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詩人은 뽕잎 먹고 비단실 토하는 누에와 같다...
2016년 11월 12일 02시 00분  조회:3907  추천:0  작성자: 죽림
 최균선 시문학을 말하다...

   1. 시의 내함
    시란 무엇인가? 사전적의미로는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다. 전통적시론에서는 시란 간결하고도 세련된 운률적인 언어로써 강렬한 사상감정을 토로하면서 사회생활을 집중적으로 반영하는 문학쟝르라고 정의하고있다.
    서방의 경우 “시”인즉 곧 문학이였는바 고대에는 운문형식과 련계되였다. 문학의 시조로서의 시의 개념은 희랍어에서 왔는데 “생산”과 “창작” 이라는 말이였다. 고대희랍시기에는 예술창작에 유관된 협의적의미로 연혁되여 일정한 범위내에서 사용되였는바 그 뜻도 광의적의미와 협의적의미로 나뉘여졌다.
    시의 개념에 가장 이르게 그리고 분명한 질서와 체계를 부여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로서 그의 ≪시학≫은 서양의 최초의 문학리론서로 되였다. 그에게서는 문학이라는 개념이 광의적의미에서 사용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자연의 모방이라고 하였지만 독일의 작가이며 평론가인 슐레겔의 예술론과 헤겔의 미학에서는 시가 자체의 고유한 원리에 의해 창조되는 자아발전적유기체라는 개념이 제기되였다. 광의적의미에서의 시는 거의 문학과 동의어로 되여 예술성을 구비한 소유의 언어작품을 다 포괄하였다.
    다른 한 관점은 특수한 내용으로부터 오직 창조성이 있고 또한 사람들을 진실로 감동시키는 순문학작품만이 진정한 시라는것이였다. “과학이 부단히 자기 과거를 훼멸시킨것처럼” 예술도 같은 과정을 겪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시학의 개념이 차차 달라지기 시작하다가 20세기초에는 상상력과 감정의 시학으로부터 구성의 법칙과 기술적책략의 시학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동양의 경우, 시가 개인적정서를 표현한다는 전설적인 순임금에 의하면 “시란 마음에 바라는바를 말로 표현한것이며 노래란 말을 가락에 맞춘것”이다. 류협의 ≪문심조룡≫에서는 이런 표현적관점과 교훈적관점의 조화를 강조한다. 마음속에 들어있는것은 뜻(志)이고 말로써 표현될 때 그것을 시라고 했다. (诗者持也, 持人情性)이라고 하면서 시는 정과 성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시가 정서를 표현한다는 주장은 그후 김성탄에 의해 더욱 발전했는데 김성탄은 “시는 다만 마음으로부터 떠오르고 혀끝에 놀며 누구나 말하고 싶어하는 말일것이다. 따라서 학자들만의 특수한 재주의 소산은 아니다.”라고 천명했다.
    그만큼 전통시는 창조라기보다 재현, 자연에의 모방, 복사에 가까웠다. 즉 시적대상을 보다 형상적으로 묘사하면서 느낌도 곁들어 전달하기 위한 수사적형식에 신경을 썼다. 시는 시인의 심령의 외재세계이다. 시인은 외재사물에서 계발을 받고 그 외재형태를 내재공간에 이입시킨후 제련과정을 거쳐 심령의 메아리로 울린것이 시 특유의 선률이다.
    시적감각은 때론 일종 사상의 지각화가 되는바 역시 시적감각이다. 시는 독특한 예술적인식이며 내면화된 인식으로서의 자기 성찰이다. 시적자아로서의 시인은 자연경물에 감탄하고 혼자 자각하는것만이 아니라 자기의 정감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싶어 한다. 이것이 시인의 핵심적기능이다. 레를 들어보자.

달빛 빛나는 밤
온몸으로 시멘트 담을 움켜쥐고
간신히 기어오른 저 하늘 끝
늦은 밤을 위태롭게 걸어가는
나를 위한 한마디
잠언
나는 온몸이 뿌리다.

    한국의 시인 강형철의 시《사랑을 위한 각서5ㅡ담쟁이덩굴》이다. 담쟁이가 닭밝은 밤, 몰래 기를 쓰고 높은 담을 기어오를 때, 서정적자아 “나”는 술에취해 늦은 밤길에 비틀거다가 찰나적인 깨우침을 받는다. “이 놈아 정신차려!” 하고 가슴을 후려치는 잠언, 지금 어느때인데 취생몽사인가? 담쟁이덩굴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나 한수의 시에서는 한가지 해석이면 족하다.
   이처럼 시적정서는 개체정서의 즉흥적류출이지만 그것은 모종 깨우침을 내재한 보편화된 인류일반의 정서이다. 다만 시인이 마음의 눈을 먼저 떠서 잡을수 없는 무엇을 보이지 않는 정서의 그물로 건져올려서 현시하는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눈은 그저 렌즈가 아니라 투시경이다.
    시인의 예술직각은 흔히 일반리성감각을 초월한 고도로 개성화된 심미판단이다. 수법상에서도 현념, 공백, 잠의식의 류동, 이미지교착 등 새로운 시적수단들이 나타나고있다. 시의 함의를 두고 쟁론되고 있으나 그 모든 관점과 정의는 결과를 제공했다기보다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할수 있다.
    시는 상상의 불새가 물어온 감각, 정감을 지혜로 빚어 감동 혹은 감흥이라는 예술향수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최고의 문학이다. 환언하면 시는 자유분방한 정감을 지극히 세련된 언어로 예술경지를 창조하는 인류심령의 예술활동으로서 곧 심령의 음악이며 진, 선, 미의 결정체이다.
    시가 먼저냐? 노래가 먼저냐?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고대시가, 향가, 속요, 경기체가, 시조 등으로 명명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듯이 그 계선을 두부모베듯 할수 없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시이자 노래이다. 박목월의 시《청노루》는 시이지만 노래같기도 하다.

머언산(山) 청운사( 青云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시적대상물이 자하산, 청운사, 숲 그리고 청노루의 맑은 눈, 그것은 일상용 어이지만 정제하여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펼쳐보이고있다. 이처럼 시는 노래이면서도 또 그림이고 사물, 관념에 대한 해석만이 아닌 형상화된 철학이 되기도 한다. 현대시 모두가 언어로 된 그림이 아니지만 드문히 만나는 좋은 시들은 모종 사물의 내재적의미로부터 떠오른 련상으로 새로운 의미와 해석을 선물하고있다. 한국의 시인 안도현의 시《연탄》이 그렇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을 연탄재=쓰레기라는 등식을 깨뜨려버리고 연탄재를 곧 전에 뜨거웠던것으로 파악했다. 이는 확실히 독특한 시적발견으로서 고정관념을 타파해야 한다는 철리를 설득하고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뒤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한국의 시인 리형기의《낙화 》첫련이다. 보통 꽃이 지는 모습을 조락으로 보며 애수는 느끼지만 시인은 지는 꽃의 양자에서 신구교체의 섭리를 읽으며 깨쳐버려야 할 인습과 편견에 대해 말하고있다. 이처럼 시의 진정한 함의는 재현보다 교훈성에 계시되여있는것이다.
    2. 시의 특징
    1) 시적감수의 특징
    시적감각은 인간화된 자연이다. 아름다운 대자연에 도취하게 되고 그 경이로움에 정감활동은 치렬해진다. 그 흥분된 마음을 누를길없어 자기만 느끼는 미적세계를 시로 엮어서 자신을 나타내보겠다는 충동이 일었다면 그것이 시의를 격발시키는 정감의 불꽃이다. 달리 말하면 시의 종자가 생명의 꽃을 피운다.
   시인은 그 독특한 감수를 타인들에게 가장 운치있게 전달할수 있는 언어를 발굴하게 된다. 가장 적절하고 생동하게 전달할수 있는 새로운 언어의 조합이 시구와 시련으로 이어진다. 그때 선택된 시어들은 거의 모두가 그때 시인의 정감세계를 장식하는 진주구슬로 된다. 생활하는 가운데 무시로 가슴을 끓이는 서정이 곧 시의 속성이다.
   시적령감은 순간적인것이다. 령감이 떠오르게 된 환경, 시간 등에 의하여 각각 개성이 다른 시상이 되고 그때 떠오르는 그 시상에 따라 시의 특성이 결정되고 시의 생명이 탄생한다. 시의 핵은 시인의 본능이기도 한 감동의 세계에서 불새처럼 날아오른다.
    시인본성의 핵심은 창조로 불타는 심정이다. 이 정감의 작용에 의하여 참됨과 선과 미를 추구하는 마음이 곧 시의 령혼으로서 가령 진달래꽃을 읊는다 할 때 시인의 론리적인 리성사유가 시를 쓰는것이 아니라 진달래꽃이 시를 쓴다. 그것은 시인의 령혼속에 그 진달래꽃과 같이 아름답고 순진무구한 정열이 불타기때문이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진달래꽃에서 온 오감을 얻을수 없다.
    이는 마치 해빛속에 적 등, 황, 록, 청, 람, 자 칠색이 없다면 무지개의 고운빛깔이 나타날수 없고 또한 시신경이 고장났다면 그 빛을 분별하지 못하는것과 같다. 사물을 바라보고 일어난 감명을 시로 표현하고자 할 때는 평소에 탁마한 형용사나 수식어들이 총동원된다.
    시인이 경물과 자기 감수가 일체감을 갖게 되는것은 시인의 기본성품인 상상력때문이다. 시인은 상상력에 힘입어 시에 속성을 불어넣는바 전도체에 전류가 흐르듯이 심정에 정서파장이 흐른다. 생명의 에너지는 령혼의 파장에 의해 사람들에게 즉흥적으로 전달된다.
    시창작은 흘러넘치는 정서의 활동이다. 이 시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의 기능은 실제로 일어난것에 관여하지 않고 일어날지도 모르는것 즉 재연성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것에 관여한다.”고 말하였다. 시의 본질은 정서와 사상의 결합이다. 그러나 시의 효용은 감동과 쾌락에 있기에 사상이 정서를 앞설수는 없다. 사상은 지각, 지식, 신념, 의견의 결정이고 정서는 감화적요소로서 유기체의 전신적감각이다.
     인간의 삶의 의미는 생명에 있고 생명의 의의는 감각에 있다. 시적감각은 생명의 감각으로서 시창작과정은 생명에 대한 일종 리해와 감수이다. 시가 최초에 로동과정에서 산생되였다고 할 때 노래와 무용이 결합되였을것이다. 시의 화제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서이고 복잡하고 심오하지만 한 찰나에 발발하는 즉흥적정서이기때문에 시는 정취로 시작되여서 지혜로 완성된다고 할수 있다.
    사람들의 일상적감각은 시적감각이 아니다. 시에는 고정된 물질형식이 없지만 시의는 복잡한 심리현상으로서 감정의 범주에 속한다. 시적감각은 인화된 자연이다. 인화된 자연의 감각은 예민하고 기이하며 사물에 대한 리해가 독특하다. 누군가 문학가는 응당 철인과 어린애의 혼합체가 되여야 한다고 했다.
   시적감각은 때론 일종 사상의 지각화가 된다. “사상의 지각화”도 역시 일종 시적감각이다. 오직 이런 감각은 더없이 깊은 통찰력이 수요된다. 비상히 추상적인 사물도 만질수 있고 냄새를 맡을수 있으며 눈에 보는듯이 표현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서방의 어느 시인은 “사상의 직각화 즉 사상이 직각으로 환원될 때 장미꽃 향기를 맡을수 있듯이 당신은 사상을 감지할수 있다.”고 하였다.
    시적감각은 일반적정황하에서는 시속의 세절속에 존재한다. 착란되고 비틀어진 세절 혹은 “인화적”, “환몽식”, “사상이 지각화”된 세절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감각기관이 있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현실활동, 인간내심의 심리활동을 감각하는것이다.
    시를 시구조 전체로 고찰할 때 시적구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면서 자체의 법칙을 스스로 가진다. 시인이 생활속에서 외재물의 촉발을 받고 외재형태를 내재공간에 이입시키고 전반 지식의 종합과 제련과정에 심령의 골방에서 스스로 류출된것이 시 특유의 선률과 절주이다.
    시인의 이미지속에는 류달리 타오르는 불길이 있고 그 불길속에서 독특한 상징의미가 제련된다. 흔히 말하는 시이미지란 “리성과 감정의 종합체”로서 리성과 감성의 순간적결합이다. 사상은 피와 살이 있는 물체ㅡ시적감정을 격발시키는 대응물에 대한 반응결과로서 독자를 향한 시인의 의식, 정조, 사상이 투영되여있다. 시적이미지는 정신적이미지. 비유적이미지, 상징적이미지로 나눈다.
   이미지의 일차적기능은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각적의미의 내용이나 감정을 전달하는데 유익한 방식, 또는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착상에서 시작되는것으로서 개연성을 전제로 한다. 예술은 예지와 투시에 의해 다채로운 자연을 재창조함으로써 자연의 질서가 반영된다. 또 예술은 자연에서 표현수단과 방법을 빌려온다. 이런 정서세계의 정수라 할수 있는 지혜의 결정체를 가장 작은 그릇에 담아내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시이다.
≪새장≫이란 단시를 례로 들어보자

열었다.
새장의
문을
새가
날아
가도록
자유를
주었다.

