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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문사 - 송몽규를 재다시 알아보기...
2017년 09월 30일 00시 10분  조회:3169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의 소울메이트 송몽규

 [ 길림신문 ]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윤동주에게는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가 있었다. 소울메이트-마음의 벗,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를 가리켜 말한다. 그 죽이 잘 맞았던 친구가 바로 송몽규이다.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는 겹경사가 났다. 명동촌 친정집에 와있던 윤하현 장로네 큰딸 신영이가 9월 28일 아들애를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네가 12월 30일에 또 아들애를 보았다. 석달을 차이두고 태여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집에서 자랐다.

이런 혈연때문이였던지 얼굴과 키도 비슷해 쌍둥이같았던 두 사람이다.

송몽규는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성정미의 윤동주와는 대조적이였다. 소년시절부터 문학소년이면서도 활동적인 성격을 갖고있어 동료간에 리더십이 돋보였다고 한다. 크리스마스나 학기말에 이르면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연극을 연출하는 등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였다.

어릴적부터 둘은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했다.

1925년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교장이자 외숙부였던 김약연선생의 훈도아래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다. 그들 둘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시절이였다. 4학년때 동주와 고종사촌이고 동갑인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생활》을 구독하였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달라자에 있는 당시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소학교 학생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산길을 둘은 함께 매일이고 걸었다.

윤동주 가(家)는 1931년 늦가을 룡정으로 이사하게 되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2년 4월 봄 은진(恩眞)중학교에 함께 입학한다. 이때에도 송몽규는 윤동주네 집에 얹히게 된다.

문단 진출도 남보다 빨랐다. 송몽규는 1934년 12월 은진중학 3년생으로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부문에 응모한다. 송한범(宋韓範)이란 아명으로 응모한 작품인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여 고향 간도사람들을 놀래웠다 윤동주보다 빠른 문단진입이였고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였다.

자기의 문호를 《문해》-《문학의 바다》라 지으며 문학적소망을 드러냈던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시던 민족주의자 명희조선생의 영향하에 결연히 직접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길로 나간다.

송몽규는 은진중학을 중퇴하고 남경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의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이 한인반은 한국림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던 김구선생이 반일민족독립전쟁에 수요되는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 운영하는 학교였다.

청년문사라는 그에 대한 별칭은 그 어디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락양군관학교에서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련마하면서도 학생들을 조직하여 한인반 잡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등사로 인쇄하여 만든 두툼한 책을 보고 김구선생은 몹시 칭찬하시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었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1936년 4월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에서 제남 주재 일본 령사관 경찰부에 체포된다. 그는 이제 일제의 경찰들의 검은 리스트에 그 이름이 오른것이다. 갖은 고문에 시달리다 겨우 석방되여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때부터 그에게 《요시찰인물》이란 딱지가 붙어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것이 그후 일본 류학시기 교도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는 한 원인이 된것이다.

이때의 윤동주의 행적을 보면 또 다른 친구인 문익환과 함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학교에서 자퇴를 하고 룡정으로 되돌아와 윤동주와 문익환은 룡정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되였다.

광명학교는 당시 흉년의 여파로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되여 친일계 학교가 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윤동주와 문익환은 조선인의 황국화(皇國化)를 위해서 세워진 중학부에서 공부할수밖에 없는 신세에 《솥에서 뛰여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구나.》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서 《이런 날》(1936.6.10)이라는 윤동주의 시 한편을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중략)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싶다.

동주가 다니는 친일계 광명중학교 정문 량쪽 돌기둥에는 만주국 기발과 왜놈들의 일장기가 걸려 펄럭이고있었다. 이런 무가내한 상황에서 동주는 하소연하고 기대고싶은 존재로 송몽규를 찾고있었다. 겨우 석달이상이지만 랭철한 현실 대처의 자세로 언제나 그들의 선두주자였던 의젓한 형 송몽규를 사무치게 그리고 마음으로 부르고있는것이다.

1937년 4월,송몽규는 룡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그동안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계속하였다. 그는 문학에 대한 뜻을 버리지 않고있었다. 그의 졸업일기에는 영어로 《일체는 문학을 위하여》라는 글발이 남겨져있다.

