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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불확실한 세계의 창을 치렬한 사유로 닦아야...
2017년 07월 24일 05시 16분  조회:1951  추천:0  작성자: 죽림

 

보편적 정서의 힘 

강경희 


복잡한 삶의 회로에 갇혀 살다보면 때로는 단순하고 분명한 것들에 이끌리게 된다.

 단순함과 분명함이 주는 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비틀림이 없는 세계,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있는 그대로의 실재로 받아들일 수 있는 편안함은 세계를 순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변화와 변동의 증폭이 큰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변화하지 않는 것, 지속적 쾌감과 일관된 사유를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갈망한다. 이러한 경향은 자명함의 상실, 절대적 진리의 부재가 초래한 불안감에서 비롯된다.

자명한 것은 이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자명함은 오히려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발현시킨다.

그것은 어쩌면 불확실성의 위기를 반성적으로 사유하려는 태도일 수도 있다. 

한 편의 시를 통해 느끼는 감동은 어떠한 사태에 대한 개념적 판단을 드러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반드시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신기성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독자의 감성에 적극적으로 호소하는 시는 시인의 특수한 경험을 통해 정서적 친화성과 일치감을 확인할 때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일종의 정서적 안도감으로 나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삶의 유대성에서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불분명하고 확신할 수 없었던 잠재된 의식을 보편의 감각과 정서로 재인식시킴으로써 일종의 통합된 존재론적 경험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자연과의 친화성을 강조하는 시, 일상생활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는 시는 보다 폭넓은 공감을 확보한다. 이는 마치 복잡한 악보를 일일이 읽어내지 못하더라도 자연스러운 음악의 선율과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는 현상과 유사하다.

이처럼 서정시의 위력은 논리적 세계를 이성으로 파악하려는 분석적 태도보다는 삶에 내재한 다양한 국면을 일반화와 보편화의 정서로 드러내는 데 있다. 


이 세상 

천지간에 

봄이 불쑥, 찾아와서 

아닌 밤중 홍두깨로 박태기꽃 울컥, 피고. 


어머니, 

흑, 흑, 우신다. 


가슴이 

처 어 -ㄹ 렁, 

한다. 
―이종문, 「봄날」(《현대시학》, 4월호) 전문 


겨울의 터널을 뚫고 불현듯 당도한 봄의 숨결은 때로는 난감하다.

 "봄이 불쑥, 찾아와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되어 나를 후려칠 때 일순간 잊었던 혹은 잠재되었던 감정이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슬픔의 정서'이다.

어느새 환하게 피어난 봄날의 꽃,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화자는 "울컥"한다. '울컥'이라는 표현이 환기하듯이 마음 한 구석 깊이 감추어진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난다.

이 제어할 수 없이 솟구치는 슬픔의 정서는 봄날의 개화처럼 느닷없이 화자의 마음을 흔든다. "울컥" 피어난 "박태기꽃"은 "흑, 흑" 우는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닮았다.

거기엔 어머니의 곡절 많은 생의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과 '한'으로 표상되는 한국인의 보편적 감정을 이 시는 다시금 일깨운다. 슬픔의 뿌리에는 아픔과 설움, 사랑과 인내, 고단함과 엷은 웃음이 스며있는 인생의 뒤안길이 숨어 있다. 

이종문은 이러한 한국인 보편의 정과 한의 감정을 '봄날'의 자연 현상을 통해 비유적으로 그려낸다.

어머니가 토해 낸 울음 꽃은 급기야 화자의 마음까지 요동치게 한다.

"가슴이/ 처 어 -ㄹ 렁,/ 한다."라는 표현처럼 당혹스러운 사태에 어찌할 수 없는 북받치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고단한 생, 온몸으로 고통을 감수하면서 인내의 세월을 견뎌왔던 어머니, 참아왔던 설움의 응어리가 "박태기꽃"처럼 일순간 쏟아질 때 화자는 그 세월의 고통을 함께 앓는 것이다.

