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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의 기획사업인 <인접 예술과의 만남> 그 두 번째 자리가 <스페인, 중남미 음유시에의 초대-스무 개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란 이름으로 마련되고 있다.
물론 그 자리에선 네루다의 시도 불려지고 낭송되겠지만 음유시가 케케묵은 미분화시대의 무슨 원시적 유물이 아니라 엄연한 현대적 장르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거기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네루다가 누군가. 우리에게도 친숙한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의 현대시인이 아닌가.
시로서의 자율성을 잃고 있다는 뜻으로 형태적 산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문적 삶의 와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시들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물론 그 시대는 노래와 시가 분리되지 않았던 그야말로 <몸시>의 시대일 수 있었고, 누구나 함께 시를 향유할 수 있는 가장 행복했던 문학의 공존기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원시적 미분화의 상태일 따름이다.
아기의 눈동자가 순수 그 자체이며 아기의 말이 엉뚱하다고 해서 그 자체가 시는 아니듯이 말이다. <눈>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귀>를 위한 또 하나의 기능을 망각해 왔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 소리! 소리가 없었다. 특히 오늘의 우리 한국 현대시는 그간 이른바 말 만들기, 수사법, 이미지 만들기에만 줄곧 매달려 왔다. 그것만이 현대성이라는 생각으로 알맹이 없는 방법적 추구에만 함몰해 있었다. 가시적인 구조물이 모두라고 생각해 온 혐의가 짙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울림>이 없다는 뜻이다. <에코>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서정성의 상실을 뜻한다. 문자만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논리와 계산을 동반한다는 뜻이며, 소리로 다가간다는 것은 리듬과 멜로디로 다가간다는 뜻이다. 그만큼 생체적이어서 에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에코는 본래 소리의 본질이다. 이 두 개의 세계를 아우르는 자리에 시가 있다. 그게 시의 자율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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