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http://www.zoglo.net/blog/sy10088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홈 > 포럼칼럼

전체 [ 22 ]

22    중국은 우리나라, 잘 있느냐? 댓글:  조회:497  추천:0  2022-03-28
며칠 전, 우리총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카카오 구인 광고란에는 높은 봉금으로 코로나환자를 돌볼 간병인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올라왔었습니다. 동포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을 항상 잊지 않고 있는 우리 회장님께서는 나한테 전화를 걸어 와, 동포구역에 와서 이런 광고를 올리는 행위를 규탄하는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무슨 이유로 규탄해야하지? 일시 궁금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은 분명히 한국인을 대신하여 죽을 수도 있는 염가 희생양을 물색하는 광고라고 느껴졌습니다. 한국인들 중에서는 중국동포간병인들을 희생양으로 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번에도 인천 모 요양병원에서 중국동포간병인들을 코로나 위험구역에 강박적으로 밀어 넣은 사례가 있었습니다. 코로나 방역은 어디까지나 나라적 행위로서 나라에서 책임지고 완성해야 하는 것이지, 노동보호법 사각지대에 밀려나 있는 외국동포간병인들을 여기에 내 몬다는 것은 너무나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죠. 그렇다고 우리는 공개적으로 그 누구를 규탄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므로, 동포간병인들에게 긔뜸하여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동포간병인들은 한국에 와서 돈은 적당히 벌고, 건강하게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그까짓 봉금에 영혼을 잃지 말고, 모름지기 신중하시기 바랍니다. 그 광고를 올리신 분도 이익 때문에 양심을 버리지 말고, 중국동포들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기를 권고합니다. ​ 필을 들었던 김에 몇 자 더 보태여, 임인년 설을 맞으며 조국에 대하여, 고향에 대하여 그리운 마음을 달래여 보렵니다. ​ 우리는 중국에서 살 때, 중국은 결함이 아주 많은 나라라고 인정하였습니다. 특히 개혁개방하고 나라 문이 열리고, 세계와 처음 접촉하게 되면서, 우리는 세계의 많은 자본주의체제나라들에서는 중국보다 아주 선진적이고, 아주 부유하게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습관적으로 자본주의체제나라들을 선진국가 혹은 발달국가라고 높여서 부릅니다. 사회적으로 많은 자본주의체제 숭배족들이 나타났죠. 인테넷에서 박쥐처럼 쏘다니는 소위의 公知들의 유령같은 글을 가끔 보면서, 잠깐이나마 자기나라의 위대함을 의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 중국이 최근 10여년 사이에 韬光养晦를 깨고, 상상 밖으로 초고속 발전하게 되자,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체제나라들에서 집단적으로 질투하는 대상이 되었고, 세계 유일한 초급패권국에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해하고, 제재하고, 공격하는 목표가 되었습니다. 중국이 그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중국의 발전이 너무 빨라, 그네들의 패권과 우월감이 도전을 받았다고 느끼고 불안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에 세계적 코로나대전이 터지면서, 중국은 다시 자기의 위대함과 필승불패의 지위를 세계에 떳떳이 중명하였으며, 세계 자본주의체제나라들과 초급패권국의 신화는 여지없이 깨여졌으며, 지금도 계속 깨여지고 있습니다. ​ 2019년 10월, 중국무한에서 세계군인운동회가 있었는데, 누가 퍼뜨렸는지 알고 있지만, 그해 말 중국무한에서는 역병이 터졌습니다. 세계 자본주의체제나라들에서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모든 중국 발 육로, 수로, 항공로까지 엄밀히 차단하고, 역병에 “중국페염” 혹은 “무한페염”이라고 모욕적 이름을 달아놓고는, 중국이 어떻게 망하는가를 흥미 있게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세계력사상 유례없이 인구 천만이 넘는 대도시를 대담히 봉쇄하고, 전국인민이 합심하여 근근 두 달 동안 악전고투하여 성공적으로 역병을 공제하였습니다. 중국의 엄정한 제의하에 세계위생조직에서는 역병에 대한 모욕적 이름을 취소하고, “코로나19”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코로나의 제일 발원지가 원래 중국이 아니었던 만큼, 세계가 아무리 중국을 봉쇄하였다 하여도, 자본주의체제나라 내부로부터 코로나가 터지더니, 세계 198개의 모든 나라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퍼지여, 전 지구를 거의 마비상태에 빠뜨렸습니다. 게다가 세계의 유일 초급패권국에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벽한 대통령이 나타나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대하던 나라를 코로나 앞에서 가장 실패한 나라, 가장 무능한 나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백신이 나오고, 삼차접종까지 보급되면서 코로나는 한시기 지역별로 공제되는 듯싶더니, 새로운 변종이 끊임없이 나타나면서 오늘까지도 사태는 점점 우심해지고 있습니다. ​ 자본주의체제나라들에서는 자기들을 민주국가라고 하고, 비자본주의체제나라들을 독재국가라고 합니다. 기실 나라의 성질은 민주인가, 독재인가에 의해 갈리는 것이 아니라, 소유제의 성질에 의하여 갈리는 것입니다. 민주는 전 인류의 공동소유의 정치유산입니다. 결코 특정한 체제국가의 특허권이 아닙니다. 민주와 독재는 영원히 공존합니다. 자본주의체제나라에도 독재가 있습니다. 나라기능이 바로 독재이고, 법률이 바로 독재입니다. 사회주의중국에도 민주가 있습니다. 선거가 바로 민주이고, 협상이 바로 민주입니다. 자본주의체제나라의 민주는 주로 선거민주이고, 사회주의중국의 민주는 전 과정 민주입니다. 각기 자기의 특색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관점이 아니라, 정치상식입니다. 중국의 한나라 두가지제도의 실천에 의하면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는 얼마든지 평화공존하며 호상 촉진할 수 있습니다. 이제 멀지않은 내일에, 중국의 GDP가 세계제일이 되고, 중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는 그때, 사회주의중국은 세계 자본주의체제나라들과 전면 화해하고 평화공존하게 될 것이며, 그때부터 세계의 영구한 평화번영은 진정 보장 될 것입니다. 이제 며칠 후, 2월 4일부터 북경동계올림픽이 개막됩니다. 이번 올림픽은 가능하게 세계의 중국시대 전주곡으로 될 것입니다. ​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남의 나라에서 말을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만 줄이겠습니다. 이상 글에서는 주로 실제사실을 말하였고, 상식문제를 말하였습니다. 결코 정치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체제나라에서는 중국과 상관되는 모든 이슈를 정치로 해석하고 처리하려하는데, 다른 쓸 만한 카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매체에서도 중국과 상관되는 뉴스를 다룰 때에는 편파성이 강하고, 선택성이 많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중국문제전문가 교수님들까지도 유튜브에서 한국국민들에게 중국을 소개할 때 너무 어처구니없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를 포함하여 우리가 자기에 대하여 신심을 잃게 될 가봐 걱정되어, 자아격려의 차원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국 밥을 먹으면서 한국 밥 가마를 걷어차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도 위대하지만, 중국은 더욱 위대하며, 우리가 중국공민으로 살게 된 것은 우리 선조들이 쌓은 덕택이므로 모름지기 소중히 여겨야 하겠다는 것을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 내일은 설입니다. 임인년에 부디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 ​ 2022년 1월 31일 현용수
21    自律이 인생을 우수하게 한다. 댓글:  조회:625  추천:0  2022-03-19
