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개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거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 김광균 ‘노신(魯迅)’
시인은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회의(懷疑)로 불면의 밤을 지샌다. 젊은 나이엔 열정 하나로 가난을 이겨냈지만 나이 들수록 생활의 짐이 어깨를 짓누른다. 시인은 노신을 생각한다. 노신은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조국에 기여하겠다며 문인의 길로 들어섰다. 좌·우파 협공을 함께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이념문학을 비판했다. 상업학교를 나온 회사원 김광균은 결국 시작(詩作)을 멈추고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 무역업으로 성공했다. 먹고사는 것에 관한 시인들의 방황은 60년 뒤라고 다를 게 없다.
‘시인 되면 어떻게 되는 거유/ 돈푼깨나 들어오우// 그래, 살맛 난다/ 원고 청탁 쏟아져 어디 줄까 고민이고/ 평론가들, 술 사겠다고 줄 선다/ 그뿐이냐/ 베스트셀러 되어 봐라/ 연예인, 우습다// 하지만/ 오늘 나는/ 돌아갈 차비가 없다.’ / 한명희 ‘등단 이후’
문학지 시 한 편 고료가 3만~5만원. 원로들이나 10만원을 받는다. 시집을 5~6권 낸 중견도 새 시집을 2000부쯤 인쇄한다. 다 팔린다 해도 한 권에 4000~5000원이니 인세로 100만원이 수중에 떨어진다. 100~300권을 자기가 사서 나눠 보는 문단 풍습을 따르자면 적자다. 다른 직업 없이 전업 시인으로 살기란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다.
‘―MENU―//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쉴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카프카’
이 커피집 메뉴는 세계적 예술가와 석학들이다. 예술과 철학이 상품화·규격화·도구화한 시대를 빗댄다. 그중 카프카가 가장 싸다. 시인의 제자는 생활인으론 제일 가난한 시인이 되려고 시를 공부하겠다고 한다. 시인은 주변머리 없는 제자가 ‘미쳤다’고 혀를 차지만 속으론 기특하게 여긴다. 이 자조적(自嘲的) 시엔 시인의 자존심이 반어법으로 숨어 있다. 하이데거는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이고 가장 죄 없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의 시인론은 거창하지 않다. 가진 것 별로 없어도 착하고 넉넉하고 따뜻하고 슬기롭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말한다. 무구함으로 세상을 떠받치고 삶을 밝히는 풀잎기둥들이 시인이라고.
‘내가 다닌 대학에는 많은/ 국문학적 얼굴들이 있다. 그중/ 국어학 교수 얼굴들이 흔한 말로 가장/ 고상하고 원만하고 이른바 정품이다/ 막말로 그중 교수답다. 그 다음/ 고전문학 교수 얼굴들이 약간은/ 축 늘어지거나 모가 나거나/ 그렇게 조금씩 비뚤어졌는데/ 이것도 막말로 정품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교수 얼굴이라 해도/ 크게 구라가 아니다. 건데/ 현대문학 교수 얼굴들은, 딱 깨놓고 말해서/ 이건 교수 얼굴이 아니다/ 짓눌려서 짜부라지고/ 모가 나서 날이 서 있고/ 일그러지고 찌그러져, 이건 참말로/ 영 교수 얼굴이 아니다. 건데 건데/ 이상하게도 말이다. 그 짜부라질 대로/ 짜부라진 현대문학적 얼굴들이/ 진짜 얼굴로 다가오는 거 있지/ 대학 다닐 땐 지긋지긋하던 얼굴들이/ 너무너무 보고 싶은 거 있지/ 나이 사십 넘어서니까 그게 바로/ 내 얼굴인 거 있지, 문득문득 그 얼굴들/ 막 껴안아주고 싶은 거 있지/ 건데 건데 말이다/ 그보다 더한 국문학적 얼굴이 있는 거 있지/ 그게 박재삼이나 김수영 같은 얼굴인데/ 중풍병에 걸려 손을 덜덜 떠는/ 말라비틀어진 명태같은 박재삼 얼굴이나/ 내 詩에조차도 침을 뱉아버릴 것 같은/ 독하기가 왜고추 같은 김수영 얼굴이/ 진짜 진짜, 진짜 얼굴로 다가오는 거 있지/ 막, 눈물나게, 다가오는 거 있지.’ / 서림 ‘내 사랑하는 국문학적 얼굴들’
스스로 국문학 교수인 시인은 국문학 전공 교수들을 정품, 준정품, 개성품으로 분류한다. 그중에 시인의 얼굴이 가장 입체적이고 개성적이라고 우스개처럼 품평한다. 진짜 인간적이고 매력적인 얼굴이라고 결론짓는다.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누가 뭐래도 자신만의 개성이 또렷한 사람들이 시인이라는, 애교있는 자찬론(自讚論)이다.
시인은 맹인가수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심안(心眼)으로 꿰뚫어보고, 들리지 않는 우주의 소리를 섬세하게 들어 낸다. 보통사람이 보고듣지 못하는 것에 감응하고 교감한다. 그렇게 해서 시인은 사람들 일상에 새로운 서정의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 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냄새와 물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 점 모시나비/ 기린초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 허형만 ‘맹인가수’
평론가 김재홍은 시인을 이 시대의 곡비(哭婢)라고 했다. 초상집을 돌며 곡소리가 끊기지 않도록 상주(喪主) 대신 곡(哭)을 해주는 노비라고 했다. 시인은 뭇사람을 대신해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통곡하고 사람들의 절망과 좌절, 그리움과 괴로움, 고통과 비탄을 곡진하게 울어준다.
‘저 여자/ 내 전생의 저 여자/ 부엌 칸 부뚜막에/ 암코양이처럼 걸터앉아/ 막걸리 한 사발/ 꿀물 마시듯 꿀떡꿀떡/ 시퍼런 김치 줄기에 돼지고기 보쌈해/ 야무진 입매 다시는/ 나무비녀 쪽진 머리/ 푸르죽죽한 낯빛의/ 눈꼬리 샐쭉한/ 소복의 저 여자/ 조붓한 어깨 들썩이며/ 아이고 아이고/ 진양조 단조로/ 어수선한 상가(喪家) 분위기/ 휘어잡고 있는/ 저 여자/ 울음을 웃음처럼/ 갖고 노는/ 내 전생의/ 저/ 여자.’ / 이명주 ‘곡비’
시인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맑게 해주고 가슴과 머리를 씻어준다. 때로 사람이 밉고 사는 게 힘들 때 한 편의 시는 무엇보다 큰 위안이다. 연민·진정·사랑으로 열심히 살아라 도닥거려 주는 시인들이 많아서 그나마 이 시대가 살 만하다. 좋은 시에 대한 기다림은 옛 당(唐) 시인을 모시던 시동(侍童)의 마음이다.
‘주먹코인 저야 베옷 입어 마땅하니(巨鼻宜山褐) 눈썹 짙은 주인님은 글을 지으셔요(龐眉入苦吟)/ 주인님이 시를 노래하지 않으시면(非君唱樂府) 만추의 가슴앓이 누가 알겠나이까(誰識怨秋深).’ / 이하(李賀) ‘시동의 노래(巴童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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