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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인 가수 밥 딜런는 누구인가...
2017년 04월 03일 01시 52분  조회:4357  추천:0  작성자: 죽림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밥 딜런

 

 

 

이름

밥 딜런 (Bob Dylan)

출생시 이름

로버트 앨런 지머맨 (Robert Allen Zimmerman)

출생

1941년 5월 24일 (만 75세), 미국 미네소타 주 덜루스

국적

미국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en/thumb/a/a4/Flag_of_the_United_States.svg/188px-Flag_of_the_United_States.svg.png

직업

싱어송라이터시인화가

학력

미네소타 대학교 중퇴[3]

신체

171cm

배우자

사라 딜런 (1965 - 1977) 
캐롤린 데니스 (1986 -1992)

자녀

마리아[4], 제시, 안나, 사무엘, 제이콥, 데지레이 (3남, 3녀)

활동

1959년~

데뷔

1962년 1집

레이블

유니버설 레코드[5]

주요
수상

프랑스 예술 문화 훈장 (1990) 
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 (1991) 
케네디 센터 공로상 (1997)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 상 (2000) 
폴라음악상[6] (2000) 
골든글로브 주제가상 (2001) 
퓰리처상 표창상 (2008)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7] (2012) 
레지옹 도뇌르 훈장 (2013) 
노벨문학상 (2016)

서명

 

링크

 https://g.twimg.com/Twitter_logo_blue.png[8] 공식 사이트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주제가상

 

 

제72회 
(2000년)

제73회 
(2001년)

제74회 
(2002년)

필 콜린스 
(타잔)

밥 딜런
(원더 보이즈

랜디 뉴먼
(몬스터 주식회사

 

 

역대 그래미 시상식 [9]

 

올해의 앨범상

제39회
(1997년)

제40회
(1998년)

제41회
(1999년)

Falling into You - 셀린 디온

Time Out Of Mind - 밥 딜런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로란 힐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주제가상 수상작

제51회 
(2000년)

제52회 
(2001년)

제53회 
(2002년)

You'll Be in My Heart
필 콜린스
(타잔)

Things Have Changed
밥 딜런
(원더 보이즈)

The Hands That Built America
U2
(갱스 오브 뉴욕)

 

1. 개요2. 생애
2.1조안 바에즈와의 인연2.2. 음악 활동2.3. 노벨 문학상 수상
3. 평가와 영향력4. 여담5비틀즈와의 관계6. 종교7. 디스코그래피8. Traveling Wilburys9. 저서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입니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합니다.


― 스티브 잡스 (2006년 8월, 발표회에서) #

 

그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으로부터 U2까지 모든 가수가 밥 딜런에게 빚을 지고 있다. 미국 음악사에서 밥 딜런 같은 거인은 없다.


― 버락 오바마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화가이자 시인이다. 태어났을 때 이름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Allen Zimmerman)[10]으로, 지금쓰는 밥 딜런은 예명이 아니라 법적으로 개명한 본명이다.[11] [12].

밥 딜런은 미국 포크, 록 음악의 거장, 대중 음악사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의 하나이자 음악사의 한 획을 그은 전설이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명이다.

수 십년동안 현재까지 음악, 문화의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13] 그의 가사는 광범위하게 정치, 사회, 철학적, 문화적 영향을 통합한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반전운동, 반문화운동,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을 늘 불편해 하여 음악 스타일, 대외적인 이미지를 몇년 단위로 바꾸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당대 시국과 관련된 발언 자체를 하지 않고[14] (그를 접한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앞 뒤 연결이 힘들고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보이는 등[15] 대중과 언론의 기대를 아랑곳 않는 행보를 보여왔던 탓에 영미권에서는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전술한 것 못지 않게 강하다.

2016년에는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로 가수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 생애[편집]


[16]

1941년 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중산층 자녀로 태어났다.[17] 어렸을 때부터 행크 윌리엄스엘비스 프레슬리리틀 리처드의 광팬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엔 로큰롤 밴드를 조직하여 여러 번 공연을 했었다. 이 당시에 그가 속한 밴드는 다른 스쿨 밴드보다도 매우 시끄럽게 연주했다고 하며, 한번은 교장 선생이 마이크 줄을 끊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59년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18] 미국에선 여러가지 이유로 로큰롤 배척 분위기가 팽배해져[19] 우디 거스리의 포크 음악과 흑인 전통 블루스에 관심을 돌리고 근처에서 밥 딜런이라는 예명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61년에 뉴욕으로 올라와 카페에서 반주를 하고 간간이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이 때 그는 우디 거스리의 병실을 찾아가 그를 간병하며 초기 음악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1962년 컬럼비아 레코드의 눈에 띄어 첫 앨범인 "Bob Dylan"을 발표한다.

2.1. 조안 바에즈와의 인연[편집]

여기에 따르면 1961년 1월 딜런이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도착했을 동갑내기 조안 바에즈는 이미 "포크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딜런의 2004년 자서전에 따르면 딜런이 처음으로 TV에서 바에즈를 보았을 땐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눈을 깜빡이기조차 싫었다 (중략) 그녀의 모습에 난 한숨만 나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 악령을 쫓는 목소리. 하느님에게 직접 노래하듯한 목소리 (중략) 못하는 게 없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그에 비하여 1961년 바에즈는 딜런의 공연을 보고 별로였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963년 바에즈는 아직 무명인 딜런을 자신의 공연에 불러 듀엣도 하고 솔로의 기회도 주기 시작하였다. 만명에 달하는 관객은 딜런의 낯선 스타일에 야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과 더불어 딜런의 인기는 바에즈를 추월하였고 이제는 바에즈가 딜런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였다. 1965년 유럽 공연을 떠난 딜런은 초기 바에즈가 준 도움에 보답을 하고 싶다며 바에즈를 초대하였으나 이미 인기가 몰락해버린 바에즈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였고, 바에즈는 큰 상처를 입은 채 2년간 이어진 그들의 로맨스를 끝내고 말았다.

이후에도 늘 저항 가수로서 활동하던 바에즈는 딜런에게 다시 돌아오라며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던 딜런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수차례 합동 공연을 통해 인연을 이어갔고, 바에즈가 자서전에서 딜런을 엄청나게 씹어댔지만 현재는 서로에 대해 좋은 말을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바에즈는 딜런의 노래만큼 부르기 즐거운 음악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에즈와 결별한 해 밥 딜런은 비틀즈와 조우하면서 서로의 음악에 큰 영향을 주고 받게 되었고 대마초도 전수해준다, 폐쇄적인 포크 소사이어티를 벗어나서 서로 다른 장르들이 융합하는 포크'록' 아티스트로서의 행보를 걷게 된다.

