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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의 시와 만주체험
장춘식
1. 청마의 생애와 만주체험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 1908~1967)은 한국에서 등단하여 상당한 문명(文名)을 이룬 후 중국에 들어와 활동한 시인이다.
청마의 본관은 진주(晉州)이지만 경남 통영에서 출생하였다. 형 유치진(柳致眞)은 현대 극작가이다. 유치환은 11세까지 외가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22년 통영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일본 도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형 유치진이 중심이 된 동인지 ������土聲������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가세가 기울어 4학년 때 귀국하여, 1926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였다. 그 후 당시 시단을 풍미하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감동하여, 형 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掃除夫������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 ������文藝月刊������에 시 「靜寂」을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뒤 잡다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부산에서 문예동인지 ������生理������를 주재하여 5집까지 간행하고, 1939년 첫 시집 ������靑馬詩抄������를 발간하였다. 여기에 초기의 대표작인 「깃발」, 「그리움」, 「일월」 등 55편이 수록되었다.
1940년 3월, 통영협성고등학교 교사직을 사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빈강성 연수현(煙首縣)으로 이주하여, 농장관리인 겸 정미소 경영인으로 5년여를 살았다. 이때 만주의 황량한 광야를 배경으로 한 허무의식과 가열한 생의 의지를 쓴 시들이 제2시집 ������生命의 書������(1947)에 수록되었다. 1945년 6월말 귀국하였고 광복 후에도 활발한 시작활동을 하였다. 1953년부터 고향에서 줄곧 교직으로 일관하였고, 안의중학교(安義中學校) 교장을 시작으로 하여 경주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거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1967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시집으로는 상기 2권외에도 ������울릉도������, ������보병과 더불어������, ������청령日記������, ������청마시집������, ������제9시집������, ������유치환선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미루나무와 남풍������,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이 있고, 수상록으로는 ������예루살렘의 닭������과 2권의 수필집,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 등이 있다.
이상의 경력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1940년부터 5년여에 걸치는 만주체험이다. 32세부터 37세까지 청장년기의 중요한 시기를 만주에서 보냈다는 말이 되는데, 그 체험은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시집 ������生命의 書������를 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절실한 것이었다. 본고에서 관심을 가진 부분도 이 시기의 시작품이다.
청마의 시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유치환의 시와 만주체험을 연관시켜 검토한 연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 주목하여 본고에서는 유치환의 시와 5년여에 걸친 그의 만주체험을 연관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텍스트는 주로 보고사의 ������중국조선민족무학대계5 현대시������(2006) 유치환 부분을 이용하고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였다.
2. 원시적인 생명력과 현실 부정의 의지
유치환의 시를 흔히 “생명에의 의지”라는 표현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를 서정주와 더불어 생명파 시인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만큼 유치환의 시에서 생명에 대한 관심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강한 생명의 욕구가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生命의 書 一章」1)을 보면 그런 생명에의 의지 혹은 욕구가 얼마나 강하게 시인의 가슴 속에서 약동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생명의 욕구 혹은 생명에의 의지는 진리 혹은 생명의 본질을 찾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화자는 아라비아의 사막에 자신을 내맡겨 생명의 본질을 경험해보고자 한다. 구도자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생명의 예찬이라 하겠다.
「生命의 書」2)에 오면 그러한 생명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은근히 내비친다.
뻐치뻐치 亞細亞의 巨大한 地檗 알타이의 氣脈이
드디어 나의 故鄕의 조고마한 고흔 丘陵에 다었음과 같이
내 오늘 나의 핏대속에 脈脈히 줄기 흐른
저- 未開쩍 種族의 鬱蒼한 性格을 깨닷노니
人語鳥 우는 原始林의 안개 깊은 雄渾한 아침을 헤치고
털 깊은 나의 祖上이 그 廣漠한 鬪爭의 生活을 草創한 以來 敗殘은 오직 罪惡이었도다-.
내 오늘 人智의 蓄積한 文明의 어지러운 康昧에 서건대
오히려 未開人의 朦衡(?)와도 같은 勃勃한 生命의 몸부림이여
머리를 들어 우르르면 光明에 漂渺한 樹木우엔 한點 白雲!
내 절로 삶의 喜悅에 가만히 휘파람 불며
다음의 滿滿한 鬪志를 준비하여섰나니
행여 어느때 悔恨없는 나의 精悍한 피가
그 옛날 果敢한 種族의 野性을 본받어서
屍體로 업드린 나의 尺土를 새밝앟게 물드릴지라도
아아 해바라기같은 太陽이여
나의 좋은 怨讐와 大地우에 더 한층 强烈히 빛날지니라.
