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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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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민주주의 녀류시인 - 이바라키 노리코
2017년 03월 12일 00시 17분  조회:4408  추천:0  작성자: 죽림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はじ)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行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與えられた道を 
步みゆかねば。 

今宵も空が風に吹きさらされる。 

/윤동주 <서시>  /아바라키 노리코 日譯.

 

좀 더 강하게
                  / 이바라기 노리코

 

 

 

 

좀더 강하게 원해도 괜찮다

우리들은 아카이시(赤石)의 도미가 먹고 싶다고

 

좀더 강하게 원해도 괜찮다

우리들은 몇 가지 종류의 잼이

언제나 식탁에 있어야 한다고

 

좀더 강하게 원해도 괜찮다

우리들은 아침 햇빛이 비치는 밝은 주방을

갖고 싶다고

 

닳아빠진 구두는 깨끗이 버리고

딱 들어맞는 소리 나는 새 구두의 감촉을

좀더 느끼고 싶다고

 

가을 여행을 떠나는 이가 있다면

윙크로 보내는 것도 괜찮다

왜일까

위축되는 것이 생활이라고

 

믿어버리고 마는 촌락과 도시

집들의 차양은 눈을 치켜뜬 눈꺼풀

 

어이 조그마한 시계집 주인이여

구부러진 등을 펴고 당신은 소리쳐도 괜찮다

올해도 결국 토요일의 장어는 맛보지 못했다고

 

어이 조그마한 낚시도구집 주인이여

당신은 소리쳐도 괜찮다

나는 아직 이세(伊勢)의 바다도 보지 못했다고

 

여인을 사귀고 싶으면 빼앗아도 괜찮다

남자를 사귀고 싶으면 빼앗아도 괜찮다

 

아 우리들이

좀더 탐욕적으로 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시작되지는 않는다

 

 

 

-시집『대화』(1955년)
/ 《현대문학》(2012년 5월호) 재수록

 

 

 

-이바라키 노리코 

/ 1926년 오사카 출생.
제국여자약전(현재 도호[東邦]대학의 전신) 약학부 졸업. 

대표시집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보이지 않는 배달부』『진혼가』등. 2006년 사망.

 

-번역 / 양동국(상명대 일본어문학과 교수)

 






윤동주 시의 윤회, 이바라기 노리코

 

 

 

 

 

사실 나는 어떤 유행에 대해 기피하는 기질이 있어, 윤동주 시에 대해 그리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지내왔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은 백석이나 신동엽이다. 그런데 일본에 와서 윤동주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윤동주에 대한 일본인의 사랑은 유별나다. 그 사랑을 통해 윤동주의 의미를 다시 감득(感得)하는 것이다. 

사에구사 토시카츠[三枝壽勝] 교수는 한국문학을 논하는 일본인의 자세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첫째, 한국문학에서 일본문학의 영향을 찾아보려는 태도다.
둘째, 한국문학에 대한 연구를 정의로운 행동으로 생각하는 태도에 대해 사에구사 교수는 예민하게 지적한 바 있다. 사에구사 교수는 일본인이 한국문학을 대하려면, 우월하다는 자세나 뭔가 사죄한다는 정의로운 생각이 아니라, 단순히 '외국문학'으로 읽어야지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사에구사 교수의 본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경청한다. 어떤 선입견을 두고 작품을 대하면 작품의 본뜻과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담감을 그대로 안은 채 윤동주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연구자는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다. 2003년 겨울, 소설가 김학철 선생의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자리에서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김학철과 윤동주를 비교해서 말했다. 

"한국문학에서 세계문학에 내놓을 수 있는 작가는 두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인 윤동주이고, 소설가 김학철입니다."

이 말대로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1985년 5월 연변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를 발견하고, 친필책을 냈다. 또한 오오무라 마스오는 소설가 김학철을 가장 처음 만난 외국인이며, 김학철이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에 만난 외국인이 되었다. 그리고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윤동주와 김학철의 많은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윤동주의 시를 처음 번역한 이는 이부키 고오[伊吹鄕]지만, 그의 번역은 지나친 의역과 꺼릭칙 한 대목이 있다. 나아가 윤동주의 시를 일본 교과서에 실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는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다.

