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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를 한꺼번에 그리기...
2017년 10월 08일 11시 31분  조회:1998  추천:0  작성자: 죽림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 :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원시(原始)의 세계를 찾아나선 예술가

 

 

나부습작(裸婦習作)

 

고갱은 일요화가(日曜畵家)로서 코로나 쿠르베의 영향에 의한 그림을 그리다가 1874년 피사로와 만나 차츰 당시의 파리 화단에 물결치고 있던 인상파(印象派)의 화론(畵論)에 공감하여 갔다. 이 작품은 1881년 제6회 인상파전(印象派展)에 출품되었는데 그때 유이스만스의 격찬을 받아 하나의 일요화가에 지나지 않던 고갱의 이름을 크게 높이는데 성공한 그림이다. 유이스만스는 '조금 부풀은 듯한 허벅지에 이어져 있는 하복부나 그늘진 으슥하게 된 둥근 유방 아래의 잔주름, 다소 메마른 무릎의 관절이나, 손목의 볼쏙한 부분 등은 얼마나 많은 진실이 담겨져 있는 것이겠느냐'라고 했지만 확실히 여기에는 알몸 그 자체에 접근 하려는 일종의 생생한 욕구가 느껴진다. 그림의 모델은 고갱 집의 가정부로서 젊을 때엔 들라크로아의 모델을 한 적도 있었다.

 

 

야회복을 입은 메트 고갱

 

고갱은 1873년 11월, 23살의 덴마크 여성 메트와 결혼 했다. 결혼 전 어느 편지에서 그녀의 강한 성격과 고귀한 감정에 대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진주를 덴마크로부터 뺏어 오기 위하여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작정입니다.' 고 했지만, 결혼 후 북구(北區)의 프로테스 탄트풍(風)의 엄격한 윤리관에 젖어 있는 그녀와 고갱과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의 남편이 고갱 이외의 다른 남자였다면 훌륭한 부인으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갱이 고갱 자신으로 돌아 감에 따라 그녀도 자신을 드러내어 자제하지를 못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본격적인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베르탕 상점을 그만둔 다음 해에 르왕에서 그린 것인데 인상파적인 수법으로 그녀의 그런 기질(氣質)을 잘 나타내고 있다. 초상화에서 이런 투시력(透視力)은 고갱 시각(視覺)의 독특한 성질의 하나일 것이다.

 

 

캔버스 앞의 自畵像

 

고갱이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화가로서의 길을 택하여 전적으로 화업(畵業)에 투신함으로써 생활의 형편은 절망적이었다. 1894년 11월 그는 가족과 함께 부인 메트의 고장인 코펜하겐으로 옮겼으나 사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코펜하겐에 체재하고 있을 때 그린 것이다. 메트가 불어 레슨(佛語講習)을 하기 위하여 거실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는 지붕밑 다락방을 아틀리에로 쓰면서 틈틈히 제작에 몰두했다. 그가 회화라는 것은 외계(外界)의 재현(再現)이 아니라 내적 세계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슈프네케르란 사람에게 써 보낸 것은 1885년 5월의 일이었으나, 이 작품은 그러한 그의 정신과 회화관(繪畵觀)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어둡게 침잠된 색조 속에 화가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凝視)하고 있다. 고호나 고갱이 함께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 것은 대상(對象)의 응시(凝視)가 자기 응시(自己凝視)에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그들 공통의 지향에 원인한 것이었다.

 

 

4

명의 브르타뉴 舞踊手

 

1886년 제8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19점의 작품은 기대했던 만큼의 평판을 얻지 못하고 깨어진 하모니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그 시기의 구축성(構築性)이 강한 구도법(構圖法)과 그의 평면 처리법(平面處理法)이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의 길은 브르타뉴의 생활에서 하나의 달성을 보인다. 화면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브르타뉴 농부(農婦)의 얼굴을 옆으로 그리는 수법이나, 빨강이나 초록의 사용법 등은 두 번째 브르타뉴 시대의 작품을 예견케하는 점이고, 전경의 인물이나 사물을 크게 그리고 후경(後景)에 여러가지 정경을 그려 넣는 수법으로 장식적인 화면에 원근법(遠近法)을 도입한 것은 고갱이 그의 타히티의 작품에 있어 자주 쓰던 수법으로, 그 싹이 여기에서 자란 것으로 느껴진다. 피사로부터 받은 점묘적(点描的)인 터치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평면적 의지가 화면 속에 교차되어 있다.

