영종은 참신한 시어 고르기를 중시했고 강소천은 동시《닭》과 같은것을 써서 간결하면서도 객관적인 표현미를 살리며 독자더러 다각적으로 음미하게 하는 방향에서 창작했다.
  윤동주도 화적동시를 쓸 때와는 달리 시의 함축에 애를 썼고 또 시가 관념형태로 나아가면서 점차 시의 무게를 강화하는 면으로 나아간것이 그의 작품에서 완연히 드러난다. 이를테면《무얼 먹고 사나》(1936),《호주머니》(1936),《못자는 밤》(1941) 등이 이런 시에 속한다.
  동시《못자는 밤》에는 시적 대상물이 없이 관념적인 뜻을 간결한 시어로 다루고있다. 그 뜻을 독자들마다 제 나름으로 해석할수 있는 드넓은 감상 여지를 가지게하였다. 이런 시들은 윤동주의 시 가운데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이런 시형태도 윤동주가 추구했던것만은 사실이다.
  이상에서 볼수 있는바 윤동주는 선배시인들의 훌륭한 학생으로서 그들의 창작경험을 진지하게 학습했던것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선배들과 동시대 동시인들의 창작경험을 무분별하게 그대로 받아들인것이 아나라 바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시를 창작한 탐구적인 동시인이였다는것을 우리는 알수가 있다.
 
 
                      윤동주동시의 사상미학적가치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태여 나서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까지 만 27년 2개월만 산 사람이다.
   이 짧디 짧은 생애에 그는 정치상에서는 아직 미숙하나마 개량주의경향을 보였지만 사상적으로 보면 그때 벌써 《격렬한 민족의식》 6)을 가진 철두철미 민족주의자로 되였다.
  하여 그는 프로작가들과도 다르고 친일적인 자산계급작가와도 다른 오직 민족주의 립장에 굳건히 서서 문학가적인 신분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자기의 저항의식을 예술적으로 오묘하게 표현하였다. 그가 쓴 동시에서도 그의 저항의식은 충분히 표현되고있다.
   첫째, 윤동주는 일제 치하에서의 우리 인민들의 고달픈 생활을 그대로 그려내고 그런 현실을 부정하는것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우선, 문학가 윤동주는 일제강점하의 우리 인민들의 고달픈 생활을 소묘적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런 작품들에는《애기의 새벽》,《해바라기얼굴》,  《기와장 내외》 등이 있다.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아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아기가 젖 달라 보채여
새벽이 된다.
 
   이것은 동시《아기의 새벽》의 전문이다. 일제시대 일본인들과 친일파 나부랭이, 그리고 잘사는 집들에서는 이른바 현대문명의《혜택》을 입어 벽시계들이 나타나 땡땡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서정적주인공의《우리 집》에는 시계는 고사하고 새벽을 알리는 닭마저 없는 지지리 구차한 집이다.
   오직 시간을 알리는것은 배불리 먹지 못해  빽빽거리는 젖먹이의 젖 달라는 그 울음소리뿐이였다. 배고픔으로 하여 어제를 보내고 배고파 새날을 맞이하는 인민들의 생활을 아기의 울음소리로 기발하게 보여준 여기에 윤동주의 시적재능이 남김없이 나타난다.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로 간다
 
해바라기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동시《해바라기얼굴》의 전문이다. 한창 꽃펴나야 할 꽃나이 누나는 일제놈들의 강제로동에 끌려가 고달픈 로동에서 시들고만다.
 
비오는 날 저녁에 기와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 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 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이것은 동시《기와장 내외》의 제1련이다. 작자는 기와장 내외를 의인화하여 가지고 외아들이 그리워 구슬피 우는 기와장 내외의 처량한 모습을 비극적정서로 노래하고있다.
   왜서 달콤히 자야 할 갓난아기가 이른 새벽부터 울음을 터뜨려야 하는가?
   왜서 한창 꽃필 나이의 누나가 서리 맞아 시들어야만 하는가?
   왜서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기와장 내외는 구슬피 울어야만 하는가?
   이 모든것은 윤동주가 소묘적으로 그려낸 당대현실의 축도적 표현인것이다. 이것은《대동아공영권》을 불어대면서《락토(乐土)》라고  떠벌인 일제침략자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요, 철저한 부정으로 되는것이다.
  다음, 윤동주는 당대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을 아주 함축적이면서도 철리적으로 표현했을뿐만아니라 자기의 저항의식을 상징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래일 래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래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아보니
그때는 래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래일은 없나니

 
  이것은 윤동주의 최초의 동시이다. 이 시를 단순한《새날》을 기대하는 동심의 표현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새날》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고《래일》을 찾던 시적주인공은 오늘과 같은 래일, 즉 오늘이 반복되는 래일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래일은 오늘이요, 때문에 래일은 없다는것이다. 여기서《새날》과 같은 광명의 래일이 올수 없다는 놀라운 시적경지에 올라선 윤동주를 우리는 기꺼이 바라보게 된다. 비극적 현실로 가득찬 오늘의 지속, 그것은 일제 치하의 현실이였으며 래일이 있을수 없는 비극적인 세월이였다.
 
