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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포스트모더니즘을 알아보다...
2016년 11월 06일 21시 33분  조회:3631  추천:0  작성자: 죽림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현상

Ⅰ. 서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현대에 이르러 한때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명확한 개념이나 한계가 분명히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세련됨의 대화의 대명사처럼 마구 사용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대체로 모더니즘 뒤에 나타난 예술 문화의 운동이라고 이해되었지만 이는 사상 영역의 후기 구조주의와도 대응하고 있다. 철학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온 이 하나의 경향은 문학 및 전 예술 영역으로 확산되었고, 현대 사회를 해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모더니티의 이성상에 대한 비판을 극단적으로 급진화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 인간이 견인하는 역사의 진보성, 사회의 합리화, 주체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실제라는 모더니티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들을 지적한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기존의 관념들을 해체하고 요란하게 분해, 조립하여 정작 그 실상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저에 비교적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 '해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해체 현상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이고 오늘날 대중문화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어떤 의의를 가지며 문제점을 무엇인가?

본론에서는 이러한 '주체의 죽음', '인간의 종말' 현상의 근저에 있는 해체 현상에 대해 철학적 시각에서 근본적으로 탐구해 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조건 거부가 아니라 진리, 규범, 양식 속에 깃들어있는 절대성과 중심성의 허구를 드러냄으로써 자연스럽게 해체를 시도하는 것이며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 구조주의의 탈중심이론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게 된다. 데리다, 푸코, 료타르, 라캉, 하버마스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진리관을 거부하고 해체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사상을 통해서 여러 가지 탈주체 이론 - 특히 현대 프랑스 철학계를 중심으로 - 을 그 형성 배경과 함께 제시하며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탈중심화 해체 현상이 문화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여러 분야에서 그 특성이 나타나지만 특히 문화에서는 문학, 미술, 연극과 대중문화 전반에 두드러지는 영향을 미쳤다. 본고에서는 특히 '작가의 죽음', '메타픽션'등으로 대표되는, 문학 분야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과 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해체 현상은 열병처럼 퍼지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써 기존의 이론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 이에 입각해서 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기존 사상을 비판하고 주체를 해체시키는 관점의 이론들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특히 철학 분야에서는 그러한 탐구가 활발해짐으로써 포스트 구조주의의 지평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자체적으로 가진 모순점역시 많이 비판되고 있다. 따라서 결론에서는 이러한 해체 현상에 대한 전반적이고 개괄적인 관찰과 의의 및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며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논함으로써 글을 맺고자 한다.

Ⅱ. 본론

1. 해체 현상에 대한 철학적 이해 -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히 문학, 예술 면에서 두드러진 변화를 몰고 왔다. 이렇듯 복잡 다단한 변화들 중에서 중심된 특징과 경향을 살펴보고자 할 때 사회와 개인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하는 포스트 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이 되므로 먼저 이에 대해 알아보아야 겠다.

1) 해체 이론의 기원과 생성
서양의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자아의 발견이라고 할 때, 인식의 주체, 사유의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탐구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아주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자아 중심의 철학은 자의식의 풍부한 활동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창조적 능력과 상상력을 강조하여 창조적 주체, 자유로운 개인을 핵심으로 삼는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한 토대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표방하는 것은 주체에 의해 파악된 객관적 실재가 진리의 기준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회가 이성의 힘에 의해 총체적으로 합리화될 것이라는 모더니즘의 이념의 거부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성 중심의 세계상이 해체되고 거시적 일반 이론도 거부되며 인식론 상의 기초 이들은 서구에서 상식처럼 통용되어 온 견해, 즉 이성적 '주체'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마련하여 '진리'로 비이성적인 현실의 장막을 제거하고 '이성적인' 사회,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계몽주의적 이성 중심의 세계관을 거부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연과 사회 속에서 인간에게 부여되는 모든 관계들과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근간을 이루었던 이성 중심주의 , 과학지상주의 , 체계화와 총채성의 이념은 해체와 다원화 탈중심과 불연속으로 대체된다. 이성과 비이성 주체와 객체의 명확한 구분이 사라지고 의미의 능동적 창출자로서의 주체는 갈가리 흩어져 종말을 맞이한다.

