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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시인 - 베르톨트 브레히트
2017년 09월 03일 00시 35분  조회:3613  추천:0  작성자: 죽림

 

[시가 있는 월요일]

            살아남은 자의 슬픔

                                  /매일경제 허연 기자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作 <살아남은 자의 슬픔>

 

독일 출신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파란 많은 삶을 살았다. 오죽했으면 "구두보다 나라를 자주 바꿨다"는 말을 남겼을까. 브레히트는 젊은 시절, 나치를 피해 핀란드와 러시아를 전전하다 미국에 정착한다. 하지만 매카시즘에 휘말려 미국에서도 추방당한 후 스위스를 거쳐 동베를린에서 생을 마감한다.

 

시에는 사연이 있다. 1941년 브레히트는 턱밑까지 진격해온 나치를 피해 모스크바를 탈출하면서 결핵 때문에 거동이 불편한 연인이자 동지인 스테핀을 남겨두고 떠난다. 훗날을 기약했겠지만 스테핀은 결국 결핵병동에서 숨을 거둔다. 스테핀에 대한 죄책감은 이 명작을 탄생시켰다.

 

살아남은 것이 자랑이 아니라 죄스러운 일이 됐던 시대. 그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인간은 역사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가.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작은가.

 

[허연 문화부장(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독일어: Bertolt Brecht, 1898년 2월 10일 ~ 1956년 8월 14일)는 20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극작가, 시인, 그리고 연출가다. 주로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으며,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연극연출에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표현주의를 거친 신즉물주의적(新卽物主義的) 스타일로, 현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과 풍자를 극화한 니힐리스트. 후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생애[편집]

 

독일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지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은 뮌헨에 있는 병원에서 잠시 일했다.

 

전쟁이 끝난 뒤 뮌헨에서 극작가·연출가로 출발하여 후일 베를린으로 나가 막스 라인하르트의 독일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처녀작 희곡 《바르》(1918)와 이어서 제2작 《밤의 북[鼓]》(1919)으로 클라이스트 상을 받았고, 《도시의 정글 속에서》(1923)와 《서푼짜리 오페라》(1928)로 극단에 결정적인 지위를 굳혔는데, 《서푼짜리 오페라》는 무려 100회가 넘는 공연이 베를린에서 있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전쟁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계급에 등을 돌려 차츰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드러내는 극본과 사회주의 소설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하는 좌파작가로 활동했다. 1933년 극우정당인 나치의 집권과 나치가 좌파탄압을 위해 날조한 사건인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미국에 망명했다. 망명 중에 집필한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 《갈릴레이의 일생》(1938),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39), 《코카서스의 백묵원》(1944) 등의 상연으로 새로운 연극의 길을 제시하였다.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도 1947년 12월 극단적인 반공주의인 매카시즘이 불어 브레히트는 다시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이주해야 했다. 당시 많은 동료 좌파작가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택했지만, 그만은 동독을 택했다. 하지만 동독 공산당(SED) 간부들이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동독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하여 풍자시를 쓰기도 했으며, 정부가 인민을 버렸다면서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을 비판하기도 했다. 1956년 8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가족으로는 1929년 결혼한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두 자녀(슈테판, 바바라)가 있다.

 

주요작품[편집]

 

시[편집]

 

브레히트의 주요 시 작품으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기존 가치관에 대한 비판의식, 인간에 대한 사랑,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평화주의가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례로 시 〈1492년〉은 이민을 심사하는 판사가 일부러 쉬운 문제를 내서, 가난한 이탈리아인 가족의 입국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희곡[편집]

 

브레히트는 처음엔 표현주의 작가로 출발하였으나 후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게 되었다. 처녀작인 <바알>, 출세작이 된 귀환병극(歸還兵劇) <밤의 북>, 인간소외의 문제를 앞세운 <도시의 정글>에는 아직 안비바렌트한 도취나 익살, 조소의 빛이 강하지만 차츰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져, 대상에의 거리적(距離的)인 태도는 사회적인 인식을 구하는 새로운 서사적 연극의 주요한 수법인 이화효과(異化效果)를 낳았다. <사나이는 사나이다> 그리고 실지교시(實地敎示)를 중시한 일련의 교육극의 시도는 이미 그러한 지향(志向)을 보인 것이다. 단순한 정감에 흐르지 않는 음악과 극의 새로운 종합을 구하는 방향은 작곡가 바일의 협력을 얻어 <싸구려 오페라>(1928)와 <마하고니시의 흥망>(1930)을 낳았다. <도살장의 성 요한나>와 <모친>은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극이다. 불우한 망명생활 중 그의 연극론은 차츰 체계화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걸작 <배짱 센 어머니와 그 아이들> <푼틸라 나리와 하인 마티> <사천(四川; Szechwan)의 선인(善人)> <코카서스의 백묵원(白墨圓)> <갈릴레이의 생애> 등을 연달아 집필, 전후에는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베를리나 앙상블을 결성하고 실제의 연극활동을 통해서 그의 연극의 혁신적인 의의를 무대 위에서 입증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모았으나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는 도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rtolt-Brecht.jpg

