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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님은 "값비싼 대가"로 통시적 진실를 치렀다...
2017년 09월 14일 01시 06분  조회:1955  추천:0  작성자: 죽림

 

마광수 소설 <즐거운 사라>의 시대적 가치 -- 마광수론 (이종섭 씀)

(문학사조 변환기에 희생된 작가와 작품)

 

 

 

<작가의 말>이 뜻하는 변명

 

지금으로부터 불과 18년 전,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는 세상에 발표되자마자 외설적 내용이라는 이유를 들어 국가 권력에 의해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 작가와 작품에 대한 국가 권력의 폭력을 묵인했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직장이었던 학교의 교수직에서마저 추방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그의 직장 등 3자 모두가 힘을 합하여 한 작가의 인격을 보복적으로 살해하고 그의 작품 하나를 철저히 생매장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우리 사회는 품위 있는 내용의 고상한 허구만을 창작의 자유로 허용하는 것인가? 또한 그 품위의 기준은 타당한 것이었는가?

 

작가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불길한 기운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 작품의 발문으로 <작가의 말>이라는 제하의 겁먹은 설명을 덧붙였다.

 

N. 프라이는 그의 저서 <비평의 해부>에서 “비평은 말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예술은 벙어리인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물론 시에 대하여 중점을 두고 한 이야기지만 다른 여타 장르의 예술에 있어서도 반박할 근거는 없다.

 

따라서 소설가가 작품의 서문이나 발문에서 자신의 작품 내용에 대한 외연적 설명이나 해명을 가했다면 이는 작품에 대한 변명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며,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작품 해석과 평가를 획일적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분명하므로 가치에 대한 이득보다 손실이 클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작품의 가치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변명을 늘어놓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작품이 당시의 사회적 정서로 볼 때 지나칠 정도의 외설적 내용에 치중하고 있었다는 고백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몰고 올 사회적 파장을 미리 예견하고 해명을 가하고자 했다는 추측을 피할 수는 없다.

 

불과 18년 전인 1992년은 지금처럼 인터넷이 상용화되지 않아 모든 정보의 유통이 오프라인에 의해 이루어지던 시대였으며, 우리 사회는 도덕적으로 외설의 기준이 지금보다 강했다. 따라서 사회의 통일지향적인 구조 속에서 사회를 향한 개인의 사사로운 의사 표시는 함몰되기 일쑤였으며, 그 대신 상당한 규모를 갖춘 언론매체가 대부분의 여론몰이를 주도하고 있었다.

 

1987년의 민주화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과거보다는 한결 창작의 자유가 인정되는 민주사회로 발전되기는 했지만,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당시 소설 문학의 이념적 사회구조 속에서 고삐 풀린 미친 말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치부를 노출시키는 자연주의 소설은 일정정도 비판을 받을만한 이유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합일시키려는 의미 있는 시도를 뚜렷이 보이고 있다.

 

“문학이 준엄하고 결벽한 교사(敎師)나 사제(司祭)의 역할, 또는 혁명가의 역할까지 짊어져야만 한다면,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의 자율성은 질식되고야 만다. 또한 소설의 근본은 역시 <리얼리즘>에 있는 바 (실제적 현실을 그리든, 내면적 현실 또는 상상적 현실을 낭만적으로 그리든, 모든 것은 다 리얼리즘이다), 그것의 소재가 혹시 퇴폐적이고 반동적인 부르주아적 상상력의 소산이라 할지라도 결코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비판적 리얼리즘이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반대한다.”

 

뒤이어 김동인의 유미주의 소설의 대표격인 <감자>에 대하여 리얼리즘의 가치를 크게 부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위해 이념과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몸부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것은 작가가 인간의 마음속에만 숨어 있던 모든 것, 이를테면 저속하게 보여진다거나부끄럽게 생각되는 마음 까지도 모두 솔직하게 낱낱이 들춰냄으로써 문명의 발달과 도덕에 의해 가려졌던 날조된 원초적 진실을 바로잡겠다는 야심찬 주장이기도 하다.

