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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삶의 희노애락이 얼룩진 보물상자에서 나온다...
2017년 04월 18일 17시 06분  조회:2205  추천:0  작성자: 죽림
 

4. 시는 싸우고 감동하고 눈물 흘리는 삶의 얼룩에서 나온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짧은 안내문이나 편지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하면 “아유, 저는 글 못 써요.”하고 정색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 사람들은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글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전문가들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그런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시를 쓰자고 하면 더 펄펄 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인다. 아마 시라는 것이 어렵고 특별한 내용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끼리 암호처럼 주고받는 것쯤으로 생각하지 않나 싶다.
그런 사람들은 글은 잘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잘 쓴다는 것 속에는 유식한 말들이 많이 나오고 몇 줄 건넌 한 번씩 어려운 말과 처음 들어보는 구절이 등장하며 화려하고 그럴 듯한 표현들로 이어져 나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쉽고 진솔하게 써 나가는 것이 좋은 글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그런 시가 더 진솔한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진짜 이렇게 써도 괜찮으냐는 표정을 짓는다.
글에 대한 그런 편협한 생각을 깬 사람중의 하나가 김용택 시인이다. 그의 시는 쉽다. 어렵지 않고 진솔하다. 강 마을에서, 학교에서 농촌에서, 살아가면서 접하고 느끼는 삶의 이야기들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전혀 어렵지 않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풋풋한 정을 느끼고, 감동을 받고, 김용택 시인이 사는 강변으로 찾아가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든다.
김용택 시인뿐만 아니다.‘ 노동의 새벽’의 박노해 시인,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의 고재종 시인, ‘인부수첩’의 김해화 시인 ‘공친날’의 김기홍 시인 이런 시인들의 시도 쉽다. 다 자기들 삶에서 우러난 시들이다. 공장 노동자, 농사짓는 사람, 시내버스 안내양, 철근 다루는 일용노동자, 주부 이런 사람들 중에도 시를 잘 쓰는 훌륭한 시인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고등학교 중퇴, 중학 졸업,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사람들도 여럿 있다. 시란 꼭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잘 쓸 수 있다는 통념을 깬 사람들이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시인들이 쓰는 시는 특별한 이야기를 화려하고 아름답게만 장식해 나가는 시어가 아닌 평범한 일상어들로 표현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삶의 진실성과 문학적 진정성을 동시에 얻어내는 특징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이런 문학적 분위기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 속에 생활시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1930년대에 이러한 생활시가 주조를 이루던 생활시 시대가 있었다.
일본의 생활시 이론가 이나무라 갱이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조풍월의 취미가 생활에서 도피하려는데 비해서 생활시가 나가는 방향은 생활에 밀착하려는 태도이다.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활 가운데 뛰어들어 거기서 나아가려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참가하려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생활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새로운 생활적인 정신으로 살아가려는 우리들이 사념하는 것은 근심 많은 이 세상, 더렵혀진 이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거기에 생활시의 근본적인 태도가 근거한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인간이 영위하는 생활과, 그 인간이 만든 사회와, 인생을 사랑한다. 그것에 부딪쳐 가는 강인한 생활의욕을 희구한다. 우리들은 생활을 속사(俗事)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 속사(俗事)에야말로 시가 있는 것이다.1) 
  
  속사, 즉 세상의 이런 저런 일 속에서, 우리들의 때묻고 남루한 삶의 한복판에서  시가 쓰여지는 것이라는 이러한 자각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땀과 눈물과 기쁨과 분노와 고통과 소망, 이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뒹굴며 살아가는 동안 묻어나는 삶의 얼룩 그것이 시가 되어야 하며 오철수 시인의 말대로 ‘우리의 생활은 우리 시가 사는 보물상자인 것’2)이다. 
다음 시를 보자.

     
처음엔 남자가 할 짓이 아니라며 짜증도 냈지만
요즘엔 나 스스로 재미가 나서
언제 적 것인지도 모를 신문지를 깔아 놓고는
아내와 마주앉아 콩나물을 다듬습니다

콩나물은 노란 대가리와 흰 뿌리로
신문지 위에서 언제나 의연합니다
우루과이 라운드니 농산물 개방이니 어쩌구 하는
대문짝만한 일면 기사 위에서나 
백 억인지 천 억인지 그 큰 돈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탐욕스런 큰 손 아줌마의 눈빛 위에서나
거리낌 없이 꼿꼿한 뿌리를 쭉쭉 내뻗기도 하고
더러는 몸뚱아리 하나로 먹고 산다는
어느 광고 모델의 요염한 사타구니 사이로
천연덕스럽게 대가리를 디밀기도 하면서
풋풋한 재미를 즐깁니다
     