2.2. 음악 활동[편집]

본격적으로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에 발표한 "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이었다.[20][21] "Blowin' In The Wind",[22][23]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24][25] 등의 명곡이 쏟아져 나왔으며, 시적이면서 정치적인 깊이가 있는 가사와 모던 포크의 간결함을 수용한 이 앨범은 곧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이 앨범으로 인해 그의 음악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밥 딜런이 되고자 했다.[26] 

하지만 그는 곧 혼자서 통기타와 하모니카만으로 포크를 연주해야만 하는 상황과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포크 커뮤니티에 질리게 되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유명해진 이후부터 자신을 저항의 기수로 띄우려는 움직임을 상당히 불편해 했는 데, 이런 감정을 후술할 Bringing It All Back Home 이전에 내놓은 포크 앨범 Another Side Of Bob Dylan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My Back Pages에서는 그땐 너무 늙었고 지금은 더 어려졌다고 비유하면서 정치색에 물들어 설교 스타일의 노래를 발표한 과거의 자신을 꾸짖는가 하면, To Ramona에서는 노래 가사 속에 등장하는 연인[27]에게 죽어가는 것들을 어찌해봤자 소용없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집단 정치적인 포크 운동 자체를 비판, It Ain't No Babe에서는 나는 당신들이 바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면서 이 움직임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선언했다. 더군다나 이 앨범을 발표할 즈음에 포크 관련 행사에서 포크 팬들과 좌파 성향의 인물들 앞에서 '트롤링'에 가까운 발언을 했다. 그 중엔 리 하비 오즈월드에게서 나의 일면을 본다[28]는 식의 발언은 그야말로 충공깽. 이 와중에 신은 딜런에게 비틀즈를 선사했다. 더불어 신은 비틀즈에게 딜런을 선사했다.

당대의 스타였던 두 뮤지션들은 곧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비틀즈는 심도있는 가사[29]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이 가진 에너지와 환희에 매료되었다.[30] 딜런은 후배 밴드인 "버즈(Byrds)의 "Mr. Tambourine Man"과 자신의 앨범인 "Bringing It All Back Home"을 통해 록을 시험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본격적으로 포크 록에 도전한다. 그리고 기존 포크팬들에게 쌍욕을 먹기 시작한다.

당시 포크 씬은 전기 기타를 드는 행위를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기 기타를 드는 행위가 포크의 순수성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5년 5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은 전기 기타를 드는 것으로 그들의 믿음을 배신했다.[31] 하지만 딜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8월 "Highway 61 Revisited"를 발표했다. 오히려 포크의 대부 우디 거스리는 "젊은 사람이 하겠다는 것이 바로 미래이다"라면서 딜런을 옹호했다.

이 앨범은 여러모로 밥 딜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우선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 간보기를 했던 포크 록을 본격적으로 완성시켰으며, 가사 역시 하나의 예술의 경지로까지 올렸다. 록 평론가 '데이브 마시(Dave Marsh)'는 이 앨범을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최고라고 평하면서, "이 무렵 그의 영향력은 너무도 확산되어 정말 수천의 사람들이 그의 언어 하나 하나에 매달리는 실정이었다."[32]고 말했다. 수록곡 "Like A Rolling Stone"은 6분이라는 파격적인 곡 길이와 비의적이지만 신랄한 가사, 당시로서는 복잡한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싱글차트 2위에 올라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잡았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도 밥 딜런 커리어 중 으뜸으로 자리잡고 있다. 앨범전곡을 가사번역하신 분이 계신다.#

1966년에 발표한 "Blonde on Blonde" 역시 큰 찬사를 받았고, 작품성으로는 그의 정점이라 평해진다. 밥 딜런은 저 세 장의 앨범으로 천하를 제패했다. 하지만 앨범 발표 뒤에, 오토바이 사고가 일어나 크게 다친 그는 잠시 세간의 눈을 피해 요양하게 된다. 이는 사실 매니저 앨버트 그로스먼과 짠 계획이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던 딜런은 그로스먼과 신비주의 전략과 가정을 위하여 일부러 크게 다쳤다고 발표하기로 하고, 그가 다쳤단 소식이 들리자 딜런의 앨범 판매량이 급증했다. 

복귀 이후 그는 히피 운동이 한창이였던 1960년대 말을 "John Wesley Harding", "Nashville Skyline"[33], "The Basement Tapes"[34]같은 앨범을 녹음하면서 어쿠스틱과 컨트리에 집중하는 인상을 보였다. 이렇게 대중과 평단의 기대와 Self Portrait(1970)와 Dylan(1973) 같은 딜런의 이미지에 안맞는 전설적인 똥반을 발표하는 등[35] 어긋나는 행보에 미묘한 반응을 얻던 차에 이혼 직후인 1975년 발표된 'Blood on the Tracks'으로 다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 앨범과 'Desire'[36]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방향을 급격하게 전환한다. 종교 때문이었다.

1970년대 말, 기독교에 심취하기 시작한 밥 딜런은 1979년 "Slow Train Coming"이라는 가스펠 음반을 내놨으며 그래미 상도 타고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밥 딜런은 기독교에 심취함을 넘어 전도사로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전도사 생활 비중을 늘리면서 예전보다는 덜한[37] 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정규적인 앨범 발표와 공연과 반전 운동으로 1980년대를 보낸다. 허나 발표한 앨범들의 퀄리티가 전성기보다 못해서 이 시절은 그의 암흑기로 불린다. 정확히 콕 집어서 말하자면 백 밴드 놔두고 당대 유행인 뉴웨이브를 어정쩡하게 도입하려고 했다가 안 좋은 평을 받았다고.[38] 그 와중에도 기억될 만한 음악적 경력을 꼽자면 미국의 유명 뮤지션 25명이 녹음한 자선음반인 "We Are The World"의 녹음 참가 정도(...) 그래도 별다른 휴지기 없이 꾸준히 공연 돌고 반전 운동에 참여하긴 했다. 별로 눈에 안 띄는데다 상대적으로 걸작이라 할만한 앨범이 없어서 그렇지

1989년 "Oh Mercy"로 지금까지의 암흑기를 떨쳐버리고 재기의 가능성을 내비친 그는 1997년 "Time Out Of Mind"로 확실히 재기에 성공한다. 지금도 3~5년 터울로 꾸준히 음반을 내놓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밥 딜런의 음악은 음악적인 뿌리 (블루스, 포크)를 찾아 회귀하는 인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다룬 '스탠더드 팝' 앨범을 발표했다.

2.3. 노벨 문학상 수상[편집]

 

그의 작품을 통해, 밥 딜런은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Horace Engdahl (전 스웨덴 아카데미 사무총장)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상 이유는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 링크

1996년 시인 앨런 긴즈버그의 제안으로 버지니아 군사대학교 교수 고든 볼이 밥 딜런을 노벨문학상 후보에 추천한 이래 해마다 유력 후보 중 한 명으로 이름이 거론되긴 했지만, 2016년 진짜로 수상하게 됬다. 1993년 토니 모리슨 이후 23년만에 미국인이 받는 노벨문학상이다.

