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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한 신문사 부장이 윤동주의 "빼앗긴 시혼(詩魂)"다루다...
2017년 03월 12일 01시 15분  조회:2824  추천:0  작성자: 죽림
 
▲ 안영진 前 중도일보 주필
 
▲ 안영진 前 중도일보 주필
 
광복 66주년을 보내면서 애국인사들의 면면이 뇌리를 스쳐갔다. 김구, 안창호, 신채호, 여운형, 윤봉길 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이 많은 얼굴들. 그 중 시인 윤동주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후테이센징(不逞鮮人)'으로 몰려 후쿠오카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끝내 옥사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시는 몇몇 일인 양심인사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양명가도를 달렸다. 

물론 패전 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니까 윤동주는 일제에 의해 죽었으나 일인들 손에 양명을 하는 묘한 운명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1917년 12월 30일 당시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서울 연희전문 문과(2년)를 졸업하고 일본유학길을 떠났다. 그러나 교토의 동지사대학 재학 시 불순분자라 해서 경찰에 의해 투옥된 후 옥사를 하고 말았다. 채 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처럼 20대에 요절한 그에게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남겼다. 처음에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으나 세월이 가면서 국내에서 인기가 치솟았다. 

필자는 그간 윤동주를 인양한 일본의 양심파 지성들을 추적한 바 있다. 이부키고오(伊吹鄕)는 윤동주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화제를 모은 지성이다. 번역솜씨가 원작 못지 않게 유려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기도 하다. 오무라 마쓰오(大村童夫) 와세다 대학교수인 그는 1985년 5월 14일 중국 용정중학교를 찾아가 윤동주 시집을 전하는 한편 그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바람에 윤동주 명성은 용정 뿐 아니라 한국으로 파급된 것이다. 

 
여류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는 윤동주의 시세계를 섬세한 안목으로 재평가한 인물이다. 그녀는 대화,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 자신의 감수성 정도, 촌지=寸志, 시심을 읽는다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 도쿄 출생인 그녀에게 우리가 향의를 갖는 것은 공주, 부여를 주제로 한 한글나들이라는 저서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윤동주의 시세계를 대담하게 해부하고 있다. 1980년대 초 필자가 그녀를 찾아가보니 도쿄한복판 '이나리신사' 옆에 예쁜 2층 양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집 한글나들이(はんぐるへの旅)를 번역해서 팔아먹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청을 선선이 받아들이며 메모지에 “'한글나들이' 번역을 수락합니다”라고 적은 후 수정도장을 찍어주던 여류시인…. 출판기념회 때는 꼭 참석해달라는 청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풍만한 체구에 귀족 티가 흐르는 그런 시인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면 이바라기의 윤동주 평은 어떤 것인가. '돌아와 보는 밤'= 평소 '다치와라(立原道造)'를 좋아했던 윤동주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서로 다르다는 지적이다. 정감은 서로 피아노의 선율처럼 흐르고 있지만 그 깊이는 윤동주 쪽이 한수 위라고 했다. 

'다치와라'의 시가 음악처럼 부드럽긴 하나 핵이라 할 중심부가 허약하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비해 윤동주는 밑바닥에 힘이 깔려 있을 뿐 아니라 섬세하다. 그리고 윤동주는 '쉽게 쓴 시'에서 부모님의 땀내 나는 학비봉투에 비해 쉽게 글을 쓴다는 건 사치라며 자책을 한다. 

'또 다른 고향'은 윤동주가 24세 때 쓴 시로 3년 후에 다가올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예언하고 있다. 필자 역시 윤동주 발자취를 캐러 도시샤대학을 찾아간 일이 있다. 정문(수위실)에선 윤동주의 시와 선전물을 방문객에게 건네준다. 정지용 시인도 이 대학 출신이지만 인기는 단연 윤동주 쪽이었다. 이밖에도 윤동주 연구에 힘쓴 언론인이 있다. 

니시닛퐁(西日本)신문 이데(井手俊作)부장이 그 장본인이다. 그는 종전(태평양전쟁) 50주년 특집물로 윤동주의 '빼앗긴 시혼(詩魂)'을 다뤘다. 그는 윤동주가 형무소 수감 당시 약물 주사를 맞고 미친 듯이 소리치며 몸을 꼬았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당시 규슈(九州)대학에선 전쟁으로 부족한 혈장 대용인 식염수 사용을 위해 생체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윤동주의 죽음과 무관치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데 부장이 그 연재물을 필자에게 보내주어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한다. 늦었지만 이를 한국 측 지면에 소화할 생각이다. 이데 부장은 후쿠오카 형무소와 동지사대학, 시다카모(下鴨) 경찰서, 국회도서관을 꽤나 찾아다녔다고 했다. 어떻든 윤동주는 요절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격조 높은 것이라는 데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논쟁거리가 있다면 그의 시가 '저항시'냐 아니면 '서정시'냐 하는 점이다. 이 또한 한국문단이 챙겨야 할 숙제라 할 수 있다. 요즘 독도문제로 한·일간의 국민감정은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윤동주를 발굴한 일본의 양심파 지성들은 요즘 어떤 표정일까를 생각해본다.


