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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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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수로 평생 명인대가로 인정되는 사람 없다?...있다?!...
2016년 11월 12일 03시 25분  조회:3783  추천:0  작성자: 죽림

문학창작의 세가지 현상시대


홍천룡

 

어느 땐가 문학편집과 작가협회회원들의 문단상황에 대한 견해발표모임이 있다는 전화통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중요한 모임이라 제딴에는 좀 어마어마하게《포》를 쏘자고 발언고를 준비했었다. 헌데 아쉽게도 그날 모임에서 랑독하지 못했었다. 두가지 원인이였는데 하나는 그날 토론초점이 준비한 발언고내용과는 천리나 떨어진 어느 한 작품에 집중되면서 열렬해졌던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찬시간이 다 되여왔기때문이였다.
전번날 《문학과 예술》잡지 주필님과 만난 자리에서 그의 원고부탁이 있었다.
《난 평론가도 아닌데…》했더니 그가 작품을 감상한 소감도 좋고 문단상황에 대한 소견도 좋으니 써보라고 고무해주었다. 믿어주고 밀어주는 고마운 부탁이니 써보리라 맘먹었다, 헌데 정작 쓰자니 무얼 어떻게 써야 할지 막연해났다. 애꿎은 담배만 태웠다. 몰몰 피여오르는 담배연기속에서 령감이 떠오른다는 말이 빨간 거짓풍선이라는 감이 들었다. 오히려 타래치는 연기따라 생각이 점점 헝클어지며 퍼지기만 했다. 안되겠다싶어 송구함이나 표시하자고 전화를 드는 순간에 그 발언하지 못했던 발언고가 생각났던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 발언고를 찾았다. 찾고보니 발언고라 역시 어수선했다. 할수없이 어설픈 발언고를 다시 정리하며 어설프게 써냈다. 어설픈 수준이니 별수 없었다. 
 

 《수도물》시대

쏴— 쏴— 무더운 여름날 수도꼭지를 탈아놓으니 시원한 감이 얼굴을 감싸준다. 아들놈이 큰대야에 수도물을 꼴똑 채워놓고 도마도며 참외며 오이를 왈왈 불궈놓는다. 먹기도전에 입안이 썽—해나며 상큼한 감이 든다.
《야, 맥주나 수도물처럼 콸콸 쏟아졌으면 좋겠어.》
《임마, 물 좀 절약하며 써라.》
《야, 아버지두 답답함다. 흔한게 수도물인데두.》
아들놈은 툴툴거리며 대야를 한쪽으로 밀어놓고는 시허연 물줄기로 퍼져내리는 수도물에 골을 들이밀어넣는다. 그리고는 머리며 얼굴을 마구 문대며 연신 푸푸거린다...
그래, 집안에서 제일 많이 써야 하고 제일 쓰기 편리하고 제일 흔하게 쓰는것이 수도물이 아닌가! 몇년전에 일본의 한 경제학자가 세계적인《수도물》시대가 바야흐로 닥쳐오고있다고 예언하였다. 상품이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 광고가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 맥주도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자연히 책도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 영화며 텔레비드라마도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게 될것이라는것이다. 서점에 가보면 책이 점점 더 많아진다. 허리굽혀 들어가는 책가게에도 신문잡지만 수백종 된다. 컴퓨터인테넷에 들어가면 마치도 물고기 왁실거리는 양어장에 뛰여든것 같다. 어느 놈부터 잡아야 할지...
음식도 너무 풍성하게 차려놓으면 맛있는줄 모르고 너무 흔하면 먹고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사람의 감수란 참, 묘하다. 그 옛날 사랑채세집방에서 살 때 귀한 손님이 오면 퍼런 비닐통을 들고 《쑈풀》(小铺儿)로 달려간다. 땅콩접시에다 짠지쪼각 달랑 놓고 생맥주 한컵씩 카- 하며 넘기고는 명태를 쭉 찢어 짭짭 씹어먹던  그 맛, 세계형세를 론하고 문학을 론하고 인생을 론하던 그 격정, 지구를 안고 세계를 울릴 호기였다. 마시면 마실수록 시원해지던 그 생맥주, 씹으면 씹을수록 쫄낏쫄낏해지던 그 명태쪼각, 말하면 말할수록 호매로워지던 그 마음속 호소, 통쾌하고 한없이 즐거웠던 그 밤, 그 밤이 왜 그토록 짧았던고?
지금은 귀한 손님이 오면 무슨 국제반점이요 세기호텔이요 하는 장소로 번쩍거리게 모신다. 진수성찬에다 고급맥주를 마시지만 기분나게 벌컥벌컥 마셔대는 사람은 별로 없고 맛있다고 료리를 짭짭 소리내며 먹어대는 사람은 더구나 없다. 오고가는 말도 공식적인 인사치례나 건투를 비는 어구들이다. 술이 서너순배만 돌아도 지루하다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 친구들이 있게 된다.
중국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많아서 손해볼게 없고 많아서 나쁠게 없다는것이다. 있는것이 없는것보다 낫고 많은것이 적은것보다 좋다는 우리의 생활론리이다. 우리 민족은 많은것 없이 살아왔고 모든것이 부족하게 살아왔었다.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날 좀 두두룩하게 벌어서 사고싶은걸 사고 먹고싶은걸 먹고 놀고싶은걸 놀며 흔장만장 써보는것도 뭐 크게 잘한다고 춰줄 일은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제멋에 살줄은 안다고 해야겠다.