문인이 아닌데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경우는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 정치인 윈스턴 처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장 폴 사르트르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의 문학이라고 생각되는 범주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었고 같은 뛰어난 소설을 남겼다.">[39] 가수로서 이 상을 수상한 것은 밥 딜런이 처음이다.[40]

하지만 2016년 10월 19일 현재, 밥 딜런은 노벨위원회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으며, 노벨위원회는 밥 딜런에게 연락을 포기했고 측근에게만 수상 사실을 알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실제로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하여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사르트르처럼 노벨상 수상을 거부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는 상태다. 노벨위원회는 시상식에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10월 28일,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상을 받겠다고 했지만# 다른 약속이 있다는 사유로 불참을 선언했으며, 어떤 약속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는 기사도 있다.# 특히, 시상식 불참을 선언한 이후 비판적 시각이 늘어났다. 하지만 밥 딜런을 비판하고 있는 해당 조선일보 기사는 '아무 근거는 없지만, 필자는 전 세계 재계와 언론계를 꽉 잡고 있는 유대인들의 입김이 이번 노벨문학상 선정에도 작용했다고 본다. 밥 딜런은 본명이 로버트 앨런 지머맨(Robert Allen Zimmerman)인 유대인이다. 공교롭게도 뉴욕타임스의 딜런 수상 기사에는 비판적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는 지극히 인종 차별적이고 편협적인 내용이다. 기자 본인이 인정했듯 아무 근거도 없는 비난을 기사로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은, 밥 딜런은 문학인이 아님에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문학계의 반발은 단순한 엘리트주의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평생을 언어를 이용해 고도의 철학과 메시지를 담는 데 바치는 수많은 문학인들과, 이들을 연구해온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울 수 있는건 사실이다.

딜런은 노벨상 시상식에 수락 연설문을 보내며, 다른 사람이 대신 연설한다고 밝혔다.# 그 다른 사람은 아지타 라지 주스웨덴 미국 대사가 대독하였다. 연설문에서 "만약 누군가가 내가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 가능성이 달에 서 있을 확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수상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이어서 "자신을 극작가로 여겼던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쓸 때만 해도 '역에 잘 맞는 배우는 누구일까' 등 다른 많은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라며 '내 작품이 과연 문학인가'라는 것은 그가 가장 하지 않았을 질문이라고 언급했고, 딜런 자신도 셰익스피어처럼 창조적 시도를 하고, 삶의 일상적 문제를 다루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다며 '내 노래들이 과연 문학인가'라는 질문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런 면에서 자신의 노래를 문학으로 여겨준 한림원에 감사를 전하며 러디어드 키플링, 조지 버나드 쇼, 헤밍웨이 등 문학 거장들과 함께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함께 이름을 올리게 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축하 공연을 한 가수 겸 작가 패티 스미스는 딜런의 노래 'A Hard Rain's A-Gonna Fall'를 선곡했다.

3. 평가와 영향력[편집]

https://s-media-cache-ak0.pinimg.com/564x/38/a8/2f/38a82faf7af5984f37be71335ac479ba.jpg
에스콰이어 1965년 9월호 표지. 밥 딜런과 말콤 X피델 카스트로존 F. 케네디의 얼굴을 1/4씩 배치했다.
60년대 초중반 딜런의 가사가 얼마나 크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는 지를 알 수 있는 짤방.
정작 본인은 이걸 보고 이게 뭐하자는 플레이냐고 질색했다.

밥의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밥의 가사를 읽어봐야 한다. 그것들은 삶의 기쁨과 슬픔으로 채워져 있다. 밥이 되어 노래를 하면 어느 누구도 평범하게 노래할 수 없다. 가끔 난 내가 곡을 만든 것처럼, 나인 것처럼 그의 곡을 노래한다. 난 밥과 같이 가사를 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날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 지미 헨드릭스

 


 

나는 그를 존경했고, 나는 그를 많이 존경했다. [41]


― 존 레논, 1970년

 


 

And now Dylan has entered that pantheon, shoving against the boundaries of the definition of ‘literature’ just as he pushed past so many borders in music.

밥 딜런은 이제 신전에 올랐다. 음악에서 수많은 경계를 밀어냈듯이 '문학'의 정의라는 경계를 힘차게 밀어내면서.


LA 타임스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중략)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임진모, 1999년

 



대중 음악의 가사를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린 전설이자 포크를 현대 예술로 탈바꿈시킨 역사적인 인물.

밥 딜런은 비틀즈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현대 음악사 최정상에 위치한다. 롤링 스톤은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 2위[42]에 꼽았고 2015년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싱어송라이터 1위로 꼽기도 했다.# 음악 통계 사이트인 어클레임드 뮤직에서는 비틀즈에 이어 역대 아티스트 랭킹 2위를 기록했다.

딜런이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하나로 꼽히는 가장 큰 이유는 노랫말때문이다.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밥 딜런에 대한 가사를 감상하고 분석하는 강좌들이 개설되어 있다. 1970년대부터 영문학계에서는 그의 노랫말을 텍스트로 하는 학위 논문이 제출되기 시작했고, 문학계 일부에서도 시로 인정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현재는 대학 강의에서 밥 딜런의 노랫말이 문학 텍스트로 활용됨은 물론, 다른 문학가들과 동등하게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가 내세운 이유 역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로, 시인으로서 밥 딜런의 공로를 인정했다.

또한 영문학 분야 가장 권위 있는 문학 선집으로 알려진 『노튼 앤솔러지』에도 딜런의 가사가 실려 있다. 〈스페인산 가죽 부츠(Boots of Spanish Leather)〉가 『노튼 시선집(The Norton Anthology of Poetry)』(2005)에,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이 『노튼 문학 입문집(Norton Introduction to Literature)』(2010)에 수록됐다. 

과학자들까지 그의 가사를 논문에 인용을 많이 해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시인 랭보를 좋아했고 지금의 이름도 영국 시인인 딜런 토머스에게서 따올 정도로 시와 가까이 있었다. 때로는 가사가 비유와 상징을 사용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저항정신을 담으면서도 사회와 인간,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함을 잊지 않았다.시대와 주류에 맞서는 저항성에 예술성이 더해지면서 그의 노래의 진정성은 진가를 발휘했다. 창법도 때로는 음정과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창법으로 읊조리듯 불러[43] 아티스트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존 레논 역시 소년과 소녀의 사랑 얘기밖에 몰랐는데 그의 음악을 듣고 나서 인생, 사회, 종교에 대한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 보헤미안들의 성지였던 그리니치 빌리지에 정착한 그는 우디 거스리와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포크 커뮤니티의 정치적 성향을 받아[44] 저항적, 사회 비판적 성격을 띤 포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1962년 밥 딜런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존 해먼드에 의해 컬럼비아레코드에서 데뷔앨범을 낸 후, 1963년 《프리휠링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이 앨범에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비롯한 〈전쟁의 지배자들Masters of War〉[45] , 〈궂은 비가[46] 쏟아지네A Hard Rain’s A―Gonna Fall〉 등 지금까지 불리는 수많은 곡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앨범으로 밥 딜런은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국이었으면 블랙리스트라 카더라 실제로 저 앨범을 내놓을 즈음에 예정되어 있던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이 거기서 부르려던 노래가 문제가 되어[47] 직전에 취소가 된 일이 있었다. 자신의 또다른 우상은 골반 춤 출 때 하반신은 안비추는 걸로 타협을 봤는 데...