自律이 인생을 우수하게 한다. *   가슴에 큰 뜻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엄격히 자율 하는 사람들이다. 자율이란 자아단속을 말한다. 자율 하는 사람들은 무섭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만약 친구라면 당신은 그들에게서 자율을 배우고, 만약 적수라면 당신은 그들을 충분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무서운 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은 짧으니, 반드시 좋은 때를 놓치지 말고, 향락을 누려야 하며, 오늘 술 있으면 오늘 취하고, 젊어서 풍류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자율하지 않는 사람들의 행위는 결국 그들에게 더욱 큰 고통을 가져 다 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를 우수하게 만들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마라. 자율은 우리들의 삶을 더욱 고급적인 삶으로 만들어 준다. 자유의 본질은 자기를 풀어놓고 아무런 짓이나 하는 것 아니라, 자율을 한 후의 가뿐함이며, 우수하게 된 후의 편리함이다. *   사람이 어째서 자율 해야 하는가?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남의 우수함을 볼 줄만 알았지, 그들이 그렇게 우수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잘 모른다. 자율이 습관으로 굳어진 사람들은 보건대 사는 것이 별로 재미가 없다. 남들이 바깥에 나가 즐기며 놀 때에도, 그들은 집에 박혀서 책을 보고 있으며, 남들이 거리에 나가 미식을 즐길 때에도, 그들은 헬스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살을 까고 있으며, 주말이 되면 보통 아침도 먹지 않고 점심때까지 자지만, 그들은 여전히 제시간에 일어나고, 아침운동 하고, 책을 보고, 유익한 일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보건대 사는 것이 아무 재미도 없는 것 같고, 심지어 자아학대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며,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   하지만 실제로는 자율 하는 사람들이 자율하지 않는 사람보다 결국 더 많은 자유가 있게 된다. 당신이 언제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즐기기만 하며, 노력할 줄 모르고, 자기를 방종하며 살아 왔다면, 보건대 아주 자유스러운 것 같지만, 기실 당신은 그렇게 살수록 자유가 점점 없어지며, 선택할 자본이 적어진다. 소위 자유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 자기를 주재하는 것이다. *   사람이 자율 할수록 자유가 있게 되고, 발언권이 있게 된다. 하루 이틀에는 보아낼 수 없지만, 몇 년, 몇 십 년 지나면, 자율 하는 사람과 자율하지 않는 사람은 현저한 차이가 있게 되며,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살게 된다. 일반적으로 노력의 부출과 성과의 보답은 정비례를 이루며, 량적 변화가 충족히 쌓여야만 질적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자율 해야 하는 원인으로서, 이후에 사는 것이 많이 가뿐해지고, 자유롭게 되기 때문이다. 신체나 인생이나 마찬가지 도리이다. *   자율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진정 무엇이 수요 되는가를 잘 알게 되며, 그로하여 시간과 정력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자기를 보다 우수하게 성숙시킨다. *   모든 우수함 뒤에는 모두 고행승과도 같은 자율이 있었다. 자율 하겠다는 사람은 많으나, 자율을 견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치도 험준한 높은 산에 오르듯이, 정상이 가까워 올수록 포기하는 사람이 많고, 견지하는 사람이 적게 되며, 종당에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몇이 안 된다. 좋은 습관의 견지는 그 본신이 바로 자율이다. 많은 경우에 우수했기 때문에 자율 할 수 있은 것이 아니라, 자율 했기 때문에 우수하게 되는 것이다. *   사람은 자율 할수록 우수하게 된다. 게으름, 방종, 자제력부족, 등의 근원은 인지능력이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율 할수록 인지능력이 강하게 되며, 다른 사람보다 점점 우수하게 된다. 한사람의 자율 중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하여 있다. 당신 자율의 정도는 당신 인생의 높이를 결정한다. *   사람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선택할 권리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은 짧으니 많이 즐겨야 한다고 하는데, 틀리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자율 하는 인생은 기실 더욱 멋지고, 더욱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 나갈 제, 온 천하가 길을 비켜주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높이 올라 멀리 볼 수 있는 사람은, 영원히 잡념이 없이 꾼준히 자기 목표를 향해 나가는 사람이다. *   우리는 진정으로 자율 하는 능수로 되면, 자기가 되고 싶었던 사람으로 될 수 있고, 자기가 살고 싶었던 삶을 살 수 있다. *   인생에는 지름길이 없다. 하지만 당신인생이 얼마나 많은 길을 에돌아 왔든, 당신의 매 한 걸음마다 모두 효과가 있는 보귀한 경력으로 된다. 그러므로 인생에는 효과가 없는 공연한 경력이란 없다. 성공한 경력이든, 실패한 경력이든, 한 일이 없이 지내온 경력이든, 모두가 보귀한 인생 자본이 된다. 자기 매 한번의 걸음을 중시하시라! *   현용수 서울왕십리무학로 2021-02-06
20    지난인생 저렇게, 남은인생 이렇게 댓글:  조회:483  추천:1  2022-03-16
지난인생 저렇게, 남은인생 이렇게 *     세상에는 돈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건강장수약이 있습니다. 하나는 “知足”라는 약인데, 아침에 한 알 먹고, 또 하나는 “感恩”이란 약인데, 저녁에 한 알 먹습니다. 매일 이 두 알의 약을 먹으면 마음속에 항상 찬란한 해 빛이 비쳐들어, 그 어떤 번뇌도 즉시 사라지며, 그 어떤 병마도 나의 몸에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고, 언제나 활기찬 젊은이의 기분으로 살게 됩니다. * **     기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필연코 죽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 죽기 직전까지도 기를 쓰고 살려고 합니다.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 *****     끝없이 분주한 사회, 너무 간사한 사람들, 내려놓을 수 없는 근심걱정, 다 겪어낼 수 없는 풍상고초, 다 넘어갈 수 없는 험한 언덕, 어쩔 수 없는 무가내, 잊을 수 없는 어제, 끝없이 바쁜 오늘, 알 수 없는 내일 ... ... 이렇게 허둥지둥 살다가 어느 날엔가는 불연 듯 이 세상을 떠나라는 통지를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산다는 것이며, 바로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쁘고 힘들더라도, 자기를 아껴야 하며, 자기를 잘 보살펴야 합니다. * **     인생은 마치도 날씨와도 같습니다. 예측할 수는 있는데, 그 예측이 왕왕 틀립니다. 해 빛 밝은 맑은 날씨는 물론, 비가 오는 흐린 날씨에도 언제나 즐거운 마음만 확보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그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나의만의 정신재부입니다. *     매일매일의 생활을 잘 틀어쥐고, 보석 같은 자기 신체를 잘 돌보아야 합니다. 얻었다면 담담한 마음으로, 잃었다면 태연한 마음으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며, 모든 것은 연분에 따라 움직이는 것, 이것이야 말로 가장 활달하고 명지한 인생태도입니다. * **     우리는 모두 결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포용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우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치하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개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양보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상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안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기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나눌 줄 알면 좋습니다. *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주는 가장 값진 예물은 자기의 심신건강을 잘 보양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두 가지 일을 잘 처리해야 합니다. 