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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유)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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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이름 | 유두(流頭) |
다른이름 | 유두날 |
날짜 | 음력 6월 15일 |
2016년 | 7월 18일 (월) |
2017년 | 8월 6일 (일) |
2018년 | 7월 27일 (금) |
2019년 | 7월 17일 (수) |
축제 | 유두면 · 상화병 · 수단 |
유두(流頭)는, 우리 민족의 전통 세시풍속의 하나이다. 음력 유월 보름(6월 15일)으로 맑은 개울을 찾아가서 목욕을 하고, 특히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빗은 다음 그 빗을 벼랑에 던져버리면 그 해의 액운을 없애준다고 믿었다.
유두에 대한 기록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둔촌잡영》(遁村雜詠), 《목은집》(牧隱集) 등 고려, 조선 시대의 문집과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두루 보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및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는 고려 명종 때의 학자 김극기(金克己)의 문집을 인용해 “경주 풍속에,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어 버린다. 그리고 계음(禊飮)을 유두연(流頭宴)이라 한다.”라 하여 신라 시대의 풍속으로 설명하였다.
1년 열두 달의 풍속을 노래한 고려가요 《동동》에서도 "六月ㅅ 보로매 아으 별해 바룐 빗 다호라/것거 바리신 後에 디니실 한 부니 업스샷다"(6월 보름에 벼랑에 버린 빗 같아라/꺾어 버려진 뒤로는 다시 주워 가질 사람이 없네)라는 구절이 있어, 고려 시대에는 이미 수릿날과 함께 보편적인 명절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유두음(流頭飮)에 대해 “명종 15년 6월 계축일(14일)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인일(15일)에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崔東秀)와 함께 광진사에 모여서 유두음을 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 풍속에는 6월 15일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음으로써 좋지 못한 일을 제거한다고 했으며, 이로 인해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이것을 유두음이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의 학자 정동유(鄭東愈)는 《주영편》(晝永編)에서 우리나라 명절 중에 오직 유두만이 고유의 풍속이고, 그밖의 것은 다 중국에서 유래한 날이라고 단정지어 말했다.
유두(流頭)는 우리 겨레가 즐겼던 명절로 음력 6월 15일입니다. 유두는 유둣날이라고도 하는데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의 준말이지요. 이것은 신라 때부터 있었던 풍속인데 가장 원기가 왕성한 곳으로 보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면 액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특히 식구나 이웃과 같이 머리를 감고, 술을 돌려 마심으로써 공동체임을 확인했습니다.
유두의 시절 음식은 햇밀가루로 만든 국수와 떡, 제철을 맞은 참외와 수박이 있는데, 이 음식으로 조상신이나 땅의 신 등에게 유두제사(유두천신)를 지낸 후 나누어 먹습니다. 이렇게 하면 악귀를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유두날엔 참외꽃이 떨어지고, 참외가 열릴 무렵 국수를 삶아 참외밭에 가서 참외 덩쿨에 국수 가락을 걸치면서 "외가 주렁주렁 내리소" 하고 비는 외제를 지냅니다. 유두일에 해먹는 음식으론 유두국수가 있었는데 햇밀로 국수를 눌러 닭국물에 말아 먹는 것입니다. 그밖에 구절판, 상화병, 밀쌈 ,편수, 미만두, 수단, 건단, 연병이란 것도 먹었지요.
유둣날은 삼월삼짇날, 칠월 칠석, 구월 중양절과 함께 우리 겨레의 명절이었으나 현대에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수돗물로 머리 감는 이 시대에 유두의 의미는 잊혔지만 불편했던 이웃과 함께 햇밀 국수라도 나눠 먹음으로써 서로 갈등을 깨끗이 풀고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명절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면 어떨는지요? 그래서 유두에는 시절 음식이라도 같이 먹으며 더불어 살려던 옛 조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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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6월 15일로, 유두날·물맞이라고도 한다. 동류두목욕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날 맑은 개울에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 뒤 유두음식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고 나쁜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유두 무렵에는 참외 등과 같은 햇과일이 나오므로 햇과일·국수·떡 등을 사당에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유두천신이라고 한다. 이날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에서는 논이나 밭에 가서 농사를 관장하는 용신과 농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찰떡을 해서 물꼬나 둑 밑에 한 덩이씩 놓고, 물이 새지 않고 농사가 잘 되기를 빈다. 보리나 밀이 나는 때이므로 밀가루 적이나 밀떡을 논에 뿌려 풍작을 빌고 일꾼들과 나누어 먹는다.
유두음식에는 유두면·수단·건단·연병 등이 있다. 유두면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슬처럼 만들어 오색으로 물들인 뒤 3개를 색실로 꿰어 허리에 차고 다니거나 대문 위에 걸어둔 것으로, 지금의 긴 국수와는 모양이 매우 다르다. 이는 잡귀의 출입을 막고 액을 쫓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 풍속은 전하지 않으나, 지금도 유두날에 밀국수를 해먹으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여긴다.
