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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친구 문익환 목사도 시 "동주야"를 썼다...
2017년 03월 07일 19시 03분  조회:4470  추천:0  작성자: 죽림

                 동주야

                             문익환

 

   너는 스물 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 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 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쿠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 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릴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고 문익환목사는 “원통하기 그지 없지만 나는 동주형의 추억을 써야한다. 나는 이글을 쓰고

    싶었다.” 라고 술회한 바 있다.  어린 시절 소학교를 같이 다니던 친구 윤동주가 일제의 고문

    에 의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것을 원통해 하며 쓴 시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1930년대 은진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윤동주(뒷줄 오른쪽)와 문익환(뒷줄 가운데) 모습

 

 *문익환(文益煥, 1918~1994)

만주출생의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자 재야운동가. 호는 늦봄

만주(현재의 길림성 용정시)에서 태어나 1947년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 졸업

1954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음

이후 한국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성서학을 강의하였으며, 1970년대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의 공동번역성서 번역사업에 개신교 대표로 참여

친구이자 사회운동가인 장준하(張俊河)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

1970~80년대 군사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수차례 투옥되었으며 석방 후 활발한 통일운동과 강연활동을 벌이던 중 1994년 심장마비로 별세함

1989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귀국하였으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었음

2002년 민주화운동에 대한 업적이 인정되어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음 

저서에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꿈이 오는 새벽녘> 등이 있고  시집으로 <새삼스런 하루>, <꿈을 비는 마음>,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등이 있음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

사진 한 장이 있다. 1930년대 중반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네 명의 친구들이 찍은 것이다. 세 명은 뒷줄에 나란히 서있고 앞 줄 가운데는 약간 비딱하게 한 명이 앉아있다. 세간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는 이 사진 속 네 명이 저마다 다른 의미로 한국 현대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고 한다. 뒷줄 왼쪽부터 장준하 선생,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이며 앉아 있는 이는 대한민국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냈던 정일권이라는 것이다. 특히 한때 함께 사진을 찍을 정도로 친한 동창이었지만 극과 극으로 나뉜 삶을 산 세 명의 친구와 정일권 전 총리를 비교하는 설명이 많다.

한 장의 빛바랜 사진에 함께 등장하는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그리고 정일권. 이 설명은 사실일까.
 

1월 18일은 23년 전,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문 목사와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너무 다른 삶을 살았던 정일권 전 총리는 공교롭게도 하루 전인 1994년 1월 17일 사망했다. 하루 차이로 세상을 떠난 이 두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앞서 언급한 사진 한 장이다.

하지만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정일권이 함께 찍었다고 알려진 이 사진의 설명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소설가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에는 이 사진의 진실이 담겨 있다. 


이 사진은 윤동주 평전이 집필될 때 문 목사가 인터뷰를 하며 제공한 것인데 뒷줄 가운데는 문 목사, 그 오른쪽이 윤동주 시인인 것은 맞다.

윤동주 평전은 문 목사가 밝힌 이 사진의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당시 교모를 모자 가게에 가서 맞춰 썼는데 문 목사의 것은 반듯했는데 윤동주 시인의 모자는 우그러진 형태였다는 것이다. 평소 물욕이 없던 시인이 이상하게 모자를 탐내자 문 목사는 대신 호떡을 사라고 하고 바꿔 줬다고 한다. 이 사진 속 모자가 서로 바꿔 쓴 것이라고 문 목사는 설명했다.
 

윤동주 평전에 따르면 문 목사는 사진 속 나머지 두 친구가 누구인지도 밝혔다.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온 네 명이 찍은 것인데 그의 왼편은 이름을 잊었고 앞에 앉은 이는 장로신학대 교수를 지낸 이영헌이라고 했다. 장준하로 알려진 사진 속 인물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정일권으로 알려진 이는 이영헌 목사라는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유족도 사진 속의 인물이 선생이 아니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게다가 은진중학교 출신 전학생들이 찍은 사진이라는 문 목사의 설명과 달리 정 전 총리는 은진중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그렇지만 문 목사가 윤동주 시인과 죽마고우였고 장준하 선생과도 평생 친구였으며 세 사람이 같은 시기에 숭실중학교를 다닌 것은 사실이다.