하나, 둘, 셋, 넷

밤은
많기도 하다.
 
   이것은 윤동주의 마지막 동시《못자는 밤》의 전문이다. 윤동주는 내면세계의 불안한 정서를 잠이 오지 않는 시적주인공을 통해 간결하게 드러내면서 시적주장을 함축적으로 생략부호로 표현하면서 독자더러 그것을 음미하고 터득하도록 하였다.
   래일이 없는 비극적인 오늘, 잠을 못자는 고달픈 운명, 이것이 일제 치하에서의 우리 민족의 생활형편이였다.
   윤동주는 바로 이와 같이 일제 치하의 비극적 현실을 소묘적으로 재현하고 부정한 토대우에서 독자더러 철리적으로 음미하도록 하면서 일제침략에 대한 저항의식을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둘째, 윤동주는 조국과 고향을 잃은 우리 민족의 설음을 피력하는것으로써 조국을 빼앗고 고향에서 쫓아낸 일제침략자에 대한 저항의식을 오묘하게 드러내고있다.
  이런 시들로는《조개껍데기》,《고향집》,《오줌싸개지도》,《편지》 등이 있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다가에서
주어온 조개껍데기
 
여긴 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짝을 그리워 하네
 
아롱다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물소리
 
   윤동주의《조개껍데기》라는 이 동시는 아주 절묘한 구성으로 씌여 졌다. 바다가에서 주어온 조개껍데기가 짝을 잃고 그 짝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정서와 바다가에서 북쪽나라로 쫓겨 온 시적주인공의 물소리 바다물소리 그리는 망향(望乡)의 정서가 합쳐서 그 시적정서를 보다 풍부히 해주는 예술적효과를 드러내고있다.
  조개는 무엇때문에 바다를 떠났고 시적주인공은 무엇때문에 바다가를 떠났는가? 이것은 대단히 값진 물음이 아닐수 없다. 일제침략자가 고향땅을 강점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정든 고향을 떠났겠는가?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며 저도 모르는새 주먹을 그러쥐고 입술을 깨물며 일제침략자를 저주하는 시적주인공을 우리는 보는듯하다. 윤동주는 바로 이런 형상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저항의식을 자기의 동시에 예술적으로 다분히 부여하였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소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하늘 저 길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이것은 동시《고향집》의 전문이다. 이 동시에서는 두만강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왜 왔는가고 직접적인 물음을 들이 대고있다.
   이 시에서는 시적주인공은 보다 대담한 형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또 이런 물음을 제기하도록 시적주인공 뒤에 서서 부축해 주는 윤동주의 형상을 찾아 볼수가 있다. 바로 쓸쓸한 이 땅에 온것은 일제침략자때문인것이다. 이 결론은 우리 민족이라면 그 누구나 얼른 찾아 낼수가 있는 대답이였다. 때문에 작자는 문제만 제기하고 독자더러 음미하고 그 대답을 찾게끔 했던것이다.
  윤동주는《오줌싸개지도》에서 어머니를 잃은 시적주인공이 만주로 떠난 아버지를 그리는 소년의 비극으로써 일제침략에 대한 저항의식을 보여주었고《조개껍데기》에서는 고향에서 쫓겨난 나어린 애들이 고향을 그리는 정서로써 일제침략자에 대한 반항의 정서를 보여주었으며《고향집》에서는 고향을 떠난 그 원인을 장천(长天)에 묻는것으로써 일제침략자에 대한 분노를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셋째, 윤동주는 우리 민족의 문화의식을 고취하는것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윤동주는《조선독립을 위하여 조선민족문화를 사수》 7) 하려고 했다. 그는《학교에서 조선어수업을 페지하고 한글 신문잡지페간을 조선문화 즉 고유 민족성을 말살하고 조선민족을 멸망시키는것》8)으로 간주했다. 그는 조선민족의 언어와 글을 갈고 닦을것을 필생의 목표로 내세운 동시인이였다.
  때문에 한국의 평론가 김수복은《윤동주의 동시창작은 이러한 민족현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으며 그의 동시관 또한 그의 시가 지향하는 민족자아회복을 통한 민족정신의 앙양이라는 주제의식을 담고있다.》9)고 하였다.
  1937년, 일제침략자는 조선말과 글을 사용하는것을 엄금했다. 이리하여 아동문학계에서 김영일과 같은 사람들은 1940년대에 일본말로 일본침략자를 칭송하는 동요《대일본의 소년》이라는것을 써서《아이생활》에 발표하기까지 했던것이다.
  그러나 량심적인 민족주의자 윤동주는 계속 우리 말과 우리 글로 시를 썼으니, 비록 그런 작품을 발표하지는 못했지만 이 자체가 바로 저항시인의 모습을 뚜렷이 돋보여주는것으로 된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에
뭉기뭉기 웨인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거지 총각 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컬레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에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이것은 윤동주가 명동골안에서 보낸 어린시절을 바탕으로 해서 쓴《굴뚝》이라는 동시 전문이다. 화전민 아이들이 오막살이집에서 감자를 구어 주린 배를 달래면서 민족의 얼을 키우고있다. 우리 민족의 옛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감자를 먹고 그들은 날마다 커갔다. 그런 이야기에는 리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장군의 이야기가 들어있었을것이다.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족의식을 키운 어린이들, 그 가운데의 윤동주는 빨리도 성숙되여 27년 2개월 동안 벌써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으로 되지 않았는가!
 