하나는 아이들을 잘 교육하여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신체를 잘 보양하여 아이들에게 부담을 끼치지 않은 것입니다. *     이제 우리가 자기수명을 다 살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철저히 허무한 존재로 남게 됩니다. 우리는 한평생 분투하였어도 동전 한 푼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한평생 집착하였던 사랑도 허영심도 모두 남겨놓고 가야 합니다. 부귀비천을 막론하고 누구든 결국에는 이 길을 가게 됩니다. 저승길에 망향 대에 들려 자기일생 돌이켜 본다할 때, 그저 마지막 날밤의 긴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남은 인생 잘 살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마음이 즐겁고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눈앞의 번화한 세상도 손가락 튕기는 사이입니다. 제명이 다하고 나면 한줌의 재밖에 남지 않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     사람의 한평생은 너무나 무상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평생 잘 지내자고 약속했건만, 결국은 지키지 못하고 갈라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친구하자고 약속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저 면목이나 아는 남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일 다시 만나자고 분명히 약속했건만, 아침에 깨여나 보니 서로 다른 세계에 갈라져 있습니다. *     그러니 우리가 지금 살아서 숨 쉬고 있을 때를 놓치지 말고, 만나고 싶은 사람 어서 만나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 열렬히 사랑하며, 포옹하고 싶은 사람 힘껏 포옹하고, 잡고 싶은 사람의 손을 꽉 잡고서 놓지를 말아야 합니다. 놀 수 있을 때에 놀고, 먹을 수 있을 때에 먹고, 걸을 수 있을 때에 가보는 것입니다. *     호상 이해하여야만 진정한 감정입니다. 자기의 인생에 너무 많은 유감을 남기지 마세요. 아무리 좋은 연분도 가꾸지 않는다면 멀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깊은 감정도 아끼지 않는다면 상처 받게 됩니다. 사랑에는 진짜 바보가 없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바보짓 하려는 사람 있을 뿐이죠. 당신을 모두 양해하여 주는 사람은 당신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짜 성의가 있어야 서로 오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아낄 줄 알아야만 무엇을 소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     이익이 있을 때 양보할 줄 알고, 도리가 있을 때 용서할 줄 알며, 능력이 있을 때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 노련하면 남들의 질투를 받게 되고, 너무 각박하면 남들의 미움을 받게 되며, 너무 우쭐대면 남들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원래부터 빈 것을 가지고 노는 유희입니다. 빈 것으로 시작하여, 빈 것으로 끝나지요.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이 많으면 사람을 상하게 되고, 미움이 많으면 영혼을 상하게 됩니다. *     한평생 바라는 것은 마음에 부끄럽지 않고 자유자재로 사는 것입니다. 진짜 세상에 부끄러움 없을 때, 비로서 산다는 것의 본뜻을 터득한 것입니다. 세상의 도리를 다투자면 끝이 없고, 다투어 이겼다면 미움을 사게 됩니다. 세상의 이익을 가지자면 끝이 없으니 비슷하게 가졌으면 만족해야 합니다. 재산이 모이면 사람이 흩어지고, 재산이 흩어지면 사람이 모입니다. 마음이 행복하면 하루하루 살기가 힘들지 않고, 사람이 자유롭게 살아야 일생이 가치가 있습니다. 생각이 많으면 번뇌하기 쉽고, 근심거리가 많으면 곤경에 처하기 쉬우며, 추구가 많으면 지쳐 쓰러질 수 있습니다. *     내가 아는 사람들과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아끼시라. 모두 연분으로 이어진 사이니까. 생활의 쾌락을 충분히 감수하시라. 한순간에 훅 사라질 수 있으니까. 생명의 하루하루를 열심히 체험하시라. 이 생애 끝나면 다음 생애는 없으니까. *     너무 멀리 내다보지 마시라. 부질없습니다. 남은 꿈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방향을 잘 조정하고는, 수걱수걱 걸어 나가시라. 이 길이 끝나는 그곳까지. *     현용수 작성 2020-11 서울왕십리
19    逍遥인생 사는법 댓글:  조회:745  추천:0  2022-03-10
逍遥인생 사는법 《庄子》 학습심득 ♣♣♣♣♣♣ 장자는 “忘”을 인생번뇌를 없애는 비결로 삼았다. “忘物、忘情、忘我”, 이 세 가지를 할 수 있으면, 진정으로 “逍遥”의 인생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 01, 忘物 《智慧书》에서 말했다; 욕망이란 神이며, 욕망의 에네지와 神의 에네지는 비슷하다. 물질에 대한 욕망은 인생의 본능이다. 衣食住行 모두가 욕망이며, 욕망이 없으면 인생이 없다. 그러나 밑굽빠진 욕망은 메울 수가 없다. 과도한 욕망은 인생비극의 시작이다. 한 지주가 왕을 만났다. 왕이 말했다; 당신이 여기서부터 갈만큼 가서 표기를 하고 돌아오라. 그러면 여기서부터 그 표기한 곳까지 모두 당신의 땅이다. 해가 서산에 졌지만 그 지주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너무 급한 속도로 너무 멀리 가버린 탓에 길에서 지쳐 죽고 말았다. 장자가 말했다; “物物而不物于物” 우리말로 하면, 물질을 소비하고 욕심내면서도, 물욕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마음은 제한적이지만, 욕망은 무궁하다. 물욕과 명리에 빠져있는 사람은, 한 발작 한 발작 점점 깊은 심연에 빠져 들어가, 결국 나올 수 없게 된다. 장자가 말했다; 뱁새가 수림에 둥지를 튼다 해도,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황하물을 마신다 해도, 그 쪼끄만 배를 채우는데 불과하다. 하긴 그렇다. 아무리 부자라고 하루 밥 열 끼씩 먹는 것이 아니고, 매일 금 그릇에 산해진미 담아 먹는다고 장생불로하는 것도 아니다. 禍는 만족할 줄 모르는 데서 오고, 근심거리는 가지려는 욕심에서 온다. 그러므로 만족의 도리를 조금이라도 알면, 한평생 큰 탈이 없이 살 수 있다. 물질이 눈부시게 풍부한 오늘의 시대에서, 탐욕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명지한 處世之道라고 하겠다. 02, 忘情 하등인은 정이 薄하고, 중등인은 정이 厚하고, 상등인은 정을 잊는다. 정을 잊는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뜻이 아니다, 정이 깊으면서도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통사람들은 혹은 박정하고 무정하여 세상의 따사로움을 받을 수 없는가 하면, 혹은 정에 너무 깊이 빠져, 나올 수 없어, 자기로 슬퍼하면서 상처 입는다. 장자가 말했다; 샘물이 마르면서 두 마리 고기가 땅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자기 배속의 거품을 토해 내여 대방의 몸을 적셔주며 목숨을 유지한다(相濡以沫). 차라리 서로 잊고 제각기 강이나 호수를 찾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사람들은 위기에서 서로 의지하여 힘겹게 사는 행위에 상당히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서로 놓아주고 각기 돌파하는 것이 더 좋은 삶의 길일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들은 결코 무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정이란 대방에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것이다. 너무나도 고상한 정의 잊음이다. 장자는 안해가 죽자, 대야를 북처럼 치며 노래 불렀다. 안해의 죽음은 자기를 동반하는 형식을 바꾸는 것에 불과하므로, 슬퍼하는 것은 안해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세상에서 진정을 하나 얻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행운이다. 그런데 또 영구하기까지 바란다면 그것은 순전히 망념이다. 사람은 살아 갈라지지 않으면, 죽어 갈라진다. 어쨌든 종당에는 갈라진다. 이것은 사람의 숙명이다. 이 점을 진정으로 알았다면 사람은 더욱 활달하여 지고, 사는 것이 더욱 쉬워진다. 