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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울린 ‘간도 빨치산의 노래’
‘분노의 울림을 담아...쏟아져오라!
격분의 물방울을 높이...용솟음쳐라’
한국인인듯 민족혼 대변한 서사시
발표 직후 日에 체포돼 옥고끝 요절
민족·국가 초월한 비운의 반전시인
日 절대 존재 천황도 서슴없이 비판
펜으로 치열하게 평화 부르짖어
의인의 삶, 시대 초월한 감동 선사
윤동주(1917년 12월~1945년 2월)의 ‘서시(序詩)’는 아마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애송하는 시일 것이다. 또 윤동주 시인의 고결한 삶과 민족혼이 깃든 주옥같은 시는 각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상당한 카타르시스와 영혼의 안식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민족시인’ 윤동주가 살고 있던 시기에 비슷한 삶을 살다가 같은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옥고를 치르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일본의 반전(反戰) 시인이 있다고 하면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바로 마키무라 고(전村浩, 1912년 6월~1938년 9월)다. 일부에서는 ‘마키무라 히로시’로 부르기도 하지만 자신은 마키무라 고라고 불렀다. 본명은 요시다 도요미치(吉田豊道)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났다. 그는 1912년 6월 일본 서남부 시코쿠의 고치현에서 태어났다. 올해 9월3일은 서거 8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일본 경찰의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1938년 9월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치 윤동주의 시 원고를 친구인 정병욱이 전남 광양에 있던 자신의 집에 묻어뒀다가 일제 패망 이후 다시 찾았듯이 마키무라의 원고 역시 일본 군국주의가 발호하고 있던 1930년대 일본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출판사 사장이 기름종이에 싸서 땅에 묻어뒀다가 그가 죽은 지 25년 만인 1963년에야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1년 뒤인 1964년 10월에 ‘간도빨치산의 노래 -전村浩시집(신일본출판사, 1964)’가 최초로 간행됐다.
그는 만 20세에 ‘간도빨치산의 노래(間島パルチザンの歌)’를 ‘프롤레타리아문학(プロレタリア文學)(1932년 4월 임시 증간호)’에 발표했다. 이 시는 모두 12연 187행에 달하는 방대한 서사시다. 그러나 그는 이 시 발표 직후 고치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치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 시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오오, 3월 1일 / 민족의 피가 가슴을 치는 우리의 그 누가 / 무한한 증오를 한순간에 내동이친 우리들의 그 누가 / 1919년 3월 1일을 잊을쏘냐! / 그날 /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방방곡곡을 뒤흔들고 / 짓밟힌 일장기 대신 / 모국의 깃발이 집집마다 휘날렸다 / 가슴에 다가오는 뜨거운 눈물로 나는 그날을 생각한다! / 반항의 우렁찬 소리는 고향마을까지 울려 퍼지고 / 자유의 노래는 함경의 봉우리마다 메아리쳤다. (중략)
우리들은 함경도 사내와 여자 / 착취자에 대한 반항으로 역사를 새로 쓰는 내 고향의 이름에 맹세코 / 온 조선 땅에 봉화를 올렸던 몇차례 봉기에 피를 흘린 이 고향의 흙에 맹세코 / 고개를 숙이고 순순히 진지를 적에게 넘겨줄 수 있단 말인가 (중략)
바람이여, 분노의 울림을 담아 백두에서 쏟아져오라! / 파도여, 격분의 물방울을 높이 올려 두만강에서 용솟음쳐라 / 오오 일장기를 휘날리는 강도들아 / 부모와 누나와 동지들의 피를 땅에 뿌리고 / 고국에서 나를 쫓아내고 / 지금 칼(劍)을 차고 간도(間島)로 몰려오는 일본의 병비(兵匪: 병사 비적떼)여! / 오오, 너희들 앞에 우리가 다시 굴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려는 거냐 / 뻔뻔스런 강도들을 대우하는 법을 우리가 모른다고 하는 거냐”(후략)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간도(중국 연변)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던 젊은 청년 일본인이 이렇게 감동적이면서도 빼어난 서사시를 썼다. 물론 한국인과의 교류가 이 시의 토대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마키무라를 연구한 전문가 미야자키 키요시(宮崎淸)는 그의 시가 일본에서 사랑받고 높이 평가받는 이유를 ①청춘의 모든 것을 쏟아서 시인 자신의 혁명운동에 대한 정열과 체험을, 무엇보다도 그 마음의 진실로 표현해 객관화한 점, ②당시 일본인들이 부딪히고 있던 전쟁, 억압 등 냉엄한 현실과 그 역사적인 명운(命運)을 전위(前衛)의 입장에서 분명히 형상화해 보여줬던 것에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위의 시는 무엇보다도 일본인인 마키무라가 마치 한국인인 것처럼 너무나 생생하고 투철한 혼연일체의 몰입과 동일시, 철저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매우 놀랍다. 