이처럼 「봄날」은 한국인 심성에 자리잡은 슬픔의 정서를 재확인시킴으로써 보편적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이 시에 묻어 있는 정서가 전통적 울림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를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성 가는 길 
번쩍이는 칼날 
검은 들판에 비닐하우스들 
눈을 찌르는 은빛 
시루떡 위에 뿌려진 팥고물처럼 
저기 녹지 않은 눈 사이 
응달에서 먹다 남은 
흙의 맨살들 
그 위에 부러진 뼛조각들 
흙 속에 뼈다귀를 파묻는 개 
모란시장 
철망 속에 갇힌 한 무리 
녹슨 눈빛들 
도마 위 시뻘건 생고기 한 덩이 
유성 가는 길 
겨울 들판에 놓여져 
번쩍이는 은빛 
언제나 배후에 숨어 있는 
칼날 
―강인한, 「殘雪」(《현대시》, 4월호) 전문 


강인한의 「殘雪」은 시각적 현상을 인식론적 의미로 환원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잔설'의 시각적 요소는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된다. "번쩍이는 칼날""비닐하우스"의 "눈을 찌르는 은빛"처럼 강렬한 무채색의 발광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시루떡 위에 뿌려진 팥고물" 사이사이에 드러난 흰색 시루떡의 표면으로 암시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각적 측면을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은 '잔설'이 단지 자연 현상을 드러내는 기표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인한에게 '잔설'은 그저 "저기 녹지 않은" 자연의 "눈"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녹지 않은 눈"은 그에게 "칼날"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칼날"은 찌르고 자르는 속성을 지녔다. 찌르고 자르는 칼날의 이미지는 "모란시장/ 철망 속에 갇힌 한 무리" "녹슨 눈빛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포획된 '개들'의 비참함을 통해 극대화된다.

즉, "도마 위 시뻘건 생고기 한 덩이"로 바뀌는 살풍경한 모습은 "칼날"이 의미하는 잔혹성과 무참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자연의 공간에서 개들은 "흙의 맨살"에서 뒹굴고 사냥하는 본성에 충실한 동물이다.

 즉 "흙 속에 뼈다귀를 파묻는 개"처럼 그들은 자신의 생존에 열심을 다하는 순진무구한 대상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육식성의 세계는 "시뻘건 생고기"가 암시하듯 피의 냄새와 살육의 흔적이 가득한 포악하고 잔인한 생존의 현장을 보여준다. 

이처럼 강인한은 삶의 현장 이면에 내재한 배후의 진실을 포착하고자 한다. "언제나 배후에 숨어 있는/ 칼날"이라는 말처럼 그는 표면적 사실 너머에 존재하는 삶의 진실을 확인하고자 한다.

 때문에 현상적 세계를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은 실상 그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려는 인식론적 태도를 반영한다.

사유를 강조하는 시가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는 관념의 과도한 개입과 설명적 요소로 인해 시적 미감을 저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인한은 감정의 적절한 제어, 절제와 압축된 이미지의 선택, 선명한 대비적 색채감을 통해 미적 형상화의 완결성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백 명의 재상이 나온다는 황계동산에 들어선 
백 채의 아파트를 보며 
혹 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중 
인류발전과 조국의 광영을 위해 
헌신할 재목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자축도 해주면서 

그래, 이제 마흔이 되었으니 
스스로 떠나버린 빈 절터에 서 있는 중들처럼 
머쓱한 표정은 짓지 말자며 
교정의 가문비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서 있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대견하게 보고 있다 
―이창수, 「불혹」(《작가》, 봄호) 부분 


개발의 실질적 방식은 재래의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가 현실의 논리에 의해 붕괴될 수밖에 없는 참담한 사태를 아이러니컬하게 보여준다.

"백 명의 재상이 나온다는 황계동산"의 전설은 어느새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백 채의 아파트"로 탈바꿈했다. 도심 개발의 목적은 철저하게 '돈'의 가치와 직결된다.

 "백 배"로 오른 "땅값"은 곧 백 배로 남는 "이익"으로 환수되어야만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이다. 이 자본의 논리 앞에서 인간적 가치, 윤리적 이념, 이상적 철학, 전통의 소중함은 말살된다.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꿈꾸며 공부했던 '학교'는 그저 지나간 추억과 전통을 회상하는 공간으로 인식될 뿐이다.

 "마흔의 나이"가 된 "고등학교 동창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는 방식은 "혹 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중/ 인류발전과 조국의 광영을 위해/ 헌신할 재목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자축"하는 냉소적 조롱의 말들일 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소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중년의 나이에서 느끼게 되는 자기 한계에 대한 씁쓸한 자기고백이기도 하다. 