장자가 말했다; 어쩔 수 없음을 알면서도 평소처럼 태연할 수 있는 것은, 덕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갈라질 때 울고불고 하지말고, 함께 있을 때 좀 잘해 주라! 03, 忘我 《庄子·山木》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이 배타고 강을 건너는데, 앞에서 어떤 배가 자기 배에 부딪친다. 그는 곧 욕설을 퍼붓는다. 눈깔이 없냐고. 그런데 그 배에는 사람이 없다. 빈 배다. 금방까지의 분노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만일 그 배에 사람이 있었다면 자기를 건드린 것으로 여기고, 크게 성을 내는 것으로 자기존엄을 지켰을 것이다. 한사람의 자존심이 너무 강하고, 자아의식이 너무 강하면, 남들이 조금만 눈에 거슬려도 즉시 반격에 들어가고, 정서가 폭팔한다. 이것은 기실 전형적인 약자의 자아보호의식이다. 사람과 사람지간의 많은 모순들은 모두 “나”로부터 시작된다. 자기 감수를 일방적으로 너무 강조하는 것이 사람지간 모순의 근원이다. 장자가 말했다; 사람이 자기를 비우고 세계를 노닌다면, 누가 당신을 해칠 수 있겠는가? 한사람이 자기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그렇게 많은 번뇌도 없을 것이다. 두 배가 서로 부딪쳤을 때, 만일 당신의 첫마디가 욕설이 아니고, 대방을 관심하여 “별일 없었소?”하고 묻는다면, 당신이 대방에게 주는 감각이 바로 빈 배와 같겠으니, 어찌 다툼이 생길 수 있겠는가? 인생을 살 제,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잊고, 많이는 남을 생각한다면, 결국 남에게 상해주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서 상해 받지도 않을 수 있다. “추호도 이기적이 아니고, 오로지 남만 위하라”는 말 아니다. 많이는 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 집착을 내려놓는다면, 자연히 옴니암니 따지지 않게 되며, 인생이 悠然自在할 수 있다. ​ 현용수 작성 서울왕십리무학로 2021-02-23
18    大道는 간단해 지는 것 댓글:  조회:388  추천:0  2022-03-08
大道는 간단해 지는 것 이 글을 노년벗들에게 삼가 드립니다! ​ 글을 쓰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수련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요즘 내 마음 살펴보니 스팸들이 많이 끼였다. 하여 마음 깨끗이 하고 가볍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글을 쓴다. 내 나이 어느새 칠순에 가까워 온다. 지금은 칠순 고래희가 아니라지만 적은 나이는 아니다. 신체가 망가지는 것을 어쩔 수 없구나. 금년에는 암 진단이 나와서 수술까지 받았다. 이제 얼마를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라지는 않을 것이다. 상관하지 않는다. 나머지 시간에는 될수록 간단하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생활하다가 간단하게 가련다. ​   大道가 바로 간단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발전 법칙으로서, 중국 도가 철학의 기본이며, 중화문화의 정수이다. 자고로 “진짜 전수는 한마디 말로 하고, 가짜 전수를 만권의 책으로 한다.”고 하였다. 간단해 지는 것, 이것은 단지 공능의 정밀화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요하게는 본질의 승화를 뜻하는 것으로서 사람 인생의 높은 경계를 의미한다. ​   大道는 간단해지는 것, 大道는 모양이 없는 것, 大道는 법칙이 없는 것, 이런 상태는 大道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본원으로 돌아가는 고급공능상태이며, 이 출발점에서 마음을 다스리어 진정 청정무위(清净无为), 망아무사(忘我无私), 천인합일(天人合一)등 높은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 심각한 진리는 기실 간단하고 소박하다.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만드는 것, 이것은 고명한 능력이다. 위대한 사람은 바로 간단하여짐으로서 위대하여 지는 것이다. ​   인생도 결국은 간단하여지는 것이다. 깨달음이 심오할수록 간단해 지고, 또 간단해 질수록 심오하여 진다. 간단하던 것이 복잡하여 졌다가 다시 간단하여 진다. 산을 보아 산이던 것이, 산을 보아 산이 아니다가, 다시 산을 보아 산이 된다. 이것이 바로 본질의 승화이다. ​   마음은 바르고 넓어야 하고, 사유는 간단해야 한다. 간단함은 일종 미적 향수일 뿐만 아니라 일종 능력이며, 일종 경계이다. 확실하게 알면서도 아는 척 하지 않는 것, 이것은 경계가 높은 표징이다. 눈으로는 몽롱하게 보고 마음으로 투철하게 인지하며, 보는 듯 마는 듯, 아는 듯 마는 듯, 이렇게 처세한다. 세상물정은 투철하게 보지 않는 것이 바로 투철하게 아는 것이며, 투철함 뒤의 불 투철, 명백함 뒤의 불 명백, 이런 것이 바로 얻기 어려운 호도의 높은 경계이다. ​   간단해지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다. 원래 복잡하던 것을 간단하게 하려면 지혜가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하며, 담략도 필요하다. 지혜 있는 사람은 간단하기를 선호하므로 공명과 재부에 집착하지 않는다. 물욕이 없으니 뜻이 밝아지고 그윽하니 멀리까지 보인다. 간단하게 사람이 되고, 착실하게 사무를 처리하며, 지혜를 발휘하여 어려움을 간단하게 만들어 처리한다. ​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비옥한 토지처럼 순박하며, 고요한 호수처럼 안정하다. 이런 사람만이 “석양 비낀 언덕에서 소와 양이 돌아오는” 유유함을 볼 수 있고 , “연꽃에서 풍기는 가을기운” 느낄 수 있으며, “죽엽에서 떨어지는 이슬소리” 들을 수 있고, “빈산에서 사람 보이지 않고 말소리만 들리는” 낭만의 정취 맡을 수 있다. ​   간단하다는 것은 결코 결핍이 아니라 자유이며, 공허가 아니라 단순이다. 최고의 도리는 왕왕 가장 간단한 것이므로 간단하게 사람이 되고, 소박하게 생활하며, 간결하게 처사한다. 자기사심잡념을 내려놓고, 자아욕망을 초월하면, 진정 망아망물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만이 진정 大道에 진입할 수 있다. ​   인생의 혼잡함은 유혹에서 오는 것이므로, “仁”으로 유혹을 물리치고, “智”로 곤혹을 해제한다. 유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혼잡에서 간단에로 승화하는 표지이다. 옹달샘 넘쳐나 흘러도 나는 지금 한 컵이면 족하고, 인생백태 복잡하지만 기실 모두가 하나부터 시작된다. 즐거움으로 번뇌를 바꾸고, 간단함으로 진짜를 얻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의 大道이다. ​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행자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께서 도를 얻기 전에 무얼 하셨나요?” 스님 대답하기를 “땔나무 하고 물 긷고 밥을 지었지요.” 행자 묻기를 “도를 얻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스님 대답하기를 “역시 땔나무 하고 물 긷고 밥을 지었지요.” 행자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도를 얻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스님 대답하기를 “도를 얻기 전에는 땔나무 하면서도 물 긷기 근심을 하였고, 물 길으면서도 밥을 지을 근심을 하였죠. 그런데 도를 얻은 후에는 땔나무 할 때는 땔나무만 생각하고, 물을 길을 때는 물만 생각하고, 밥을 지을 때는 밥만 생각하죠.” 숭고하고 심오한 도리는 왕왕 극히 간단한 사상에 함축되어 있다. ​   사람마다 모두 자기의 생존방식과 생활경로가 있다. 세월 속에서, 생활 속에서 많은 번뇌가 생기는데 이런 것들을 모두 내려놓으면 일체가 자유로워진다. 생활에서 많은 문제는 마음에 둘 필요가 없고, 인생에서 많은 부담은 짊어질 필요가 없다. 일념으로 내려놓으면 간단생활의 낙취를 감수할 수 있고, 심령비약의 쾌감을 감수할 수 있다. 어떤 일을 개변하려면 먼저 진짜 자기를 찾고, 자기부터 개변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많은 잠재능력이 있는데 습관에 의하여 가리여 지고, 시간에 의하여 무디어 지고, 게으름에 의하여 허실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만 기억하고, 잊어야 할 것은 잊으며, 개변할 수 있는 것만 개변하고, 개변할 수 없는 것은 접수한다. 우리는 가장 적은 후회로 과거를 대하고, 가장 적은 낭비로 현실을 대하며, 가장 많은 꿈으로 미래를 대한다. ​   천지의 도는 간단하다. 인생은 결코 쉽지 않고 그리 길지도 않다. 그리하여 생활을 너무 복잡하게 하지 않고 간단하게 한다. 인생이란 드라마가 일단 시작 되었다면, 당신이 좋아하던 싫어하던 상관없이 종막까지 연기된다. 그중 인생의 큰 도전이 집중된 단계에서도 오직 조용히 살아가고, 즐겁게 공작하고, 간단하게 생활한다면 이런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 사람이 만족할 줄 알고, 즐거워할 줄 안다면 모든 슬픔, 모든 아픔, 모든 버릴 수 없는 것들은 생명활동중의 잠깐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당신이 이 과정을 뛰어 넘을 수 있다면 당신의 삶에는 비약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   행복한 생활은 간단한 생활이다. 