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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는 문학예술운동을 넘어선 삶의 한 방식이다...
2017년 04월 11일 01시 30분  조회:3681  추천:0  작성자: 죽림

브르통과 초현실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한
초현실주의
surrealism는 20세기 미술운동 중 가장 고도로 조직화되고 엄격하게 통제된 운동이었습니다
초현실주의가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1896-1966)이 <쉬르레알리슴 선언>을 발간한 1924년부터이며,
1925
년에는 이 운동의 첫 종합전이 파리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의 뿌리는 다다이즘입니다다다이즘은 1차 세계대전 후의 기존의 전통질서에 대한
파괴운동이었던 만큼 비합리를 예찬하고 때로는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흐르며

콜라주와 같은 새로운 기법오브제와 같은 직접적인 표현도 채택했으며
초현실주의의 강력한 무기인 에로티시즘에 이르러서는 다다이즘의 비도덕적인 자세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

초현실주의의 도덕적실천적 지도자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었습니다.
14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브르통은 보들레르말라르메위스망 등 상징파 시인에게 열중했습니다
의학생으로 파리대학 재학 중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각지의 육군병원 정신과 및 신경과에 근무하면서 프로이트의 저서를 애독하게 되었고,
 
프로이트를 통하여 계발된 인간정신의 무의식 영역에 관한 인식은 후일 그가 초현실주의 이론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

상상력과 감정적인 힘이 늘 과학과 이성주의의 실추를 상쇄해왔다고 믿은 그는 
1차 세계대전 중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며 목격한 고통과 괴로움에 큰 충격을 받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군복무 후 파리에 정착하고 재능 있는 새로운 미술가들과 특히 다다운동을 지원하고 장려하던
비평지 
<문학>의 편집인이 되었습니다당시 브르통은 마르셀 뒤샹을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으로 간주했습니다.

브르통은 1924년 친구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헌정한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계기로 초현실주의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선언문은 주로 초현실주의 문학과 관련 있었지만회화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1925년 파리의 피에르 화랑에서 개최된 첫 초현실주의 전시회 초현실주의 회화전의 기획을 도왔습니다.

초현실적surrealiste’이라는 용어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1917년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남성 명사순수한 심리적 자동주의로서이를 통해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사고의 진정한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이성의 통제가 없는 곳에서그리고 모든 미학적 혹은
도덕적 선입견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
.

백과사전철학 용어초현실주의는 이제까지 소흘히 해온 연상 작용과 관련된
최상의 실재를 믿으며
꿈의 편재성과 무관심한 사고 작용을 믿는다
이는 모든 다른 정신적인 메커니즘을 없애고대신에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 그 자체를 해결방법으로 제시하려 한다
.

초현실주의는 문학미술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며 철학적 견해의 표현으로 진전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의 본질은 논리적인 사고에 의해 이해 가능한 사건들의 질서 잡힌 시스템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우연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은 무의식에 대한 비논리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이런 통찰은 특정한 비논리적인 자동주의 방법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브르통의 자동주의

 

 

 

자동주의automatism는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에 의해서
처음으로 알려졌습니다
브르통은 1920년 친구시인 필리프 수포Philippe Soupault(1897-1990)와 함께
자유 연상의 방법을 이용하여 창작한 글을 실은 
<자장Les Champs magnetiques>을 출간했으며
이것은 자동주의 방법의 첫 사례가 되었습니다.

회화가 초현실주의에서 타당한 위치를 가지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자 브르통은 말했습니다.

시각은 가장 강력한 감각이므로시각적인 이미지를 명확하게 하는 능력은
초현실주의가 회화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 
총체적으로 초현실주의 회화 또한 다른 초현실주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의 의식 속에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회화를 혁명을 수행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브르통은 회화 자체의 미학적 목적보다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시만큼이나 회화를 늘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몇몇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성공으로 인해 대중이 초현실주의가 우선적으로 양식상의 문제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자
몹시 당황해 했습니다
브르통은 달리를 교의상의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초현실주의 운동으로부터 추방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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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만에 다시 부는 ‘초현실주의’ 바람
초현실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몇 달 전 영국 런던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초현실주의 전시회가 열린 데 이어,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도 3개월여간 열린 초현실주의전에 연일 관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미국 뉴욕과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도 초현실주의전이 곧 열릴 예정이다. 