돈도 없고 명예는 물론 권세도 남만 못한             
이 땅의 교사인 내가 
오백 원어치 콩나물을 정성스레 다듬다 보면
콩나물처럼 머리를 맞대고 사는
평생을 살아도 신문 기사에 이름 석자 오르지 못할
많은 이웃과 아이들이 손을 내밀며 걸어 나오고
콩나물만으로도 풍요로울 줄 아는
우리들의 소박한 식탁이 떠오릅니다
     
욕심을 낼래야 낼 건덕지도 없는
콩나물은 콩나물끼리 뿌리를 얽고는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다듬어 줍니다
마주 앉은 아내와의 사랑이 다듬어지고
이웃들의 정겨운 웃음이 다듬어지고
아이들의 건강한 꿈이 다듬어지고
그렇게 다듬어진 콩나물들은
욕망으로 얼룩진 신문 활자를 당당히 즈려밟고는
싱싱한 우리의 양식이 되어 보란 듯이 손을 흔듭니다
             --- 장문석 「콩나물 사랑법」전문 
                           
                                
이 시는 콩나물을 다듬고 앉았다 쓴 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참 짜증나고 답답한 남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는지 몰라도 이 시속의 시적 화자는 이 사소하고 시시해 보이는(이런 표현 자체가 남성중심문화 속에서 몸에 밴 습성이고 남자는 그런 일이나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부장의식과 그런 일은 여자나 하는 것이라는 여성 비하적인 삶의 태도가 내면화 되어버린 것이지만) 일을 하는 동안 결코 사소하지 않은 자각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이 땅의 소시민으로 태어나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평범하기 때문에 시인도 될 수 없고 시도 쓸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 따위는 이미 뛰어넘고 있다.
  아니 바로 그 평범한 삶 속에서 삶의 소박한 진리를 깨닫고 있는데 이 시의 미덕이 있다. 콩나물을 다듬기 위해 깔아 놓은 신문지를 보며 대문짝만한 기사들로 연일 채워지는 이 땅의 큰일, 큰일을 만드는 사람들과 ‘콩나물처럼 머리를 맞대고’‘평생을 살아도 신문기사에 이름 석자 오르지 못할 많은 이웃’들의 삶을 비교해 보고 ‘우리들의 소박한 식탁’을 떠올린다. 그러나 결코 주눅들지 않고 소박한 삶 그 자체에서 더 큰 풍요로움을 느낀다. 물욕과 육욕 그 유혹을 콩나물의 모습으로 깔아뭉개는 여유로운 모습도 있다.
  ‘욕심을 낼래야 낼 건덕지도 없는’삶의 콩나물 다듬는 작은 일 속에서,그것도 아내와 마주 앉아 하는 가사일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다듬어 주고’‘마주 앉은 아내와의 사랑이 다듬어지고’‘이웃들의 정겨운 웃음’‘아이들의 건강한 꿈이 다듬어지’는 이런 과정은 얼마나 싱싱한 삶의 활력이 되는가. 삶의 한복판에서 시가 쓰여지고 그렇게 쓰여진 시가 삶을 가꾸는데 기여하게 되는 이러한 과정이 문학과 삶의 가장 온당한 모습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양정자 시인은 「나의 시」라는 시에서 시가 어떻게 생활 속에서 쓰여지는 것인가를 아주 잘 이야기한 바 있다.  

나의 시에는 
세 살 다섯 살 된 내 딸, 아들의 떼쓰는 울음소리
눈물나도록 어여쁜 재롱
내 악쓰는 소리가 섞여 있다

아이들이 떠들고 그림 그리는 옆에서
부대끼며 싸우며 시를 쓰므로
피노키오 파스 색깔
미운 오리새끼, 인어공주의 눈물 몇 방울 떨어져 얼룩져 있다
.........................................

나의 시에는 
물 묻은 내 손에서처럼
설겆이질의 야릇한 냄새, 갖은 양념내
걸레 썩는 냄새가 배어 있고...