 

 

 

열대의 식물

 

이 작품은 1887년 뜨거운 태양을 쫓아서 마르티니크섬에 얼마간 체재하면서 그렸다. '원주민의 남녀는 서인도의 노래를 부르면서 종일 맷돌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그칠줄 모르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조롭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이만큼 변화가 풍부한 곳은 없을 것이다. 자연은 색이 선명하고 기후는 온난하며 때맞추어 시원한 바람이 분다.' 그는 이섬의 환경에 만족스러웠으나 여기서도 가난과 병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은 그가 초기에 자주 나타내던 전후경(前後景)의 대조적 구도법을 이섬의 자연에 의하여 장식적으로 바꾸어 나간 흔적을 느끼게 한다. 이 섬의 강한 태양은 프랑스의 힘없는 태양빛 아래의 경우처럼 인상파적인 분할적 수법(分割的 手法)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섬의 체험은 후일 그를 타히티로 가게 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욕하는 브르타뉴의 아이들

 

'나는 막 나체화(裸體畵) 몇 개를 끝맺었다. 이것들의 됨됨이에는 자네도 만족하여 줄줄믿는다. 이것은 드가풍의 하찮은 것은 아니란다. 가장 최근의 것은 개울가에서 두 아이들이 엉켜 있는 것을 그렸는데 이것은 페루의 야만인이 그린 실로 일본적(日本的)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888년7월 8일 슈프네 케르에게 보낸 편지). 

이 작품도 고갱이 말하고 있는 나체의 연작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부인 메트가 싫어했기 때문에 앞에 소개한 <裸婦習作> 외에 나체화가 없었으나 브르타뉴의 자연 속에서 그의 내면에 마르티니그나 페루의 추억에 잠겨 그의 정신적인 이미지에 순도를 더해갔다. 샛노란 풀잎의 색과 배경의 빨간색에서 그의 내면의 반영을 느낄 수있다. 브르타뉴에서 차츰 그는 피사로의 영향을 벗어나 인상파를 뛰어넘는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하여 가게 된다.

 

 

해변의 두 소녀

 

두 소녀를 전면에 크게 그리면서 먼 배경(背景)을 의도적으로 차단, 아주 평면적인 표현법을 썼다. 커다란 색면(色面), 선명한 분할(分割)등, 어떻게 보면 일본의 우끼요 에(浮世畵)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고갱은 고호와 함께 이 우끼요 에를 연구했고, 인상파 화가들인 마네, 모네 등도 색채와 형태의 표현 기법에 흥미를 나타냈었다. 고갱은 1889년 10월부터 르 푸르뒤라는 어촌(漁村)에 머물면서 현지 소녀를 모델로 한 <해변의 두 소녀> 외에 <황색의 그리스도> 등 대표작 수점을 그렸는데, 복잡한 가정 문제, 인상파 탈퇴, 고호와 비극적인 공동 생활 등을 치른 후여서 그림과 인간에 대한 그의 가장 심각한 번민을 이 소녀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그의 타히티행은 이와같은 번민과 파리 만국박람회 때 본 자바 미술에 대한 관심이 합쳐저 2년 후에 결행된다.

 

 

戱畵的(희화적) 自畵像(자화상)

 

아를르에서 고호를 떠나 1889년 4월에 세번째로 퐁 다벵으로 갔다가, 10월에 루 뿌르두로 가서 하숙집 식당의 찬장 위쪽 거울 판에 이 그림을 그렸다. 반대쪽에는 친구 마이엘 데 팜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사과와 뱀, 머리 위의 노랑빛 관 등을 추측하면고갱이 여기에서 자기를 구세주(救世主)로 견주어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 하다.

