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음력설 특집(두번째 시간)
《전통과 현대의 융합》
방송주제:《우리 민족 족보와 성씨, 호칭에 관하여》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절연구회 현성원 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출연연사: 답례) 반갑습니다.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 련휴가 끝났지만 아직도 전통명절인 정월보름을 약 일주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오늘은 음력설특집 두 번째 시간으로 《우리 민족 족보와 성씨, 호칭》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은 혈연관계로 맺어진 한집안 - 친족의 그 계보를 도표식으로 적어둠으로써 가족의 변화상황을 적어둔 족보를 과거에는 아주 중하게 여겼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족보에 대한 개념이나 관심이 조선반도에 있는 우리 민족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족보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습니다. 가족 모든 구성원들의 변화를 적어둔 전체 가족의 족보의 모든 것은 제쳐두고라도 자기 한 가족의 구성원들의 변화양상을 적어둔 가족의 변화양상을 기록해두고 후대에게 전해주는것 또한 현대인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특히 오래전에 시작된 핵가족시대, 자기 한가족구성원들의 변화마저 후대들에게 남겨주지 못한다는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하여 오늘은 전통명절기간을 리용해 우리 민족 족보의 의미와 중요성을 짚어보고 우리 민족 성씨와 호칭을 알아보는것도 전통문화를 살리는 중요한 사안이라고 봅니다. 먼저 현회장께서 족보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주시죠?
현룡수 회장: 족보란 지금말로 하면 한 가족의 기본 력사당안자료입니다. 우리는 족보에서 자기가족의 시조를 알수있고 자기가족의 전통을 알수 있으며 그 시조로부터 어떻게 발전하여 오늘까지 오게 되였는가? 하는 전반과정을 알수 있으며 자기친척의 범위와 갈래 그리고 그 관계를 가계보를 통하여 알수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 이어서 족보의 의미와 기원에 대해서 거론해주시겠습니까?
현룡수 회장: 일찍 삼국시기 신라에 벌써 족보 비슷한것이 생겨나 왕공귀족들이 리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족보란 계급사회의 등급제도의 산물로서 그 의의는 주요하게 자기가문의 정통성과 고귀함을 증명하기 위한것이였습니다. 그후 고려에서는 양반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양반이란 주로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문무관원들을 일컬으는 말입니다. 지금말로 하면 국가공무원인 셈이죠. 고려에서는 文宗(기원1047년)때부터 상놈도 제한적으로 자기성을 가질수 있었다고 하는데 보통 가문에서 그누가 조정에 등용되여 벼슬을 하게되면 그 가문은 곧 출세하여 량반가문이 되므로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거나 또는 선조명이나 출신지역의 지명으로부터 성을 결정한후 그사람을 시조로 하고 그사람에게 봉해진 식지혹은 출신지역을 본관으로 하여 계보를 작성하여 기록하여 내려 오는데 그것이 후에와서 족보가 되는 것입니다. 식지란 봉지라고도 하는데 봉건사회에서 벼슬을 하게되면 벼슬의 급별에 따라 봉해주는 토지와 관리구역으로서 양반가문 경제수입의 주요래원이였으며 세습할수 있었습니다.
김동선 기자: 과거에는 족보가 지배층 즉 귀족이나 왕실에서 신분을 가려보기 위하여 피줄의 갈래를 잊지 않으려고 기록한 비망록의 기능을 하고 또 한 가족의 신분을 나타내는 도표식 책으로서 그 부작용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만민이 평등해진 오늘날에 와서 족보를 신분상승의 어떤 원인으로 될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족보의 가치를 다르게 리해하는것이 필요하지 않을가 생각하는데 현회장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족보의 가치는 신분증명보다는 가족의 뿌리를 알고 가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며, 가족과 친척의 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가족관념을 가강하고 가문의 뉴대를 형성시키며 가문의 매개성원들의 사명을 강조하기 위한것이라고 봅니다.
현재 연변 조선족 가정의 족보는 문화혁명때에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아 이미 기본상 근절되였습니다. 개혁개방을 하고 한국과의 국교가 맺어지고 한국의 종친회와의 련계를 다시 회복하게 되면서 적지않은 가문에서는 다시 자기의 족보를 가지게 되였으며 선조와의 련계점을 성공적으로 찾고 자기가정 성원들을 족보에 보충하여 기입해 넣은 가정도 적지 않습니다.
