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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과 윤동주
2019년 01월 24일 00시 49분  조회:3488  추천:0  작성자: 죽림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해방 후 윤동주 유고 시집의 서문을 쓴 사람은 바로 정지용 시인이다. 청년 윤동주는 그를 동경했고, 죽어서는 그의 찬사를 받았다.

강연 주제는 ‘윤동주와 정지용’이다. 

강연자는 이숭원 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 교수는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정지용 시인을 다룬 논문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습작기 작품을 보면 정지용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며 “실제 윤동주 시인의 창작 노트를 통해서도 정 시인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쉽게 씌여진 시’는 정지용 시인이 경향일보 주필로 재직할 때 세상에 공개된 작품”이라고 말했다.

잘 나가던 유명 시인과 학생 윤동주

시인 정지용의 모습. 윤동주 시인은 발간 이듬해인 1936년 3월 시집을 소장했다. 유품으로 남은 시집에는 정독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 등이 그대로 기록돼있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1917년 출생한 윤동주 시인과는 15년 차이다.

둘은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유학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정 시인은 22살이었던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수학했다. 윤 시인은 도쿄의 릿쿄대에 입학해 한 학기가 지난 1942년 10월 도시샤대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했다. 지금도 도시샤대학교에는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다.

1935년 시문학사에서 출간된 정지용 시집은 한국 문단계의 큰 주목을 큰 받았다. 하지만 곧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뛰어들면서 전시체제에 접어들었고, 조선 신문·잡지도 차례대로 폐간됐다.

정 시인은 1941년 두 번째 시집 <백록담>을 출간했지만 좌익 문학인으로 찍혀 경향신문 주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경기도 녹번리에서 은거하던 정 시인은 한국전쟁 이후 1950년 9월 행방불명됐다. 한동안 월북 문인으로 규정돼 작품조차 공개되지 못했다.

이 교수는 “당대 한국 최고의 시인이 사망 원인과 시점도 모른 채 사라지게 된 것은 민족사의 비극”이라고 평했다.

유품으로 남은 윤동주 시인의 장서에도 정지용 시집이 포함돼있다. 책에는 1936년 3월 19일 ‘동주소장’이라는 글귀가 친필로 쓰여있다. 윤 시인이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이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은 시집 발간 이듬해가 돼서야 정 시인의 책을 샀다”며 “경제 사정도 넉넉지 못했을 것이고, 당시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한 학생들이 동맹휴업과 동맹자퇴를 하던 시기였다. 3월 말 자퇴 직전 시집을 구입해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품이었던 정지용 시집을 보관한 이는 바로 윤동주 시인의 벗 강처중이다. 시집에는 밑줄, 단어 해석 등 윤 시인의 메모가 그대로 기록돼있는데, 그가 얼마나 시집을 정독했는지 알 수 있다.

당대 최고 시인과 윤동주의 만남

 
윤동주 시인의 유품 목록 중 하나인 정지용 시인의 시집. 종이에 친필로 날짜와 동주소장이라는 글귀가 써있다.

윤동주의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인 라사행 목사의 증언을 통해 생전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만남이 알려졌다. 1939년 윤동주는 북아현동에서 하숙을 했는데, 라사행 목사는 그와 함께 정지용 시인의 자택을 방문했다고 증언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다만 영화에서는 만남의 시점과 동행인 등 약간의 픽션이 가미돼있다.

이 교수는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 소설가가 라사행 목사의 증언을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정지용 자택을 생전 윤동주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며 “당시 정 시인의 집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통했다”고 했다.

해방 후 정지용 시인은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을 썼다. 1947년 12월 28일자 글이다. 당시 정 시인은 경향신문 주필, 윤 시인의 친구 강처중은 기자로 재직했다. 서문에는 윤 시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를 향한 찬사가 함께 드러나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일제 강점기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정지용 시인이 쓴 서문)

습작기 작품에서 보이는 정지용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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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은 1941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3권을 제작했다. 한 권은 자기가 소장하고, 한 권은 연희전문 스승 이양하 선생, 마지막 한 권은 후배 정병욱에게 선물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윤동주 시인의 시는 습작기인 1938년까지, 본격적인 자각을 갖고 쓴 1939년부터의 시로 나뉜다. 습작기 작품에는 정지용 시인의 영향, 본격적인 창작기 작품들은 독자적 사유에 바탕을 둔 성숙한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습작 시절 정지용 시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긴 하지만 두 시인의 시상이나 주제는 확연하게 다르다”며 “정 시인이 감각적인 언어 표현에 중점을 뒀다면 윤 시인은 내적 고뇌를 표현한 작품이 다수”라고 설명했다.

습작기 정 시인의 영향이 나타난 작품은 ‘모란봉에서’, ‘산림’, ‘압천’, ‘비로봉’, ‘사랑의 전당’ 등이다. 주로 시어나 표현적인 면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윤 시인은 1년이 넘는 절필기를 두 어 번 거친 뒤 1939년부터 자기만의 글쓰기에 집중했다. 첫 시집에 냈던 19편의 시가 그 때 나온 작품들이다.

이 교수는 “윤동주 시인은 노트에 습작하면서 정지용 시인의 영향을 받은 것을 그대로 기록했다”며 “당시 젊은 시인들이 정 시인을 답습하는 경향을 많이 보였는데, 윤 시인은 그만큼 순정하고 정직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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