 

배경의 강한 빨강과 앞쪽의 강한 노랑으로 화면을 이등분하여 상태티즘(synthetisme)의 지도자상으로 부각하여 평면적으로 밀어버렸다. 그러나 밝고 빛나는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주는 인상은 어둡고 시니크한 괴로움이 감돌고 있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동료들 속에서 이 야만인의 고독을 방영하고 있는 것이리라. 바로 직후에 타히티의 원시림(原始林)에 자기를 던져, 그 야성을 불태울 거친 이지(理智)의 힘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황색의 그리스도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에 건너가기 이전의 최고 걸작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 상은 퐁 다벵에 가까운 트레마로의 교회당에 있었던 것이다. 원경에 보이는 것은 퐁 다벵 마을과 생트마르그리트의 언덕일 것이다. 세 사람의 부르타뉴 여인도, 십자가도, 붉은 색 나무들도, 모두 하나의 상징적 풍경의 요소로 화하고 있다. 야성이 가득하고 자만에 부푼 그가 이 작품에 임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견고하게 화면을 구축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비친 어떤 화재 (畵材)도 그가 나타내려는 의도대로 변형되고 추상화 (抽象化)되어 버린다. 옥타브 미르보는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 그리스도의 우울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얼굴에는 무서운 슬픔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무렵의 그의 심정이 바로 그랬으리라고 짐작된다.

 

 

 

 

아름다운 안젤

 

고갱은 브르타뉴 지방의 퐁 다벵에서 사트르라는 젊은 부부에게 여러 가지 신세를 졌다. 그는 감사의 뜻으로 미인으로 평판이 높은 안젤 사트르라는 젊은 부인의 초상을그렸지만, 이 아름다운 작품은 당사자인 그부인에게나 남편에게나 조금도 아름답게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고갱이 가지고 온 그림을 보고 부인은 '지독한 그림!'이라고 부르짖고 남편은 화를 내어, 고갱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돌아 갔다. 

테오토르 반고호(고호의 동생)는 이 그림의 인상을 '여기에 그려져 있는 여성은 젊은 암소와 같은데가 있어.. 얼굴의 표정도 태도도 실로 신선하며, 정말 시골티가 나고, 보고 있으면 아주 즐겁다.'라고 형에게 써 보내고 있다.이 평의 뜻은 소박하고 침착한 이 여성의 인상을 정확하게 전하여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自畵像

 

 

 

 

슈잔 밤부리지

 

1891년 6월 4일, 고갱은 타히티에 도착한 3일만에 부인 메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조금 있으면 초상화를 좋은 값으로 두세 장 그릴 수 있게 될 것 같소.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사방에서 물어오고 있기에 말이오. 이번엔 내가 될 수 있는 한 배짱을 좀 퉁기려고 하고 있소 그러는 것이 좋은 값으로 사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오.' 이 작품도 그가 말하는 초상화의 하나이다.

 

모델은 당시 타히티의 수도 빠뻬테에 사는 영국여성(英國女性)이었다. 타히티 궁전에서 당시 의식(儀式)이나 축전(祝典)을 거들거나 통역을 하거나 했는데, 고갱이 먼저 그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이 작품에는 아직강한 타히티의 작품적 특색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아를르에서 고호와 함께 그렸던 <루랭 부인의 초상>을 상기시키는 온화한 그림이다.

 

 

 

바히네 노 테 치아레

 

고갱이 타히티에 도착하여 얼마간 지난 후에 그린 작품으로, 간혹 그의 오두막집에 찾아오곤 하던 이웃 여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녀는 예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는 구라파적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럴 뿐이다. 어쨌든 역시 아름다운 것이다. 그 얼굴 생김새의 어디를 보나 곡선의 매듭 속에 라파엘로적인 조화가 있다. 조각가가 살을 붙인 것 같은 입은 온갖 말을 하고, 즐거움과 괴로움과의 입맞춤을 말하고 있었다. 그 울적한 표정 속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뒤엉켜 의연함 속에 순종(順從)함이 있었다. 미지(未知)한 것에의 두려움이 적당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서 정열을 기울여 일을 했다. 그 초상은 내 마음의 눈이 인정한 것을 그리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면을 그리려고 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노아노아에서)

 

 

 

해변에서

 