한 잔의 차, 한 장의 탁상, 그윽한 분위기, 마음에 잡념이 없이 매일매일 평범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간단한 생활이다. 하지만 간단한 생활도 많은 노력을 수요 한다. 그래야만 간단함을 보장할 수 있다. 생활은 총체적으로 완미한 것이다. 완미하지 못한 것은 사람의 심태일 뿐이다. 흠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것저것 흠집만 잡으면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간단하게 사람이 되고, 솔직하게 자기를 대하며, 분촌을 장악하고, 환경에 잘 적응하여 그에 만족하며, 기꺼이 현실을 접수한다. 간단하게 처사하고, 사달을 일으키지 않고, 시비를 만들지 않고, 사변을 두려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   인생은 자기 운명과의 장기적인 겨룸이다. 어떤 사람들은 초년에 웃고, 어떤 사람들은 만년에 웃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일생동안 웃지 못한다. 항상 낙관하면서 긴장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성급해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생활하면서 마음이 가는 대로, 성격이 하는 대로, 연분이 부르는 대로, 가장 솔직한 자기로 되고, 만족할 줄 알고, 미소할 줄 알며, 담담하고 태연할 줄 안다. 아무리 고생스럽고 어렵다 해도 견정하게 앞만 보고 나간다면 자기가 바라던 아름다운 풍경은 조만간에 나타난다. ​   사는 것이 쉬운가? 어려운가? 관건은 어떻게 사는가를 본다. 생활처지는 마음가짐에 따른다. 마음가짐을 고치면 생활처지도 달라진다. 당신이 생활에 요구하는 것이 많을수록 당신은 더욱 긴장해지고, 더욱 복잡해지고, 더욱 힘들어 진다. 반대로 당신이 생활에 요구하는 것이 적을수록 당신은 더욱 쉽게 만족할 수 있고, 더욱 쉽게 즐거울 수 있다. 강산명월은 원래 고정한 주인이 없다. 마음에 여유로움 얻은 자가 바로 주인이 된다. ​   깨달음 안고서 그윽하니 마음의 달 유독 밝구나. 마음 바르게 잡고, 고요한 물인 듯 하니 인생을 웃으며 살게 되더라! 인생을 살면서 평범하고 담담함이 가장 진짜이고, 조용하고 들볶지 않고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생명에서 가장 지구적인 것은 번화하고 화려함이 아니라 평범하고 담담함이다. 하나의 동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심정이 좋지 않을 때는 번뇌 털어 버릴 줄 알고, 심정이 좋을 때는 아무 거리낌 없이 크게 웃을 줄 안다. 어린아이처럼 간단하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생활하면서, 즐거움을 잃지 않고 마음의 본원을 확보한다면 일체는 자연히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생활에서 어떤 이야기는 말하고 싶은데 입을 뗄 수 없다. 차라리 단념하고 잊어버려라. 사람들은 보통 남의 것을 많이 부러워하고, 자기 것은 잃게 되거나 잃은 후에야 아까워한다. 소위의 득과 실, 정분과 연분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점점 희미하여 진다. 어떤 욕망은 내려놓기가 어렵겠지만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조만간에 떠나간다. ​   사람은 일생에 필연코 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그 길에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있고, 억울한 눈물이 있으며, 끈질긴 견지가 있고, 성공의 기쁨이 있으며, 또 실패의 깨달음도 있는데, 매 단계의 경력은 모두가 보귀하다. 생명의 풍요로움은 마음의 간단함에서 오고, 생활의 아름다움은 평상심에서 온다. 생활이 간단하면 힘들지 않고 즐겁기만 하고, 생각이 간단하면 평화롭고 그윽하다. 간단함으로서 생명의 진가를 깨닫게 되고, 심령의 조용함 지킬 수 있다. ​   끝으로 노래 “깨여나다”의 가사로 이 글을 맺는다. ​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얼마나 멀더냐? 숨 들이 쉬였다가 내쉬는 사이니라! 미혹에서 깨닫기까지 얼마나 멀더냐? 일념 한번 바꾸는 사이니라! 사랑에서 미움까지 얼마나 멀더냐? 무상한 사이니라! 옛날에서 오늘까지 얼마나 멀더냐? 한담하는 사이니라! 너와 나는 얼마나 멀더냐? 소통하는 사이니라! 네 마음과 내 마음 얼마나 멀더냐? 하늘 땅 사이니라! ​   현용수 작성 2020-08-08
17    러-우 전쟁이 주는 사고와 계시 댓글:  조회:534  추천:0  2022-03-03
러-우 전쟁이 주는 사고와 계시   국가 간의 전쟁과 사람들 간의 게임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지 멀리서 들리는 총성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사람들 간의 게임에서 지켜야 할 기본도리를 제시하여 줍니다.   01 인간의 존엄은 왕왕 날카로운 칼날위에 있고, 진리는 왕왕 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있습니다.   전쟁이 막 시작된 ​​2월 24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늠름한 자태로 텔레비전앞에서 전국을 향해 전쟁동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몇 시간 만에 우크라이나의 주요 군사시설, 군용공항 및 탄약고가 러시아 군대의 맹렬한 포격에 의해 즉시 파괴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방공 및 항공 부대는 기본적으로 전투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2월 25일, 젤렌스키가 다시 텔레비전 화면으로 공중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하지 않은, 속벌차림의 초라한 상태로, 우울하고 근심에 싸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버림받았습니다. 우리는 홀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국제 투쟁, 특히 현대 전쟁에서는 공격을 받는 약소나라의 존엄은 지켜질 수 없으며, 그 나라 인민들의 생명안전도 보장받기 어렵습니다. 강대한 진공국에서는 약소나라의 존엄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이며, 약소나라의 인민들을 향하여 서슴없이 발포할 것입니다.   국가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회에 향하여, 혹은 자기가 거주하는 나라에 향하여 존엄을 외치고, 인권을 외치고, 정당권익을 외칠 때, 강대한 자기나라의 배경도 이용해야 하지만, 자기 혹은 자기 소집단의 실력과 단결력, 그리고 성취를 가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02 능력자에게 의지하고 친구에게 의지하는 것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전쟁 전, 이미 서방세계에 눈을 돌린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일단 공격을 받으면 유럽과 미국의 친구들이 반드시 도와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켜 준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정말로 전쟁의 불바다에 떨어지자, 그 많은 잘난 친구 중에 누구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전쟁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데, 하늘처럼 믿었던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계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만 떠들어 대면서, 우크라이나에 지원군은 한명도 파견 못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강대함은 기실 모두 전설에 불과하고, 다른 사람의 힘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달콤한 말들로 이뤄진 신뢰는 결국 유사시 자기를 해치는 만성독약이 됩니다.   국제사무이든 개인발전이든, 사람이 포만한 자부심, 안정적인 지위 및 무적의 영향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자기 힘으로 싸워서 세계를 정복하고 쟁취하여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 싸워서 세계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쟁취하는 것은 물론 매우 어렵고, 진행이 느립니다. 