특히 이 모든 해체 현상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선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주체의 해체'현상이다. 사실 '주체'라는 개념 자체는 모호한 것으로 인식의 주체 일수도 있고 정치권력의 주체 일수도 있으며 인간의 자의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개인의 인식의 우선성과 보편적 타당성을 제공하는 절대절명의 원리인 이성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세계를 포착하고 규정할 수 있는 특권화된 인식의 주체이며 자신의 삶과 역사의 원동력을 우리는 주체의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주체의 죽음'은 의미의 능동적 구성자이며 창조적 인물인 이성적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성적 주체라는 것은 인간관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그러한 인간관에 의해 구성된 존재와 인식자연과 타자 등의 모든 세계관적 문제를 주제 삼고 있는 것이다.

'신의 죽음'을 주창한 니체에게서 인간의 규정은 사고의 핵심을 이루며 우리는 그의 철학을 '자아의 해체 작업'이라 명명할 때 그러한 점에서 니체는 포스트 구조주의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정신사에서 볼 때 인간은 고대로부터 이성을 가진 동물로 구분되어 왔으며 데카르트이후 근세 철학은 이성을 '자의식'형태로 전수하여 철학의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데카르트에게서 확실한 학문의 기반으로서의 사유, 칸트에게서 모든 통일성의 기반으로서의 초월적 자아의 통일성, 헤겔에게서 모든 현실성의 기반으로서의 객관정신등이 그것이다. 이에 반해 니체는 인간의 본질을 의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종의 도치된 인간 이해라고 비판한다. 그는 인식을 "인간의 핵심, 영원한 것, 근원적인 것, 확고히 주어진 것"등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과대평가와 오해"라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우선적이고 근원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하고 모순된 욕망과 의지의 충돌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충돌로부터 일종의 화해, 계약이 성립되며 그것이 곳 우리가 일컫는 지성이라는 것, 이성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의식이나 지성이란 결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원리에 입각한 독립적 능력, 모든 다른 비이성적 충동들을 상호간의 투쟁이 서로 화해하며 끝날 때까지의 최후의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힘, 의지로서의 생의 힘은 의식이 아니라 충동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니체에게서 의식은 생의 비본질적 부분적 영역으로 축소되어 이해될 뿐 아니라 나아가 생의 가장 약한 부분, 가장 표피적이며 가장 나쁜 부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니체에게서 의식이란, 인간에 의한 특수한 내적소여방식을 뜻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여 충동이나 기쁨이나 고통처럼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간접적인 소여, 즉 언어를 매개로 하여 주어진 것을 뜻한다. 니체에게서 의식은 한마디로 '언어적 파악', '언어적 사고'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에게서 의식의 기원과 기능을 밝혀 주는 단서는 바로 의사 전달 기호로서의 언어이다. 또한 이러한 언어적 사고를 따르는 의식은 개별자로서의 인간 각자의 본래적 자아가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일반적이며 군중적인 속성에 속하게 하여 자의식이란 것도 역시 인간의 개별적 자아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의 길은 못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개인의 본질을 개인의 고유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존재'에서 찾았다.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에서 이상과 위대함은 오로지 신의 속성으로 피안에서 설정된 가치이며, 차안의 인간은 단지 작고 힘없는 왜소한 존재로 규정된다. 이는 더욱 심화되어 끝에는 인간이 너무도 왜소하여 신의 위대한 자체가 인간에게 자기 모순적으로 나타나 결국 인간이 신을 제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인간의 대비자로써 생각되고 세워진 것은 결국 인간 스스로에 의해 파멸되고 만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인간이 곧 신의 창조자이며 동시에 신의 살상자라고 강조하는 의미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곧 모든 인간에 의해 설정된 가치, 피안적 진리, 불변하는 진리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본래적 자아가 되고자 하는 인간은 사고되고 의식된 표상 세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기 자신에 의해 자유로운 긍정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니체는 생각하였다. 