1938년 초봄, 그들은 당시 간도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한다. 윤동주는 의사나 고등고시로 출세하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문과를 택했고 몽규도 같이 문과로 간다.

남성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인데다 달변인 그의 주도하에 문과학생회는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송몽규는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문우》지에 《하늘과 더불어》라는 시를 발표했다. 우리 말이 억압당하던 시기 몽규(夢奎)를 꿈별이라 굳이 우리 말로 풀어 이름을 단것이다.

서울생활 4년을 마친 뒤 1942년 봄 두 사람은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 남의 나라, 적국이였지만 대학과정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이것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무가내한 선택이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송몽규는 교도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입학하고 윤동주는 이케부쿠로에 있는 릿교대학에 들어간다. 1940년대에 조선인이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후 윤동주는 학교를 바꾸어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 다시 송몽규와 재회한다.

늘 머리를 맞대고있으면서 그들은 일경이 그를 감시하는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장래》며 《민족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하에서 민족독립의 래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송몽규는 자신은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해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송몽규 묘소를 찾은 필자

마침내 두 사람은 일본경찰의 마수에 떨어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10일, 윤동주는 7월 14일 각각 교도에서 특고 형사에게 체포되여 교도 시모가모경찰서 류치장에 감금된다.일제 경찰의 감시하에 있던 송몽규가 그 사정권에 들었던것이다. 죄명은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이라는것이였다.

1944년 봄, 두 사람에 대한 결심공판이 있었다. 재판시에는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사건(조선독립운동)》으로 그 죄목이 정해졌다. 징역은 각각 2년이였다. 형은 같았으나 형 종료시기는 윤동주는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는 1946년 4월 12일이였다. 송몽규의 형이 더 무거웠다.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도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들에 의해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것은 처음이다.

7매로 된 재판판결문에는 송몽규의 주된 활동이 비교적 정리가 잘 되여있었다. 판결문 내용을 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특히 언어문화를 말살하는 사회상황구조를 파악하여 지적하고있고 기존의 독립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리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있다. 또한 일본이 머지 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을 할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방법론도 전개하고있다.

형이 확정된 그들은 후꾸오까형무소로 이송되였다. 머리를 깎고 또 사상범인 연고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붉은색 죄수복을 입었다.

이때 일제는 패망으로 줄달음치고있었다. 마구 잡아들인 조선인 복역자들은 일제에 큰 짐이 되고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처치방법을 생각하고있었다. 바로 생체실험이였다.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한가슴 지녔던 애젊은 나이의 문사는 비참하게 적국의 땅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졌다. 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었고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 때,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이들의 의문사에는 후꾸오까형무소와 구주제대 의학부의 생체실험의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고있다.

후꾸오까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1945년 3월 6일 장례를 치르고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었다.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한학에 밝은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비문을 썼다.

송몽규의 시신도 후꾸오까 화장장에서 재가 되였다.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으며 가족들은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 지묘》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역시 윤동주의 비문을 작성했던 김석관이 썼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친구 윤동주가 묻혀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지성인들에 의해 근년에 송몽규의 《밤》이라는 시 한편이 또 발굴되였다.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작품으로서 연희전문 1학년때 쓴것으로 보인다. 송몽규의 작품은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과 연희전문시절 《문우지》에 발표한 시 《하늘과 더불어》 등 두편이 고작이였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맑고 고운 결, 고운 마음으로 캄캄했을 세상에 대한 고심이 깊다. 젊은이의 사색이 잘 옹글었다. 벗인 윤동주의 시를 닮은듯하다.

그들은 같은 해에 한집에서 태여났고 같은 해 한 형무소에서 함께 죽는다.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였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글발을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 그의 문학적재질을 인정받으면서도 시대상황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문학보다는 반일운동에 적극 뛰여들었고 그 와중에 젊은 몸을 바쳤다.