1960년대는 세계사적 전환기였다. 선발 제국주의 국가와 후발 제국주의 국가가 맞붙은 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동서로 분할되고, 냉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의 각축장이 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제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두 개의 제국 어디에도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저항이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시기 미국의 현실을 가장 적확하게 노래한 사람이 바로 밥 딜런이었다. 

한국의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준 ‘Blowin‘ in the Wind’(바람만이 아는 대답)과 ‘The Times They Are a-Changin’과 같은 노래들은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저항적 노랫말로 시민권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이러한 가사들로 밥 딜런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의 아이콘, 반전가수로 인식되었다.

딜런은 장르적으로 포크, 록, 컨트리, 블루스에 걸쳐있으며, 포크록을 창시해 1960년대 청춘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포크록의 전형을 보여준 ‘Highway 61 Revisited’와 ‘Blonde On Blonde’ 앨범은 포크의 저항성과 록의 마이너(하위문화)를 결합한 것이다. 

<뉴스위크>는 70년대의 가수들 이를테면 폴 사이먼, 닐 영, 도노반, 돈 맥클린, 조니 미첼[48] 등을 팝 역사는 다른 말도 아닌 '딜런의 자식들'로 분류했다. R.E.M.에서부터 징징거리는 기타 소리의 메탈 밴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뮤지션들을 '딜런의 후예'라고 일컬었다.

유명한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그의 앨범을 연구한 저서 <보이지 않는 공화국>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음악은 음악으로만 보면 안 된다. 그것은 대중음악의 정신혁명과 관계한다. 그의 음악은 20세기 모더니즘의 가장 강렬한 분출이다. 이 점을 빼놓고는 왜 그의 음악과 앨범이 명작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여기까지 읽고도 '도대체 이 사람이 뭐길래 이리 잘났다고 호들갑인가' 라고 생각한다면 임진모의 평을 읽어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밥 딜런의 노래가 이해되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팝과 락 등의 대중음악 감상에 있어서 아마추어로는 거의 최고의 수준에 올라갔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의 노래들은 그만큼 미적으로 뛰어나지만 이해하기도 어렵다.

4. 여담[편집]

  • 엄청난 워커홀릭이다. 1962년 앨범 발매 이후 최소 2~3년안에 무조건 앨범을 냈다. 이렇게 앨범을 자주 냄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작품의 퀄리티를 계속 유지한다. 가장 오래된 공백기는 2001년 'love and theft' 발매 후 5년만에 'modern times' 앨범을 낸것이다. 2015년, 2016년엔 2년 연속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 스티브 잡스가 가장 존경한 인물중의 한명이다.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말한적도 있다. 딜런이 녹음한 773곡 전곡이 담긴 디지털 패키지 세트를 아이튠스 스토어에서 판매하기로 했는데 상품의 출시를 알리면서 잡스는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이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영화 ‘스티브 잡스’의 대니 보일 감독은 “그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반골로 부르며 우상화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 모든 사람 중에서 딜런이 잡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애플 초창기 잡스는 100시간 분량이 넘는 1960년대 딜런 음악 해적판을 수집했다. 월터 아이잭슨이 저술한 잡스 전기에 따르면 그와 애플 초기의 스티브 워즈니악은 딜런 팬으로서 마음이 맞았다. “딜런의 노래책을 구입해 가사를 해석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고 워즈니악은 말했다. “딜런의 가사들은 창조적 사고를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그 뒤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밥 딜런의 곡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마침내 딜런과 상봉했다. 잡스의 전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딜런의 방 앞쪽 테라스에 앉아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잡스는 긴장했지만 그의 우상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정말로 허심탄회하고 솔직했다.” 잡스가 기억하는 한, 그가 너무 긴장해서 말이 잘 안 나온 적은 오직 밥 딜런을 만났을 때(2004년 10월)뿐이었다'는 대목도 있다. 1984년 매킨토시를 공식 발표할 때 스티브 잡스는 연설 첫머리에 딜런의 ‘세상이 변하고 있네(The Times They Are a-Changin’)’ 중 둘째 행을 인용했다.

 

‘저술가와 비평가들은 오라 / 펜으로 예언하는 사람들 / 눈을 크게 뜨고 보라 /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 바퀴는 여전히 돌아간다 / 그리고 예측할 수 없다 / 누구의 이름을 부를지 / 오늘의 패자가 내일의 승자가 될 것 /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 알다시피 가사 쓰는 실력을 보면 과연 보통이 아니다. 신랄하면서도 예리한 촌철살인적인 발언들은 그를 히피 세대의 대변인으로 자리잡게 했다.[49] 하지만 그런 인기와 달리 그의 행동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웃사이더적인 면모가 많았다. 이런 독단적이고 개인적인 행동들 때문에 인생사가 심각하게 우여곡절이 많은 편이다. 이혼도 자주 했고, 마약도 하고, 주변 사람들과 불화도 심했다.

 

  • 딜런은 음악적으로 뿐 아니라 음악외적인 이미지와 행동양식 면에서도 동시대 및 후대의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썬글래스를 쓰고 담배를 꼬나물고 늘 티꺼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방진 이미지와 수수께끼 같고 냉소적인 행동방식을 통해 한 락뮤지션 이미지의 원형을 만들어낸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 역대 록 뮤지션들 중에 섹시한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 스타가 엘비스 프레슬리라면, '지적인'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50] 특히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가 밥 딜런의 그런 이미지를 모방하며 이미지 스타일과 언행방식의 롤모델로 삼았다는 점은 꽤 유명하다.

  • 60,70년대에는 앤디 워홀과 관계가 있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2015년 20대 경관에게 노숙자취급을 받아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리기도 했다.

 

  • 90년대 번역 출판된 소설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비롯한 일본어 소설을 보면 밥 딜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편인데, 이름이 보브 딜런으로 표기되어있다. 밥 딜런을 일본어 가타가나로 풀어쓴 걸 그대로 옮겨온 듯한 이 번역은 사실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에 의한 것으로 2001년 국립국어연구원의 심의를 거쳐 지금의 밥 딜런으로 고쳐졌다. 다만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2001년 이후에도 여전히 보브 딜런으로 쓰는 사람도 꽤 있다.

 

  • 90년대 초반에는 애플 컴퓨터 제품에 이름이 딜런이라는 것 때문에 소송 제기했다가 패소했는데, 미국 언론에게도 딜런 토머스 지인들도 문제시하지 않은 일이라고 비웃음을 들었다.