우리의 문단상황도 대개 이러한것 같다. 없던데로부터 있게 되고 적던데로부터 많아지게 되는 과정을 걸어왔었다. 문학붐이 일기 시작했던 70년대말에는 작품 한편 발표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나 다름없었고 책 한권 빌려보기가 이웃집아저씨네 돈꾸기만치나 힘들었다. 대학교 2학년시절이라고 기억된다. 문학작품은 언어예술인데 언어가 풍부해야 써낸 작품도 토실토실한 도야지처럼 잡아먹기 알맞춤하게 살이 진다고 천세봉의 작품을 한번쯤 훑어보는것이 좋겠다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학교도서관을 찾았었다. 천세봉의 《석개울 새봄》을 차용해보자고 도서관의 뒤고방뙤창문같은 그 창구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번마다 허리굽혀 골을 들이밀고는 소리쳐본다. 번마다 나간게 안들어왔다는 답복이였다. 몇십번째였던지는 모르겠으나 그날 체육시간에 남몰래 빠져나와 도서관에 갔더니 면바로 그 책을 물리러 오는 조문학부학생과 맞띄우게 되였다. 얼마나 기뻤던지! 책을 넘겨받고보니 싯누런 포장지겉가위에다 시꺼먼 붓글씨로 제목을 써놓은것이였다. 슬슬 피루어보니 너무 보풀이 져서 앞몇페지는 기본상 글씨체가 알리지 않았고 기수페지 오른쪽아래면이 다슬어 반달이 된 곳이 적지 않았었다. 그날은 저녁식사때도 모르고 밤을 패가며 보았다. 색시를 안고 이불밑에서 황홀한 꿈을 꾸기보다 더 들큰한 향수였다. 그당시 얻기 바쁜 책 한권을 빌려다 본다는것이 더없는 행복이였다. 헌데 지금은 책이 많으니 그걸 다 읽어볼 시간도 없거니와 또 읽어본데도 그런 행복감을 느껴볼수가 없다.
작가협회 사오백명되는 회원들가운데서 해마다 작품집이 수십권내지 수백권씩 나오고 거기에 달마다 나오는 각종 잡지에, 날마다, 주일마다  나오는 신문지상에 발표되는 작품들을 합치면 얼마나 되겠는가! 옛날에 비하면 그야말로 콸콸 쏟아지는 수도물이라 할가 봄날의 우후죽순이라 할가! 복받은 독자들은 백화원 꽃밭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나비가 된셈이다.
세월은 글쓰는 사람들에게도 흥그럽게 돌아간다. 작품집이 나오면 무슨 발간의식이요 축하모임이요 좌담회요 하면서 문단의 저명인사들을 모셔놓고 작자에게 꽃바구니를 안긴다 축사를 올린다 하며 서로서로 덕담으로 보듬어주고 분위기를 돋군다. 클라이막쓰는 오찬에 가서 이루어진다. 서로서로 술잔을 나누며 축하도 해주고 고무격려도 해준다...
이런 모임이 빈번해지니 시뚝해서 잔소리를 하는 량반도 있고 곁에서 보아주기 민망하다고 코웃음치는 군자들도 있다.
《허, 또 그 모임이군. 안가면 좋아 안하지.》
《그 량반 작품집이 나올 때마다 부산을 떠는구만. 피곤해난다구.》
《그것도 뭐 작품집이라고 내놓고 법썩꾸려.》
... ...
점차 빈번해지니까 시끄럽고 걱정되여 뒤공론이나 해보는 불평들이라 가히 리해해줄만한 소리들이다. 허지만 필경은 호사인것만큼 좀 너그럽게 봐주면 너좋고 나좋고 다 좋을게 아닌가! 사오십년대에 태여난 사람이라면 최저로 한두번쯤은 호미자루를 만져보았을것이다. 사래 긴 콩밭이나 조이밭김을 두세이랑씩 매고는 밭머리에 나가서 오이랭국이나 감주를 마일 때가 많았었다. 땀발에 익는 몸을 적셔주는 그것이 얼마나 시원컬컬했던가! 농부에게도 순간적으로나마 그런 멋이 있게 된다. 문학창작 역시 고달프고 지겨운 글쓰기농사다. 애타게 써낸 글이라 자기의 작품을 《자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식》이 세상에 태여났는데 그래 술 한잔 들어 축하하지 않겠는가! 그 《자식》이 밉든 곱든간에, 그 《자식》이 많든 적든간에 다 귀여운것이다. 때문에 그런 모임이 빈번해진다고 시끄러워하시지 말고 군소리 없이 가서 축하해주는것이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윈칙이 아니겠는가! 요청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서로의 사정을 헤아려주고 말없이 축하를 보내주는것도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량심이라 하겠다.
《뭐, 그것도 작품이라고 내놓고 히뜩거려!》하며 비웃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어떤 작품은 학교작문이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개인서신이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어처구니없이 덜익어 시쿨기만 한것도 있다. 수도물도 맑을 때 있고 흐릴 때가 있다. 자식이 많으면 개중에는 《범새끼》도 있고 《시라소니새끼》도 있게 되는 법이다. 수준이 낮은 작품이 있어야 수준이 높은 작품이 알릴수 있지 않겠는가!
자연적인 동물계의 생태평형규률을 살펴보면 재미나는 현상들이 많다. 쥐들의 번식이 얼마나 빠른가. 지금 쥐를 깨끗하게 소멸할 뾰쪽한 수가 없다. 이쪽에서 약을 친다 착고를 놓는다 하면 벌써 저쪽에 가서 무리로 번식해나간다. 우글거리는 쥐무리를 보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헌데 쥐잡이능수인 뱀과 부엉이는 이 세상 그리 많지 못하다. 산양, 들소, 들말 등 초식성동물들은 수십마리, 수백마리씩 무리를 지어다니지만 그걸 잡아먹고 사는 사자나 호랑이같은 육식성동물들은 많지 못하다. 사자는 기껏해야 대여섯마리씩 무리를 지어다니고 호랑이는 단독행동이 많다. 그걸 비유해서 인류력사도 육식하는 민족이 강세할 때가 많았고 소식하는 민족이 그 압박을 받을 때가 많았다고 인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뭐, 그 말이 남녀궁합처럼 딱 들어맞는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내가 알고있는 력사숲을 헤집고 봐도 대개는 그러한것도 같다.
