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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서점이고, 서점이 곧 아버지였다"
2017년 02월 19일 16시 55분  조회:2938  추천:0  작성자: 죽림

 

 

 

 

 

 

 

파리를 여행할 때면 나는 센 강변을 먼저 찾아간다. 루브르박물관과 노트르담성당 등 파리를 상징하는 경이로운 문화유산들이 거기 즐비하지만, 나는 강변의 좌안에 늘어서 있는 고서점들을 가는 것이다. 나는 이 고서점들에서 빛의 미술가 윌리엄 터너의 컬러 판화를 여러 장 구하는 행운도 누렸고, 1860년대에 출간된 쥘 베른의 소설들과 풍자화가 그랑빌의 책을 구하곤 즐거워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고 드레퓌스사건 때 진실을 밝히는 지식인 운동에 앞장선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는 “나무가 있고 책방이 있는 센 강변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도 이곳에서 고서점을 했다. 20세기 초 파리 시 당국이 고서점들을 철거하려 하자 작가들과 연대하여 존치운동을 펼쳤다. 자신의 작품에서 애정 어린 필치로 고서상들을 그리기도 했다. 파리 시민들은 그렇게 책을 사랑하고 가난한 고서상들을 배려한 작가를 기려 그 한 구간을 ‘아나톨 프랑스 강변’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이들 고서점을 둘러보고는 바로 이웃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로 들어간다. 탐서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센 강변의 고서점들과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가 있어서 파리는 나에게 파리다. 1920년대 파리에서 6년을 머물면서 셰익스피어 서점을 드나든 헤밍웨이는 파리를 ‘움직이는 축제’라고 했지만, 나는 책의 도시 파리이기에 파리로 간다.

가난한 예술가들 보살핀 실비아 비치

1919년 11월 19일. 미국 뉴저지 출신의 실비아 비치가 20세기 유럽 문예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공간인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문 연 날이다. 청소년기를 선교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파리에서 보낸 실비아는 당초 뉴욕에 프랑스책을 취급하는 서점을 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갖고 있는 돈으로 뉴욕에 서점 내기는 불가능했다. 1917년 서른 살의 나이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프랑스 현대문학을 공부할 생각도 했지만, 강 좌안에서 프랑스책을 판매하는 아드리안 모니에와 친구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영어책 서점을 내게 된다.

 

서점 이름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고 했다. ‘컴퍼니’란 동료 또는 동호인을 뜻한다. 몸집이 작아 귀여운 여성 실비아는 당대의 작가와 지식인·예술가들을 운집시키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1차대전이 끝나면서 세계의 예술가·작가들이 파리로 몰려들었다. 작가 제임스 조이스, 화가 피카소, 음악가 스트라빈스키,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영화감독 예이젠시테인이 그들이었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시인 에즈라 파운드, 소설가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엘리스 토클라스, D.H. 로렌스가 또한 그들이었다. 파리는 이들의 정신의 은신처였다. 셰익스피어 서점은 바로 이들의 아지트였고 실비아는 이들을 수발하는 마돈나였다.

실비아 비치는 서점을 연 이듬해인 1920년 한 파티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제임스 조이스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조이스의 숭배자였던 실비아는 1959년 펴낸 자서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파티에 참석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 몸이 떨려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썼다. 조이스는 그때 『율리시스』를 영국의 ‘에고이스트’에 연재하다가 구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치는 바람에 미국의 ‘리틀 리뷰’로 옮겨 연재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외설이다 뭐다 하면서 항의가 이어졌다. 단행본 출판 전망도 밝지 않았다.

 

실비아는 『율리시스』를 직접 출판하기로 했다. ‘무삭제 완전판’ 1000부 한정 출판한다고 1921년에 광고했고 1922년 732쪽에 달하는 『율리시스』를 출간했다. 전 세계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책은 이내 매진되면서 실비아와 셰익스피어 서점은 일약 역사적인 존재가 되었다.