가을 지난 마당에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읽으며
뒤발로는 글씨를 련습하지요
 
하루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자밖에 더 못쓰는걸
 
  이것은 실로 묘한 시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참새》라는 동시는 윤동주의 시적재주를 훌륭히 구현하고있다. 참새를 의인화하여 우리말 글씨공부를 하게 한 이것, 이 시각(视角)이 대단히 묘하다.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못 쓰게 하는 그런 비극적 시대에 참새더러 우리 말 글씨공부를 하게 한 윤동주의 착상 또한 얼마나 절묘한가! 이것은 바로 일제 언어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요 일제침략자에 대한 직접적인 반항으로 되는것이다.
   이같이 윤동주는 일제침략자에 대한 저항의식을 자기의 시에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당시 프로작가들이 자기의 리념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것과는 완전히 다른것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윤동주를 저항의 시인으로 보고 있다 물론 필자도 윤동주를 저항의 시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윤동주는 정치적이거나 구호적 동시로써 저항의식을 표현한 것이 절대 아니였다
  윤동주는 자기의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예술적인 형식을 빌어 간접적으로 반영했던것이다. 하여 윤동주의 동시는 한결 값비싼 사상미학적 가치를 가진 우리 아동문학의 성과적 보물로 되는것이다.
 
 
                                           결론
 
  이상의 론술을 모두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수가 있다.
  첫째, 윤동주는 동시창작으로부터 문단에 소문 없이 나타나 1930년대 조선동시혁신의 년대에 탐구적자세로 여러 가지 동시형태에 걸쳐 적잖은 성과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다가 특정된 년대에 사회와 모순 되는 자아를 발견하게 되면서 윤동주는 괴로워 하고 고민하고 방황하면서 더는 동심에 물젖어 동시를 쓸수 없다는것을 자각하게 되였다.
  게다가 나이를 점차 먹어가고 학식도 점차 늘어나게 되면서 현대파시에 대한 접촉으로부터 윤동주는 시창작의 출로를 성인시에서 찾게 되였다. 그리하여 점차 동시창작을 적게 하고 성인시창작을 많이 하게 되였다. 그 결과 윤동주창작에서의 성과는 성인시에서 많이 나타났지만 동시창작에서 얻은 성과 또한 홀시할수가 없는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윤동주의 동시창작은 그의 창작활동에서 자못 중대한 의의를 갖게 된다. 윤동주는 동시창작에서 어떻게 현실생활을 시적으로 반영하는가 하는것을 터득하였으며, 또 동시창작에서의 많은 탐구적 노력과정에서 많은 시적기교를 학습하고 장악하게 되였다. 하여 그는 동시창작에서 얻은 경험교훈을 살려 짧디 짧은 창작생애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빨리 성인시 창작에서 빛나는 성과를 올릴수 있었던것이다.
  둘째, 윤동주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 형성시기인 1930년대의 작가로서 중국조선족항일아동문학시기에 자유동시 확립의 정초자이며 예술적인 동시로써 반일저항의식을 오묘하게 반영한 우리의 자랑찬 동시인이다. 때문에 그의 동시작품은 우리 항일아동문학의 귀중한 재부로 되며 그는 또  우리의 중국조선족항일아동문학에서의 기둥작가일뿐만 아니라 1930년대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대표적인 동시인으로 높이 모셔야 할 작가로 된다 
  셋째, 윤동주는 중국북간도 태생으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대표자일뿐만아니라 그가 거둔 창작적성과로 하여 전반 우리 민족 아동문학에서도 그 위치 상당한 동시인인것이다.
  그는 1930년대 한반도 동시혁신운동시기에 많은 령역에 걸쳐 동시혁신을 위한 탐구적 노력을 하였고 또 훌륭한 동시들을 많이 써내였다. 특히 일제의 조선말 말살정책에 항거하여 우리의 아름다운 말과 자랑스러운 글로 성과적 동시를 써 내여 우리 민족  동시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운 작가로 되기 손색 없다는것이다.
  하기에 윤동주는《부끄럼 한점 없이》중국 조선족아동문학에서의 밝은 별로 천추에  빛날것이며 우리 민족문학사에서도  그 이름 영원히 빛날 것이다 
 
주해
1,성기옥<<정지용시에있어서 동시와 동심>>
2,김수옥<<윤동주 시세계>>
3,리재철<<세계아동문학사전>>제3페지
4,로원호 윤석중론<<명쾌한 동심의식과 지적정서>>
5,윤일주<<윤동주의 생애>>
6,윤동주판결문
7,<<특고월보>>1943.12 죄장
8,<<특고월보>>1943.12 죄장
9,김수복<<윤동주의 동시세계>>
 
*주:본문은 "윤동주 옥사 65주년 윤동주시포럼"(중국연길.2010.6.27)에서 발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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