 

 

 

写真전후 민주주의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

1945년 일본이 패전했을 때 그녀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고, 이듬해 그녀는 지금의 토호[東邦]대학인 제국여자약전(帝国女子薬専)의 약학부를 졸업한다. 말이 공부지, 전쟁에 동원되어 해군 약제조공장에서 일하는  이른바 '군국소녀'였다. 이 무렵에 시를 쓰기 시작한 그녀는 동인지 『카이[櫂, 노]』를 창간했는데, 첫시집『대화』(1955)부터 이바라기의 시는 시원시원한 상상력이 넘쳤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1958년에 시집『보이지 않는 배달부』을 내면서 당시 풍경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을까

블라우스의 팔을 걷어올리고 비굴한 도시를 으스대며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 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 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중략)

 

때문에 결심했다 되도록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불란서의 화가 루오 할아버지처럼            

 - 시집「내가 가장 예뻤을 때」에서,『보이지 않는 배달부』(1958)

 

이바라키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시「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그녀가 32살 때 20대 초기를 생각하며 쓴 시로, 일본의 국정교과서에도 실렸다. 온 거리가 대공습으로 와르르 무너진 건물 안에서 천정을 보았을 때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였다는 증언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죽어가는 사람들, 전쟁에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사내들이 등장한다. 이 전쟁을 그녀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단정한다. "비굴한 도시를 으스대며 쏘다녔다"라는 표현처럼  자유롭게 활보한다. 끝연에 나오는 루오(Henri Rousseau, 1844~1910)는 뒤늦게 명성을 얻었던 할아버지 화가였다. 루오처럼 뒤늦게라도 청춘을 즐기고 싶다는 역설적 표현이 이 시를 역경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노래로 빚어낸다.

그녀의 시에는 역사적인 어둠과 비극적 현장이 분명하게 담겨있다. 가령 "조선의 수많은 사람들이 대지진의 도쿄에서 / 왜 죄없이 살해되었는가"(「쟝 폴 사르트르에게」)라며 1923년 9월 1일에 벌어진 조선인 학살을 증언하기도 했다. 그녀는 흑인 차별, 부락민(〓백정) 차별, 여성 차별 문제 등 그늘에서 사는 사람에 대한 시선을 평생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 그 어느 곳에도 패배적인 비장미는 없다. 오히려 낙관적이며 밝기만 하다. 바로 이러한 자세로 인해, 전쟁 후 풍경을 숨막히는 비극적 어둠으로 표현했던 일반 시인들과 달리, 이바라기 노리코는 이 한 편의 시로 전후시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열었던 것이다.

두번째 시집『보이지 않는 배달부』(1958) 이후 세번째 시집 『진혼가』(1965), 『자기 감수성만큼(自分の感受性くらい)』(1977)등 시집이 출판될 때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주었다.

1980년대 50세 때 남편을 잃은 이바라기 노리코는 한글을 공부하며 미지의 경계(境界)를 넘어선다. 아래 시「이웃나라 말의 숲(隣国語の森)」은 1982년에 낸 시집『촌지(寸志)』에 실려 있는데, 그녀가 한글과 윤동주를 얼마나 동경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지도 위 조선을 새까맣게 먹칠 해놓고 가을 바람을 듣는다   

    다쿠보쿠(啄木, 일본의 민요시인)의 메이지 43년의 노래                                    

    일본말이 한때 걷어차 버리려 했던 이웃나라 말               
        한글                                                                      

    지워 버리려 해도 결코 지워 버릴 수 없었던 한글              

    용서하세요 「유루시테 쿠다사이」                           
        땀을 줄줄 흘리며 이번엔 이쪽이 배울 차례입니다     
  

     그 어떤 나라의 언어도 끝내 깔아눕히지 못했던

     굳건한 알타이어, 이 하나의 정수(精髓)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그 아름다운 언어의 숲으로 들어갑니다

 

     왜놈의 후예인 저는

     긴장하지 않으면

     금세 한 맺힌 말에

     붙잡혀 먹힐 것 같고

     그러한 호랑이가 정말 숨어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옛날 옛날 그 옛날을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대' 라고

     말해온 우스꽝스러움도 역시 한글이기에

 