오늘날 윤동주가 겨레 시인으로 높이 추앙됨은 천행이라 하겠다.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송몽규는 그에 비해 아는이가 적다. 뒤미처 한반도 나아가 그를 숨지게 한 적국에서까지 사랑받고있는 친구의 곁에 우두커니 서있는 송몽규이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존재가 다시금 각인되는것은 그 역시 친구가 읊조리고 지켜왔던 생의 수칙처럼 《한점 부끄럼 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간 위인이기때문이다.

 

/김혁

 
 
ㅁ꿈별(송몽규의 필명)-밤,하늘과 더부러,술가락

 

 

하늘과 더부러

꿈별(송몽규의 필명)

 

하늘 ー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수있어 알수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오오 하늘아  

든것이 흘러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들만 뿌려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의 잔재만

쓰디쓴 추억의 반추만 남어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연인이 없어 고독스럽지않아도

고향을 잃어 향수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에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 맘속에 하늘을 간직하고싶어.

 

미풍이 웃는 아침을 기원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부르기를 가만히기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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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몽규의 알려지지 않은 '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 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맘은
험한 山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조선일보' 1938년 9월20일치').

연희전문 1학년때 쓴 작품 '밤'이다. 맑고 고운 결 고운 마음으로 캄캄했을 세상에 대한 고심이 깊다. 젊은이의 사색이 잘 옹글었다. 벗인 윤동주의 시를 보는 듯하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벗 가운데서도 으뜸 벗이었다. 북간도 명동촌의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났다. 송몽규가 1917년 9월28일, 윤동주가 12월30일이다. 둘은 고종사촌 사이였다.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가 윤동주의 고모부다.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일했다. 이런 혈연뿐만 아니라 얼굴과 키도 비슷해 쌍둥이 같았던 두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둘은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 했다. 1938년 봄 연희전문 진학도 함께했다. 처음 기숙사도 한 방을 써다.

서울 생활 4년을 마친 뒤 1942년 봄 섬나라 경도 유학을 함께 떠났다. 거기서 왜로(倭虜) 경찰에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고 비슷한 시기에 영면했다. 지금 용정 동산에 위 아래에 가까이 묻혀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다. 둘 다 미혼이었다.

차이가 난다면 송몽규는 윤동주에 견주어 외향적이었다. 문단 진출도 빨랐다. 1935년 열여덟 어린 나이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학업을 그만두고 김구 선생 밑에 들어가 낙양군관학교에서 항왜활동을 위한 비밀 훈련을 마쳤다. 이 일로 1936년 왜로 경찰에 붙잡혔다. 그 뒤로 송몽규는 '요시찰인'으로 감시망의 대상이었다.

1942년 봄 경도에 들어간 송몽규와 윤동주는 "줄곧 조선 독립을 궁극의 목표로 삼아" 서로"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경도에 있는 조선인 학생들을 충동"('재경도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개요')했다. 그러다 송몽규는 1943년 7월10일, 윤동주는 14일 왜로'특고경찰"에게 체포됐다. 그 뒤 2년 징역을 선고받고 갇힌 채 숱한 고문과 생체실험까지 겪은 두 사람이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윤동주가 절명한 날이 1945년 2월16일이다. 송몽규도 3월10일 그 뒤를 따랐다. 둘 다 스물일곱 나이였다.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옥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위해 큰 일을 했을 것이다. 윤동주가 겨례 시인으로 되살아난 일은 천행이엇다. 송몽규는 이름조차 없다. 오늘 북방 용정 동산에는 두 젊은이의 무덤이 여름 햇살 아래 따가울 것이다. 문득 찾아낸 송몽규의 시 한편으로 이저런 감회가 깊다.


박태일 시인. 경남대 교수 


송몽규의 알려지지 않은 '밤'은 국제신문 7월25일 자에서 옮겼습니다. 안타까운, 그러나 차라리 '윤동주님이 옆에 있어 그의 이름은 더욱 알려지지 않을까'하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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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가락 

송몽규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망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外國)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동아일보 1935년1월1일자에 게재된 신춘문예 콩트 부문 당선작인 송몽규의 「술가락」 전문.
아명인 송한범(宋韓範)으로 게재.1934년 무렵에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그는 '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큼직한 사각도장을 마련해서 자기의 책을 분류,정히하는데 썼다.오늘날 윤동주의 유품인 『철학사전』(일어판)속장에 그의 도장 자취가 남아 있다.