 

주인공 “즐거운 사라”의 인물적 성격

 

지금은 이미 과거에 묻혀버린 <즐거운 사라>에 대하여 여태껏 사회의 여론이 가졌던 주된 관심은 그것이 외설이냐 아니냐에 모아졌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의 ‘사라’가 무엇을 말하려는가가 문제이지 그것이 외설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관심도 의미도 없다.

 

주인공 사라가 추구한 것과 같이 인간이 소망하는 원초적 즐거움은 육체적인 것에 근거하며, 이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동물의 근원적 속성이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사랑보다 육체적 접촉에서 오는 쾌락이 더욱 즐겁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현대의 환경 등 여러 제약으로 인해 그것을 자유롭게 즐길 수는 없으므로 항상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낀다. 따라서 ‘사라’는 즐거워야 할 ‘사랑’에서 무언가 하나 정도 빠져버린 ‘결핍된 사랑’이고 문명화된 사회에서 원시로 되돌아가고 싶어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녀가 흥분되는 마음을 억누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성기에 땅콩을 넣어보는 행위는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솔직한 욕망의 실행이며 동시에 정당한 호기심의 발로이기 때문에 작품에서의 그러한 표현이 있었다 하여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교적 도덕률로 무장되어 있는 시대에 있어서도 무의식 중에 간혹 원초적 본능의 갈증을 느끼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낸다면 그는 천하다거나 속되다고 말해지며 동양적인 사고에서는 특히 더하다.

 

주인공인 사라는 그러한 행동을 과감하게 실천하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지성적 인간으로 향하는 어엿한 명문대학의 학생이었다. 그러한 사라는 동물적 성격을 지닌 인간이 사회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짐승보다도 자유로운 성적 쾌락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사라는 국가가 그어 놓은 미성년의 선을 넘어서면서 성년으로서의 권리를 소유하게 되었으므로, 그 권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자유로운 성의 바다에 뛰어드는 행위는 마땅히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이 있을 수 없고 정당하다. 그래서 우선 먼저 여성에게만 채워져 있는 원죄의 족쇄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녀의 첫 번째 남성인 ‘기철’에게 처녀성을 내던져버렸다. 이것은 지금까지 남성사회가 만든 도덕적 관념에 의해 억압받아왔던 여성의 용기 있는 성적 해방 선언이었다.

 

사라가 성적 자유를 얻고 난 후 여성보다 오히려 남성이 상대적으로 약자였음을 깨달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라는 성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실험하려 하지만, 원초적 성의 즐거움을 억압하는 위선적인 사회에서는 유흥업소가 가장 자유로운 지대라는 사실 또한 더욱 위선적이고 왜곡된 현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주간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야간에는 유흥업소에서 성의 유희를 즐기는 이중적인 생활을 하며 여러 가지 성적 테크닉을 실습하는데 있어 즐거운 성적 행위란 페팅이나 자위행위뿐만 아니라 에이널 섹스, 동성애, 사디즘과 매저키즘도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이런 자유로운 행위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게 될 때 ‘변태’라는 비웃음의 용어도 사라질 것이다.

 

사실 원래부터 사랑하는 사람 또는 좋아하는 남녀 간의 자유로운 성행위에는 제한이 있을 수 없음에도 경건주의적인 성 도덕 관념이 ‘변태’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그 용어는 당연히 없어져야 할 단어이다. 또 사라가 원할 때 육체적 성을 즐기려 하는 것은 억압적으로 지속되어 온 여성 성행위의 수동적 관습으로부터 공격적이고 능동적으로 변해가려는 시대적 의미를 내포한 중대한 사건이다. 따라서 사라는 바로 일인칭 서술자인 주인공으로서,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 자신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가치 있는 성 해방의 의미

 