수단은 찹쌀로 만든 새알을 차가운 꿀물에 타먹는 것이며, 얼음물에 타지 않고 그냥 먹는 것은 건단이라 한다. 연병은 밀가루 반죽을 넓게 밀어 기름에 튀기거나 깨와 콩을 묻혀 꿀을 바른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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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액막이는 현대의 관점에서는 미신에 불과하지만, 병과 재난에 대해 뚜렷한 대책이 없던 시기에는 일종의 신앙이자 심리적 위안을 주는 행위였다. 한국에서는 액막이가 주로 절기에 따라 행해졌다. 조선시대의 궁중에서는 설날에 문배라고 하여 금갑이장군상을 대궐문 양쪽에 붙였다. 민간에서는 벽 위에 닭과 호랑이 그림을 붙여 액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해에 3재가 든 사람은 머리가 셋이고 몸뚱이가 하나인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였다. 이때 3재란 수재·화재·풍재 또는 병난·질역·기근을 가리킨다. 5월 5일 단오에는 여자들이 창포물로 머리를 감고, 두통을 앓지 않는다 하여 창포뿌리를 깎아 비녀로써 머리에 꽂았다. 동짓날에는 팥죽을 먹고 그것을 문짝에 뿌려 벽사한 풍속이 있었다. 또 마을 단위의 액막이로 동제가 있다.
도액(度厄)·제액(除厄)이라고도 한다.
액막이는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있는데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미신에 불과하지만, 병과 재난에 대해 뚜렷한 대책이 없던 당시에는 일종의 신앙이자 심리적으로 큰 위안을 주는 행위였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유감주술(類感呪術)을 이용하거나 악귀보다 더 강력한 상징물·색깔·냄새 등을 몸이나 몸 가까이에 두는 것으로 십자가, 각종 부적 및 신라에서 역신(疫神)을 쫓았다는 처용의 형상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또 중국에서는 새해 첫날 닭울음 소리와 함께 일어나 폭죽을 터뜨려 악귀를 쫓는 일종의 청각형(聽覺型) 액막이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액막이가 주로 절기에 따라 행해졌는데, 한 해를 시작하는 정월에 많이 몰려 있다.
조선시대의 궁중에서는 설날에 문배(門排)라고 하여 금갑이장군상(金甲二將軍像)을 대궐문 양쪽에 붙였으며, 또 종규(鍾馗)가 귀신 잡는 상과 귀두(鬼頭) 모양을 문과 중방에 붙여 액과 돌림병을 물리쳤다. 민간에서는 벽 위에 닭과 호랑이 그림을 붙여 액을 물리쳤으며, 금줄을 치고 체를 마루벽이나 뜰에 걸어서 초하룻날 밤에 내려오는 야광귀(夜光鬼)를 물리쳤다. 그리고 그해에 3재(三災)가 든 사람은 머리가 셋이고 몸뚱이가 하나인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였는데, 이때 3재란 수재(水災)·화재(火災)·풍재(風災) 또는 병난(兵難)·질역(疾疫)·기근(飢饉)을 가리킨다.
나쁜 병을 물리치기 위해 설날에 지난 1년간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황혼녁에 문밖에서 태우는 소발(燒髮) 액막이도 있었다. 아이들의 나이가 제웅직성(直星)에 들면(남자 10세, 여자 11세) 정월 14일에 제웅 안에 돈과 성명, 출생년의 간지(干支)가 적힌 종이를 넣어 길가에 버림으로써 그해의 액을 막았다. 또 아이들은 청색·홍색·황색 등을 칠한 3개의 호로(葫蘆 : 호리병박)를 색실로 끈을 만들어 차고 다니다가 이날 밤에 길가에 몰래 버려 액을 막았다.
정월 15일에는 '액', '송액'(送厄), '송액영복'(送厄迎福) 등을 쓴 액연(厄鳶)을 띄워 놀다가 저녁 무렵에 줄을 끊어서 그해의 재액을 막았다(대보름). 5월 5일 단오에는 여자들이 창포(菖蒲)물로 머리를 감고, 두통을 앓지 않는다 하여 창포뿌리를 깎아 비녀로써 머리에 꽂았는데, 더러는 수복(壽福)을 기원하고 재액을 물리치기 위해 그 비녀에 '壽'자나 '福'자를 새기고 끝에 연지를 발랐다.
상류층에서는 관상감에서 만든, 주사(朱砂)로 박은 천중적부(天中赤符 : 또는 端午符)를 문설주에 붙여 재액을 막았다. 6월 15일 유두의 액막이에 관해서는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경주의 유속(遺俗)에 의하면 6월 보름날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가서 머리를 감아 불상(不祥)한 것을 씻어버린다. 그리고 액막이로 모여 마시는 술자리, 즉 계음을 유두연(流頭宴)이라 했으니 국속(國俗)에는 이로 인하여 유두라는 속절(俗節)이 생겼다." 또 이날 밀가루로 구슬 모양의 유두면(流頭麵)을 만들어 먹거나, 오색실로 유두면을 꿰어 차고 다님으로써 액막이를 했다.
6월 이후의 액막이로 두드러진 것은 동짓날에 팥죽을 먹고 그것을 문짝에 뿌려 벽사한 풍속을 들 수 있다. 또 마을 단위의 액막이로 동제(洞祭)가 있다. 액막이의 의식이 이렇게 6월 이전에 몰려 있는 것은 액막이의 예방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액막이의 주대상인 각종 질병과 전염병이 대부분 여름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과학문명이 한국에 유입된 이후에 액막이는 벽사와 질병예방의 본래적 기능에서 탈피해 고유의 풍속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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