<송우혜저,윤동주평전에서>

밤 -

송몽규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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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절부터 반일독립운동에 몸을 담았던 청년문사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지금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있는 외가집- 윤동주집에서 당시 명동소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송창희)선생과 윤동주의 고모이며 기독교신자인 (윤신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한범이
었다.

소학교시절

1925년 4월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김정우,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활동력이 강한 그는 공부를 잘 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어서 친구들중에서 언제나 으뜸였다.
윤동주 등의 적극적인 활동과 수선하에서 그의 학급은 문학소년반과 다름없는 그런 길로 나아갔다.소학교 4학년시절, 그는 (어린이)잡지를 서울에서 주문해다 읽고 그것을 친구들에게 빌려주어 돌려보게 하였다.
5학년때 그의 주도로 교내문예지를 만들려고 했으나, 문예지 이름을 무엇이라고 짓기가 신통치않아 담임선생 (한준명)선생님을 찾았다 .애들의 장한 모습에 감동된 선생님은 기특한 나머지 (새명동)이라 하면 어떻냐 하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찬동하고 (새명동)잡지를 몇차례나 꾸려나갔다. 소학교시절의 송몽규는 이처럼 독서에 취미가 깊고 문학에 흥미를 가졌을뿐만 아니라 성탄절이나 학기말에 이르면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연극을 연출하는 등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이기도 야무진 소년이었다.


중학교시절

1931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명동촌에서 10리 떨어진 달라즈에 있는 당시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고 1934년 4월에는 룡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소학교시절부터 문학을 각별히 즐기던 송몽규는 중학교에 가면서도 더욱 문학을 열심히하였다. 그는 끝내 조선 동아일보 신춘문예현상모임에서 콩트(숟가락)을 송한범이라는 아명으로 발표하였다. 1934년 은진중학교 3학년 시절 송몽규는 자기의 문호를 (문해)라 지었다. 그러나, 문학적염원은 드러냈던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도양사와 국사 그리고 한문을 가르치시던 민족주의자 (명희조)선생의 영향하에 결연히 직접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걸로 나갔다.
송몽규는 4학년에 진급하지 않고 은진중학을 중퇴한 후 남경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의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이 한인반은 중국국민당정부의 주석인 장재석의 지원하에 한국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던 김구선생이 반일민족독립전쟁에 수요되는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운영하는 학교였다.

송몽규가 반일독립운동의 길로 결연히 나선데에는 아버지인 (송창희)선생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품이 엄하고 풍채가 름름한 송창희선생은 한때는 대립자에서 촌장이기도 했다. 당시 수업마저 일본어로 하는 세월에도 그는 일본어를 배우지 않고 그만은 늘 경찰서장과 사이가 나빴다. 그는 서장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홧김에 술을 마시면서 자실들에게 우리 송씨 집안에서는 단 한사람이라도 총, 칼차는 사람이 나오면 않된다고 훈시를 하곤 했다.
이런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란 송몽규가 은진학교에 가서 민족주의자 명희조선생의 반일사상영향을 받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당시 학생들은 (이광수)의 소설(흙)의 주인공처럼 리상촌건설에 나서는 풍조가 유행이 되다싶이 하였다. 명희조선생은 학생들에게 (국가가 성립되려면, 국토, 국민, 주권)3가지가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주권이 없는 노예상태이다, 주권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지금 너희들이 하려고 하는 리상운동 역시 그렇다. 그런 일을 개인적인 운동만으로는 도저히 이룰수 없다, 리상촌운동의 목적이 무엇이냐,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삶을 찾자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거주나 생활환경이 조금 나아졌다해도 그 처한 상태가 주권을 빼앗긴 노예의 처지 그대로라면 그게 무슨 인간다운 삶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참된 이상촌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도 그보다 먼저 우선되어야 할 것이 바로 우리의 독립이다)리고 설교하였다.