     어딘가 멀리서

     웃으며 떠드는 목소리

     노래

     시치미 떼고

     엉뚱하기도 한

     속담의 보물 창고이며

     해학의 숲이기도 하는

     대사전을 베개로 선잠을 자면

     "자네 늦게 들어왔네"라고

     윤동주가 조용히 꾸짖는다

     정말 늦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너무 늦었다고 생각지 않으려 합니다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그것이 당신들에겐 광복절

     우리들에겐 항복절(降伏節)

     8월 15일을 거슬러 올라 불과 반 년 전이었을 줄이야

     아직 학생복을 입은 채로

     순결만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렇게 노래하고

     당시 용감하게 한글로 시를 썼던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고 그리고 애잔합니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달빛처럼 맑은 시 몇 편을

     서투른 발음으로 읽어 보지만

     당신은 씽긋도 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도 없는 것

     앞으로

     어디까지 더 갈 수 있을는지요

     갈 데까지

     가서 쓰러져 눕고 말고 싸리 들녘에

                               - 「이웃나라 말의 숲(隣国語の森)」, 시집『촌지(寸志)』(1982)

 

 '한글의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어두운 오솔길부터 시는 시작된다. 구체적으로 한글와 일본어를 하나 하나 대비시키는 부분은 무척 재미있다. 일본어와 한국어를 모두 아는 독자에게는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시의 중반에 이르러 일본 군국주의가 한글을 없애려는 대목부터 시는 진지해진다. 그리고 숲 속에서 윤동주가 등장하여, 시인과 대화를 나눈다. 윤동주는 시인에게 "늦었네"라고 말을 건다. 이 말은 시인 자신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책(自責)일 것이다. 이 시는 이바라키 노리코가 윤동주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 원점을 보여주는 시다. 

이어 그녀는 『한글에의 여행(ハングルへの旅)』(1986)이라는 에세이집을 내기도 했다. 이 에세이집에 실린 「윤동주」라는 수필을 치쿠마쇼보 출판사의 편집국장이 우연히 읽었고, 1990년 고교 현대문 교과서에 11페이지에 걸쳐 실리게 된다. 이바라기는 이 글에서 윤동주는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통한(痛恨)의 감정을 갖지 않고는 이 시인을 만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썼다.

 

'청춘시인' 윤동주―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 있는 시인. 수난의 상징, 순결의 상징‘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장본인. 일본유학 중, 독립운동의 혐의로 체포되어,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옥사(獄死)한 사람. 옥사의 진상도 의문이 많다. 일본의 젊은 간수는 윤동주가 사망 당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윤동주가 대학생이었을 때 자신은 여고생이었다며, 만났다면 ‘동주오빠’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고 농담하곤 했다던 이바라기 노리코.  그러면서도.  윤동주의 시가 다치하라[入原道造]을 받은 흔적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바라기가 윤동주를 알리면서 1995년 일본 공영방송 NHK TV에서 '윤동주 특집'이 방영하기도 했다.

1990년 63세 때 번역시집『한국현대시선(韓國現代詩選)』(花神社)을 펴낸다. 12명의 한국 시인의 시를 실은 이  번역시집으로 그녀는 1991년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한다.

 

이미韓国現代詩選  /茨木のり子/訳編 [本]

만들어진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미

만들어진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미

만들어진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제는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아

마음속으로 배운 건 이 정도

내 눈 귀

내 두 다리만으로 서서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기대고자 한다면

기댈 건

의자 등받이뿐

 

만년에 낸 시집은 오히려 20대의 싱싱한 상상력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녀는 모든 권위적인 파시즘을 거부했다. 권위주의가 만들어낸 일체의  사상, 종교, 학문을 그녀는 거부한다.  오히려 "기댈 건 / 의자 등받이뿐"이라는 표현으로 일본의 우익을 경멸했다.  만년의 그는 일본사회에 전후 민주주의 이념이 사라져 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 시집『기대지 말고(倚りかからず)』(1999)는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분노의 시집이었는데, 기록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던 2006년 2월 이바라기를 아는 사람들은 난데없는 부음 편지를 받는다.

 

"이번에 저는 2006년 2월 17일, 뇌막졸중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써 둔 것입니다. 내 의지로 장례ㆍ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집도 당분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니 조위금이나 조화 등 아무 것도 보내지 말아주세요. '그 사람도 떠났구나'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 기억해 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서경식 칼럼「심야통신」(『한겨레신문』2006.3.31)에 실린 「죽은 자가 보내온 부음」에 실린 인용문은 이바라기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써놓은 편지였다. 2006년 2월9일, 도쿄의 자택에서 79세의 나이로 그녀는 조용히 먼 여행을 떠난다.

