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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 -> 력사/민속 -> 조선(한국)력사민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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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는 8성씨가 있었고, 신라 초기에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가며 왕이 되었다가
내물왕대에 이르러서 김씨의 왕위계승이 고정되었습니다.
가야의 경우 김수로가 초대 왕이 된 이래 김해 김씨가 생겼고요.
특히 고려 초기에 후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한 지방호족들을 그 지역을 본관으로 한 성씨의 시조로
임명(이라고 해야하나... 갑자기 어떤 말을 써야 하나 헷갈리네요)했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는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인동 장씨가 그러한 성씨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후 조선시대에도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시조로 한 성씨를 인정해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여러 개의 본관을 가진 성씨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조선 전기까지는 이러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성을 하사받은 가문들은 대개 경제력과 지위를 가지게 되고,
그러한 부와 지위를 세습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은 상류층들이나 갖는 것이고
일반 농민들이나 천민들은 그냥 이름으로 불렸죠.
역사책에 보면 농민이나 천민들이 일으킨 난들이 '원종 애노의 난' '만적의 난' 등
주동자 이름에 성씨가 없는 게 그 이유입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집니다.
돈이 궁했던 조정에서는 돈을 많이 바치는 사람에게 벼슬을 준다고 했고(납속책),
이 때 돈 많은 평민, 천민들이 돈을 바치는 대신 공명첩을 받습니다.
공명첩이란 벼슬을 받는 자의 이름이 빈칸으로 되어 있는 인증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녹봉을 받으며 일하는 벼슬자리는 아니고 이름만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공명첩을 받음으로써 천민의 신분에서 해방되거나 평민의 지위에서 양반의 지위로 상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밤에 야반도주하는 노비들이나 농민들이 많았습니다.
주인의 학대와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해서였죠. 이렇게 도망친 사람들이 악착같이 일을 하고 돈을 모아서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된 이들은 몰락한 양반의 빚을 갚아주는 대신,
그 양반의 족보에 자기 이름을 넣음으로써 양반 행세를 합니다.
이런 건 연암박지원의 양반전이라든지, 몇해 전 방영한 드라마 '추노'에 나타나는 모습들입니다.
이런 일들이 많아지면서 조선 후기에는 양반이 농민천민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아지게 됩니다.
본래 양반이란 게 사회상류층이고 그 비율이 전체 인구의 1~3퍼센트 정도로 소수인데
조선 후기에는 개나 소나 다 신분이 양반이었습니다.
즉, 이 양반들 중에 조상 대대로 부와 지위를 물려받거나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에 오른
'진짜 양반' 말고 돈을 주고 양반신분을 산 '가짜 양반'들이 대다수였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