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
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예로부터 지중해 사람들은 선원들을 인도할 수
있는 거대한 기념물을 항구에 세웠다. 주로
엄청난 규모의 거상이나 먼곳에서도 보이는
신전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그러한 건물이나 거상이
항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배들이 낮에만 도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밤에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선박들의 선원이 항구를
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2백80년경에
파로스섬에 고대 역사상 가장 높은 등대를 건설하게 된 요인이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 된 등대의 높이가 120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오늘날의 등대처럼 가늘고 둥근
모습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빌딩처럼 지어졌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져서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그 둥근 모형 안에 거대한 화로가 장치되어 밤에는
내내 불을 피웠다. 땔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램프 뒤에는 거대한 반사용 거울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한다.
파로스 등대는 단순한 항해의 표시였던 것은 아니었고, 등대
내부에는 300개 이상의 방이 있어서 많은 수의 군인들이 묵었고
따라서 성곽의 역할까지 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있다.
등대는 높이가 상당했는데도 꼭대기까지 연결하는 계단이
없었으며 나선형으로 비스듬하게 길을 만들어 말들이 다닐
정도였고 등대 꼭대기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이시스 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아랍인들이 7세기에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이 등대는 빛이 너무 밝아
반사경의 불빛이 55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었으며, 맑게 개인
날에는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의 거리 모습이 거울에 비칠
정도였다. 이집트가 아랍인에 의해 점령을 당하고도 상당 기간 동안
이 등대는 잘 보존이 되었다. 그러나 850년 경 신성로마 제국과
이슬람교도간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파로스 등대는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화로스 등대는 이슬람 교도들에게는 아주
유리했으나 로마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즉
로마군의 상황이 이 등대의 거울에 의해 낱낱이 관찰당한 것이었다.
로마 황제는 싸움이 이처럼 불리하자 알렉산드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칼리프(회교도의 왕)에게 첩자를 보내, 등대 밑에 엄청남 금은
보화가 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칼리프는 즉시 등대 밑을 팠다.
그러나 적의 계략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반사경이 깨진 상태였고
다시 원상태로 회복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파로스 등대는 이때부터 등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신 화로스
등대는 이슬람교의 사원으로 전락을 해버렸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는
카이로가 번창함에 따라 점점 쇠퇴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고 등대는
폐허가 되어 버렸다. 1375년 삼각주를 휩쓴 엄청난 대지진으로 화로스
등대는 그나마의 모습마져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지진은
후유증이 커서 지진 지역을 정리하는데만도 약 100년이 걸렸다고 한다.
등대의 흔적이 없어지자 자연히 사람들의 입에서도 파로스 등대 이야기는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묻혀 지내던 파로스 등대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고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겨우 등대가
있던 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 크지 않던 섬에 그렇게 웅장한 등대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으로 그렇게 밝은 빛을 낼 수 있었으며 또 렌즈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등대의 건물에 방이 수백 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혹시 작은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876년에 이루어진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를 쇄국주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한 사건이었다. 그뒤 개항장을
드나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은 이권을 먼저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용기를 얻은 일본은
개항장을 통하여 한일 양국간의 선박 왕래가 날이 갈수록
빈번해졌는데 한국 연해의 요소에 등대나 초표가 설치되지
않아 불편한 점이 많다며 등대건립을 촉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온다.
또한 등대건설위치선정을 위한 측량선 인천 도착 날짜를 통보하니
협조원을 보내라는 독촉도 있었으며 각 항구에 출입하는 상선으로부터
징수하는 관세를 등대건설에 충용하라는 제의도 있었다. 또한 러시아
영국으로부터 비슷한 요구가 있었다.
등대의 효용성을 알고 있었지만 극심한 재정난으로 난감해 오던 우리
정부는 결국 열강의 강권에 못 이겨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海關 燈臺局)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北長子) 등대와 백암(白岩) 등표(燈標) 건설에
착수해 1903년 6월에 이를 각각 완공하였다. 이것이 우리 나라
등대의 효시인 것이다. 결국 우리 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의
이양선(異樣船)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기 위한 바다의 이정표(里程標)로
등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