지금 우리의 작품창작에도 이런 경우가 많다. 《사자》나 《호랑이》같은 작품이 적고 《산양》이나 《들소》같은 작품이 많다. 듣건대 장백산야생동북범이 거의 멸종경지에 이르렀다가 요즘 훈춘변두리에서 가끔 두각을 내밀어 가뜩이나 심장이 약한 촌민들을 놀래웠다고 한다. 우리 문학동네에도 동북범같은 《호랑이》몇놈이 슬근슬근 내려와 《따웅!》하고 주변산곡간을 울려놓았으면 좋겠다. 문학동네에는 노루심장을 가진 사람이 별반 없으니 놀라 달아날 우려는 있을것 같지 않다. 저마다 장수이다. 어떤 장수는 적장 한놈을 베고 평생 명장이 되였고 어떤 장수는 평생 천군만마속을 좌충우돌하면서 수없는 병사를 무찌르고 명장이 되였다.
말하기는 부끄럽소만 필자의 경우도 전자에 속하는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근 30년전 대학교 3학년 때라고 기억된다. 한창 철없이 뛰놀 때라 문학동네 강아지가 되여보겠다고 《구촌조카》라는 소설 한편을 써냈다. 뭐, 지금에 와보면 소학교아이들 작문이나 다름없는 작품이였지만 그당시에는 확실히 호랑이새끼의 《따웅!》하는 울부짖음이 되여 시골의 문학동네에 범소리흉내를 냈던것이다.수천수만 독자들의 추천표와 편집과 평론가선생님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아 그해 문학상을 땄던것이다. 그후 세속의 소용돌이속에 빨려들어 허우적거리다보니 거의 붓대를 꺾다싶이 하였다. 지금도 술좌석같은데 앉아 아무개라고 소개하면 모르지만 《구촌조카》하면 대개 50대이상 사람들은 알아봐주는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의 놀림을 받아 얼굴이 화끈해날 때도 있다.
《너 뭐 〈구촌조카〉 한편을 던지고 평생 작가라고 점잖을 빼?》
《자식, 내가 언제 점잖을 뺐어?》
고금중외에 소설 한부, 시 한수, 노래 한곡, 그림 한폭으로 평생 대가로 인정받아온 명인들이 적지 않다. 채권놀음과 흡사하다 할가! 어떤 사람들은 채권에 재미를 붙여 수년간 수만원씩 처넣으며 채권을 샀지만 추첨되지 못해 궁지에 빠져서도 그냥 호기를 피우며 돈을 꿔서라도 밀어넣는다. 헌데 어떤 사람들은 별로 궁리도 없이 스치는 호기심으로 단 한번에, 단 몇푼 돈에 추첨되여 승용차를 타거나 몇백만원부자가 된다. 세월속의 어떤 일들은 리해하기조차 어렵게 공평스럽지 못하다.
수십년동안 문학창작에 혼신을 태우며 수백편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가 있다. 어느 한 모임에서 그를 장편 몇부, 중단편 몇백편을 써낸 작가라고 소개하였다. 뒤좌석에 앉은 몇사람이 수군덕거렸다.
갑: 《거 대단한 분이신데 대표작으로는 어떤 작품들이 있는가? 당신 봤나?》
을: 《글쎄, 이름을 들으니 어디서 본것같은데. 이봐 자넨?》
병: 《그렇지. 거 제목이 뭐더라, 한번 보다가 지루해서...》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개 신문출판방송 등 분야의 기자, 편집, 문화사업일군들이였다. 우리 사회의 제일 고급독자들이라고 인정해야 할 사람들이다. 정상적인 사유법칙으로 추리분석해본다면 수십년동안 수백편 써낸 작품들이 고급독자들에게 준 인상이 아리숭해졌다면 일반 독자들에게는 더 아리숭해졌을게 아닌가!   
여기에서 원칙적인 시비가 터진다. 그래 한두편 명작으로 이름 날렸다해서 문학동네좌상으로 모시고 한평생 부지런히 글을 써온 사람은 명작이 없다해서 동구밖파수군으로 내세우면 되겠는가? 구경 어느쪽이 더 위대한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
지금 소시장에 나가 소 한마리를 사자면 몇천원 내번져야 한다. 괜찮은 소는 만원묶음을 내놓고 흥정해야 한다. 헌데 범을 사자면 값이 없다. 자그마한 연길시내에도 백만부자, 천만부자는 물론, 억만부자까지 있다. 값이 있다면 어느 놈이 대부금을 끄집어내서라도 살것이다. 범은 고기뿐만 아니라 뼈다귀마저 명약으로 쓰이지만 너무 귀하다보니 잡아먹게도 못한다. 무송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다시 범을 때려엎었다면 옥살이를 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문학에서도 진정한 명작은 값이 없다.
《여보게, 자네 과거에 그처럼 위대한 명작을 써냈는데 요즘 골을 싸매고 들어앉아 다시 명작 한편 더 써내게. 내 몇백만원 메칠테니까.》
옛날에 명작을 써냈다고 오늘 또 명작을 써낼수 있을가? 명작이란 누가 시켜서 써내는것도 아니고 투자해서 그 효과를 보는것도 아니고 계획을 세워서 써내는것도 아니다. (간혹 그런 경우도 있을수 있겠다는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것은 아니지만.) 이런 명작을 누가 한평생에 한편을 써냈든 두평생에 반편을 써냈든 다 위대한것이다. 값이 없는것이니깐. 의례 동네좌상으로 모셔야 할것이 아닌가!
여기까지는 절반 시비를 가른 셈이다. 그래 호랑이만 호랑이라고 소를 무시해서 이 문학동네가 살아갈수 있겠는가? 시골이라 문학동네는 농가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문학》이란 밭을 갈아 《창작》이란 농사를 지어먹고 산다. 소가 없는 농부를 제농사군이라 할수 있겠는가! 한때는 《농부 애비없이는 살아도 소가 없이는 못산다》는 말까지 있었다. 최저한 추석날에 소고기국물이라도 마실수 있어야 동네인정이 도는것이다. 소도 부지런히 기르면 새끼치기를 자주 해서 늘어나게 된다. 작품농사도 그런것이다. 부지런해야 식구들도 먹여살리고 동네구제도 할수 있고 동네추렴에도 한몫 낼수있는것이다. 누구나 명작 한편 냈다고 그늘밑에 앉아 부채질만 하다가 건너마을색시가 더 고운가 해서 들락날락하며 세월을 보낸다면 곡식밭이 쑥밭으로 되여 범이 새끼를 칠게 아닌가! 독자들이 명작 한두편만 펼쳐놓고 자꾸 뜯어볼수는 없는것이다. 아무리 좋은 명작이라 해도 벌써 두번 다시 보면 재미없어지는것이다. 한평생 수십편, 수백편씩 되는 작품을 써내온 다산 작가들이 없었다면 우리 문학동네에는 진작 기근이 들어 동냥살이로 뿔뿔이 다 흩어졌을것이다. 그보다 방방곡곡에 있는 독자들이 그동안《배》를 곯아왔을게 아닌가!
