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미처 또 신문에 발표된 윤해영선생의 글에 곡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동북인민자위군송가》였습니다.《흥안령 높이 솟아 우리들의 새 기상 / 송화강 힘찬 줄기 우리들의 뜻일가 / 손잡고 너도 나도 달려 모인 동지들 / 맹세도 장하구나 동북인민자위군 // 빛나는 청천백일 대지에 붉은데 / 황하수 남북하늘 로선 리념 다르다 / 새로운 민주주의 자유평등 기발아래 / 이 한몸 혁명 위해 붉은 피도 바치리 // 동북은 우리의 터 우리들이 지키여 / 중국의 완전해방 실현하기 위하여 / 칼 들고 싸워 갈길 검산도수 험해도 / 막을자 그 누구냐 정의용사 우리들 // 새 세기 부는 바람 오대양은 끓는다 / 성을 넘어넘어 두만강을 건너서 / 침략자 내적외구 한칼로 베고 / 아세아 하늘가에 평화종을 울리다》(김종화선생은 격동된 심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1946년 7월, 목단강 서장안공영회관에서 부대의 위문공연을 했는데 2일간 걸렸어요. 끝나는 날 윤해영선생이 공연을 관람하고 나를 만나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조두남선생이 이미 조선으로 가고 없어 윤해영의 다른 친구 두세분과 함께 자리를 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상봉이였습니다. 그후 우리 악극단이 도문에 이르러 공연을 할 때 극단의 사람들이 윤해영선생이 떡국장사를 하는지 어느 식당에서 나오는것을 보았다고 합디다. 그가 재취한 후처가 잔치해서 일곱달만에 해산을 했는데 윤해영선생의 아이가 아니였답니다. 그래서 리혼을 하고 떠돌다가 조선으로 건너갔지요. 1949년 16절지 석판인쇄로 된 조선 노래집에서 윤해영선생의 가사로 되여있는《분여받은 땅》인지 하는 노래를 보았어요. 가사 내용은 대개《장군님 주신 땅에 밭갈이 하세》라는 뜻이였습니다. 그후론 소식을 몰라요. (윤해영선생은 조선에서 1956년에 별세했다고 한다. - 필자 주)
문 :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선구자노래》가 확실히 있었습니까?
답 : 1962년엔가 어느날 서울방송을 들을라니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더군요. 1944년 봄에 녕안에서 조두남선생의 신곡작품으로 발표한 그《룡정의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노래제목이《선구자노래》로 되여있더라구요.
특히 가사에서 보면 류랑민의 서러움이 력력히 보이는《눈물 젖은 보따리》거나《흘러온 신세》같은 구절은 없어지고 그 대신《활을 쏘던 선구자》,《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로 되였더군요. 원 가사에는《선구자》라는 문구가 전연 없었답니다.《룡정의 노래》를 발표한 그 당시 목단강지대는 물론 한국 전체에서도 항일투쟁이 이미 저조기에 들어갔으며 군경들의 경계가 삼엄한 때인데 커다란 녕안극장에서 감히《조국을 찾겠노라 말 달리던 선구자》라고 노래 할수 있었겠습니까? 그 시기 서울에서는 일장기를 걸고야 음악회를 했다고 하는데 그처럼《선구자》를 노래했다면 그것은 민족해방 투사가 아니라 우매한 사람일수밖에 없습니다. 연주에 참가한 나 역시 나이가 어리긴 했어도 단군력사를 배웠고 애국가를 부르며 자라났으므로 일본놈이 되기 싫어 종래로 일본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이긴 했어도 그런 담량까지는 갖지 못했었습니다.《선구자노래》는 원래의 곡이긴 하지만《룡정의 노래》를 가사로부터 제목에 이르기까지 고친것입니다.
한국의 책을 보면《선구자노래》는 1932년에 창작된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당시 룡정에서 불렸다고도 하는데 그때 룡정에서 살았거나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그런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답니다. 그리고 예술가란 자기의 작품을 자랑하기를 좋아한답니다. 조두남선생도 그러한 분이였습니다. 그런데 나하고 2년나마 사귀여왔고 무랍없는 사이였지만 그런 말 한마디 없었다구요. 더구나 1944년 봄에 녕안에서 가진 신작발표공연에서 처음으로《룡정의 노래》를 내놓았던것이랍니다.
문 : 조두남선생의 다른 애호가 어떤것이 있습니까?
답 : 그분은 장기를 아주 잘 두었습니다. 신안진에서 그분을 당할 사람이 없었답니다. 한다하는 오장기도 조두남선생한테 졌으니까요.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평양에 계실 때 담배돈이 떨어지면 거리에 나가 장기박보풀이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한테 가서 고개를 기웃거리면 벌써 장사군들이 슬그머니 돈을 쥐여주며 자리를 뜨기를 바랐다는겁니다. 평양에서도 그의 장기가 소문이 자자했던가 봅니다.
문 : 김선생님 외에 조두남선생을 아시는 분이 생존해계십니까?