몇 십 년 눈물겹도록 어렵게 분투하였어도 성과는 여전히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그 업적이야말로 확실한 내 것이며, 내 손안에 장악되어 있는 것이며, 견고한 것입니다.   03 남의 인내와 양보를 나약함으로 보지 말고, 모든 일에서 여지를 둘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남의 권익을 침해해선 안 됩니다.   소련이 붕괴된 지 30여 년 동안, 미국을 위수로 하는 서방은 거듭 거듭 러시아와의 약속을 어기고, 나토를 한걸음 한걸음씩 동쪽으로 확장해 나가면서, 러시아의 핵심 이익을 엄중히 위협하였습니다. 푸틴은 오래 참았고, 오래 기다렸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나토를 견제하는 마지막 방선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점령되면 러시아는 다시 소련처럼 해체되어야 할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나토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그들의 강대한 군사력을 빌어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환상하였습니다. 그들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에 한 마리의 미친개로 이용되기를 달갑게 원했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러시아가 받게 될 치명적 위협을 아랑곳 하지 않고, 나토를 집안에 끌어들이려 하였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의 이익을 해치는 전형적인 국제 이기주의 행위였습니다.   쏘련시대 KGB의 출신인 푸틴은 싸우기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특히 잘 싸우는 북극곰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30여년의 인내와 양보를 나약으로 보고 괴롭혀 왔습니다. 결과적으로 푸틴은 더는 퇴로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우크라이나를 징벌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순식간에 머리가 깨지고 피가 터지게 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두뇌 없는 치매전략을 통해 약소국가는 대국 간에 중립을 지키거나, 모순해결의 다리가 되어야 하지, 함부로 대국의 분쟁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04 무릇 국제사무에서 힘이 세면 틀린 것도 옳게 되고, 힘이 약하면 옳은 것도 틀리게 되며 심지어 두들겨 맞게 됩니다. 너무도 불공정하고 격분할 일이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중국이 세계 최강으로 되려는 목적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불공정한 세계의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기실은 초기에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많은 정력을 들여 직접 책동하여 성공하였습니다. 미국은 국내에 위기가 발생하면 왕왕 전쟁을 일으키거나 사촉하는 방법으로 해결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위기에서도 한번 전쟁을 하고나면 그럭저럭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미국의 건국 200여년의 역사에서 20여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쟁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만큼 미국은 전쟁이 없이는 살아 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인류의 재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언제나 전쟁 도발자였지만, 번마다 자기의 여론패권을 이용하여 도덕 심판원으로 자칭하고, 정의의 대표권을 행사합니다. 이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부상하고 러시아가 온정 되면서, 여러 가지 위기에 시달리는 미국의 국력은 엄중히 쇠약해 졌습니다. 지금 미국은 중국 하나를 대상하기에도 힘에 부치는데, 러시아까지 간섭합니다. 중국의 전통 군사지혜의 표준으로 보면 천치의 수준에 가깝습니다.   미국은 그동안 수차례 중-러 관계를 이간질 하려 했으나, 이번에야말로 또 핑게를 찾았습니다.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중국은 언제나 자주주권과 영토보전을 강조하는데, 우크라이나가 침공 받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러시아가 공격을 중단하도록 설득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중국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세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하고 있는건가?”하고 도발적으로 질문했습니다. 이에 대해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습니다: “미국은 주권 문제에 있어서 중국의 결정에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자격이 없으며, 권리도 없다. 중국은 이에 대해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깊은 감정을 갖고 있다. 20년 전,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 대사관이 미국 항공기의 폭격으로 3명의 언론인이 사망했고, 지금까지 나토는 중국에 피의 빚을 지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세계에서 갱단을 묶고, 세력범위를 확장하는 행위에 관심이 없으며, 이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바이든 미국대통령은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너무 좋아서 미국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중국은 미국과 달라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이 고조된 이후로 미국은 추잡한 행동을 줄곧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러-우사태의 발전을 주시하여 볼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하루속히 갈등이 해소되고 정전이 되기를 빕니다.   현용수 서울왕십리 2022-03-03  
16    한국은 우리민족의 대표로 될 수 있을까? 댓글:  조회:630  추천:1  2022-02-13
한국은 우리민족의 대표로 될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韓國은 자기를 우리민족의 당연한 대표로 자처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 문화의 모든 것에 韓이라는 모자를 씌운다. 이를테면 韓민족, 韓글, 韓복, 韓식... 등. 심지어 우리민족 몇 천 년의 역사도 모두 한국사로 되어있고,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도 인입한 것이든, 자생한 것이든 일률로 한국고유문화로 점찍고, 고수하고 있다. 그럼 韓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먼저 韓國國名의 유래부터 살펴보자.   중국 《後漢書》에는, 기원전 194년에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망하여 韓王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에 반도 중남부에는 각기 馬韓, 辰韓, 弁韓이라는 세 개의 부락연합체가 있었으니, 이를 “三韓”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韓”이란 결코 우리민족의 발원지가 아니며, 우리민족 대표성 역사사건의 발생지도 아니며, 단지 고대 모 역사시기의 모 지역에 불과하다.   누가 조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마한의 伯濟國이 백제로, 변한의 狗邪國이 고구려로, 진한의 斯盧國이 신라로 이어진다는 설도 있기는 한데, 하여튼 이 三韓설이 바로 大韓民國 국호의 최초의 어원인 것만은 확실하다.   다른 역사사건들은 잠시 제쳐놓고, 韓의 유래에 상관되는 근대 역사사건들만 살펴보자.   1894년 2월 10일날, 조선에서 동학농민폭동이 일어난다. 따라나선 사람들이 20여만이나 된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임금인 고종은 동학농민폭동군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종주국인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청나라에서는 호위군사 2800명 보내 준다. 그런데 이때 일본에서도 청나라와의 해상전쟁을 구실로 8000명의 군사가 조선에 들어온다. 그때 벌어진 전쟁이 바로 청일갑오전쟁이다. 결국 부패하고 쇄약해진 청나라가 해전에서 패배하고 조선 땅에서도 패배하여 쫓겨 가면서, 일본과 “시모노세끼협약”을 맺는다. 