Bertolt Brecht
베르톨트 브레히트

1898.2.10. – 1956.8.14.

 

1. 개요[편집]

독일의 극작가 겸 연출가이며 시인으로도 활동했었다. 독일문학계에서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이름이며 독일문학을 넘어 그야말로 세계 연극계에 한 획을 그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이다. 그가 남긴 무수한 작품들은 그가 떠난 지금도 여전히 연구대상이며 무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그의 극작론은 연극계를 넘어 다른 학문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이다.

2. 생애[편집]

독일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했다. 1차대전에 징집되지 않으려고 뮌헨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지만 결국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병원에서 의무병으로 1달간 근무하였다. 1922년 <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하였으며, 28년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는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마르크스 주의를 받아들여 좌파적 성향을 작품에 이입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실질적으로는 그의 동료들과 공동으로 집필한 작품이 굉장히 많다. 그 예로 <서푼짜리 오페라>의 각본은 거의 대부분 그의 여비서였던 엘리자베스 하우프트만이 영국인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번역한 것을 메인 텍스트로 삼은 것이어서 후에 하우프트만이 공동 저자로 인정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어머니>, <도살장의 성 요한나> 등이 있다. 1933년 나치스가 독일 정권을 장악하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날조하자, 브레히트는 덴마크로 망명하여 정치적 의식을 드러내는 시를 쓰는 한편, 연극 <제3제국의 공포와 빈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등을 썼다.

이후, 1941년 핀란드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미국의 매카시즘 때문에 스위스로 떠나 <안티고네>와 <파리 코뮌의 나날>을 쓰고, 연극론에 대한 개설서 <소사고 원리>를 집필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동독의 동베를린으로 가 자신의 작품들을 연출하면서 후배 연극인을 양성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동독에서도 여전히 체제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작품을 남겼다.

브레히트는 사회주의를 연극 작품에 접목시킨 좌파 극작가로도 유명하지만, 그의 시 작품으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 등이 유명하다. 휴머니즘 속에서 현실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전쟁을 고발하는 내용이 많다.

3. 작품세계[편집]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라는 기법으로 극작계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소격효과는 '생소화 효과', '낯설게하기 효과'로도 알려져 있다. Verfremdung이라는 단어의 철학 번역어가 그 유명한 소외다. 인간소외 현상의 소외. 이런 입장을 따르면 브레히트의 연극이나 시에 관객이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잘못 해석한 셈이다.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나서도 껄끄러운 불편함이 남아서 현실을 비판하기 시작해야 한다.

서사극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내려온 기존 극작기법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연극을 감상할 때의 보통의 태도(연극 무대에 대한 공감, 주인공에 대한 동화, 대리만족 등)들을 부정한다. 대신 연극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낯설게' '관찰하는' 연극을 보여준다. 때문에 관객들 입장에서는 극의 진행을 예상할 수 없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며 감성적인 관람보다는 이성적이며 생각하고 판단하는 관람을 작가가 주문한다. 예술은 자본주의가 현실에서 주체를 소외시키는 것에 대항해야 한다. 즉 현실을 위한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현실을 이성적으로 직시하게 만들어야 한다. 연극은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이 현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너를 속이는 현실에 감정이입하지 말아야 한다 렇게 연극을 통해 관객이 현실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자신이 현실에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연극이 관객을 몰입시키지 않고 소외시키도록 한다. 관객은 현실에 소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연극을 통해 감정이입에 실패하고 소외당하면서 깨닫게 된다. 

아래는 소격효과를 반영하는 예들이다.

- 브레히트는 초기작에서부터 무대에 이런 현수막을 걸었다고 한다. "그렇게 낭만주의적인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지 마시오!"

