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2월 2025 >>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詩人 대학교

현대시의 흐름을 알고 시작(詩作)을 시작(始作)하자...
2017년 03월 29일 20시 11분  조회:2375  추천:0  작성자: 죽림


1. 신시의 태동과 새로운 양식의 모색(1900∼1910년대)

  개화 초기의 시는 전통과 창조의 원리를 동시에 수용하면서 나타났다.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기 위해 문학은 구태(舊態)를 벗고, 새로운 주제들을 담아낼 새로운 시의 형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전통적 요소들과 참신한 근대적 요소들이 혼재된 과도기적 형태의 문학이 등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창가와 신체시이다.
  
  창가는 가사의 율격인 3 4조, 4 4조로부터 출발하여 6 5조, 7 5조, 8 5조 등으로 다양화하였으나, 정형적인 율조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하였다. 초기 형태의 창가는 이중원의 <동심가>처럼 개화 사상을 고취한 것, 대한 매일신보에 실린 '사회등 가사'처럼 사회 고발적 의지를 담은 것 등으로 구별된다. 보다 다양한 형태를 지닌 후기의 창가들은 신문명에 대한 예찬을 담고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노래로 불리어진다는 창가의 특성이 국민 개화에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남선의 <한양가>, <경부철도가>는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우국 저항의 의지를 전대(前代)의 가사 형식으로 표현한 개화 가사도 있었다. 제목은 대부분 '애국가'나 '독립가'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자주 독립을 향한 애국심 고취를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

  한편, 최남선은 [소년]지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형식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비록 분절법과 후렴구의 사용으로 창가의 잔영(殘影)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정형적 율격을 깨뜨린 실험적 형태의 근대시였다. 최남선은 이 작품에서 바다의 힘과 건강성을 노래하면서 이 나라의 소년들이 그러한 품성을 가져주기를 희망하였다. 그의 시적 주제는 이처럼 바다에서 출발하여 후기에는 산으로 전환하는 변화를 보인다. 
  
  최남선은 이 시기에 창가, 신체시, 시조 등 여러 가지 시가 장르를 섭렵하면서 개화기의 중심적 문인으로 부상하였다. 작품의 미학적 가치에 있어서는 결코 성공적이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시가 문학사적으로 의의를 지니는 것은 전래의 정형 시가와 현대적 자유시 사이에서 교량적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2. 자유시의 등장과 낭만주의의 전개(1920년대)

  창가와 신체시가 지닌 과도기적 성격을 지양하면서, 보다 본격적인 의미의 근대시를 추구하려던 경향은 자유시를 등장시켰다. 민중 계몽이라는 공리적 주제 대신 개인의 정서가 시의 중심을 이루었고, 창작의 주체인 시인들도 보다 전문화하였다. 
  
  프랑스 상징주의 도입에 앞장섰던 김억은 창작시 발표에도 힘써 [태서문예신보]에 <봄은 간다>, <봄> 등의 작품을 발표하고 1923년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발간하였다. 주요한은 <불놀이>를 통해 현대 자유시의 완전한 형태를 갖춘 산문적 율격의 새로운 시 형태를 선보였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이론적 측면보다 음악성에 더 많은 자극을 받았던 이들은 상징주의의 본령인 절대 세계의 추구 대신 민요적 율조의 서정시 창작에 집착하게 된다.

  1919년, 민족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만방에 떨치고자 온 국민이 궐기했던 3·1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짙은 허무와 패배 의식이 국민적 정서를 침잠 시켰고, 이에 낭만주의의 형상을 한 감상적(感傷的) 우울과 퇴폐의 정조가 시의 지배적 경향으로 대두되었다. [폐허]와 [백조]를 비롯한 여러 동인지들을 중심으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박종화의 <사의 예찬>, 박영희의 <월광으로 짠 병실> 등 병적, 퇴폐적 낭만주의에 근거한 시들이 쏟아져 나왔다. 외부로 분출되지 못한 민족적 비분(悲憤)이 시의 감수성과 결합하여 감상적으로 토로된 결과였다.