이광수의 계몽문학이 제시하는 사이비 이상주의에 도취했던 젊은 제자들에게 역사를 옯바른 시각과 대의를 서리발같이 일깨워주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춘추필범의 엄정함과 위엄을 지니고 있어 송몽규와 같은 애국청년들을 단연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락양군관학교)에 간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연마하면서도 학생들을 조직하여 잡지를 제작하는 주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자기보다 좀 늦게 입학한 은진중학 학생 (라사행)등에게 원고를 써내라고 하고는 등사판을 사다가 등사로 인쇄하여 두툼한 책을 만들었다. 김구선생은 이 책을 보고 몹시 칭찬하시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실로 청년문사라는 그에 대한 별칭은 그 어디에서도 빛을 더하였다. 송몽규는 민족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1935년 11월에 남경을 떠나 산동성 제남에 있는 조선독립단체를 찾아갔다.

1936년 4월 10일 송몽규는 영문도 모르게 제남주재 일본령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분적지인 웅기경찰서로 곧장 압송되었다. 그는 갖은 고문에 시달리다 겨우 석방하여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때부터 그에게 (요시찰인물)이란 딱지가 붙어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살아야 했다. 1937년 4월, 송몽규는 룡정대성중학 4학년으로 편입하여 2년간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계속하였다.그는 문학에 대한 뜻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졸업싸인에디 영어로(일체는 문학을 위하여)라는 글을 남겼다. 1938년 2월 대성중학을 졸업한 송몽규는 아버지의 승낙을 받고 당시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와 함께 경성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1941년 6월 5일, 송몽규의 주도하에 문과학생회 문우회의 잡지(문우)를 펴냈다. 송몽규는 당시 문우회의 회장이었다. 그러나 (문우)도 당시 일어를 (국어)로 엄격히 상용하던 때였기에 창간호때는 우리말이었으나, 문우회의 해산과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문학도로서의 송몽규

송몽규는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문우)에 (하늘과 더불어)하는 시를 발표했다.1942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당숙(송창근)목사도 송몽규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하여 졸업식에 참가하였다.

1942년 12월 27일 연희전문을 졸업식이 송몽규는 졸업성적이 우수하여 2등으로 우등상을 받았다.나중에 우등상 상품을 펼쳐보니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이었다. 송몽규는 `에이, 그런 영감, 차라지 주지나 말지, 상이라면서 이따위것들을 준다`라고 성을 내며 집어던져버렸다. 
남성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인데다 달변인 송몽규는 (요시찰 인물)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는송몽규가 그 따위의 책을 애지중지 여길리 있겠는가?.


일본유학시절

1943년 3월, 윤동주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간 송몽규는 경도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하였다.그는 늘 윤동주 등 벗들과 함게 일경이 그를 감사하는 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장래)니 (민족독립)이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하에서 민족독립의 내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그는 자신은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헤서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1943년 7월 10일 일본당국은 송몽규를 (재경도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의 주모자로 단정하고 체포, 1944년 4월 13일 경도지방재판소에서 2년 징역을 언도했다.
1945년 4월 18일 송몽규는 일제의 생체실험대상으로 시달리다가 오매에도 그리던 민족의 광복을 보지 못한채 비명으로 조졸하였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지니고 분전했던 청년문사 송몽규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비참하에 옥사하였다.
한줌의 재가 된 청년문사 송몽규는 그가 나서 자란 고향 지신 장재촌 북산(윤동주가 묻힌 곳)에 함게 안장되었다.

...두편의 유작을 남긴 이름없이 사라진 송몽규의 원혼은 오늘까지 소쩍새의 울음속에서 사라져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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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jmagazine.joins.com/3696639864_ARTBq4E3_1.jpg

일본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에 방학을 맞아 귀향한 송몽규와 윤동주.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윗줄 오른쪽이 윤동주. 윤동주의 왼쪽은 윤동주 조부의 육촌 동생인 윤길현. 송몽규의 왼쪽은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동생이자 몽규, 동주와는 학우였던 윤영선이며, 오른쪽은 그의 조카사위인 김추형.
 