기실 우리의 문단화원은 그들의 부지런한 손끝에서 가꾸어지는것이다. 또한 그들이 있기에 여러 가지 꽃이 제각기 울긋불긋 피여날수 있어 백화원을 이룰수 있었던것이다. 그래 이런 량반들을 동네좌상으로 모시지 않으면 되겠는가? 우선 앞으로 문단좌상으로 될 후배들이 들고일어날것이다.
이러고보면 다 위대한 창작가들인것이다. 한평생 명작을 한두편 써낸 사람도 위대하고 한평생 작품을 수십편, 수백편씩 써낸 사람도 위대한것이다. 결론은 무릇 문학창작에 달라붙은 사람이라면 다 위대한 인물인것이다. 그것은 문학창작이 인간을 연구하고 인간을 그려내는 인간수업이기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연구하는 사업보다 더 위대한 사업은 이 세상에 없다.
이런 위대한 사업을 한평생 한두편 명작을 써낸 사람도 좋고 한평생 수백편 작품을 써낸 사람도 좋고 다 같이 오늘날까지 추진해왔었다. 문제는 래일에는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것이다. 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니 우리 문학동네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있다. 시골마을인데도 아스팔트길이 마을복판을 가로 째놓고 승용차며 농기구들이 들이닥친다. 소궁둥이를 치며 밭갈이하던 목가적인 정경도 점차 찾아보기 힘들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너무도 빠르고 무정하게 뭉개며 나가니 마음만 들볶인다. 이럴 때일수록 철학적인 변증법적 사유가 수요된다. 남들이 승용차를 타고 질주한다고 소 탄 놈이 소궁둥이에다 채찍질만 해서야 되겠는가! 소란 놈은 빨리 달릴수록 멀리 못간다. 문학창작 역시 이러한 리치가 깃들어있다고 생각된다. 작품이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있는 오늘날, 남들이 수도를 탈아놓았다고 나도 덩달아 더 크게 탈아놓으면 그 수도물을 누가 다 쓰는가? 쌀도 일고 빨래도 씻어놓았고 구들장판도 다 닦아놓았는데...
작품의 사회효과성에 대해서도 우려되는 점들이 많다. 누군가는 작품집 이삼십권 찍어 친구들한테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동네개추렴》식이다. 개를 한마리 잡아놓으면 동네분들을 청해다 대접시키고 집식구들이 모여 둬어끼니 잘 먹을수 있을것이다. 물론, 자작작품에 자아도취되고 안해나 아이들이 감상해줘도 역시 일정한 사회효과성이 있었다고 볼수 있고 또한 개인적으로는 기념비를 세웠다고 할수 있겠다. 허지만 우리가 숭엄한 문학의 대문에 들어서서 신성한 창작의 붓대를 들었을 때에는 이런걸 바라고 쓴것이 아니잖는가! 우리 민족의 얼을 지켜나가고 우리 민족의 위용을 떨치자면 속도가 빠른 글로벌시대일수록 마음을 다잡아먹고 질적인 만속도를 추구해야 한다. 문학명작은 속도전이나 돌격전에서 나오는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토끼와 거북의 달리기에서처럼 거북이 되여야 한다는것도 아니다. 부지런히 쓴다고 해서 명작이 나오는것도 아니다. 빠른것과 늦은것, 많은것과 적은것, 다 문제의 관건이 아니다. 관건은 우리의 눈과 머리에 있다. 우리의 눈길로 세상을 잘 관찰하고 세상의 눈길을 우리한테로 끌어올수 있도록 머리를 써야 한다. 연예인들이 세상눈길을 끌자면 특수한 표현재질에 머리를 써야 하고 우리 문학인들이 세상눈길을 끌자면 세상사람들의 복잡한 정감세계에 눈길을 돌리고 머리를 써야 한다. 

 

《말썽》이 없으면 문단이 아니다
 

그제날 필자가 문단강아지로 발발 기여다닐 때의 일이다. 무슨 모임이였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술좌석이 한창 흐지게 퍼지고있을 때 저쪽 상에서 왁짝 고아대는 소란이 일어났다. 건너다보니 두 선배님이 서로 상대방의 코대에다 상앗대질 하며 입에다 김이 서려날것같은 거품을 끓이고있었다.
《이눔아, 거 망발이지...》
《이자식, 정신 좀 차려...》
당금 손찌검이 투닥투닥 터질것만같이 상태가 험악해지고있었다. 곁에서 벌떡벌떡 일어나 뜯어말렸다...
그때 받은 충격이 심각했었다. (문단에 점잖은 사람들도 그저 그렇게 노는구나.) 소학교저급학년시절 변소에서 나오시는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께서도 똥을 누시는걸가 하고 의혹을 가졌던것과 같은 천진한 심리라고 할가! 별로 문단이란 이 샛말간 물에 렴치없이 흙탕물을 뚝뚝 떨궈놓는다는 꽤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후에 편집사업을 하게 되면서 문단에 몸을 잠구고보니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 들어섰구나 하는 《공포감》을 느끼게 되였다. 괜히 오고가는 눈먼 총알에 맞을가봐 입을 단속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기실 문단에 나서 너좋고 나좋고 다 좋게 놀자고 해도 헐치 않은 일이였다. 때론 회의장소나 모임자리에서 공공연하게 서로 《포》를 쏘아댔고 때론 사무실이나 술좌석에서 뒤로 헐뜯으며 야유조소하기도 했다. 곁에서 맞장구질 쳐주지 않기도 게면적스럽게 된다. 서로간 무슨 모순갈등이 그렇게도 많은지?  크게는 누구와 누구는 한동아리라는 《립장문제》도 있고 작게는 건방지게 인사말 한마디 없었다는《례절문제》도 있다. 작품쟁론으로부터 관점문제, 사람관계, 자리다툼, 돈거래, 출국방문, 대상뽑기, 성격갈등, 주고받는 마음쓰기에 이르기까지《말썽》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혹간 외계친구들과 앉으면 핀잔받을 때가 많다.                               