이 시를 읽는 누구나 작자가 한국인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1931년 9월 일본이 중국 동북(만주) 침략 이후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어떻게 이처럼 우리의 독립운동과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깊은 감동과 동참을 토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만큼 그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과 반일투쟁에 깊이 공감하고 국제적 연대를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키무라 시인은 만 열 살 때 고치시를 방문한 황족 앞에서 세계사를 강의하고 시를 짓는 등 조숙한 천재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특히 일본이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한 ‘만주사변’ 직후부터 이를 비판하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반전 문예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1932년 2월 고향 고치시에서 열리는 우익단체 ‘신무회(神武會)’의 연설회를 반대하는 삐라를 뿌리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다리 주변에 붙였다. 역시 이달 27일에는 고치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육군 보병 제44연대가 중국 상하이로 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반대하는 삐라를 제작 살포하는 등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반대하는 구체적 실천행동을 벌였다. 특히 마키무라는 반전 삐라의 원고를 주로 군대신문 ‘병사의 벗(兵士の友)’에 활용했는데 병사용 삐라는 카페 광고와 흡사하게 해 봉투에 넣거나 성냥에 넣어 외출병사에게 전하기도 했다. 또 밤에는 병영 안으로 직접 잠입해 전쟁에 반대하는 삐라를 뿌리기도 했다.
그는 같은 해 4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고향인 고치경찰서와 형무소에서 3년이 넘게 옥고를 치렀다. 특히 마키무라는 일본인들에게 절대적 존재인 천황에 대해서도 비판적 내용의 시 ‘떡의 노래(餠の歌)’를 지어 더욱 탄압을 받기도 했다. 고치형무소 수감 동안 심한 고문과 학대를 받아 심신에 큰 상처를 입었다. 특히 마키무라는 일본 당국의 전향 요구를 거부했는데 출옥 후 끝내 도사의 한 정신병원에서 불우하게 일생을 끝마치고 말았다.
감옥에 있던 마키무라는 조선 출신으로 일본 도쿄에서 활동한 좌익작가이자 운동가인 김용제(金龍濟, 1909년~1994년)의 ‘조풍(潮風)’ ‘사랑하는 동지에게’ ‘성장한다는 것’, 이 세 편의 시를 자신의 노트에 필사해놓았다. 마키무라는 충북 음성 출신의 김용제와 교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인 학자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에 따르면 김용제는 일본에서 맹렬한 프롤레타리아문학 활동과 좌익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7년 7월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는 변절, 전향해 오히려 맹렬한 친일분자로 일본 군국주의의 앞잡이로 활동했다고 한다. 마키무라의 초지일관한 행적과 너무나 대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키무라는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964년 10월 유고 시집 ‘간도 빨치산의 노래’가 출판되고 고치시 출신 작가 도사 후미오(土佐文雄)가 1966년에 소설 ‘인간의 뼈(人間の骨)’를 내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좌익작가로서 반전 시인으로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됐다. 그의 대표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는 정말 대단한 시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이 시는 서사시라는 문학작품 형식을 띠고 있지만 작자가 마치 한국인인 것처럼 느껴지고 진정으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고무하고 찬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역사학자나 역사학계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키무라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민족시인’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지만 윤동주보다 1년이 더 짧은 비극적 삶을 살았다. 우리 민족의 저항에 깊이 공감하고 이웃 중국 침략을 비판하며 저지하려 한 마키무라 시인의 뛰어난 저항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와 일련의 저항시를 읽고 이 천재시인의 사상과 삶을 기억, 추모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가끔 논란이 되는 독도나 일본군 ‘위안부’, 교과서 문제 등 한중일 사이의 복잡한 현안과 역사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중일 3국 국민과 민중, 학생들의 진정한 상호이해와 연대·성신(誠信)에 바탕한 교류가 도움이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윤동주 시인이 주목받듯이 우리에게 아직 낯선 미키무라 고 시인의 시와 반전 평화사상, 민중연대에 대한 이상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음미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치열한 반전 평화사상을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실천하면서 일제 당국의 모진 탄압을 받은 마키무라 고 시인. 간절히 한일 민중연대를 꿈꿨다는 점에서, 그리고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 진정한 공공선과 피압박 근로대중이 주인인 사회, 나아가 인도·정의·평화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의인’이라고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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