급속하게 변화되는 도시의 풍경은 한편으로는 인간을 소외시킨다.

전통 공간을 통해 인간은 과거와의 유대성과 현재의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오래된 공간들이 파괴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지켜왔던 온전한 삶의 가치마저 폐기되어 버렸다는 상실감과 공허감을 갖게 된다.

또한 전통적 이념과 가치를 지켜낼 수 없다는 자기 한계는 삶의 허무를 가속화한다. 이창수의 「불혹」은 세속의 질서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자기 연민과 세계 상실의 아픔을 역설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어둠을 길러 
하늘로 올려보낸 두레박 
줄 끊어진 
두레박, 
재개발지구 깨진 지붕에 
엎어져 둥둥 뜬 두레박 
어둠이 튀어오르는 
두레박 
혼자 사는 할머니가 
마시는 두레박, 엄마 
없는 아이들이 
손 담그고 노는 
두레박 
붉은 가위표 담벽마다 
어둠의 해골해골들, 
첨벙대는 두레박 
―신용목, 「보름달」(《애지》, 봄호) 전문 


"재개발지구"의 한 마을을 연상하게 만드는 이 시는 가난이 묻어 있는 초라하고 쓸쓸한 사람들의 내면의 아픔을 눈물겹게 묘사하고 있다.

전래동화나 전설에 나오는 "두레박"은 비루한 현실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주는 사물로 곧잘 등장한다. 간절히 소원을 비는 사람들은 짐승의 도움이나 신의 허락으로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두레박이 없다면 이 세상은 먼 우주와 단절되어 버린 곳이 유배의 공간이 될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동화의 세계일 수 없다. 때문에 "어둠을 길러/ 하늘로 올려보낸 두레박"은 이미 "줄 끊어진/ 두레박"이 되고 만 것이다.

줄이 끊어졌기에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묘연하다. 다만 하늘을 바라보고 자신의 간절한 꿈이 다시금 이루어지길 소망할 뿐이다.

가난한 재개발지구 마을에 둥둥 뜬 두레박은 다름 아닌 "보름달"이다. 여기서 달은 자연의 달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화 된 달이라 할 수 있다.

"혼자 사는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달이며, "엄마/ 없는 아이들"의 허전하고 아린 마음을 위로해 주는 따뜻한 달이다. 그러나 또한 재개발지구 위에 뜬 달은 "붉은 가위표 담벽마다/ 어둠의 해골해골들"을 보여주는 죽음의 달이기도 하다. 
신용목은 재개발지구의 가난과 위태로운 삶, 누추하지만 소중한 인간미가 살아 있는 마을의 풍경, 그 속에 숨쉬는 나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 깨어진 염원과 비루한 현실을 시인은 두레박이라는 하나의 상징물을 통해 통합해낸다.

신용목의 시의 탁월함은 사물성의 이미지를 풍부한 정서적 변용물로 치환시키는 시적 상상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두레박과 보름달의 형태적 유사성, 두레박이 암시하는 동화적 세계의 지향, 또한 동화적 세계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는 광포한 현실에 이르기까지 두레박의 상징은 이 세계의 다양한 삶의 풍경을 다채롭고도 일관된 형식미로 통합해낸다. 

시인은 현실을 가공한다. 가공된 현실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현실에 내재된 숨어 있는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서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시인은 독설의 언어로 현실을 비판하고, 또 어떤 시인은 풍경의 방식으로 이 세계의 맨 얼굴을 보여준다.

시인의 렌즈에 포착된 세계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삶의 비의를 발견하는 것이며, 지나가는 사물 속에서 문제적 현실을 읽어내는 것이며, 변화무쌍한 세계의 속도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금 고쳐 세우는 성찰의 결과이다.

때문에 불확실한 세계의 창을 끊임없이 닦아내려는 시인의 치열한 사유는 숭고하고 의미 있는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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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희 / 문학평론가. 숭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2001년 〈문화일보〉신춘문예 평론 당선. 저서 『타자의 언어학』, 『표류와 유출의 상상력』등. 현재 숭실대, 산업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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