「生命의 書」 전문이다. 울분에 넘치는 생명의 원천을 화자는 알타이산맥과 닿아있는 종족의 핏줄에서 찾는다. “저- 未開쩍 種族의 鬱蒼한 性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말이 알타이어계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인종도 알타이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미개적 종족의 생명력은 패배를 모르며 오히려 패잔은 죄악이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내 오늘 人智의 蓄積한 文明의 어지러운 康昧에 서건대/오히려 未開人의 朦衡(?)와도 같은 勃勃한 生命의 몸부림이여” 라는 두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지혜에 의해 축적된 현대의 문명은 “어지러운 康昧”인 반면에 미개인의 생명력은 발발하며 몸부림친다. 원시와 현대를 대결시키고 있는 형국인데, 여기서 현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고 해도 문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문명비판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뒤에 나오는 회한(悔恨)없는 자신의 정한(精悍)의 피가 그 옛날 종족의 과감한 야성을 본받아서 죽으면서 자신이 엎드린 작은 땅을 새빨갛게 물들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와 연관시켜보면 현실에 대한 저항의 의미는 더욱 강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행인 “나의 좋은 怨讐와 大地우에 더 한층 强烈히 빛날지니라.”에서 그러한 생명욕구와 과감한 야성의 죽음에 대한 환희는 절정을 이룬다. 다시 말하면 암울한 현실에서 시인 유치환이 추구했던 것은 미개적 종족의 과감한 야성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본연적인 생명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시적 혹은 본연적인 생명력을 숭상한 유치환에게 있어 원시성에 대한 문명의 잠식은 일종의 모독이나 다름이 없다. 「濱綏線 開道에서」3)는 그런 시인의 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白雪에 덮힌 山山”에 “칠칠히 樹木이 들어”선 “老爺嶺도 高嶺子 길은 山間”은 원시적인 생명력의 상징이 되겠고 철도역과 술집, 집 등은 현대문명을 상징한다 하겠는데 그렇다면 “敢히 年輪도 헤아릴수 없는 아람들이 老木들이/서슴 없이 발목짬을 찍히어/씻을수 없는 罪狀 같이 마을바닥에 어지러이 덩거리만 남아 박혔나니” 라는 표현은 원시적인 생명에 대한 문명의 유린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화자에게 있어 그러한 문명의 유린은 겨우 “작은 人爲의 冒瀆”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人爲의 冒瀆엔 關焉할바 없는 深深한 바람이 일고/그 무엔지 利慾하여 여기에 어울린 작은 마을은/의지 없어 다시 그의 있을 바를 모르도다” 라는 표현은 결국 문명보다는 태고의 원시성이 훨씬 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유치환은 인간 지혜의 축적에 의해 이루어진 현대문명과 종족의 과감한 야성 사이의 대결을 통해 문명비판을 시도함으로써 작품의 중심은 오히려 미개인의 야성에 대한 지향성에 놓여진다. 그리고 이런 지향성은 현실의 삶에 대한 분노를 동반한다. 「怒한 山」4)에서 이점은 확인된다.
그淪落이 거리를지켜
먼 寒天에山은 홀로이 돌아앉아 있었도다.
눈뜨자 거리는 저자를이루어
사람들은 다투어 貪婪하기에 餘念이없고.
내 일즉이
호올로 슬프기를 두려하지 않었나니
日暮에 하늘은 陰寒히 雪意를 품고
사람은 오히려 우르러하늘을 憎惡하건만
아아 山이여 너는 높이怒하여
그寒天에 구디 접어주지말고 있으라.
「怒한 山」의 전문이다. 시인은 분노를 울분으로 풀어낸다.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저항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지는 않고 있으나 이 작품의 화자는 어딘가에 울분을 토한다. 어쩌면 하늘과 산의 대결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그 하늘(寒天)과 그 산은 그냥 하늘과 산이 아니라 화자의 심상이 부여된 하늘이요 산이다. 그것을 우리는 “사람들은 다투어 貪람하기에 餘念없고” 라는 표현에서 조금은 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늘도 노한 모습이다. “陰寒히 雪意를 품”었다고 한 것은 그런 하늘을 우러러 증오하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분노를 잉태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는 산더러 더 높이 노하여 그러한 한천에 굽어들지 말라고 호소한다. 결국 화자 자신이 음한히 설의를 품은 하늘보다도, 그에 굽어들지 않고 분노하는 산보다도 더 울분에 차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한다. “神도 怒하시기를 그만두섰나니”나 “地獄의 惡靈같은 주린 그림자를 끌고/因果인양 피의 復讐를 헤이는/아아 너 이 슬픈 陰樹.” 라는 유치환의 또 다른 시 「陰獸」5)의 표현에서 이점은 좀 더 뚜렷해지는 것이다.
