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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적 상상력을 중첩, 확대하는것은 실체(체험)를 바탕하기...
2016년 10월 27일 23시 03분  조회:3656  추천:0  작성자: 죽림

4. 투사, 삶의 본질에로의 날카로운 진입


시적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을 바라보는 서정적 주체가 있다 주체는 반드시 주체의 관점을 통하여 대상을 바라본다 그 관점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그 주관은 삶의 본질을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주관이자, 어떤 객관적인 언술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향해 비약하는 주관이다 그 주관은 일체의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획득된 것이며 순간적으로 지각된 느낌을 명징하게 드러냄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논증적인 결론에 뒤지지 않는 심정적인 깨우침을 안겨준다 그리고 독자는 이 당연한 주관성을 엿봄으로써 공감을 느끼거나 부적절함에 대한 반감을 토로함으로써 시적 상상력에 개입한다 무엇보다 이 내밀하고 주관적인 관점이 우리에게 건네는 공감이야말로 시의 아름다움이 갖는 본질적인 표딱지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 주관을 가능케 하는 힘을 투사라고 한다. 이 투사는 또 직관력을 절대로 필요로 한다.

* 투사라함은 시적대상에 시인의 삶이 용해되어 그 본질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시를 쓸 때 사물의 겉면만을 보고 쓴다면 깊이 있는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연륜이나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함께 동화되어 신선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투사일 것이다

墨畵


김 종 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自尊

화창한 가을날
벌판 끝에 밝고 환한 나무 한 그루
우뚝 솟아 있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


시 묵화는 회화적이다 이는 첫 행과 두 번째 행을 통해 누구의 눈에라도 확연히 그 풍경을 지각할 수 있다 저물무렵 아마도 깡마른 손임에 분명한 할머니 손이 물억고 있는 소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는 외딴집 울타리 속의 풍경. 제목이 묵화이듯이 어떤 묵화를 바라보고 썼거나, 거꾸로 풍경과 人事의 여러 자잘한 가지를 생략해버리고 고단위의 긴장과 절제의 방법으로 여백과 농담의 미가 충만한 묵화의 세계를 지향앴거나 상관없다 이 시는 묘사적 풍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3행으로 넘어가면서 직바로 본질로 진입해 가는 시인의 날카로운 주관적 투사, 즉 진술 곧 " 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말해버림으로 무먹는 소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지는 단순하고도 객관적인 풍경이 소와 할머니 사이에 지극한 교감으로 바뀌고, 또 단순하고 객관적인 풍경이 생의 비애, 존재가 맞닥뜨린 생에 대한 자각과 그에 반응하는 섬세한 존재의 울림을 고스란히 확인케 함으로써 우리를 천박하고 저열한 우리의 그저 놓여있는 일상을 새롭게 충전하는 것이다.
시 자존도 이 점에선 시 묵화에 한 점도 뒤지지 않은 시이다 오히려 묵화가 3행부터의 투사적 진술이 우리를 깨우치긴 하지만 존재와 풍경이 감추고 있는 아득한 비의를 약간은 깨버린듯한 인상을 주는 데 비해 자존은 그렇지 않다 이 시에서도 너무나 확연한 그림 하나를 볼 수 있다 화창한 가을날이면 하늘은 높고 햇살은 순금빛으로 쏟아지고 대기는 맑다 못해 푸르른 날일 것이다 그런 날 벌판 끝에 그 햇살을 받고 나무는 역시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도 좋겠고 투명한 갈색으로 빛나는 느티나무도 좋겠다 얼마나 밝고 환할 것인가 그것이 우쑥 솟아있다 황금나무다 세계수다 은행나무라면 땅에서 하늘로 팔 벌린 상태일 것이고 느티나무라면 둥그렇게 마을을 감싸는 모습일 것이다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나 모두 지상과 하늘을 매개하는 영매이다 어쨋든 그것은 얼마나 신비롭고 아늑하고 정정하고 성성하고 밝고 환할 것인가 여기까지는 객관적 풍경의 언어적 그림이다 이에 덧붙여 연을 나눈 마지막 한 줄이 투사적 진술을 감행한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라고 객관적 사실은 모든 새들은 그곳에서 날 수도 있고 날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밝고 환한 나무에서 새가 날지 않고 어디서 날겠는가 새는 자유 순수 평화 등 모든 것을 상징한다 그 새는 인간의 비상의 꿈을 하늘로 치솟음을으로 상징해 준다 그러나 들판의 새는 대개 옆으로 난다 여기 밝고 환한 나무에서 나는 새도 그 나무에서 솟는 새이기도 해야 하지만 그 나무를 가로질러 나는 새이기도 해야한다 그래야 나무의 수직과 새의 수평이 이루어지는 것을 상상치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시는 이런 모든 췌사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풍경에 대한 언어의 선연한 그림과 이에 날카로운 투사적 상상력을 보탬으로 존재의 비의를 한층 더 깊게 만드는, 말을 침묵에 가깝게 줄임으로 되레 수 많은 말을 가능케 하는 시의 진경이 여기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5. 유추, 빗대어 말하기