장에

    새장의 문을 열어 새에게 자유를 찾아주려 했다. 이것은 보통사람도 생각할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의 지각과 감수는 그에 그친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심층적의미를 발견했다. 바로 해방된것은 오히려 새장이였다. 이는 독특한 상상이다.
    이것은 시적발견이고 철학적사색의 섬광이였다. 마치 감옥간수가 범인의 자유를 속박하고있는 동시에 그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도리는 확실히 일종 깨달음으로서 시인의 이런 발견이야말로 이 서정시의 창조적특징이며 독자들이 감탄하게 되는 핵심이다.
    시는 바로 이 정과 사색을 생명화한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의 원동력이란 시적충동이고 어떤 형상이 떠오르게 한것이 시상이며 시적경지를 펼친 힘이 시적표현력이며 독자의 마음을 흡인하는 시의 매력이다. 생명이 생명으로서 역할을 할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듯 시의 본질은 본성이 담길수 있는 그릇이다. 이 힘은 생명의 속성을 담고있는 바탕의 하나로서 시의 생명력이라고도 한다.
    2) 시적언어의 특징
    언어예술이란 어떤 소리가 입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의 귀에 전달되는 말의 아름다움, 오묘함, 진실됨, 간절함 등이다. 시어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를 지닐 때 미적가치와 예술가치를 지닌 언어로 거듭난다. 시는 시적소재로부터 시공간을 초월한 새로운 힘과 시인의 경험과 그 사물로부터 새로운 가치창조성을 지니게 하는 은유와 상징과 아이러니를 지닌 언어를 창출하여 그것이 음악이 되게 하고 그림이 되게 하고 춤이 되게 하는 문학예술이다.
    짧은 시어속에 보고 느끼고 생각한바를 명확하게, 풍부하고 깊게 또는 넓게 전달하는것이 시인의 사명이다. 본인의 심령에 사무친 소리가 외부로 나와서 독자의 마음의 귀와 눈속에 전달되고 그것이 독자자신의 정서처럼 되여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울리는것이기때문에 훌륭한 시를 일러 예언서라고도 한다.
    원론적으로 시어란 시에 사용하는 언어로서 다양하여 부드러운 언어의 련결로서도 복잡한 내용을 나타낼수 있으며 또는 난해하게 생각되는 언어조합이 아니고는 작자의 이미지를 나타내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근본은 단순하며 작자가 마주한 진실에 대하여 거짓을 말할수 없는 엄격한 시의 정신에 있다.
    18세기의 서방시인들은 시어는 저급적이거나 전문용어, 범속한 용어여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우회적이고 보다 더 고상한 대용어를 사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워즈워즈는 산문의 언어와 운문의 언어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타당성있는 시어의 판단기준은 감정의 자발적류출이라고 하였다.
   시적언어의 바탕은 일상적언어지만 또 일상용어가 모두 시어로 되는것은 아니다. 일상용어는 지시적의미를 갖지만 시어는 함축적의미를 가진다. 또 시어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소리의 질서에 의한 리듬을 가지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다의성 특징을 가지고있다.
    이미지화된 언어야말로 시를 산예술로 느끼게 하는 힘을 가진다. 그리하여 존재를 개념으로 인식하느냐 이미지로 감지하느냐 하는 문제는 시와 철학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시어의 함축의미는 어떤 정서적효과를 취지로 알뜰히 선정된 의미이며 출발점은 지시적의미이지만 목적지는 새로운 형상적의미가 더 부여된 예술경지이다. 하지만 독자의 순통한 열독을 방애하기 위한 장치를 설정하는것이 현대파시의 언어구사 특징이다.
    낯설음이 의미를 이동하는 방법으로 얻어지는것이 아니므로 비유적이미지의 인관관계를 차단하라고 주장한다. 시어의 함축적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어가 그 시에서 더 획득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례컨대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에서 “번지”의 의미, “구획된 땅의 번호”라는 의미를 “문명, 자연적삶의 터전”으로 터득하여야 옹근 시의 의미도 리해할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뛰여난 시어는 명쾌한것인 동시에 천하지 않은것”이라고 했고 발레리도 “아주 아름다운 문장에서는 구절이 떠올라있는것처럼 보이고 심정을 자동적으로 알수 있으며 물체도 정신화되여 나타난다”고 하였다. 자고로 “시에서의 절주는 그의 외형이며 생명”이라는 특징은 시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규칙이 되였다. 이런 외재형식의 특질을 몇개 조목으로 귀납할수 있다.
    첫째, 원래 지칭하려던 A를 B로 바꾸어서 A=B라는 수사법을 택하는것이 보통이다. 로씨야형식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A=B라는 설명적어법을 택하면 자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므로 독자들이 왜 A를 B라고 표현했을가 생각해 보도록 만들고 그 과정에 스스로 원래의 형상을 떠올리도록 만들기 위한것이다.
    김소월의 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의 마지막련 “이제는 저 달이 설음인줄은/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에서 시인은 달을 보면 설음이 난다는것을 달이 곧 설음이라고 비유하고있다. 김춘수는 ≪나의 하나님≫에서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라고 읊고있는데 원관념 “하나님”을 “비애”로 “살점” 등으로 바꾸어 은유의 형식을 쓰고있다.
   둘째로 시적대화에서 이런 어법때문에 사물과 언어의 관계가 외연이기보다 내포적으로 쓰인다. 시적어법은 표현과 의미가 1:1로 대응되는것이 아니라 한마디에 많은 의미를 담는 다의성을 띠며 무엇을 명백하게 해석하기보다 암시적으로 어떤 상태를 제시한다.
    산문이 말을 최적의 순서로 엮은것이라면 시는 최상의 말을 최상의 순서로 배렬해 놓은것이라고 할수 있다.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에서 시는 더더구나 최적의 언어예술이 되여야 한다. 문학론에서 요구하는 언어의 형상성, 정확성, 음악성은 문학(시)의 영원한 세가지 법보이다.
    시에서 리성이 형상을 압도해서는 안된다. 심각한 사상만 있어도 안되고 미사려구만 있어도 안된다. 리규보는 가르치고있다. “시는 의(意)가 주되므로 ‘의’를 잡는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맞추는것은 그 다음이다. 의도 또한 기(气)를 위주로 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바로 이 ‘기’의 우렬에 따라 의의가 깊고 옅음이 생기는것이다. 대체로 글을 깎고 다듬어 구(句)를 아롱지게 하면 아름다움에는 틀림없다. 허나 거기에 심후한 의의가 함축되여있지 아니하면 처음에는 볼만하나 다시 씹어보면 맛이 없어버린다.”
    리규보의 말처럼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수 있어야 하고 듣는 이의 령혼을 뜻대로 이끌어나갈수 있으며 오직 사상이 언어로 전화되고 언어가 사상으로 전화될 때 훌륭한 시로 될수 있다. 만약 생활소재를 바다라고 한다면 문자, 사상은 그속에 용해되여있는 물질이다. 일정한 조건하에서 결정체의 형식으로 현연될 때 시는 곧 그 결정체로 나타난 소금이라 할수 있다. 그것은 일종 승화이며 응결이다. 현대파시인 발레리는 시속에 사상은 과실의 영양가와 같이 스며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일상생활용어에서 비유를 많이 적절하게 쓰면 담화내용이 운치를 돋우고 생동하며 풍부해진다. 그런데 대부분 경우에 표식의 류사성에 의하여 사물의 형태나 느낌을 표현한다. 그러나 시에서 만약 보이지 않는것을 가시적인 구체사물로 바꾸거나 리해하기 어려운 관념을 쉬운 관념으로 바꾸면 산문적인 비유의 차원에 머믈고만다.
    셋째로 기타 쟝르보다 더욱 유기적이고 집중적이고 조직적이다. 시는 어느 한 순간에 연소하는 정서를 함축하여 말하는 쟝르이기에 시적이미지는 물론 말하는 어조, 형상창조를 위한 시어선택, 그런 시어들의 조직과정에 발생하는 리듬까지 보조관념에 맞추어 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로써 유기적이고 집중적인 구조로 완성된다.
    한키로그람의 장미기름을 얻으려면 2천근의 장미꽃송이를 압축해내야 한다는 비유가 있다. 한키로그람의 꿀을 빚기 위해 한마리의 꿀벌이 30만 공리의 길을 날아다니며 천만송이 꽃송이에서 채집하기에 꿀이 그처럼 달콤한것이다. 시는 라티움제련과도 같으며 장미기름을 짜내고 꿀을 빚는것과 같다.
    넷째로 산문에 비해 음악적인 특점을 강구한다. 지금은 이것이 전통시에 국한되는 요구로 되였다. 현대시에서는 음악적속성은 홀시되고 파괴되여버린다. 이와같은 변화는 독자가 감각적리듬보다 감성상태에서 작품을 자률적으로 수용하려는 경향때일수도 있다.
    지금은 쩨마만 서정적이면 형식이나 기법에서 거의 산문화되는 사례들이 많다. 시인들이 어떤 실험의식에 몰입하여 새 틀도 마련하지 못하고서도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고 신록처럼 아름다운 풍취를 주는 리듬마저 외면한다면 시는 존재가치를 잃고 차차 자멸을 자초할것이다.
   숨김의 원리에 의한 암시성의 본질을 몰각한채 원관념과 보조관념사이에 넘기어려운 장벽이 설치되여야만 좋은 시가 되는것은 아니다. 시란 자아와 세계의 만남에서의 미적체험을 바탕으로 인간구원으로 나가야할 경우 호소하는것이 아니라 찾아내고 해득하는 의미로움만이 시의 미덕이고 미학이기때문이다.
    3) 시의 내재적특징
    (1) 정감성: 시에서 상상이 중요한것은 사실이지만도 정감과 격동이 없으면 시인도 없고 서정시도 없다. 그래서 “시인을 감정의 총아”라고 한다. 프랑스의 시인 볼라는 “서정시는 환호, 감탄, 흐느낌…의 선률의 발전이다.”라고 정채롭게 표술했다.
망울짓는 봄꽃을 보면 희열과 반가움속에 사랑의 마음이 생기고 그것을 읊조려보고픈 표현욕과 더불어 마음이 설렌다. 때론 조용히 핀 꽃을 보며 까닭없이 애틋해지고 흘러가는 시내물을 보며 문득 알수 없는 비애를 느끼게 될 때 이런 심리적동요ㅡ설레이는 정서가 감각을 통해서 대상물ㅡ곧시를 찾게 된다.

아, 시는 어디에서 찾을가?
잔잔히 내리는 보슬비속에?
꽃잎지는 애처로운 소리에?
솔솔솔 꽃바람에 실려올가?
정다운 저 물소리에 있을가?

    시는 감동과 감정의 글, 가장 아름답고 짧은 말로 문자화된 사상 즉 사상과 형상의 융합으로서 곧 시인의 심령의 외재세계이다. 시인이 외재적사물에서 어떤 촉동을 받았을 때 외재적현상이 내재세계속에 이입되여 심령속에 침투되고 사상, 감정이 그속에 잦아들었다가 특유의 선률과 절주로 용솟음쳐 나온다.
    따라서 시는 어디까지나 미적절주의 창조이고 시인의 정감의 연장선이며 심령의 노래, 진실하고 착하고 아름다운것의 메아리이다. 그래서 시를 “감정의 왕국”이라하는것이다. 시는 용속사회학도 아니며 정치의 메가폰이 아니다. 시의 사상은 정감을 통해 체현되는것이지 선률을 통해 연장되는것이 아니다. 시가 추구하는것은 일종 경지이다. 유성유색(有声有色)의 시혼은 시의 절주와 음악적선률과 경지중에 존재할뿐이다.
    고시로부터 신시에 이르기까지 의경을 시의 최고규범으로 삼는다. “의경”이란 원래는 불경에서 온 모종 감오의 경계를 의미하였다. 의경은 시인의 사상감정과 객관사물의 결합이다. 창조해낸 시적경지는 정신과 형상이 겸비된 예술경계로서 곧 “의”와 “경”의 화해의 통일이다. 즉 시적대상물에 대한 시인 특유의 감정침투를 말하기도 한다.
객체에 대한 주체의 침투는 다음 몇가지 정황에서 표현된다.
    가) 감정이입: 시인은 주위의 사물을 자기중심으로 리해하려는 본능이 있으므로 생물과 무생물에 인격적요소를 이입하여 생각하게 된다. 시인의 감정이입(感情移入)은 예술작품이나 자연, 대상 따위의 요소속에 자신의 감정이나 정신을 불어넣어 자기의 대상이 서로 통한다고 느끼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감정에 휩쓸려 들어가서 필요에 따라  자기 본성을 되찾을수 없는, 그리고 분리되지 못하는 불변의 화학적용해 현상이다. 심미주체는 자기의 풍격, 기질, 사상감정을 객체에 옮기여 인화(人化)와 심미화의 복합체를 이루게 되는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감정을 대상속에 이입시켜 마치 대상이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것처럼 표현한다.
    본래 감정이입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무생물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유정물로 만들기도 한다. 전자를 본래적감정이입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비본래적감정이입이라고 부른다. “객관화된 자기 가치감정”이라고 할수 있는 정감이입의 최고경지는 경물과 자아, 량자를 망각하는 상태 즉 교감이 이루어지는 때이다. 례를 들어보자.

님그린 상사몽이 실솔의 넋이 되여
추야장 깊은 밤에 님의 방 들렀다가
날잊고 깊이 든 잠 깨와볼가 하노라.