1. 소개2. 생애
2.1. 출생2.2. 학업2.3. 독립군 투신2.4. 학업 재개2.5. 체포와 사망
3. 사후4. 송몽규 전집5. 대중문화

 

1. 소개[편집]

그들은 한 집에서 석 달 간격으로 태어나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냈고, 거의 평생을 동반자로서 살아갔다. 그들은 같이 일본에 유학했고,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건, 같은 죄목으로 얽혀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같은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옥사했다. 두 사람은 참으로 평생을 두고 생과 사를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윤동주 연구에서 송몽규란 인물은 도저히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 크게 자리 잡고 있다."-《윤동주 평전》


宋夢奎. 독립운동가윤동주의 사촌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으로 활동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으로서 어린 시절 같이 자라고, 학업과 유학을 함께 했으며, 윤동주와 함께 잡혀가 똑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아명은 송한범(宋韓範). 문호는 문해(문학의 바다). 필명으로 몽규(夢奎)를 우리말로 풀어쓴 "꿈별" 등이 있다. 이 본명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큰 별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가명으로는 '고문해(高文海)'가 있다. 아명은 '한범'으로 어린 시절 송몽규를 알던 사람에게는 '한범이'로 불리는 일이 많다.

1917년 9월 28일생이며, 1945년 3월 7일 해방을 몇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본적지는 함경북도 경흥(慶興)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출생지는 만주 간도성(間島省) 연길현(延吉縣) 지신촌(智新村) 명동둔(明東屯). 지금의 중국 조선족 자치구이다.

성격이 부끄럼 많고 조용한 윤동주와는 대조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쉽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와 거의 모든 생애를 함께 한 형제 같은 인물. 다만 윤동주와는 달리 그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윤동주 평전>에 회고한 문익환 목사에 따르면 그 당시 어려서부터 성적을 보면 송몽규, 윤동주, 윤영선, 문익환 자신이 항상 선두 그룹이었는데, 그 중에서 윤영선은 나중에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자신은 윤동주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꼈고, 윤동주는 또 자신보다 송몽규가 한 발 앞선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몽규를 보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뒤집어보면 현재는 내가 뒤쳐진다는 걸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윤동주가 약관의 나이에 쓴 시가 사망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을 보면, 그 윤동주가 열등 의식을 가졌던 당시 송몽규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송몽규의 아버지는 북간도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5세 때 충청도에서 연해주로 가다가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우상동에 머물러 가문을 일으켰으며, 송창희는 서울에 유학을 다녀왔다. 송씨 문중은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송몽규의 삼촌 손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1920년 전사, 송창근은 일본-미국으로 유학하여 1931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몽규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의 딸로서, 윤동주의 아버지인 윤영석(永錫, 1895-1962)의 큰 누이동생인 윤신영(信永,1897-?)으로 그녀는 윤동주의 고모가 된다. 송창희는 25세 때 명동에 왔는데, 체격과 인물이 뛰어나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큰 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가 자기 큰 딸과 선을 보게 하여 결혼시켰다고 한다. 송창희는 윤 장로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양잠을 가르쳤다.

송몽규는 1917년 파평 윤씨 가문에서 친정집에 와 있던 윤하현 장로의 큰딸 신영에게 9월 28일 태어났다. 이후 12월 30일 이 집안의 외아들 영식의 가족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3달을 차이 두고 윤동주와 함께 태어나, 5살이 될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윤창식이 따로 집을 구하고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송몽규의 동생으로는 여동생 한복(1923년생), 남동생 우규(1931년생)가 있다.

2.2. 학업[편집]

윤동주는 문학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송몽규는 연설을 잘했으며, 정치적 리더십이 두드러져 장래 희망을 일찌감치 독립군으로 정해놓고 있었다.” - 문익환 평전


1925년, 8살 나이로 같은 마을의 또래였던 윤동주문익환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 교장이자 외숙부 김약연 선생에게 사사 받았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고 리더쉽이 강한 인물로,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 등을 공연하는데 주도했고,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으로 찍은 문예지를 내기도 했다. 이 때,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서 수입해온 아동지 《어린이》,《아이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윤동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김신묵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명동소학교가 '교회학교'에서 '인민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송몽규가 큰 일을 했다고 한다. 김신묵 장로는 문익환목사의 어머니이다.