 

정신적 윤회 : 윤동주, 이바라기 노리코, 서준식

서경식 칼럼에 따르면, 그의 형 서준식이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서준식이 17년간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250통 이상의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차례에 걸쳐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중 시「6월」도 인용되어 있다. 

 

어딘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하루 일이 끝나면 한 잔의 흑맥주

괭이를 세워놓고 바구니를 두고

남자나 여자나 커다란 조끼를 기울이는

 

어딘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을까

먹을 수 있는 열매 달린 가로수가

끝없이 뻗어 있고, 제비꽃 빛깔의 황혼은

젊은이의 정찬 술렁거림으로 넘치고 넘치는

 

어딘가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의 힘은 없을까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친근함과 재미와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이 시는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읽는 시다. 각연의 첫행에 모두 "어딘가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을 읽으면 마음이 이내 환해진다. 1, 2연은 단순히 아름다운 인간 공동체의 정경이 재현되어 있다. 그런데 3연에 이르면 개인적이 아름다움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이들의 삶과 공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3연 첫행 하나로 이 시는 상상력이 비약(飛躍)한다.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의 힘은 없을까"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어서 시인은 아름다운 마을과 아름다운 거리를 읊었을 것이다. 감옥에서 이 시를 읽었던 서준식은 1982년 7월31일 소인이 찍힌 편지에서는 「6월」을 스스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이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유토피아’다. 내 마음 속에는 이런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옥중서간집』야간비행)고 썼다. 1982년에 아무 꿈도 꾸지 못할 깜깜한 시대에 서준식은 이 시 한 편으로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것이다.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은 평생 생활의 질감(質感)을 느낄 수 있는 시를 투명하게 빚어냈다.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희생자, 차별대우 혹은 여성차별 문제를 시로 써온 그녀는 인간을 억압하는 온갖 모순에 이성적으로 응전했다. 

윤동주와 함께 순수의 꿈을 꾸었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학술적으로 꼼꼼히 비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바라기 노리코 시를 읽으면서 윤동주를 느낀다. 윤동주 시의 핵심에는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있다. 윤동주 시의 원점에는 그가 쓴 많은 동시(童詩)가 있다. 윤동주가 갖고 있던 어린 아이의 맑고 투명한 심성이 이바라키 노리코의 시에도 보인다. 윤동주가 살아 있다면 이바라기 노리코처럼 쓰지 않았을까? 이바라기 노리코가 윤동주에게 받은 영향은 무엇일까?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정신에서 나는 윤동주 시정신의 환생(幻生)을 본다. 전혀 학술적이지 않은 짐작이지만 나는 이바라기 노리코 시를 읽으면서 꺼꾸로 윤동주를 만나는 것이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나는 "저도 이바라키 노리코처럼 한글을 배워서 윤동주의 마음을 배우고 싶어요"라는 말을 어떤 일본인에게 들었을 때 이바라키 노리코의 보이지 않는 힘을 느꼈다.    

그녀의 시는 감옥 안에 있던 서준식의 마음밭에 희망의 유토피아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서준식은 석방되자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사랑방을 만든다. 이렇게 윤동주에서 오오무라 마스오, 그리고 이바라키 노리코에서 다시 서준식, 그의 동생 서경식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계보는 참으로 아름다운 정신적 윤회(輪廻)라 아니할 수 없다. 윤동주의 시정신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이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 아름다운 그대들, 그대들에게 힘은 있는가.

 

(김응교 2009.1.19)

 

 

이바라키 노리코 대표작 (번역 김응교)

 

 

 6월

 

어딘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하루 일이 끝나면 한 잔의 흑맥주

괭이를 세워놓고 바구니를 두고

남자나 여자나 커다란 조끼를 기울이는

 

어딘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을까

먹을 수 있는 열매 달린 가로수가

끝없이 뻗어 있고, 제비꽃 빛깔의 석양은

젊은이의 정찬 술렁거림으로 넘치고 넘치는

                                                                                                                   

어딘가 아름다운 사람들,그들의 힘은 없을까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친근함과 재미와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 시집『보이지 않는 배달부』(1958)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지고