《너네 문단에는 말썽거리도 많더구나.》
《글쓰는 사람들은 왜 물고뜯기만 하니?》
... ...
모르는 소리라고 까박을 주기도 하고 좋은 말로 해석해주면 더구나 넌덜넌덜한 구체실례까지 꼬챙이에다 꿰여가지고 민망하게 흔들어친다. 기분잡치게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확실히 문단이라는 곳이 다른 분야보다 특수하게 《말썽》이 많다는 감이 든다. 필자는 탄광에서도 일해보고 공장에서도 작업해보고 정부기관에서도 사업해보았었다. 다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인만큼 그 어디나 모순으로 충만되여있다. 허지만 탄광에서는 《말썽》이 없다. 모순이 격화되면 대개 툭!탁! 하고 피를 보는 싸움이 벌어진다. 공장에서도 《말썽》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일이 생기면 서로 책임추구다. 기관에는 좀 《말썽》이 있다. 그러나 국장이나 해당부서책임자의 한두마디 《지시》면 《말썽》이 인차 해결된다. 두번 다시 그 《말썽》을 일으켰다간 큰꼴 먹는다. 공장의 작업은 대개 흐름식이다. 만약 한 직장에 사고가 생기면 그 아래 모든 직장작업에 다 영향을 주게 되며 지어 직장밖의 보관, 운수, 판매에까지 영향이 미치게 된다. 한두 사람의 불찰로 전체 직공이 상금을 못탈 때도 있다. 때문에 서로 의존하게 되고 서로 믿게 되며 서로 조작규정을 지키게 되고 서로 시간을 준수하게 된다. 헌데 우리 문단에서의 글쓰는 일은 완전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혹간 집체로 창작할 때도 있다. 소설을 집체로 창작한다는 외국의 실례도 있지만 그건 특수정황이 아니면 창작법칙을 떠난 행위인것이다. 작품창작은 공장작업처럼 눈과 손으로 조작하는것이 아니라 주요하게는 머리로 한다. 전반 인류사회에서 뇌를 쓰는 일은 고급작업에 속한다. 고급작업을 하는 사람은 고급인간이다. 고급인간은 일반인간보다 아는것이 많다. 보편적으로 모르는 사람들의 입이 무겁고 아는 사람들의 입이 빠르다. 여문 곡식일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아는것이 많으면서도 입이 무거운 사람을 겸손하다고 하는데 기실 이 세상에서 진정 겸손한 사람은 얼마 안된다. 허다한 나라의 정치가들은 그 나라의 고급기둥감들이다. 무슨 선거를 할 때 보면 그들은 어찌 저렇게 뻔뻔스러울수가 있을가 할 정도로 제자랑을 뽐낸다. 대개 입이 드센 연설가들이다. 결국 나라는 그들에게 의해 다스려진다. 우리의 작가들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것도 일종 제자랑인것이다. 인류의 정감세계에 자기의 공헌을 과시하는것이다. 금전을 바라지 않고 글을 쓴 작가는 고금중외에 꽤나 되였으나 자기의 명성을 고려하지 않고 작품을 발표한 작가는 극히 드물었다. 혹간 환경의 제한으로 또는 개인적수요로 필명을 달고 본명을 피하는 사람들이 두루 있었으나 결국에 가서는 자기의 명예만은 따지고들었다. 앞으로는 필명을 리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적어질것이다. 이처럼 아는것이 많고 명성을 날려보겠다는 사람들이 남보다 입을 더 놀려보겠다는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작가들이 머리로 써낸 작품은 공장에서 기계로 제조해낸 제품이 아니다. 지금까지 수도물처럼 그렇게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나왔지만 도작과 모방작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작품이 한편도 없었다. 이것이 또한 문창작에서의 특징이다. 글쓰는 사람마다 제각기 사유가 다르고 개성이 다르다. 개성이 다른 사람들이 한분야에서 서로 교류하자니 자연 오고가는 말들이 서로 융합될수 없다. 그래서 자기의 의도나 관점을 대방에게 해석하고 접수하게끔 강요하니 대방이 또한 사탕알로 얼릴수 있는 삼척동자가 아니다. 오히려 제쪽에서 자기의 의도나 관점을 가지고 반격한다. 그래서 《말썽》이 일어난다. (내가 누군데! 네가 언감생심 내앞에서 굿거리질 해? 말썽을 피워보겠으면 입슬이 다슬도록 피워봐. 나는 나대로 내글 쓰겠다는거야. 이제 내가 써낸 글 좀 봐. 눈이 환히 트일거야.) 글쓴다는 사람이라면 대개 이런 오기쯤은 가지고있을것이다. 세상에서 내 작품과 같은 글을 써낼자 또 누가 있어? 있으면 좀 나서 봐! 세상에 둘도 없는 글을 내놓는 내가 그래 이런 오기쯤 한번 못부려볼손가! 얼마든지 큰소리 땅!땅! 쳐볼수 있는 자격자이다. 네가 큰소리 치면 나도 큰소릴 못칠가! 이렇게 생긴 《말썽》이 아주 자연스럽지 않는가! 정치무대에서는 《말썽》생겼다가 나중에 어느 한쪽으로 쏠리며 통일되여야 성과가 있다고 본다. 허지만 문단에서는《말썽》이 통일되면 그건 오히려 망태기가 된 현상이다. 작품끼리는 서로 개성이 다를수록 좋다. 그걸 써내는 사람들의 사유가 굳어져서 통일되면 공장의 제품처럼 똑같은것만이 뚝뚝 찍혀나오지 않겠는가!