1929년 봄,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교회학교를 인민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몽규 역시 고작 12살 나이에 송창희 선생의 주장에 따라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워낙 다부진 성격이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윤동주와 함께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20여리의 등교길을 매일 함께 다녔다고 한다. 룡정으로 이사하면서 1932년 4월에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송몽규는 윤동주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1934년 12월, 중학교 3학년으로 18세 나이로 꽁트 《숟가락》을 써서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다. 아명인 송한범으로 실렸다. 윤동주보다 이른 나이였으며 윤동주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1934년부터 문해(文海)라는 호를 썻다. 글(文)의 바다(海)라는 뜻으로 송몽규가 문학에 품고 있었던 큰 뜻을 짐작케 한다. 송몽규는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크게 새긴 사각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는데 사용했는데,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이 도장이 찍힌 게 몇 권 있다고 한다.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은 민족주의자였는데, 송몽규는 이때부터 민족의식을 강하게 가졌다고 한다.

2.3. 독립군 투신[편집]

돌연 송몽규는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남경으로 떠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한인반으로서는 2기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장개석에게 지원을 받아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던 학교로서, 10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군사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장개석은 이를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송몽규는 '왕위지'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은진중학교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명희조(明羲朝) 선생[1]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같은 시기에 송몽규와 함께 은진중학교 선배를 통해서 점조직으로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때 잡지를 만들었는데 김구가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중국의 재정지원 중단으로 반이 해체되자 학교를 떠났다. 1935년 11월에는 중국의 제남지구(濟南地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웅의 일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는데, 1936년 3월, 산동성 성도 제남(濟南)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 이래로 일본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송몽규는 강제귀국 조치를 당하고, 1936년 6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등의 혐의로 본적지 함경북도 웅기경찰서(雄基警察署)에 구금되었으며, 고문과 취조를 받다가 8월 말 무렵 석방되었다. 이 떄부터 경찰의 요시찰인물이 된다.

이후 송몽규가 일본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특고월보』에서는 송몽규가 1936년 3월에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권유로 자수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1936년 특고경찰이 작성한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따르면 송몽규가 체포된 시간과 장소는 '1936년 4월 10일, 제남'으로서, 북간도 대랍자에서 일본 경찰에 자수했다고 기록된 '1936년 3월'과는 다르다.

『사상월보』에 실린 판결문에는 송몽규가 1936년 4월 부터 본적지 옹기경찰서에 유치되어 취조를 받았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는 선인군관학교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에 명시된 체포 시기, 정황과 일치한다.

송옹규는 송몽규가 일본 경찰에 잡혀서 본적지로 압송되는 현장을 우연하게 목격하였다. 이 역시 자수설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일 송몽규가 집안 어른들 권유에 따라서 자수를 해서 압송되었다면 본가에서 연락이 가서 압송 때부터 뒷바라지를 시작했을 것인데, 정작 옹기 본가 사람들은 송몽규의 압송 현장을 우연히 보고서야 체포되었다는걸 알게 되었고, 무슨 사건으로 체포된 건지 전혀 몰라서 집안 어른들이 알아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2.4. 학업 재개[편집]

1937년 4월, 용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했다고도 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간도에 있던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를 졸업했다고도 한다. 조선족 신문에서는 전자, 국가보훈처 국립유공자 보훈록에서는 후자로 쓰고 있다. 본인은 은진중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8년 4월에 서울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에 윤동주와 나란히 합격하였다. 경제적으로 유망한 학교에 가길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희전문 문과에 갔다. 하지만 당시 연희전문은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기 때문에 사촌 간이 나란히 합격했다는 것은 크나큰 경사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의 8월에 송몽규는 시 《밤》을 적어서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또한 연희전문에서는 1932년에 창간된 문과학생회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文友)》를 이어받아 문예부장으로서 활동했다. 문우의 마지막 호인 1941년 판에서 필명 '꿈별'로 '《하늘과 더불어》'[2]를 발표했다. 윤동주는 이 때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문우에서 함께 발표하였다. 편집인은 일본 유학을 함께 하게 된 강처중(姜處重).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3]


송몽규는 자신들이 참가하게 된 문우 마지막 호에서 안타까운 심경이 가득한 후기를 남겼다.

