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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를 지켜준것은 "우정"이였다...
2019년 01월 24일 01시 42분  조회:3072  추천:1  작성자: 죽림
2018.10.09 
 
 


함양에서 말벌술을 함께 마신 정 교수님은 국문학자 정학성 교수다. 정 교수의 부친이 정병욱 교수라는 것을 그 밤에 알았다. 내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2학년이 되어 국문학과 배정을 받아 과 사무실을 드나들었을 때 바로 앞방이 정병욱 교수 연구실이었다. 봄학기 내내 연구실 문이 닫혀있더니, 그해 가을에 정병욱 교수가 암으로 타계했다.

나는 <국문학산고>, <한국고전시가론> 교재를 통해서만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30년도 더 지나 말벌술을 마신 그 밤에, 정병욱 교수의 호 백영(白影)이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에서 딴 것이고, 그가 양조장집 아들이었고, 그 양조장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손 글씨 원고가 보관되어 오늘의 윤동주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명의 윤동주를 시인으로 일으켜 세운 친구들
 

▲ 함께 하숙하며 연희전문을 다닌 윤동주와 정병욱 ⓒ

윤동주 시집을 다시 읽어보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는 시 속에서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다. 그는 술로 생을 위로받지 않았고, 술 마신 사연을 한 줄 시 속에도 남기지 않았다. 감성적인 문학 청년이 일제 탄압이 혹독해지던 시절인데도 술 한 잔 마신 흔적을 남기지 않다니, 그의 시가 맑고 깨끗하고 선명했던 이유를 알 듯도 하다.

윤동주는 살아서 문단에 정식 데뷔하지 못했다. 그의 시가 튼튼해지던 시기는, 당대의 문학청년들이 등단하고 싶어했던 <문장> 지가 1941년 4월호로 폐간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1940년 8월로 폐간된 상태였다. 우리말로 자유롭게 글을 짓고 뜻을 펴지 못하고,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부역을 하듯이 글을 쓰던 상황이었다.

윤동주가 개인시집을 내려고, 훗날 '서시'라는 제목이 붙게 된 서문을 쓰고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붙이고 지인들의 의견을 구했을 때가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1941년 11월이었다. 윤동주는 일제로부터 탄압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출판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아들였고, 자필 시집 3권을 만들어 한 부는 영시를 배운 연희전문 이양하 교수에게, 한 부는 함께 하숙을 했던 정병욱에게 주고, 한 부는 자신이 소장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2월에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945년 2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가족에게 시신이 인도되어 북간도 용정현에 묻혔다. 윤동주는 데뷔도 하지 않았기에 무명의 문학도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를 시인으로 일으켜 세운 친구들이 있었다.

연희전문 문우였던 강처중이 그렇다. 윤동주는 일본에서 5편의 시를 편지지에 써서 건넸는데, 그중의 한 편인 '쉽게 씌여진 시'가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문과 함께 게재되었다. 이는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던 강처중이 노력한 결과였다. 이 시가 해방 뒤에 발표된 윤동주의 첫 작품이고, 윤동주라는 시인의 존재를 알린 작품이다.

윤동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서시',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 '십자가', '자화상'은 1941년 손 글씨로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 속에 담겨 있었다. 그런데 윤동주가 소장한 작품들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이양하 교수에게 건넨 것도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정병욱에게 건네준 것만이 남아 오늘의 윤동주 시인을 이루게 된다.
 

▲ 광양 망덕포구의 양조장에 보관되어 있던 윤동주의 손 글씨 시집 ⓒ 허시명

 
윤동주보다 2년 늦게 연희전문을 졸업한 정병욱은 1944년 학병으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 정병욱은 전라남도 광양에 계신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시를 맡겼다.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던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시면서 기뻐하셨다." 

정병욱의 증언이다. 어머니가 시집을 보관했던 곳은 양조장 마루장 밑의 항아리 속이었다. 정병욱은 1948년 강처중, 그리고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와 함께 정음사에서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시집을 펴냈다. 윤동주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다.

1948년 시집을 내기 위해서 서문을 받으러 윤일주가 정지용 시인을 찾아갔을 때였다. 그때 정지용 시인이 윤일주에게 그의 형에 대해 물었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었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싸스나 거저 줍데다." 


이 문답 끝에 정지용은 윤동주를 이렇게 해석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빼앗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다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일주는 형이 술을 '먹는 것 못보았습니다'고 했지만, 윤동주가 술을 전혀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병욱의 수필 "잊지 못할 윤동주 형"(백영의 수필집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에 수록되어 있으며 원래는 <나라사랑>이라는 잡지 1976년 여름호에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글 제목 끝에 "형"이 라는 칭호가 빠져 있다)에서 윤동주의 일상생활을 회고하는 부분을 보면 "가끔 영화관에 들렀다가 저녁 때가 늦으면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는데, 그때 더러는 배갈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주기가 올라도 그의 언동에는 그리 두드러진 변화는 없었다. 평소보다는 약간 말이 많을 정도였다. 그러나 취중일지라도 화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고 적고 있다. 