인간은 그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 나가야 할뿐이며 자기 자신을 자신 이외의 다른 이상이나 목적 아래 둔다거나 혹은 자신을 표피적 의식이나 일반화된 군중의 척도에 따라 평가하고 그에 예속시키려 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니체의 철학 정신을 한마디로 일반성과 군중을 앞서는 인간 각자의 고유성과 개별성의 강조, 즉 실존의 강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니체의 반형이상학적 정신들은 하이데거에 이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 계승되고 그들에 의해 니체의 정신은 방법적으로 보다 정교하게 심화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포스트 구조주의와 동일한 맥락으로 연계되어 있다. 즉 포스트 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2) 해체 이론의 발달 -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적 관점에서도 그 이전의 입장과는 큰 차이점을 보이는데 새로운 철학적 입장은 주로 프랑스에서 1960년대 말엽부터 대두되기 시작하는 포스트 구조주의가 가장 잘 대변한다. 해체 주의를 포함한 포스트 구조주의는 후기의 롤랑바트르를 비롯하여 데리다, 푸코, 라캉, 료타르 그리고 들뢰즈 등의 이론가들이 주로 주창하였다. 이들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삶의 실재의 본질이나 성격에 대해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실재를 편린적,이질적, 다원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파악하는 주체에 회의적이면서 '존재의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있다. 몇몇 철학자들이 흔히 '주체의 죽음'으로 일컫는 현상이다. 이 '주체의 죽음'은 장소의 고정성 그리고 개인이나 국가 역사에서의 권위나 가치의 확실성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의미한다. 또한 거대 이론의 붕괴를 몰고 와 신학과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등 각 분야에 거대한 파장을 몰고 왔다.

① 자크 데리다

지난 60년대 후반에 등장해 오늘날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해체 이론은 서구인들의 바로 그러한 인식의 변화를 잘 표출해 주고 있는 중요한 사고 체계이다. 이의 창시자인 자크데리다는 <<문자학에 대하여>>(1967)라는 저술을 통해 자신의 해체 이론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레비스트로스등 이에 앞선 구조주의자들역시 전통적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고자 할 때는 과학적 방법 등을 사용하여 접근하였다. 그들이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자세를 견지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종래의 형이상학적인 방법이나 가설, 가정 등에 의존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체계에서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데리다는 우선, 서구의 형이상학적이 이차적이고 간접적인 언어인 글보다도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언어인 말에 더 우선권을 주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그는 말이 글보다 더 본원적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서구의 전통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말 역시 글처럼 불완전한 이차 언어에 불과하며 서구인들이 말속에 현존해 있다고 믿는 본원적 의미란 다만 착각일 뿐 사실은 부재 속에 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항하는 자신의 이론을 <문자학grammatology>라고 칭했다. 그렇다면 문자학 또는 해체 이론은 신이 사라진 시대, 곧 절대적 진리가 사라진 시대의 이론이 된다. 해체 이론은 아직도 신의 음성 곧 절대적 진리가 현존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고 믿는 모든 시대착오적 지배 체제의 독선과 횡포에 도전하여 그것들의 눈먼 확신을 그 근본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체제전복적 이론이다. 이러한 그의 해체 이론은 서구 사고 체계 전체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사실 그는 서구의 형이상학 전체가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문화와 사상은 사물을 둘로 나누어 그중 첫 번째 것에만 특권을 부여하고 두 번째 것은 이차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소외시키고 제외시키는 양분법적 태도 위에 세워져 있다. 데리다는 바로 이와 같은 이분법적 태도가 그 동안 사회의 모든 구조에서 타자를 부당하게 억압하고 배제시키는 것을 합리화시켜 주고 합법화시켜 주는 논리적 근거의 역할을 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깨달음은 곧 모든 사회적, 정치적 체제 속에 스며들어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된 지배올로기의 억압 구조를 드러내 보이고 그 횡포를 깨닫게 해준다는 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데리다는 그와 같은 양분법적 흑백 논리가 실은 상호보족적인 관계에 있음을 지적하며 그 둘 사이의 경계에 해체를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해체 이론의 궁극적 목적은 인식론적 변혁을 통한 지배 체제의 해체가 된다. 그러므로 '해체'라는 말은 외부로부터의 파괴가 아닌, 내부로부터의 '탈구축'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은 예전부터 항상 그에게 고유한 종말로서 달리 말하면 인간에게 '고유한 것'의 종말이다"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지배 체제의 독선과 횡포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절대적 진리에의 확신이었다고 하며 그 현존을 부정한다. 그의 해체 이론에 따르면 진리란 당대의 지식과 권력이 담합하여 만들어 놓은 언술행위이고 또다른 진리를 침묵시킨 결과로 얻어지는 것일 뿐 결코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순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해체 이론은 진리와 허위의 오랜 경계선을 무너뜨렸다. 데리다는 해체 이론을 통해 이성, 질서, 총체성 등의 존재와 회복을 신뢰하는 헬레니즘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비이성, 무질서, 파편성 등을 특성으로 하는 헤브라이즘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해체 이론은 가시적인 투쟁 대상뿐만 아니라 불가시적인 투쟁 대상까지도 찾아내어 붕괴시킬 수 있는, 현대의 고도로 복합적인 시대의 한 효과적인 저항 이론이 된다.

