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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바로 이육사. 그가 마흔 하나라는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그 다음 해에 광복을 맞이하게 되어 더욱 안타깝지요.
오늘은 이육사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육사는 친가와 외가 모두 일제에 저항했던 대쪽 같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답니다.
그는 앞선 독립운동가들의 항일 투쟁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형제들과 함께 항일 무력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이육사와 형제들은 중국 베이징을 오가며 국내 소식과 군에 필요한 돈을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했지요.
이육사는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27년에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의 주동자로 휘말리게 되어 이육사와 형제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됩니다.
일본 경찰들은 이들 형제가 사건을 계획하고 폭탄을 운반한 것으로 사건을 조작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진짜 주동자였던 장진홍 의사가 잡히게 되어 2년 4개월 만에 석방되었어요.
이육사는 이때의 죄수 번호였던 264번을 따서 자신의 이름을 육사라고 지은 거랍니다. 원래 이름은 이원록이에요.
모진 고문 끝에 병을 얻은 이육사는 휴양을 하며 건강을 회복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러나 이미 일본에 감시 인물로 찍힌 터라 굵직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투옥을 당하곤 했죠.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1934년에도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났지요.
이런 식으로 감옥에 투옥된 횟수가 무려 열일곱 차례나 된다는군요.
일본이 이육사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어요. 살아생전 정말 쉼 없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거든요.
그는 중외일보의 기자로 활동하기도 하고, 중국 독립운동 기지의 조선 군관 학교에서 독립 투쟁을 준비하며 군사 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적 몰래 통신하는 법, 폭발물을 설치하고 터뜨리는 법 등의 훈련을 받기도 했어요.
뿐만 아니라 끝없이 만주를 오가며 국내외 소식을 전하고 독립군을 모집하기 위한 비밀 임무를 계속 수행했지요.
그러느라 이육사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어요.
건강이 나빠진 이육사는 시를 비롯한 다양한 글을 쓰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갔어요.
시를 통해서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던 거예요.
이 무렵 이육사가 쓴 「절정」, 「청포도」, 「광야」 등의 작품은 광복을 꿈꾸는 이들에게 크나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육사의 시 중에서 한 편을 감상해 보시죠.
그의 시를 읽은 사람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일제 강점기라는 어둠 속을 헤치고 나아가겠다는 시인의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었어요.
광야를 지은 후, 이육사는 영문도 모르는 채 경찰에 붙잡혀 베이징의 교도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갑작스럽게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동생 이원창이 황급히 베이징으로 향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요.
일본 영사관은 가족이 이육사의 시신을 확인하기도 전에 화장해 버렸거든요.
이육사의 유해는 처음에는 미아리 공동 묘지에 안장했다가 광복 후 안동시에 이장했어요.
1990년에 나라에서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내렸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죄수 번호 264번, 저항 시인 이육사 (생방송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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