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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눈 "나"를 고백한 시, "너머"를 상상한 시를 쓰다...
2017년 11월 13일 20시 55분  조회:2391  추천:0  작성자: 죽림
▲  윤동주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자화상’의 친필 원고. 윤동주는 미움, 연민, 그리움 등 시간과 감정의 변화를 통해 자기 긍정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윤동주 100주년, 문학과 역사  
-  ‘1인칭’ 과 ‘너머’ 의 시인
 

◇ 윤동주의 생애를 다시 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타계하였다.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문학사에서 윤동주처럼 이른바 요절 문인으로 알려진 이들은 이상(1910∼1937), 김유정(1908∼1937), 박인환(1926∼1956), 기형도(1960∼1989) 등이다. 모두 30년을 채 못 살았지만, 이들이 남긴 작품들은 한결같이 한국문학사를 환하게 비추는 당대의 별이자, 지금도 애독되는 고전적 텍스트들이다. 그런데 이들과 윤동주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윤동주는 마지막 생애 1년 7개월가량을 경찰서와 감옥에 있었다. 1943년 7월 14일 일본 교토(京都)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피검되어 12월 6일 검사국으로 송국되었고, 1944년 2월 22일 송몽규와 함께 기소되었고,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고, 그 후 후쿠오카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으면서 죽어갔다. 그러니 그의 27년 1개월 남짓한 생애에서 1년 7개월의 공백이 생긴다. 계산하면 그가 자유롭게 세상을 호흡한 시간은 25년 6개월 15일 정도인 셈이다. 

그런데 윤동주가 교토에서 살았던 동안의 기록들 역시 망실되어 지금 찾을 수 없다. 당시 도쿄(東京)에 있던 당숙 윤영춘이 서둘러 교토에 와 윤동주를 취조실에서 면회했을 때 윤동주가 자신이 쓴 조선어 글을 모두 일본어로 번역하고 있었다고 술회한 것으로 미뤄, 윤동주는 교토에 있는 동안에도 많은 글을 썼을 것이다. 윤영춘도 그 원고량이 상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그 글들은 지금 우리에게 없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가 우리에게 남긴 지상 최후의 기록은, 도쿄의 릿쿄(立敎)대를 다니던 1942년 6월 즈음에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에게 편지와 동봉하여 보낸 시편들이다. 릿쿄대 편지지에 깨끗하게 정서한 그 작품들은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씌어진 시’ ‘봄’이다. 앞의 네 편에는 창작 일자가 남아 있고, 마지막 ‘봄’에만 날짜가 빠져 있다. ‘사랑스런 추억’과 ‘흐르는 거리’는 각각 5월 13일과 5월 12일의 창작 일자를 달고 있으니까 윤동주가 꼭 창작 순서대로 정서를 한 건 아니다. 그러니까 ‘봄’은 대략 ‘흰 그림자’를 쓴 4월 14일부터 ‘쉽게 씌어진 시’를 쓴 6월 3일까지 어름에 쓰였을 것이다. 늦게 잡아도 ‘봄’이라는 시상에 어울리려면 6월 안에는 썼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동주가 남긴 120여 편의 시와 4편의 산문은 모두 1942년 6월 이전의 작품이 된다. 어림잡아 윤동주의 ‘기록자로서의 생애’는 24년 5개월 남짓이 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윤동주의 발화는, 모두 20대 초반에 이뤄진 것들이다. 

이는 앞에서 거론한 이상, 김유정, 박인환, 기형도 등의 대표작이 대부분 20대 후반에 쓰였다는 점과 유의미한 대조를 이룬다. 이상의 ‘날개’나 ‘권태’ ‘실화’ 등은 그의 말년에 쓰였고, 김유정의 ‘동백꽃’ 등도 마찬가지다. 박인환의 걸작 ‘세월이 가면’도 유작으로 쓰인 것이고, 기형도도 대부분 20대 후반에 절창들을 연쇄적으로 써나갔다. 그런데 윤동주는 20대 초반에 그의 모든 작품을 쓴 것이다. 이 점은 강조되어 마땅한데, 그만큼 윤동주가 과조숙한 사람이었으며, 또 그에게 20대 후반이 허락되었다면 더욱 훌륭한 작품을 남겼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해주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윤동주는 진짜 ‘청년 시인’이 아닐 수 없다. 


▲  일본 교토 도시샤대에 있는 정지용 시비(오른쪽)와 필자.

◇‘일인칭’의 시인 윤동주 

하지만 이러한 요절 자체가 윤동주에 대한 비상한 매혹을 불러온 것은 아니다. 그는 좋은 시를 다수 남긴 훌륭한 근대 시인이고, 어쩌면 한국문학사 전체를 조회해 보더라도 그 함량과 파생력에서 단연 일급에 속한다. 그렇다면 윤동주 시가 가지는 진짜 브랜드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부끄럼’을 키워드로 하는 성찰의 언어와 ‘저항’을 키워드로 하는 민족주의적 독법이 오래전부터 매개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윤동주는 다른 시인에게서는 찾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그만의 독자적인 특장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한편으로는 ‘나’를 고백한 시로, 다른 한편으로는 ‘너머’를 상상한 시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끊임없이 토로하고 고백한 일종의 ‘자기 폭로’로서의 예술을 보여준 윤동주의 특성은,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서정시의 원리이니 새삼 크게 강조할 것도 못 된다. 하지만 윤동주가 시를 공부하고 노트에 써두고 또 자필 시고를 묶을 때의 한국 시의 맥락과 성취를 전제해 보면, 그 방향과 성취는 자못 돌올하다.  