시란 다른 질서 안에서 존재하는 사물을 자신의 질서로 바라보는 것이다. 시는 타자를 자신의 질서 안에 재편할 뿐 아니라 타자의 질서를 자신의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혹은 자신의 질서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 시적 관계 양상을 유추라고 명명할 수 있다
유추는 두 대상을 나란히 마주 세움으로써 시작된다. 물론 그 한편에는 항상 인간의 삶이 있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여우는 여우가 아니라 사람이다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시커먼 돼지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의 상징적 대체물이다 이 두 상징이 얼마나 엄밀히 조응하는 가에 따라 유추의 효과는 그 빛을 발한다
일반적으로 유추를 통해 획득되는 시적인식은 계몽적이거나 풍자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유추의 대상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하고 싶거나, 삶이 얼마나 비루한 것인지 잔뜩 조롱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유추가 삶 전체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열려 있지만은 않다 시가 문제삼는 삶은 특정한 삶이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추사으로서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어떠한 삶을 풍자하거나 외경스러워하는지를 무엇보다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오징어 3

최 승 호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
릇이 있다

이 짧은 시의 대상은 오징어부부이다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남 다르다 '부둥켜 안고 목을 조르는 버룻'은 결코 사랑의 자연스러운 방식이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표현은 오징어의 여러 개의 긴발의 형상에서 취한 상상력인데, 그러나 이러한 부부는 그 오징어부부만이 아니라는 현실 때문에 표현의 성공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류의 사랑은 많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은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목을 조르고 있지는 않았던가 교묘하게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고 억압하고, 풍부한 인간적 감성을 마모시키지나 않았던가 결국 그 오징어 부부는 우리들 사랑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 뒤덮인 인간이며 그 사랑의 방식은 우리들이 하용 지니고 있던 버릇이었던 것이다

근래에는 이렇게 다른 사물에 빗대어 말하기, 즉 시를 쓰는 유형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봅니다 예전에 억압적인 시대에 많이 쓰던 기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아닐지라도 무언가를 통렬하게 이야기하고 싶을 때, 유추의 상상력은 커다란 깃발이 될 것이다

6. 전복, 뒤집어보기 꿰뚫어보기

전복 또한 상상력의 일종이다 현상을 통하여 현상의 이면에 숨죽이며 떨고있는 본질을 드러내는 힘, 그것이 꿰뚫어보는 상상력이며 뒤집어보는 상상력이며, 일체의 허위를 전복하는 상상력인 것이다


북어

최 승 호

밤의 식료품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은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러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열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이 시는 참 재미있는 시이다 식료품가게 꼬챙이에 꿰어진 채 널부러져 있는 북어를 직접 들여다보고 있는 듯이 형상화하고 있다. 더욱 세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지다가 '가슴속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꿈꾸는 가운데 교묘하게 북어가 사름으로 대체되어 있다 헤엄쳐 가기를 원하는 것은 북어가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그 순간 느닷없이 커다란 입을 벌린 북어들이 큰소리로 '너도 북어지'라고 귀를 먹먹하도록 계속 부르짖는 눈부신 전복으로 시를 끝맺고 있나.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말라 찌부러진 요즈음의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뒤틀린 현실을 전복하고자할 때, 전복적 상상력은 비판적 세계인식을 드러내는 유효한 무기가 된다 따라서 이것은 앞의 발견적 상상력과 함께 리얼리스트들의 중심적 상상력을 형성한다


