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누가 써온 것인가? 그 기원을 찾아서.
이승하(시인.중앙대 교수)
시의 질료는 언어뿐일까요?
애드가 앨렌 포의 정신적인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샤를르 보들레르는
"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노래하는 것에 있지 않다. 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라는
유명한 자기목적설을 주장했습니다.
존 홀 힐록은 보들레르의 말을
흉내 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문은 언어를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만,
시는 언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과연 시는 언어만을 목적으로 삼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의 언어가 있습니다.
지시어와 함축어가 그것입니다.
지시어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정보를 전달하거나
의사소통에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규칙이나
법령은 반드시 지시어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언어를 다른 말로 과학적 언어라고 합니다.
법조문이 지시어로 되어 있지 않고 애매한 표현이 있어
자구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면 큰 혼란이 올거예요.
하지만 문학의 언어는 가급적이면 함축어를 써야 합니다.
지시어는 머리(이성)에 의존하지만
함축어는 마음(감각)에 호소합니다.
함축어를 제일 많이 쓰는 이는 역시 시인입니다.
언어와 사물이1:1의 관계가 아니라
1:多의 관계를 시인은 지향합니다.
알 듯 모를 듯한말,
행간에 숨은 뜻이 있는 말,
해석의 여지가 풍성한 말이 문학적인 말(언어)입니다.
그와 아울러 시는 근본적으로 애매한 언어이며
역설적인 언어입니다.
시는 언어를 구사하여 이루어진 것이되 일상적인
언어로부터해방되려는 모순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현대에 들어 점차 가솟화되어
언어를 거부하거나 언어를 파괴하는 극단적인 형태로
치닫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시에 사진. 그림. 만화. 악보. 화학 방정식이 함께
등장하기도 합니다.
악보를 사람 얼굴 모양으로 찢어붙이기한 이런 것이
시라고 발표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밖에도 외형이 시 같지 않은 시가 대단히 많습니다.
시인은 유사 이래 언어를 갖고 논 말 놀이꾼이었고,
언어로 사물을 찍어낸 언어의 연금술사였으며,
마침내 언어를 부숴버리려 든 이상한 족속입니다.
시의 언어 즉 시어는 축소지향의 언어입니다.
시인은 한 마디의 말에 여러가지 뜻을 담고자 애씁니다.
정원사가 잔가지를 쳐내어 나무를 더 잘 자라게 하고
보기 좋게 하듯이 쓸데 없는 말을 줄이는 것이
시를 쓰는 과정입니다.
앙상한 가지만으로
깊은 뿌리와 무성한 잎까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야
시가 됩니다.
하지만 소설은 이야기에 살을 자꾸만 붙여,
구체성, 사실성, 개연성을 추구합니다.
확대지향의 언어, 즉 산문이 소설의 언어가 되는 것이지만,
소설도 때에 따라서는 함축적인 언어를 써
축소를 지향할 때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언어는 존재의 집니다"하는 말을
한 적이 있지요.
사물과 현상을 다 껴안고 있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가 없으면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고,
언어를 통한 인식이 없이는 사물과
현상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말이 있어야 모든 사물과 현상의 존재가 가능하며,
문학은 말에서 출발하여 말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시에서도 말의 파괴현상이
위험 수위를 넘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언어에 온갖 욕설과 음담패설이, 비어와 속어가,
외래어와 전문어가 넘쳐납니다.
그래서 영랑과 소월, 백석과 만해,
윤동주와 이육사의 시가 지금까지도
국민적인 애송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시는 우리말로 우리 정서를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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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었던 것들
―한영옥(1950∼ )
실한 풋고추들이 쪼개져 있었다.
쪼개진 풋고추 처음 보여준 사람은
고추전 잘 부치시는 우리 어머니
풋고추 싱그럽게 채반 가득한 꿈이
아침나절 덮어와 어머니 곁에 왔다
함께 기우는 목숨 언저리 햇살
한껏 잡아당겨 서로를
찬찬히 눈여겨두는
나물 그득한 점심이 달다
내가 아는 모든 것, 어머니가
처음으로 비춰준 것들이었다
떠나서 배운 이 골목 저 골목은
끌고 다니며 발길질만 했다
두 눈 가리우고 끌려 다녀
어디가 어디인지 하나도 모른다
이제야 눈가리개 풀고
어머니, 맛있게 잡수시는 곁에서
맛있었던 지식(知識)들 햇살 채반에 널어본다
모조리 어머니가 먹여주신 것들이다
다시 나는 끌려 다닐 것이다
다만 여기 이 점심이,
죽을 것 같은 날짜를 덮어 주리라고
어머니 곁에 앉은 김에 꾹꾹 먹는다
씹으면 아삭아삭 맵고 단 맛이 배어날 싱싱하고 실한 풋고추가 채반에 가득하다. 그 싱그러운 냄새와 빛깔의 꿈은 화자 무의식 속 갈망이 불러낸 것일 테다. 화자는 현재 행복하지 않다. 화자가 몸담고 있는 ‘이 골목 저 골목은/끌고 다니며 발길질만 했’단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죽을 것 같은 날짜’를 앞뒀단다. 칙칙하고 울적하던 차에 한 꿈이 햇살처럼 비춘다. 화자의 꿈에서 풋고추들은 깔끔하게 반으로 쪼개져 있다. ‘쪼개진 풋고추를 처음 보여준 사람은’ 어머니였지. ‘고추전 잘 부치시는 우리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쪼개진 풋고추뿐일까. ‘내가 아는 모든 것, 어머니가/처음으로 비춰준 것들이었다’. ‘까꿍!’부터 도리도리 짝짜꿍은 어머니가 맨 처음 가르쳐주시는 삶의 기호들. 자식에게 살아가는 법, 살아가는 맛을 가르치는 것, 그것이 어머니의 살림이다. 반면 세상의 ‘스승’들은 진을 뺄 뿐이다. 두 눈 가리고 끌고 다니다가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내팽개친다. 나보다 배움이 짧다고 생각해 온 어머니, 그런데 ‘맛있었던 지식들’은 ‘모조리 어머니가 먹여주신 것들’이구나. 화자는 한달음에 어머니를 찾아가 ‘나물 그득한 점심’을 달게 먹는다. ‘함께 기우는 목숨 언저리 햇살’이라니 화자는 젊지 않은 나이이고 어머니는 많이 연로하셨을 테다. 어머니 손맛이 그리울 테지만 밥상 차리시게 하지 않고 어디 맛있는 밥집에 갔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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