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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이미저리의 원형과 수사학적 기법을 잘 활용해야...
2017년 05월 22일 23시 11분  조회:2304  추천:0  작성자: 죽림


2) 형식과 기법

① 형식

시짓기에서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큰 줄기로 보아 짧은 서정시인지 서사시인지, 근자에 유행하는 장시, 연작시, 산문시 등 어떤 것을 쓰든지 그것은 작가가 주제나 소재에 대한 접근 의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가지로 볼 때 시 한편 한편이 모두 그 작품만의 고유하고 유일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지구에 태어나는 인간이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완성된 시 한편도 그것만의 고유하며 유일한 형식을 지니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이 동일한 제목, 또 동일한 주제로 비슷한 길이의 서정시를 또 한편 썼다고 하자. 그것도 엄연히 내용상 형식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게 된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시의 무한한 형식적인 실험이 가능하다는 뜻도 담겨 있다.

한시(漢詩)나 영시(英詩)의 경우, 자유시일지라도 글자수나, 운(韻)등을 제각기 갖추어야하는 그 나름의 법칙이 있지만 우리 시의 경우, 외형상 그같은 제약이 없다.

자유시에서 외형상의 형식으로 쉽게 구별되는 것은 연(聯)의 구분에서 찾을 수 있다. 연 구분이 없이 전연(全聯)으로 된 것도 있다. 한 연을 몇 행으로 마무리 지었는가에 따라 형태상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김소월(金素月)의 7·5조의 시들은 시조의 정형성을 잘 살려내 자유시이다. 정형성의 제한을 극복, 오히려 현대시로서 우리말의 멋을 잘 살려낸 것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부분

이 시에서 7·5조가 제1, 제2행으로 나누어진 것과 제3행에서 묶인 것은 이 시에 대한 작자의 기법에 해당한다. 작자는 형태상의 변화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 내재율로서 호흡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 내재율로서, 호흡의 장단이나 활음에 따른 성조(聲調) 등을 감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작자가 무엇에 역점을 두고 지었는가에 대한 평가는 감상하는 자의 몫이다.

소위 모더니즘을 표방했던 이상(李箱)의 「烏瞰圖(오감도)」는 현대시란 이름으로 시를 짓던 한국문단에 독특한 개성의 시를 제시했다. 발상에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대담한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시의 내용에서도 그 줄거리나 주제를 파악하는데 의견이 분분했고, 오늘에까지도 비평가들의 연구대상에 올라있는 것이다. 특히 이상이 일련의 시에서 시도한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붙여쓰기나 산문화한 구문이 연속으로 네모꼴의 형태 속에 채워 넣은 「꽃나무」같은 시가 있는가 하면 아라비아 숫자를 거꾸로 표시하거나 구문의 순서를 뒤에서부터 읽어야하는 것도 있다.

위의 김소월이나 이상이 시도했던 형식에 대한 시도는 한국 현대시의 형식성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깨고 무한한 실험의식을 추구함으로써 오늘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며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② 기법

시짓기의 기법은 언어의 수사학적 활용에 해당한다. 이는 무쇠를 용광로에 넣었다가 새로이 기능적 역할을 해낼 수 있는 형태로 주조(鑄造)해 내는 것처럼 시인은 어떤 수사학을 동원해 시적 의도를 완성시킬 수 있는가에 심혈을 기울인다. 도예가가 흙을 빚어 작품을 완성해내듯이 시인은 언어를 빚어 작품을 완성시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이 언어매체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에 문장마다, 시구마다 ① 문법적인 요건 ② 논리적인 요건을 전제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법적인 요건이란 우리 글의 문법에 맞는 규칙을 지키는 일이다. 이 경우 시인들이 문법 규칙을 일부 벗어나고 관용적인 활용, 또는 의도적인 변형을 일삼는 경우가 있으나 초심자에겐 절대로 경계할 일이다.

논리적 요건이란 사람의 감정과 사상, 지향 의지 따위를 이치에 맞고 합리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이 경우 외형적이고 과학적인 논리보다는 심리적인 논리 전개가 공감을 줄 수 있는 것에 유의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의 기법에서 수사학적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I. A. 리챠즈가 지적한 대로 현대시를 분석, 감상, 비평하는 데는 수사학적 방법에 대한 역(逆)추적에 해당한다는 데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시에 드러나는 에스프리를 분석하고 이미저리의 원형을 해부하는 것이다. 시의 시상이나 역사 혹은 사회성과의 관계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의 시상이나 역사 혹은 사회성과의 관계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의 내면에 흐르는 심리적 의도와 작품마다 적용되는 고유의 수법에까지 수사학적 차원의 분석, 감식하는 과정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시짓기에서 시인의 반의무적이리 만큼 빈번히 활용되는 비유법 몇 가지를 예문을 들어 설명한다.

