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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상여에 대한 간단한 조사--김선화
2012년 07월 16일 09시 49분  조회:4422  추천:0  작성자: 백화상조
상여에 대한 간단한 조사
<조선족 전통장례>세미나 응모작품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 김선화

 
《장례》하고 《죽은 사람》하면 머리카락이 쭈볏이 일어서고 밖에 나가기조차 무서워하던 필자는 박물관에 와서 많은 시간을 오래된 문물들과 접촉하면서, 특히 올해에 있은 전국 《귀중문물 데이터베이스(数据库database)》 건설에 참가하여 룡정부분을 책임지고 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 국가급 일급 문물인 상여를 진일보 가까히 접촉하고 그에 관한  재료를 수집하면서 많은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였고 문물 하나 하나에 담겨진 그 의미를 진일보 터득하게 되였다.
웅장하면서도 비감한 상여군들의 상여소리에 맞추어  명정을 선두로 공포, 요여, 만장, 상여, 그뒤로 상인, 조객 등으로 길게 늘어진 상여행렬은  20세기 6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연변지구 농촌에서 흔히 볼수있었던  한개 경관이였다. 상여는 장례시 죽은 자의 시체를 장지로 운반하는 공구인데 행상 또는 령여, 향두라고도 부른다. 상여가 제일 처음 문자로 문헌에 기재된 것은 조선의 《주자가례》라고도 할수 있는 리재가 쓴 《사례편람》인데 《대여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하기 힘들므로 상여를 사용해도 된다.》라고 씌여 있다. 그리고 8권으로 된 《사례편람》에서  3권부터 8권까지는 상례와 제례에 관한 부분이다. 이로부터 효도와 조상숭배를 인륜의 첫째 준칙으로 주장하는 유교륜리에 의하여 관혼상제의 사례 (四礼) 가운데서 상례와 제례는 그 절차가 얼마나 번잡하고 까다로웠는가를 엿볼수가 있다. 
상여는 장례때 씌이는 여러가지 물건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물건으로서 과거 상여의 정교함과 호화로움은 그 가족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을 나타내기도 하고 죽은 자에 대한 효도와 사랑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상여는 종족끼리 준비하는 것도 있었고 마을에서 공동으로 준비하여 쓰는것도 있었다. 이것은 비상업적인 행위로서 세를 놓는것이 아니고, 공익성적으로 마을에 상사가 생기면 서로 빌려다 쓰군 하였다. 상여의 좋고 나쁨은 한 마을의 명예와도 관계되기 때문에 매 마을에서는 자기마을의 상여제작 과정중에서 자연히 호화롭고 아름답게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였다. 그리고 종족에서 준비하는 상여일 경우에는 상여의 좋고 나쁨이 그 종족의 지위와 재력을 직접 표현하기 때문에 상여의 제작공예나 재료에 더더구나 성본을  아끼지 않았다.
60년대 초기까지만 하여도 연변의 조선족 마을마다에 거의 상여가 있었다. 평상시에는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 상여막을 짓고 그곳에 보관하였다가 유사시에만 가져다 쓰군 하였다.
우리가 답사한데 의하면 덕신향 석문촌에는 원래 상후동 (지금의 석문4대 )과 간촌(지금의 석문2대)에 각기 향두막이 있었다. 마을과 좀 동떨어진 곳이였는데 향두막은 돌을 쌓아 벽을 하고 짚으로 지붕을 이였는데 문은 하나만 냈다. 향두를 관리하는 사람을 “향두워량”이라고 불렀는데 마을 어른들이 일년에 한번씩 회의를 하고 선거를 하였다. 향두를 써야 할때에는 먼저 “향두워량”과 상의해서 쓰군 하였다. 60년대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잡귀신을 때려잡는다고 하여 향두를 불살라버리고 향두막도 허물어 버렸다.
우리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상여는 피나무와 적송으로 된것인데 1989년 훈춘현 마적달향 마적달진에서 수집한 것이다. 1960년대에 제작한 것이고 16명이 메도록 만들어졌다. 이 상여는 양장, 웃덥개, 몸체, 운각, 들대, 장식등 6개 부분으로 구성되였다. 양장은 너비1.5메터, 길이 3메터의 연푸른색 광목천 변두리에 15센치메터의 검은색 광목천 변두리를 둘렀고, 그 옆에 흰색천으로 레스모양을 만들어 달았다. 양장은 길이가 약 2메터 되고 직경이 7센치메터 좌우의 두대의  x자형 양장대로 긴 들대에 고정시켜 쓴다. 덮개는 앞뒤 두장의 반원모양의 룡수판을 세오리의 가름대로 고정시키고, 그위에 검은색 광목천을 덮어 지붕모양을 만들었다. 혼백이 검은 의복을 입은 저승사자에 안내되어 북방으로 간다고 생각하여 관 위를 검은색천으로 덮어서 사용하였다. 그 위에는 입에 여의주를 물고 머리를 각기 앞뒤로 향하고 몸체를 칭칭 감아 서로 얽힌 두마리 운룡모양의 조각을 마룻대에 얹어 고정시켰다. 그 룡조각위에는 또 하나가 크고 두개가 작은 꼭두각시 세개가  꽂혀 있다. 가운데 큰 인형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는데  이는 동방삭을 의미한다고 한다. 동방삭은 보통 사자를 탄 모습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사자를 타지 않고 직립하고 있다. 전설에서 삼천갑자를 살았다고 하는 동박삭은 죽은 자의 망령을 좋은 곳으로 안내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크기가 같은 두개의 꼭두각시는 하나는 남자모양으로, 하나는 여자모양으로 되여 있다. 