②질 들뢰즈

데리다가 철두철미한 반개념적인 철학을 견지하고 있는데 반해 들뢰즈는 철저히 개념 철학에 의존하여 차이가 이 세계의 철학적 원인임을 규명해 나간다.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인정함은 존재가 곧 차이이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복은 차이의 대긍정이며 그러므로 긍정을 역설하고 찬양함은 존재하는 것에 기대는 수동적 측면이 아니고 부정적인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정신분열증을 자본주의와 연결시켜 분석하면서, 정신분열증 환자야말로 자연인에 가깝다고 보고 그야말로 기호의 세계에서 살면서 사회적으로 통제되고 제도화된 의미의 경계를 거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체가 사회적으로 분절된, 훈련받은, 기호화된, 주체화된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된 것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정신분열증에서 찾았다. 들뢰즈에 의하면 차이를 긍정하고 창조하고 평가하는 자는 원한과 질투에 의해 비교하는 비루한 짓은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차이에 지나지 않으며 반복하는 영원 회귀는 동일성이 없이 연루된 세계 속에서 서로 서로 손잡고 있는 차이의 세계와 같다. 존재는 사실상 하나의 다양성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철학은 어떤 전체성도 거부하고 중심이 없는 것이다.

③ 료타르

료타르는 전체화, 중심화, 절대화는 그것을 통한 획일화를 조장하게 되므로 그것을 거부하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합리화하려는 행위와 차이점보다 동일성을 창조하는 행위를 비판, 해체시키고자 하였다.

료타르는 보다 사회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그가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투쟁과 갈등이 불가피하게 생기고 그런 사회적 갈등과 압력의 해결을 위한 보편적 법칙일 인간이 발견하기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 인간관계는 '언어 놀이'와 '문장 놀이'에서 표출되고 이는 시시각각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각각의 문장 놀이는 쉽게 다른 사람의 것과 일치되지 않는 각자의 특유 어법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기존의 철학이 큰 체계를 중시하는 것에 반대하여 '조그만 이야기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으로 내세운다.

④푸코

푸코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총체성의 관점은 그 자체로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는 기존 사회의 억압적 구조를 '진리'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투명한' 사회를 목표로 삼는 혁명적 이상이 전면적 감시 프로그램과 연결된다고 본다 (이것은 진리의 이름으로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푸꼬는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연속적이고, 특수하고, 지역적인 비판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푸꼬는 해석의 다원론을 강조하며 열려진 해석학적 체계를 선호한다. 그에게서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라곤 없다. 모든 것은 이미 해석이며, 모든 기호는 그 자체가 해석에 제공된 사물이 아니라, 다른 기호에 대한 해석이다. 따라서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세계에 관한 공유된 합의일 수 없고 그 상황에서의 힘의 균형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푸꼬는 사회· 역사에 관한 총체적 지식이 권력에 대한 주장을 지닌다고 본다. 그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밝히듯이 그것은 배제의 체계--참과 거짓의 구분, 특정한 담론에 대한 금지 등--에 의한 것이다. 참과 거짓의 구별은 궁극적으로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명제의 의미는 과학적 담론이 짜여진 실천의 체계와 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의 제도적 배열은 항상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나타낸다.

푸꼬는 어떤 체계도 실재의 복합성을 밝힐 수 없다고 보고, 그 자신의 탐구의 무질서하고 파편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체계적 통일을 거부한다. 이처럼 그는 
참된 지식의 이름으로 걸러 내고, 위계화하고, 질서지우는 단일한 이론을 요구하는 것에 대항하며, 견고하고 동질적인 이론적 地形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국지적이고, 불연속적이고, 비특권적이고, 정당화되지 않은 지식에 머물고자 한다. 푸꼬는 '보편적' 지식인이 아니라 '특수한' 지식인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지식인은 자신의 작업장, 수용소, 병원, 연구실, 대학 등에서 특정한 투쟁에 충실해야 한다. 이론은 단지 특수한 투쟁에 봉사하는 도구 상자일 뿐이며, 그것의 유용성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곧바로 버려야 한다.