- 브레히트의 희곡에는 장편의 현실비판적 노래들이 어이없게갑작스레 끼어드는 경우가 많다. 극의 줄거리와 크게 상관도 없으면서 갑자기 현실비판에 들어가기 때문에 몰입을 오히려 방해해버리는데, 이는 소격효과를 위해 의도적으로 장치된 것이다. 

연출을 맡을 당시 배우들에게도 등장인물에 감정이입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초연 후 대히트를 쳤을 때 배우가 억척어멈에 감정이입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판권을 회수하고 동베를린에서 초연 시 브레히트의 아내이자 여배우인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이 억척어멈역으로 재공연하였다. 브레히트에 따르면 연극을 볼 때 그 인물에 대해 관객이 느끼는 답답한 감정에 이입해야 한다. 보는 내내 답답하고 화가 나는 등장인물인 억척어멈 역을 맡은 배우는 그 억척어멈이 실제로 느꼈을 감정인 굳센 의지와 억척스러움, 어떻게든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된다. 또 이렇게 연기해서 관객에게 억척어멈이라는 인물을 동정하게 하면 안 된다. 억척어멈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화를 내고 그러면서 전쟁을 벌이는 현실을 비판하게 되는 관객에 감정이입해서 답답해하고 를 내면서 연기해야 한다. 그래서 억척어멈을 연기하는 배우는 "이 놈의 세상 전쟁나든 말든 어떻게든 나하고 가족들만 잘 살면되지"라는 내용의 대사를 하면서도, "이 미련한 인간아, 전쟁나면 네 가족도 죽고 너도 죽는거야."라고 억척어멈을 비판하고 답답해 하는 입장에서 연기해야 한다. 아이구 브레히트 이놈아 배우들 정신분열 걸리겠다 

때문에 브레히트가 20년대 좌파적 성향을 띄고, 나아가 30년대 '망명문학(Exileliteratur)'의 기수로서 다분히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내놓을 수 있던 것은 그의 연극이론에서부터 이미 보이고 있었다. 다음 그의 말은 그가 연극을 통해 무엇을 추구했으며, 그가 만든 결과물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희곡작가이다. 나는 내가 본 것을 알리고자 한다. 인간시장에서 나는 보았다.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나는, 희곡작가인 나는 그런 것을 알리고자 한다."

생소화 효과는 연극계 뿐만 아니라 관련 인문학에서도 종종 인용이 된다. 심지어는 연극학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역사교육이론에서도 역사 해석과 역사적 사고 증진 등의 방법으로 논의될 정도이니 이 정도면 한 획을 그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나무위키에서도 자주 나오는 용어인 제 4의 벽 역시 브레히트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최초는 아니다)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독일어권 작가는 '막스 프리슈(Max Frisch)'나 이른바 '희비극'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uerrenmatt)' 등을 꼽을 수 있다. 브레히트 바로 다음 세대 독일어권 연극계를 잡았던 작가들이다. 참고로 이 두 사람은 모두 스위스인이다.

4. 애증의 대상, 동독[편집]

앞서 언급하였듯이 브레히트는 망명생활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두 개의 독일 중 사회주의 진영에 있던 동독을 선택했다. 브레히트 외에도 안나 제거스(독일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소설가, '일곱번째 십자가'로 알려져있음) 등 다수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독일 땅에 세워진 새로운 이념국가로써 동독을 선택했고, 브레히트 역시 그들처럼 본인이 영향을 받았던 좌파적이면서 사회비판적인 성향을 때문에 동독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 시절부터 냉전시기까지 사회주의라는 이념은 매우 이상적이고 희망찬 이념으로 알려졌었고, 더욱이 '약자의 해방'이라는 이미지와 겹쳤다. 때문에 상당수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은 사회주의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고 동독 역시 그러한 새로운 이념 국가로써 진정한 이상적인 독일로써 이념적 우월성을 얻어 서독에 지지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사실 브레히트가 결정적으로 동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고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연극 세계를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극장이 바로 동베를린에만 있었다는 것이었다. 동독 당국은 이 걸출한 연극 스타에게 실제로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었다. 독일의 최승희 이런 말이 괜히 가능한 것이 아닌게 북한 역시 만담의 귀재 신불출, 식민지 조선을 넘어 세계에도 알려진 최승희그리고 내가 고자라니 심영 등 수많은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에게 연구소 설립 등 전폭적인 예술활동 지원을 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념선전의 도구였으며 56년을 기점으로 이런 예술인들은 모조리 숙청을 당하게 된다. 