    작자는 상사몽에 빠진상태여서 귀뚜라미가 되는것으로 객체를 주체화시킨다. 이렇게 객체가 주체화되고 다시 주체가 객체화되는것을 심미적감응이라 한다. 관상자가 어떤 경물에 완전히 매료되였을 때 물아(物我)의 구별이 소실되고 나의 생명과 경물이 서로 교류되는 경우가 시인에게는 보통일이다. 시인은 자연속에 푹 빠져버리고 대자연도 나의 심령속에 빨려 들어온다. 이리하여 나와 대자연은 혼연일체로 되여 함께 승화되고 함께 전률한다.
    리백의 ≪촉도난≫은 놀라운 상상과 과장, 기발한 묘사, 생동한 형상을 창조하여 아름다운 대자연을 노래하면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의 운명을 근심하는 우국정신을 표현했다. 독자도 시에서 기이한 산천경개를 답사하는듯 현실감을 가지게 되고 감탄과 더불어 환상같은 예술경지에 도취되지 않을수 없다.
    문학은 작가의 체험과 감수를 표현하지만 보통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던 형상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한다. 인간이면 거개 가지는 공성의 사상과 감정을 예술적으로 새롭게 깨우치는것이 문학의 사명이다. 하여 사람들이 늘 보아 무심한 경물도 시인의 심장을 거치면 한폭의 풍경화가 되는것은 시적마술이다.
    시인은 일상의 삶에서 체험하고 느끼고 사색한것을 제재로 하고 그것을 문학어로 형상화하여 새로운 예술적인생현장을 펼쳐보인다. 인간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들에서 보다 아름답고 보람있는것에로의 지향을 가지게 하는 이런 문학현상은 시인이 상상의 나래와 허구의 힘을 입을 때에만 이루어진다.
   “산이 날 에워싸고/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박목월의 ≪산이 날 에워싸고≫에서) 넓은 뜻의 심적련합작용의 한 형식이다. 대상과 인간감정이 완전히 결합되여 혼연히 융합하는 경우, 미적감정이입이라 하고 이것을 미의식의 근본원리로 보는것이 철학자 립스 등이 명명한 이른바 감정이입미학이다.
    사람의 감각에는 세가지가 있다. 본체감각기관에서 산생되는 감각에는 운동감각과 평형감각이 있다. 내부감각기관에서 산생되는 감각에는 기체각(机体觉)과 통각이 있다. 외부감각기관에서 산생된 감각에는 시각, 청각, 촉각, 미각과 취각이 있다. 사람의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 호상 옮겨지는것을 통감(通感)이라 한다. 통감은 사람의 련각(联觉)에 의해 형성된다.
    련각이란 대뇌신경을 거쳐 형성된 각종 감각기관의 상호작용으로서 한가지 감각기관을 흥분시키는 동시에 다른 감각기관의 흥분도 야기시키는 련속적인 심리운동이다. 시인은 왕왕 통감에 의하여 객체의 침투를 더 순리롭게 완성하며 더욱 정확하게 심미정취를 체현시킨다. 통감을 떠나서는 심미반영이 불가능하다. 통감수법은 현대시수법이 아니라 고금중외에 다 있었다. 통감의 운용은 중국의 조기에 속한 시들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례를 찾을수 있다.

○ 나는 하늘 골짜기에서 풍겨오는
란향의 무거운 향기를 맡는다. (풍만초)
“란향”이 무겁게 감수된다. 이는 취각과 기체감각의 전환이다.
○ 나의 꿈속에서/달콤함은 꿈속에 광휘였다. (서지마)
“달콤함”이 “광휘”롭다. 량자는 미각과 시각의 소통이다.
○ 나는 그곳에 누워서/태양의 향미를 짓씹었다. (대망서)
“태양”도 가히 짓씹을수 있다. 시각속에서도 맛을 볼수 있다.

   “미”와 “향”은 또한 취각과 미각의 소통이다. 통감은 시의에서 일종 수법으로서 시의 예술감각에 속하는바 잘 리용하면 시의를 깊게 할수 있으며 더욱 미묘하게 사상감정을 토로할수 있다. 고대희랍의 시인들과 희곡작가들도 이 수법을 썼고 랑만주의시인들도 써보았다.
    문학은 작가의 체험을 형상화하지만 그 형상에 새로운 느낌을 가지게 한다. 순수경물을 읊은 시에 시인의 남다른 사상감정이 맥맥이 흐르고 독자는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질감을 가지게 되고 공명하게 되는것은 그때문이다.  
나) 수의적변형: 수의적변형이란 작가가 자기의 의지, 념원에 따라 객체를 임의로 개변시키는것을 말한다. 사람의 사유는 시종 론리적일수 없다. 시인에게 있어서 인간화된 자연의 감각은 예민하고 기이한바 때론 시적감각이 일종 착각과 변형이기도 한것이다.
    이리하여 리백에게 있어서는 “백발이 3천장”, “은하수 구천에서 떨어지네”도 너무나 당연한 느낌이 되였고 시인의 느낌 또한 수많은 독자들의 공감대를 울리기에 충분하다. 뭇사람들에게는 그저 무심히 보이지만 시인의 심령속에는 밝은 달이 그저 밝기만 한것이 아니라 빈정거림으로도 될수 있고 가로등은 비웃는듯 한눈을 껌벅거리는 외눈박이 거인으로 되기도 한다.
   꽃은 웃고 잎은 반기고 열매는 향기로운 입술로 말한다. 새는 나를 부르고 별은 하늘가의 이슬로 보인다. 시적감각은 때로 일종 환각이다. 니체는 예술세계는 두가지 정신으로 구성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꿈”인데 그 꿈의 경계는 무수한 형상이라고 했다. 시는 일정한 환각상태에서 존재한다. 내가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가 있다. 방불히 정신환자의 신경착란처럼 일종 거대한 심리압력하에 형성된 일상의 도리에 맞지도 않고 알둥말둥 한것을 표현한다. 때론 주체를 객체화하기도 한다.
    작가가 창작과정에 너무 사색에 몰두하게 되면 주객체가 혼연일체로 융합되는 경지에 이를수 있는데 이것을 주체의 물태화(物态化)라고 한다. 즉 주체의 사상감정, 심미취미가 불가피적으로 침투된다는것이다. 례로 들어보자.

“누구세요?”

누구세요? 누구세요?
문밖 오솔길로 달려오는?
아, 당신이였군요. 분명
당신이 발걸음소리지요.
문이 열리네요. 문이 열리네
락엽 한잎 방안에 날려드네요.
아, 바람이군요. 바람이
가을바람이 문밖에서
나무를 안고 몸부림치네요.

    시에서 님을 기다리는 련인의 심경을 쓰고있다. 이 시에 착각이 관통되여있다는것을 쉽게 보아낼수 있다. 나무에 휘감겨 우는 바람소리가 님의 발자국소리로 들렸던것이다. 님을 기다리는 절절한 마음이 아주 감화력있게 안겨지는것은 바로 이 착각의 표현때문이다.
    시적감각은 이처럼 일종의 환각이다. 이런 환각은 몽경과 같아서 일체감각우의 공간을 질주하는바 한절반 인간세상에 있고 한절반은 선경에서 헤맨다. 니체가 말한것처럼 꿈의 경계는 무수한 형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꿈이면서도 현실이기도 하고 새로은 정서세계에서의 감흥이다.
    (2) 상상성: 상상은 형상과 전형을 창조하는 기교상 가장 본질적인 수법의 하나이며 형상창조의 필수조건으로서 한 작가의 예술적재능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시는 상상의 총아이다. 벨린쓰끼는 “창작과정은 오직 환상(상상)을 통해서만 완성된다.”고 하였다. 상상의 전제는 진실하고 풍부한 생활체험이다. 상상이 작가의 풍부한 생활체험과 생활에 대한 심각한 인식을 기초로 하였을 때에만 그 상상에 의해 창조된 예술형상이 선명하고 진실한것으로 된다.
    시인의 상상력의 세계를 중시한 리론가는 영국의 랑만주의자 코울릿지로서 그는 “상상력을 조형하는 힘” '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상상력은 인간의 사고에 존재하는 능동적요소와 수동적요소를 결합하는 중간적능력으로서 시의 경우, 이러한 능력이 의지에 의해 규제된다. 그에 의하면 제1상상력과 제2상상력이 존재한다. 제1상상력은 유한한 정신이 무한한 자아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창조행위의 반복을 뜻한다. 제2상상력은 전자의 메아리로서 인간의 의식적의지와 공존한다. 시인의 상상력은 일반인에게는 생경하고 심지어 사이비하고 경악스러운 일일수도 있다.
    보들레르는 상상은 “일체 공능중에서 녀황제이다.”라고 하면서 문학, 특히 시에서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는 환상과 감정의 백열화이고 상상은 시가 불새로 되여 나래치게 하는 금빛날개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시적상상은 생활론리와 정감수요에 복종해야 하는 동시에 예술취미ㅡ상상주체의 예술취미를 체현해야 하며 흔상자의 예술취미도 고려해야 한다.
    시적상상에서 예술취미를 추구하여 상상재료를 이식접목하기도 하고 변형시키기도 한다. 예술취미는 생활의 취미가 아니다. 전자는 주관적추구이고 후자는 객관적규정이다. 예술취미와 생활론리는 시적상상을 제약한다. 시의 형성에서 령감은 상상과 정감분출의 돌파구로 된다. 뿌쉬낀은 령감은 민첩하게 인상을 감수하는 일종의 정서라고 하였고 애청은 령감은 곧 시의 잉태라고 하였다.
    상상의 주도적표현과 예술취미는 서로 어울려야 한다. 예술취미는 상상의 내용을 제약할뿐만아니라 예술상상의 류형도 제약하기때문이다. 예술창작에서의 상상은 현실적상상과 정감상상으로 나뉜다. 현실적상상이란 바로 생활론리를 선행시키는 상상이다. 정감상상은 현실적상상과 다르다. 생활론리와 예술취미의 의거는 내용과 형식, 주객관, 리지와 심미의 필연적인 련계의 의거이다.
    만약 소설에서 묘사하는것이 “전형환경중의 전형인물”이라면 시는 곧 “전형환경중의 전형정서”이다. 이는 시적감각이 때로 사상의 지각화라는 설명이 된다. 시에는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하는바 감각, 지혜로서의 시는 곧 인생의 비평, 인생철리의 해석이 된다. 그만큼 시의 사상은 정감속에 스며들어 정감을 통하여 체현되는 메아리이다.
    통찰력이 있는 상상력은 외재사물의 현상에 머물지 않고 내면적인 형상속에 침투한다. 련합적인 상상력은 사물에 대한 관념, 정서에 정서적으로 친근한 심상들을 련합한다. 이런 시적경지는 사상을 억지로 붙이는것이 아니라 시적 절주와 음악선률의 경지속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중국의 시인 사백의 서정단시 ≪단풍≫을 흔상해 보자.

바람이 단풍잎을
발뒤꿈치에 던져왔다.
오, 가을이구나.
록색의 생명에도
더운 피가 있었음을
서리 맞은후에야
나는 알았다.

    이 시에서 시인에게 가슴치는 충격을 준것은 저절로 지는 여느 나무잎이 아니라 찬가을 바람에 던져진 단풍잎이다. 이런 시적계기는 많은 시인에게 포착될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촉동받은것은 가을의 한 측면ㅡ흥망성쇠의 징표인 조락의 서글픔만이 아니다. 단풍잎, 그것은 한 인간의 생명의 파란만장한 력사의 상징물로서 누구에게나 해당한 감수인것이다. 그것을 초월하여 시인이 문뜩 깨우친것은 푸르던 그때(일상적생활상태)는 미처 몰랐던 하나의 섭리ㅡ준엄한 시련을 겪은후에야 생명의 열렬함과 그속에 내재된 충성의 마음이 “나” 혹은 사람들에게 자각되였다는 그 진리이다.
    (3) 조약성: 시에서 조약성은 함축을 전제로 한다. 시의 조약성은 정감성과 상상에서 온다. 강렬한 정감은 시인의 생활체험, 생활 감수의 승화이고 농축으로서 그것이 격발시킨 상상력은 필연적으로 대폭도의 조약을 약속하게 된다. 즉 고도의 세련된 표달을 강요한다. 이 강요성이 곧 시의 조약성을 결정한다. 일체 문학형식에서 가장 정채롭고 가장 절약된 필묵으로 가장 풍부한 생활내용을 체현할수 있는 문체는 아마 시를 내놓고는 더 없을것이다.
    시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똑똑히 감수할수 있어야 하거니와 오묘한 뜻을 담고있어야 한다. 시는 우물처럼 깊어야 하지만 그 시원한 물맛을 볼수 있어야지 현대파시처럼 수수께끼가 되여서는 안된다.
김소월의 시 ≪만리성≫이야말로 시의 조약성을 보여준 시이다.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루밤
쌓았다. 헐었다.
긴 만리성

    시에서 외재적표현이 시사하는 뜻은 일목료연하다. 그러나 파고들면 밤이 지새도록 쌓고 또 허물어버린 그 상념의 만리성ㅡ그 피나는 쌓음과 가슴 아픈 허물림의 과정에 담긴 심령세계는 무한하다. 따라서 독자가 감수하는 예술경지도 무한하게 펼쳐진다.
    거기에 가버린 님에 대한 막무가내한 미련의 애모쁨도, 인생의 파란곡절에 대한 제시도, 반복무상한 인생마당에 세워지고 허물어지는 막연한 동경의 궁전도, 그것을 자각한 철리적사색도 혹은 빼앗긴 조국에 대한 옛정을 이룰수 없는 절망감도…다 가능하다. 이처럼 시는 시행의 대폭도의 조약이 진행되는바 심리적시공간은 실제시간과 공간의 계선을 파괴해버린다.
    (4) 음악성: 시에 노래가 있다고 하는것은 시의 음악성을 두고 한 말이다. 시는 글속에 출렁이는 물결같은것이 있는 춤추는 글이다. 시의 음악성도 그것의 정감성에서 온다. 시가의 음악성은 여러가지 인소의 융합으로 이루어지지만 가장 주요한것은 절주와 운률이다.
    시가의 절주는 정감절주의 반영으로서 정감의 기복이 시의 절주의 기복을 결정한다. 우리 말 시의 운률에는 정형률과 자유률이 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전통적정형률은 시조로부터 시작되였다. 정형률에는 3. 3조, 3. 4조, 4. 4조, 4. 3조, 7. 5조 등 다양한 률조가 있다. 운률은 또 외형률, 내재률로 나누어 고찰할수 있다. 음수률의 전형적실례로 ≪고향의 봄≫을 들수 있다. 김소월시의 경우 운률조성에서 독창성도 찾아볼수 있다.