먼저 윤동주가 깊이 사숙하고 모방하고 또 비껴갔던 정지용의 경우, 그는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나’를 전면에 내세우는 고백 시편보다는 풍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명하게 담아내는 사물 시편을 많이 썼고, 아니면 주체를 지우면서 신성이나 풍경 속에 몰입하는 신앙 시편과 후기 ‘백록담’ 시편을 썼다. 

윤동주는 그에게서 시어의 혁신, 이미지의 참신함, 조선어의 예술성 구현 등을 정성껏 배웠지만, 시 안에서 차분하게 일인칭의 목소리를 발화하는 점에서는 스승의 시로부터의 역주행을 택했다. 사실 윤동주의 화자는 그대로 청년 윤동주의 발화와 가장 가까운 근사치이다. 이 점은 앞 시대의 소월이나 만해가 주로 배역 시편을 썼다거나, 임화나 이상이 실험적인 다양한 화법의 시를 썼다거나, 김기림이나 김광균 등이 묘사 시편을 썼다거나 하는 사실로부터 훌쩍 벗어난 윤동주만의 문학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에게는 시인과 화자 또는 내포적 화자와 현상적 화자 같은 개념이 미분화한 채, 시인 자신의 진솔한 고백에 시적 발화가 통합되어 있다. 물론 이는 백석의 후기 시편들과 구조적 동류항을 이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윤동주 시만의 ‘자기 폭로’ 방법을 독자들이 좋아했던 데 있다. 윤동주는 끊임없는 부끄럼과 고통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시 안에서 “괴로워했다”라고 쓰면 그것은 그대로 윤동주 자신의 괴로움이 되고,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바람이 불어’)라고 말하면 연애 한 번 안 해본 사람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 우리 근대 독자들은 서정시의 이러한 고백을 마음 열고 엿들으면서, 자기와의 동화와 투사를 감동 깊게 수행해간 것이다. 

이때 시의 화자 ‘나’는 시의 독자 ‘나’와 순간적으로 통합되면서 일체감을 낳는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사랑스런 추억’)라는 예언을 들으면서는 그 예언이 이뤄지지 않은 그의 불행한 생애를 불멸처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나오는 ‘나’는 그대로 ‘청년 윤동주’였고, 우리는 그가 고백하는 ‘나’를 만나 “최초의 악수”(‘쉽게 씌어진 시’)를 한 셈이다. 윤동주가 우리에게 이렇게 보편성과 항구성을 띤 채 새롭게 읽히는 것은, 그가 그 당시에 매우 새롭게 채택한 일인칭 고백으로서의 시법에 원인이 있고, 그 형식을 통해 자신만의 흔치 않은 진정성을 보여준 데 더 큰 까닭이 있는 것이다. 



◇‘너머’의 시인 윤동주 

이렇게 ‘나’를 고백한 시 외에도, 윤동주에게는 그만이 가진 매우 중요한 지향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을 우리는 ‘너머’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윤동주는 현상적인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들여다보면서도 그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곳을 넘겨다본 시인이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또 다른 고향”을 찾아 떠난다. 그곳이 진정한 고향이 아니라 고향 ‘너머’의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전제한 발화이다. 또한 그는 참회록을 써놓고도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쓰고자 한다. 날카로운 첨탑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또 다른 십자가를 상상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인류의 괴로움을 지고 괴로워했던 그리스도의 희생 이미지와 연결된 것이다. 그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기꺼이 희생의 불가피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또 다른’ 속성의 확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태초의 아침’을 넘어 ‘또 태초의 아침’을 노래하는 것 역시 차원이 전혀 다른 아침을 통해 신성과 세속이 벌이는 갈등의 드라마를 보여주려는 의욕을 담고 있지 않은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자화상’에는 세 명의 ‘사나이’가 나온다. 가을밤에 논가 외딴 우물에 가서 윤동주는 ‘한 사나이’를 들여다본다.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가다 다시 그 사나이가 가엾어져 도로 가 들여다본 것은 ‘그대로 있는 사나이’다. 다시 그가 미워져 돌아가다 생각하니 이제 그 사나이가 그리워진다. 이제는 그 사나이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 그 우물 속에는 천체들의 이동과 함께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미움-연민-미움-그리움’의 감정 회로를 따라가면서 궁극적으로 성숙한 시선을 통한 자기 긍정에 이르는 이 감동적인 흐름 역시 ‘사나이’와 ‘또 다른 사나이’ 사이의 시간과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집 마지막 작품인 ‘별 헤는 밤’에서 흙으로 덮어버린 이름 위에 자랑처럼 무성한 풀 역시 시인이 욕망하는 ‘또 다른 이름’의 형상일 것이다. 그렇게 윤동주는 현상 ‘너머’, 지금 ‘너머’, 이곳 ‘너머’를 오래도록 상상한 시인이다. 

이 점은 재차 강조되어 마땅한데, 사실 이처럼 ‘또 다른’ 차원으로의 존재 전환에 대한 갈망과 희원은 우리 시사에서 매우 드문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이원론적 사유라고 해도 좋고, 형이상학적 전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러한 입체적인 ‘치명적 도약’(옥타비오 파스)을 이뤄낸 시인으로서, 이는 소월이나 백석이나 김수영조차 가지지 못했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존재 비약과 전환의 욕망은 앞으로 더욱 세심하게 논구되어야 할 윤동주 득의의 브랜드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윤동주가 요절 때문에 작품 외적으로 과대평가된 것이 아니라, ‘저항시인’이라는 민족주의적 독법에 따라 시대적 후광을 얻은 것이 아니라, 우리 근대 시사에서 퍽 드문 영역인 ‘나’를 고백한 시, ‘너머’를 상상한 시로 남은 고전적 텍스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문화일보 9월 12일자 25면 6회 참조)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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