윤동주가 술을 입에 대긴 했지만, 술로 마음까지 움직이진 않았던 것 같다. 부끄럼 많은 청년이 괴로움을 달래는 방법은 하늘의 별과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시를 쓰는 것이었다. 절망적인 시대를 견디는 방식이 고요하고 아득했다. 그는 비록 술로 마음을 달래진 않았지만, 그의 영혼이 담긴 시를 지켜준 것은 남도 끝 망덕 포구의 양조장이었다.

광양 망덕 포구의 양조장에 가다
 

▲ 전남 광양 망덕포구의 양조장 건물 ⓒ 허시명

 
나는 보리 이삭이 피는 봄날 도다리쑥국이 맛있을 무렵에, 광양 망덕 포구의 양조장을 찾아갔다. 광양군의 문화해설사가 양조장 가옥을 설명했다. 가게와 살림집과 양조장이 연동되어 있는 건물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윤동주의 시집을 숨겨놓았던 마룻장 위에 시집이 놓여 있었다.

바로 앞 망덕 포구는 섬진강을 거슬러 하동으로 이어지고 바깥으로 남해군으로 연결되는 바닷길이다. 일제강점기 때에서는 인천에서 시모노세키로 연결되던 연락선이 들어오고, 육지와 다도해 섬을 연결시키는 곳이라 물산이 풍부했다.

백영 정병욱은 이곳에서 성장했고, 부산과 서울로 유학하던 시절에 방학이면 이곳을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남해군 사람으로 3.1운동에 연루되어 피신하다가 하동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망덕 포구로 나와 어장과 양조장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아들 정병욱을 따라 1960년대에 서울로 이주하기까지 양조장을 운영했고, 그 뒤로 처조카에게 양조장을 넘겨주었다. 그 처조카 박영주는 1980년대까지 양조장을 운영하다 그만두었는데, 다행히 그 양조장은 허물어지지 않고 그의 아들 박춘식씨에게 이어졌다.

양조장 건물 옆에서 도다리쑥국을 해내는 횟집을 운영하는 박춘식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 청하여 양조장 안채와 안마당을 보게 되었다. 정병욱이 부산대학교 교수 시절에 우장춘 박사에서 씨앗을 받은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사람은 갔지만, 꽃은 다시 찾아왔다.

양조장 발효실은 어느 해 태풍 오던 날, 뒷산 흙더미에 무너지고 말아 빈 터가 되었다. 그래도 본채에 딸린 양조 공간은 남아있어 그곳에 누룩방이 있었다. 창고로 쓰이는 창문없는 누룩방이 쓸쓸해 보였다.

안마당에 양조장 우물이 남아있는데, 덮개를 열고 보니 우물물이 거울처럼 빛나고 있었다. 술을 담았던 질항아리가 장독대에 하나 간신히 남아 있었다. 종이덮개를 하고 있는 질항아리는 자존심을 잃고 매실청을 담고 있었다.

이제 술 향기는 나지 않지만, 양조장 건물은 2007년에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되었다. 양조장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으로 명명되었고,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과 인연을 소개한 글이 벽보로 붙어있고, 간간이 사람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은 멀리 북간도에서 유학온 윤동주의 영혼이 한반도를 가로질러 광양 망덕 포구의 양조장 마루 밑에 깃들면서 새롭게 재구성된 공간이 된 셈이다. 섬진강이 남해 바다로 접어드는 망덕 포구를 걸으면, 지금도 윤동주와 정병욱이 포구에 앉아 도란도란 시를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이곳은 한국문학사가 기억하는 최고의 우정이 깃든 곳이라고 평할 만하다. 이 땅에서 이만큼 아름다운 사연을 지닌 양조장도 아마 없을 것이다.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1941년에, 윤동주는 '별 헤는 밤' 원고를 정병욱에게 보여주었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은 "따는 밤을 세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로 끝나 있었다. 정병욱은 윤동주에게 넌지시 "어쩐지 끝이 좀 허전한 느낌이 드네요"라고 말했다. 윤동주가 무척 싫어하는 것은 그의 시를 고쳐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의 힘 때문이었을까? 윤동주는 필사본 시집-양조장에 숨어있다가 세상 빛을 본 그 시집-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서 "지난번 정형이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라면서 마지막 넉 줄을 정병욱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한 '별 헤는 밤'의 아픈 마지막 시 구절이 완성되었다. 시는 윤동주가 썼지만, 그 시를 지킨 것은 우정이었고, 그 시를 품어준 것은 땅끝 모퉁이 망덕 포구의 양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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