문학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제의 중국 동북강점기간은 문학을 통한 현실 부정이나 비판의 자유를 빼앗긴 시간이었다. 따라서 우리 시인들은 여러 가지 시적인 장치를 이용하여 우회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이나 인식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유치환의 경우 현대문명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한편 그것을 원시적인 삶의 야성과 대립시킴으로써 일종의 울분과 비분강개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시작품 중에서 원시적인 야성을 생명력의 원천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환희로 표현한 것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3. 죽음과 허무의식
유치환의 시에서 생명에의 의지 혹은 집착은 상기와 같이 원시적 혹은 근원적 생명력에 대한 욕구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죽음이나 생명의 허무의식으로도 표현된다. 어쩌면 생명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며 따라서 이때 시인의 상상은 좀 더 인간의 본능에 근접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내 너를 내세우노니」6)에서 시인은 생명을 지극히 극한적인 상황에 놓고 그 본질을 실험해본다. “호을로 人類를 떠나 짐승같이 彷徨ㅎ다가/마지막 어느 氷河의 河床 밑에 이르러/주림과 寒氣에 제 糞尿를 먹고서라도/내 오히려 그 모진 生命慾을 버리지 안겠느뇨” 고독과 극한적인 실존의 상황 속에서도 생명욕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고는 다시 존재의 허무를 떠올린다. “다시 내 너게 묻노니//薄暮의 이 연고 없이 외롭고 情다운/아늑한 거리와 사람을 버리고/永劫의 주검!/눈 코 귀 입을 틀어 막는 鐵壁 같은 어둠속에/너 어떻게 호을로 종시 묻히어 있겠느뇨” 그러나 여기서는 비록 섬찍한 죽음의 공포와 이로 인한 허무를 내비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실존적인 생명의 욕구를 강하게 드러낸다. 극한적인 상황이란 사실상 생명의 의지력에 대한 시험의 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다른 작품인 「兒殤」7)이나 「六年後」8)에서처럼 아이의 요절을 슬퍼하는 어버이의 허탈한 심정을 표현한 것도 죽음을 통해 삶에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 된다.
그러나 「虛脫」9)에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실존에 대한 회의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 앓이어 잠 못이루는 한밤
宇宙도 知覺도 죽고
붉은 등불에 비쳐 있는 房안은
오직 하나 지켜 있는 實在!
記憶도 關聯도 意味도 숨고
壁도 시렁도 책상도
奇怪한 魑魅의 나라의 形象을 하고
곁에 잠든 안해 마저
겨우 한개 物體로 化石 하였나니
아아 이 虛脫한 時空에서
너는 무엇을 믿겠느뇨
아득한 어둠 저편
가늘게 떠는 별빛이뇨
한숨 짓는 바람결이뇨
오직 한오라기 앓이는 齒神經!
「虛脫」의 전문인데 여기서 화자의 실존은 허무하다. 잠든 아내마저 하나의 물체로 화석해 있다고 했으니 허탈의 극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단 하나 “앓이는 齒神經”만이 실존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實在”하고 있는 것은 치아의 아픔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치통이 심하여 그 아픔이 너무 클 때 느끼는 허탈이기도 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하게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회의 혹은 허무의식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허무의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 작품은 아무래도 「드디어 알리라」10)라 하겠다.
드디어 큰악한 空虛이였음을 알리라
나의 삶은 한떨기 이름 없이 살고 죽는 들꽃
하그리 못내 감당하여 애닯던 生涯도
정처 없이 지나간 一陣의 바람
須臾에 멎었다 사라진 한점 구름의 자취임을 알리라
두번 또 못올 세상
둘도 없는 나의 목숨의 終焉의 밤은
日月이여 나의 주검가에 다시도 어지러이 뜨지를 말라
億兆 星座로 燦爛히 九天을 裝飾한 밤은
그대로 나의 큰악한 墳墓!
지성하고도 은밀한 풀벌레 울음이여 너는
나의 永遠한 소망의 痛哭이 될지니
드디어 드디어 空虛이었음을 나는 알리라
작품 전편이 죽음과 허무의 집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공허(空虛)” 혹은 허무의 이미지들로 점철되어 있다. 화자 자신의 삶을 “이름 없이 살고 죽는 들꽃”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애닯던 생애를 “정처 없이 지나간 一陣의 바람”으로, “須臾에 멎었다 사라진 한점 구름의 자취”로 인식한 것은 철저한 허무의식이다.