사라가 대변하는 일차적 주장은 기존의 도덕률 파괴에 있다. 이것은 여성뿐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 억압의 빌미를 주게 되므로 성 의식에 대한 왜곡의 근원이 된다.
또한 사라는 남을 의식하는 눈치보기나 사회적 계층에 따라 같은 행위를 달리 보는 차별의식을 비판한다. 형식상의 민주사회에서 진정한 민주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평등하게 인식되는 사회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학생 신분인 사라가 아무리 화려하게 차려입고 버스를 타더라도 자신은 그리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승객들은 힐끔거리면서 사라를 쏘아보며 아주 불결한 여자를 보는듯한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라던가, 달동네 판잣집에 사는 여자가 밖에 나갈 때는 삐까번쩍하게 차려 입고 나간다고 욕을 하고 전셋집에 사는 주제에 자가용을 굴린다고 비난 섞인 개탄을 해대는 것 등이 평등하지 못한 사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당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위선적이며 모순적인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이 소설의 주인공 사라가 공장의 여공이나 사창가의 창녀가 아닌 대학생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차별 없는 성의 자유화를 이룰 수 있는 진정한 민주화의 방향설정이기도 하다. 같은 사람이 야간에는 유흥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간에는 명문대학의 여대생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신분이나 계급의 통합을 상징하기도 하다.

 

다음으로 궁극적인 목표는 역시 성은 자유로워야 하고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여성의 상대인 남성의 존재를 사실 그대로 인정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라는 급진적 여성해방 운동가들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성을 본격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한 사라로서는 남녀평등을 빌미로 섹스에 있어 남녀 간의 성차(性差)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이는 페미니즘의 성격과도 상당한 거리를 가진다.

 

우리나라 사교춤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남성이 이끌고 여성이 따르는 질서정연한 타입이었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트위스트를 거쳐 고고와 디스코로 옮겨오면서 상대와 동등한 위치에서 춤을 즐기게 되었다. 두 남녀가 함께 붙어서 추는 부루스에 있어서도 남성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고전적 정통 부루스의 스텝보다는 그저 부둥켜 앉고 규칙도 리더도 없이 박자에만 맞추어 움직이는 형태로 변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대적 춤이 옛날의 춤보다 더 여성에게 즐거움을 준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여성의 성해방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성도 기존의 도덕에 억매임 없이 자유로이 즐길 수 있어야 하되, 진정한 즐거움이란 남녀 간의 미묘한 성차(性差)에서 오는 것이라는 생물학적 현실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디즘과 매저키즘의 정당성이 확보되며 남성과 여성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동료로서 진정한 양성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대변하는 것들

 

사라의 상대 남성은 먼저 학교 선배인 기철이었다. 기철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친구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는 대학생이나 지식인들이 민중운동에 빠져드는 시대의 현실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몇 년 전부터 민중미술 바람이 불어, 기철의 친구들이 몽땅 열렬한 
민중미술지지자들이 되었다. 워낙 기철은 어떤 유파에 가담한다든가 공동작업을 
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더욱더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설명은 구조화시대에서 탈이념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가치체제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투쟁적 이념사조에 대한 비판은 다음에 만난 정아와 자신과의 비교에서도 강조된다.

 

“나는 다시금 정아와 나를 비교해 보았다. 정아에 비해 볼 때 아무래도 나는 뭐든
지 복잡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민중운동을 하든 부르주아처럼 살든, 일단 
대학생 딱지가 붙어버리면 다들 계산적으로 돼버리는 게 요즘 대학생들이기 때문
이다.“

 

이는 반항적 민중운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진보적 지식사회에 대한 거부감으로서, 다음 시대는 거창한 사회적 이념보다는 개인적인 근원적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가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에 만나는 성의 상대는 여고동창 정아와 장사꾼인 김승태였다. 정아와 함께 벌이는 레즈비언 성행위나 정아, 사라, 그리고 김승태 등 2 대 1의 혼합섹스는 섹스의 종류나 방식에 구애받지 않는 또 다른 자유의 육체적 즐거움이다.