례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가
하니 그리워

그냥 갈가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이 시는 차마 헤여지기 어려운 상황속에서 떠나야만 하는 사람의 망설임과 그리움을 전통적(민요조) 률조인 3음보(7. 5조)의 률격에 담아내고있다. 특히 유음과 비음, 그리고 모음으로 된 시어를 사용하여 음악적효과를 얻고있다. 특히 7. 5조를 이리저리 허물어 아름답게 분행한것으로서 그의 많은 시에서 이채를 띠고있다. 김소월의 일련의 시의 형식은 실로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고있다. 7. 5조와 그것을 기조로 한 변체, 3. 4조와 4. 4조 등 다양한 정형률의 구성, 압운, 반복, 반향, 굴절 등 시어와 아름다운 구사에서 실로 따를 시인이 없다.
    ⓛ 음위률의 례: 돌각담에 속삭이는 해발같이/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이 시구에는 두운, 요운, 꼬리운이 운용되였다.
    ② 음성률: 모든 시에 존재하는 운률로서 음의 고저, 청탁, 강약, 장단 등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면서 생기는 운률이다.
    시에서 행이나 련을 구분하는 근본원인은 바로 이런 운률 즉 시의 음악성에서 기인된다. 김소월의 시에 있어서 그 형식이 극치에 이르고 있는바 아름다운 시어와 가장 우아한 리듬이 시적정서와 조화되여 울려나온다. 김소월의 시 ≪삭주구성≫도 좋은 실례가 될수 있다.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
삭주구성은 산을 넘은 륙천리요

물맞아 함빡이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
밤에 높은 산
삭주구성은 산 넘어
먼 륙천리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리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으로 오며가며 아니 합디까
들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반쯤은 어디 바로 가있을텐고
삭주구성은 산 넘어
먼 륙천리

    7. 5조, 3음보의 민요적가락에 그리움의 정서를 담아내면서 이중적의미를 지닌 상징적시어를 사용하고있다. 그리고 물리적거리를 나타내는 시어로 정서적거리감을 조성하고있다. 그리고 우리 말의 음향적특성에 의해서 아름다운 운률이 형성된다는것은 주목할바이다. 양성모음 “ㅏㅡㅗ”는 명랑성, 개방성을 가진 어음으로서 그것이 들어간 단어를 잘 리용하면 밝고 여린 느낌을 준다.

례: “아름다운 강산에 아침노을 붉은데
사랑하는 내 나라 영예로 빛나라”
또 유향자음 “ㄹ”의 소리는 완급성, 처지는듯한 감을 준다.

례: ≪륙승정 련못가에 늘어진 버들은
실실이 날실로 늘여나 볼ㅡ가≫

    여기서 알수 있는바와 같이 운률이 시적대화에서 발휘하는 기능은 다양하다. 이를 대체로 다섯가지로 귀납할수 있다. 첫째로 시와 산문적대화를 구별하는 뚜렷한 징표구실을 한다. 둘째로 독자의 미적쾌감을 자극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셋째로 시의 내용에 대한 독자의 리성적비판능력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발휘한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을 례로 들어보자.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녕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분히 지레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 시를 리듬이 없는 일상의 대화로 이야기한다면 듣는 이는 그토록 사랑하는 님을 왜 보내려고 하느냐? 정말 꽃을 뿌려줄 작정이냐고 따지고싶어질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공감하는것은 시의 아름답고 정교한 리듬에 신경쓰이고 매료되였기때문이다. 김소월의 대부분 민요풍의 시들을 읽으면 이 점을 감수할수 있다. 김소월만큼 조선말의 음향을 잘 살린 시인은 아직 없다.
    넷째로 시적대화의 구성, 전개의 원리가 된다. 다섯째로 어떤 의미나 뉴앙스를 강화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운률에 대한 이상의 서술은 “시란 운률적인 언어로 시인의 사상감정을 표현한것”이라는 고전적정의나 운률학에 기점을 둔것이다. 우리 말 정형시에서 운률은 물리적으로 류사한 자질들을 배치하여 얻어지는 질서감이다. 즉 언어적, 내지는 어음적인것에 의거했다는것이다.
    시에서 시로 하여금 생명을 갖게하는 가장 주요한 특징은 시적형상이지만 운률은 시에 형식상에서의 존재리유와 가치를 부여한다. 시는 형상을 떠날수 없다. “우리는 물론 다만 앵두나 배는 먹을수 있다. 그러나 과일을 먹을수는 없다. 한것은 추상적인 과일을 먹을수 있는 사람이 없기때문이다.”
   시의 구성을 이루는 요소의 일체화에서 감성에 직접적영향을 줄수 있고 감흥에 직접 자극을 줄수 있는것은 소리와 뜻이며 음악성이므로 음악성이 짙은 시일수록 감성자극이 크고 폐부에 전달되여 깊이와 넓이가 정비례된다. 전통적작시법상 리듬과 운률을 일시동인해 오면서 다루어왔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정형시가 자유시로 번지고 작시법의 초점은 운률에서 내재적인 리듬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낯설게 하기를 선호하면서 운률미는 뒤로 밀리였다.
    4) 시의 구조적특징
    시의 이미지의 구조는 시가 어떻게 변화든 기본구조이다. 한편의 시를 시구조 전체로 고찰할 때 시적구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면서 자체의 법칙을 스스로 갖는다. 현대시의 이미지가 의미거부의 경향을 띠는것은 순전히 이때문이다.
    시의 내용이란 시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요소를 말하며 구조는 이러한 요소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구성되고 조직되는가를 말한다. 시가 구성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시어이다. 다음 운률로서 시가 시로 될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시는 문학예술의 결정체라고 한다.
    시는 함축을 강구한다. 하여 “암시, 계발을 통하여 독자앞에 심각한 의미를 가진 경계를 펼쳐보인다.”따라서 내재결구는 이런 암시, 계발의 효과에 도달하기 위해 짜인다. 시의 내재결구는 문자, 구절의 배치가 아니라 의념, 의상의 배치이다. 이런 배치는 곧 문자, 사상의 배치가 아니라 문자화된 사상이다.
    시는 시각적인것도 중요하다. 그 시가 외형적으로 보이는 문장구성의 형태미도 추구해야 한다. 눈앞에 나타난 한편의 시의 정서는 아기자기해야 한다. 세번째로 필요한것이 새 이미지이다. 시각적, 미각적, 후각적, 촉각적, 색채적, 감각적이미지를 기존의것에서 탈피시켜 력동적이며 파격적인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 과거의것으로부터의 해탈, 새로운 이미탐색의 시에로의 전환 그리고 비전과 발전을 위해 끊임없는 이미지 창조는 시인에게 숙명적인 과업이다.
    이미지는 시의 속성이 형상화되는 핵심이며 화자가 독자에게 직접적감화를 주어 정서적환기를 가지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인력적구조는 곧 독자로 하여금 감명, 감동, 감화를 받도록 하는 힘을 말한다. 시어가 운률을 지니고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키는것은 곧 시적원동력이다. 길을 걷다가도 시어가 나오는가하면 잠결에 번개같이 스치는 무엇인가 있어 시를 읊조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시란 근본적으로 계시적산물이다. 시인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독자로 하여금 오해없이 접수할수 있도록 하는것이 전제이다. 머리에서 나온 시행조직은 머리로 풀이하게 되고 심장으로 피운 정감의 꽃은 페부로 그 향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리백. 두보, 도연명, 김소월, 박목월 등의 시는 지금도 향기만방한다.
    이로써 현실적인것, 인간다반사의 희노애락을 정서적으로 표현하는것이 수필이라면 시는 그러한 정서들을 함축하여 새로운 정서적의미를 창출하고 창출된 그 새로운 가치는 그대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속되는 최첨단의 예술창조세계라는것을 잘 알수 있다.
    3. 시의 류형
    시의 류형은 그 내면적형식에 따라 서정시, 서사시, 극시로 나눌수 있고 외면적형식에 따라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로 나눈다. 그리고 대화내용의 길이에 따라 장시, 단시로 나누며 전체를 구성하는 작품들의 독립성에 따라 련시, 단시(单诗)로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문학의 발달변화에 따라서 서사시는 소설에, 극시는 희곡에 그 기능을 넘겨주고 서정시만 남은 형편이다. 그리고 서정시ㅡ정형시는 이미 영화를 다 누린 옛꽃이 되였다.
   1) 서정시
   희랍에 있어서는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는데 어원은 칠현금을 뜻하는것으로서 곡조를 가지고 노래되는것으로, 가창 내지 랑송에 적합한것으로 인식되여왔다. 따라서 음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오늘날 서정시는 어떤 심리상태나 사고와 감정의 과정을 표현하는 단 한사람의 화자를 제시하는 상당히 짧은 비설화적인 운문글로서 보통 1인칭으로 표현되지만 시속의 “나”를 시인 자신과 동일시하여서는 안된다.
    서정시는 벙어리의 감각에다 말과 형상을 부여하며 그 감각을 밀페된 가슴속으로부터 예술적생명을 얻을수 있는 신선한 대기속에로 이끌어내여 그것을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따라서 서정시의 내용은 이미 객관적사건의 발전인것이 아니라 주관 그 자체이며 그것을 거쳐 진행되는 일체의것이다.
    서정시는 옮겨 이야기할수도 없으며 설명할수도 없다. 다만 읊고 느낄수 있을 따름이며 그것도 시인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대로 따라 외우면서 느낄수 있을 따름이다. 만약 말로 옮겨 이야기되거나 혹은 산문으로 고쳐 서술된다면 그것은 오색찬란한 나비가 방금 날아나온 보기 흉하고 껍질만 남은 고치로 변한것처럼 꼴불견이 될것이다.
    서정시는 고정된 물질형식이 없다. 그러나 시가 문자로 고정되였을 때 “가장 훌륭한 문자의 가장 최적화한 배렬”이라고 할수 있다. “한수의 서정시는 정취로 시작되여 지혜로 맺힌다.”고 하는것은 서정시는 인간본성의 내면적인 본질을 구성하는 형상과 형태가 없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시적형상과 예술적화폭을 창조하여야 하기때문이다.
    미세한 정감의 불길은 사상의 부싯돌이 일으키는 불꽃으로부터 타오르는바 정감밀도가 높기에 단시의 예술적력량을 산생시킨다. 웽그리아의 시인 뻬뙤피의 명시 ≪너는 무엇을 먹느냐?≫를 흔상해 보자.
너는 무엇을 먹느냐? 대지여
너는 어이하여 그처럼 마시느냐?
이렇게도 많은 눈물을!
이렇게도 많은 피를!

    이 시에는 단 두개의 물음이 있다. 그러나 짧은 넉줄속에 인간세상의 고통, 불행, 비애, 심지어는 학살과 략탈, 쟁투까지 담고있다. 시에는 전쟁에 대한 구체적묘사도 없고 인간과 인간의 박투도 묘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짧디짧은 넉줄의 시에 담겨있는 상징적함의는 많은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시는 상징해야 하며 허와 실사이에 대폭도의 조약을 해야 하며 소리밖에 소리가 있고 시구의 뜻밖에 뜻이 있어야 한다. 숭고한 격정, 힘, 생명력은 생활에 대한 초월이고 창조적초월이며 곧 생명의 상징이다. 서정시는 인류생명이 개인의 격정속에서의 꿈틀거림이기에 훌륭한 서정시는 그 생명력의 흐름이 독자의 마음의 터밭에 차분히 흘러든다. 그리고 예술향수로 비옥해진다.
    시에는 허경이 있어야 하거니와 더우기는 실경(实景)이 있어야 한다. 즉 이른바의 진실한 시의의 실재적인 경계이다. 진실은 평용하게 직접 토로되는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형상으로 감동시킬것을 강조하고있다. 경물에서 정이 생성되여 즉흥적으로 시를 짓되 풍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것 모두가 실경이다.
    시적정서의 대응물이 실경이고 그에서 생긴 감정, 정신 혹은 뜻을 “허경”이라고 한다. 허와 실은 예술정신의 두극이지만 많은 시속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여있어 실속에 허가 있고 허속에 실이 있다. “시인은 자연과 인생을 대하여 반드시 그속에 들어가야 하며 또 반드시 그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속에 들어가매 능히 지을수 있고 그 밖으로 나오매 가히 볼만하도다.”
“예술가는 심령으로 삼라만상을 비추어 산천을 대신하여 말하는바 그가 표현하는것은 주관생명의 정조와 객관적자연경상과의 상호융합, 침투로서 모든 동물이 즐겁게 살고 활발하며 못이 깊으매 령경(灵景)을 이루는것이다. 이 령경이 곧 예술이 예술로 되게 하는 ‘의경’(意境)을 구성한다.”(종백화)
    물론 의경의 심층속에 숨은 뜻은 표층적의상자체에서 직접 체현되는것이 아니라 의상과 의상사이에 구성된 예술공간속에 존재하면서 비유와 상징과 암시 등으로 완곡하게 표현되여 느끼고 깨닫고 사상에서 얻음이 있게 한다. 백거이는 일찍 “시란 정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고 했다.
   상술한바와 같이 의경은 정감을 주도로 한 정경융합의 통일체이고 “허”와 “실”의 결합이며 경물에서 형상이 창조되는 일종 심미예술공간이고 뜻이 함축되여 심미적운치가 무궁한 예술가경(佳境)인것이다. 즉 소설에서의 전형처럼 문학형상의 최고급형태의 하나이다.
    의경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경계역시 일종 층차이다. 최저층차는 바로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요 나무를 보면 나무요 구름을 보면 곧 구름자체이다. 그런 일호차착이 없이 곧이곧대로 묘사한 자연, 거울식의 완전한 현연은 예술이라 할수 없으며 그 이상 핍진하여도 태생적으로 죽은것이다.
    시의 고층차는 오감의 경계일것이다. 바로 사물의 표층을 투과한 수정같은 정경이다. 이는 또한 인격, 개성, 기질이 시적형상속에서의 함축이며 일종 “허속에 “실”이 있고 “실”속에 “허”가 있는 내재선률과 절주이며 사상감정이 개성화, 육체화이며 대천세계에 독특한 특색이다. 이른바 “나는 산천을 대신하여 말하고 산천은 나의 정신과 만나는것”이다. 김소월의 시 ≪버리운 몸≫을 보자.

꿈에 울고 일어나
들에 나와라.
들에는 소슬비
머구리는 울어라.
풀그늘 어두운데,
뒤짐지고 땅보며
머뭇거릴 때
누가 반딧불 꾀여드는 수풀속에서
간다. 잘 살아라 하며 노래 불러라.