김동선 기자: 족보는 가족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점이 있고 또 그 체계는 어떻게 정해져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족보는 가문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인 체계는 비슷합니다. 맨 앞에 가문을 자랑하는 서문이 있고 시조를 포함해 주요한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밝혔으며 시조와 조상들가운데서 력사에 《이름난 인물》의 사적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시조 아무개로 시작하여 가문성원들의 이름을 세대를 나누어 항렬의 순서에 따라 적고 매 사람의 이름에 곁붙여 자, 호, 생졸년월일 그리고 생전에 지낸 대표적인 벼슬, 간단한 략력, 안해의 본과 성씨, 무덤의 위치 등을 적어넣었습니다. 딸은 출가외인이라 하여 보통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어떤 가문에서는 사위의 성과 이름을 밝히기도 합니다. 남자들은 성이 모두 같으므로 이름만 적었으며 그것도 적서의 구별을 두어 본처의 자식은 《적》으로, 첩의 자식은 《서》로 갈라 적었으며 외손자인 경우 보통 밝히지 않지만 또 일부 밝힌 가문도 있습니다.
보통 족보는 해당 문중에서 스스로 자기 문중의것을 작성하였고 이밖에 족보와 성질은 같지만 형식과 내용이 약간씩 다른 가첩과 가승이란것도 있었습니다. 가첩이란 직계친족만 적어둔것이며 가승은 가문의 직계친족과 그 가문의 사적을 적어놓은것입니다. 족보를 중요시함에 따라 해당 가문의 종친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종보와 그중 어느 한갈래의 종친만을 밝힌 지보란것도 생겨났습니다.
왕실에서는 왕족의 족보를 전문 다루는 부서를 내오고 전체적으로 총괄하였는데 그것을 종부시라고 불렀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말에 친척이란 말과 인척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별하여 나온 것입니까?
현룡수 회장: 친척이란 피줄과 결혼관계로 련결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친척은 크게 친족, 인척 두가지 부류로 나눕니다. 친족은 피줄관계로 련결된것인데 흔히 집안이라고 합니다. 인척은 결혼관계로 련결된것을 말합니다.
친족안에는 직계와 방계로 구분되는데 직계는 할아버지, 할머니-아버지, 어머니-아들, 딸-손자, 손녀-증손자, 증손녀 등과 같이 피줄이 직접 잇달아 물린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가족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방계와 구별하기 위하여 《친할아버지》, 《친손자》 등 《친》자를 붙여 부르기도 합니다. 방계는 큰(작은) 할아버지-큰(작은) 아버지-조카 등과 같이 몇 대우에서 갈라져나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인척가운데서 어머니켠을 외켠(외척), 안해켠을 처켠(처척)이라고 하였으며 시집간 딸은 친족성원에서 빼버렸으나 사실상 고모, 고모부, 고모사촌 등은 실제생활에서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 되여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이런 친척을 우리 민족은 그 관계의 멀고가까움을 밝히는데 하나의 척도로 써왔는데 그것이 바로 촌수입니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촌수를 밝히기 시작하였습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 민족이 촌수를 밝히기 시작한것은 대체로 고려시기부터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4세기 문인 리색이 《4촌회》라는 말을 쓴것도 있고 또 《고려사》에 외사촌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쯤으로 추증하는것이 옳을것 같습니다.
김동선 기자: 촌수는 어떻게 나누게 됩니까?
현룡수 회장: 촌수는 부부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한세대를 한촌으로 셉니다. 때문에 부부사이는 촌수가 없고 대수가 점차 벌어짐에 따라 촌수는 많아집니다. 따라서 촌수가 적을수록 가까운 친척이고 촌수가 많을수록 먼 친척으로 됩니다.
직계에 속하는 친척은 대수가 곧 촌수인데 부모와 자녀사이는 1촌이고 할아버지와 손자사이는 2촌입니다. 그러나 부를때에는 절대로 촌수로 부르지 않으며 증조할아버지와 증손, 고조할아버지와 현손사이도 촌수는 각각 3촌, 4촌이지만 부를때에는 절대로 촌수로 부르지 않습니다.