그러나 허무는 생명 존재에 대한 인식의 한 측면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록 이런 허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극복하려는 의지보다는 어느 정도 허무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노출되기는 하였지만 허무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인식은 나무랄 바가 아니라 하겠다. 생명이란 결국 삶과 죽음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4. 광야의 삭막함과 방랑의 욕구
유치환의 시에서 생명에의 의지나 지향성은 늘 자연적인 것, 원시적인 것과 연결된다. 숲, 사막, 광야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또한 중국이라는 유치환이 생활했던 자연환경과도 무관하지 않거니와 이를 통해 유치환은 생명의 본질을 보다 근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유치환의 시에서 만주벌판의 삭막함은 일차적으로 초기 이민시인들이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이민지에 대한 선입견 혹은 편견 같을 포함하고 있다. 「합이빈도리공원(哈爾濱道裡公園)」11)이 이 경우에 속한다. “五月도 섯달갓치 흐리고 슬푼 季候/사람의 솜씨로 며진 밧 하나 업시/크나큰 느름나무만 하늘도 어두이 들어서서/머리우에 가마귀 終日을 바람에 우짓는” 등의 표현은 거친 땅의 이미지다. 그만큼 이주민에게 있어 “만주”라고 하는 이민지는 춥고 거칠고 음산한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록 자연현상 자체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래서 상대적으로 따뜻한 한국 땅에서 이주해온 유치환에게 있어 그러한 자연은 불모의 땅이고 차가운 기후가 되었겠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인이 이러한 춥고 거친 땅에 이주해올 수밖에 없는 현실과 운명일 것이다. 「北方十月」12)이라는 작품에는 이런 느낌이 좀 더 강하게 표현된다.
이곳 十月은 벌써 죽음의 季節의 始初러뇨
까마귀는 城귀에 모여들 근심하고
다시 天日도 볼 수 없는 한 장 납빛 하늘은
荒漠한 曠野를 鐵柵인 양 눌러 막아
아아 北方 이 巨大한 鬱暗의 意志는
娼婦인 양 虛無를 안고 나누었나니
내 스스로 여기에다 버리려는 孤獨한 思惟도
이렇게 적고 찾을 길 없음이여
호을로 허물어진 城터에 서건대
朔風에 남은 高粱대만
갈 데 없는 감정인 양 못 견디어 울고
한떼 騎馬의 흙빛 兵丁 있어
人力이 아닌 듯
黙黙히 西쪽 벌 끝으로 向하여 달려가도다
여기서 화자의 느낌은 북만의 열악한 기후와 환경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넘어선다. 이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죽음, 어두움(까마귀, 울암)과 차가움(朔風)이다. 표면적으로는 북만 지역의 자연에 대한 화자의 느낌을 그대로 드러낸 것 같지만 여기에는 자연환경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자연에서 화자가 느끼는 의식의 암담함이다. 그리고 그 의식의 암담함은 자연에서 보다는 현실적인 삶 혹은 사회의 암담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유치환의 방랑벽은 홀로 된 호젓함과 상실감을 동반한다. 때로는 누구도 알아줄 이 없는 허허벌판에서 마음의 고요를 찾지만 때로는 또 그러한 황막함에 당황하고 그런 자신을 체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車窓에서」13)라는 작품은 전자의 경우에 속한다. “아무도 아는이 없는 새에 자리 잡고 앉으면/이 게 마음 편안함이여”에서는 그러한 화자의 느낌이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편안함”은 “기름때 저린 ‘유치환이’”와 연관되어 삶의 고달픔과 불안함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를 동반한다. “義理니 愛情이니/그 濕하고 거미줄 같은 속에 묻히어/나는 어떻게 살아 나왔던가”라는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불만이 이를 반증해준다. “내만의 생각의 즐거운 외로움에/이 길이 마지막 西伯利亞로 가는 길이라도/나는 하나도 슬퍼하지 않으리”라는 결구부분의 강조된 표현은 현실적인 삶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강한 방랑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인지 유치환은 “절도(絶島)”와도 같은 적막을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허구한 歲月이/광야는 외로워 絶島이요/새빨간 夕陽이 물 들은/세상의 끝 같은 北쪽 의지 없는 마을”이라고 한 「絶島」14)의 이미지가 그렇다. “큰악한 終焉 인양/曠野의 하로는 또 지오”에서는 그런 자학적인 즐김이 뚜렷이 엿보인다. 「郭爾羅斯後旗行」15)에서는 유랑의 땅이 절대고독 속에 잠겨 울적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멀수록 알뜰한 너 생각 의지하고/이 외딴 세상의 외딴 하늘 우러러/나는 家畜과 더불어 살 수 있으리”라는 표현이 그렇다. 그러니까 적막에 대한 즐김은 실제로는 역시 “자학적인 즐김”에 다름이 아니다. 다수의 경우 유치환의 방랑 욕구는 현실적인 삶에 대한 불만과 직결되어 있다. 「絶命地」16)라는 작품이 그렇다.