대부분 《말썽》에는 서로의 욕지걸이가 많이 동반된다. 욕지걸이에는 궤변이 많을수 있는데 그 반면에 욕지걸이에도 진리가 있을수 있는가? 정신상태가 격한 감정에 의해 파렬되면서 실신(失神)적으로 튕겨나오는 언어이기에 론리적법칙이 완전하지 못하지만 대개 순간적인 진실과 허위만은 적라라하게 표현하게 된다. 욕지걸이에는 욕하는 사람의 사상경계, 도덕수양, 인식수준, 성격개성, 인간됨됨이 등 여러 방면의 특징이 종합적으로 표현된다. 때문에 누가 자기한테로 욕지걸이를 퍼부어왔다면 그것이 악의적이든 선의적이든, 터무니없든 있든간에 우선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 리유라면 첫째는 그 사람이 공짜로 당신한테 자기의 종합표현을 감상시켜준것이고 둘째는 당신이나 당신의 작품을 공개적으로 긍정해준것이다. 서로 상대가 되지 않으면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이 당신의 명예를 더럽히고 위신을 납짝하게 만들자거나 당신이 지금 앉은 자리에서 끌어내자거나 당신과 친구들지간에 리간을 붙이자거나 하는 비렬한 목적을 가지고 욕지걸이를 해왔다 해도 그럴 때에는 그 사람으로서의 필요성이 있었기때문인것이다. 그 필요성이 당신이나 당신작품을 선택했다는것은 기실 당신이나 당신작품자체를 긍정해준것으로 되는것이다. 세번째는 당신에게 당신의 종합표현을 이 세상에 보여줄수 있는 기회를 그 사람이 마련해준것이다. 세상에 욕지걸이를 얻어먹고도 가만 있을 사람이 별로 없다. 벌레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하지 않는가! 더구나 문단에 계신다는 고급인간으로서는 체신이 높은덕에 감각이 더 예민해질것이 아닌가! 반격이 가해지면 그 반격이 정의적이든 부정적이든, 옳든 그르든간에 대방의 욕지걸이와 마찰되고 충돌된다. 그것이 마찰되고 충돌되면 소리가 생긴다. 소리가 생기면 사람들의 청각을 자극하여 자연 구경군들이 모여들게 된다. 사람이 많게 되면 자연 시비가 갈라지게 된다. 혹간 시간이 걸려서야 갈라질 시비도 있고 또한 영원히 갈라질수 없는 시비도 있을수 있지만 총적으로 이런 욕지걸이나 《말썽》을 통해 많은 일들과 관점이 명백해진다. 또한 그걸 통해 어떤 사람은 한결 더 위망이 높아갈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위신이 더 납짝하게 될수도 있다. 그리고 그다음 《말썽》에 가서 그 위치가 바뀌여질수도 있다.
문단에 《말썽》이 많은것이 결코 나쁜 현상은 아니다. 물론 《말썽》이 일어나면 서로간의 단결에 불리할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의기소침해져 창작에 영향을 끼칠수도 있고 심리적고통으로 건강에도 해가 될수 있겠지만 할수 없는 일이 아닌가! 자기의 의사대로 돌아가는 문단이 아니잖는가! 애당초 문단에 몸을 잠구지 않았더라면 이런 시달림은 받지 않았을텐데! 그러지 마시고 생각을 한번 바꾸면 되는것이다. 소위 글쓴다는 고급인간으로서, 인류령혼의 공정사라는 신분으로서, 인간의 복잡한 정감세계를 파고들며 생생한 인물형상을 부각해낸다는 작가로서 요만한 《말썽》속의 생활을 한번 체험해볼수 없겠는가! 한번, 두번 체험해보노라면 오히려 면역력이 생겨 창작에도 유리할수 있고 건강에도 유리할수 있고 더 높은 차원의 단결에도 유리할수 있다.
물이 맑으면 고기가 없다는 말이 있고 큰고기일수록 요동치며 일으키는 파문이 크다는 말이 있다. 란세속에서 영웅이 나오듯 《말썽》속에서 명작이 나오고 대가가 나올수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로신선생도 《말썽》속에서 명작을 써내셨고 김학철로선배님도 《말썽》속에서 붓대를 꺾지 않고 민족의 얼을 지켜오셨다. 무엇이나 통일적인것을 반가워하시는 모주석께서도문화예술분야에다는《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방침을 제정해주셨다. 《말썽》도 일종 쟁명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주의할것은 《말썽》이 무리한 탈선행위로 번지여져서는 안되고 또한 《말썽》을 통해 파벌을 묶어서는 안된다. 력대로 문단풍격은 《단식치기(单打)》였지 《무리싸움》이 아니였다.
 

《귀신》철학

 
  요즘 누가 옛말을 들어봤는지? 지금은 아이들도 옛말을 듣기 싫어한다. 또 들을사이도 없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옛말을 제일 듣기 좋아했었다. 특히 귀신옛말이라면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오돌오돌 떨며 들었다. 필자가 살던 공신 《웅덩개마을》엔 《성7건(省七建)》에 다니는 미장공아저씨가 계셨는데 허씨였던지 서씨였던지...귀신옛말을 귀신같이 잘했었다. 여름밤, 그집 마당가엔 쑥태를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올랐고 그 주위에는 늘 마을에 조무래기들이 눈이 초롱초롱해서 빙 둘러앉는다. 코를 훌쩍거리는 놈, 쑥태연기에 콜록거리는 놈, 별놈들이 다 있다. 허지만 귀신옛말이 아슬아슬한 정절에 이를 때면 그놈들 코물이 한뼘이나 허옇게 내리드리워도 훌쩍거리지 않았고 쑥태연기가 자오록해도 콜록거리지 않는다. 옛말이 끝나면 집이 코앞인데도 무서워서 못가는 겁쟁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미장공아저씨가 한놈 한놈씩 집까지 안아다주군 했었다. 그처럼 무서운 귀신옛말을  왜서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처럼 듣기 좋아했을가? 귀신옛말에는 유물론적인것도 있고 유심론적인것도 있으며 변증법적인것도 있고 형이상학적인것도 있다. 그 철학적원리를 신선같이 터득하고 귀신같이 활용한것이다. 아마 그래서 청자들의 마음을 꽉 옭아맬수 있었지 않나싶다.