방계(곁갈림)에 속하는 친척의 촌수는 먼저 어느 조상에서 갈라졌는가를 따져보고 그 조상과 자신과의 촌수에다 알려고 하는 대상과 그 조상과의 촌수를 합하면 됩니다. 례를 들면 조카와 자신과의 촌수는 이렇게 캘수 있습니다. 조카는 형 혹은 동생의 자녀로서 자신과는 아버지를 통하여 련결된 곁갈림입니다. 그러므로 조카와 자기와의 촌수는 자기와 아버지의 촌수에다 조카와 아버지와의 촌수를 합하면 됩니다. 즉 자기와 아버지와는 1촌이고 조카와 자기 아버지(조카에게는 할아버지)는 2촌이므로 자신과 조카는 3촌이 됩니다.
김동선 기자: 촌수는 친족뿐만 아니라 인척을 가릴때에도 쓰이지 않습니까?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외켠의 친척은 어머니와 그 친척과의 촌수에다 자기와 어머니와의 촌수(1촌)을 합한 수와 같은 촌수입니다. 례를 들면 어머니의 남동생은 어머니와 2촌이므로 자기와는 3촌 즉 외삼촌이 됩니다. 처켠에 대해서는 알아보려는 사람과 자기 안해와의 촌수를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례를 들어 안해의 작은 아버지는 안해의 3촌이므로 처삼촌이라고 부릅니다.
촌수로 친척의 멀고가까운것을 나타내는데 형제벌의 친척은 4촌, 6촌, 8촌과 같이 짝수(우수)로 나가며 큰(작은)아버지, 조카벌의 모든 친척은 3촌, 5촌, 7촌과 같이 홑수(기수)로 나갑니다. 이것은 촌수가 련결마디를 나타내는것으로서 세대와 세대사이에는 그를 낳은 부부가 끼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5촌형, 칠촌아우, 6촌조카, 8촌조카라는것은 있을수 없습니다.
김동선 기자: 만약 촌수의 척도로 재면서 친척을 따져나가면 수없이 많고 그 갈래도 대단히 복잡할겁니다. 그럼 대체 어느 범위까지 친척을 보는것이 바람직할가요?
현룡수 회장: 고려와 리조시기에는 서로 범위에서 얼마간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로 친족은 7~10촌까지, 인척은 5~6촌까지를 친척으로 보았으며 리조시기 법에는 친족이 10촌까지로 되어 있으나 실제생활에서는 대체로 8촌까지 보았습니다.
김동선 기자: 친척의 범위에는 친족, 외켠, 처켠외에 사돈도 친척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까?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우리말에 사돈이 한호적이란 말도 있습니다.《아언각비》란 책에 《친척》이란 《척》에는 외척, 처척, 인척을 들고 있는데 여기의 이 인척이 곧 당시 사돈집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돈은 친척가운데서 제일 먼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돈의 팔촌》이라 하게되면 친척이라고 할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먼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생활에서 사돈과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매부와 처남사이는 일반적으로 매우 가깝습니다.
김동선 기자: 친척의 촌수를 안후 그 호칭이 따로 있는데 이것을 친척호칭이라고 하면서 일상생활가운데서의 말차림에서 극히 조심하며 례절을 지키려고 애쓰는것이 우리 민족의 우수한 품성의 하나였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민족 친척호칭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지요. 먼저 직계친족을 부르는 말로는 어떤것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현룡수 회장: 예, 그러지요. 3대 할아버지, 할머니는 《증조》를 붙여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라고 부르며 3대 손자, 손녀는 《증손》을 붙여 증손자, 증손녀라고 부릅니다. 4대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조》를 붙여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로 부르고 4대 손자, 손녀는 《현손》을 붙여 현손자, 현손녀로 부릅니다. 5대이상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는 대수를 그대로 붙여 5대할아버지, 6대손자 등으로 부릅니다. 직계친족가운데서 형의 안해를 흔히 형수, 아우의 안해를 제수라고 부르며 누이의 남편을 매형, 혹은 매부라고 부릅니다.
김동선 기자: 그럼 방계친족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방계친족을 부를때에는 같은 항렬에 속하는 4촌, 6촌, 8촌형제를 친형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각각 《종》, 《재종》, 《삼종》을 붙여 종형제, 재종형제, 삼종형제 등으로 부릅니다.