고향도 사랑도 懷疑도 버리고
여기에 굳이 立命하려는 길에
曠野는 陰雨에 바다처럼 荒漠히 거칠어
타고 가는 망아지를 小舟인 양 추녀 끝에 매어두고
낯설은 胡人의 客棧에 홀로 들어 앉으면
嗚咽인 양 悔恨이여 넋을 쪼아 시험하라
내 여기에 소리없이 죽기로
나의 人生은 다시도 記憶치 않으리니
「絶命地」의 전문인데 이 작품에서 화자는 죽어도 자신의 인생을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렇다고 현재의 위치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曠野는 陰雨에 바다처럼 荒漠히 거칠어”라는 표현에서 이 점은 확인된다. “낯설은 胡人의 客棧에 홀로 들어 앉으면”이라는 표현에서 보는 것처럼 화자는 아직도 이민지의 현지에 적응되지 못하였으며 그래서 오열처럼 회한을 풀어낸다. 고향도 사랑도 회의도 다 버리고 떠나왔다고 했으니 떠나온 고향 땅에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다. 화자의 삶이 얼마나 극한적인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에게 이제 남은 것은 여전히 방랑이요 방황이다. 「曠野에 와서」17)의 경우 비록 “興安嶺 가까운 北邊의/ 이 廣漠한 벌판 끝”에서 망나니들처럼이라도 안정을 찾고자 하지만(“내 망난이에 본받아/화툿장을 뒤치고/담배를 눌러 꺼도”)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더 암담해진다. “나의 脫走할 思念의 하늘도 보히지 않고/停車場도 二百里 밖/암담한 진창에 갇힌 鐵壁 같은 絶望의 曠野!”는 갇침 속의 암담한 현실과 방랑의 욕구를 모순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설흔여섯 나이가 보람없이 서글퍼/이대로 활개치고 萬里라도 가고지고.” 라고 한 「北方秋色」18)의 이미지 또한 마찬가지 경우가 된다. 그러니까 유치환의 시에서 광야의 삭막함과 방랑의 욕구는 암담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한 한 수단이 되는 셈이다. 이런 탈출의 욕구 혹은 방랑의 욕구는 「새에게」19)에서 가장 잘 표현된다.
아아 나는 예까지 내처 왔고나
北만주도 풀 깊고 꿈 깊은
허구한 세월을 가도 가도 인기척 드문 여기
여기만의 외로운 세상의 福된 태양인 양 아낌없는 햇빛에
바람 절로 빛나고 절로 구름 흐르고
종일 두고 우짖고 사는 벌레소리 새소리에
웃티 벗어 팔에 끼고 아아 나는 드디어 예까지 왔고나.
작품의 제 1연인데 화자가 방랑의 한 중간역 쯤으로 도착한 곳은 비록 “허구한 세월을 가도 가도 인기척 드문” 곳이지만 어느 정도 만족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이 주는 만족감이라 하겠는데 그러나 그러한 인적 드문 자연 속에서 화자가 느끼는 것은 부끄러움이다. “내게는 오직 汚物 같은 五臟과 향수와 외롭고 부끄럼만이 있거늘-” 여기서 “汚物 같은 五臟”은 아무래도 현실 속에서 오염된 자신을 말할 것이고 그러한 오물 같은 현실은 자연의 순수함과 대결을 이룬다. “그 지극히 안식한 앉음새로 푸른 별과 더불어 고운 꿈자리를 이룰 게냐” 라는 표현은 순수한 자연에 대한 진일보한 찬미가 될 것이다. 결국 화자의 방랑은 이러한 대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아 하늘 땅 사이 이렇듯 적적히 흘러넘치는 햇빛 가운데서도
내가 가질 바 몸매 하나 갖추지 못하고
아아 이 외로운 길을 지향없이 가야만 하느니
나는 내쳐 가야만 하느니.