▲ 필자가 소장한 윤동주에 관한 일본 연재물로 이는 종전 50주년 특집으로 이데부장이 속한 서일본(西日本) 신문에선 ‘빼앗긴 詩魂’, ‘尹東柱의 獄死’라는 표제를 달았다. 가운데 책은 윤동주에 대해 시평을 한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기행문이다.
 
▲ 필자가 소장한 윤동주에 관한 일본 연재물로 이는 종전 50주년 특집으로 이데부장이 속한 서일본(西日本) 신문에선 ‘빼앗긴 詩魂’, ‘尹東柱의 獄死’라는 표제를 달았다. 가운데 책은 윤동주에 대해 시평을 한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 기행문이다.
 
“이념 날과 서정 올로 짜여진 詩” 
옥사 후 日人에 의해 ‘햇빛’ 
국내선 70년대 비로소 본격 연구 

日신문 종전 50주년 특집 기획 
“생체실험 진행 당시 죽어”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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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아픔 공감대 형성 앞장 



日人에 빼앗긴 시 



애국시인 윤동주가 세상을 뜬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다. 그는 1917년 북간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연희전문 문과를 거쳐 경도(京都)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재학 중 감옥에 끌려간다. 죄명은 독립운동 혐의였다. 저 악명높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옥사를 했다. 

중학교 재학 당시 동시(童詩)를 쓰다가 시로 전환한 것은 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당시에는 이렇다할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윤동주 시가 햇빛을 보게 된 것은 국내에서가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서였다. 그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밖에 없다. 

일인 손에 죽은 윤동주가 사후 몇몇 일인(양심파 지성)에 의해 제 모습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윤동주는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먼저 유명해지면서 그 진가가 한국으로 상륙했다. 

국내에서 윤동주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이후였다. 우리 문단의 거성 김현과 김윤식에 의해 윤동주는 제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 특히 젊은층에서 우상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저항시냐 아니면 서정시냐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끊이지 않는다. 한 쪽에서는 저항시라고 보기에는 첨예성이 결여된 매우 소극적인 숨결이라 지적하기도 하고 반면 반대편에선 매우 세련된 격조 높은 저항시라고 옹호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분석해 볼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길….’ 

이 땅의 사회지도층에선 요즘도 서시구절을 곧잘 인용한다. 이렇듯 윤동주는 젊은층과 애국시민들에겐 우상으로 태양등처럼 빛을 발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일본에서 본 윤동주 

‘이바라기 노리코’의 윤동주 시평을 살펴본다. 

돌아와 보는 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다치와라’와 윤동주 시인의 능금의 이미지가 공통일 뿐만 아니라 언뜻 보기에 약한 것 같이 보이면서 피아노의 선(線)처럼 쭉 뻗은 투명한 서정의 질에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윤동주 쪽이 다치와라 쪽보다 율적 서정이 깊지만 다치와라의 시를 어떤 식으로 읽었는가를 알고 싶어 새삼스럽게 두 사람의 시를 그러한 각도에서 꼼꼼히 읽어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르다. 다치와라 시는 음악과 같고 의미에 중점이 놓여져 있지 않으나 윤동주의 시는 핵이라고 할만한 힘이 있어 끊임없이 거기에 집약되어 숨겨진 의미 또한 무겁고 깊다. 윤동주는 ‘다치와라’ 사후에 그의 시를 즐겨 읽은 셈이지만 퍽 겸허하게 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시에 한 하늘 아래 같이 살아온 지성(시인)끼리 통하는 그 어떤 선율 같은 것이 엿보인다. 


쉽게 쓴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이 포근히 풍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씩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心澱하는 것일까.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진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후의 악수 


흔해 빠진 향수(鄕愁) 타령 같지만 찡하니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다. 부모님 땀내가 벤 학비봉투 앞에서 쉽사리 시가 써진다는데 죄책감을 갖는 시인. 

비 내리는 밤에 잠은 오질 않고 시가 쉽게 써지니 이는 지독한 사치가 아니냐며 자책을 한다. 윤동주는 유학생 시절 다치와라 도조(立原道造)의 시에 탐닉해 있었다. 연보(年譜)에서 그것을 알았을 때 필자는 흠칫했다. 윤동주의 시를 읽다 보면 그 서정(抒情)의 질이 다치와라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잠의 유혹 등불처럼 바람처럼 별처럼 
내 목소리는 한 마디에 저기로 여기로…. 