 

김승태가 돈이 많음에도 생활에서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역시 성에 관한 불만문제이다. 아내를 정신적으로는 사랑하지만 아내에게서 맛볼 수 없는 또 다른 육체적 즐거움을 위해 정아를 찾았고 사라와도 만났다. 그것이 설사 플레이보이 기질이라 하더라도 흉이 될 수 없고 이것은 눈물을 동반하는 로맨틱한 센티멘털리즘적 사랑보다 육체적 사랑이 더 즐겁고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사 중 성기를 빨게 하는 것과 에이널 섹스 등은 매저키즘에서도 성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음 택시 운전사와의 카섹스는 장소에 구애 없는 성행위를 뜻하는 것이고, 정력이 뒤떨어지는 연예인 김철과의 사랑은 누구나 성을 즐기며 사랑할 수 있음을 뜻한다. 마지막 등장인물인 한지섭은 사회적으로 존경과 신망을 받는 대학 교수라는 직업의 지식인으로서 그러한 지식인의 위선적인 껍질을 스스로 벗고자 몸부림치는 파격적 인물이며, 그의 행동은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교수인 한지섭의 참여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보다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지금까지 사라가 만난 인물들은 대학 선배인 미술가 기철, 전문대학생 정아, 사업가 김승태, 택시운전사와 연예인 김철 등 대부분이 보통 이하의 계층이었으나, 지적으로 가장 상류층 계급에 속하는 한지섭마저 전형성을 깨트리고 참여시킴으로써 성의 자유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깊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사회적으로 천한 계층에서는 간혹 성의 자유를 시도하려는 여성들이 존재하기도 했었지만, 사회를 이끌고 있는 지식계급이 전형적인 엄숙주의나 경건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한 성의 자유는 획기적으로 증진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지섭의 등장은 성에 관하여 누구든지 솔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하며 지식인도 예외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교수에 관해 성적으로 문란한 내용은 문학작품에서도 금기로 취급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를테면 1950년대의 <자유부인> (정비석 작)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일 수 있는데, 그 작품은 교수 부인과 바람둥이 대학생과의 춤바람을 그렸다 하여 당시 교수사회로부터 상당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즐거운 사라>는 작가 자신이 대학 교수이고, 작중 인물인 한지섭 또한 작가 자신과 매우 유사한 성격의 인물인데, 이것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한지섭이 <문학과 인간> 과목을 담당하는 국문학 교수인 것은 시대적 사명인 육체적 즐거움의 자유로운 구현을 선도할 용기 있는 모험가는 문학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작가 자신이 시대의 선봉에 서서 그 짐을 짊어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문학이란 결국 인간학이고, 그래서 인간의 본성과 행동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예술장르이며, 문학은 결국 <사랑에 대한 푸념>이 그 내용의 전부이고, 인간 역시 동물의 일종이기 때문에 식욕과 성욕이 삶의 실존적 근거가 되게 마련인데, 식욕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경제학이라면 사랑에 대해 공부하는 게 문학이라는 논리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 시대에서 지식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민중해방을 부르짖는 투쟁적 이데올르기보다도 사랑에 관련된 육체적 즐거움의 문제를 더 우위에 올려놓는 획기적인 발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가와 문학인 그리고 독자들은 이를 두고 변화되어가는 문학사조의 새로운 선언으로 보기보다는 타락한 몽상가의 잠꼬대 같은 헛소리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이 머지않아 우리 앞에 닥쳐올 현실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한지섭은 외로움을 느끼던 차에 사라와 육체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커녕 동거 같은 잠시의 얽매임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지섭이 어떠한 형태의 형식이나 관례와 연관된 사회의 위선적 요소를 모두 다 거부하고, 인간의 동물적 본능에 기초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작가는 그것이 곧 겉과 속이 똑같은, 다시 말해서 본능적 욕구와 실제적 행동이 똑같은 예술가적 정렬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야한 사랑’이라고 결론 내린다.

 

한편 이 소설의 작가는, 작품에 기술되어진 언어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국가권력의 제재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문학은 그 언어가 문학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표현의 자유가 제한을 받는 금기가 설정되면 안 된다고 보고 있다. 자유에 대한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은 언어의 자유로부터 시작된다. 즉 성에 관한 언어의 자유는 성에 대한 완전한 자유의 시작을 의미하므로, 작품에서 사용된 언어에 대한 외설 여부의 문제제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최상위 계층에 속하는 등장인물들이 사회적으로 비판받을만큼 매우 저속하다고 일컬어지는 섹스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오히려 가식 없이 솔직한 성적 표현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보지, 자지, 성교, 불두덩, 페팅, 자위행위, 항문 섹스, 동성애, 사디즘, 매저키즘, 씨발, 좆 같은, 씹 같은.....”