    보다싶이 고독한 “나”는 소슬비가 내리는 들길을 혼자 걷는다. 이는 특정된 정감이고 형상이며 동시에 또 특수한 기분을 조성한다. 시에 비내리는 들판이 펼쳐있고 “뒤짐지고 땅을 보는” 하나의 커다란 돌처럼 독자의 마음의 못에 뚤렁 떨어지고 시행의 추진에 따라 잔잔한 파문이 일렁인다.
    마치 반딧불 꾀이는 미궁같고 깨지 않은 꿈속같은 정경속에서 우리는 “뒤짐지고 머뭇거리는” 고독한 시인을 보며 떨어버릴수 없는 공허와 락담, 실락감에 가슴답답해진다. 이것이 김소월이 겪는 시대병이지만 독자도 시인과 함께 그 시대병을 앓게 된다. 시에서 보여주다싶이 인격의 층차, 경계를 제외하고도 의경을 창조할 때에 심경문제도 있다. 이런 심경(心境), 자연 역시 인격과 그 함양과도 유관된다. 그것을 무아지경이라 지칭한다.
    2) 서사시
    서사시는 운문형식으로 된 장편서사문학이다. 고대와 중세기의 주요한 문학형태로서 원래 음유시인들이 민간을 돌아다니면서 랑송하던 작품이였다. 고대서사시는 뭇신들과 영웅들의 행위를 중심으로 민족의 운명과 사건을 구가하였기에 기세가 웅대하였다.
    서사시는 원시적서사시와 문학적서사시로 나눈다. 원시적서사시는 개인창작이 아니라 영웅전설이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다가 서사시화 된것이다. 반면 문학적서사시는 민족영웅을 읊었다 할지라도 시인의 예술적의식으로 창작된것을 말한다. 서사시적문예는 주관상태의 표백이 아니라 사건서술을 위주로 한다.
    단떼는 이렇게 쓰고있다. “서사시의 흥미는 작자가 아니고 그 시속의 사건이다. 례를 들면 고대희랍의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개인적으로는 실제인물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을만큼 아무래도 좋은 인물이다. 다만 호메로스의 시속의 영웅들에 흥미를 느낄따름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듀쎄이아≫야말로 서사시의 전형이라 할수 있다. 영웅서사시는 바로 세대를 이어 구두로 류전되여오던 영웅전설로서 그 규모가 방대하나 얽음새가 교묘하게 잘 짜이였으며 언어는 형상적이고 정확하고 청신하며 표현력이 지극히 풍부하고 감화력이 강하다.
    작자는 과장, 비유와 반복수법을 능란하게 운용하였다. 많은 비유는 일상생활과 자연현상을 바탕으로 하였고 환경과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인물을 그렸기에 개성이 두드러지게 하였다. 이 서사시는 거대한 예술적힘을 갖고있는 걸작일뿐만아니라 고대희랍사회를 연구하는 진귀한 력사자료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사시란 실제상에서는 서정서사문학으로서 질적방면에서든 량적방면에서든 모두 서사인소와 서정인소의 결합이다. 서사시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는 서정과 서사의 결합이다. 시라하면 일반적으로 서정을 위주로 하기에 서사시도 례외가 아니다. 서정이 결여한 서사시는 시행을 나눈 이야기글에 불과하며 오히려 산문같은 미적향수도 주지 못하게 된다.
    결구상에서 서사시의 이야기정절과 세절에 응당 전형성과 개괄성이 있어야 하며 이야기는 될수록 간결해야 한다. 만약 시행이 빈번한 교대, 복잡한 정절과 많은 인물속에 빠져버린다면 시의를 희석시킨다. 그러므로 대표성적인것, 중요한 정절과 세절을 설치해야 하며 인물설정도 너무 많아서는 안된다.
   서사시에서는 서사와 서정이 어떤 때는 물과 젖처럼 융화되지만 많은 경우에 질적통일이 있어야하거니와 량적구별도 있어야 한다. 시에 어떤 부분은 옹근 서사이고 어떤 부분은 전부 서정이기도 하다. 리백의 ≪장한가≫가 그렇게 구성된 시이다. 서사시에서 서사와 서정은 내용의 중요성에서는 평등하다.
    그러나 이런 균등한 요구도 작품의 옹근 편폭속에서 서정부분이 서사부분을 훨씬 초월하는 정황하에서만이 실현될수 있다. 이를테면 네크라쏘브의 서정서사시 ≪대문앞에서의 사념≫은 모두 117행인데 90행이 서정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한 묘사로 되여있는데 독자들은 사실보다 진지한 서정에서 감동받는다
    고리끼는 “풍경화외에도 풍속화도 있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런 풍속화에 대한 묘사는 결코 장식도 아니고 렵기성도 아닌 시의 혈육ㅡ령혼과 통일된 혈육이다. 그리고 간단한 풍토인정에 대한 소개가 아니라 생활ㅡ지방특색과 민족특색, 시대특색이 있는 생활이여야 하며 생활에 특유한 색채와 흙냄새가 풍겨야 손색이 없는 서사시라 할것이다.
    제재의 선택외에 어떤 시인은 그물식으로 사건을 엮는데 만족하면서 인물이 “무엇을 하는가”를 쓰지만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묘술이 없고 더우기 “어째서 이렇게 하는가”에 대한 묘술이 없다. 혹 “영웅의 행위”를 쓰면 인간의 정신상태에 대해서 쓰지 않는다. 이야기의 흥취성에 편향했기때문이다. 시가 심령의 선률의 연장선일진대 서사시도 례외가 아닌바 심령과 외재사물의 결합이 되여야 하고 응결된 수정체가 되여야 한다. 서사시에서 때론 심리묘사를 할수도 있는데 장편서사시《백두산》에서 감동깊은 한 장면을 보자.

꽃분이 주저앉아
두손으로 꽃잎 거둔다.
한줌 거두어 돌우에 놓고
두줌 거두어 돌우에 놓고...
산란하고 들뜨는 마음
(만날 수 있을까? ㅡ
샘물을 바라보는 처녀의 생각,
거울같은 물속에서
어글어글한 두둔 수심을 낱낱이 말하는듯ㅡ
에그! 내 무슨 생각을!
낯을 붉히는 처녀 (하략)

    시인은 인물의 심리를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묘사하고있다. 위험이 따르는 긴박한 시각이지만 있을수 있는 처녀의 절절한 련모의 심정이다. 이것은 복잡한 감정의 침투와 얽힘으로서 시행으로 하여금 감정과 심리상태와 더불어 기복을 이루며 진전시키는것이지 사건의 선후순서에 따라 진전되는것이 아니다.이것은 서사시에 고유한 서정성의 특성에서 결정된것이다.
    3) 산문시
   “산문시”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출범하고 류행되기는 19세기이다. 산문으로 시적요소를 갖춘 서정시의 하나로서 정형시처럼 시적운률이 없고 자유시와 같은 현저한 리듬, 련과 행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은 산문체로서 쓰인것이 특징이다. 비록 문장구조상에서 산문형식을 취하고있지만 풍부한 서정을 가지고 시적 으로 생활을 묘사하므로 산문미와 시적인 미감을 풍기고있다.
    산문시는 산문과 시의 특점을 겸유한 문체이다. 첫째로는 반드시 시이고 둘째는 산문의 특점을 흡수한 시이다. 즉 시적정감 및 세련미와 음악미는 산문의 령활하고 다양한 표현력과 하나로 융화되여있다. 산문시는 어디까지나 령롱하고 청신하고 간결할것을 원칙으로 한다. 구성은 령활하여 산문과 비슷하다.
    산문시는 전통적인 작시법규범의 제한을 크게 받지 않는바 시련과 시행과 글자수를 따지지 않는다. 산문시는 흔히 반복, 상징, 비유, 련상, 강조, 대구 등 표현수법을 포만된 감정으로 전형적인 생활현상이나 사물을 묘사하면서 의론을 전개하거나 서정을 토로한다. 그러면서 철리성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산문시와 서정산문은 엄격한 계선이 없어 때로 가리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산문시의 내용은 더욱 집중되고 언어는 더욱 간결하고 편폭도 더욱 작다. 서정색채가 매우 농후하고 언어가 시적인 서정산문은 산문시로 본다. 우수한 산문시는 짧고 세련되여있다. 로씨야의 뚜르게네브의 산문시 ≪문턱≫이 귀감이다.
   시적정서와 생동한 화폭, 철리성이 결합되고 정경과 경물이 융화되여있어야 독자들의 련상과 상상을 불러으키면서 심미적향수를 안겨준다. 산문시는 재래의 작시법에 얽매임이 없이 비교적 자유롭기에 행과 련을 나눔에도 자유롭고 활발하여 마치 흐르는 물같으며 내재적으로 일종 자연스러운 절주를 이룬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시이기에 무슨 수법을 쓰든 시의 기본특점을 구비해야 하며 격정이 있고 련상, 상상이 있어야 하며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시적언어로 씌여져야 한다. 그러나 속담이나 경구, 우화류와 또 다르다. 그것은 그것들에 시의가 없기때문이다. 로씨야의 뚜르게네브, 인도의 타고르 등은 모두 세계적인 산문시의 대가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산문시의 각도에서 본다면 한편의 우미한 산문시는 우아한 분행시에 비해 또 다른 흥미를 끌며 자체의 감화력을 고유하고있다. 시의 형식이 문제가 아니다. 시인은 자연에서 얻은 에너지를 전달할 때 한편의 시는 정체적으로 에너지의 결구로 되여야 하며 시종 에너지를 방사해야 한다. 형식 역시 신축성을 가진다. 행을 나누고싶으면 행을 나눌수 있는바 고정적격식이 없으며 전통적시형식과 격률을 접수할수 없다고 한다.
    4. 시창작원리
    1) 보이는것과 보아내는것
    시창작의 목적과 시의 존재의 리유로 말할 때 전자는 개체적인 자아실현 의 목적이고 후자는 전체적인 목적이 그 리유가 된다. 시창작의 본질을 론함에서 먼저 제기되는것은 시적대상에 대한 시인의 인식문제다. 시인의 예술직각은 흔히 일반리성감각을 초월한 개성화된 심미판단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 어떤 형상과 색채와 소리를 남다르게 파악하여 그것을 다시 표출하여 여러사람의 정서와 융합되는 공성의 정감으로 구체화한다.
    시는 생활에서 받은 충격에 의한 그 시인의 내면화된 인식, 자아성찰로서 시인의 의식을 통해 반영된 세계의 구체화이다. 시의 출발은 시인이 시적대상물을 보고 느끼는것을 표현하는것이며 독자는 시인의 정감에 감응하는것이다. 이때 대상세계는 수동적으로 감지되는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지각된다.
    시적감동을 “경이로움”에 둔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지금껏 보여져 온 세계가 아니라 새롭게 투영된 특별한 세계, 우리가 무심코 보아넘겼던 일상의 경험에 대해 새로운 경지를 펼친것으로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정경을 재인식하게 한다. 즉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복제품에 대한 일상적인식이 아니라 시적인식으로서 이미 표상된 대상을 부정하면서 새롭게 본 인식이다.
    김소월의 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그 례로 해석할수 있다.

봄가을  없어도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맘 밝아도 쳐다 볼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의식의 대상이 되였을 때 달의 의미는 의식의 변화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 무의적인 달이 유의적인 달로 다시 보인것은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곧 지금에 와서 내의식이 작용하고있다는 뜻이고 그 의식이 작용할 때 비로소 달이라는 시적대상물은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였다는 뜻이다.
    달은 지금까지 무관심의 상호관계에서 새 의미를 가진 세계, 새로운 경지로 펼쳐졌다. 이처럼 시인이 세계를 인식하는것은 새로운 존재로 시사된것이며 새 의미를 부여받음으로 해서 시적예술 경지로 부상하게 된것이다. 이처럼 한수의 시에서 중요한것은 그 시대에 산 시인의 인식과 체험과 평가이다.
    시는 경험해석이 아니라 감수의 형상화이다. 시인이 인식한 세계를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표현해냈을 때 독자는 자기의 경험세계에 묻혀있던 그 대상의 새로운 정경을 인식하고 공명하게 된다. 예술적인 정감체험이라는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즉 시인이 남다르게 인식한 대상물을 표현해 내여 독자가 재인식하게 하며 그속에서 이채로운 정감체험을 실현하게 한다.
    2) 세계관과 시의 정조
    궁극적으로 시는 시인의 세계관에 따라 특수한 정조로 물들게 되고 독자는 그 물든 세계에 공명하게 된다. 말하자면 부정적세계관이 선행할 때 “달”은 슬픔의 대상이 될수도 있고 긍정적세계관에 의해 환락의 대상이 될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 새는 노래하는것으로 느껴지고 애처롭게 우는것으로 감지될수 있다. 이는 시인의 개성, 주관에 의해 특수한 정조로 물들기때문에 가능한것으로서 개성이 독특한 시인일수록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역설적진리가 성립된다.
    시인의 개성은 주관적세계관에 의해서 나타난다 하더라도 보편성이라는 시대적흐름 우에서 벗어날수 없다  시인이 주관에 따라 세계를 자신의 정조에 맞게 채색한다는 말은 곧 세계와 자아의 동일시를 의미하는데 방법상 부동해도 세계는 자아에 적절하게 변용되며 이 변용된 세계가 곧 서정의 본질세계이다.

