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비우기와 마음 세우기
―임강빈론 -
홍 희 표
(시인·목원대 교수)
3. 시적 공간
(1) 그리운 사물 채우기
임강빈의 시는 어디서 출발하는가. 우리는 이미 그의 전 시세계를 관류하는 유교적 선비정신에 대해서 통찰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시가 조선조 선비들이 지닌 관념과 표백된다든지, 시인이 그러한 삶의 모습을 향수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의 인간됨이나 시 전체에 아주 막연하게 감지되는 느낌을 단정하여 규정한 것일 뿐이다. 그의 시의 구체적인 출발점은 사물을 응시하는 그의 독창적인 눈빛의 현현이며, 거기에 묻어나는 무욕(無慾)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서정을 지켜가려는 시인의 결백한 마음은 초기시에서부터 단단한 언어로 그의 시 속에 자리 잡는다. 그는 제2시집인 『冬木』의 자서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나에겐 무엇보다도 소망스러운 일이다. 이것을 떠나서는 한가닥 나의 진실은 위태롭기만 하다"고 토로한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시를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절대적인 대상으로 간절히 부둥켜 안으려 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임강빈에게 있어 시쓰기란 자신의 존재 전체를 현시하는 진실한 작업임을 본다. 그렇지만 그는 시를 통하여 자기를 섣부르게 말하려는 시인이기 보다는 시 자체에 자기를 겨우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것이다. 다만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이 진실하게 드러나기를 갈망할 따름이다.
요컨대 우리는 그러한 임강빈 초기시에서 시에 대한 그의 순백한 자세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간결하리 만큼 너무 맑아 필요한 그늘마저 찾기 어려운 느낌"을 주기도 하려니와 그의 시가 지닌 정서의 순연함은 세속에 거리를 둔 유적함을 지닌다. 아울러 그러한 순수한 시심을 견지하기 위한 언어에 대한 장인적 연마는 시의 응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는 항상 말을 아낀다.
그의 시에서 군더더기 수식이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시를 통해서 그 어떤 감정을 과시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렇듯 그의 시는 잘 절제된 언어가 야무진 짜임새로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그의 시는 자연과 사물에 가까이 가고자 한다. 사욕이 전혀 배제된 순백한 마음으로 그는 한편의 시에서 다루고자 하는 대상에게 민들레처럼 접근한다.
크고 작은 숱한 항아리 옆
민들레가 피었다.
솔 한 그루
굽어보듯 서 있는
그림 같은
愛情.
무엇이나
가득히 담아주고 싶도록
그토록 하늘마다 향한
둥그런 門.
아아
나도
항아리 옆에 피어가는
노을이 되고 만다.
― [항아리] 전문
그는 우주적 침묵으로 사물을 응시한다. 그 관조자의 눈빛에는 사심이 없다. 즉 자신이 주시하는 그 대상을 뿌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이념을 구현코자 하는 세속적이고도 전위적인 인간의 사욕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는 그저 대상을 보고 그리고 그 대상에 자신을 동화시키고자 한다. 그 응시로 그가 찾아낸 것은 무정한 대상으로 알았던 사물의 그리운 풍요로움이다. 사물은 오히려 인간에게 가르쳐준다. "무엇이나/ 가득히 담아 주고 싶도록/ 그토록 하늘마다 향한 / 둥그런 門"을 열어두고 옹졸한 인간의 마음에 여유를 준다.
결국 그는 자신이 대면한 자연이나 한 사물에게서 인간의 결벽, 인간의 옹졸, 인간의 불완전함을 채우고자 한다. 이러한 시인의 사심없는 사물에 대한 인식은 사물과 자신과의 동일시에 이른다. [항아리]에서 다다른 그러한 일체감은 "머리말/ 꽃병/ 허무한 항아리/ 빈손으로 돌아와/ 꽃무더기 속/ 내가 있었다"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는 결코 그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의 본질 속으로 자신이 몰입하여 들어가고자 한다. 인간이 사물을 부리고자 함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사욕이 개입된 사물에의 응시는 항시 그 의미가 굴절되기 마련이다. 임강빈의 시에는 그러한 사물에 대한 집착이 없다. 그는 "우리집 비좁은 마당/ 비집고 들어와/ 피어준/ 장미 앞에 서고 싶다"고 순연하게, 그러면서도 간절하게 느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자체로 아름답게 스스로의 존재에
형용되는 대상을 경이롭게 혹은 감사하게 응시한다.