 

  • 외국에서는 비틀즈롤링 스톤스와 동급의 본좌 뮤지션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번안된 "Blowin' In The Wind"가 국내에서도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언어 문제와 앨범에 담긴 미국적인 향취 때문에 의외로 대한민국에서 밥 딜런 자체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다. 유명하지만 유명하지 않다라는 모순적인 표현이 잘 어울린다고 할까. 그래도 '아임 낫 데어' 같은 영화 때문에 일반 대중의 밥 딜런에 대한 인지도가 조금씩 늘고 있다.

 

  • 가창력 자체보다는 웅얼웅얼 읊조리며 부르는 독특한 분위기의 창법이 유명하다.[51]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If Not For You'나 건즈 앤 로지스가 부른 'Knockin' On Heaven's Door'[52]를 들어보면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2012년 작 "Tempest"에 수록된 "Duquesne Whistle"에선 루이 암스트롱을 연상시키는 창법으로 노래했다. 참고로 이것들은 노래와 자신의 이미지 구축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목소리다. 지인들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미성의 소유자이며, Nashville Skyline에 나오는 목소리가 진짜 목소리에 가깝다고 한다.

 

  • 2010년 3월 31일 잠실에서 내한공연을 열었다.

 

  • 원피스 만화 연재본 572화의 제목인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밥 딜런의 3집 앨범 제목이자 타이틀곡이다. 이 노래는 잭 스나이더가 감독한 영화 왓치맨의 오프닝 곡으로도 쓰였다. 오프닝 영상은 원작에서 길게 소개되는 미닛 맨 소속의 과거의 히어로들의 역사를 20세기 미국사의 여러 장면들과 함께 시간순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데, 이는 원작의 긴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요약해 보여줄 뿐 아니라, 노래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영욕의 세월을 거쳐 새로운 국면으로 치달아가는 작중 히어로들의 상황을 잘 나타낸다.

 

  • 첫째 부인에서 얻은 네 번째 자식인 아들 제이컵 딜런 또한 미국의 유명 밴드 '월플라워스(The Wallflowers)'의 리더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아버지 밥 딜런 정도의 전설은 아니지만, 아버지 후광 없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 뜨고 나니 아버지가 밥 딜런이었구나 하고 알려질 정도. 1996년 앨범 Bringing down the horse, 그리고 이 앨범 최고의 히트곡 One Headlight는 상당히 유명하고 1998년 Time Out Of Mind로 아버지 밥 딜런이 그래미 앨범상을 받을 때 월플라워스 역시 락부문 그래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앨범부터는 그만한 인기를 얻지는 못하고 잇다. 활동은 중단하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하는 중. 밥 딜런이 심한 바람둥이었기 때문에 부자 간 사이는 좋지 않은 듯하다. 손자인 파블로 딜런은 래퍼로 활동 중인데, 할아버지나 삼촌과는 달리 철저하게 언더 활동 중이라 정보가 매우 부족한 편.

 

  • 2013년 11월 13일 "Complete Album Collection Vol. 1"이 국내 정식 발매되었다. LP 미니어쳐로 제작된 정규 47개의 앨범들, 268쪽의 부클릿등 딜런의 음악을 귀로 직접 체험하고 싶다면 구입해보도록 하자. Vol.1이라는 타이틀이 무섭게 느껴진다.

 

 

  • 배우로도 아주 가끔씩 활동한 적이 있는 데, 가장 유명한 영화라면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이 있다.[53] 비중있는 조역인데 연기는 그닥(...) 감독 영화도 있는데 망했고. 10여년 이후 영화가 재발굴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Hearts of Fire이 혹평을 들은 이후로는 영 아니다 싶었는지 출연은 없다. 장난삼아 배우를 한 건 아니고, 어렸을 적부터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참고로 배우로써 데뷔를 한 건 의외로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그것도 가수로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1963년에 BBC에서 만든 단편 영드 'Madhouse on Castle Street'에서였다.

 

존 포드의 영화엔 용기와 용감한 행동과 구원 그리고 고뇌와 황홀함의 기이한 조합이 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드라마틱한 방식을 통해 보여 준다.(...) 찰리 채플린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조차 그렇다. 난 항상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를 의식하는 것 같다. "[54]

 

  • 허영만의 1987년 작품 <고독한 기타맨>에도 나온다. 처음에는 주인공 이강토의 동경의 대상이었으나("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반복해서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중에 이강토와 직접 만나게 되며, 이강토의 기타 실력에 빠져서 그의 멘토이자 프로듀서로 나선다. 이강토는 밥 딜런의 도움에 힘입어 전미를 석권한다. 실제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계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넘어 기축이 되었던 존재였다. 한국 포크록의 전설인 한대수도 밥 딜런의 창법과 스타일을 많이 연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만든게 "행복의 나라"였다. 실제 그가 말하길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 등장에 씨앗을 뿌렸다라고 평한다.

 

 

  • 60~70년대 많은 유명곡을 뽑아내던 활동시절과 현재의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 음악 성향도 그렇고. 1980년대 이후 앨범들은 한국에서 그다지 잘 알려있지 않기 때문에 2010년 내한공연 때 예전 생각하고 보러 온 상당수의 관객들이 당황하기도 하였다. 본인은 이 상황을 즐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팬들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 2013년에 프랑스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모욕 및 혐오선동 건으로 고소를 당한 적이 있다. 2012년 롤링 스톤 프랑스어판 인터뷰에서 '흑인들은 아직도 일부 백인들이 노예제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노예 주인이나 KKK의 피를 갖고 있다면 흑인들이 알 수 있다는데 마치 유대인이 나치의 피를,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의 피를 알 수 있다는 것과 같다.[55] 부디 하루빨리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발언하여 크로아티아를 나치에 비유했다는 이유. 오프 더 레코드를 걸은 건데 그걸 어기고 기사에 실은데다가 특정 국가를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혐의 처리되었다.

5. 비틀즈와의 관계[편집]

1964년 저널리스트 알 아로노비츠의 주선으로 밥 딜런과의 뉴욕에서의 만남이 성사된다. 밥 딜런은 비틀즈의 음악이 가진 활력에 매료되어서 비틀즈와의 만남을 원하고 있었으나 비틀즈는 딜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딜런은 비틀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리화나를 선물로 준비한다. 이 만남은 이후 비틀즈와 딜런 상호간에 음악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밥 딜런과 존 레논은 동갑내기다.

흥겹고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가사의 대부분이던 비틀즈는 밥 딜런의 노랫말에 깊은 인상을 받아 1965년부터 작사에도 큰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사에 멤버들의 가치관이 많이 반영되어 철학적이거나 사회비판적인 면모가 가사에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포크적인 요소도 수용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드러난 출발점이 러버 소울(Rubber Soul) 앨범이다.