㉠직유(simile)

하나의 사물을 그 의미나 성질을 다른 사물로 설명, 인지시키는 방법이다. 즉, 두 가지 사물을 비교하여 형용하는 수사법이다.

두 가지 사물을 대비하여 견주어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무엇을 '―같다', '―처럼', '듯(이)', '마냥', '인양'등을 사용하여 동등하게 관계지우는 역할을 한다. 표현코자 하는 주(主) 사물을 그와 유사한 사물에 직결시켜 주된 사물을 강조하거나 그 개념을 선명히 하며 나아가서 증의(增義)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단순한 방법으로 단순하고 일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속된 표현이 될 가능성이 짙기 때문에 항상 참신한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령 '보름달 같은 얼굴'이니 '갈대와 같은 여자의 마음'이니 하는 직유가 시에 쓰였다면 이것은 진부한 표현이 되고 만다.


아릿다운 그아미(娥媚)
높게 흔들리우며
그石속 〈같은〉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번영로, 「논개(論介)」부분

파도가 산맥의 발목을 놓치고 썰물을 따라간다.
보아란 듯이, 상수리묵 〈같은〉뻘밭으로 간다.

─이향아, 「파도와 산맥」부분


「논개」의 〈같은〉은 석류 속이 붉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직유로서의 효과가 직감으로 들어온다. 「파도와 산맥」의 〈같은〉은 '상수리 묵'에 대한 외형상의 개념이 없을 경우 읽는 이는 애매해진다. 그러나 읽는 이는 비유된 '뻘 밭'에서 '상수리 묵'의 모습을 연상하고 유추할 수 있는 감상 능력을 주게 된다.

「논개」에서는 색깔로써 변용시키고 있고 「파도와 산맥」에선 형태로써 변용시키고 있다. 직유에서는 이 외에도 소리, 향기, 관념 등을 자주 연결시킨다.

이처럼 직유는 '같은', '처럼'등의 관계사로 이뤄지는 것이다.

㉡ 은유(metaphor)

은유란 비유법 중에서 가장 고도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특히 문학의 테두리에서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은유 자체가 여러 가지 비유법을 총괄하는 의의를 지니기도 한다.

어반(W. M. Urban)은 「언어와 사실성」에서 언어의 발달 과정을 다음과 같이 나눈다. 첫째 모방적(疑聲)이거나, 모사적 단계, 둘째 유추적인 단계, 셋째 상징적 단계가 그것이다. 제1단계는 단순한 서술에 해당하고 제2단계는 직유의 비유가 성립된다. 언어의 비유적 기능이 드러난다. 다음 제3단계에 오면 은유로써 복잡한, 그래서 다양하게 상징성을 구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

상징적 단계가 가장 고도의 비유법이라 함은 직유가 A=B, 혹은 A≒B의 표현이 된다면 은유는 'A는 B이다'로 나타낸다. A≒B를 직유, (A=B는 은유로 표시하기도 함) =나 ≒의 표시는 같거나 유사한 상태로 이끌지만 'A는 B이다'라고 할 때 A가 본질적으로 바뀌어 B에 접근하므로써 A도 아니고 B도 아닌 새로운 본질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은유는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으로 모든 사물이나 관념에 대한 유사성과, 상상력을 폭 넓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 심장하고 개성적이며 신선감을 주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남성은 늑대
여성은 여우

이는 속성, 개성 따위를 짐승에 비유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예가 된다. 일찍이 우화에서 보여 주었던 것으로 사람의 인격과 인간성을 은유화한 것이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김동명,「내마음은」부분

네 슬픔이 오 비누거품이구나

─안수환, 「廣德山·3」부분

이같은 시구가 있다면 이는 불가시적인 관념을 시각적으로 불 수 있게 은유화한 것이다. 사물의 본질, 관성, 개념 따위를 유사하거나 같은 의미로 결부시키게 된다.

사람이 아니올씨다.
짐승이 아니올씨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 난
버섯이 올씨다. 버섯이 올씨다.

─한하운,「나」부분

이 작품은 나환자였던 시인 한하운(韓何雲)이 자학적이리만큼 자신의 천형을 저주하는 대목이다.

이 시는 시의 내용 전부가 제목 「나」를 은유화하고 있다.