    례1.  —成浑— 시조

     말업슨 靑山이요 태업슨 流水로다
     갑업슨 淸风이요  님자 업슨 明月이라
     이중에 病업슨 이몸이 分别 업시 늙으리라 

   례2.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으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 .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 .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례1)의 경우에 세계와 자아가 분별, 감동이 없이 혼연일체가 되여있음을 본다. 이 시에서는 주객일치, 천인합일의 경지가 실현되였는데 이는 내가 의식한 자연,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순리에 따라 흘러가고있음을 의식하기에 더 이상의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례2)의 경우는 자아와 세계는 분리되여있고 나는 거기에 대해서 저항하고 무엇인가를 요구하며 “있음”에 대해서 “있어야 함”을 주장하고있다. “있어야 함” 의 당위적세계가 결여되여있기때문에 격정, 방황하는 마음이 되고 세계에 대한 적대적감정이 나타난다.
    례1)의 세계는 순응의 세계이기때문에 목소리는 부드럽고 우리에게 안락한 서정적감동을 주고 례2)의 세계는 목소리가 높고 거칠며 강한 욕구를 인식하게 하여 감동을 주게 된다. 서정시의 원래 모습은 례1)의 세계라고 하겠으나 현대시에 있어서 우리는 례1)의 목소리로만 만족하지 못하기에 례2)의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곧 분렬된 현대사회의 모습, 그리고 쟝르의 순수성만 고집할수 없는데서 기인되였다고 할수 있다.
    3) 시적표현기교
   시에는 시로서의 표현기교를 가진다. 시의 예술적특성은 시적언어가 발휘하는 독특한 미적기능에 의해 실현된다. 시어의 구조는 구조지향성, 비유성, 문맥성으로 결성된다. 산문작가는 도구로써 언어를 사용하고 시인은 사물로써 언어를 사용한다. 전자는 실제적효용성,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강조하고있고 후자는 비실제적인 효용성 곧 심미성을 강조하고있다.
시인은 화가나 음악가처럼 하나의 사물의 세계를 창조한다. 시인이 창조하는 세계는 어떤 외부적대상을 지적하는것이 아니라 시인의 분노, 고뇌, 희열이 그대로 슴배여있는 또 다른 아름다운 동경의 세계이다.
    그 세계에는 령혼이 깃들어있다. 그러면서 창조된 세계가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것은 육체화한 감동, 감정의 미분화상태에서의 뒤엉킴과 생생하게 현연되는 “사상”이다. 결국 시인은 언어를 사용하는것이 아니라 언어에 봉사한다.
(1) 직유적표현: 시적표현에서 직유법도 어떻게 쓰는가에 달린것이지 결코 진부한것이 아니다. 직유와 은유의 차이는 비유의 효과적차이다. 따라서 직유가 축적된것이 은유이고 반대로 은유가 부연된것이 직유라고 말할수 있다. 한국의 시인 변영로의 ≪론개≫를 례를 들어보자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우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이 시는 전적으로 직유에 의하여 이루어진 시로서 분노와 종교, 정열과 사랑, 강낭콩 꽃과 푸른 물결, 양귀비꽃과 붉은마음 등이 모두 류사한것으로 비교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매우 쉽고 독자들이 바로 알아볼수 있지만 시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가 불분명하고 비논리적이어서 어리둥절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너무 작위적이고 기괴한 비유는 결코 좋은 비유가 아니다.
    (2) 은유적표현: 은유는 하나의 관념, 이미지 혹은 그 이상의 관념, 이미지 혹은 상징들이 사용됨에 따라 선명성, 함축성이 높아지는 압축된 표술이다. 은유는 비교, 대조, 류추, 류사성, 동일성, 융합의 원리로 다양하게 기술되여 비유에서 고층차적이라고 말할수 있다. 은유는 기지의것으로 미지의것 혹은 불완전한 지(知)를 명료하게 깨닫게 하고 그 본질을 정의하고 서술하는 힘을 가진다.

≪꽃≫ 박두진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하략)

   이 시에서 시인이 표현하고자 한 원관념은 꽃이다. 그 꽃은 여러가지 다양한 사물에 바로 맺어져있다. 그리하여 시적인 긴장을 고조시킴과 동시에 의미의 함축성도 높여주고있다. 원관념인 꽃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개념이지만 이것이 “속삭임”, “울음”, “피흘림”, “피방울”, “정적”, “호심” 등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이미 잘 알려져있는 여러개 보조관념과 동일성을 근거로 결합되여있다.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는 외형상의 류사나 동일성보다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며 가치가 있는 동일성이 된다. 이렇게 시에 있어서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사이의 동일성이 희박할수록 좋은 시가 된다. 현대시는 두사물사이의 류사성이 없이 이질적인 사물과 결합시켜 더욱 시의 매력을 얻는다.
    (3) 인유(引喻)적표현: 동서를 막론하고 인유는 널리 쓰인 표현법으로서 동양에서 고대중국의 문헌이라든지 서양에서 고대희랍과 로마의 신화 및 성경 등은 시와 산문을 통털어서 널리 사용되여 왔다. 례: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东学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략)

    시에서 1련의 “4월”은 4. 19학생혁명을 비유한것이고 제2련의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은 민중의 자각이 봉기했던 동학혁명의 함성을 뜻하며 제3련의 “아사달 아사녀”는 신라시대에 불국사의 무영탑을 조각하느라고 비연을 감수한 석수와 그 아내를 두고 말한 인유이고 “한라에서 백두”는 한반도 3천리강산을, “쇠붙이”는 모든 무기를 말한 대유이다. 신동엽은 특히 “진달래 산천”을 노래하고 평화를 추구한 저항시인이었다.
    (4) 역설적표현: 역설적상징의 구조는 시적긴장을 유발한다. 시 구조의 본질이 이 긴장미에 있다고 볼 때, 이런 시작품은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긴장의 류형을 따르고있다. 역설적상징은 결국 경험의 복잡성과 모순성들을 구조화하는 하나의 기법이다. 한룡운의 시《님의 침묵》은 시종 역설로 씌였다.

    ≪님의 침묵 ≫ 한룡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여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뒤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론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것을 념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것은 아니지만, 리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것인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것을 념려하는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5) 상징적표현: 상징이란 개념의 어원은 희랍어로서 고대희랍인들의 비밀조직의 성원들을 위해 만든 조건부적인 표식부호이다. 상징수법은 시어에서 생활현상, 개념 및 사물의 명칭을 지적할 대신 그러한 생활현상을 어떤 점에서 상기시키는 비유적이며 조건부적인 말로 표시하는 비유의 일종이다. 례하면 노을, 아침은 청춘과 인생의 출발을 상징하며 밤은 죽음, 인생의 종말을 상징하며 얼음, 눈은 추위, 랭정, 랭혹 등을 상징한다.
    어떤 현상의 특징들과 그 현상을 규정하는 사상을 가장 선명하게 구현하는 예술적형상도 역시 상징이라고 한다. 상징은 근본적으로 둘이 결합 혹은 련결됨으로써 비로소 자률적의미를 나타내는 언어양식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학에서의 상징이란 용어는 류추적으로 가시적인 세계, 곧 물질세계가 련상의 힘에 의해 불가시적인 세계, 곧 정신세계와 일치한 표현형식이 된다.

    례: 사과 한알이 떨어졌다.
          지구는 부셔질 그런 정도로 아팠다.
          이내 어떤 정신도 발아하지 않았다.

    “사과”는 도입해온 보조관념이다. 원관념도 쉽게 알수 없으나 상상을 통해서 사과의 의미는 죽음을 암시할뿐이다. “떨어지다” “부서지다” “움트지 않음” “아픔”“은 죽음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 동일성이다. 그래서 원관념의 “최후”인 죽음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김수영의 ≪눈≫에서 상징의 동일성을 보자.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우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하략)

    눈이 생명을 가진다. 눈과 기침의 내부관계의 공통성을 찾기어렵다. 다만 상상력으로 눈과 기침은 상징으로서 이 감각적이미지는 순결과 진실성이라는 관념과 밀착된 상징이라는것을 느낀다. 눈의 생명성은 이 순결의 생명성이며 기침을 하는 행위는 화자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성의 관념과 밀착되여있다. 한국시인 김수용의 시≪풀≫을 보자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져 울다가 / 다시 누웠다 (하략)

    “풀”이 지닌 드러냄은 감춤과 조화를 이루고있다. 이 조화는 리듬이 빠른 템포로 흐르면서 주술성의 어떤 오묘한 맛을 내고있는데서 발생한다. 특히 풀이 바람보다 빨리 눕고 울고 일어난다는 반복되는 론리적모순과 융합되여 이 시의 철리성을 느낀다. 이 주술의 리듬속에 풀은 민중을 감추고 바람은 그 민중이 살고있는 실존적상황을 감추고있는 상징의 의미를 느낄수 있다.
   (6) 의성의태어수법: 우리 말은 의성의태어가 비상히 발달되여 있다.

   ≪청산도≫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해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골어 흰구름 걷는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7) 시적표현에서의 화법(话法)과 토: 토가 가지는 기능을 령활하게 운용해야 한다. 시의 내용에서 사용하는 화법에는 1인칭 화법, 2인칭 화법, 3인칭화법이 있다. 1인칭화법은 화자로서 자기의 얘기를 들려주듯이 표현하는 방법으로 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다. “나는 보았노라.”, “내 푸른 동년의 그 언덕에는”, “나의 고향은 두만강변에 있노라”와 같이 내가 중심이 되여 말하는 화법이다.
    2인칭화법은 화자의 상대를 말하는데 시적에서 본다면 “못잊어 꿈에도 생각나는 당신”, “당신의 뒤못습 바라보며”, “당신은 알고도 모른체 하셨지요?”, “당신은 제게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와 같은 표현이 2인칭의 화법이다. 3인칭화법은 객관적인 제3자에게 말하는 화법으로 표현하는것을 말한다.

      “산은 진분홍 치마에 불을 지피고있다.”,
      “침묵에 습관된 산은 하늘과만 속삭이는걸가?”
      “두만강은 구슬픈 노래를 흘리고있다”

    상기한 시구와 같은 표현이 3인칭화법이다. 훌륭한 시는 매우 조직적이기때문에 제요소 상호간의 관계가 체계있게 시인의 사상으로 수렴된다. 한용운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시 전개방식은 바로 ‘역설”의 기교다. 그의 시에서 역설은 모순을 극복하고 시적초월과 비약을 성취시키는 원동력으로 된다.
(8) 반어적표현: 작가가 의도와는 전혀 다른 표현을 하여 날카로운 멋과 예리한 감각을 발휘하는 기법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반어적구조를 통해 주제를 형상화하였다.
   (9) 자동기술법: 인간 내면의 깊은 생각, 관념을 아무런 제재없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표출시키는것이 인간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길이라 믿고 꿈을 꾸는 자가 그 순간 그대로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듯이 무의식의 세계를 기술하는 기법이다. 인간의 의식은 때론 몽환세계에 잘 빠져든다.
    4) 시에서의 시간 공간
    록수는 흘러가도 청산은 의구하다.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가도 공간은 의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시속에서는 시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흘러간 시간도 돌려오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도 당겨다가 현실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며 심리시공간형식으로 시속에 자유자재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현실에만 머물지 말아야 하고 눈앞에 경물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이를테면 신화, 력사, 현실, 미래를 사유의 예리한 칼로 잘라내고 깁기도 하면서 인간과 인간의 심령, 인생의 의미를 형상화해야 시창작공간이 무한대로 확장된다. 그 시공간이 상상력의 활무대로 된다.
    시는 응당 조각상이 되여야 하지만 사상은 공간을 질주해야 하며 감정은 공간속에서 설레여야 한다. 그것이 환각의 공간이든, 현실의 공간이든 자기가 창조해낸 하나의 조각상에 응결시킬수 있다. 상징시에서 시적상상은 거칠것없이 날아옌다. 하여 정서의 파동에 초점을 두고 복잡한것을 단순하게 만들지만 생활경험이 담겨지게 한다. 그리하여 다종다양한 감수가 병존하게 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과 재창조의 여지를 충분히 제공하며 시적용량을 최대한 확대하여 시의 다의성을 확보하고있다.
    5) 시창작자세
    생명이 존재해야 할 새로운 리상이 곧 시의 지향이 되고 시가 독자들에게서 읊어져 많은 감명을 줄 때 자체 내지는 개체의 유지목적이 달성되여 시적가치가 실현된다. 시인이 시를 쓰는 목적은 결코 하느님에게 기도하거나 참회하는 식의 은밀한 고백에 있지 않다. 시는 소리없는 납함이 못될 리유가 없다.
    시인은 시로써 독자로 하여금 감명을 받게 하는 모습을 보며 창조의 희열을 향수하기 위해 시를 쓸것이다. 진달래냐, 살구꽃이냐, 사랑이냐, 자유냐? 하는 시의 제목 즉 그 이름이 곧 그 시 자체이다. 그러나 진달래나 살구꽃이나 사랑이나 자유가 기존의 의미도 전달하지 못했다면 시창작은 무효로동이다.
   물론 살구나무를 그대로 사진 찍으라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살구나무의 이미지를 살리면서도 그것이 새로운 살구나무로 탄생한 개성이 오해받지 않도록 완미한 시가 되여야 한다는 말이다. 공성이 부재한 개체취미의 교류에만 매달린 시의 열매는 맛이 없다.
   시인의 자아도취라는 말은 시인의 가슴에 희노애락의 감정으로 와닿아 시를 낳지 않으면 안되게 한 그 내속을 옳바르게 전달하라는것이다. 시인의 감정을 움직인것이 동기가 되고 시대적요청과 사회적정서가 시의 존재의 의의로 되고 시가 지향하는 방향 등이 제대로 전달되여야 시의 존재리유가 있게 된다. 따라서 독자들의 감정들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더욱 예민한 시인의 선지선각이 선행되여야 하고 “낯설음”이 전제되여야 한다.
   시인은 언어창조자이다. 그렇다고 없는것을 만드는것이 아니다. 일상의 언어가 생명력을 갖도록 하는데 시인의 직능이 있다. “서산에 지고있는 저녁해”라기보다 “산마루에서 얼굴을 붉히고있는 저녁해”라고 표현하면 더욱 실감난다. 붉게 타는 석양보다 미학적가치가 있는 표현이므로 그 사물의 특징을 나타내게 될 때 그 말은 곧 생명력을 갖게 된다.
    시인은 자기의 시를 자기화시키려하고 제2의 자기 모습으로 나타내여 그 시로 하여금 자기를 대신하게 하려한다. 나아가서 자기의 시를 흔상하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자기와 같은 그러한 감미로움을 체험하게 하고싶어한다. 이와같이 시창작의 목적은 자아표현을 달성하는것으로서 참됨과 선과 아름다움을 심어주어 읽고 읊으면 무한한 감명과 기쁨을 새겨줄수 있는 여건이 요긴하다.
    정신은 곧 언어로서 언어가 실재를 형성하는 존재의 집이다. 베르그송은 “시인이란 이미지에 의해 그 감정과 생각을 기른다”고 하였다. 추상적의미보다 시적대상을 순진 그대로 감각하고 인식하도록 자극하는 말이 바로 좋은 이미지다. 그러므로 시인은 바로 진실한 감각을 진실한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
    이미지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이나 정서를 구체적이고 개성적인것으로 보여주는 시의 가장 근본적인 표현방법이다. 시는 심장에서 분출한 정감의 결정체이다. 시에서 개인의 감정과 정서를 그린다는것은 이미지창조이다. 따라서 개인의 주관정서를 한수의 시속에 이미지를 통해 응축시켜야 한다.
    시적인식은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우주의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단순히 보고 지각하는 일상적인식과는 달리 시적인식은 이미 있어온 대상을 부정하면서 새롭게 보아내는 인식이다. 가령 대자연속에 진달래꽃이나 별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윤동주의 ≪별헤는 밤≫에서 시적으로 인식될 때 이른 봄, 산속에 피여있는 진달래꽃이나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지시하는것이 아니라 그것은 떠나가는 님에 대한 정한의 서정을 일깨우며 그리운 얼굴들을 상기시켜주는 대상으로 인식되고있다. 이 경우 진달래꽃이나 별은 그 본래의 일상적의미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의미로 재현된다.
    시적능력이란 바로 어떤 의미를 두고 사물과 자신과의 사이에 새로운 질서나 관계가 성립되고있음을 말한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상상력이 빚어내는 이미지의 련쇄반응도 사물을 응시한 기억이 쌓이고 쌓여서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다. 시의 리듬이 발생하는 지점은 행갈이, 련의 나눔, 음절과 음운의 반복, 고저, 장단, 강약, 문장부호의 배치 등으로 알려져있다. 한편의 시짓기는 집을 짓는 일과 같으나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즉흥적으로 미궁을 지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미궁은 신비감은 줄수 있지만 감동 그자체는 아니다.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 즉 시적감동이나 감흥은 스스로 어떤 모습과 질서를 보존, 전달하려는 에너지를 안으로 지니고있고 이 에너지를 능동적으로 발동시켜 그 자연발생적감동과 감흥을 어떻게 표현하여 정착시키느냐 하는것이 바로 시의 작업이요 그 방법과 심장으로 하는 기술(记述)의 문제이다. 그래서 시짓기의 작업으로는 먼저 어떤 대상물에서 받은 감흥이 무엇인가를 알고 현실적경험을 시적경험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독일의 반(反)나치스시인 요한네스의 시 ≪봄≫을 흔상해 보자.