  한편, 일제 강점기(强占期)의 깊은 상실감을 노래하면서, 전통성과 종교적 신념의 회복을 통해 현실을 타개하고자 했던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김소월과 한용운은 그러한 노력을 통해 한국 현대시의 창조적 지평(地平)을 마련하였다. 김소월의 시편들은 민족적 정한과 전통적 율격을 바탕으로 하여 특유의 언어 감각을 살린 민요조 서정시의 한 정점을 보여 주었다. 한용운은 불교적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하여 역설의 어법을 통해서 님을 상실한 절망과 희망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문학적 흐름에 반하여, 감상적 개인주의 문학에 제동을 걸고 강렬한 사회 비판 의식을 담아낸 시들도 찾아볼 수 있다. 1925년에 결성된 카프를 중심으로 경향시가 많이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들은 문학적 형상화의 측면보다는 이념의 선명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가 있다.


3. 현대시의 등장과 시의 다양화(1930~1945년대)

  1930년의 만주 사변으로부터 1937년의 중일전쟁을 거쳐 광복에 이르는 기간은 극심한 일제의 탄압으로 숨이 막히던 공포의 시대였다. 현실에 대한 언급이 곧 생존권의 박탈로 이어지는 악화된 창작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시인들은 갖가지 형태의 노력들을 경주하게 된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암담한 상황 속에서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본격적인 현대시의 찬란한 개화를 가져왔다.

  먼저 박용철·김영랑·신석정을 주축으로 한 시문학파의 순수시 창작을 그 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김영랑은 섬세한 언어의 조탁과 세련된 시적 표현으로 서정시의 본령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절묘한 시어와 운율을 통해 미묘한 정서적 울림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역사적 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정지용·김기림·김광균·이상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파는 지성에 호소하는 주지주의, 감각화를 강조하는 이미지즘, 실험적 기법을 구현하는 초현실주의 등으로 구별된다.

  생명파는 이러한 모더니즘의 문명 추구열에 반발하며 생명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몰입하였다. 서정주는 원죄 의식과 관련된 인간의 근원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생명의 신성함과 그 역동성을 시화하였다. 유치환은 삶의 고뇌에 맞서는 인간 의지와 생에 대한 희구를 부르짖었다.

  30년대 후반에 등단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소위 청록파 시인들은 서로 다른 종교적 기풍을 지니면서도, 자연 친화를 근거로 하나의 유파를 이루었다. 민족의 암담한 현실을 자연과의 조응(照應)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한편, 폭압적 현실에 맞서 저항적 삶과 문학을 전개해 나갔던 시인들로 이육사와 윤동주가 있다. 이들은 강인한 지사적 풍모와 내밀한 자기 응시로 암흑기 문학을 수놓고 있다.

  이처럼 현실의 중압감을 순수 서정시의 절창들을 통해 암묵적으로 드러내던 시인들과 달리, 오히려 현실을 더욱 철저히 인식하고 그것을 시에 투영했던 시인들이 있다. 오장환과 이용악은 그 대표적 예에 속한다. 오장환은 타락한 현실 속에서의 절망적인 몸부림을 시로 표현하였으며, 이용악은 일제 강점하의 참담한 민족 현실을 시로 드러내려는 노력을 보였다.


4. 광복 공간과 전후의 시(1945∼1950년대)

  광복은 환희의 순간과 함께 극심한 혼란의 시간들을 우리 민족에게 안겨 주었다. 좌 우익의 이념적 갈등은 광복으로 더욱 극단적인 국면을 맞았다. 각 진영의 세력 확보에 정치력이 집중되면서 전 민족적 생존의 문제는 도외시되었고, 결국 동족 상잔과 민족 분단이라는 최악의 결말로 치닫게 되었다. 전쟁이 가져온 피해 의식과 허무 의식은 사회적 분위기를 짓눌렀고, 분단 의식의 극복은 민족의 지상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민족적 상처를 치유하려는 움직임이 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혼돈과 무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의 창작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했던 광복 이후의 시에 이어 6 25 이후의 시는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의 경향들을 선보이고 있다.

  광복 이전부터 활동해 왔던 청록파, 생명파 시인들이 더욱 원숙한 경지에 이른 시들로 일제 치하와 6 25를 힘들게 거쳐온 민족의 비애를 담아냈다. 조지훈과 유치환은 종군 시인으로서 자신의 전쟁 체험을 실존적으로 형상화하였고, 구상 역시 전쟁의 비극과 전후의 상처를 휴머니즘적 입장에서 다루었다. 전통적 순수 서정시 계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끈끈한 인간애와 정제된 시적 감수성을 통해 인간 삶의 문제를 형상화한 시인들로는 이형기 김종길 정한모를 들 수 있다.