브레히트에게는 당시 베를린의 최고 극장 중 하나인 '베를린 앙상블'을 주어졌으며, 그는 걱정없이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았지만...그는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빗대었다.

"예술작품은 사무실의 예술견해를 예술작품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가 자로 재서 만들 수 있는 것은 장화 뿐이다."

실제로 브레히트는 스탈린 체제에 대해서도 공공연연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다행히 정치적인 분쟁에 휩쓸리지 않고 조용히 보내긴 했지만...

5. 작품[편집]

그가 지은 작품에는 큰 특징이 있는데, 작품의 무대가 대부분 독일 밖이라는 것이다.

5.1. 픽션[편집]

  • Geschichten vom Herrn Keuner(코이너씨의 이야기)

 

5.2. 연극[편집]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은 임한순 교수의 <브레히트 희곡선집 1, 2권> 이 좋다. 작품 해설도 붙어 있고 과거 판본에 비해 번역도 깔끔하다. 많은 작품이 유명하지만, 당대에 가장 인기있었고 현재에도 가장 인기있는 작품은 '서 푼짜리 오페라',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 '사천의 선인'이다.
(국내에 대본이 번역되어 있거나 잘 알려진 작품은 굵은 글씨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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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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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출생 1898년 2월 10일
독일 독일 아우쿠스부르크
사망 1956년 8월 14일
동독 동독 동베를린
사인 심장병
거주지 독일 독일동독 동독미국 미국
국적 독일 독일
직업 극작가, 시인, 무대 감독
자녀 한나 히옵, 슈테판 브레히트, 바바라 브레히트
서명
Brecht Unterschrift.jpg

베르톨트 브레히트(독일어: Bertolt Brecht1898년 2월 10일 ~ 1956년 8월 14일)는 20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극작가시인, 그리고 연출가다. 주로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으며,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연극연출에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표현주의를 거친 신즉물주의적(新卽物主義的) 스타일로, 현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과 풍자를 극화한 니힐리스트. 후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생애[편집]

독일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지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동안은 뮌헨에 있는 병원에서 잠시 일했다.

전쟁이 끝난 뒤 뮌헨에서 극작가·연출가로 출발하여 후일 베를린으로 나가 막스 라인하르트의 독일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처녀작 희곡 《바르》(1918)와 이어서 제2작 《밤의 북[鼓]》(1919)으로 클라이스트 상을 받았고, 《도시의 정글 속에서》(1923)와 《서푼짜리 오페라》(1928)로 극단에 결정적인 지위를 굳혔는데, 《서푼짜리 오페라》는 무려 100회가 넘는 공연이 베를린에서 있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전쟁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계급에 등을 돌려 차츰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드러내는 극본과 사회주의 소설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하는 좌파작가로 활동했다. 1933년 극우정당인 나치의 집권과 나치가 좌파탄압을 위해 날조한 사건인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미국에 망명했다. 망명 중에 집필한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 《갈릴레이의 일생》(1938),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39), 《코카서스의 백묵원》(1944) 등의 상연으로 새로운 연극의 길을 제시하였다.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도 1947년 12월 극단적인 반공주의인 매카시즘이 불어 브레히트는 다시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이주해야 했다. 당시 많은 동료 좌파작가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택했지만, 그만은 동독을 택했다. 하지만 동독 공산당(SED) 간부들이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동독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하여 풍자시를 쓰기도 했으며, 정부가 인민을 버렸다면서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을 비판하기도 했다. 1956년 8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가족으로는 1929년 결혼한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두 자녀(슈테판, 바바라)가 있다.

주요작품[편집]

[편집]

브레히트의 주요 시 작품으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기존 가치관에 대한 비판의식, 인간에 대한 사랑,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평화주의가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례로 시 〈1492년〉은 이민을 심사하는 판사가 일부러 쉬운 문제를 내서, 가난한 이탈리아인 가족의 입국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희곡[편집]