              호젓한 나루터에/보트가 한척
              환하게 맑은 호수를/산들바람이
              흔들고 선명한 록색으로/서로 칠한 벤치
              여름은 지난해와/다를바가 없을테지(하략)

    얼핏보면 쉽게 쓴것같지만 자세히 음미해보면 예리하고도 세밀한 관찰과 그 취사선택이 이루어져있음을 알수 있다. 시란 그저 우연히 떠오른 마음의 설레임을 그대로 써놓으면 되는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제재로하여 새로운 감동 의 세계를 펼쳐보이는것으로서 읽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이다. 그만큼 시적인 능력이란 바로 어떤 의미를 두고 사물과 자신과의 사이에 새로운 질서나 관계가 성립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릇 시인은 고립된 상태에서 생활할수 없다. 시도 또한 그 사회생활에서 떠날수 없다. 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현실에 직면하여 거기로부터 끊임없이 주제를 찾아내야 한다. 재래로 시의 사회성이라면 시인이 일반 사회인으로서의 공통성우에 서고 사회의 제반현상을 주제로 다루고 또는 능동성을 나타내는것이다. 현대시라도 사회적불안감이나 위기감 또는 거기서 탈출하기 위한 항쟁, 희망같은것을 다양한 형태로 표출하지 않을수 없다.
    어떤 시이든 시는 어디까지나 감동이 물결쳐야 한다. 독자들이 시인의 시적감각을 접수하기 어렵고 리해하려 하지도 않는것은 독자들의 마음에 감동과 감화를 안겨주지 않기때문이며 시가 독자의 정서생활에 어떤 유익한 점을 주는 공성의 이미지가 결여하기때문이다. 이는 결코 독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시각이나 청각에 의존한 감각적즐거움은 순간적이며 단순하지만 지각에 의존한 즐거움은 직선적으로 전달되지 않기때문에 비밀이 얼핏 리해되지 않는 현념이 있고 그것을 터득하는데 시의 재미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기쁨을 “재인식의 쾌감”이라고 하였는데 훌륭한 시는 감각보다 더 큰 물결같은 감동을 독자들의 심장에 전달한다.
    자연경물을 읊는 시에서는 흔히 서술적시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형용사나 색채어를 통하여 시적대상의 양태나 색다른 감수를 묘사하거나 진술한다. 그러나 인식의 내용을 직접 설명하지 않으며 외적현상만을 제시하지 않은 내면화된 현상이다. 이 점이 시적인식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근거이다. 시는 인식의 공명을 확보하고있으면서도 시적상상력의 폭이 좁을수 있다.
    진정 감각화된 시들은 느낌을 립체화시키고있다. 시인은 언어를 이미지로 갈고 닦는 련금술사로서의 재능을 보여야 한다. 시는 문자조합이 아니며 그로써 시인이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라 정감의 총아로 태여나는것이다. 쉑스피어와 동시대인이였던 극작가 존 벤슨은 “시인이란 태여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지기도 한다.”고 했지만 시가 억지로 만들어진다면 분명 볼품이 없게 된다.
    시는 본질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받은 감수가 격동을 불러일으켜 소리를 지르거나 환호성, 사색, 조소 등을 유발하는 기능과 성격이 있다. 그리하여 함께 흥분하고 즐기게 하는것이 시이다. 물론 개체의 삶이 우선이고 시로 자아를 표현하지만 세상에 홀로의 삶이란 있을수 없다.
    시인은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토하는 누에와 같다. 그러나 시행이라는 비단실에 자신이 묶일수도 있다. 많은 시인들이 굳어진 자기 사유공간과 시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돌파를 가져오지 못해 고민하고있다. 확실히 매 시편마다에서 똑같은 얼굴이 비쳐지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시에는 특유의 모호미도 고유되여있다. 시적전달에서 볼 때 시창작은 시의 내적언어형태의 기호화이고 시의 향수는 기호분석의 과정이다. 그러나 시에서 모호미는 결코 언어학적인 낯설기에서만 오는 애매모호함이 아니다. 시의 난해성을 단순히 독자의 열독에서의 장애, 고정된 양식에 대한 기호분해의 난해, 흔상능력문제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철학적인 주제나 내용을 시로 형상화할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시적형식을 취했을뿐 철학적사변에 머물러있는 글은 철학적서술이지 철리시는 아니다. 례를 들어보자. “먹고 사는 일이 다 뭔가 / 자주, 내가 나에게 던지는 낡고 지친 질문 / 굶주림이란 말이 없었대도 가난한 주인은 있는 법 /배고플수록 /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 ” 이 시는 나름대로 삶의 무언가에 대해 철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해답이 막연한 상념뿐이다.
    주지하다싶이 시의 탄생은 어디까지나 민족성, 시인의 생활경험, 지식결구, 성격, 기질과 생활에 대한 인식정도 및 감각의 민감정도, 지역특점 그리고 인문환경과 깊이 관련되여있다. 이런 전제가 있기에 서방현대주의 시풍격에 맹종해서는 아니되는것이다. 그 어떤 시를 쓰든 민족성까지 마멸할수 없다.
    시의 민족화란 비교적 큰 범주이다. 민족의 문화심리결구, 사상의식, 심미리상과 예술취미상에서 공성을 고유하지만 민족문화의 핵심인 민족혼은 분명 구별된다. 물론 민족특징은 일종 모식이 아니다. 예술에서 형식미의 추구는 마치 모태주는 반드시 도자기 술병에 넣고 탁배기는 옹배기에 담고 와인은 굽높은 잔으로 마셔야 한다는 그런 형식적인 추구와 같은것도 아니다.
 =====================================================


문학예술의 몽롱미

1. 몽롱미리론의 기원

소위 몽롱이란 사물이 모호하여 똑똑하지 않고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여 사이비하고 이렇기도 한것같고 저렇기도 한것같은 현상 즉 명료성과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몽롱성은 미감을 순수화하고 풍부하게 하며 인차 사라지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다. 몽롱미란 곧 형상의 모호, 개념의 불확정성, 터득할수는 있으나 말로 전달하기는 어려운 몽롱하고 함축된 미를 지칭한다.

몽롱미는 보일듯 말듯하고 그 뜻을 밝히기 어려운 미로서 모호미라 지칭하는 미감의 일종이다. 옛글에 “말우에서 용사를 가려내고 달아래에서 미인을 본다.”고 하였다. 미는 일정한 거리감에서도 오지만 몽롱성에서도 온다. 장강 3협의 선녀봉은 일년내내 구름에 덮혀 험준한 절경이 태반이나 가리워진다. 그리하여 “선경절반, 인간세상 절반” 이라는 경구가 나왔다.

일정한 조건하에서 몽롱미는 완전히 로출된것보다 더욱 매력이 있을수 있다. 만약 구름이 걷힌 날 가까이서 본다면 “신선세계”의 절반은 사라지고 들쑹날쑹한 면면한 산봉에 기암괴석만이 보일것이다. 구름속에 달, 교교한 월색, 운무속에 황산, 자오록한 비발속에 잠긴 계림의 산수, 동정호의 묘망한 돛배그림자…등등은 다 몽롱미의 극치라 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몽롱성은 일부 모종 사물의 허물을 덮어감추고 일종의 특이한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활짝 드러낸 상태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지구적인 미적향수를 느낄수 없을것이다. 마치 확대경속에는 비단결처럼 보드랍고 아름다운 피부가 없는것과 같은 도리이다. 이와같이 몽롱성은 모종 사물의 진면모를 투철하게 꿰뚫어볼수 없게 함으로써 심미심리에 미지의 공간을 남겨 그냥 흥미를 보유하게 한다.

몽롱은 선명함에 상대되는 개념이지만 대천세계에 허다한 객관사물 지간의 계선은 몽롱하고 모호하다. 달빛도 몽롱하고 안개도 몽롱하고 산도 몽롱하고 물도 몽롱하고…안개속에 다소곳한 꽃을 흔상할 때, 물속에서 비낀 달에 홀릴 때, 눈앞아물아물하는 아지랑이 등은 몽롱한 느낌을 준다. 몽롱미는 자연경물중에 고유한 일종의 풍경선이 아닐수 없다

사람들의 전통관념과 관습속에는 몽롱성이 나쁜 의미로 락인찍혀있는데 이는 심미표준의 시대적변천과정에서 생긴 심미심리장애라고 할수 있다. 기실 문학작품에서의 모호이미지, 회화에서 몰롱성 등은 다 미적표상이다. 몽롱미는 일종 미일뿐만아니라 일종 예술풍격미이기도 하다.

몽롱미의 특징은 몽롱하고 모호하며 함축된 형식으로 다의성내용을 표현하여 흔상자로 하여금 알아맞추고 상상해 보고 곰곰이 음미해야 비로소 심미향수를 만끽하게 하는것이다. 자기의 시로써 세상과 대화는 하려하면서도 열독을 방애하는 회삽(晦涩)이야말로 병태이며 내용상의 빈혈이다.

미국계통론학자 쟈드는 20세기 60년대 사물의 모호성문제를 제기하여 과학리론으로 연구되였다. 1975년 모호학은 하나의 학과로 세계적범위에서 중시받았다. 20세기 80년대 중국의 첫전문서인《모호학인론》나왔고 70년대 몽롱시에 대한 대론쟁을 거친후 문예계에서 모호리론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기에 모호이미지와 몽롱한 미적표상은 더는 생소하지 않게 되었다.

칸트는 “모호개념은 선명한 개념보다 더 표현력이 있다. 미란 응당 말로 전달할수 없는것이 되여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들이 생각하는것을 언어로 충분히 표현할수 없다.”고 쓰고있다. 현대 중외의 작가들이 창작에서 모호성, 추상성을 추구하는것은 몽롱미의 효과에 이르려는 시도이다.

예술작품속에 몽롱미는 내용속에 숨겨둔 모호성, 다의성, 추상성, 적라라하지 않은 함축된 내함으로 표현되며 비흥(比兴), 상징,은유, 말속에 말 등으로 체현된다. 사물의 모양과 색채와 소리가 융화되여 불확정적이고 일상을 초월하도록 변형시켜 직관과 상식적인 도리로는 리해하기 어려워 풍부한 상상력으로 예측하고 추단해야 그것의 진실한 함의와 내재미를 파악할수 있다.

2. 몽롱성의 미학공능

사람은 금방 접촉한 사물에서 미적향수의 수요가 왕성하지만 일차성적으로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에 “접근성 미감”이 산생된다. 이때가 바로 미감수요가 가장 강렬할 때이다. “행위과학”의 시점에서 볼 때 인간행위의 발동기라고 할수 있는 욕망(심리수요)이 일단 만족되면 곧 소실되고 새 욕망이 새 행위를 발동한다. 몽롱성의 미학공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적대상에 흥미도도하여 련련한 정을 보류하는 그 미감의 지속성, 접근성 미감에 있다.

몽롱미는 특정한 의경(意境)을 창조하여 호기심을 유발하며 탐구욕에 불을 지펴 알듯하면서도 묘망한 느낌속에 특수한 심미감수를 얻게 한다. 심미적대상에 대한 이런 고유한 심미심리 혹은 그런 기대심리를 예술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수법을 운용한다.

이를테면 “뜻은 명철하나 말은 에두른다.”는 수법으로 글에 함축미가 있게 여지를 남겨두거나 서정토로도 곧이 곧대로가 아니라 몽롱성속에 숨김으로써 예술미를 창조한다. 몽롱미에서 펼쳐지는 경지는 깊은 사색을 불러일으키며 미적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렇듯 문학예술창조활동에서도 창조적사유의 일종인 련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몽롱성은 중요하다. 객관적사물의 몽롱성은 결코 희미한것이 아니고 알쏭달쏭함도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시창작에서 몽롱성원리를 리용하여 몽롱미를 창조하더라도 흔상자들에게 파악불능이 되게 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새 시기 현대시의 영향을 받아 젊은 일대들이 몽롱성이 짙은 시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례하면 “어두운 밤은 나에게 검은 눈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눈으로 광명을 찾았다.”, “광풍은 꿈속에 재부를 빼앗아갔지만/도리어 나에게 사고의 유산을 남겨주었다.” 등에서처럼 몽롱성을 리용하고 몽롱미를 창조한것은 흔상자들에게 끝까지 파악불능의 수수께끼를 내는것이 아니다.