이 협약에서 청나라는 처음으로 조선을 독립국으로 승인한다고 써 넣었다. 이제 조선은 더는 청나라의 종속국이 아니므로 일본이 점령하든 말든 청나라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명성황후가 나선다. 명성황후는 로씨야에 구원을 요청한다. 로씨야는 “조선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일본에 경고한다. 분통이 터진 일본점령군은 1895년 10월 8일에, “여우사냥”이란 명목으로 명성황후를 경북궁 건청궁에 끌고 가서 집단모욕하고 불에 태워 살해한다. 고종임금은 너무도 놀랍고 무서워서 로씨야 공관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로씨야 보호를 받으며 조마조마하게 지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임금은 로씨야 공관의 사촉을 받고, 朝鮮의 국호를 “大韓帝國”으로 바꾸는 사건이 있었다. 청나라가 이미 조선을 버린 형편에서 중국 년호를 폐지하고, 자기 년호를 “光武”로 정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조선도 인젠 떳떳한 독립국가로 되는 시작이 아니라, 새 상전인 로씨야의 뜻에 따른 해프닝이었다. 이것이 후기에 韓國국명의 계기가 되였다.   1904년, 함흥 앞바다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난다. 역시 서로 조선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운 것이다. 결국 일본이 이기고, 러씨야가 패배한다. 그리하여 1905년 11월 17일에 일본은 “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간다. 그 후 5년간 조선에서는 별로 큰 반항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日朝倂合條約”이 강제 체결되고, 공포됨으로써 조선은 국권까지 완전히 빼앗겼다. 이로써 조선은 35년간의 치욕적인 일본식민지시대가 시작된다.   새 시대가 열릴 때마다, 나라의 興亡盛衰는 주로 통치자에게 달린다. 조선이 망국한 것은 그 주요책임이 고종의 무능함에 있었지만, 조선의 백성들에게도 자기 책임을 다 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었다. “乙巳勒約”이 체결되고 조선이 외교권을 빼앗기자, 경기도 용인에서 이익삼이라는 의병장이 나서서 “나라를 건지자! 따라나서라!”하고 외쳤는데, 겨우 15명이 따라나셨다. 너무도 무능한 조정을 보면서, 백성들은 이 땅에서는 더 이상 나라를 건질 생각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싸움에서 800명 일본군이 4만명 농민군을 살해하였는데, 일본군은 한명의 죽음도 없었다. 농민군의 무기는 창과 칼, 기껏해야 화승총이었지만, 일본군의 무기는 기관총과 대포였다. 그것이 그 당시 조선과 일본의 현실적 차이었다.   당시 반도에서 망국노를 원치 않는 민족의 많은 유지지사들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 중국조선족 선인들은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대오에 가담하여 중국인들과 어깨 겯고 전 중국을 누비며 일본군과 싸웠고, 김일성을 대표로 하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에 건너가, 처음에는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동북항일련군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후에는 자체로 빨지산 항일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일본군과 싸웠다. 그리고 홍범도, 김좌진 등 기개가 있는 조선의 민족주의자들도 중국에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고, 중국의 봉오동, 청산리 등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이후, 그해 9월 15일에 김 구를 대표로 하는 조선의 민족독립 운동가들은 중국上海에 가서 “大韓民國”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당시 중국국민당정부의 지지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견지하였다. “大韓民國”국명이 이때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다.   이와 반면에 박정희(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를 대표로 하는, 일본에 굴복한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은 징병되어 일본군에 편입되었으며, 일본군을 따라 대동아전쟁과 중국침략전쟁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리고 많은 조선의 유부녀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모집되어 갔고, 많은 조선의 청장년들이 노동자로 모집되어, 일본을 위하여 고된 노동을 해야만 하였다.   1945년 8월 10일 중국군과 쏘련군 미군에 의해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고, 8월 15일 반도 땅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을 반도에서는 광복이라고 한다. 당시 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 지역은 쏘련군, 이남 지역은 미군이 진주한 것을 계기로, 1948년, 북남에 각각 쏘, 미 군정에 의한 분단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렇게 이북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 수립되고, 이남에 大韓民國이 수립되면서, 광복 이후 자주독립 통일국가를 지향한 민족의 염원은 좌절되었고, 분단은 고착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이북과 이남의 두 정권의 성분를 각기 분석해 보면, 이북정권은 철저한 항일세력들로 무어진 정권으로서 독립의 의의가 아주 크고 민족색채가 돌출하지만, 이남정권은 일본에 굴복했거나, 일본에 충실했던 친일세력들이 대거 등용된 혼잡한 정권으로서 그들에게 있어서 독립의 의의는 그리 크지 않으며, 상전 국이 일본으로부터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 한국은 우리민족의 정통을 계승하고 발양한 나라가 아니고, 우리민족의 국제적 대표가 될 수 없으며, 중국조선족에 대하여 더구나 대표자격이 없다. 우리민족은 근대에 와서 대국들의 분쟁에 의하여 분열된 민족으로서 아직까지도 국제적으로 통일된 호칭이 없다.   한국에서는 “한민족”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는 “조선민족”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인다. 이는 습관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고, 현대에도 한국과 조선으로 분단되어 서로 국명을 달리 하고 있기 때문에, 분단되기 이전 명칭인 “조선”이라는 말이 그나마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조선을 “북한”이라고 하고, 조선에서는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남의 정권이나 북의 정권에서, 모두 자기의 헌법에 반도는 하나의 나라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조선”이란 말은 반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이북의 조선만 가리킬 땐 “북조선”이라 부르며, 이남을 가리킬 땐 “남조선”, 혹은 “한국”이라고 부른다. 민족을 호칭할 경우 아예 영어로 “코리안(Kore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도 "백의민족", "배달민족" 등 호칭이 있지만 공식호칭은 아니다.   세계에서 우리민족의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총 8,000여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세계인구의 약 1%를 차지한다. 대한민국에 5,000여만 명, 조선에 2,500여만 명 있으며, 이외에도 미국에 약 250여만 명, 중국에 약 180여만 명, 일본에 약 80여만 명, 원 쏘련지역에 약 50여만 명... 등, 한국과 조선 이외에도 근 500만 명좌우의 계례들이 산재하여 있다.   중국조선족은 조선왕조말기부터 일본식민지시기를 거쳐 중국에 건너온 조선인들의 후손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민족법전에 “조선족”으로 명명되어 등록 되었다. 그들의 중국 국적은 당국에 입적신청을 올려 비준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중국의 漢族들과 어깨겯고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 참가하여 크나큰 희생을 냈고, 혁혁한 공훈을 세웠으며, 공화국 창건활동에 직접 참여한 결과이다. 