 
초현실주의는 여태까지 르네상스, 낭만주의, 인상주의 예술 등에 비해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예술사조로만 인식되었던 초현실주의가 최근 들어 갑자기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퐁피두 전시를 기획한 뒤셀도르프대학의 미술사 교수이자 전 퐁피두 현대미술관 소장인 워너 스파이스는 세 가지 가설을 내세운다.

1세기 만에 다시 부는 ‘초현실주의’ 바람
첫째, 1960년대까지 관객들이 인상주의에만 관심을 가져왔다면 이제 그 다음 사조인 초현실주의에 눈을 돌릴 시기가 됐다는 것.

둘째, 이 사조는 20세기를 관통하면서 마티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시도한 부조리한 현실에의 초월, 보이지 않는 세계, 꿈의 세계와의 유희 등은 오늘날 특별히 느껴지는 불안과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될 수 있다고 평가된다는 것.
 

1세기 만에 다시 부는 ‘초현실주의’ 바람
냉전 이후 미국이라는 단일 패권주의 세계체제와 신자유주의가 내포한 불확실성, 그리고 출구가 없을 것 같은 현실에 대한 막연한 극복 의지가 20세기 초에 등장했던 초현실주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는 얘기다. 
 
초현실주의는 1924년 이 운동의 교황으로 불리는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두 가지 모순된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아 시인 로트레아몽과 랭보를 자신들의 선조로 여기면서 그들의 가치, 서정성, 예술이 갖는 초월의 힘,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신뢰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부르주아 사회, 금융자본주의, 경제적 번영, 보수적 교회와 정치가들, 정형화된 예술 등에 반대하며 등장한 다다이즘을 계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도발이나 스캔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다다이즘과는 달리 니힐리즘을 배격하였으며, 문학과 사회의 변혁에 대한 좀더 체계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기존의 선입견과 도덕성에 반기를 들고 삶을 다시 창조하고자 했으며,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욕망, 꿈과 무의식이 자유롭게 표현되는 방법을 모색했다. 브르통이 얘기한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소통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모순되지 않는 지점은 이 유파의 다양한 예술가들의 공통된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1세기 만에 다시 부는 ‘초현실주의’ 바람
특히 1929년 벨기에 잡지인 ‘다양성’이 ‘초현실주의시대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펴낸 지도를 보면 이들의 인식세계를 극명하게 엿볼 수 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초현실주의 태동에 기여한 순서로 다시 만든 이 지도에서 미국은 사라지고, 오세아니아의 조그만 섬들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원시예술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크게 확대되어 나타나 있다.

‘초현실주의 혁명’이라고 이름 붙여진 파리 퐁피두센터의 전시회는 초현실주의자들이 특히 왕성하게 활동했던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 중 200점의 그림, 200점의 데생을 비롯한 그래픽 예술, 100여점의 조각, 70여점의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특별히 이 전시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호안 미로, 드 키리코, 르네 마그리트와 조각가 자코메티, 사진가 만 레이 등 이 흐름을 주도했던 예술가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에 관한 특별한 테마 연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관객들은 전시실을 돌며 꿈, 밤, 산책, 도시, 자연사, 에로티즘, 신성모독의 주제들로 정리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루이 아라공, 폴 엘뤼아르, 로베르 데스노스, 벤자멩 페레 등 프랑스의 주요 초현실주의 시인들과 공동작업을 했던 미술가들의 특색을 볼 수 있도록 문학과 미술의 만남에 관한 전시실도 마련되어 있다. 

1세기 만에 다시 부는 ‘초현실주의’ 바람
미술 전시와 더불어 초현실주의 영화 상영도 퐁피두센터가 준비한 대형 이벤트 중 하나다. 초현실주의자들의 활동을 알 수 있는 다양한 다큐멘터리와 르네 클레르의 ‘잠이 든 파리’ ‘상상 여행’, 루이 뷔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 ‘황금시대’ 등 100여편의 초현실주의 관련 영화들이 전시기간 내내 되풀이 상영된다. 이어 초현실주의자들이 열광했으며 1911년 수베스트르, 알랭이 창조하고 루이 페이야드, 폴 페조스 등이 영화화한 ‘팡토마스’(프랑스어로 ‘유령’이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말)를 상영한다. 악의 화신인 이 인물을 시작으로 이후 영화들에 악한 주인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후대 영화감독들의 작품 중 람베르 힐러의 ‘배트맨’을 비롯해 프리츠 랑, 조르주 프란주, 올리비에 아사야의 작품들도 함께 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체코 초현실주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간도 마련된다.

