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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14)
2017년 05월 06일 00시 03분  조회:2527  추천:0  작성자: 죽림

수필과 시의 관계는 수필과 시가 문학이라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수필과 시는 우선 동질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시는 시로서 수필은 수필로서 각자 자기 특성을 지닌 독립된 장르이다. 이는 두 장르의 이질적인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시와 수필은 동질적이면서도 이질적인 관계에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를 수필처럼, 수필을 시처럼 쓰려는, 다시 말해서 두 장르의 표현상 한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현상은 어디서 오는가. 이는 아무래도 두 장르의 동질성에 원인이 있겠고 또 다른 이유는 수필이 갖은 특성에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하여 차례로 살펴보고 두 장르의 이질적 관계에 대하여도 알아보자.


수필과 시의 동질성


이 두 장르가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하는 문학이란 원초적 동질성에 대하여는 재론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 두 장르는, 다른 문학 장르(소설, 희곡)가 허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비하여 상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 동질성이라 하겠다.


상상이나 허구는 각자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직접 체험 중에서 대상이 없는 내적 체험을 ‘생각’이라고 하는데 생각 중에도 사건이 없는 생각을 ‘사색’이라하고 사건이 있는 생각을 ‘상상’이라 한다. 이때 상상으로만 이루어진 사건이 ‘허구’이다. 이 허구虛構를 바탕으로 하는 문학 장르가 소설과 희곡이요, 상상想像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 장르가 시와 수필이다.


흔히 수필은 현실을 바탕으로 그것만을 나타내면 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느 문학 치고 현실을 배제할 수는 없다. 시는 물론이요, 소설이나 희곡도 현실(작자의 체험)을 도외시 할 수는 없다. 사람은 자기의 체험(직접체험이든 간접 체험이든)으로 인식한 것(앎) 이외에는 상상도 할 수 없고 상상으로 인한 사건(허구)도 구성해 낼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어느 문학이든 현실(작자의 체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수필은 교술 문학이므로 어느 문학 장르보다 현실성이 강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수필이 상상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현실만을 기록하는 것이라면 수필을 문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나 수필가는 작품을 쓸 때 현실을 모사模寫하지는 않는다. 현실을 상상을 통하여 수정하고 재구성한다. 작자가 현실을 수정하고 재조정할 때 작가의 인생관, 세계관, 도덕관, 철학관이 작용하지만 상상력 개입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나뭇가지에 참새들이 나란히 앉아 지저귀는 걸 보고, 「참새가 짹짹, 나뭇가지에서 짹짹,


아침에도 짹짹, 저녁에도 짹짹 울지요.」한다면 이는 현실의 모사일 뿐이다. 그러나「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 울지요.」라고 한다면 새에게 물어 볼 수는 없었을 터이니 작자의 상상에 의한 글이므로 문학으로 생명을 갖게 된다.


수필도 이와 다르지 아니하다. 수필이 현실성이 강하다고 하여 상상을 배제한다면 문학으로서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


「아들 내외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를 내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났다. 하던 공부를 마치려면 아직 2년은 더 미국에 머물러야 한다. 오늘이 손자의 생일이다. 제 어미가 보고 싶은지 녀석은 아침밥도 드는 둥 마는 둥하고 집을 나섰다. 저녁엔 케이크를 사다가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를 해 주었다 녀석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저도 제 친구의 생일에 그러는 걸 보아 은근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윗글에서 밑줄 친 부분(상상)을 제외한다면 현실 이야기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되어 문학성이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물론 문학성을 갖는다고 하여 훌륭한 작품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글(詩든 수필이든)은 상상을 통함으로써 비로소 문학성을 갖는다는 걸 말했을 뿐이다.


이처럼 두 장르, 시와 수필은 상상을 통하여 문학으로 태어난다는 동질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상상이라는 마음의 작용은 시에만 적용되고 수필에서는 상상 작용 없이 현실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기 때문에 상상을 통하여 시가 형성되면 상상과 관계없어 보이는 수필형식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이즘 들어 늘고 있다. 수필은 시와 달리 행과 연의 배열이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번엔 수필을 시처럼 쓰는 이유를 알아보자. 이는 수필의 특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수필의 특성


수필이 무형식의 문학이라는 어설픈 정의로 야기된 몇 가지 문제 중 하나가 수필을 시의 형태를 빌려 써도 무관하다는 그릇된 생각이다. 시의 형태란 행과 연을 구분하여 운율을 맞추는 것을 이름인데 산문으로서의 수필은 그런 형식으로는 일관할 수 없다. 어느 한 대목을 그런 형식을 빌려 쓸 수는 있겠지만 글 전체를 시형을 빌려 쓴다면 산문으로서의 성격을 잃게 될 것이다. 때로 시적인 소설도 볼 수 있다. 이효석의 산이나 메밀꽃 필 무렵 같은 것은 시적 소설로 평가 받고 있다. 그것은 서술 방식이 시형詩形을 닮아서가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용적인 문제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절語節별로 혹은 문장 단위로 행을 바꾸고 연을 만들어 마치 시를 쓰듯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의 행과 연은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이므로 만일 수필을 본래 의미대로 행과 연에 맞춘다면 이는 산문으로서의 수필이 아니라 운문으로서의 시로 둔갑할 것이다. 그러니까 운율을 위한 행과 연이 아닌 단순히 읽거나 보기에 편하도록 혹은 필지의 멋(?)으로 수필을 시처럼 행과 연으로 나타냈다면 이는 시도 아니요, 수필도 아닌 잡문이란 평을 벗어날 수 없다. 더구나 산문을 시형에 맞추려면 문장을 생략하거나 축약해야 할 터인데 산문으로서의 수필은 생략된 문장이 아닌 완벽한 문장을 요구한다는 것을 인지하여야 한다.


수필과 시의 이질성


우선 시는 운문 문학이고 수필은 교술 문학이다. 시가 운율을 기본으로 하여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문학이라고 한다면 수필은 메시지를 통하여 가르치고 깨우쳐 인도引導하는 문학이다.


문학을 운문 문학과 산문 문학으로 나누던 아리스토텔레스의 2분법 이후에 명상록, 인생론 등 많은 명저가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명저(문학)는 시나 소설로 분류할 수 없었으므로 오랜 동안 문학자와 학자들이 숙고한 끝에 교술 문학을 설정하여 문학의 3분법시대를 열었다. 이 교술 문학이 오늘의 수필문학이다. 이 교술 문학은, 서정 문학이나 사사문학과 같이 독자들을 이해시키고 공감을 얻어 감명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메시지를 전달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 메시지대로 행동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문학이다. 이것이 시와 수필의 다른 점이다.


수필의 성격이 이러하니 작가가 말하려는 생각과 감정을 오차誤差없이 독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호한 표현이나 개인 상징적인 언어, 과도한 생략과 비약은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수필에서는 시의 기법으로 즐겨 쓰는 상징적 표현, 은유, 대유, 생략, 비약 등은 극도로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다.

결론

시와 수필은 상상想像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이란 동질성을 갖는다. 그러나 각자 다른 장르이므로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운문인 시가 산문인 수필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거나 산문인 수필이 운문인 시의 형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장르의 전환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는 시다운, 수필은 수필다운 형식을 가져야 한다. 다른 장르의 형식을 섣불리 모방하면 잡문이란 평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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