지금 세계적으로 과학환상소설이나 영화, 텔레비드라마들이 인기가 높다고한다. 책으로 찍으면 몇백만, 몇천만씩 나가고 영화로 찍으면 너도나도 앞다투어 본단다. 두루 어떤 장면들을 스쳐보면 그제날 귀신옛말과 흡사한데가 많았다. 그 순식간에 변하고 날아다니는 대형거물들이 대개 귀신옛말에서 나오는 귀신형상들과 엇비슷한 감이 든다. 그래서 요즘은 엉뚱하게도 귀신같이 귀신같은 생각을 가져보기도 한다. 한번 좀 귀신이 되여 귀신같은 글을 써볼수 없을가!
   헌데 귀신이 되겠다면 귀신이 될수 있는건가? 지난 세기 60년대말에 적잖은 글쓰는 사람들이 《귀신》으로 몰리웠었다. 《귀신》이 되고싶어 된것이 아니라 남들이 씌워주는 《귀신》모자를 억울하게 쓰고 인간대접을 받지 못했던것이다. 지금 그 량반들더러 다시한번 더 《귀신》이 되여보라고 하면 아마 두주먹을 불끈 쥐고 치를 떨것이다. 이런걸 알고있는 내가 왜서 귀신이 되여보고싶은 미친 생각이 떠올랐을가? 내 미친 생각에는 귀신이 되면 다음과 같은 좋은 점이 있을것 같다.
   우선 신비스러워질것이다. 그 사람 귀신이 되였나?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의혹을 가지고 다 알고싶어 할것이다. 어떻게 생겼는데? 먼곳에 있는 사람들은 사진이나 찍어 빨리 인테넷에 올리라고 야단일것이다. 지금까지는 공개적으로 공포된 귀신사진이 없었다. 아마 공포되는 날이면 세계유명 보도매체들에서 앞다투어 달려오느라 란리가 날것이다. 초상권양도비는 얼마씩 불러야 할지 지금부터 골머리가 욱씬거린다. 헌데 그 사진에 어떤 모습이 나타날지 귀신이 되여보겠다는 나로서도 신비스럽다. 그 옛날 귀신옛말을 듣고 조무래기들끼리 주고받던 말이 떠오른다.
  《나 어제밤꿈에 귀신을 봤어.》
  《 어떻게 생겼더니?》
  《도깨비처럼 생겼더라.》
  《도깨비는 어떻게 생겼는데?》
  《귀신처럼 생긴거지.》
  《피-, 가짓부리.》
  지금은 정말이지 거짓부리가 아닌 귀신이 되여보고싶은 마음이다.
    그다음 귀신이 되면 자유스러워질것이다. 귀신의 자유는 일반 자유가 아니다. 인간사회를 초월할수 있는 자유이고 우주의 시공간을 초월할수 있는 자유이다. 달나라화장실에 들어가 뒤를 볼수도 있고 햇님네 꾸린 찜질방에 들어가 한껏 몸을 풀수도 있다.
   세번째 좋은 점이라면 더없이 만족스러워지는 감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컬컬하면 천도복숭아도 따먹을수 있고 술생각이 나면 룡왕생회를 초장에 쳐서 안주할수도 있다. 상아아씨가 고우면 딸라묶음을 안겨줄수도 있고 어느 놈이 괘씸하게 놀면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한바탕 혼빵나게 해줄수도 있다.
   이밖에도 좋은 점이 많고도 많다. 한입으로 한꺼번에 어찌 다 말할수 있으랴! 글쓰는 놈이 귀신이 되여보겠다니 귀신이 된다음에는 그래도 제일 하고싶은 노릇이 귀신같은 글을 써보자는 일일것이다. 글을 귀신같이 쓰면 다음과 같은 좋은 점이 있겠다고 느껴진다.(옛말에서는 귀신의 나쁜 점을 너무 많이 말했었다. 그 엎음갚음으로 오늘은 귀신의 좋은 점을 더 말하고 싶다.)
  첫째로는 상상력을 마음대로 펼수 있을것이다. 귀신은 사람들이 하는 노릇도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것도 상상해낸다. 귀신이 되면 벼라별 상상을 다 해볼수 있지 않겠는가!
  둘째로는 작품의 깊이를 깊게 파낼수 있을것이다. 지금 작품을 감상하고나면 좀 아쉬운 감이 들 때가 많다.
  《야, 요거 한삽만 더 팠더라면...》
  그 한삽때문에 독자들에게 실망을 줄 때가 많고 그 한삽때문에 자신도 고민할 때가 많다. 그 한삽을 파자면 힘도 힘이겠지만 머리로써 꾀를 써야 한다. 꾀란 철리성의 활용이다. 우리의 적지 않은 작품들은 철리성이 부족하기에 가벼워보인다. 대개 몸이 가벼운 사람이 빨리 뛴다고 한다. 허지만 승용차는 자체중량이 무거울수록 속도가 빠르고 평온하다. 때문에 일반 승용차는 한둘이서 밀수 있지만 고급승용차는 한둘이서 밀기 빠쁘다. 귀신들에게는  꾀가 많다. 꾀를 쓰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였다가 바다밑 물고기로 변하기도 하고 하늘로 날아다니는 새로 둔갑하기도 한다. 세상 있을수 없는 일이지만 우주공간의 자연법칙과 인간사회의 생존법칙은 떠나지 않는다. 웅덩이가 점점 좁아져서 마지막 한삽을 파낼래야 파낼수 없을 때 귀신으로 변하면 꼭 파낼수 있는 꾀가 생길것이다. 귀신같은 꾀가 생길수 있다면 그 어떤 작품의 깊이도 다 파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셋째로는 대담하게 글을 써낼수 있을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것이 무엇이냐? 인간으로서는 죽음의 공포일것이다. 헌데 귀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개 귀신들은 한번씩은 죽었다났으니깐. 한번 죽으면 어떻고 두번 죽으면 어떠랴 하는 귀신들의 심리였을것이다. 우리의 작품들도 대개 몇개의 사선을 넘게 된다. 우선 귀천길 행차 자결행위이다. 애면글면 써낸 글이 자기마음에도 들지 않아 목을 매서 자살한다. 그다음 편집출판기관의 내부판결이다. 공개지면에 나갈수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을 때가 있게 된다. 그리고 독자들의 공개판결도 있다. 발표되여 나간다음 대부분 독자들이 《글같지 않은 글》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그 작품은 끝장을 보게 되는것이다. 또 지역, 민족, 제도, 종교적인 판결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 발표될수 있는 작품이 다른 나라에 가서는 발표될수 없는것이 있다. 세월이 흐르노라면 력사의 판결도 있게 된다. 어떤 작품은 력사의 국한성이나 사회의 모종 환경의 제한으로 하여 그당시 발표되고 그당시 인정받지만 세월이 얼마쯤 흘러간뒤, 그 세월의 흐름이 짧을수도 있고 길수도 있는데 문뜩 사회에 해를 끼치는 독초라고 인정되면 곧 사형받게 되는것이다.