생각도 않던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부릴 계기를 잃고 말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아름다운 눈짓만을 남기고 모두 떠나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굳어 있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올리고 비굴한 도시를 으스대며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 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 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아주 얼빠졌었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때문에 결심했다 되도록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불란서의 화가 루오 할아버지처럼          

 

                  - 시집『보이지 않는 배달부』(1958)

 

 

 

 

   자신의 感受性 정도는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가 물 주는 것을 게을리 하고서는

 

까다로워져 가는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은 어느 쪽인가

 

초조해지는 것을

친척 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얼 하든 서툴기만 했던 것은 나 자신

 

초심(初心)이 사라져 가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시당초 유약한 결심일 뿐이었다

 

쓸데없는 모든 것을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가까스로 빛내는 존엄(尊嚴)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어리석은 자여          

 

 

 

                  - 시집『자기 감수성만큼(自分の感受性くらい)』(1977)

 

  

    이웃나라 말의 숲                        

 

숲속 깊이                                                              

가면 갈수록                                                            
   나뭇가지 엇갈리며 더욱 깊숙해져                                

외국어의 숲은 울창해 있다                                        

한낮 어두운 오솔길 홀로 터벅터벅                                

구리(栗)」는 밤                                                   

「카제(風)」는 밤                                                   

「오바케」는 도깨비                                                 
   「헤비(蛇)」 뱀                                                      

「히미츠(秘密)」 비밀                                              
   「다케(茸)」 버섯                                                    
    무서워 「코와이」                                                    

입구 근처에는                                                           

들떠 있었다                                                            

모든 것이 죄다 신기하고                              
  명석한 음표문자와 청렬한 울림에                       

 

「히 노 히까리」 햇빛                                

「우사기」 토끼                                     
   「데타라메」 엉터리                                  

「아이(愛)」 사랑                                        

「키라이(きらい)」 싫어요                                     

「다비비토(旅人)」 나그네                                    

지도 위 조선을 새까맣게 먹칠 해놓고 가을 바람을 듣는다   

타그보그(啄木, 일본의 민요시인)의 메이지 43년의 노래                                    

일본말이 한때 걷어차 버리려 했던 이웃나라 말               
   한글                                                                      

지워 버리려 해도 결코 지워 버릴 수 없었던 한글              

용서하세요  "유루시테 쿠다사이"                           
   땀을 줄줄 흘리며 이번엔 이쪽이 배울 차례입니다     
  

그 어떤 나라의 언어도 끝내 깔아눕히지 못했던

굳건한 알타이어, 이 하나의 정수(精髓)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그 아름다운 언어의 숲으로 들어갑니다 

왜놈의 후예인 저는

긴장하지 않으면

금세 한 맺힌 말에

붙잡혀 먹힐 것 같고

그러한 호랑이가 정말 숨어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옛날 옛날 그 옛날을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대' 라고

말해온 우스꽝스러움도 역시 한글이기에

 

어딘가 멀리서

웃으며 떠드는 목소리

노래

시치미 떼고

엉뚱하기도 한

속담의 보물 창고이며

해학의 숲이기도 하는

대사전을 베개로 선잠을 자면

"자네 늦게 들어왔네"라고

윤동주가 조용히 꾸짖는다

정말 늦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너무 늦었다고 생각지 않으려 합니다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그것이 당신들에겐 광복절

우리들에겐 항복절(降伏節)

8월 15일을 거슬러 올라 불과 반 년 전이었을 줄이야

아직 학생복을 입은 채로

순결만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렇게 노래하고

당시 용감하게 한글로 시를 썼던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고 그리고 애잔합니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달빛처럼 맑은 시 몇 편을

서투른 발음으로 읽어 보지만

당신은 씽긋도 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도 없는 것

앞으로

어디까지 더 갈 수 있을는지요

갈데까지

가서 쓰러져 눕고 말고 싸리 들녘에

            - 「이웃나라 말의 숲(隣国語の森)」전문, 시집『촌지(寸志)』(1982)

 

 

 

     기대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미

만들어진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미

만들어진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이제는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아

마음속으로 배운 건 이 정도

내 눈 귀

내 두 다리만으로 서서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기대고자 한다면

기댈 건

의자 등받이뿐

        -『기대지 말고(倚りかからず)』(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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