이 그림은 커다란 나무 등걸을 화면 중앙에 옆으로 눕혀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누고 있다. 위쪽에는 고기잡이를 하는 세 인물을 배치했는데, 앞 왼쪽의 여인은 곧 바다 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를 향하여 엎어지려는 순간으로 신선을 유도한다. 고갱의 타히티 작품 속에서도 이 작품은 가장 장식적인 쪽의 하나로, '나는 화가보다 공예가에 적합하다.'라고 그는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그림과 함께 많은 목각 부조(木刻浮彫)를 장식적으로 만든 것이 많고, 그것들은 그의 개성이 넘치는 독특한 착색(着色)에 의하여 훌륭한 그의 체취(體臭)를 풍기고 있다. 이 작품은 그의 그런 장식적인 재능이 신선하게 부각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쪽의 보라색이 감도는 분홍 색은 이를테면 그의 마음의 눈이 본 모래의 색이며, 나무 등걸 위의 빨간 꽃, 분홍색 모래와 노랑의 풀잎 등 그 장식적 효과는 찬란하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

 

'그러나 나는 50호의 그림을 한 점 그렸다. 노란 날개를 가진 천사 하나가 두 사람의 타히티 여인에게, 타히티 사람인 마리아와 예수를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다. 그것은 파레오를 걸친 나체화이다. 파레오라고 하는 것은 꽃모양이 있는 일종의 면포(綿布)인데 말이야,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는지 허리에 감는 거야. 배경은 지극히 어두운 산과 꽃이 피어 있는 나무들, 길은 짙은 보라색으로 전경은 에머랄드 그린, 왼편에는 바나나가 있다. 나는 이 그림이 제법 마음에 든다.'(1892년 3월 11일 몽프레에게)

 

고갱이 브르타뉴 이후 타히티에서도 화면에 간혹 기독교적인 주제를 취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를테면 중경(中景)의 두 여인의 모습이 자바 사원의 대상 부조(帶狀浮彫)에서 가져온 것은 원시의 신성(神性)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테 파토르마

 

샤를르 모리스는 이 그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뒤쪽을 활짝 열어제친 마오리인(人)의 집 출입구 쪽에 다리를 개고 앉은 한 여인이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골이 나서 볼이 부어 오른 모습을 하고 앉아 있다. 적어도 5분간은 혼자서 이렇게 부어있었을 게고, 적어도 5분간은 앞으로 더 부어서 있을 것이겠지.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고 그녀 자신도 모른다. 다분히 골이 나서 부어 있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중경(中景)에는 난처한 모습으로 개가 앉아 있고 밖에는 말을 탄 남자가 있다. 남편인지 연인인지. 여인의 모습은 아주 자연스럽게 풍부한 양감(量感)에 의존하고 있고, 다소 코믹한 고갱의 애정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브로타뉴의 환상적인 화면에서, 안정되고 온화한 화풍으로 바뀌어 가는 느낌이 풍기는 작품이다.

 

 

 

어마, 질투하고 있니?

 

1892년 7월 고갱은 몽프레에게 '나는 최근 모델없이 나체화를 한 장 그렸다. 물가에 두 여인이 있는 그림이다. 지금까지 그린 것 중에서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쓰여 있다. 바로 이 그림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샤를르 모리스는 이 정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영(水永)을 하러 온 두 자매가 더운데도 동물과도 같이 우아하게, 싱싱하게 몸뚱이를 뻗치고 중얼중얼 하며 지금까지의, 또 지금부터의 연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돌연 말다툼이 벌어진다. 뭔가를 생각해 낸 것이다. '어마, 질투하고 있니?' 이 대담한 구도에 두 인물의 누움과 앉음의 배치, 양광(陽光)과 음영(陰影)의 배치에서 뭔가 비밀스러운 회화(會話)를 누구나 상상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타히티란 한 원시적인 낙원에 사는 한가로운 주민(住民)의 생활을 단면적(斷面 的)으로 잘 느끼게 해준다.

 

 

 

언제 결혼하니?