한편 푸꼬는 권력 이론을 크게 3가지로 구별한다. 즉 1)'경제적' 이론, 2)권력을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비경제적' 이론과 3)권력 관계를 일종의 '전쟁'으로 보는 자신의 관점으로 대비시킨다. 권력을 어떤 개인, 집단, 기구가 소유하는 실체로 보지 않고 관계, 또는 그물망으로 본다. "권력, 그것은 제도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며,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권한도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복합적인 전략적 상황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소유된다기 보다는 행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계급의 '특권'이 아니며, 전략적 상황의 효과이다. 따라서 국가를 지배계급의 정치적 도구로 보고, 권력의 핵심을 국가 기구로 이해해서 모든 권력 현상을 국가 기구에 의해 설명하는 방식은 일면적인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권력이 무엇인가?' 라고 묻지 않고 '권력은 어떻게 작용하는가?'라고 묻는 방식을 바꾼다. 그리고 권력은 자연, 본능을 억압하고, 개인이나 계급을 억압한다고 본다 (헤겔, 프로이트, 라이히 등의 견해). 권력을 권력이 오로지 제한하고 구속하며, 금지하는 법률과 금지의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푸꼬는 권력을 단순히 금지하는 힘으로 보지 않고 창조적, 생산적, 긍정적인 힘으로 보며 일종의 전쟁, 적대적 세력 관계들간의 상호 투쟁으로 이해한다.

그러면 <<감시와 처벌>>을 통해 이러한 권력의 작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푸꼬는 18세기 후반에 감옥 제도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일반화되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규율적인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그는 감옥 제도를 규율적 권력이 행사되는 전형적인 예로 보면서 이런 권력이 사회 전체에 침투해서 현대 사회를 규율적 권력이 편재하는 '유폐적' 사회로 만들어 나간다고 본다. 푸꼬는 이러한 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이 인간의 신체에 주목하면서 그 신체를 권력이 작용할 수 있는 유용한 대상으로 만드는 과정에 주목한다. 푸꼬는 이러한 신체에 대한 권력의 작용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작업장, 군대, 감옥, 병원, 학교 등--에서 규율이 생산, 수행되는 일정한 방식들에 주목한다. 푸꼬는 이러한 규율적 권력이 '위계질서적 관찰'과 '정상화하는 판단'을 결합시킨 형태를 통해 작용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이 기준이 '정상화하는 판단'이다. 이것은 일탈을 없애 그것을 정상으로 만드는 기능이다. 이를 위해 일정한 정상적 질서를 정해 놓고 사소한 위반에 관해서도 처벌한다. 그래서 일상 행위의 가장 미세한 측면을 특정화함으로써, 거의 모든 것이 잠재적으로 처벌 가능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이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이러한 정상적인 질서에 적응하지 않거나 반항하는 자들은 규율의 감시, 처벌, 교정 대상이 된다. 푸꼬는 이와 관련해서 인간 과학이 탄생하고, 그것은 개체들을 인식론적 무대 안에 적절하게 배치시키는 작업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정리, 분류된 기록은 권력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개체를 길들이고, 유용하게 만드는데 최대한 이바지하게 한다. 


푸꼬는 어떤 사회에서도 사회적 신체를 구성하고 특질화하는 다양한 권력 관계가 있는데, 이러한 권력 관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화의 생산과 축적, 유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권력은 '진리'를 생산함으로써 작용한다. 푸꼬는 권력이 신체에 작용하는 것이 사실은 정신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이상에서 살펴본 규율 체계는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를 심화시키면서 모든 개인을 정상적으로 기능 하는 위계질서의 한 지점에 배치시킨다. 이처럼 '비정상성', 위반이 배제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체제 안으로 흡수, 통합된다. 그리고 규범적인 것의 '보편적' 지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권력이 완성된다.

푸꼬는 지식을 지식 외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려는 입장--역사유물론,사회학주의 등--을 거부하고, 지식이 의식과 관념의 (제도적, 문화적) 산물이라는 입장--인간학주의--도 거부한다. 푸꼬는 인간 과학의 관리적 역할, 권력과의 공모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지식과 권력은 쌍둥이며, 지식 자체가 권력이고 권력은 지식을 통해 작용한다. 모든 지식 형태는 그 자체가 권력의 형태이며, 동시에 그 존재와 기능에서 다른 형태의 권력과 연결된 의사 소통, 기록, 집적, 대체의 체계가 없이는 행사될 수 없다. 푸꼬는 권력과 지식이 서로를 함축하고 있으며, 서로 의존하고 서로를 강화시킨다고 본다. 그는 지식-권력이 지식의 형식과 가능 영역을 결정한다고 본다.