일부 평론가들은 1960년 앙드레 브르통의 죽음으로 초현실주의는 끝났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파리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초현실주의 전시회는 이런 생각이 편협한 것임을 보여준다. 초현실주의는 한 시기를 풍미하다 사라진 고정된 유파가 아니라 그 흐름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자유로운 운동이라고 일반인들에게 소개하고 재해석해 주는 것이 바로 이번 전시회의 기획 의도다.  

시 미술 사진 영화 등 모든 장르를 수용하는 초현실주의의 정신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미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퍼포먼스, 바디 아티스트, 안무가, 사진가, 디자이너, 패션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현대 예술가들은 알게 모르게 이 예술사조의 영향을 받고 있다.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예술을 내세웠던 초현실주의는 민주주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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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의 첫 선언문’ 
 

1942년 10월 14일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처음으로 그들을 위한 전람회를 메디슨 가에 있는 ‘화이트로 라이드 Whitelaw Reid ’에서 개최했다. 전람회의 명제는 ‘초현실주의의 첫 선언서 First Papers of Surrealism’이었는데, 미국 작가들은 아직껏 그처럼 왁자지껄하고 요란한 전람회를 본 적이 없었다. 전람회는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이 주최했고, 뒤샹은 2마일 가량의 기다란 끈을 사용하여 내부를 장식했다. 그들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 안에 아이들이 놀며 떠드는 소리가 울려퍼지게 했고, 뒤샹은 사람들을 고용하여 전시장 안에서 미식축구나 돌차기 놀이(hopscotch), 줄넘기를 하게 했다. 뒤샹이 기획하고 건축가 프레데릭 키슬러가 공간을 구성하여 탕기, 뒤샹, 마타, 에른스트, 마송, 그리고 미국작가 만 레이의 작품들을 배치했다. 전람회장의 실내에서는 지하철역에서 들을 수 있는 기차소음이 재생되었으며 기차소리가 날 때마다 전람회장의 불들이 껌뻑거렸다. 그러나 그런 장치들이 작품을 자세히 관람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미로, 에른스트, 쿠어트 셀리그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 옆에는 피카소와 클레의 그림이 함께 걸려 있었는데 피카소와 클레는 자신이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불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미국 작가들로는 바지오츠, 마더웰, 데이비드 헤어가 참여했으며 마타와 달리의 그림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는 그들이 미국인들에게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유럽 예술가들 중 꿈, 정신이상, 시에 관심이 많았던 브르통은 당시 마타의 아파트 윗층에 살고 있었다. 브르통은 뉴욕에 5년 동안 체재했는데 문화적으로 아주 뒤떨어진 미국생활에서 만족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어를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고, 예술가들의 모임에도 덜 참석했으며, 돈이 떨어지자 라디오 방송국에 취직하여 나치를 비난하는 방송을 했다. 그는 미국인 조각가 데이비드 헤어와 우정을 나누었고, 그와 함께 잡지 『VVV』를 창간했다. 번역은 브르통의 아내가 맡았다. 그러나 브르통과 헤어는 우정관계에서 연적의 상대로 돌변했는데 이는 브르통의 아내 재클린이 헤어와 사랑에 빠져 브르통의 아이를 데리고 헤어에게로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성적으로 더욱 자유분방했다. 달리도 친구인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카라를 자신의 아내로 낚아챘었다. 브르통은 뉴욕 생활에 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이 빨리 끝나 파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레제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식당에서 예술가들을 종종 만났는데 그들은 레제를 늘 주인공으로 여겼다.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던 레제의 유물론에 근거한 기계주의 미학은 그 논리적 귀결로서 당연히 그로 하여금 공산당에 입당하게 했다. 레제와 피카소의 공산당 입당은 당시 신문에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몬드리안은 재즈를 좋아했으므로 할렘(Harlem)에 있는 댄스홀에 자주 갔고, 여가가 생기면 블루스를 추었다. 페기와 결혼한 에른스트는 이스트 51번가에 있는 페기의 고급주택에서 살고 있었으며, 뒤샹은 1915년 뉴욕에 온 이래로 파리를 자주 방문하고 있었다. 피카소, 마티스, 미로는 유럽에 남아 있었지만 나치의 반(反)모더니즘적 태도로 인해 활동할 수가 없었다. 피카소의 경우 나치는 언론이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대부분의 중요한 예술가들이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파리는 텅 빈 것처럼 보였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주제들에 매료되었던 것이 아니라 학문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들의 회화방법에 감동했고 그들의 무의식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험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특히 미로의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좋아했고, ‘자동주의’ 기교의 창시자인 마송의 그림들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송은 그때 코네티컷 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입체주의는 하나의 화법으로서 그 우수함이 알려졌지만 초현실주의는 하나의 미학운동으로서 그 영역을 계속 넓혀가고 있었다.  