내 인생은 마비된 희망속의 잠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열려 있는
일찍이 빛났던 두 눈동자
귀는 쓰레기 통
입은 함정

─정현종,「납속의 희망」부분

상징보다는 우화성(寓話性)을 취한 은유이다. 제목은 작자가 생각하는 관념이나 상상의 은유이다. "마비된 희망"과 "일찌기 빛났던"의 문맥으로 보아 "납속의 희망"이란 기대하는 어떤 희망이 아니라 이미 의욕이 끊긴 좌절된 체험적 인식을 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은유는 유사성과 동일성을 文面에 드러나는 내용과 그 속의 뜻하는 바를 나타내는 '겉과 속'의 관계인 것이다.

㉢ 의성·의태

原始語의 일차적 기능은 의성어나 의태어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이 짙다. 짐승이나 새들의 소리를 흉내내어 감정을 나타내고 의사 소통의 구실로 삼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시에 와서도 이 의성어(onomatopoeia)나 의태어(mimesis)의 활용은 과거의 노래하는 시로 불리우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詩語로서 혹은 시의 기법으로 매우 유용한 위치를 차지한다.


──삐이 뱃쫑! 뱃쫑
하는 놈도 있고
──호을 호로롯
하고 우는 놈도 있고
──찌이잇 잴잴잴!
하는 놈도 있고 온통 산새들이 야단이었습니다.

─박두진, 「사슴」부분

바다, 바다, 바다, 바다,
無窮動 바다,
차츰 그 바다에 가까이 가서야
목청이 열렸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
마치 처음으로 질러보는 음성인양,
진정 「아아」라는
母音이 있기에 구원이 되는 셈.

─박희진, 「바다」부분

"삐이 뱃쫑" "호을 호로롯" "찌이잇 잴잴잴" 등은 直喩的이다. 여러 가지 새들의 소리를 직접 흉내낸 것으로 낱말로서의 의미는 완전 배재되어 있다. 오직 소리만이 존재한다. 즉, voice가 아닌 sound의 상징인 것이다. 반면 박희진의 「바다」는 바다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간접적으로 擬聲化시킨 것이다. 즉, 실제의 소리가 아닌 관념상의 의미로 대치시킨 것이다. 작자의 恣意的인 음성기호로서 '바다'가 쓰였다. 이는 이센손(Jon Eisenson)이 그의 「The paychology of speech」의 개념으로 든 ㉠口頭表現(oral symbol) ㉡ 몸짓(gesture visible word) 중에서 ㉠에 해당하다.

① 텨-얼썩, 텨-얼썩, 턱, 쏴……아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부분

② 바다, 바다, 바다, 바다,

─박희진, 「바다」 부분

③ 옥쪼록 빠쪼록 조래 조래……

옥쪼록 빠쪼록 조래 조래……

─신석정,「Nostalgia」 부분

결국 ②는 '바다;의 뜻이 아닌 바다의 소리를 은유로 쓴 것인데, 반복되는 리듬感으로 파도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소리뿐만이 아닌 의태적인 이미지도 동시에 제시된다. 이 역시 바다를 간접적으로 연상되게 한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의 경우도 실제로는 작자의 감탄사를 바다소리로 의성화시킨 간접적인 은유이며 상징이다. ③은 강남으로 돌아갈 제비들의 망향가로 들린다는 의성어로 나타낸 것이다. 심리적으로 향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흰 옷자락 아슴아슴
사라지는 저녁달
썩은 초가 지붕에
하얗게 일어서

─박목월, 「박꽃」 부분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僧舞」 부분


방점부분 "아슴아슴"과 "나빌레라"는 모두 간접적인 의태어들이다.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옷자락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아슴아슴"하다는 형용태로 나타냈고 '나빌레라'는 춤추는 모습을 동작태로 나타낸 것이다.

의성어나 의태어는 단순히 소리를 모방하고 몸짓을 흉내내는 것만이 아니라 직유나 은유의 수법으로 시 속에 끌여들인 것을 볼 수 있다. 말라르메(Mallarme)가 "시는 아이디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로 쓴다"고 언어의 외형적 기능──모음조화, 자음의 결합, 韻, 리듬, 율격등──에 詩的 성취욕을 보였었다. 즉, 內容語(content word)에 대한 고의적 의미 부여를 경계한 것이다. 이에 앞서 소위 순수시(pure poetry)라는 것도 언어의 내용보다는 "음악처럼 직감적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추구한 사실도 유의해야 한다. 청각적 자극이나 시각적 자극에 관심을 두어 의성어나 의태어의 시적 활용 가치가 많아진 것이다.