이러루한 사선들이 봉쇄선을 치고있기에 글쓰는 사람들은 구상으로부터 집필, 수개, 탈고계단에 이르기까지 이러저러한 제한과 속박을 받게 되고 고려와 우려를 가지게 된다. 그것이 습관이 되여 양성으로 발전하면 《창작성치매증》에 걸리게 될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귀신이 되여 글을 쓰게 되면 그어떤 제한과 구속도 받지 않을것이고 그어떤 고려와 우려도 가지지 않을것이다. 마음껏 상상하고 통쾌하게 좔좔 내갈길수 있는것이다.
넷째로는 요술스러운 변화기법으로 글을 써낼수 있을것이다. 귀신들의 제일 큰 특점이 요술스러운 변신기교다. 헌데 우리의 일부 작품을 보면 줄거리의 전개나 인물의 형상부각이 너무나 꼿꼿한 전선대와도 같다는 감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잔잔하고 느리게 변화되는것이다. 사계절변화처럼 여름에는 여름옷을 입고 겨울에는 겨울옷을 입는식이라 하겠다. 삼복철 여름날씨에 겨울옷을 입고 한번 서시장 한복판에 나서보시라. 숱한 사람들의 눈길을 한꺼번에 끌어올수 있지 않겠는가! 어느 한 작품의 작중인물이 숨막히게 물크는 여름날 정오에 털외투에 털모자를 쓰고 목수건까지 꽁꽁 둘러치고 서시장 한복판에 섰다고 가설해보자.
《저 사람, 좀 오락가락하는구만. 신수는 멀쩡한데.》
《얘, 잘 생겼다야!》
《아, 고과장이 왜 저래고 나섰지?》
... ...
숱한 사람들이 신수가 멀쩡하고 기관에서 한자리나 한다는 사람이 왜 여름날 겨울옷을 입고 나섰을가 하는 의혹을 강렬하게 느낀다.
이튿날, 고과장은 미색샤쯔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착 매고 그 미끈한 체격을 탄력있게 자랑하며 사무실로 출근했다. 습관적으로 사무상을 정리하고는 담배 한대 피워물고 창가에 서서 창밖을 응시했다. 금방 풍문을 얻어들은 국장이 음침한 기색으로 들어섰다.
《고과장, 어제 집에서 뭘 했댔소?》
창가에 그린듯이 서있는 고과장은 까땍 미동도 없다. 파르스름한 담배연기가 그의 곱슬머리를 감쳐물고 타래치며 서려오른다. 침묵이 흐른다. 빠금히 열린 문밖에는 기관의 남자녀자들이 까치발 세워가며 서로의 어깨너머로 기웃거린다. 국장의 면상이 한쪽으로 찌그러진다. 그 면상이 한번씩 찌그러지고 난뒤에는 속으로 눈물을 흘린 녀자도 있었고 뒤에서 가슴을 친 남자도 있었다.
《고과장!》
몸이 오싹해 날것같은 차디찬 목소리다. 미구에 고과장이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엔 눈물이 글썽거리고있었다.
《아니, 고과장-》
고과장의 한일자로 담겨진 입은 끝내 열려지질 않았다.
그 다음날, 더욱 놀라운 소식이 기관청사 각 과실로 쫙 퍼져나갔다.
《고과장이 죽었대.》
《왜 죽었다니?》
《어떻게 죽었어?》
술좌석에서도 고과장곁에 앉고싶어했던 녀자들, 평상시 고과장의 능력에 질투해왔던 동료들, 고과장을 제 팔다리처럼 써먹어왔던 국지도어른들, 모두가 다 한결같이 고과장의 죽음에 대해 알고싶어했다...
여름날에 겨울옷을 입은것, 겨울날에 여름옷을 입은것, 특이한 변화라 일시에 거리바닥에서 오고가는 길손들의 눈길을 끌수있는 장면이다. 우리의 작품에서 크게는 이야기줄거리, 인물의 성격과 운명, 작게는 먹고마시고 잠자고 노는 세절에 이르기까지 귀신같은 요술스러운 변화들이 많아야 독자들의 인기를 끌수 있다고 느껴진다. 작품이 귀신의 요술처럼 변화무쌍하게 엮어졌다면 그것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것이고 또한 그것이 우주공간의 자연법칙과 인간사회의 생존법칙을 위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예술의 진실에 부합되는것이다.
이밖에도 좋은 점이 많다. 글을 귀신같이 쓰면 이처럼 좋은 점도 많지만 또한 나쁜 점도 많다. 가장 나쁜 점이라면 모험스러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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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 늘 "서탑"을 쌓고 쌓는 시인 - 김창영 2016-11-11 0 3816
1809 장르적인 경계를 깨는 문사 - 조광명 2016-11-11 0 3836
1808 김철 / 장춘식 2016-11-11 0 4182
1807 "조양천"과 김조규 2016-11-11 0 3585
1806 "국어 교과서 편찬"과 김조규시인 2016-11-11 0 3910
1805 "만주"와 유치환 2016-11-11 0 3674
1804 {자료} - "두루미 시인" - 리상각 2016-11-11 0 3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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