문익환 목사가 쓴 시 '동주야'에는 28살에 세상을 떠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 재야의 거목, '늦봄' 문익환 목사. [자료사진]


 
이시우 전문기자=


   
▲2002년 6월 중국 용정 옛집 자리에서 포즈를 취한
박용길 장로(맨 왼쪽)와 문 목사의 동생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내가 1944년에 결혼해서 시집살이 온 집이 바로 이집이지. 58년전 기차에서 내려 용정에서 마차를 타고 이집으로 들어가는데 목사님이 굉장히 좋아하시며 흥분하셨어.” 

2002년 6월 박용길 장로님을 모시고 함께한 만주 용정여행 때였다. 박 장로님은 문익환 목사의 옛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서서 마치 가마를 타고 막 골목으로 들어서는 새색시처럼 상기된 얼굴로 함께한 가족들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아주 잠시 이어진 침묵의 응시. 나는 골목길에서 보았던 박장로님의 그 표정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장면은 여러 생각과 감상이 쌓이고 쌓여 나에겐 그저 단순히 시집가는 날의 풍경, 그 이상이 되었다. 

소녀 박용길은 경기여학교를 거쳐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관동조선신학생회모임에서 청년 문익환을 만나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문익환이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안 부모님은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자 “반년만 살아도 좋다. 이 남자와 결혼 못한다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버티며 집안을 설득했다. 박용길은 이 가엾은 청년과 결혼한 뒤 6개월 뒤에 죽으면 나머지는 평생 전도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람을 알아보는 천재가 사랑의 이름으로 실현됐다는 점에서 이 선택의 주도권은 청년 문익환의 몫이기 보다는 소녀 박용길의 몫이 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 고 문인환 목사의 생가를 찾아 중국 용정과 명동촌을 방문한 2002년 6월 당시의 박용길 장로와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두 사람의 열애는 결실을 맺어 1944년 6월 17일 안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2차대전의 전세가 기울고 식민시대가 마지막 정점에서 발악하던 시절, 전쟁 속에서 피어올린 꿈같은 사랑의 결실이었다. 반년도 못살 거라던 문익환 목사의 예고된 운명은 결혼 후 반년이 지나고 일년이 지났지만 보기좋게 빗나갔고 그 대신 만주에 들려온 소식은 제국주의 일본의 운명이었다. 사랑의 힘은 죽음을 넘어 승리했고, 세기의 폭력은 평화의지 앞에 좌절된 것이다. 

해방 후인 46년 만주 피난민 수용소에서 난민을 돌보던 두 사람은 ...가족과 난민을 데리고, 걷고 또 걸어 압록강을 넘어 신의주로,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로 이르는 대장정에 오른다. 

따라서 박 장로님이 만주에서 생활한 시간은 채 2년 안팎이다. 박 장로님이 만주를 떠난 뒤 해방은 분단이 되었고, 분단은 전쟁이 되었으며, 전쟁은 독재를 낳았다. 일본제국의 심장에서 피워낸 사랑과 길지 않았던 만주에서의 생활은 단순히 일본에서 만주로의 거리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이후 만주와 일본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전략지대로서의 지정학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유라시아극동의 전략지대인 만주로 이주하여 이러한 지정학의 숙명을 몸으로 체득한 ‘문씨네’ 집안과 함께 하게 된 박 장로의 운명 역시 이에 동화되고 일치되었다. 문영환은 만주에 정착했고 문동환은 미국에 정착했다. 문익환.박용길 부부의 장남 문호근, 삼남 문성근은 문익환의 길을 따랐지만 차남은 JP모건의 시카고 부사장이다. 가족들의 복잡해 보이는 이력은 극동유라시아의 지정학이 관통되던 만주라는 무대를 지우고서는 설명되기 힘들어 보인다. 