 

나는 2014년 여름 조이스가 서명한 『율리시스』의 초판본을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의 고서점 아고시에서 직접 만져볼 수 있었다. 보존상태가 좋아 6000만 원이라고 했다. 흰 장갑을 끼고 역사적인 한 권의 책을 만져보는 나의 손이 떨렸다. 나는 서울대 영문학과 석경징 명예교수가 10년 이상 번역하고 있는 『율리시스』 출간을 준비하고 있기에, 그 초판본을 직접 넘겨보는 감흥이 남달랐다.

 

독일군 말 안듣자 수용소 끌려가 고초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살림은 그러나 늘 고단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또한 1930년대가 끝나가면서 파리는 전장으로 변했다. 젊은이들은 징집되었다. 파리주재 미국대사관은 실비아에게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실비아는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갈 여비도 마련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나치 점령하의 파리에서 친구와 함께 사는 편을 택했다”고 그는 회고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조이스가 죽는 1941년 실비아의 셰익스피어 서점도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조이스의 대작 『피네간의 경야(經夜)』 때문이었다. 대형 군용차에서 내린 독일군 장교가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피네간의 경야』를 사고 싶다고 했다. 실비아는 남아 있는 유일본이기에 팔 수 없다고 했다. 장교는 화를 내면서 돌아갔다.

 

2주 후 장교가 다시 찾아왔다. 『피네간의 경야』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실비아가 치워버렸다고 하자 장교는 얼굴을 붉혔다. “오늘 중으로 서점을 압류하겠다”면서 차를 몰고 돌아갔다. 실비아는 친구들과 함께 서점의 책과 물건을 모두 위층으로 옮겼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는 간판도 페인트로 지워버렸다.

 

54세의 실비아는 독일군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풀려났지만 서점 문은 다시 열지 않았다. 기력도 쇠약해졌다. 문학가들과 친구들이 책방을 다시 열라고 했지만 그는 서점 이름과 같은 제목의 회고록으로 한 시대의 문예사적 풍경을 기록으로 남겼을 뿐이다. 1962년 제2의 고향인 파리에서 75세로 생을 마감했다.

 

실비아의 맥은 파리에 유학 중인 미국청년 조지 휘트먼에 의해 이어졌다. 1951년 8월 15일 문을 연 휘트먼의 서점 이름은 ‘르 미스트랄’이었다. 앨런 긴즈버그, 로렌스 펄링게티, 윌리엄 버로스, 리처드 라이트, 윌리엄 스타이런, 훌리오 코르타사르, 헨리 밀러, 윌리엄 사로얀, 로런스 더럴, 제임스 볼드윈 등 비트제너레이션으로 불리는 보헤미안 문학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1964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을 맞아 휘트먼은 서점 이름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로 바꾼다. 실비아의 전설이 새롭게 이어진다.

셰익스피어 서점 여기저기에 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입구 계단에 “인류를 위해 살아라”라는 구절이 보인다. 바닥엔 “배고픈 작가들이 먹게 하라”고 써놓았고 2층으로 오르는 머리 쪽에는 “낯선 사람을 냉대하지 마라.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라는 성서의 한 구절을 새겨놓았다.

 

 

 

2. 셰익스피어 서점은 가난하고 배고픈 젊은 이들이 머물고 가는 잡초여관이다.

 

아버지 조지 휘트먼을 이어 셰익스피어 서점을 이끌고 있는 실비아 휘트먼. 

 

 

 

갈 곳 없는 작가들 서점에 머물게 해

휘트먼은 서점을 열면서부터 갈 곳 없는 작가들과 배고픈 지식인들을 위해 수프를 끓였다. 서가와 책 더미 사이에 간이침대를 놓아 잠잘 수 있게 했다. 휘트먼은 자신의 서점을 ‘잡초여관’(Tumbleweed Hotel)이라고 불렀지만, 가난한 잡초들에게 셰익스피어 서점은 삶과 사유의 안식처가 되었다. 이곳을 거쳐간 잡초들이 3만 명이나 된다니. 지금도 하루 여섯 명씩 머문다.

