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카테고리 : 오늘의 명상
명상이란 몸과 생각에 대한 단순한 통제도 아니고 호흡등을 제어하는 행위도 아니다. 몸은 조용하며 건강하고 긴장이 없어야 한다. 느낌의 감수성은 예민한대로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마음은 그 모든 중얼거림, 혼돈, 들떠있음, 그리고 무엇인가를 항상 더듬거리며 찾아다니는 것으로 부터 그쳐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혼란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몸과 마음으로 구성된 일개 유기체(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주는 것이 아니라,좀 깊이 더 들어가서 특정 경향성의 견해 , 굳어진 선입관,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애착을 지니고 있는 마음자체만이 관찰되어져야 한다.
마음은 건강하고 생기가 나며 힘이 넘칠 때에 느낌이 고양되고 극히 예민해 진다. 이런때는 습관과 욕망의 취향에 의해서 마음이 오염되지 않고, 원래 타고난 지성과 함께 몸이 해야 할 제 기능을 있는 그대로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몸이 아니고, 마음으로 부터 착수해야 한다.마음이란 알고 보면 생각들과 생각들의 다양한 움직임의 표현일 뿐이다.
단순한 집중은 생각을 협소하게 제한하고 구속하지만,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각(自覺)이 있을 때는 집중이 자연스럽게 오게 된다. 이 자각(自覺)은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버리고, 집착하고, 거부하는 그 생각하는 자(에고)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 자각(自覺)은 선택이 있을 수가 없는데,외면(대상)과 내면(주체), 이 양쪽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이 둘(대상과 주체)의 공통적인 내면적 흐름이며, 그래서 내면과 외면 사이의 분리란(主,客 이원화), 자각(自覺)에 의해 끝장이 나 버린다. 생각들은 사랑(하나됨)의 느낌을 파괴해 버릴 뿐이다. 생각은 단순히 즐김만 줄 뿐이고, 이 즐김을 쫏다보면 사랑(하나됨)은 옆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다.
생각 속에서는 먹고 마시는 등의 (감각적) 즐거움들이 계속적으로 그자체를 지속시키려고 만 하는데, 생각 안에서 이러한 단순한 즐거움을 통제 또는 억압하려고 한다는 것은별다른 효과와 의미가 없으며,여러가지 형태로 갈등과 강박적인 충동만을 더욱 일으킬 뿐이다.
생각이란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물질적인(파동성 의식)) 성품으로써시간을 초월한 경지를 추구할 수가 없다.
생각이란 기억이고 그 기억 속의 경험들은 지난해 가을날에 떨어진 낙옆처럼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한 자각속에서 (존재에 대한)주의집중이 나오는데,이것은 부주의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나의 존재에 대한)부주의는 몸이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습관을 만들고, (존재)느낌의 강도를 희석시킨다.
부주의(不注意) 자체가 (자기 존재에 대한) 주의로 바뀌어 질 수는 없다. 부주의에 대한 자각(自覺)이 곧 (나에 대한) 주의 집중이다. 이 의식의 복잡한 흐름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주시하는 것이 명상이며,마음의 혼란속에서는 오직 명상으로부터만 질서가 나올 수 있다. 이질서는 수학의 공식만큼이나 절대적이며,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작용이 바로 직관적 행위이다. 질서란 배열적이며, 구조적이고, 비례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야 뒤늦게 나오는 것들이다.
질서란 (기억된)개념적 내용들에 의해서 방해받거나 혼란되지 않은(고요한)마음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생각이 침묵할 때에 비움이 있고, 비움이 곧 질서인 것이다.
-지두 크리스나무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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