물론 충만된 격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것이 아니라 한폭한폭의 구체적도화(图画)로써 시인의 사상감정을 은근히 암시하고 상징하며 두드러지게 하는 새로운 시형식이 독자들앞에 돌연 나타났을 때 일반사람들의 흔상심리지각상 필연코 습관되지 않아 입에 잘 오르지 않는다거나 개운하지 않다거나 알수 없다거나 하면서 심지어 노해서 외면하기도 한다. 례하여 이런 시가 있다.

비둘기마저 성숙한 울음을 운다.
지나간 비바람 모질던 그 여름을.

이 시는 얼핏 보면 대자연속에 가을을 쓴것 같다. 그러나 다시금 음미해보면 “10년동란시기”의 그 “비바람 모질던 여름”을 읊고있고 오늘의 조국을 그려내고있다. 시는 리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작자는 직설적으로 자기 감정파동을 토로하지 않고 시속에 한층의 상징적의미를 깔아놓고있는데 이 역시 미적창조의 새로운 풍경이 아닐수 없다.

3. 몽롱미의 필수성

문예는 몽롱성을 수요하며 문예는 몽롱성을 떠날수 없다. 문예의 몽롱은 일종의 미를 현시한다. 그러나 무작정 새것을 추구하고 색다른것을 표방하기 위한것이 아니다. 문예작품은 인류생활정보의 일종 귀환으로서 작가들이 모호세계에서 취한 정보와 소재가 또 인간의 관측할길 없는 “흑상(黑箱)”속에서 가공되므로 충분히 몽롱성을 띠게 된다.

작가가 가공해낸 작품은 몽롱세계에 대한 투시 혹은 굴절반사의 형상일뿐이다. 례하면 화면에 나타나는 장백산이나 계림산수는 비록 부분적모습만이라도 장백산은 장백산이고 계림산수는 계림산수이다. 한것은 량자는 부동한 개념으로서 장백산, 계림의 완정한 형식과 내용을 포괄하기때문이다. 허적인 각도에서 보아도 선명하다. 화면에 나타난것이 각자의 특징을 구별해주기때문이다.

다음 문학형상은 모두 모호개념 집합으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을진대 작가는 상상, 허구로 형상을 창조한다. 즉 실체적대상을 떠난 정황하에서 원래 저축하였던 흩어지고 모호한 인상으로 개조하여 다시 결구를 짜는바 모호수거의 결합체일수밖에 없는것이다. 자연물에 대한 형상묘사는 더구나 모호언어를 위주로 한다. 미국의 현대 시인 로닐의 시 ≪조우≫를 보자.

단풍잎에 이슬은
붉게붉게 빛나는데
련꽃잎에 이슬은
눈물처럼 투명하네.

이 시에서 단풍잎, 이슬, 련꽃잎, 눈물방울은 모두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딱히 알수 없다. 황차 세상에 똑같은 사물이란 없음에랴, 사물의 상대론각도에서 볼 때 모인물, 모사물도 순간마다 그것일수도 있고 또 그것이 아닐수도 있다. 모두어 말해서 사물의 무궁한 변화, 형상의 천차만별로 하여 종잡을수 없기에 사물의 특수성과 몽롱성이 충만되여있게 된다. 문예는 오직 사물의 이런 특수성과 몽롱성을 형상적으로 드러낼 때에야만이 풍부하고 다채롭고 정취가 그윽한 매력과 미감을 선물할수 있다. 무형속에 형상이 현연되여야 볼 때는 없는듯하지만 사색속에서는 실재를 느낀다. 이것은 전통적예술추구로서 일종 몽롱미에 대한 야릇하고 불가항력적인 추구이다.

표현방면에서 본다면 시가, 소설, 산문에서의 생략 혹은 비약이며 회화에서의 공백이고 영사막, 무대에서의 공간 모두가 기실 일종의 몽롱미이다. 례하면 영화 ≪붉은수수≫에서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할머니”가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앞에 펼쳐진것은 설레이는 일망무제한 붉은수수밭이다. 그들은 인적기가 없고 장려한 대자연속에서 하늘을 이불로 삼고 대지를 침상으로 삼고 그렇게 미칠듯이 야하게 그러면서도 순결하고 자연스럽게 정욕을 불태운다.

그 광활한 대자연은 “실재적”인 붉은수수밭이 아니라 “허적인 예술공간”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로이 나래칠수 있는 황야이고 정감의 심연이며 사랑의 바다의 상징이다. 거기서 자유의 불길, 사랑의 불길, 생명의 불길이 활활 타번진것이다. 정직하고 강인하며 랑만적이고 호현한가하면 온순하고 순박한 다종기질의 사나이가 거기서 원시적인간성이 빛을 발산한다. 바로 그 붉은수수가 우매무지하던 시대의 인간성복귀의 상징이다.

“한뙈기 붉은수수는 한사발의 붉은수수술을 고아낼수 있고 또 붉은 선혈로 변하여 나중엔 붉게 타오르는 민족정신으로 승화하였다.”고 상상해보라. 넓고 거칠고 야한 록색의 공간이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얼마나 모호하고 몽롱한가? 립체감도 있고 류동감도 있어 실로 끝이 보이지 않고 사색이 끝없는 공령(空灵)의 경지에 이르게 할수 있다.

“사람은 아름답기에 사랑스러운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기에 아름다운것이다.”(레브 똘쓰또이) 이 명제에 근거하여 우리는 문예의 몽롱미를 련인의 눈속의 “서시”에 비유할수 있다. 서시가 그토록 아름다운것은 “서시”를 심미적눈길로 바라보고 “서시”를 죽도록 사랑하고 추구하는 련인의 모호하고 몽롱한 심령즉 아름다운 기대심리에 도취되여있끼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얼마의 련인이 있으면 얼마의 “서시”가 있게 된다. 문예의 몽롱미는 이처럼 현묘하고 알쏭달쏭하며 풍부하고 다채롭다. 사람이 몽롱하면 사실도 몽롱해지고 몽롱한 붓끝아래 대중도 따르기 어렵게 된다.
시 ≪가자!≫(북도)를 음미해 보자.

가자!락엽은 골짜기에 날려들고
노래는 오히려 갈곳이 없다.
가자!얼음위에 달빛이
강바닥에 넘쳐흐른다.

가자!눈은 한곳 하늘을 보라.
눈은 한곳 하늘을 보라.
마음은 황혼빛 북을 친다.
가자! 우리는 기억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가서 생명의 호수를 찾자.
가자!길이여, 길이여,
붉은 양귀비 흩날린다.

≪가자≫는 인생도로의 험난함이 주제로 된 서정시이다. 시에는 감상적인 기분이 짙게 흐른다. 그러나 “생명의 호수”를 찾는것은 잊지 않고있다. 인생의 가을에 “갈곳이 없고” 황혼빛 창망한데 일체 희망은 모두 물거품이 되여버려 마음속에서 북소리 울린다. 현실속에 인생의 길, 갈래갈래에 붉은 마취제인 아편꽃 흩날린다. 어디가서 생명의 호수를 찾는단말인가?

그러나 가지 않으면 안된다. 가자! 가자! 가자! 한걸음 한걸음 가는데까지다. 이것이 북도의 마음의 절규이다. ≪가자≫는 얼핏 보고는 알둥말둥하다. 마치 지옥에 오래 갇혀있다가 도망쳐나온 도주범의 번뇌와 갈망이 숨겨져있는것 같다. 어찌 생각하면 한창 청춘시절을 잃어버린 처녀가 아무리해도 되찾을길 없는 그 아픈 마음과 쓰라림을 호소하고있는듯도 하고 방불히 실총당하여 버림받은 적자가 다시 총애의 품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지만 이미 아득히 흘러가버린 세월을 한탄하며 돌아와도 들어갈 문이없어 처절한 신음을 토해내는것같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을 쏟아지는 울분대로 직설하지 않고 시적대상물에 정감을 이입시키는 수법으로 보일듯 말듯 정감의 베일속에 감추고 은근히 토로한다. 독자는 바로 그 숨겨진 심령심처의 구석구석에 더 호기심이 끌리고 보이지 않는 그 말을 더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곳을 엿보고 싶어하고 밟아보고 싶어진다. 시인은 이렇듯 수수께끼로가 아니라 몽롱미로 자기의 절절한 감수를 장식함으로써 시에 더 없는 매력을 싣고있다.

4. 몽롱의식의 영구성

인류가 생활하고있는 환경으로 말하면 어느 사람에게나 하나의 모호 세계라고 말할수 있다. 인간의 정신령역과 정감세계는 오색잡다하고 변화무상하여 조종할 방법이 없는 미형컴퓨터나 열수 없고 또 내부상태를 직접관찰할수 없는

“흑상(黑箱)”같다고 할수 있다. 객관세계와 주관세계 자체의 정지상태에서나 변화각도에서 보아도 완전히 다 알수 없고 다 꿰뚫어볼수 없는 몽롱성이 존재하므로 인식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몽롱의식이 산생된다.

인간의 현실에 대한 개조, 사람지간의 투쟁 및 사물자체의 발전변화는 사물을 시종 운동상태에 처하게 한다. 만약 인간이 정지적인 안광으로 변동속의 사물을 투시한다면 필연적으로 의혹과 모호의식이 산생된다.

만약 인간이 정지적안광으로 변동속의 사물을 투시한다면 필연적으로 의혹과 모호의식이 산생된다. 이런 주관의식의 몽롱성은 부단히 소실되고 부단히 산생된다. 그런데 이런 소실은 국부적이고 잠시적이다. 인간의 인식과 운동하는 세계사이에는 시공간적차이가 있기에 주관의식의 몽롱성은 불가피면적이다.

세계상의 어떠한 언어이든지 물질세계와 복잡다단한 심령세계의 기술하고 묘사함에서 의도적인 다의성보류, 추상성, 편파성, 파생성 등 불확실성을 가지게 되므로 핍진하지 못한 표현의 곤혹을 철저히 극복할수는 없다. 예술언어도 주관의식을 표현할 때 스스로 막무가내한 모호성과 몽롱성을 의식하게 된다. 이는 인류언어의 빈곤증을 의미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283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843 "님의 침묵"이냐?... "情人의 침묵"이냐?... 2016-11-14 0 3844
1842 실존주자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다... 2016-11-14 0 3528
1841 윤동주의 시 속에 마력이 없다?... 있다!... 2016-11-14 0 3028
1840 윤동주는 "북간도"가 낳은 시인이다... 2016-11-14 0 4721
1839 생태문학이 세계문학의 최고봉이다?... 아니다!... 2016-11-14 0 3598
1838 창작이냐?... 모방이냐?... 이것이 문제면 문제로다... 2016-11-14 0 3690
1837 중국 조선족 동시의 흐름을 알아보다... 2016-11-14 0 3443
1836 동시의 다양화에 관하여 2016-11-14 0 3646
1835 윤동주와 동시 2016-11-14 0 3383
1834 "우화시"와 허두남 2016-11-14 0 3566
1833 동시때벗기기 = 동시도 시로 되여야... 2016-11-14 0 3717
1832 채택룡 / 김만석... 랑송동시도 창작해야/ 김만석... 2016-11-14 0 3374
1831 박영옥 / 김선파 2016-11-14 0 3331
1830 김득만 / 김만석 2016-11-14 0 3532
1829 詩란 고독한 사람의 고독한 작업속에 생산되는 미적량심 2016-11-14 0 3797
1828 시 한수로 평생 명인대가로 인정되는 사람 없다?...있다?!... 2016-11-12 0 3791
1827 김영건 / 고 한춘 2016-11-12 0 3738
1826 심련수 / 한춘 2016-11-12 0 3829
1825 적어도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한다면,ㅡ 2016-11-12 0 3477
1824 "동시엄마" - 한석윤 2016-11-12 0 3408
1823 최룡관 / 최삼룡 2016-11-12 0 3872
1822 김동진 / 최삼룡 2016-11-12 0 4049
1821 詩人은 뽕잎 먹고 비단실 토하는 누에와 같다... 2016-11-12 0 3907
1820 [자료] - 중국 조선족 문학 30년을 알아보다... 2016-11-12 0 4137
1819 조선족 문학작품을 중문번역 전파하는 한족번역가 - 진설홍 2016-11-12 0 4325
1818 베이징 "등대지기" 녀류시인 - 전춘매 2016-11-12 0 4030
1817 화장터 굴뚝연기, 그리고 그 연장선의 값하려는 문사-정호원 2016-11-11 0 3761
1816 고 최문섭 / 전성호 2016-11-11 0 4094
1815 녕안의 파수꾼 시인 - 최화길 2016-11-11 0 3951
1814 한국 최초의 모더니스트 시인 - 정지용 2016-11-11 0 3653
1813 "등불을 밝혀"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려는 지성인 2016-11-11 0 3882
1812 詩人은 태작을 줄이고 수작을 많이 만들기 위해 정진해야... 2016-11-11 0 3963
1811 늘 "어처구니"를 만드는 시인 - 한영남 2016-11-11 0 4518
1810 늘 "서탑"을 쌓고 쌓는 시인 - 김창영 2016-11-11 0 3820
1809 장르적인 경계를 깨는 문사 - 조광명 2016-11-11 0 3844
1808 김철 / 장춘식 2016-11-11 0 4189
1807 "조양천"과 김조규 2016-11-11 0 3588
1806 "국어 교과서 편찬"과 김조규시인 2016-11-11 0 3919
1805 "만주"와 유치환 2016-11-11 0 3685
1804 {자료} - "두루미 시인" - 리상각 2016-11-11 0 3913
‹처음  이전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