⑤ 롤랑 바르트

롤랑바르트는 언어의 상대성과 불명료함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진리관을 비판하게 된다. 언어 자체가 확실한 것임을 전제로 하는 일련의 노력들은 사실상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느낌이나 자각 이외의 것을 보여줄 수는 없다. 언어는 그 자체로써는 무기력한 것에 불과하나 그러한 언어를 통해 사물의 본질이나 진정한 리얼리티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절대적 진리 그 자체를 언어 속에 붙들어 둘 수도 없으며 언어가 진리 그 자체가 될 수도 없는 일이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의도, 사유, 전략 따위를 보여주는 것이지 그것과 유리되어진 진리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에 의해 통제되고 발견되고 창조되는 진리란 이미 절대성을 손짓하기보다는 상대성을 드러내게 된다. 절대라는 말은 그러한 상태가 결핍된 인간이 만들어 낸 욕망과 미몽의 혼합물일 뿐이다. 그러나 언어가 환기시켜 주는 느낌은 일종의 현기증이나 현혹 작용을 일으켜 구원, 초월, 절대, 중심 따위의 말을 사용하는 사용자의 주관과 그 주관의 상대성과 허구성을 은폐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롤랑바르트, 데리다, 푸코등은 언어에 기반을 두는 진리관을 철저하게 해부하며 그것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그 허구성을 사유의 공간 속에서 소멸시키려 한다. 나아가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주체의 죽음이라는 테마를 인식론적, 역사적, 미학적으로 훨씬 다채롭게 발전시킨다. 이러한 포스트 구조주의의 탈 중심적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며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중심화 현상을 이론적으로 조명해 주고 있다.

2. 문화에서의 해체와 탈중심화 경향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과 예술 전통으로서의 모더니즘이 안고 있는 모순과 한계, 예술적 허상을 비판하는 문예적 개념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축 부분에서 시작하여 문학과 미술, 연극등 다양한 분야로 퍼져 갔는데 이는 기술의 발달과 사회 변화로 인한 문화의 패턴이 변하여 대중매체에 뿌리내린 대중문화 속에 스며들면서 더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이에 대해 프레데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리켜, 제국적 자본주의가 다국적 자본주의 형태로 세계 시장에 파고드는 것을 도와주는 후기 자본주의 논리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특징을 '미학적 대중 주의, 문화 생산물의 깊이 없음, 역사성의 빈곤, 의미의 해체, 비판적 거리의 말소, 재현 이데올로기의 약화 등으로 들고 있다. 이러한 판단의 공통적인 현상인 해체 현상은 문학에 경우 특히 지대한 영향을 미쳐 1970년대 이후 현대문학 이론의 전개와 방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데리다가 해체 이론서인 <<문자학에 대하여>>에서 보여주는 탈중심지향은 활발한 유희와 해석 작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중심의 횡포나 억압과 현존을 거부하게 했다. 그는 체제 내부에서의 해체 작업을 위해 패러디와 다원성 긍정의 두 가지 책읽기 방법을 제시했다. 이는 이후에 상호 텍스트성, 파편화현상, 메타픽션 등의 경향을 보이며 현재에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1) 상호 텍스트성

'상호텍스트성' 현상은 다른 문학 텍스트들과 맺고 있는 상호 연관성을 중시한다. 하나의 작품을 텍스트라고 한다면 작품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데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의도적으로 상호텍스트성을 활용하여 장르 개념을 해체시킨다. 상호 텍스트 성은 무조건적인 모방이 아니라 비판이 개재되어진 텍스트의 적극적 활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독창성을 강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세상에서 진정한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학이나 예술 작품은 마치 모자이크와도 같아서 이미 과거에 존재했던 작품들을 다시 결합하고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작가나 저자의 죽음'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작가는 더 이상 초월적인 신으로 간주되지 않고 한낱 언어라는 재료로 제품을 만들어 내는 생산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이 보여주는 의미란 무엇인가. 이는 무엇보다 모더니즘 미학에 대한 비판으로 형성되었고 독자성, 또는 독창성의 허구를 드러냄으로써 창작을 둘러싸고 있는 규제를 비판해 자율과 자유를 철저히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탈 장르, 탈 양식의 일환인 상호텍스트성은 형식보다는 내용이 함유되게 되는 생명력이 중시되게 되었다. 각 장르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비평이 독자적 기능의 하나였던 해석은 중시되었다. 소설은 영화를 텍스트로 하기도 하고 회화는 영화의 한 장면이나 상품광고의 한 장면을 텍스트로 하기도 하고 고전주의 문학작품을 텍스트로 하기도 한다. 여기에 패러디와 혼성 모방까지 뒤엉켜 사실상 장르나 양식 개념은 해체되고 있다. 