 

반대로 밥 딜런은 비틀즈의 다이나믹한 록큰롤 사운드의 영향력을 목도하며 과감하게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섰다. 이런 그의 음악적 변신의 중심에 밥 딜런의 명곡, 'Like a rolling stone' 이 있다. 이 노래는 1965년 그의 세 번째 음반 < Highway 61 Revisited >에 실려 빌보드 차트 2위에 올랐다.

밥 딜런, 비틀즈, 그리고 이 둘 모두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버즈(The Byrds), 이 세 뮤지션에 의해서, 종전엔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포크'와 '록'이 급속도로 융합되기 시작했으며, 이런 화학작용은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두 거물의 만남은 서로에게 엄청난 윈윈이 된 것이다.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도 조지 해리슨은 밥 딜런과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 관계를 쭉 유지했다.

6. 종교[편집]

밥 딜런의 종교적 회심에 대한 오해와 진실

1979년말 밥 딜런은 갑작스레 '거듭난 그리스도인'(born-again Christian)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더 나아가 이 때 발표한 세 장의 앨범 < Slow Train Coming >(1979), < Saved >(1980), < Shot of Love >(1981)에는 자신의 회심을 고백하고 신을 찬미하는 노래들로 채웠다. 이후 몇 년간 그는 전도자로 활동한다.

비슷한 시기 유대인이었던 밥 딜런이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당시 대중들에게 이런 충격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밥 딜런의 전기 작가인 로버트 쉘턴(Robert Shelton)에 의하면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고, 어릴 때 다른 유대인들처럼 유대교 예식 참여는 물론 히브리어도 상당 수준으로 학습했다. 일부 언론과 평단은 늘 베일에 쌓여있던 그의 신비주의 전력을 근거로 그의 회심을 의심했다.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벌인 일종의 쇼라는 것이다. 더욱이 몇 년간의 뜨거운 전도활동 후 그는 자신의 신앙적 입장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으니 이런 의심이 생길만도 하다.

1970년 전후, 미국 음악계의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왜곡된 히피 정신을 가졌던 찰스 맨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배우 샤론 테이트(로만 폴란스키 감독 부인)를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또한 롤링스톤즈의 알타몬드 공연에서는 죄 없는 흑인 청년이 오토바이족 헬스 엔젤스의 칼에 맞아 죽었다. 패션이 된 약물은 수많은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소위 '27클럽'의 '위대한 3J'(지미 핸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가 약물중독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은 음악계에 흐르던 저항문화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대신 카펜터스, 캐롤 킹, 짐 크로취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의 서정적이고 따뜻한 노래가 사랑 받게 된다.

밥 딜런 역시 이 시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행복했던 결혼도 권태기에 빠졌다. 결국 밥 딜런의 외도로 아내 사라와 이혼했고 다섯 자녀의 양육권 역시 긴 소송 끝에 잃어버렸다. 또한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 Renaldo and Clara > 역시 평단의 지독한 혹평 가운데 실패했다. 무엇보다 그의 내면에 지독한 허무감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1970년대 밥 딜런은 시적 은유가 가득한 노랫말의 확장과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계속했다. 당시 그의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자신의 의미가 무언지를 되묻는 사상적 고뇌가 두드러진다.

당시 밥 딜런은 '흑인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흑인 음악, 흑인 음식, 흑인 스타일에 흑인 애인까지. 부인과 이혼 후 그가 사귀었던 여성들은 모두 남부 출신 흑인들이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코러스 싱어 케롤린 데니스(Carolyn Dennis)와 결혼해 여섯째 아이를 낳았다. 그녀 역시 흑인이었다. 한대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밥 딜런은 흑인들의 가스펠에 매료되었고, 그 안에 담긴 그들의 신앙에도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다가 1978년 밥 딜런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빈야드 펠로우쉽 처치'의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된다. 이 교회가 속한 '빈야드 크리스천 펠로우쉽'은 은사주의적 성격이 강해 기독교에서 이단 시비까지 일으킨 바 있는 초교파 교회이고, 이적과 체험을 강조한다. 이 교회는 1990년대에는 '모던워쉽'을 주도하며 기독교 음악계에 큰 획을 그었다. 지금도 미국 뿐 아니라 국내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빈야드가 발표한 노래들을 예배 때 부르고 있다.

이런 '복음주의' 기독교는 보수적 교리와 사회관, 그리고 종말론적 가르침을 강조한다. 밥 딜런이 회심한 빈야드 교회 역시 그 특성상 이런 '복음주의' 그룹에 속한다. 이 교회에서 그는 존 듀이어 목사의 영향을 받으며 결정적으로 회심하고 세례를 받는다. 신약성서를 깊게 읽으며 자신의 공허한 일상을 위로하는 예수의 메시지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1979년 발표한 < Slow Train Coming >은 제리 웩슬러(Jerry Wexler)가 프로듀싱하고 다이어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가 기타로 참여하며 평단으로부터도 큰 찬사를 받았다. 제리 웩슬러는 빌보드지 기자 시절 처음으로 '리듬앤블루스'(R&B)란 용어를 사용했고, 1950-1960년대 레이 찰스와 아레사 프랭클린 등의 음반을 프로듀싱하며 흑인 음악 활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때까지 그의 수많은 히트곡들을 외면해 왔던 '보수적인' 그래미는 놀랍게도 이 앨범의 타이클곡, 'Gotta serve somebody'에게 그의 첫 번째 그래미상(최우수 록보컬 남자 부문)을 안겨주었다.

밥 딜런의 크리스천 삼부작 앨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종교적 회심의 진정성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딜런은 특히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말씀들을 자신의 노래들에 인용했다.

앨범 발매 이후 딜런은 1979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투어를 진행했다. 총 79회의 공연에서 그는 오직 새롭게 만든 종교적 노래만으로 세트리스트를 채웠고, 공연 중 신앙고백과 전도 메시지를 전했다. 1980년 5월 투어를 마치며 그는 저널리스트 카렌 휴스(Karen Hughe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분이 언제나 나를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적절한 때와 뜻을 이루십니다. 나는 바로 그분의 때에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1980년 11월부터 1년간 지속된 다음 투어에서는 공연 중 종교적 노래와 자신의 히트곡을 함께 불렀고, 공연 전 대기실에서 세션들과 함께 '주기도문'을 함께 낭송하며 공연을 시작했다.

< 밥 딜런 평전 >(실천문학사, 2008)을 보면 당시 그의 회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가 후대에 기독교에 심취하게된 이유는 미국의 혼란스런 사회상에서 이데올로기도, 아니면 그에 반하는 이데올로기도, 전쟁을 찬성하는 국가지배층도, 반대로 반전을 주장하는 이도, 그들의 행동 양식은 결국은 성경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밥 딜런은 빈야드 교회와 결별하며 자신의 회심에 대한 지속적인 고백이나 전도 활동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다. 1982년 이후 그는 기독교 신앙을 중단하고 다시 유대교로 복귀했다는 소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아울러 그의 종교적 입장과 변화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앨범, < Christmas In The Heart >을 발매한다. 종교적 다원사회가 된 미국에서 "Merry Christmas"라는 인사는 공식적으로 “Happy Holiday”라고 표현한다. 2000년대 발매한 대부분의 캐롤 앨범도 “홀리데이” 뮤직으로 명명하지만 밥 딜런은 앨범에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표기하고, 선곡도 예수에 대한 찬미의 노래들로 채웠다. 