아버지항렬에 속하는 큰아버지를 백부, 작은아버지를 숙부라고 부르며 흔히 숙부를 삼촌이라고 하는데 직접 촌수로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런 친삼촌과 구별하기 위하여 오촌, 칠촌, 구촌백부와 숙부는 각각 《종》, 《재종》, 《삼종》을 붙여 부릅니다. 이것은 할아버지항렬을 부를때에도 할아버지와 구분하여 할아버지의 형제를 종조부로 부르며 따라서 증조할아버지의 형제를 재종증조부, 고조할아버지의 형제를 삼종고조부로 부릅니다.
아들, 손자항렬에서도 친조카와 오촌, 칠촌, 구촌조카 그리고 친손자와 형제의 손자를 구별하기 위하여 《당》, 또는 《종》, 《재종》, 《삼종》등을 붙였습니다. 이를테면 사촌의 아들은 5촌으로서 당질(오촌조카)이며 륙촌동생의 아들은 7촌으로서 재종질(칠촌조카)이며 팔촌의 아들은 9촌으로서 삼종질(구촌조카)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추리로써 형제의 손자는 6촌으로서 재종손, 륙촌의 손자는 8촌으로서 삼종손이라고 부릅니다. 누이의 딸은 생질, 고모사촌은 고종형제라고 합니다. 이밖에도 친족을 부르는 말에는 넛할아버지(아버지의 외삼촌), 넛손자(누이의 손자), 올케(오빠와 남동생의 안해) 등이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인척을 부를때에는 어떻게 부릅니까?
현룡수 회장: 인척을 부를때에도 촌수를 캐는 법은 같으나 부를때, 외켠에는 《외》, 어머니의 자매는 《이모》, 처켠에는 《처》를 붙여 부르며 안해의 부모를 장인, 장모로 혹은 가시아버지, 가시어머니로 부릅니다. 이모의 아들딸은 이모사촌이 되고 처남과 처형제의 아들딸들은 처조카로 되며 안해의 삼촌은 처삼촌으로 부릅니다.
우리 민족은 친척교제에 있어서 비록 구분은 우에서 말한것처럼 촌수가 밝혀져 있으나 직접 상대하여 말할때는 될수록 가깝게 부르는 풍속이 있습니다. 즉 례를 들면 구촌조카를 당면해서 부를때 《구촌조카 왔는가?》하지 않고 《조카 왔나?》라고 하는 식입니다. 웃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함경도나 연변 등지에서는 《아바이》, 《클아배》,《아매》,《맏아매》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지역적으로 혹은 방언적으로 친척, 가족내에서 친근감을 줄수 있으나 많은 장소에서는 소개가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좋기는 소개는 구체적으로 촌수에 따라 하고 부를때는 장소를 고려하여 해당된 표준어를 쓰는것이 좋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연변에서는 형의 안해 즉 《형수》를 직접 대면하여 부를때 보통 《아주머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보다 친근감을 줍니다. 《아주머니(아줌마)》라는 말은 그전에는 외삼촌어머니와 고모, 이모 등과 자기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한 녀들을 부를때 쓰이였으나 지금은 주로 형수,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 또는 젊은 남의 안해를 부를때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형의 안해》를 공식적인 장소에서 남에게 소개하거나 또는 직접 부를때에는 타인의 안해와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형수》라고 부르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연변에서는 또 언니의 남편을 《아저씨》라고 부르는데 역시 친근감은 있지만 제대로 부르려면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아저씨》라는 말도 그전에는 외삼촌과 고모부, 이모부 등과 자기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남자들을 부를때 쓰였으나 지금은 주로 여자들이 언니의 남편, 혹은 친척관계가 없는 젊은 남자들을 부를때 씁니다. 때문에 《자기 언니의 남편》을 공식적인 장소에서 남에게 소개하거나 또는 직접 부를때에는 타인의 남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형부》라고 부르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동서끼리 혹은 시누이와 올케가 서로 부를때 《형님》, 《언니》, 《동생》등으로 부르며 특히는 여자들이 시형과 시아우를 자기 자식들이 부르는대로 《큰아버지》, 《삼촌》 등으로 부르는것은 친근감을 돋구는 친척호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련의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제대로 촌수에 따라서 정확히 부르는것이 바람직합니다.