 

타히티에서 그린 고갱의 작품에는 재미있는 제목이 많다. <언제 결혼하니?>. <어마, 질투하고 있니?>, <왜, 골이 나 있니> 등, 그 외에도 대화의 단편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것이 많다. 일체의 인공적(人工的)인 여벌문화가 없는 타히티의 생활에는 그 일상의 한 장면 장면이 상징적인 의미성(意味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92년 7월에 그는 부인 메트에게 '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소. 지금에 와서야 이 토지와 그 향기를 알게 되었소, 나는 타히티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수수께끼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마오리족 (族), 바로 그것이오. 이런 것을 알기 위하여 나는 일 년이 걸려 버렸소.'라고 쓰고 있다. 그러한 그의 이해가 이 그림 속에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두여인의 동 (動)과 정(靜)의 자세의 대조(對照)에 하반신(下半身)이 겹쳐 있는 그 미묘한 뉘앙스가 인상적이다.

 

 

모자를 쓴 自畵像

 

고갱은 타히티에서 마저 가난에서 해방될 수는 없었다. 과도한 제작 생활과 가난이 겹쳐 1893년 8월 파리로 돌아간다. 이 자화상은 파리에 돌아간 후에 그린 것으로서, 그가 프랑스에서 그린 자화상 중에서 최후의 것이다. 배경의 위쪽에서 비스듬히 아래의 왼쪽으로 내려온 노랑색의 색면이 코펜하겐에서 지붕밑 다락방을 화실로 쓰던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자신의 고독과 고립을 생각하며 그린 것인지... 오른쪽 뒤에 걸려 있는 그림은 그의 타히티 작품 <영혼이 지켜 본다>인데, 그의 배후에서, 누워 있는 듯하다. 색조도 어둡고 고갱 자신의 표정도 어두운 것은, 떠나오기는 했어도 그의 전부인, 타히티에의 동경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은 파리 생활의 그늘같은 것일 게다.

 

 

 

아이타 파라리

 

파리에 돌아온 고갱은 9월에 몽파르나스 가까이에 있는 그랑 쇼미에르 거리에 아틀리에를 빌려 제작을 하다가, 곧 베르생제트리크스 거리의 아틀리에로 옮겼다. 고갱은 이아틀리에에서 자바 태생의 키가 작은 혼혈의 안나와 함께 살면서, 목요일에는 손님들을 초대하여 법석을 떨었다. 아마 그것은 이미 자신의 육체 일부가 되어 버린 타히티를 떠나, 그가 안주할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던 괴로운 몸부림 같은 것이었을 게다. 타히티의 풍토적(風土的) 향기(香氣)를 안나로부터 찾으려고 했다. 그가 모래 빛깔에서 자주 보여준 보랏빛이 감도는 분홍색을 배경에 대담하게 밀어붙이듯 평면적으로 칠하고, 신비한 느낌을 주는 밝고 투명한 푸른 색이, 검은 피부의 안나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그를 파리에 붙들어 놓을 수 없는 불안이 감도는 화면에는 온화함이 없다.

 

 

 

망고의 女人

 

'나는 세로 1미터, 가로 1미터 30센티의 그림을 막 끝 낸 찰나다. 지금까지의 어떤 것보다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초록의 바닥에 나체인 여왕이 비스듬히 기대이고, 시녀가 과일을 따고, 두 노인이 굵은 나무곁에서 지혜의 나무에 대하여 말을 주고 받고 있다. 배경은 해안이다 . 나는 여태껏 한 번도 색채의 점에 있어 이렇게도 무게있고 장대한 울림을 가진 것을 그려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개는 당번을 서고, 오른쪽에는 두 마리의 비둘기가 울고 있다.' (1896년 4월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 1895년 3월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갔다. 다시 그곳에서 한 해를 넘긴 그의 희열이 이 장대한 색채와 행복감에 차 있는 이 미묘한 하모니 속에서, 점점의노랑과 빨강을 빛내며 안정감을 전달하여 준다.