그의 새로운 신앙의 노래는 의외로 2012년 발표한 앨범 < Tempest >에서 나타난다. 이 앨범에 수록된 'On Narrow Way'의 가사다.

나는 광야의 길을 걷고 있어요. 내 영혼의 안식처를 찾기까지.
나는 내가 뒤에 남겨지리라(left behind)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날이 저물어가던 때에 한 음성을 들었어요.
“평안하라 형제여, 평안히 기도하라” 
그것은 먼 길이죠. 아주 멀고 좁은 길이예요. 
만약 내가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언젠가 나를 끌어내리겠죠.

7. 디스코그래피[편집]

연도

제목

1962

Bob Dylan

1963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4

The Times They Are a-Changin'

1964

Another Side of Bob Dylan

1965

Bringing It All Back Home

1965

Highway 61 Revisited

1966

Blonde on Blonde

1967

John Wesley Harding

1969

Nashville Skyline

1970

Self Portrait

1970

New Morning

1973

Pat Garrett & Billy the Kid

1973

Dylan

1974

Planet Waves

1975

Blood on the Tracks

1975

The Basement Tapes

1976

Desire

1978

Street Legal

1979

Slow Train Coming

1980

Saved

1981

Shot of Love

1983

Infidels

1985

Empire Burlesque

1986

Knocked Out Loaded

1988

Down in the Groove

1989

Oh Mercy

1990

Under the Red Sky

1992

Good as I Been to You

1993

World Gone Wrong

1997

Time Out of Mind

2001

Love and Theft

2006

Modern Times

2009

Together Through Life

2009

Christmas in the Heart

2012

Tempest

2015

Shadows in the Night

2016

Fallen Angel

8. Traveling Wilburys[편집]

1988년 딜런은 비틀즈의 기타리스트였던 조지 해리슨, Pretty Woman으로 유명한 로이 오비슨톰 페티(Tom Petty), 제프 린(Jeff Lynne) 등 이름만 들어도 후덜덜한 친구들과 함께 트래블링 윌버리스(Traveling Wilburys)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한다. 초유명 음악가들이 프로젝트성으로 내는 슈퍼그룹의 원조다.
Handle With Care 감상해보자.

9. 저서[편집]

  • 바람만이 아는 대답 (자서전) [56][57]

  • 타란튤라 (소설, 1971년 출간)

 

10. 관련 문서[편집]

 