김동선 기자: 친척관계를 나타내는 말가운데 항렬이라는것이 있습니다. 항렬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현룡수 회장: 항렬이란 친족가운데서 세대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인데 어떤 사람의 자손가운데서 세대수가 같아서 형제벌되는 사람들을 같은 항렬이라고 하며 그들의 아버지벌되는 사람들을 아버지항렬, 아들벌되는 사람들을 아들항렬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재래로 이름을 지을때 《항렬자》 즉 《돌림자》를 썼습니다. 이 《항렬자》에 근거하여 성과 본이 같은 사람끼리 이름만 보고도 대체로 항렬을 가릴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름짛을때 《항렬자》즉 《돌림자》를 쓰지 않고 각각 제멋대로 짓는 현상이 수두록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년세 많은분이 집안에 계시는 경우, 항렬자를 따져서 이름을 짓는 집도 있기는 합니다.
김동선 기자: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민족 족보와 촌수, 친척호칭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봤는데요. 아래에 계속해서 우리 민족 성씨에 대한 개념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우리 민족은 기본적으로 혈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부계를 중심으로 하여 각기 자기의 성씨를 갖고 서로 융화하며 발전하여 오지 않았습니까?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일반인을 가리켜 한자말로 《백성》이라고 하였는데 그뜻인즉 《백가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나오기 썩 오래전인 원시사회나 노예사회, 봉건사회초기때만 해도 성씨가 많지 않았고 그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에서만 사용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이 없는 일반인들은 《천민》혹은《상놈들》이라고 불리였으며 이름은 《돌쇠》나 《똥애》처럼 아무렇게나 지어 부르는것이 고작이였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면서 평등의식이 강조되고 인격존중이 하나의 사회적 원칙으로 됨에 따라 점차 누구나 성씨를 갖게 되었습니다.
김동선 기자: 한 인간을 부를때 특정된 호칭은 보통 이름을 부르는것이 통례인데 대개 사람들의 이름은 언어에 따라, 민족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조선, 중국을 비롯한 적지않은 나라들에서는 이름앞에 성씨를 붙여 부르며 일부 서방국가들에서는 성과 부칭, 이름을 붙여서 부릅니다. 우리 민족은 성씨에는 주로 몇가지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우리 민족의 경우, 이름앞에 붙이는 성씨는 일반적으로 같은 족속을 나타내는 칭호인데 한문투를 따서 보통 무슨 《씨》, 무슨 《가》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허》란 성을 부를때면 《허씨》, 혹은 《허가》라고 합니다. 《백성》이라고 하지만 실지 조선민족의 성씨는 100가지를 훨씬 초과해 수백가지에 달합니다. 옛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265성이 기록되여 있고 그후에 나온 《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으로 근 5백가지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한국은 1975년 국세조사에서는 249가지 성으로 되어 있으며 김씨가 전체 한국인구의 21.9%, 리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로 한국총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에 고대사회에서 조선 고유말로 된 성이 있었을수도 있지만 아직 고증할 문헌기록이 없습니다.
김동선 기자: 조선의 력사문헌으로서 가치가 가장 큰 문헌중의 하나로서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를 들수가 있을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사람의 앞에다다 출신지방의 이름을 붙여서 혈연관계 혹은 지방소속관계를 밝힌 사실이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옛날 백제왕실의 성인 《부여》같은것입니다. 백제왕실은 고구려왕실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자연 이 두 왕실의 출신지방이 같은 《부여》였기 때문입니다.