㉣ 기타

위에 소개한 몇 가지 비유법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① 안으로 아슴한 설은 눈섭들을 하고

한그루 풀,
한덩이 돌,

-유치환, 「역투(逆投)」 부분

②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김소월,「山有花」 부분

③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 「초혼」 부분


④ 낙엽끼리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호, 「낙엽끼리 모여산다」 부분

①은 압운법으로 볼 때 두운(頭韻)을 취한 것이요 ②는 각운(脚韻)을 취했다. '한 그루', '한 덩이'의 '한'이나, '꽃피네', '피네'의 '∼피네' 등을 압운법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외형률의 압축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우리말 고유의 내적 운율미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는 반복의 대구(對句), 대위(對位) 혹은 점층적인 기법에 의해 시의 형태미와 내적 운율미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③은 "이름이여!"를 절마다 반복함으로써 호소력을 강화시킨다. ④는 두운을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절의 반복에 간결하고 깡마른 낙엽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① 뛰노는 바다 앞엔 날개를 펴고
검은 구름 앞엔 태양을 부르라.

② 달이 지면
아무도 없는 뜰은 외로워

달이 뜨면
피리 소리 향그런 풀 밭.

①은 글귀가 서로 맞서서 같은 정조(情調)의 반복으로 대구를 이룬다. 아름다운 조화미를 창조하는 대구법이다. ②는 서로 반대되는 정취의 세계가 서로 대조되어 흥겨운 時의 맛을 돋군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明暗」의 대조에 의하여 들의 정취를 나타내는 대조법이다. 대구법은 두 가지 사실, 현상 혹은 이미지를 함계 연결시켜 나타낸다. 여기에서 문법적인 대구나 대조보다도 내적인 정조(情操)를 정리하고, 합리적으로 종합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쟝·콕토, 「귀」


"귀"가 "소라껍질"로 과장 비유되었으나 조금도 과장된 뉘앙스를 풍기지 않는다. 귀의 형상을 바닷가에 뒹구는 소라껍질로서 대신해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그 바다에서 가까이 들리는 파도소리와 멀리 수평선 쪽에서도 무언가 들린다고 인식되는 순간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한없이 펼쳐지는 시적 상상력이 발동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너털웃음은
진정 쌀가마가 되고 진정 진정 돼지 뒷다리가 되고,
당신의 너털웃음은 여러 가지로 민족이 되는 꽃나무 앞에서
예이쌍 계집이란 금테를 둘른 계집이건.
자가용에 무거운 몸을 실은 계집이건 앞치마를 둘른 계집이건,
유듀분면이건.
바람과
꽃과 달과 에리지

그리고 E. A. 포우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계집이건, 그리고.

-전영경, 「인생이란 무엇인가 묻든 주책없는 靑年」 부분

역설적인 전개이다. 이 시는 6·25직후 좌절하고 찌든 사람들의 감성을 수평적으로 시화한 것이다. 무지하고 천박한 언어들을 엮어서 사람들의 심중에 흐르는 고결함, 절실함, 진실함의 본질을 역설적으로 추출해 낸 것이다. 당시의 시민의식이 어느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가를 보여 주기도 한다.

역설법(Pradox)은 역어법, 반어법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번역되어 쓰고 있다.

이는 사상이나 감정을 정면으로 대응시키지 않고 반대로 말하는 수법이다. 희롱조가 되고, 준엄히 잘라하는 투가 되기도 한다. 그 내면에 있는 진실을 강조하게 된다.

인간의 감정이나 사상 또는 세태의 미묘한 것들을 진실되게 강조하는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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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전동균(1962∼)

일찍이 그는 게으른 거지였다
한 잔의 술과 따뜻한 잠자리를 위하여
도둑질을 일삼았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왕으로 법을 구하는 탁발승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나기도 하였다
하늘의 별을 보고
땅과 사람의 운명을 점친 적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눈먼 떠돌이 악사가 되어
온 땅이 바다고 사막인 이 세상을
홀로 지나가고 있으니

그가 지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흐름을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저 허공의 구름들처럼
말 없는 것들, 쓸쓸하게 잠든 것들을 열애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거지였다가 왕이었다가 탁발승이었다가. 하늘의 별을 보고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었다가 지금은 눈먼 떠돌이 악사.
 

 

‘여행자’는 스케일이 큰 시다. 전지적(全知的) 화자가, 공간만 옮겨 다니는 게 아니라 생을 거듭하며 한없이 광활한 시간을 지나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정말 환생이라는 게 있을까? 그것은 이 지친 떠돌이 악사의 환상이 아닐까? 눈멀어 그 자신은 볼 수 없는, 머리 위 허공 구름 같은. 


어떤 생도 ‘저 허공의 구름들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을 테지만, 이 시 ‘여행자’는 그런 생에 덧없음이 아니라 가없음의 후광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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