죽은자가 남자이면 남자 꼭두각시를 앞에 꽂고, 죽은자가 여자이면 여자 꼭두각시를 앞에 꽂는다고 한다. 전체 조각은 피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는데 특히 룡조각은 모양이 생동하고 선이 미끈하여 흠잡을데가 없다. 하나의 상여는 조각기술과 목공기술 및 미공기술의 종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체부분은 아래위 두개의 네모난 틀로 되였는데 네귀에 4개의 기둥을 세워 련결하였다. 몸체 조성이 완성된후 기둥 웃부분에 봉황새 조각을 꽂고 휘장을 드리우면 된다. 휘장은 흰색을 위주로 홍, 황, 청 세가지색을 곁들어 이쁘게 만드는데 상여안의 관이 보이지 않게하는 작용을 한다. 운각은 윗틀 휘장을 고정시키는데 쓰는 둘레 막이인데 너비가 13센치메터인 널판자로 되여있다. 이 상여는 네쪼각으로 된 운각을 쓰기 편리하게 돌쩌귀로 연결해 놓았다. 운각에도 먹으로 국화, 련꽂 등 도안을 그려 넣은것을 볼수가 있다. 운각과 몸체 웃틀에는 상응한 디(卯)가 나있어 계자순자 (鸡子榫子)를 꽂아 고정할수 있게 만들었다. 이 상여에는 앞뒤에 각각3개씩 6개, 좌우에 각각 5씩 10개, 모두 16개의 계자순자가 있다. 계자순자의 다른 한가지 용도는 장식용 술을 거는 것이다. 들대로는 장강(长扛)과 횡강(横扛)이 있다. 장강은 길이가 5메터 남짓히 길고, 지름이 15센치메터인 두대의 적송으로 되였는데 그 한쪽에 나란히 일정한 간격을 두고 5개의 꺽쇠모양의 부속이 달려있다. 이는 횡강을 꽂아 사용할때 고정하는 곳이다. 두대의 장강은 세대의 길이 60센치메터 되는 단강으로 연결되여 있다. 횡강은  길이가 2.5메터 남짓하고  지름이 8센치메터 되는 다섯개의 나무대로 구성되였다. 상여를 멜때에는 횡강 사이를 기다란 흰광목천으로  련결한후 그 천을 상여군들이 어깨에 메고 횡강을 손으로 잡는다. 이 상여는 모두 50여개의 부속품으로 구성되였지만  한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장부구조로 련결되여 있다는 것이 특점이다. 사용이 끊난후에는 작은 부속품들을 분해하여 130×40×40인 작은 상자에 넣을수 있어 운반과 보관이 간편하게 만들었다.
이번의 자료수집에서는 또 한국의 많은 상관 자료들을 접촉하게 되였는데 우리의 상여와 한국 상여의 차이점도 보아내게 되였다. 한국에서 수장하고 있는 상여들의 룡수판에는 구호수법으로 대부분 벽사적 역할을 하는 룡의 머리나 도깨비 얼굴모양을 그려넣은 것이 특징이나, 우리가 수장하고 있는 상여의 룡수판은 반월형 널판자에 련꽃과 물고기등 그림을 먹으로 그려넣고 글자를 쓴것이 특점이다. 상여와 마찬가지로 룡수판 역시 지방, 사회계층, 제작자의 취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제작된다. 또한 룡수판은 전문가가 제작한 불교 공예품과는 달리 마을에서 솜씨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여기에는 만든 이의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소장하고 있는 꼭두각시 조각들은 기법이 복잡하고 여러가지 색갈을 내여 색감이 화려하지만 우리의 것들은 간단면서도 미끈한 기법으로 그냥 봉황만 약간의 색갈을 올렸을 뿐이다. 총적으로 한국에서 수장하고 있는 상여들은 색채나 조각면에서 현란하고 호화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우리의 상여는 소박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고 할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 필자는 상여와 더불어 쓰이는 도구들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도구인 관과 수의에 대해서도 간단한 조사를 해보았다.
필자가 조사한데 의하면 과거에는 집에 년령이 60에 가까워지는 로인이 계신다면 자식들이 관널과 칠성판을 준비해 두는것이 효도라고 생각하였다. 보통 2~3센치메터 두께 되는 옹이 적은 홍송널이 관널 재료로는 상등품이라고 하였다. 생활에 여유가 있어 가정에서 자식들이 홍송널을 준비해 주면 로인들은 자기 집널을 좋은것으로 마련하였다고 즐겨워 하고, 남들 앞에게 자랑하기도 하였다.
나이가 60환갑에 가까워 오면 안노인들은 내외 두분의 수의(속옷, 겉옷, 폭건, 악수, 버선)도 생전에 베천으로  만들어서 풀까지 빳빳이 먹여서 장롱속 깊은 곳에 고이 넣어 두었다. 과거 조선족 민간에서는 노인을 위해 생전에 수의를 미리 마련해 두면 더욱 오래 앉을수 있다는 관념이 류행되였다.
력사의 흐름과 시대의 발전에 따라 연변지구에서 50년대 까지만 하여도 흔히 볼수 있었던 상여행렬은 60년대를 기점으로 전통 장례풍습이 사라져감에 따라 력사의 무대에서 사라진지 오래지만 풍격이 독특한 상여는 력사의 세례를 겪었어도 의연히 그 소박함과 고요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 여기 용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는 민간으로 부터 수집한 상여와 제례에 상관되는 문물이 족히 백여건에 달한다. 비록 물건들은 세월의 세례속에서 좀이 먹고 색이 바랬지만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조형으로부터 이 물건들의 당년의 그 기품을 그대로 보아낼수 있다.
 
201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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