그러면 너희들은 능금의 하얀 꽃이 피어 작은 초록의 열매를 맺어 그것이 빠른 속도로 빨갛게 익는 것을 짧은 동안에 자면서 보거나 할 것이다. 다치와라의 사진은 대개 어렴풋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윤동주의 사진은 언제나 입을 꽉 다물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예쁜 얼굴이다. 다치와라와 윤동주는 아직도 각각 자국의 젊은 여학생에게 사랑을 받으며 계속 읽혀지고 있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순수성은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또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서 한 방에 누웠다. 
어둔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면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24세 때 쓴 작품으로 3년 후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시(詩)이다. 크리스천이기도 했던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동요를 쓰고 있던 무렵 윤동주는 동주(同舟)라는 사랑스런 필명을 갖고 있었다. 나의 뇌리엔 ‘인간의 질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봤다. 

그러나 3년 가까운 일본 유학시절의 윤동주의 발자취는 이부키시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일이다.<茨木 노리꼬> 

일본에서 윤동주의 인기는 아직도 대단하다. 무명이던 그를 일약 대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오무라’, ‘이부키’, ‘이바라기’, ‘이데’씨의 인기도 상승가도를 달려왔다. 그 뿐만 아니라 동지사대학은 경도대학과 담하나 사이로 이웃하고 있는 사학명문이다. 정지용도 이 대학출신인데 일본에선 윤동주의 인기를 따르지 못한다. 이렇듯 그는 오늘에 부활하고 있다. <前 중도일보 주필> 








윤동주를 빛낸 일본인 

伊吹鄕(이부키 고오) 일어로 詩 옮겨 일본에 소개 

윤동주의 시를 일어로 옮겨 일본 지식인들에게 소개한 인물로 원작을 능가할 정도의 유려(流麗)한 번역솜씨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윤동주는 오늘에 더욱 빛나는지도 모른다. 



大村童夫(오무라 마쓰오. 와세다대 교수) 中 연변에 연구붐 일으켜 

어학교수인 그는 1985년 5월 14일 연변 용정중학교를 찾아 윤동주 시집 한 권을 전했고 이어 부근에 있는 그의 묘를 찾았다. 이때까지 윤동주를 몰랐던 연변에서도 갑자기 연구 붐이 일었다. 일본 땅에 윤동주를 알리고 이를 연변으로 연결지은 오무라 교수는 일본 지성의 면모를 여지없이 우리에게 보여준 셈이다. 





茨木(이바라기 노리코) 詩세계 재평가한 여류시인 

일본의 여류시인으로 ‘對話’, ‘茨木 노리코 시집’, ‘자신의 感受性 정도’, ‘寸志, 詩心을 읽는다’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 그녀는 1926년 도쿄 태생으로 우리에게 더욱 호감을 주는 건 ‘한글 紀行’이다. 이 책에선 윤동주의 시 세계와 연금술(테크닉)까지를 재단(평)하고 있다. 

또 윤 동주가 다치하라(立原道造)의 영향을 받은 경위와 시 ‘잠의 유혹’을 재단(평가)하는 날카로움까지 보였다. 

필자가 도쿄에서 그녀를 만난 것은 그의 저서 ‘한글기행’ 번역권을 얻어내려는 데 있었다. 하지만 허락을 얻고서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직껏 빛을 못 봐 미안한 감을 금할 길이 없다. 

윤동주의 시에 대해 그녀는 이념의 ‘날’과 서정의 ‘올’로 잘 짜여진 직물(비단)과 같다고 말했다. 윤동주 그는 대학생이고 그녀는 당시 여고생이었으며 일본 하늘아래 한 시대를 같이 산 셈이다. 만약 그 때 얼굴을 알았다면 ‘동주오빠’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고 농담까지 섞었다. 





井手俊作(이데 준사쿠·서일본신문 부장) 종전 50주년 특집으로 다뤄 

일본의 문예지에 윤동주 이름이 오르내린 것은 ‘오무라’, ‘이바라키’씨 때문이지만 신문에서 특집을 기획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그것을 ‘이데’ 부장이 해냈다. 종전 50주년 특집으로 그가 속한 西日本 신문에선 ‘빼앗긴 詩魂’, ‘尹東柱의 獄死’라는 기막힌 표제까지 달았다. 

이데 부장은 후쿠오카 형무소와 동지사대학 시다카모(下鴨) 경찰서, 국회도서관 등을 누비고 다녔다. 그는 윤동주가 형무소 수감 당시 약명 미상의 주사를 맞고 미친 사람처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는 점도 캐냈다. 이는 당시 규슈(九州) 제국대학 생체 해부사건과 관련이 있다. 전쟁 시 부족한 혈장 대용으로 식염수를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생체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윤동주의 죽음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윤동주 연구에서 한국내의 유족과 친인척 향맥, 학맥을 수소문 사실 그대로 다뤘다. 이데 부장은 자신이 쓴 종전 50년 특집물 15회분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암울했던 과거사, 그 아픔을 같이 나누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이데 부장의 기사는 구구절절 문장이 간결하고 사건추적에 더 없이 치밀함을 보였다. 그래서 규슈 지방에선 민완기자로 통한다.
▲ 윤동주 시인
 
▲ 윤동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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