그러니까 유치환의 방랑 욕구는 현실과 현실 속에서 오염된 자신을 탈출하려는 욕구에 다름 아니다. 이는 앞항에서 살펴본 문명비판과도 맥이 닿아있다 하겠는데 이 점은 일반적으로 이주민이 느끼는 방랑의 슬픔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난다. 다수의 이주민은 삶의 터전을 상실한 상황에서 부득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주를 선택하였지만 유치환의 방랑은 새로운 정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방랑 자체를 위한 방랑이라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그렇다면 유치환의 방랑 욕구는 상당정도 개인적이며 주관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5. 향수와 정체성 인식의 변화
유치환은 서른두 살 나던 1940년 3월 만주에 들어온다. 따라서 유치환의 신분 인식은 기본적으로 망명자 혹은 유랑자의 그것에 해당된다. 이 점은 당시 만주에 정착하여 살면서 문학 활동을 했던 여타의 문인들과 구별된다. 그렇기는 하나 그의 시작품에도 이민자의 정체성 인식이 점차 심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유치환이 점차 만주 조선 이주민으로 신분이 변화되어 가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歸故」20)의 경우 고향에 돌아온 화자는 잠깐 외출에서 돌아온 젊은이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고향은 정답고 마음 편하다. “힌 冊曆처럼 愛情에 날그신 어머님 겻테서/나는 고온 新刊을 그림책인양 보앗소”에서는 아직 이국땅에서 돌아온 이민자의 흔적마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思鄕」21)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화자는 이제 이국땅에 정착해 사는 이주민이다.
鄕愁는 또한
검정 망토를 쓴 병든 고양이런가.
해만 지면 은밀히 기어와
내 대신 내 자리에 살째기 앉나니
마음 내키지 않아
저녁상도 받은 양 밀어놓고
가만히 일어 窓에 가 서면
푸른 暮色의 먼 거리에
우리 아기의 얼굴 같은 등불 두엇!
「사향」 전문인데 이제 이국땅에서 어느 정도의 안정을 찾은 화자에게 있어 고향은 아직도 아픔이다. 그래서 향수는 “해만 지면 은밀히 기어와” 화자를 괴롭힌다. 그만큼 아직은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기가 어려웠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더 슬픈 일은 그렇게 아픔으로 다가오는 고향에 대한 정은 이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편지」22)는 편지라고 하는 고향 혹은 고국과의 통신수단을 매개체로 하여 향수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전략)
한나절 가도 드날이 업서
마을엔 그뉘나 사는지 마는지
개도 안짓고
닥도 안울고
앗든 消息
이봄 들어 두장이나 편지 왓단다
「편지」의 후반부이다. 앞부분의 정답던 추억에 이어지는 이 예문은 고향의 피폐상을 암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도 안짓고/닥도 안울고”라는 표현에는 영락한 고향의 이미지가 담겨있고 마지막 연의 “앗든 消息/이봄 들어 두장이나 편지 왓단다”는 고향의 불길한 소식을 전해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걱정이 암시된다. 그리고 편지라는 표제가 이 마지막 행에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예측은 한결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흔히 말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과는 전혀 반대의 암시이고 또 그러한 암시를 제시하기 이전의 표현들이 영락한 고향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고향은 그냥 정다운 땅만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즉 고향에 돌아간다고 가정하더라도 현재 이국땅에서 겪는 아픔보다 별로 나을 것 같지 않다는 말이다.
「우크라이나寺院」23)이라는 작품은 조국을 멀리 떠나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운명을 동정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는 남을 동정한 것으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異國의 땅에 고이 바친 삶들이기에/十字架는 一齊히 西녘으로/꿈에도 못잊을 祖國을 向하여 눈감았나니” 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인 자신의 운명, 혹은 이주민의 운명과 등치된다는 점에서 결국 자신의 슬픔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가필의 흔적이 엿보이는 「道袍」24)와 「飛燕과 더불어」25)는 그런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 두 작품은 이국땅에 살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曠野의 기나긴 해를” “먼 故國 생각에 가까스로 보”내는 “한궈人”, “꺼우리팡스”로 인식하는 이주민의 슬픈 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때 화자의 신분인식은 이중적이다. 몸은 이민지에 살지만 마음은 항상 고국과 고향에 가 있으며 또 그럼에도 고향에는 갈 수 없는 이주민의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沙曼屯附近」26)에 오면 상황은 어느 정도 변화를 보인다.