  한편, 시각적 이미지와 관념을 조화하려는 새로운 시인들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전래의 보수적 정태적 서정시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이들은 도시와 문명을 소재로 삼아 창작 활동을 전개했는데, 전후의 암담한 사회 현실과 부조리, 불안 의식 등을 시 속에 투영하였다. 김경린 박인환 김수영 등의 [후반기] 동인들이 여기에 속하며, 이들의 공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그러한 특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뿌리깊은 탐구를 보여주는 독특한 시의 영역은 김춘수에 의해 이 시기 새롭게 확립되었다. 김춘수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그 해답에 대한 안타까운 갈구를 시를 통해 구체화시키고 있다. <꽃>, <꽃의 소묘>, <꽃을 위한 서시> 등의 작품은 시인이 꽃의 이미지를 빌려 존재의 실상을 파헤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들이다.


5.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대의 시

  일제 치하와 동족 상잔의 비극이 남긴 상처가 선연한 가운데, 부패한 정권의 실정(失政)이 현실을 억눌렀다.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민족적 각성과 요구는 4 19로 분출되었다. 비록 5 16으로 인해 미완의 혁명으로 마감되기는 했지만, 4 19의 의지는 치열한 현실 인식으로 살아 남았다.

  이러한 현실을 대하는 시인들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참여적 경향의 시인들은 문학이 민중적 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며, 그 속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김수영 신동엽 신경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모더니스트로 출발한 김수영은 초현실주의의 진정한 자유 개념을 철저히 인식한 결과, 현실을 세련된 시적 감수성으로 감싸안는 독특한 시세계를 보여 주었다. 

  한편, 문학의 예술적 영역을 고수한 일군의 시인들이 있다. 먼저 김소월과 박목월, 서정주의 시에 뿌리를 두고 전통적인 순수 서정시의 창작에 몰두한 박재삼 박성룡 김관식 천상병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 달리 지성에 호소하면서 언어적 실험을 통해 시의 의미 영역을 확대시켰던 시인들이 있다. 박남수 김춘수 전봉건 송욱을 그 예로 꼽을 수 있다. 특히 김춘수는 극도로 정제된 이미지의 사용과 감정의 절제를 통해 난해한 무의미 시를 창작하였다.

  경제 발전을 국가적 과제로 삼았던 1970년대는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를 맞게 된다. 격동의 60년대를 지나며 예리하게 다듬어진 민중들의 역사 의식과 시대 의식은 경제 발전을 빌미로 한 독재 정권의 회유와 탄압에 꺾이지 않았다.

  시에 있어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그대로 이어져 정치적 자유와 인간적 평등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시인들이 대거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자신의 시를 몸으로 실천하여 진정한 참여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하기도 하였다. 민중이 현실 인식을 대변한 것으로 평가받는 고은 김지하 이성부 조태일 등의 시는 이러한 현실 참여적 경향의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이에 반하여 심화된 서정성을 통해 순수시의영역을 고수했던 시인들로는 정진규 이수익 오세영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지성적 고뇌와 시적 기교의 결합을 보여 주며 참신한 시의 조류로 등장했던 일군의 시인들이 있다.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6. 현대 시조의 특성과 흐름

  갑오개혁 이전에 지어진 일련의 시조들을 고시조라고 하는 데 대하여, 갑오개혁 이후에 지어진 시조들을 현대 시조라고 부른다. 현대 시조를 고시조와 비교해 보면 몇 가지의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형식에 있어서 한 수(首)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여러 수가 이어지는 연시조(連時調)가 많으며, 시행의 배열에 있어서도 비교적 자유로우며, 또한 고시조와는 달리 제목을 붙이고 있다.