[1] http://content.time.com/time/magazine/0,9263,7601980608,00.html[2] 표지에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밥 딜런이다.[3] 1959년도에 입학해서 1년만에 중퇴하였다.[4] 양녀[5] 2010년대부터 소속되었다.[6] 폴라음악상은 스웨덴 왕립음악원에서 주관하는 음악부문의 상이다. 노벨상과 같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스웨덴의 국왕이 직접 시상한다는 상징성과 권위로 음악의 노벨상이라 불리기도 한다.[7] 미국의 대통령이 수여하는 상으로, 미국 의회가 수여하는 미국 최고의 시민상인 의회 명예 훈장과 나란히 한다. 수상식 당시의 일화가 있는 데, 다른 아티스트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사진찍으려고 안달났는 데, 밥 딜런은 선글라스를 쓰고 아주 무덤덤한 자세만 취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바마 본인은 이 모습을 보고 '역시 내가 생각했던 밥 딜런은 이런 사람'이라며 좋아죽었다.(...)[8] 밥 딜런 본인의 sns는 아니며 밥딜런 공식 홈페이지의 sns다.[9] 그래미 시상식의 가장 중요한 상들로 여겨지는 올해의 레코드상,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노래상, 최고의 신인상만이 기록되있다. 나머지 부문의 상들은 따로 문서 내 수상 목록에 수록해주길.[10] 밥(Bob)은 로버트(Robert)의 애칭이다.[11] 그 중거로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성씨가 '지머맨'이 아닌 '딜런'을 썼거나 쓰고 있다.[12] 첫번째 음반을 내놓을 시기에 밥 딜런으로 법적 개명. 본인의 말로는 딜런 토머스의 시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딜런이란 이름 자체가 멋있어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13] He has been influential in popular music and culture for more than five decades.[14] 베트남 전쟁부터 9.11 테러까지 당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슈에 대해서 본인의 견해를 딱부러지게 언급한 적이 별로 없다.[15] 처음으로 언론에서 인터뷰를 할 즈음엔 언론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기 사진이 잘 나오는 지 신경을 쓰는가 하면, 후술할 첫 일렉트릭 콘서트에서 청중들과 거의 싸울 듯한 모습을 보이는 듯 하다나 공연이 끝나니 관객 수가 몇명인지 묻는 등. 또한 부랑자를 연상케하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섬을 몇 개씩이나 소유한(거기다 현재 집 주소가 말리부다.) 부동산 부자다.[16] 이 사진은 자신의 포크음악 우상이던 우디 거스리가 찍은 사진을 오마주한 것이다.[17] 아버지는 그 지역 노동자들에게 가구, 가전제품을 팔고 외상을 받아내는 사업을 하여 집안이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는 데, 딜런은 이런 가정 환경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18] 음악 활동에 치중하느라 학업을 매우 소홀히하여 1년도 못채우고 중퇴.[19] 58년과 60년 사이에 재수없게도 로큰롤 업계와 관계된 비극적인 사건과 스캔들이 연달아 터져버렸다. 자세한 사정은 해당 문서를 참고.[20] 약칭으로 'The Freewheelin'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1] 앨범 표지에 등장하는 여성은 당시 딜런의 전 여자친구인 수지 로톨로(Susan Elizabeth Rotolo, 1943년~2011년)이다. 여담에 따르면 수지의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졌다고 한다. 굴러온 복을 걷어찬 셈[22] 포레스트 검프에서 제니가 '바비 딜런'이라는 예명을 달고 나체로 스트립바에서 불렀던 노래.[23] 앨범의 서두를 장식하는 히트곡이자 밥딜런을 대표하는 노래로도 손색이 없지만, 정작 훗날에는 가사가 너무 1차원적이라며 젊은시절의 자신을 셀프디스(...)하기도 했다.[24] 이 곡의 경우, 양병집이 "역(逆)"라는 제목의 한국어 개사곡을 내놓은 바 있다. (곡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번안곡이라고 할 수 없고 사실 상 밥 딜런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한 2차 창작에 가깝다.) 김광석은 이 곡을 리메이크하면서 제목을 가사의 첫 소절인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바꿨다. 그리고 가사 일부가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시대착오적이라 김광석은 스튜디오 버전은 물론이고 공연때 마다 일부 가사를 바꿨다.[25] 앞의 두 곡은 발표 당시에는 혼성 포크 그룹 '피터, 폴 앤 메리'의 리메이크곡이 훨씬 유명했고 상업적으로 더 많이 팔렸다. 이 곡들이 담긴 그룹의 스튜디오 앨범은 100만 장 가까이 팔려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사실 밥 딜런의 유명세는 가수 활동 자체보단 이 곡들에 담겨진 비범한 가사와 곡조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더 먼저 주목받는 데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정설.[26] 이는 태평양건너 한국에도 영향을 미치며 포크를 위시한 저항적인 기류가 퍼지는 포크붐을 일으키기도했다. 김민기한대수 등이 대표적인 가수.[27] 정치적 대의에 동참하여 물들어가면서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을 은유한 것이다.[28]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으로부터 며칠 지난 시기에 열린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29] Help!에 수록된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나 러버 소울에서 그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30] 정확히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로큰롤 배척 분위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포크에 자리를 물려주고 숨죽이고 있었던 록 스피릿(...)이 비틀즈를 접하고 나서 다시 꿈틀댄 것에 가깝다.[31] 이런 배신(?)행위는 이듬해 5월 16일에 영국 맨체스터의 자유무역회관에서 벌인 공연에서 절정을 이루었는 데, 관중들 중 누군가가 유다(Judas)!!라고 외치자 난 너희들을 믿을 수 없어. 너희들은 거짓말쟁이야.라고 화답한 뒤 밴드 멤버들에게 존나 시끄럽게 연주해(Play fucking loud)!라고 지시를 했다. 곧바로 연주하는 곡은 바로 이 각주 다음에 올 문장에서 설명할 앨범의 수록곡인 Like A Rolling Stone.[32]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가사가 한층 심오해졌다. 다만 가사가 생각보다는 어렵지는 않다고 한다. ...영어/문화 장벽은 제외하자.[33] 밥 딜런의 음반 중 유일하게 미성으로 녹음하여 청자들을 경악에 빠트린 것으로 유명하다.[34] 더 밴드와 작업한 앨범으로 유명하다. 사실 이것은 앨범을 위해서 녹음한 것은 아니고 오토바이 사고 후 은둔을 하면서 더 밴드의 멤버와의 친목을 도모하고자 벌인 세션을 녹음한 것을 간추린 것에 가깝다. 녹음은 1967년에 끝마쳤지만 2년 후에 이 녹음들을 담은 'Great White Wonder'라는 제목의 해적판이 유통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딜런 측이 이를 막고자 애를 썼지만 이미 틀려버렸는 지, 결국 좀 늦은 시기인 1975년에 이 세션의 일부에 약간의 오버더빙을 거쳐서 The Basement Tapes라는 앨범을 발표했다.[35] 둘 다 커버곡이 대다수를 이루는 앨범인데, 그 중 Dylan은 자작곡이라곤 하나도 없고 각종 매체에서 최하의 평점을 받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36] 살인 누명을 쓴 전설적인 복서 '허리케인' 루빈 카터의 이야기를 담은 Hurricane, 유독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곡인 One More Cup Of Coffee가 이 앨범의 수록곡이다.[37] 사실 6,70년대 시절 밥 딜런은 요즘 웬만한 슈퍼스타, 걸그룹 뺨치는 수준이었다.[38] 심지어는 커티스 블로우(힙합 역사의 태동기에서(소위 올드스쿨 힙합)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 중 한명으로, 래퍼로써 최초로 메이저 레코드 사와 계약한 인물이고, 대표곡인 The Break는 랩 음악 역사 상 최초로 후렴구를 사용하여 상업적인 히트를 기록했다.)의 곡 Street rock이란 곡 도입부에서 랩을 하는 충공깽 행보를 보였다.(...)[39] 역사학자인 테오도르 몸젠을 제외하고서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대전 회고록'를 집필. 러셀은 수필을 많이 남겼고, 사르트르는 <구토> 같은 뛰어난 소설을 남겼다.[40] 1990년대 이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올랐다는 소문도 있어왔지만 실제로는 수상하지 못했고 2016년에 도박사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수상자로 예상했다.[41] Wenner, Jann S. Lennon Remembers, Rolling Stone Press (2000) 148쪽[42] 1위는 비틀즈[43] 초창기 창법은 우디 거스리의 영향을 받았다.[44] 본인은 그리니치 빌리지에 안갔더라면 이런 노래들을 결코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45] 영국 중세 민요인 Nottamun Town의 멜로디에 딜런이 쓴 새 가사를 입힌 곡이다. 다만 딜런이 부른 곡조는 영국 출신의 미국 여성 포크 가수 겸 애팔래치안 덜시머 연주자인 진 리치(Jean Ritchie)의 편곡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리치 측과 합의 하에 3000달러를 물어야 했다.[46] 인터뷰에서 폭우까지는 아니라고 언급.[47] 노래 제목은 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 정규 앨범에 수록되지는 않고 나중에 발매된 공식 부틀렉에 수록되어서야 빛을 본 곡이다. 극우 반공 단체 '존 버치 소사이어티' 일원이 빨갱이를 색출하는 데, 급기야 자신의 신변까지 훑어보는 신세까지 이른다는 내용.(...) 저런 걸 TV로 내보내겠다고?[48] 근데 이 사람은 밥 딜런에 대해서 부정적인 언급을 했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49] 다만 말 솜씨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고 사석에서 말수도 적었다고 한다.[50] 그래서 엘비스가 록의 엉덩이(혹은 골반)고 밥 딜런은 록의 두뇌라는 비유도 있다. 참고로, 밥 딜런 본인도 다른 당대 로커들이 그랬듯이 엘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51] 사실 밥 딜런과 같은 수준의 보컬리스트들은 노래를 못하는 것조차 하나의 미적 효과로 작용하게 된다. 애초에 멋지게 잘 불러야 듣기 좋을 노래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52] 그런데 현실에서 이 노래는 건즈 앤 로지스가 부른 것으로 더 유명한 듯 하다. 오죽하면 존 본 조비가 "아가들아 GNR 노래가 아니라 밥 딜런 아저씨 노래란다" 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이니.[53] Knockin' On Heaven's Door'가 바로 이 영화 사운드트랙에 실린 곡이다.[54] #출처 기사 / #중앙일보 번역 기사[55] 이 발언이 나온 배경은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우스타샤 문서 참조.[56] 2004년 뉴욕타임스가 뽑은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되고 내셔널 북 어워드(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를 수상하기도 했다.[57] 원제는 Chronicle. 연대기라는 의미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은 국내 출판사에서 Blowin' In The Wind의 국내판 제목에서 따와 붙인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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