답 : 있지요. 조두남선생의 작곡으로 된《고향생각》을 시창한 남수억(南寿亿)선생이랍니다. 지금 팔가자에 계십니다. 필자는 1995년 5월 16일 오후 1시 20분에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촌에 사시는 남수억선생을 찾았다. 남수억선생은 1922년 4월 4일 연길현 팔도향에서 출생하셨다고 한다. 그날 취재석에 동석한 분들로는 남수억선생의 부인 안경숙(安京淑 69세), 박장길(朴长吉 35세 연길시조선족예술단), 김윤찬(金允灿 47세 한국 서울신문사 사진부 차장) 등이였다.
▲ 목단강 ⓒ 봉황망(凤凰网)
당시 취재자료를 보자.
문 : 신안진으로 언제 갔습니까?
답 : 내가 7세 때에 조선 청진으로 이사를 갔다가 1942년 봄에 신안진으로 다시 이사를 갔댔습니다.
문 : 조두남선생이 신안진으로 언제 왔습니까?
답 : 1942년 가을인가 겨울인가일겁니다. 자그마한 연출대가 신안진에 와서 공연을 했는데 조두남선생이 손풍금을 쳤답니다. 약침쟁이였는데 안원장이 붙들어서 술을 먹이면서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권녕일이 주동이 되여 조두남선생이랑 목단강에 가서 민족예술절에 참가했습니다. 나는 1944년 녕안에서 가진 조두남선생의 신작발표회에서 노래《고향생각》을 불렀습니다.
문 : 조두남선생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답 : 키가 크고 몸이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걀죽했습니다. … 나는 팔가자림업국 기본건설과에서 일하다가 1980년에 퇴직했습니다. 윤해영선생은 이름은 들었고《룡정의 노래》를 작사하여 조두남선생이 곡을 붙여서 녕안에서 있은 신작발표공연에서 불렀답니다. 김종화선생과 남수억선생의 회상담을 들어보면 조두남선생은 신안진에서 살았었고 녕안에 살았던 윤해영선생과 래왕하면서《룡정의 노래》,《목단강의 노래》,《산》,《흥안령마루에 서운이 핀다》등 노래를 창작했다. 그리고《선구자노래》는《룡정의 노래》의 가사를 뜯어고친 재판에 불과하다. 그런데 조두남선생은 왜서 1932년에 윤해영을 만난 뒤로는 다시 상봉하지 못했고 윤해영이《선구자노래》라는 가사를 썼다고 했을가?
김종화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조두남선생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선생이 아니라 다른 제삼자가 조두남선생의 이름을 빌어 력사를 분식한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물론 이는 김종화선생께서 조두남선생을 존경하는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력사는 력사인것만큼 조두남선생이 글로써 남겼으니 믿지 않을수도 없는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조두남선생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을가?
광복후 랭전으로 말미암아 조선반도가 분단되고 중국과의 래왕도 끊어졌으니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국 국민한테 해도 윤해영, 김종화 등 동료들이 모를거라는 생각에서 한 말일가?
그리고《룡정의 노래》를《선구자노래》로 뜯어 고친것은 조두남선생의 소행일가 아니면 제삼자의 소행일가?
노래의 가사가 후세인에 의하여 임의로 고쳐진다면 그것은 력사의 진실을 뜯어 고치는것과 같다.《동북인민행진곡》의 제4절 마지막 구절의《아세아의 평화를》하는것이《새 동북을 건설하자》로,《동북인민자위군송가》의 제2절 첫구절《빛나는 청천백일 대지에 붉은데》가《빛나는 혁명기발 대지를 휩쓰는데》로 그리고 제4절 두번째 구절과 세번째 구절《장성을 넘고넘어 두만강을 건너서 침략자 내적외구 한칼로 베고》가《장성을 넘어넘어 황하장강 건너서 간악한 내외 원쑤 한칼로 베고》로 후에 고침으로써 민족색채가 사라지고 완전한 혁명노래로 탈바꿈 한것과 같이 한수의 애수의 노래 -《선구자노래》가 비장한 민족 투사의 노래로 된것이 아닐가? 조두남선생은 1932년 윤해영이라는 사람이 가사를 주고 표연히 사라진후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아마 독립군이였을것이라고 전설적인 이야기를 창작했는데 그것 또한 무엇때문일가?
광복전 몇해간 윤해영과 래왕하면서 여러수의 노래를 창작했고 아울러 동료들과 함께 윤해영의 집에서 파티까지 가졌으면서도 왜서 윤해영을 독립군 전사로 미화하고 희생되였을것으로 추측을 했을가?
그렇다면 윤해영은 독립군이였던가?
만일 조두남선생의 회상을 사실이라 믿어서 윤해영이《선구자노래》를 1932년에 썼다고 하자. 하지만 이미 알려진 윤해영의 광복전 창작품에서 이른바《선구자노래》를 내놓고 애수에 젖은 동요외에《발해고지》,《해란강》,《사계》,《오랑캐고개》,《락토만주》등은 친일시들이다.
1938년에 창작한《오랑캐고개》에서 시인은《오늘은 이 고개에 / 오색기 나붓기고 / 폭도군 젊은이들이여 / 노래소리가 우렁차서 / 두만강 나루터엔 다리가 걸리고-》로 일제통치를 구가했다.<계속>
정리: 최예지 중국 전문 기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작품 "혈연의 강(류연산)"의 원본을 수정없이 게재했습니다] ///봉황망코리아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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