쓸쓸히 陸橋의 난간을 비치던 落照도 사라지고
먼 거리로 돌아가는 人車소리 끊이고 나면
어디선지 말똥냄새 풍기는 푸른 밤이 고요히 드리워져
보슬보슬 별빛 내리는 菜田 새로
화안히 불 밝힌 성글은 窓마다
단란한 그림자 크다랗게 서리고
이슥하여
車窓마다 꽃다발 같은 旅愁를 자옥 실은
二十三時 十七分 마지막 南行列車가
바퀴소리 멀리 멀리 남기고 굴러간 때는
도란도란 이야기에도 지치어
마을은 별빛만 찬란하오.
이 시의 화자는 비록 아직도 “車窓마다 꽃다발 같은 旅愁를 자옥 실은/二十三時 十七分 마지막 南行列車가/바퀴소리 멀리 멀리 남기고 굴러간 때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은연중에 고향을 생각하지만 이민지의 삶에 적응되어간다. “하늘도 曠野갓치 외로운 이 北거리를/짐승갓치 孤獨하여 호을노 걸어도/내 오히려 人生을 倫理치 못하고/마음은 望鄕의 辱된 생각에 지치엇노니”27)에서 보이는 이민지에 대한 부적응의 이미지들이 이 작품에서는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아직도 “쓸쓸히”, “말똥냄새” 등 이민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간혹 보이지만 “보슬보슬 별빛 내리는 菜田”, “화안히 불 밝힌 성글은 窓”, “단란한 그림자”, “도란도란 이야기”, “마을은 별빛만 찬란하오” 등과 같이 밝고 안정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주조를 이룬다. 결국 이때에 와서 유치환은 점차 이민지의 삶에 적응되어 갔고 이민시인으로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6. 시대적 혹은 역사적 상상력의 결여
유치환은 오래전부터 친일의혹을 받아왔다. 대표적으로 그가 남긴 「수(首)」28), 「전야(前夜)」29), 「북두성(北斗星)」30) 등이 친일시로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들녘」31)마저 친일작품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들녘」은 일제의 괴뢰정부인 만주국 치하에서 평화롭고 아름다운 여름의 풍경을 밝게 그렸다는 점에서 현실 순응 혹은 체제 협력의 경향이 노출되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이를 친일시로 보는 것은 무리다. 만주국이 비록 일제가 조작한 괴뢰정부이기는 하나 일제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수」의 경우 작품에 나오는 “匪賊”을 공산당 항일 빨치산으로 보고 따라서 이를 친일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시기 사용한 “비적”이라는 개념에는 공산당 항일 빨치산도 포함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공산당 빨치산이라는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마적” 혹은 “토비”라고 하는 비적들이 이 시기에 사라졌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전야」와 「북두성」이다. 「북두성」의 경우 더러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亞細亞의 山脈 넘어서/東方의 새벽을 일으키다” 라는 2행의 표현에서 “동아공영”이라는 일제의 식민주의 이념이 반영되어 친일적인 경향이 노출된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야」에 담겼던 새 역사, 새 세대의 도래가 「북두성」에서는 ‘동방의 새벽’ 도래로 되풀이한다.”32) 라는 박태일의 평가는 일리가 있다. 박태일은 이 시를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을 이처럼 힘차게 녹인 시는 드물다”고 평한다. 그리고 “그(유치환)의 개성 가운데 하나인 거대 관념적 상상에다 시인의 목소리를 잘 묶은 부왜시”로 결론짓는다. 물론 그와는 정 반대의 주장도 있다. “‘아세아’를 시인이 디디고 있는 어둠에 갇힌 땅의 은유로 읽고 ‘동방의 새벽’을 ‘서광에 빛나는 아침’으로 읽어도 된다.”33)는 정과리의 주장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정과리 자신이 희석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아래의 「大東亞戰爭과 文筆家의 覺悟」라는 글에서 노출된 유치환의 시대 인식은 이런 해석을 곧바로 뒤집어 놓는다.
박태일이 “새 역사, 새 세대의 도래”를 표현했다고 지적한 것처럼 「전야」는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구가했다는 혐의가 짙다. “새 出發의 그 年輪에서/征服의 名曲을 부르려니/勝利의 秘曲을 부르려니……”라는 말미의 표현은 더욱 그런 혐의를 확신하게 한다.
새 世紀의 에스프리에서
뿔뿔이 樂想을 빚어
제가끔 音樂을 演奏하다.
死… 生 破壞…建設의 新生과 創設
天地를 뒤흔드는 歷史의 심포니…….
聽覺은 神韻에 魅了되고
새 世代에의 心臟은 울어 울어
聖像 아래 魔笛은 소리를 거두다.