 

이러한 용어는 다른 소설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온 용어이기 때문에 문학사적으로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할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며, ‘씨발’, ‘좆 같은’, ‘씹 같은’ 등의 언어가 상스러운 욕이기는 하지만 소설 내에서 사실적 감정이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한 대화체나 독백체로 사용되었다 하여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이유 또한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당 시대에 있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제기된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용어를 다른 작가도 아닌 대학 교수가 거침없이 썼다는 ‘품위의 문제’였다. 유흥가나 독신자 아파트, 러브호텔 등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성행위의 구체적 묘사 또한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구체적인 사실적 묘사는 자연주의 또는 사실주의 소설에서 매우 중시되는 예술적 성격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즐거운 사라>가 지식수준이 낮은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이해하기 어렵거나 고상한 느낌을 주는 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계층 간의 평등을 강조하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작가 마광수의 소설이나 시들은 대부분 쉬운 말로 쓰여 있어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결국 <즐거운 사라>는 가장 지식수준이 높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존엄한 대학 교수가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온 위선적인 엄숙주의나 경건주의를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사실주의에 충실하려 노력한 결과물인 것이다. 따라서 사라와 한지섭이 벌이는 행동은, 대학사회 등 지식층 집단도 이념적 투사를 가장해야 하는 시대에서 개인적이고 근원적인 성적 즐거움에 더 가치를 두는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사라>의 문학사적 위치

 

<즐거운 사라>라는 작품에서는 E.M.포스터가 말한 “작가는 가능한 한 현재의 시간을 유보하고 현실적 진실을 떠나 통시적 진실을 계시해야 한다.” 라는 ‘철학적 신비성을 가지고 있는 플롯’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전체를 위해 짜여진 줄거리라기보다는 단편적인 작은 이야기들의 연속적인 이음으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되어있어, 독자에게 사건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한 ‘기억력과 지성적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사회적 파장을 예견하고 <작가의 말>이라는 해명성 변명을 붙인 까닭은 무엇이며 그것이 작품 속에서 갖는 의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이력이나 직업, 경력 등으로 볼 때, 그가 작가로서의 수사적인 언어능력이나 작품기획과 구성 등에 대한 창작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 질문이다.

 

돌이켜 보건데, 우리는 항상 과거의 과오를 쉽게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음을 느낀다. <즐거운 사라> 발표 당시와는 달리 지금은 개인용 PC가 대다수 국민들에게 보급되었고, 인터넷이 생활화 되어 모든 정보가 신문이나 방송 매체보다도 개인에 의해 더 빠르게 무차별적으로 흘러다니고 있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서 18 년 전의 작품인 <즐거운 사라>를 다시 읽어보면, 어느 누구도 이 소설이 작가가 실형을 선고받고 작품이 판매금지 될만한 외설문학이라고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 속 사라의 성행위를 변태적이라고 비난하지 않을만큼 우리는 마음이 더 넓어지고 시대적으로도 성숙해져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작가가 그보다 훨씬 더 야한 내용의 작품을 발표해도 외설이라는 이유로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트집을 잡지 않으며, 사이버 상에 발표되는 문학이 상당부분 대중문학을 선도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사이버시대의 문학은 전통적인 소설기법의 플롯을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즐거운 사라>처럼 단막의 이야기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를 선호하며 전통적인 텍스트의 규범을 무시하기 일쑤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초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이념적 투쟁의 집단에 끼어드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고 과거 있는 여성은 더러운 여성으로 간주하려는 시대였으나,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개인 지향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으며 여성의 지위는 과거를 따지지 못할 정도로 높아져 가정에 얽매이는 결혼보다 자유로운 독신을 선호하기도 한다. 이는 분명 <즐거운 사라>가 지향했던 방향과 일치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문학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즐거운 사라> 사건은 작가가 의식을 했든 아니했든 간에 이념적으로 구조화된 사회로부터 개인 지향적이고 성적 즐거움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진입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선구적 역할의 진통을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겪은 사건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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