대학에서 송몽규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한국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쓰게 하여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데 있다고 보았고, 민족문화를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2월 부터 동급생 윤동주,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인잡지 간행, 문학작품 품평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를 2등으로 졸업하였고, 1942년 봄에 윤동주와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떠나면서 도항증명서를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된다. 윤동주는 후에 이 때의 감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드러내었다.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합격했으며, 윤동주는 릿쿄대학에 들어갔다가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하여 송몽규와 재회했다.

42년 10월 부터 43년 7월까지, 도시샤대학의 윤동주와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함께 교토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이 기회를 노려서 민족의 독립을 기획하는 한편, 민족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를 하는 활동을 했다. 

2.5. 체포와 사망[편집]

1943년 7월 10일,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7월 14일 체포되었다.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 경찰서의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944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44년 4월 13일에 윤동주와 함께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을 비판하였으며, 일본이 머지 않아 패전할 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서 대세를 몰아 조선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형이 확정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윤동주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절명했으며, 3월 7일 송몽규 역시 사망하여 순국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옥사에는 생체실험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4]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 장재촌 뒷산에 묻혔으며, 윤동주의 비문을 지었던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라는 비문을 썼다.

3. 사후[편집]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 송몽규의 조카가 되는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송몽규의 일생도 함께 정리하였다. 그 동안 무덤의 위치가 잘못 알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었으나,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수록된 증언 덕분에 올바른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0년 4월에 송몽규의 묘는 윤동주가 묻혀 있는 용정으로 이전하여 윤동주의 묘에서 10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함께 묻히게 되었다.

사후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4. 송몽규 전집[편집]

송몽규의 작품은 거의 남지 않았는데,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 연희전문학교에 <문우>에 발표한 《하늘과 더불어》,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밤》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문단이 곧 송몽규 전집(…)이다.

술가락 -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5]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 하늘과 더불어 -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太陽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思念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意欲의 殘滓만
쓰디쓴 追憶의 反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戀人이 없어 孤獨스럽지 않아도
故鄕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祈願하련다.

 

- 밤 -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5. 대중문화[편집]

윤동주의 「이런 날」(1936. 6. 10)에서 언급되는 '형'이란 송몽규를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사이 좋은正門의 두돌긔둥끝에서
五色旗와 太陽旗가 춤을추는날,
금(線)을 은地域의 아이들이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乾燥한學課로
해ㅅ말간 倦怠가 깃들고
‘矛盾’ 두자를 理解치 하도록
머리가 單純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頑固하던 兄을,
부르고 싶다. -1936년 6월 10일

― 윤동주 이런 날

 


송몽규, 윤동주와 연희전문학교 시절을 함께 했던 벗 강처중(1916-?) 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발문에서 아래와 같이 둘을 추모하였다.

(전략)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후쿠오카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 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주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 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건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파일:external/www.starseoultv.com/378995_170072_215.jpg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2016년작 한국 영화 <동주>에서는 박정민이 송몽규 역으로, 윤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과 함께 사실상의 공동 주연으로 열연했다. 이 작품으로 그해 다수의 주요 영화제에서 신인 남우상을 차지했을 정도.
 

[1]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동양사학 출신으로서, 민족주의자였다.[2] 목차에서는 "하늘과 더브러"로 되어 있다.[3] 출처[4] 동주(영화)에서도 송몽규(박정민 분)가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 앞에서 '형무소에서 이상한 주사를 맞고 있는 바람에 동주는 먼저 죽었고 자신도 얼마 안 남았으니 고향에 묻어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5]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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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명동촌 송몽규의 집
송몽규 옛집(지금 헐리워서 없고 새로 복원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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