 

 

 

네바모아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것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나는 단순한 나체화에 의하여 지금까지 미개인이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호사함을 암시하려고 했던 거야. 전체는 일부러 어두운 색으로 가라앉혔지. 이러한 호사함을 만드는 것은 비단으로도, 빌로도로도, 삼베로도, 금으로도 되는 게 아니고, 화가의 손에 의하여 풍부한 것으로 되는 마티에르, 오직 이것으로만 가능해. 잡다한 것은 필요없고, 단지 인간의 상상력만이 그 환상에 의하여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는 것이지. 제목은 <네바모아>, 에드가 포의 큰 까마귀가 아니라 문지기가 딸린 악마의 새야. 그리는 것은 서툴지만- 지나치게 신경이 쓰여 발작적으로 일을 하고 있음-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나로선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1897년 2월 14일 몽프레에게)

 

 

 

 

미개의 詩

 

타히티는 사령(死靈)이 지켜주고, 가지각색의 윤회전생(輪廻轉生)이 생기고, 모든 것에 정령(精靈)이 머무르며 범신론적(汎神論的) 신화(神話)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고갱은 그러한 신화나 신앙을 주제로 하는 여러 작품을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 중의 하나이다. 고갱이 그린 마오리족의 그림들에는 자바에서 본 사원의 불상(佛像)에서 시사를 받아 원시의 신성(神性)을 불상의 포즈에 결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 주는 여인의 포즈는, 예의 자바불상, 바로 그것이고, 가슴 쪽의 형상은 불상 조각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아주 정적인 여인의 얼굴에서는 많은 감정을 아로새긴 것같이, 무표정 속에서 깊은 염원(念願)과 기도(祈禱)를 가진 표정은 독특한 것이다. 왼쪽 아래 원숭이처럼 보이는 기묘한 것은 타히티의 사령(死靈)이나 정령 (精靈)으로서 마오리족의 신앙의 대상으로 그려졌는데, 재미 있게 느껴진다.

 

 

 

테 레리오아 : 꿈

 

'군함이 10일쯤 출항을 연기한 것을 이용하여 다시 한 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서둘러서 그렸지만 지금까지의 것보다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테 레오리아 : 꿈>이라는 것이 그 제목이다. 이 그림에 있어서의 모든 것이 꿈인 것이다.

아이도, 모친도, 오솔길을 가는 말에 탄 인물도, 말하자면 이것은 화가의 꿈인 것이다. 그런 것은 그림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다분히 그런 일은 없을 줄 안다.'

 

(1897년 9월 12일 몽프레에게) 이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은 고갱의 오두막집이다.두 쪽으로 갈라져 있는 왼쪽은 화실로서 '나는 이것을 조각으로 장식하여 제법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두 인물은 들라크로아의 <알제리의 여인>을 상기시키는 포즈를 잡고 있다.

 

 

 

母性

 

초록의 대지 위에 한 여인은 과일을 들고, 한 여인은 꽃을 들고 서 있다. 두 여인의 보호 아래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는 타히티의 성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물의 뒤쪽에는 노란색 하늘, 그 속엔 분홍빛 구름이 걸려 있고, 오른편 하늘로 내려온 나뭇가지에는 꽃이 매달렸다. 대담한 색 배치와 건실한 구도로써 힘찬 교향악을 이루고 있다. 고갱의 어머니 아리느는 고갱이 하급 선원으로 항해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머니의 눈길은 부드럽고도 위엄이 있으며 맑고 애정이 넘쳤다.'고 말했었다. 그는 그의 딸에게 아리느라는 어머니와 같은 이름을 붙여 사랑했었는데, 1896년 딸이 급사하여 그는 심한 충격을 받은 바 있다. 이 작품은 항상 그에게 깔려 있던 슬픈 마음의 바탕에서 우러난 행복한 모성에의 찬가이다.

 

 

 

 

바이루 마치

 

바이루마치란 원래 마오리 신화에 나오는 종족의 창시자 타아로아의 아들 오로의 아내이다. 오로는 인간의 여자를 아내로 맞고 싶어서 어떤 호수의 근처에서 그녀를 만났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이 작품 속의 바이루 마치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밝은 빨강의 배경에 금색으로 빛나는 육체를 비스듬히 기대고, 그 뒤에 옥좌(玉座)와 같은 의자, 두 사람의 시녀, 도마뱀을 밟고 선 노랑새가 함께 엑조틱한 화면을 이루고 있다.

 

'노아 노아'의 초고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 그녀는 키가 큰 여자로 타는 듯한 태양빛이 그 황금색의 어깨 위에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젊은 아가씨는 바이루마치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고갱은 타히티의 여인들에게서 이러한 신화를 투시한 것일 게다.