시는 꼭 아름다운 꽃이어야만 하는가
부대끼며 싸워가며 살아가는
실팍한 생활의 시를 쓰고 싶다

내 시에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 내 시는 어떤 빛깔이 배어 나올까. 내가 쓰는 시에는 어떤 냄새가 날까. 자기가 쓰는 시의 개성을 생각하며 이런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가장 영롱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로운 어떤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양정자 시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자기의 시에서 소리가 난다면 그 소리는 “딸 아들의 떼쓰는 소리, 재롱소리, 내 악쓰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한다. 시에 빛깔이 있다면 그 빛은 떠들면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크레파스 빛, 동화책을 읽다가 흘린 눈물 빛 그런 빛깔들이 배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자기 시에 냄새가 배어 있다면 그것 역시 설거지질의 야릇한 냄새, 갖은 양념내, 걸레 썩는 냄새 같은 냄새가 배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양정자 시인은 시가 꼭 아름다운 꽃의 빛깔, 꽃의 향기를 지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대끼며 싸워가며 살아가는 / 실팍한 생활의 시” 자신은 그런 시를 쓰고 싶다고 한다. 설거지한 손에서 나는 냄새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냄새에서부터 시가 우러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고 싸우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시를 가까이 하는 게 아니라 떠들고 싸우고 감동하고 눈물 흘리는 삶의 얼룩에서 시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거기서 실팍한 시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안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가 아니라 속이 꽉 찬 시가 진짜 시라고 믿는 이런 리얼리즘적인 태도가 좋은 시의 밑바탕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문

유명한 김광규 시인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다.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4.19가 나던 해 이십 대 초반 무렵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개인과 사회와 사람과 일에 대해 고민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후반부는 그로부터 18년 후 중년의 나이가 되어 모인 그때 그 친구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똑같이 세밑에 만난 친구들의 모습이 사실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대비되며 지금 우리 부끄럽게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자기 반성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유종호 교수는 이런 김광규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김광규의 시 세계는 사회적 경험의 현장을 이루고 있는 생활세계를 향해서 늘 열려 있다......생활세계와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을 줏대 삼아 회전하고 있는 김광규의 시가 일상생활의 낯익은 정경을 리얼리스틱한 필치로 포착하는데 비상한 솜씨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라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속의 대목은 예사로운 듯하면서도 비근한 일상 경험을 일급의 소설장면에서처럼 영속화시켜 놓고 있다....... 흔히 소설의 전문 영역이라고 지목되어온 평범한 일상 생활의 제상諸相이 김광규의 시 세계에서처럼 남김없이 포착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3) 
                  
유종호 교수의 말대로 평범한 일상생활의 여러 모습이 남김없이 포착되어 있어서인지 삶의 현장을 향해 열려 있는 그의 시는 읽기에 편하다. 막힘이나 걸림 없이 술술 잘 읽힌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쓴 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편안한 일상어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는 단순하지가 않다.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설명으로 유식하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시를 읽고 있는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서는 안 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런 생활시를 읽으며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은 정경 속에 자기를 집어넣고 함께 떠들고 이야기하고 걸어나오다 지금 나의 노래는 밤하늘 별빛이 되어 떨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침묵하고 있는가 묻게 된다. 나는 진정 피 흘리며 사랑하던 것들을 잊지 않고 있는가 아니면 늪 같은 생활의 나락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돌이켜 보게 된다.
생활시는 단순한 생활의 나열이나 재현이 그치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게 하는 시이다. 삶에서 우러나오지만 시를 통해 다시 삶을 돌아보고 가꾸게 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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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는이가 ―정끝별(1964∼ )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이(가)’는 주격조사고 ‘은(는)’은 격조사가 아니라 보조사(補助詞)다. 예컨대 ‘나는 너는 사랑하지만 걔는 사랑하지 않아’에서 ‘너는’과 ‘걔는’의 ‘는’은 ‘너를’과 ‘걔를’의 ‘를’이라는 목적격을 대신한다. 그런데 대개 ‘나는’의 ‘는’처럼 주격조사 자리에 들어가서 쓰인다. 이때의 ‘은(는)’은 화제(話題)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나는’은 ‘나에 대해서 말하자면’이란 뜻이다. 주격조사 자리에 있는 보조사와 주격조사의 구별이 한국인에게는 아주 쉬운데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에게는 어렵다고 한다. 한국인에겐 ‘은는이가’의 문법이 내면화되어 있어서 ‘은(는)’을 쓸 때와 ‘이(가)’를 쓸 때를 잘 구별하지만, ‘전철이 곧 들어옵니다’라는 지하철 안내방송을 ‘전철은 곧 들어옵니다’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외국인도 있을 테다.

이 시가 담긴 시집 ‘은는이가’를 일독한 감상은 한마디로 정끝별 시가 한창 물이 올랐다는 것이다. 뜻은 웅숭깊고 형상은 무르익었다 할까. 첩첩 겹겹으로 말을 쌓는 ‘말발’은 여일하고, 거기 어떤 단심(丹心)이 표표히 아리땁게도 나부낀다. 죽음을 아우르는 생, 그리고 시에 대한 단심이리라. 조사 ‘은는’과 ‘이가’가 지니고 있는 느낌, 그리고 용법 차이를 절묘하게 묘사해 서정적 아치마저 아로새긴 이 시의 ‘당신’과 ‘나’는 둘 다 시인 자신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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