초현실주의 선언/앙드레 브르통 지음·황현산 옮김/미메시스 발행·296쪽·

피카소, 자코메티, 달리, 엘뤼아르, 아라공 등 1920년대 파리에서 활동했던 문학ㆍ미술 거장들의 교유 관계를 살피다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앙드레 브르통(1896~1966). 독자에겐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매혹적인 여성과 교제했던 몇 달 간의 경험을 두서없고 몽환적으로 기술한 산문집 <나자>의 작가로 기억되는 프랑스 태생의 시인이자, 평론가, 편집자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예사조인 초현실주의를 주창하고 일군의 작가 그룹을 주도, 당대에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브르통이 1924년 사실주의 문학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무의식을 중시하는 창작론을 제시한 '초현실주의 선언'(이하 '제1선언')은 그를 일약 새로운 미학의 리더로 자리매김했고,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모여든 젊은 작가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그룹의 내분, 비시정부(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면서 수립된 괴뢰정부)의 탄압에 의한 미국 망명 등의 시련을 겪으며 존재감이 약화되는 와중에 제2, 제3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다. 이 세 건의 선언문과 브르통의 강연문, 잡지 기고를 묶고, 프랑스 시 분야의 권위자이자 빼어난 번역가인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가 우리말로 옮기고 해설한 책이 이번에 출간된 <초현실주의 선언>이다.

브르통이 세우고자 했던 초현실주의의 이론적 뼈대를 보여주는 이 책에서 요체가 되는 글은 시기적으로도 가장 앞서는 제1선언이다. 선언문이라는 형식이 말해주듯, 정교하고 체계적인 설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그래서 오히려 변혁을 향한 당시의 열정과 의지가 오롯이 묻어나는 이 글에서 브르통은 창작자에게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수동적인, 또는 가장 수용적인 상태에 자신을 가져다 놓으라"(95쪽)고 주문한다. 여기서 초현실주의 문학의 대표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자동기술법이 도출되는데, 이는 무의식 영역에서 자유롭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포착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묘사와 심리분석을 통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존 사실주의 문학과의 완전한 결별 선언인 셈이다. 브르통은 이어 "어떤 종류의 연상으로부터 바람직한 돌발성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좋다"(111쪽)면서, 신문에서 잘라낸 표제들을 아무렇게나 이어붙인 콜라주에 '시(詩)'라는 제목을 붙이는 도발을 감행한다.

'무의식'을 끌어들여 인간 존재의 확장을 꾀한 프로이트와, 세계의 변혁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의 사상의 수혜를 받은 브르통이 주창하고 이끌었던 초현실주의를, 황 교수는 "존재의 총체성을 문제 삼은 거의 유일한 운동"(48쪽)이라고 평가한다. 철 지난 듯한 20세기 문예사조의 본질을 짚는 이 날카로운 안목이 초현실주의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린다. 예컨대 '미래파'를 위시해 2000년대 한국문단에 대거 등장한 젊은 작가군의 반(反)리얼리즘 작풍의 저변에 깔린 정신은 90여 년 전 파리에서 사실주의의 아성에 맞섰던 초현실주의 그룹의 그것과 거리가 멀지 않아 보인다. 브르통의 선언문을 그의 개인사, 당대 파리 문화계의 사정과 연결 지어 47쪽에 걸쳐 자세히 다룬 황 교수의 해설은 그 자체로 이 책의 값어치를 톡톡히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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