백제왕실의 《부여》란 성외에도 사, 연개, 협, 해, 진, 국, 목, 백 등 큰 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277년(?)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성은 《고》씨인데 고구려에는 이밖에도 장, 양, 리, 오, 두, 왕 등 큰 성이 있었으며 이런 큰 성을 가리켜 우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신라왕실의 성은 박, 석, 김이 위주였고 그 외에 최, 안, 설, 남, 손, 정, 배, 리 등 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헌에 나오는 이러한 성씨들은 대부분이 왕실귀족의 성씨였지 백성들의 성씨는 아니였습니다. 《삼국사기》에 고위계층 즉 왕실이나 귀족들가운데서는 성씨가 점차로 보급되여 가고 있었으나 백성(인민대중)들은 성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숱한 평민들은 이름만 나오고 성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고구려의 온달, 신라의 계백과 관창, 고구려의 창조리, 백제의 도미, 신라의 솔거, 지은 등 평민들에게는 그것이 성씨인지 이름만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성씨에 대해서 살펴보면 우에서 례를 든 왕실의 성씨들을 내놓고도 을지문덕, 연개소문, 명림담부 등의 을지, 연개, 명림 등 성씨가 나오는데 그 뜻이 아마 당시 고구려의 고유어로 되어 있는것 같고 한자를 그대로 쓴 성이 아닌듯 싶습니다. 조선에서 한자성을 널리 쓰기 시작한것은 아마도 후신라때부터라고 보는것이 타당할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바로 중국과의 군사, 정치, 외교래왕이 전의 다른 어느 시기보다 잦았을뿐만 아니라 후기신라 귀족들의 한자말이 열도가 올랐었기 때문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은 당시 신라의 지명을 모두 한자식 이름으로 고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신라의 귀족들은 모두 한자성을 붙였습니다. 이로부터 고려, 리조에 이르기까지 한자성이 위주로 널리 퍼졌고 왕실이나 귀족들내에서 한자성씨를 숭상하고 그 유래를 신비화했거나 또는 한자성씨를 국가의 공로자에게 상으로 주는 이른바 《사성》이라는 제도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백성들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일반백성들의 경우에는 성씨가 보급되지 못하고 이름만 붙여 불리운것이 조선력사 반만년에 깔리운 하나의 상황이였습니다. 고려文宗(기원1047년)때부터 비양반가정에서도 자기성을 가질수있었다고 하지만 극히 제한적이였으며 지어 리조말기에 이르러서도 성이 없는 백성들이 상당수준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전국적범위내에서 통일적으로 호적등기를 하게 되자 조선반도 전 국민이 비로서 성씨를 다 쓰게 되었던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성씨를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성씨가 봉건사회에서 혈연관계 즉 피줄을 상징하는외에도 계급적 차원에서 신분의 귀천을 상징하는 표징이기도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특히 리조시기에 들어와서 유교가 국교로 됨에 따라 남존녀비와 《3강5륜》사상이 풍조로 되었으며 따라서 혈통관념이 보다 강하게 성씨에 깃들게 되었으며 정통이냐? 아니면 갈래이냐? 하는것을 무섭게 따지게 되었습니다. 그에 앞서 한 성씨안에서도 시조가 누구냐 그리고 그 시조가 발상한 고을이름이 어떠냐에 따라 《본》이란 개념이 생기게 되고 엄격이 그것을 준수하여 벌써 리조초기에 귀족들은 한자성앞에다가 발상지명을 덧붙여 《전주리씨》, 《밀양박씨》하고 불렀습니다. 시조의 발상지는 출신지역이 될수도 있고 또 벼슬하여 받은 봉지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고대에 있어서는 성씨 자체가 발상지 이름으로 된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름앞에 선조의 발상지(원래의 성)을 붙이는것이 거의 통례로 되었는데 한자성씨가 보급됨에 따라 발상지 이름이 따로 《본》이란 명칭으로 성씨앞에 붙게 되였습니다. 그후 한 종족에서도 그누가 벼슬하게 되면 따로 가보을 창설하고 성은 원래의 성을 그대로 쓰고 본은 자기의 봉지명으로 고쳐서 따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는데 주요하게 자기의 공덕 혹은 근친의 공덕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같은 성씨에 여러가지 본이 생겨나게 된것입니다. 그때로부터 본이란 기실 한 가족의 발상지만 대표하게 되였으며 지금은 같은 성씨의 다른 종친을 구분하는 의거로 많이 리용됩니다. 이것을 《본관》혹은 《관향》, 《향관》이라고 합니다.
사회, 력사적 변천으로 하여 본관의 이름이 지금은 없어졌거나 또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여진것도 허다합니다. 이를테면 문화 류씨, 가주 한씨, 반남 박씨, 무송 윤씨 등입니다. 《문화》는 신천군안의 옛고을이였고 《가주》는 정주군 가산고을의 별칭이며 《무송》은 고창군 무장고을의 별칭이며 《반남》은 라주군 소속에 있던 별칭이다. 하지만 이런 변천은 성씨의 본관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상기 본관의 개념이 바로 혈연갈래를 가르는데 두고있기 때문에 그냥 옛날지명을 그대로 부르면서 련속되여 왔던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오늘 끝으로 한마디 마무리 말씀을 해주시 바랍니다.