 

서점에 머무는 잡초들에겐 세 가지 일이 주어진다. 하루에 책 한 권 읽기, 두 시간씩 서점일 돕기, 한 장짜리 자서전 쓰기가 그것이다. 이렇게 쓰인 자서전 1만여 장이 보존되어 있다.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석 달 동안 머문 캐나다의 언론인 출신 작가 제레미 머서는 2005년 『시간은 그곳에서 부드러워진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거닌 파리』를 썼다. 가난한 작가들을 환대해준 위대한 이상주의자 휘트먼의 정신과 사상, 책에 대한 헌신과 실천을 이야기하고 있다. ‘파리무료대학’이라는 강좌를 열었고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1968년 5월혁명 때는 학생들을 책 속에 숨겨주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봐. 미혼모를 봐. 이런 사람들이 문명의 척도야!”

 

2006년 프랑스정부는 실비아의 뒤를 이어 서점의 영원한 전설을 구현해낸 휘트먼에게 ‘예술과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책은 사람을 오래 살게 한다”고 말하곤 했던 휘트먼은 2011년 98세로 별세했다. 영국에서 유학하다 2001년 늙은 아버지와 함께 있기 위해 파리로 돌아온 외동딸 실비아 휘트먼(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실비아에서 따와 지었다)은 2005년부터 셰익스피어 서점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센 강 좌안의 셰익스피어 서점에서는 매주 문학모임이 열린다.

 

“아버지가 서점이고, 서점이 아버지였다”

실비아는 새로운 기획을 펼치고 있다. 2003년부터 문학페스티벌을 시작했다. 2011년에는 드 그루트재단과 함께 전 세계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파리문학상’을 제정했다. 매주 월요일에는 문학행사를 연다. 일요일엔 작은 티파티를 한다. 페스티벌 비용은 십시일반으로 마련한다. 참여하는 사람들이 와인이나 샴페인을 들고 온다. 유로스타가 티켓을 보내준다. 몽블랑은 펜을 기부한다. 참여 작가들과 음악가들에게는 교통비와 숙박비만 제공한다. 지난 7월 26일 셰익스피어 서점을 취재하던 날 아일랜드 소설가 폴 머레이와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서점에 2주일째 머물고 있는 잡초작가다.

 

“아버지가 서점이고 서점이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전 세계에 수많은 아들딸을 두었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인류를 사랑한 분이었습니다.”

 

 

 

1. 20세기 유럽 문학사의 아지트였던 셰익스피어 앤 컨퍼니를 방문하는 세계시민들이 1년에 50만 명에 이른다.

 

2004년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 ‘비포 선셋’의 첫 장면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였다. 9년 동안 떨어져 있었던 연인이 셰익스피어에서 다시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책과 서점에서 사랑이 이뤄지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1년에 세계시민 50만 명이 방문한다.

 

 

기록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003년에 발표된 ‘한 노인과 서점의 초상’이다. 셰익스피어에 기숙한 사람들, 샌프란시스코의 서점 ‘도시의 불빛’을 창립한 시인 로렌스 펄링게티, 오스트레일리아의 전기작가이자 장서가로 『한 파운드의 종이: 한 책 중독자의 고백』을 쓴 존 백스터, 서점 이웃의 카페주인들과 학자·교수들을 인터뷰한 영화다. 영국작가 크리스토퍼 길모어도 영화의 처음에 등장해 1968년 휘트먼과 처음 만나는 과정을 극적으로 설명한다.

 

실비아는 아버지 휘트먼의 삶을 써내는 작업을 끝냈다. 책 제목을 『내 마음의 넝마와 뼈의 책방』(The Rag and Bone Shop of the Heart)이라고 정했다. 시인 윌리엄 예이츠의 시에서 따왔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신성한 공공기구’(Holy Institution)입니다.”

 

 

 

 

/김언호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김언호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1976년 한길사 창립. 한국출판인회의·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역임. 파주북소리 조직위원장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책의 탄생』 『책의 공화국에서』 등을 썼다.​

[김언호의 세계 책방 기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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