驚異한 神技 가운데
섬과 섬이 꽃봉오리처럼 터지다
森林과 森林이 鬱蒼히 솟다.
무지개와 무지개 恍惚히 걸리다.
薔薇빛 舞臺 위에
熱演은 끓어올라
樂屋 싸늘한 壁面 너머로
華麗한 새날의 饗宴이 豫言되다
終幕이 내려지면
偉大한 人生劇에로 옮길
많은 俳優 俳優들은
새 出發의 그 年輪에서
征服의 名曲을 부르려니
勝利의 秘曲을 부르려니…….
시인은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새 세기 개척을 위한 악장에 비유한다. 그리고 이를 섬마다 아름다운 꽃봉오리 터지고 삼림이 울창하며 무지개가 황홀한 유토피아적 현실로 표현한다. 철두철미 “황국신민”의 입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시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작품에는 아직도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은 없다.
이런 점에서 「大東亞戰爭과 文筆家의 覺悟」라는 글은 유치환의 내면화된 친일 문학 성향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大東亞戰의 意義와 帝國의 地位는 일즉 歷史의 어느 時代나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比類업시 偉大한것일겝니다.
이러한 意味로운 오늘 皇國臣民된 우리는 조고마한 個人的 生活의 不便가튼것은 數에 모들수 업는만큼 여간 커다란 보람이 안입니다. 時局에 便乘하여서도 안될것이고 時代에 離脫하여서도 안될것이고 어데지던지 眞實한 人間生活의 探求를 國家의 意志함에 副하야 展開시켜가지 안으면 안될것입니다.
나라가 잇서야 山河도 藝術도 잇는것을 枚擧할수 업시 目擊하고잇지 안습니.
오늘 赫赫한 日本의 指導的 地盤우에다 바비론 以上의 絢爛한 文化를 建設하여야 할것은 오로지 藝術家에게 지어진 커다란 使命이 아닐수 업습니다.34)
여기서 유치환은 자신을 “황국신민”으로 자처하며 “국가의 의지함에 부하”여야 한다고 한다. 같은 명제로 ������만선일보������에 게재된 10편의 글은 대체로 비슷한 성향을 나타내는데 문제는 같은 제하에 글을 게재한 다른 9명의 문인이 대체로 30대 미만의 젊은 문인들 혹은 아직 무명의 문인들인데 비해 유치환만은 이미 30대 중반이 된 기성문인이라는 점이다. 김조규나 현경준, 함형수 등 당시 만주 조선인 문인들 중 기성문인이라 할 수 있던 이들은 이 명제 글에 기고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왜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상기의 분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치환은 현실에 늘 불만을 가지며 때로는 분노하기도 한다. 또한 삶의 허무와 그 극복에 시적인 재능을 보여 왔다. 그런데 이들 현실에 대한 불만을 따져보면 기본적으로 개인적이다. 생명에의 의지 표현이든 방랑의 욕구 표현이든 향수의 표현이든, 더구나 허무주의적인 이미지들은 역사와 사회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유치환은 개인의 의지와 욕구와 생명에만 충실했던 셈이다. 민족적인 사명감이나 역사적 책임의식 같은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작가적 자세 혹은 문학적 성향 때문에 일제의 강력한 식민주의적 강압에 직면하여 곧 바로 머리를 숙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상기 박태일의 주장이 정확하다면 유치환은 일제의 대동아공영과 같은 식민주의적 이념을 시적으로 내면화시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시인의 이와 같은 작가적 자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유치환은 역사적 혹은 시대적 상상력이 결여한 시인이었다는 말이 된다.
7. 결 론
유치환의 시는 기본적으로 생명에의 지향성으로 일관하고 있다. 만주체험이 유치환의 시심에 준 영향도 주로는 이런 측면이다. 거친 만주 땅의 자연 형태는 이런 생명에의 지향성에 원시적인 야성의 이미지를 더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에의 지향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역사나 사회, 시대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원시성과 문명의 대결도 사실상 개인적이 삶과 관련될 뿐 시대나 사회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유치환의 시에 친일적인 부분이 노출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시대적 혹은 역사적 상상력이 결여된 시인의 의식은 외부적인 압력이 강하게 다가올 때 쉽게 변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식민지 사회 민족의 위기에 대한 사명감, 책임감이 뚜렷하지 못했던 유치환에게 있어 체제 협력이나 “부왜”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일제의 식민주의 담론이 조선사회와 만주사회에 만연되어 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 <국제고려학> 제13집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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