 

 

 

白馬

 

고갱의 타히티 작품 중 이처럼 시정에 넘치는 목가적인 작품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평평하게 칠해진 색면(色面) 하나하나가 깊숙한 환상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색다른 작품이다. 짙은 프루샨 블루의 웅덩이, 거기에서 물을 마시는 하얀 말도, 또한 푸르게 칠해진 넘실넘실 뻗어 나는 나무 가지도, 늪가에 피어있는 하얀 꽃, 새빨간 말 잔등에 올라앉아 사라져 가는 섬의 여인도, 이상한 침묵 속에 잠겨 있다. 화면의 색을 대립적으로 배치하지는 않았지만, 빨강에서 노랑, 연두, 초록, 파랑, 보라로 해조의 변화를 주어 결코 단조로운 배색은 아니지만, 전체가 통 일된 조용한 목가적(牧歌的)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작품은 그가 자살을 시도했던 다음의 작품으로 늪의 수면이나 나무의 검푸른 가지는 어둡고 침잠된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있는 듯하다.

 

 

 

 

세명의 타히티인 또는 대화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그 구도가 대담하고 힘차다. 섬사람들의 일상적인 단면을 그의 장식적인 수법에 잘 끼워 맞추어서 현실과 환상이 야릇하게 교차한 느낌이다. 과일을 한 손에 들고 돌아선 여인의 과일에서, 또 어깨로 움직이는 선이, 몸을 둘러싸는 빨간색의 파오리와 서로 응답하며 만드는 부드럽고도 풍만한 정감은 정말 아름답다. 왼쪽에서 중앙으로 내려온 그녀의 어깨선이 중앙에 배면으로 선 남자의 어깨선에서 안정감을 구하고, 오른쪽 꽃을 든 여인의 어깨선을 통하여 위쪽으로 뻗는다. 이 세 인물의 몸을 나타내는 색조는 초록과 노랑과 밝은 분홍 등의 흐르듯 깔린 색과 함께 묘한 뉘앙스를 이루고 있다. 그려진 인물의 검고 건실한 얼굴의 정감이나, 어깨에서 내려오는 풍부한 살붙임, 평면적이고 무정형적(無定形的)인 배경의 색은 이 무렵의 특질을 잘 나타낸다.

 

 

 

 

빨간 꽃과 유방

 

이 작품은 고갱의 타히티 작품 중 가장 자연스러운 것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의식적인 그의 원시주의적(原始主義的) 조형 의지를 담고 있다면, 이 작품은 그런 의식을 떠나서 간결한 구도로 인공적(人工的)인 단순화(單純化)나 양식화(樣式化)의 흔적도 없이, 두 여인의 포즈에도 고갱이 가끔 쓰는 자바나 이집트의 그 양식도 볼 수가 없다. 젊고, 그래서 아름다운 매력을 몸 속에 가득히 지니고 자연스럽게 서 있다.

 

그것은 유럽인이 꿈꾸어 오던 이브(Eve)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반대적 이브도 아니다. 그런 대립을 뛰어넘은, 싱싱한 한 현실로서의 여체(女體)인 것이다. 빨간 꽃과 젖꼭지, 입술 등의 색에서, 오렌지빛, 노랑, 그리고 청록의 밝은 치마에서 차츰 어두운 암록색 검정의 머리칼과 치마색까지 차분한 하모니를 이루고 화면은 풍부하고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다.

 

 

 

선물

 

앞 쪽의 작품들이 대부분 타히티에서 일상적인 모습들을 그리는 듯하면서도, 상당히 고갱 내면적인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는 상징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본 다면, 이 무렵에 그린 그의 작품들은 그런 그의 강한 의식을 떠난 순수한 일상적인 현실을 그린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타히티 시대의 대표적인 모자상 (母子像)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바 오아 섬에서 그린 이 작품에는 섬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단면을 통한 고갱의 애정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인에게도, 그것을 지켜 보고 있는 왼쪽의 여인에게도 양식적(樣式的)인 강조는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일상성을 묘사한 풍속화적인 작품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고갱이 인간의 내면을 투시하는 관찰안(觀察眼)과 닦아온 그의 조형적 형식미의 승화와의 사이에 이루어진 균제의 예술적인 격(格)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부채를 든 아가씨