현룡수 회장: 기록에 의하면 리조시기에 본이 가장 많은것은 김씨였는데 499본에 달하였고 리씨는 451본에 달하였으며 최씨는 326본에 달하였고 박씨는 309본에 달하였습니다. 장씨는 245본, 림씨 216본, 조씨 200본 등의 차례로 선보입니다. 본이 많다는것은 그만큼 력사적으로 벼슬을 한사람이 많다는 방증이 되겠죠.
리조후기부터 시작하여 같은 본끼리도 서로 멀고가까운것을 현상이 많아졌는데 족보를 캐여 같은 본안에서 그 문벌이 누구의 자손인가 그리고 자기 혹은 타인과 어떤 관계인가를 밝히였습니다. 하여 본안에 또 파가 생겼습니다.
그러던것이 일본인들이 조선반도를 침입하자 강산도 나라도 잃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이처럼 소중히 하여오던 성과 이름마저 《창씨개명》을 당하게 되었으니 일본제국주의자의 눈에는 조선민족의 성씨와 본, 이름이 하나의 민족적 얼을 받침해 주고 있는 《문화재》로 보였을것입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의 식민주의자들이 그 숱한 약소민족과 약소국가를 침략하고 략탈하고 유린한 민족적죄행중에서도 유독 일본제국주의자가 다른 식민주의자들도 못했던 죄악 즉 피압박민족의 성씨와 이름까지 빼앗은 추행을 저질러 침략만행에서 간악성의 으뜸으로 꼽히였습니다.
이렇듯 치욕스러운 력사도 끝나고 오늘날에는 끔찍스러운 추억으로 남았으나 하나의 리치 즉 나라, 강산, 민족, 성씨, 피줄 등 개념이 민족재생과 번영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노는가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 맺 음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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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클릭, 우리 사는 세상》코너에서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 회장을 모시고 임진년 음력설특집 《전통과 현대의 융합》두 번째 시간으로《우리 민족 족보와 성씨, 호칭》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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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일컫고 있는 우리 민족의 성씨는 무려 230여가지나 됩니다. 일설에는 270여가지로도 말하는데 그중에는 흔히 볼수 있는 리, 김, 최, 안, 정, 박, 윤, 석, 조, 한 등 성씨가 있는가 하면 인, 맹, 공, 탁, 호, 예, 단, 이, 반, 요 등 이른바 벽성도 있으며 황보, 독고, 제갈, 선우, 서문, 동방 등 복성도 있습니다.
슬기로운 우리 민족이 성씨를 쓴 력사는 이미 천년도 넘는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민속학적인 의미에서 볼때 대대로 성을 물리면서 피줄의 흐름을 이어온 자체가 하나의 력사이며 조상들의 지혜로운 유산입니다. 때문에 일제가 《동조동근》을 강요하면서 창씨개명까지 협박했던 그 살벌한 민족수난의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자기의 성씨를 잊지 않고 따라서 자기가 조선민족임을 잊지 않고 줄기차게 살아왔던것입니다.
물론 글로벌화된 오늘날에 와서 종친이요, 한 성씨요 하는 혈연개념이 희박해질수도 있고 또 그 어떤 다른 목적에 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속학적인 각도에서, 력사적인 흐름에서 성씨의 유래를 캐여보는것은 력사지식면에서도 하나의 도움이 될수 있을뿐만 아니라 세계가 날로 좁아져서 마침내 지구촌이라는 개념으로 이 세계를 평가하는 오늘날, 우리 친지들이 가족의 소중함과 귀중함을 다시 한번 새겨보는데서 또 한자리에 마주앉아 담소하는데서나 혹은 기타 교제장소에서나 모두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앞으로 우리는 자신의 족보와 촌수, 호칭, 성씨를 더욱 더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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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프로기획과 진행에 김동선이였습니다. 즐겁고 유쾌한 월요일 보내십시오.
※ 주해: 여기 구체 방송내용과 발언시간을 나름대로 정해두었습니다. 꼭 이대로 하시라는것은 아닙니다. 보충할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고 약 33~34분정도로 준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2년 1월 30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도착시간: 2012년 1월 30일 월요일 아침 6시 50분까지
도착지점: 연변병원 동대문 동쪽, 연변라디오TV방송국 대문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련계전화: 251-6545 (사무실) 139-0448-0109 (휴대폰)
이 메 일: dxkim0109@hanmail.net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2012년 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