여기서 작품의 형식적 요소는 더 이상 판단이나 비판의 기준이 되지 못하며 중요한 것은 작품이 지닌 설득력이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은 단순한 모방이나 표절이 아닌, 텍스트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 출발한 재창조로 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는 장르 개념이나 양식 개념을 비판하여 양식상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대항 문화'의 기능을 함유하려 드는 것이다.

2) 파편화 현상

포스트모더니즘은 총체적인 비젼의 제시나 모든 현상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분산화, 파편화의 방법을 지향하게 된다. 전체화를 지향할 할 경우 중심을 만들고 보편적 개념을 만들어 내며 구체적 현실과는 유리된 이념의 허구적 중심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전체적 현상보다는 미시적이고 파편화된 현상에 접근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문학 분야에서는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차용하여 개인 서술의 단편적 나열을 통한 심리묘사 방법을 쓰는 현대 소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아무런 상관도 없고 의미없을듯한 장면의 나열로 총체적 이미지를 주는 광고들에게서도 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들은 구체적이며 파편화된 현상에 대해 접근하며 그 미세함 속에 나타난 세계와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도외시되었던 공포와 혐오를 자아내는 묘사를 거리낌없이 함으로써 도덕의 구현이나 종교적 구원, 이념의 생활화 따위의 식상한 구호들과는 먼 거리의 현대인들의 좌절감을 그려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총체적인 개념 제시보다 후기 현대사회의 인간들의 본질적인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 현상은 전체적인 전망이나 총체적인 시도가 가지는 거대 체계의 허구성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써 제시되고 있으며, 동일성보다는 차이점을 부각해 본성의 차이를 비롯하여 사유와 구체적인 현실간의 차이를 드러내어 사유가 표방하는 진리, 합리화된 제도가 내세우는 목적 등과 상치되는 미세한 현상들을 부각시켜 그러한 사유와 제도가 갖는 허구성을 노출시키고자 한다. 또한 그것은 보다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현상에 접근하기 위한 시도로 정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20세기 후반의 등장한 특이한 소설 장르로써 메타 픽션을 살펴보겠다.

지난 60년대부터 서구의 소설들은 종래의 관습적인 소설 양식으로부터 탈피해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대신 소설은 자신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성찰과 반성 속에서 스스로의 특성을 찾아갔다. 소설의 이러한 변화는 바로 소설이 더 이상 리얼리티를 제현할수 없으며 더 이상 진실을 제시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페트리샤 워는 '메타픽션'에 대해 "픽션과 리얼리티 사이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스스로가 하나의 인공품임을 의식적`체계적으로 드러내는 소설 쓰기"라고 지칭하며 이를 통해 "해석과 해체의 개념 속으로 혼합시킨다"고 하였다. 이는 위에서 서술한 예술 작품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그를 밝혀 보이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창작 행위 그 자체에 대해 극도의 자의식을 보여주게 되는데 작품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픽션이며 환영이고 작가의 인식이나 감정의 소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 그 자체가 현실이나 실제도 아니며 그러한 대상을 가리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성의 투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만든 환영에 현혹되어 그것을 실제로 착각하면 그를 만든 작가의 의도는 은폐되고 일종의 우상 숭배 현상이 일어나므로 메타픽션은 그러한 허구적 노력들을 거부하고 작품을 작가의 의도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이 속에서 작가의 자의식은 극도로 개입되게 되어 있다. 또한 현대에 와서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의 권력 구조가 극도로 복합되있는 상태에서 진실과 허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현대 소설의 저항 역시 복합적이고 불 가시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메타픽션이 현실 도피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고 워교수는 부연한다. 메타픽션의 자아반영적 요소 역시 작가들의 부단한 자기 성찰과 반성일 뿐 결코 현실 상황으로부터의 단순 도피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또한번 패러디의 효용이 언급되고 있다. 패러디는 곧 하나의 창작이자 동시에 비평이 되고 새로운 것이 고갈된 어떤 것의 말기 현상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의 탐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교훈적 의도도 없이 다만 관습에 대한 과감한 조롱과 통렬한 자기 반성을 통해 출구를 찾는 행위라 할때 메타픽션과 필연적 관계를 맺는다.