 

이 작품은 그가 히바 오아 섬에 옮긴 다음 해에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이 섬에 옮겨 온 이후에 그린 여인들은 타히티에서 그린 것처럼, 어깨가 넓고 굵은 팔을 가지고 있지 않고, 반대로 부드러운 몸집에 소녀적인 가냘픔을 보여준다. 이것이 실제적인 모습인지, 고갱 자신의 건강이 나빠져서 반영된 모습인지는 몰라도, 거기에는 찬탄보다는 애정이, 양식보다는 친밀한 일상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소녀와 같은 부드러운 몸매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으나, 그 구도, 그리고 인물과 의자와의 결구(結構)는 대단히 건실하게 이루어져 있다.

 

 

 

부르는 소리

 

 

1901년 11월, 고갱은 몽프레에게 자기 생활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한쪽 구석에 조그마한 잠잘 곳을 둔 커다란 아틀리에, 이것 저것 모두 선반에 정리하여 손이 닿는 곳에 있다. 그늘진 곳에 달아맨 그네에서 낮잠을 자고 있으면, 3백미터 앞의 바다에서 야자수의 숲을 넘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여기서는 시(詩)가 저절로 생겨난다. 시상(詩想)이 떠오르는 것은 그림을 그리면서 몽상에 잠겨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 작품은 고갱의 이런 말들을 상기할 수 있게 한다. 전경의 풀밭 빛깔은 화려한 꽃밭과도 같은 빨강, 분홍, 노랑색 들의 해조(諧調) 뒤쪽의 잔디밭을 앞에 하고 여기 저기 선명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듯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는 이들의 귀에는 어떤 소식이 전해질지?

 

 

 

부채가 있는 靜物

 

 

 

해변의 騎手들

 

이 작품은 고갱 최후의 거주지인, 역시 히바 오아 섬의 아투아나 해안에서 그려진 그림이다. 개개의 포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것들을 서로 결합시키는 긴밀한 공간 감각(空間感覺)은 드가를 상기시킨다. 고갱은 선배 드가를 일생 동안 찬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 만년의 이 작품에 있어서 그는 다시 드가에 새삼스럽게 더 접근한 느낌이다. 그러나 동시에 화면의 대부분을 메운 모래밭의 분홍색은 고갱 특유의 것으로서, 포비즘 (faubism)에 발전하는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을 그릴 무렵 고갱은 관헌(官憲)과의 분쟁이나 병의 악화 때문에 매우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화면의 생기있는 표현은 조금도 그런 어두운 그림자가 없다. 그리고 시력이 아주 나빠졌는데도, 이 화가가 최후까지 작가로서의 힘을 잃지 않고 제작할 수 있었던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브르탸뉴의 추수 MOISSON EN BRETAGNE

 

1889년 캔버스 유채 92x73Cm 런던대학 코틀드 인스티튜트 갤러리 소장

 

 

 

未開한 이야기

 

만년의 고갱은 이 섬의 여러 가지 전설에 귀를 기울이고 흥미를 느낀다. 또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의 이야기로, 때로는 신비하게, 또 때로는 상징적인 성격으로 화면을 이루어 나간 것이 많다. 이 작품에서도 불상(佛像)과 같은 모습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젊은 남자와, 그 한쪽에 가까이 붙어 앉은 젊은 여인, 그들을 둘러싼 나무들과 꽃들, 이것도 고갱이 히바오아 섬에서 듣고, 보고, 느낀 이야기의 한 장면일 것이다. 그 배후의 기이한 인물은 고갱의 퐁 다벵 시대의 야코브 마이 에르 데 항이다. 곱사등이며 조그맣게 생긴 사내로서, 항상 20파운드나 되는 성서를 들고 다니는 이 남자를 여기에 그림으로써 고갱은 스스로의 과거와 현재를 한꺼번에 그리려 했던 것 같다. 그의 과거에 힘들고 괴로웠던 나날이 만년의 그가 본 섬의 일상성에 결합되었다.

 



출처:[톰과 제리 아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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