시인 김형수가 “문익환의 영혼적 혈통은 유목민이었고 그는 늘 광활한 무대를 그리워했으며 좁은 칸막이 안에서 형성된 기득권을 타고 안주하는 것을 경계했다”는 표현은 어느 샌가 박 장로님에게도 발견되는 일치점이었다. 두 세기에 걸친 박 장로님의 인생 여정에는 한순간도 어김없이 작동된 유라시아지정학의 긴장이 겹쳐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 우리 역사는 문익환이란 거목을 발견하지만 그 거목이 뿌리내리고 있던 대지와 수분과 바람을 놓칠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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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11월 13일 기자는 젊은 지성들의 모임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 회원들과 더불어 룡정의"산증인"으로 불리는 저명한 사학자 최근갑 옹(85세)을 모시고 룡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와중에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룡정에서의 자택 옛터를 확인할수 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소학교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나라사랑”이라는 잡지에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윤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주한것은 대변혁이였다.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령 윤씨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크게 변했다. 윤동주네가 이사온 룡정집은 룡정가 제2구1동36호로서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20평방메터 정도밖에 안되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8명의 식구가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시절이 시작되였다.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의 30년대의 모습윤일주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문익환목사는 “중앙월간”(1976년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페소트를떠올리고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문익환목사는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룡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학교와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에는 또 카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영국더기’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국더기”는 지금 룡정 동남쪽에 위치한 더기로서 당년에 연변의 첫 조계지가 이곳에 설립되여 있었다. 그 더기우에 일떠선 은진중학은 1만평 부지에600평의 본관과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가지고있는 ,명실상부한 룡정 최고의 신식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민족교육을 거침없이 실시해 일제가 금지하던 조선말 교육은 물론 영어-성경-국사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수업이 이뤄졌다. 간도 개척기에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의 명동학교였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룡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이였던것이다.

  “영국더기”와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200메터 상거한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1등상을 땨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그 청년기를 담금질했다.

  현재 오스트랄리아에 거주,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일한 혈육인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절구통우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잘 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 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룡정의 자택에서 치러진 윤동주 장례식 광경.

  상주들중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영정곁의 오른쪽 첫번째), 아버지 윤영석(그 두번째), 동생 일주(세번째), 어머니 김룡(다섯번째), 여동생 혜원(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왼쪽으로 네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가 문익환 목사이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 부터 그의 골회가 운송되여 왔다

. 1945년3월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 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1985년에 이루어졌다. 

 

 
 

 

서대숙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석좌교수

 

 30~40년대 룡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룡정 자택과 불과100여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후 미국콜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문제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룡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영국더기”를 찾으면서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명동마을의 정초자,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룡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사학자 최근갑옹이 김약연 목사의 옛집 터를 확인하고있다.

지금은 한 아파트단지의 접수실로 변모해 있다.

 

  최근갑 옹은30년대 김약연목사의 자택(현재 룡정 안민가 “해란의 별(海兰之星)”아파트)부근에서 당시 “벌채조합(伐采组合”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력사에 관한 어제의 “산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1926년독립운동가 최청남의 아들로 태여난 최근갑옹 역시 은진중학교 23기 졸업생이다. 즉 윤동주와 은진중학의12년 후배로 되는것이다.

  해방후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면서수차례 길림성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최근갑옹은1986년룡정시 건설국 국장에서 정년 리직한 뒤 제2의 인생 즉 우리 민족의 력사발자취를 찾고 그것을 발굴, 복원해 후세에 남김과 아울러 력사관광전적지건설에 혼신을 바치고있다.

 

 
 


윤동주의 룡정자택 옛터

 


  최근갑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는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조차 없어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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