브레히트는 처음엔 표현주의 작가로 출발하였으나 후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게 되었다. 처녀작인 <바알>, 출세작이 된 귀환병극(歸還兵劇) <밤의 북>, 인간소외의 문제를 앞세운 <도시의 정글>에는 아직 안비바렌트한 도취나 익살, 조소의 빛이 강하지만 차츰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져, 대상에의 거리적(距離的)인 태도는 사회적인 인식을 구하는 새로운 서사적 연극의 주요한 수법인 이화효과(異化效果)를 낳았다. <사나이는 사나이다> 그리고 실지교시(實地敎示)를 중시한 일련의 교육극의 시도는 이미 그러한 지향(志向)을 보인 것이다. 단순한 정감에 흐르지 않는 음악과 극의 새로운 종합을 구하는 방향은 작곡가 바일의 협력을 얻어 <싸구려 오페라>(1928)와 <마하고니시의 흥망>(1930)을 낳았다. <도살장의 성 요한나>와 <모친>은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극이다. 불우한 망명생활 중 그의 연극론은 차츰 체계화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걸작 <배짱 센 어머니와 그 아이들> <푼틸라 나리와 하인 마티> <사천(四川; Szechwan)의 선인(善人)> <코카서스의 백묵원(白墨圓)> <갈릴레이의 생애> 등을 연달아 집필, 전후에는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베를리나 앙상블을 결성하고 실제의 연극활동을 통해서 그의 연극의 혁신적인 의의를 무대 위에서 입증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모았으나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는 도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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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시의 씨앗은 시인의 몸 안에서 "무자각적"으로 싹터 자란다... 2017-03-14 0 2613
321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이골이 나다"의 유래 2017-03-14 0 2192
320 일본 교토 윤동주 마지막 사진 찍은 자리에 詩碑 세우다... 2017-03-13 0 2682
319 시 한편이 태여나는것은 늘 울고 웃는 과정을 그려가는것... 2017-03-13 0 2352
318 있어야 할건 다 있고 없을건 없다는 "화개장터" 2017-03-12 0 2576
317 우리 고향 연변에도 "詩碑자연공원"을 조성해야... 2017-03-12 0 2994
316 일본 문화예술인들 윤동주를 기리다... 2017-03-12 0 4111
315 일본 한 신문사 부장이 윤동주의 "빼앗긴 시혼(詩魂)"다루다... 2017-03-12 0 2822
314 일본 녀류시인 50세부터 한글 배워 시를 번역하다... 2017-03-12 0 3027
313 일본인 = "윤동주 선배가 나와 같은 의자에서 공부했다니"... 2017-03-12 0 2710
312 일본의 중견 시인이 윤동주 시를 일본어로 완역하다... 2017-03-12 0 2916
311 일본 녀류시인 이바라키 노리코가 윤동주 시에 해설을 달다... 2017-03-12 0 2632
310 작문써클 선생님들께: - "실랑이" = "승강이" 2017-03-11 0 2408
309 조선어의 자멸의 길은 있다?... 없다!!!... 2017-03-11 0 3331
308 시는 짧음속에서 큰 이야기를 보여줘야... 2017-03-11 0 1961
307 독자들도 시를 보고 도망치고 있다... 2017-03-10 0 2562
306 시인들이 시가 싫어 도망치고 있다... 2017-03-10 0 2224
305 작문써클 선생님들께= 아름다운 순 우리말로 작문짓게 하기... 2017-03-08 1 2698
304 윤동주의 친구 문익환 목사도 시 "동주야"를 썼다... 2017-03-07 0 4475
303 청년문사 송몽규도 시를 썼다... 2017-03-07 0 2675
302 청년문사 송몽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에 들다... 2017-03-07 0 3879
301 시인과 수석인은 이웃이다... 2017-03-07 0 2237
300 민족시인 윤동주를 연변 룡정 고향에서 모실수 있다는것은... 2017-03-07 0 2339
299 시는 생명의 황금빛이며 진솔한 삶의 몸부림이다... 2017-03-06 0 2453
298 시인은 죽기전 반항하면서 시를 써야... 2017-03-03 0 3124
297 시는 천년을 기다려서 터지는 샘물이여야... 2017-03-03 0 2315
296 시는 이미지 무덤이다... 2017-03-02 0 2687
295 시는 상식, 틀, 표준 등 따위가 깨질 때 탄생해야... 2017-03-01 0 2504
294 시 한수라도 마음속에 깊이 갈무리 해야 함은?!...ㅡ 2017-02-28 0 3342
293 작문써클선생님들께;우리와 다른 알고 넘어가야 할 "두음법칙" 2017-02-28 0 2666
292 시는 "빈 그릇"이다... 2017-02-28 0 2351
291 시문학도들이 알아야 할 시창작원리 12가락 2017-02-27 0 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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