그러나 임강빈은 그 대상에게서 자신의 내면을 본다. 이는 그가 [추부에서]와 같이 자연이나 대상을 거의 무관심하다 싶을 정도로 묘사하던 태도와는 달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시쓰기에 진정한 시인의 존재 가치를 체현한다.
언제부터인가
새는
울고 있거나
아니면
懺悔하는 노래일 것이다.
또는
慈悲와 같은
그런 웃음이나마
卿卿 새겨가는 것인가.
울고 있는 것인지
웃음 같은 것인지
스스로 분간 못하는
새.
차라리
자유롭지 않아도
좋았을 날개를
또 한번 하늘 높이
펴보는 것이다.
― [새] 전문
"새"를 통해서 자아를 들여다 본 작품이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본다는 것은 비극성을 전제한다. 자아는 내면의 고통스런 헤집기를 거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강빈의 그러한 과정은 예외적인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봄이 현란한 충동이나 격렬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윽하고 깊게 정제되어 있다. 그는 조용히 상처받은 감정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가 보고 있는 그것은 고독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 머물러 있는 고독은 "조용한 고독, 청결하기 조차한 고독"이다.
그의 초기시를 관류하는 이 고독의 주체는 임강빈에게 시인으로서의 길을 강요한 내면의 진실이다. 고독이야말로 인간의 심성이 서정적으로 기울도록, 내면의 황홀함에 취하도록 밀어올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고독이란 낱말"을 자신의 시쓰기에 절대적 분위기로 받아들이고 있다. 시란 고독한 사람의 고독한 작업 속에 생산되는 미적 양심임을 그는 자신의 시작 초기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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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한 줌 ― 조오현(1932∼ )
어제, 그끄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 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날려 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나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 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 줌뿐이네.
옛날,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를 떠나 산에 들어왔다. 하는 일은 절의 소를 돌보는 것이었다. 시간이 빠르게도 흘렀고, 느리게도 흘렀지만 소년은 산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소를 먹이던 소년은 ‘무산’이라는 법명의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스님이 된 그는 언젠가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재 한 줌’은 바로 그 스님 시인의 작품이다.
조오현 시인은 산에 산다. 그곳의 돌이나 나무처럼, 부처와 산을 보며 오랜 세월을 지냈다. 그래서인지 시에서는 맑은 향내가 난다. 특히나 세상의 너무 많은 조언으로 마음이 버거울 때 그의 시를 읽으면 참 좋다. 내가 나를 혼내고 싶을 때, 대신 그의 시를 읽으면 더 좋다.
시에 의하면, 시인은 어제 장례식에 참석했다. 도반, 즉 함께 도를 닦던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다. 곁에서는 여러 사람이 울고 있었고 시인은 화장한 재를 뿌렸다. 이 1연이 ‘오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면, 2연은 ‘오래된 죽음’을 이야기한다. 2연에서 시인은 오래된 부도를 바라보고 있다. 부도는 스님의 유골을 보관하는 돌탑을 말한다. 오래된 부도에는 어떤 스님의 오래된 유골이 담겨 있을 것이다. 시인은 오늘의 죽음을 보고 내려오다가 또 다른 죽음마저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죽음, 나아가 삶 그 자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생각 끝에 얻은 의미가 3연을 채우고 있다.
내가 죽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육신은 남아 줄 리 없다. 재산과 명예도 내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시인은 내가 뿌린 ‘재 한 줌’이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도반의 ‘재 한 줌’은 이미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으니, 이 말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현대인에게 있어, 이 시는 참 슬프기도 하고 속 시원하기도 하다.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하루하루 가진 것이 적어 미래가 무서웠는데 이 시인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내일은 습관처럼 가난한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면 다시 이 시인의 시를 읽어 보자. 큰스님의 깨달음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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