7. 종합, 상상력의 유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시적 상상력의 개진 방식들은 사실 추상화되어 있다. 한 편의 시는 모름지기 단 하나의 주독적인 상상력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섬세한 발견과 관찰, 날카롭게 대상의 본질을 길어 올리는 투사와 유추, 분리된 것을 결합하는 연상과 현실을 부정의 눈으로 확인하는 전복의 상상력들은 사실 한 편의 시에 긴밀하게 습합되고 용해된 채, 하나의 시적 세계를 튼실하게 엮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편의상 이런 분리는 상상력의 실체를 더욱 선명하게 들여다보기 위한 장치라는 점에서 놓칠 수 없는 이점들을 갖는다 더욱이 상상력들은 동일한 깊이로 시적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독적인 상상력이 전면에 배치된 채 여타의 상상력들은 후경에서 마치 삼각형의 꼭지점을 위한 밑변과 옆변을 형성하는 것처럼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시들을 보면 이러한 결합의 양상은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열 이열 삼열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끼리
낄낄대면서
깔죽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이시에서는 다채로운 상상력이 사용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의 모티브로 존재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겸험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시를 쓴 80년 대는 영화가 시작되기에 앞서 줄곡 애국가를틀어주었다 어쩌면 김남주의 말대로 세금고지서와 징병통지서 밖에 가져다주지 않는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강요하기라도 하는 듯 틀어주던 애국가였다 그런데 이 일상적 경험은 사실 발견적 상상력에 속한다 영화 속의 한 화면을 그대로 시적 경험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시의 중심적 시상에는 이 발견에 대한, 시적 인식으로서의 투사가 중핵을 이루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날아오르는 새들이 '어디론가 날아간다'는 객관적 사실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주관적인 인식으로 슬그머니 환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명백히 주관적인 의식의 투영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투사가 가능하며 이는 과연 공감을 자아내는가? 이 시가 1981년에 발표되었음을 생각해 보라 광주항쟁을 겪었고, 군사독재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던 그 때, 시인을 비롯한 깨어있는모두가 시의 이면에 그 아픔의 흔적과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고통 안에서 심지어는 그 고통의 현실과 무관한 새들조차 이 한반도의 남쪽을 벗어나고자 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끼룩거리면서" "낄낄대면서"로 투사된 채, 이런한 웃음 역시 남겨두고 떠나는 세상에 대한 빈정거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없는 모멸을 남긴 채 새들이 "자기들의 세상을/이 세상에서 떼어 매고" 앞 화면에서 비추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뜨는 것이다
그런데 이 투사는 시의 후반부에서 짝을 이루는 유추로 정교하게 반복된다 우리 역시 낄낄대면서, 깔쭉되면서, 다시 말해 빈정거리면서, 야유를 퍼부으면서 썩어빠진 세상을 떠나 깨어있는 우리들끼리라도 "우리들의 대열을 이루며" " 이 세상 밖"의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들은 날아 갈 수 있으나 우리들은 날아가지 못한다 그 부푼 꿈이 애국가가 끝나자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그냥 앉는 것이 아니라 어쩌지 못해 채 주저앉는다 영화관의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광주에, 현대사의 고통의 심부에, 썩은 세상에 주저 앉는 것이다 한마디로 의식에서의 꿈이 애국가가 끝나는 현실로 돌아오면서 그만 전복이 되는 것이다 전복적 상상력인 것이다 뜬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결코 낄낄거리거나 깔쭉대지 못한 채 고통과 누물로 우리들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한편의 시에는 발견과 투사, 유추와 전복이 다채롭게 융화되어 있다.

지금까지 시적 상상력을 구사하는 몇 가지 방법들에 대하여 간략한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미천하여 상상력을 중첩시키거나 확대하는 데, 어려움이 많으므로 하나, 둘의 상상력만으로 시작업을 해보시기 바란다 시가 체험과 상상력의 결합이라할 때, 사실 상상력은 무한 공간이다 무한대로 그 상상력을 지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가 되는 실체(체험)를 바탕으로 하기에 그 상상력의 한계는 좁아질 수 밖에 없다 점점 확대해나가는 것이 시인의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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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나에게 ― 이해인(1945∼ )

아파도
아프다고
소리치지 않고
슬퍼도
슬프다고
눈물 흘리지 않고
그렇게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견디는 그만큼
내가 서 있는 세월이
행복했습니다
내가 힘들면 힘들수록
사람들은 나더러
더 멋지다고
더 아름답다고
말해주네요

하늘을 잘 보려고
땅 깊이 뿌리 내리는
내 침묵의 언어는
너무 순해서
흙이 된 감사입니다
하늘을 사랑해서
사람이 늘 그리운
나의 기도는
너무 순결해서
소금이 된 고독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해인 수녀를 좋아할까. 왜 그의 시를 좋아할까. 간단하다. 맑고 깨끗해서다.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그의 시는 위안을 선사해 준다. 특정 종교를 떠나 기도하는 사람의 언어는, 간절한 사람들의 마음을 도닥여 준다. 힘들고 지칠 때, 무기력하고 답답할 때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준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힐링’의 키워드가 시대의 이슈가 되기 훨씬 전부터 그의 삶과 시는 사람들에게 힐링의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수도자도 사람이다. 그라고 왜 힘들지 않겠는가.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강한 것만은 아니다. 사람이니까 그도 아프다. ‘나무가 나에게’는 바로 그, 아픔에 대한 시인의 고백을 담고 있다. 많이 아팠지만, 많이 참았다고 말한다. 나무가 울지 않고 깊이 뿌리 내리는 것처럼 시인 역시 그렇게 살아 왔다고 한다. 이때의 뿌리란 인내와 사랑과 감사다. 나아가 그 뿌리는 언어이고 기도이며 시다. 무엇도 쉽게 태어나지는 않는 법. 이제는 이해인 수녀가, 단순하면서도 담백한 그의 시가 왜 좋을 수 있는지를 참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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