  내용과 표현면에 있어서는, 고시조의 관념적 주제와 상투적인 표현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개인적인 특이한 정서와 현실 생활과 연관된 제재들을 가지고 주제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섬세한 언어와 치밀한 구성의 기법으로 시인의 내밀한 정서를 형상화하고 참신한 비유와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운율도 전통적인 정형률에서 탈피하여 시적 언어가 지닌 자연스런 리듬을 중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들은 현대 시조가 현대시에 접근하는 양상의 일단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현대 시조는 신문학 초기 육당 최남선에 의해 싹이 텄지만, 형식면의 과감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계몽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 1운동 실패로 인한 민족 의식의 고취로 전통 문화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표출됨에 따라 1920년대 중반에 '국민 문학파'들의 시조 부흥 운동의 전개로 현대 시조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1930년대 초까지의 대표적 시조 시인들로는 이은상 이병기 정인보 등이 있는데, 제재나 어휘 선택 및 표현 기교 등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1940년대에는 시조가 언어 예술로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등단한 이호우 김상옥 등이 그 대표적인 시인들이다. 1950년대, 60년대에는 이태극 정완영 이영도 등의 많은 시조 시인들이 새롭고 다채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57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330 윤동주 서울 하숙집 가보다... 2017-03-17 0 2723
329 시쓰기는 보석쟁이가 값진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는것과 같다 2017-03-17 0 2686
328 윤동주의 시는 끝까지 한글 작품으로 남아있다... 2017-03-17 0 3153
327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도 시인이었다... 2017-03-16 0 3906
326 시비(詩碑)가 뭐길래 시비(是非)인거야... 2017-03-16 0 3030
325 한 편의 시에서 시의 1행이 주조행(主調行)이라 할수 있다... 2017-03-16 0 2789
324 윤동주 묘비에는 "詩人尹東柱之墓"라고 워낙 각인되여... 2017-03-16 0 3284
323 시인은 늘 령감의 메시지를 잡을줄 알아야... 2017-03-15 0 2893
322 시의 씨앗은 시인의 몸 안에서 "무자각적"으로 싹터 자란다... 2017-03-14 0 2808
321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이골이 나다"의 유래 2017-03-14 0 2426
320 일본 교토 윤동주 마지막 사진 찍은 자리에 詩碑 세우다... 2017-03-13 0 2980
319 시 한편이 태여나는것은 늘 울고 웃는 과정을 그려가는것... 2017-03-13 0 2550
318 있어야 할건 다 있고 없을건 없다는 "화개장터" 2017-03-12 0 2826
317 우리 고향 연변에도 "詩碑자연공원"을 조성해야... 2017-03-12 0 3246
316 일본 문화예술인들 윤동주를 기리다... 2017-03-12 0 4357
315 일본 한 신문사 부장이 윤동주의 "빼앗긴 시혼(詩魂)"다루다... 2017-03-12 0 3065
314 일본 녀류시인 50세부터 한글 배워 시를 번역하다... 2017-03-12 0 3266
313 일본인 = "윤동주 선배가 나와 같은 의자에서 공부했다니"... 2017-03-12 0 2910
312 일본의 중견 시인이 윤동주 시를 일본어로 완역하다... 2017-03-12 0 3170
311 일본 녀류시인 이바라키 노리코가 윤동주 시에 해설을 달다... 2017-03-12 0 2872
310 작문써클 선생님들께: - "실랑이" = "승강이" 2017-03-11 0 2667
309 조선어의 자멸의 길은 있다?... 없다!!!... 2017-03-11 0 3578
308 시는 짧음속에서 큰 이야기를 보여줘야... 2017-03-11 0 2182
307 독자들도 시를 보고 도망치고 있다... 2017-03-10 0 2797
306 시인들이 시가 싫어 도망치고 있다... 2017-03-10 0 2502
305 작문써클 선생님들께= 아름다운 순 우리말로 작문짓게 하기... 2017-03-08 1 2966
304 윤동주의 친구 문익환 목사도 시 "동주야"를 썼다... 2017-03-07 0 4690
303 청년문사 송몽규도 시를 썼다... 2017-03-07 0 2971
302 청년문사 송몽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에 들다... 2017-03-07 0 4123
301 시인과 수석인은 이웃이다... 2017-03-07 0 2502
300 민족시인 윤동주를 연변 룡정 고향에서 모실수 있다는것은... 2017-03-07 0 2595
299 시는 생명의 황금빛이며 진솔한 삶의 몸부림이다... 2017-03-06 0 2740
298 시인은 죽기전 반항하면서 시를 써야... 2017-03-03 0 3380
297 시는 천년을 기다려서 터지는 샘물이여야... 2017-03-03 0 2527
296 시는 이미지 무덤이다... 2017-03-02 0 2937
295 시는 상식, 틀, 표준 등 따위가 깨질 때 탄생해야... 2017-03-01 0 2834
294 시 한수라도 마음속에 깊이 갈무리 해야 함은?!...ㅡ 2017-02-28 0 3623
293 작문써클선생님들께;우리와 다른 알고 넘어가야 할 "두음법칙" 2017-02-28 0 2886
292 시는 "빈 그릇"이다... 2017-02-28 0 2573
291 시문학도들이 알아야 할 시창작원리 12가락 2017-02-27 0 2733
‹처음  이전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