Ⅲ. 결론

이상으로 해체 이론의 이론적 토대와 그 현상 등을 살펴보았다. 
해체 이론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 우리가 당연시해 왔던 모든 형태의 지배 문화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합법성과 억압에 대해 새삼 회의와 의문을 던지게 해주었다는 점은 분명히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서구인들에게 자신들도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대한 심오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도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해체 이론은 또한 단순한 서구의 사조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사회와 문화 모든 분야에서 전세계에 절실하게 느껴지는 중요한 지적 움직임처럼 보인다..그것은 결코 진리나 전통을 단순히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진리와 전통으로써 그 동안 우리에게 부과되어 온 것들을 심문하고 외부로부터의 단순한 파괴가 아닌 내부로부터의 해체를 그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해체 이론은 모든 것을 텍스트로 축소시킴으로써 사회 정치적 역사적 담색을 소홀히 하는 단점이 있다. 또한 해체 이론은 텍스트만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독자의 반응을 철저히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해체 이론은 창작과 비평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비평이 창작을 압도하는 소위 비평 만능 시대를 열었다.

더욱이 해체 이론은 사변적 이론으로 인해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그 스스로 유리화를 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전통과 진리를 해체한 후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가 또하나의 전통과 진리가 되어 갈 가능성도 보이는 것이다. 대안적 형이상학의 구축을 꾀하지 않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운동은 그것이 대항하고 있는 기존의 질서가 이후 역설들에 의해 일단 무력화되면,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되어 미세한 차이들의 세계로 만들것다. 한편, 이 차별화 전략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의 무한한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이용되고 있다. 새로운 유행의 창조와 광고를 통해 새로운 상품에 대한 구매 의욕의 자극이나 다품종 소량 생산과 같은 것이 그 구체적인 전략일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권위와 교조적 주체를 해체시켜 줌과 동시에 더 물을 수 없는 단절을 가져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다양해진 세계상은 또한 그만큼 피해를 입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해체를 통해 이성적 우상들은 해체되었을지라도 해체라는 나름의 합리성을 가진 따라서 이성적인 로고스는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이성 중심의 로고스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 모순을 범하게 된다. 또한 다양성의 기치를 들고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상품화를 통해 제도 권의 지배 문화에 종속되어 스스로 자신의 토대를 허물고 있다는 점이나 저자의 죽음을 역설하며 해석자를 크게 부각시킨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자기반영성 상호텍스트성 등을 통해 이를 이해하는 일부의 엘리트 해석자들에게만 호소력을 지닌 채 스스로 대중에게서 차단되어 엘리트 문화로부터 더 먼 거리를 보이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결국 자신의 논리에 묶여 새로운 논리로 세계를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략은 사회 내의 개인의 경우여도 마찬가지여서 차별성의 원리야말로 자아 동일성을 담보해 주는 원리이며 다양한 삶의 방식은 일관되고 공동체적인 삶을 방해하는 것으로 비난받는 것이 아닌, 오히려 끝까지 고무된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 내의 문화 전략으로 극단화되면 사회의 자기 분열의 상황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며 극도의 산만성, 집중성등으로 사회는 무책임한 자유방임의 무질서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해체가 극단화되면 주체가 해체되고 인식과 대화는 불가능해지며 객관성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철학도 자기 정체성을 잊고 세계의 유령으로 방황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체 이론은 탈 중심과 탈구축의 인식과 전략을 제시해 줌으로써 오늘날 기존의 지배 문화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문화와 현실에서 새로운 시각과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모더니즘의 정형들, 이성 중심주의, 근원 주의 과학 지상 주의 역사주의 세계의 총체화 대신에 파편화 불연속성, 다원화, 분산화등 탈 정형화 등의 폐쇄와 분리를 통해 인류 문화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과연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혼란성과 더불어 문화 주체로서의 인류가 유념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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