중국의 조선족 집거구에는 마을마다 진달래 피는 곳에 렬사비가 있고, 렬사비마다 적어서 몇 십 명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국가 급 노래인 “中國人民解放軍軍歌”도 조선족 음악가 정율성선생이 지운 것이다. 중국에서 조선족은 부끄럼 없이 당당한 開國民族이다. 中華人民共和國은 중국조선족이 중국의 漢族, 그리고 다른 소수민족들과 공동히 손잡고 건립한 완전 자기나라이다. 중국에서는 헌법상 모든 민족이 공동한 주인이고, 공동한 권리가 있다. 민족이 크고 작고 상관없이 일률로 평등하다. 그리하여 중국의 소수민족들은 자기언어를 쓸 권리가 있고, 자기문자를 쓸 권리가 있으며, 자기민족복장을 입을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전통문화를 계승 발양할 권리도 있다.   소위 “한복”이라는 것은 우리민족 전통복장에 대한 한국식 명칭이다. 이 복장은 결코 한국의 독점衣裳文化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공동한 전통衣裳文化이다. 전 세계의 우리계례들은 모두 이 복장을 입을 권리가 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이건만, 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 복장은 한국에서만 입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누가 그런 권리를 주었는가? 중국조선족이 자기의 민족복장을 입고 베이징동계올림픽개막식에 출현하였는데, 이것은 원래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한 현상이건만, 한국은 마치 대단한 것을 도둑이나 마친 듯이 온 나라가 떠들 썩 한다. 그런데 한국은 기실 크게 잘못알고 있다. 중국조선족이 입은 옷은 결코 “한복”이 아니라 전통 “조선족 복”이다. 한국은 과대망상에 빠져 상식을 혼돈 하고 있다. 이렇게 이웃나라의 트집만 호시탐탐 노리며 사는 것이 피곤도 하련만, 한국에서는 이것이 도리어 기본정치인 것 같다. 그리하여 하찮은 기자의 황당한 기사 하나로 온 나라를 들쑤셔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상전국의 뜻을 따라야 하는 한국의 정치가 얼마나 취약하고 기형적인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중국의 道德經에는 “海納百川”이란 말이 있는데, 바다가 천하의 하천을 용납하듯이, 너른 흉금으로 천하의 인심을 포용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개인 GDP가 비교적 높은 한국은 중국조선족을 포함하여 세계에 흩어진 우리 계례들에게 얼마간 흡인력은 가지고 있지만, 우리 계례들을 마음으로 포용할 만큼 그렇게 너른 흉금이 없다. 중국동포들은 무한한 동경을 안고 한국에 왔다가, 한국이 많은 방면에서 확실히 선진국가임을 실감하면서도, 중국동포들에 대한 너무 편파적인 사회민심과 너무 인색한 국가정책 때문에 크게 실망하게 된다. 물론 한국도 체제적 당파 간 싸움으로 자기의 어려운 사정이 있겠지만, 현재의 한국은 자기를 대표할 뿐이지, 우리민족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자연히 그 답안이 나오는데, 너무 높은 기대는 접어야 한다.   중국조선족들에게 있어서 韓國은 한때 민족의 성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현재 중국의 GDP가 미국을 바싹 따라가면서 G2로 부상하여 한국보다 훨씬 높아졌지만, 개인 GDP는 한국이 많이 더 높으므로, 많은 중국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노무하고 있다. 한국노무는 여전히 중국조선족들이 치부하는 중요한 선택의 하나이다. 이제 멀지않은 내일에, 중국이 G1이 되어 세계최대 부강국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역사의 추세이다. 그때에도 중국조선족은 한국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분쟁은 분쟁이고 계례는 계례이다. 한 계례간의 분쟁은 상호 욕설로 해결할 수 없다. 역사가 해결해 줄 것이다. 조급해 마라. 현재 한국이 중국과 중국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중국이 쾌속 부상하는 과정의 작은 에피소드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많은 일들은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곳까지 노력을 하여 역사에 유감을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용수 서울왕십리 2022-2-12 초고 현용수 서울중랑천 2023-9-20 수개
15    “人不为己,天诛地灭” 是正见 댓글:  조회:2998  추천:0  2015-12-28
“人不为己,天诛地灭” 是正见 (献给2016丙申年)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玄龙洙 在当今社会上,反映主流思想的积极的观点称之为正见,而反映陈腐思想的消极的观点称之为负见。 中国有一句俗语“人不为己,天诛地灭”。 “天诛地灭”是一句成语,对此有很多人知道,可是对于“人不为己,天诛地灭”,知道的人并不多。此语在包括《四书五经》在内的可查寻的所有中国经典古籍中竟然查不到,《辞海》或《辞源》等中国大型辞典里也没有收录此语。 可知,此语不可能是经典古语,很可能是近代或现代才形成的一句民间俗语。   有人说;《論語-宪问第十四》中的“古之学者为己,今之学者为人。”一句是此语的来源。 又有人说;中国战国时期诸子百家中的《杨朱》所言“损一毫以利天下,不与也。”一句是此语的来源。 可是,这些主张都是推测,没有直接的证据,与“人不为己,天诛地灭”相差甚远。 至今为此,发现此语最早出现的文献是1937年刘少奇所著的《论共产党员的修养》一文,文章里写道:“…这种人的脑筋,浸透着剥削阶级的思想意识,他相信这样的话:‘人不为己,天诛地灭’……他甚至用这一大套剥削阶级的话,来为他的自私自利和个人主义辩护。” 不过,以此来断定刘少奇就是创造此语的第一人,为时尚早,因为,刘少奇文章中此语是打引号的,是引用别人之语的,引用何时何处何人之语呢?我们不得而知。 还有在文革时期,中国商务印书馆出版的《汉语成语小词典》第276页,在解释“天诛地灭”成语的例文中也引用了此语,只道是“反映了剥削阶级反动腐朽的世界观。”,却没有说明此语最初的出处。 此外,网上还可以查寻到引用此语的一些佛文讲稿和文艺作品,例如一位高僧(净空法师)讲述的《佛说十善业道经》第二十四集和文革时期的现代京剧《红灯记》中,各有发现一段引用此语的痕迹,可惜都是现代版的东西,没有考证价值,不能做为历史依据。   至今,“人不为己,天诛地灭”的原话出自何时何处何人,依然是个迷。 现在,问题的焦点是对此语的理解上存在的一些争议和由此衍生出来的很多奇谈怪论。 包括刘少奇和净空法师在内的曾经引用过此语的所有人普遍认为,此语的基本意思是“人若不为自己谋私利,会遭到天诛地灭”,并当做典型的极端利己主义观点来加以否定和批判。   此外,有一些人执意编造各种奇谈怪论,试图证明此种利己主义观点的合理性和正当性,可能他们是真正的高智商的利己主义者,我们不必去惹他们。 为了彻底揭开对此语的疑惑,我们不妨换个方式来观察此语,以进一步了解此语中所包含的其他内容。 如何理解此语,关键是如何解释此语中的“为”字的含义。 我们知道“为”字是广义字,有以四声发音的“为”字和以二声发音的“为”字。现代汉语(白话文)中以四声发音的“为”字表示;“为了、代替、因为、对于、利于、帮助…”等,以二声发音的“为”字主要表示;“做、作、成、当…”等。 古汉语(文言文)中二声属于“平音”,四声属于“仄音”,其意义和用法完全不同。   上述所见,人们说“人不为己,天诛地灭”的基本意思是“人若不为自己谋私利,会遭到天诛地灭。”,但要知道这只是把“为”字以四声来解释的情况,这样解释此语,确实是一句极端利己主义的观点,根本上违背了中国传统道德标准,只能视为负见。   可是,人们忽略了此语还有一种解释法,就是把“为”字以二声来解释的方法,可以把“为”字换成“做”字来解释,此时,此语的基本意思就变成“人若不做好自己,会遭到天诛地灭。”。这样解释就合理多了,不违背中国传统道德标准,含蓄着很强的哲理性,可以视为正见。   同样一个“为”字,采取不同声调,其意义就变了,这可以说是中国汉语的魅力之一吧!   通常所说的“为自己谋私利”是针对于“不合法,不合理,不道德”而言的,是“以损失别人或公共利益来谋取自己私人利益”的意思,是个很缺德的行为,所以遭到天下人的吐沫。   把“私利”和“自己利益”混为一谈是概念上的错误。正当谋取“自己利益”是天经地义,是要大力鼓励的,是“做好自己”很重要的一个内容。   所谓的“做好自己”可以理解为;“加强自己生存能力和发展能力(包括正当谋取自己利益),保持自己特色,忠实于自己职责,担负起自己责任…”等,实为更全面、更积极的“为己”。 如今,我们无法证实“人不为己,天诛地灭”的初衷到底是什么?可是,为了增加社会正能量,还是采纳正见为好。 人是社会的主体,都是以“自己”的身份去成为社会的一员,人人都要首先做好“自己”;这是人人自我生存和发展的基本条件,是与人共存共荣的前提条件,是帮助别人、战胜敌人的必备条件。   首先做好自己,应该说是正常人的本能。没有首先做好自己,连“自己是谁?”也不知道,自己的基本生存也不能保障,这种人有什么余力去参与社会的其他事务呢? 人若不做好自己,不加强自己的生存能力和发展能力,社会就不承认他,他不能成为健康的社会成员,会被淘汰出局,此乃天诛地灭也。 一个民族也是如此,若不做好自己,不保持自己特色,不加强自己建设,世界就不承认此民族,会被取消,此乃天诛地灭也。 一个国家也是如此,若不做好自己,不加强自己建设和管理,他国就欺负此国家,此国家在地球上丧失合法地位,会被推翻,此乃天诛地灭也。   从以上意义上讲,“人要为己,天经地义,人不为己,天诛地灭。”可以解释为;“人要做己,天经地义,人不做己,天诛地灭。”,是完全的正见。   2015-12
14    미국의 바지 벗겨보자! 어떤 괴물이드냐? 댓글:  조회:3463  추천:0  2015-09-20
미국의 바지 벗겨보자! 어떤 괴물이드냐?   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몇가지   1, 미국에는 “련방저비위원회(美国联邦储备委员会简称美联储)”라는 것이 있는데, 국가의 중앙은행에 상당하다. 그의 직능은 미국의 화페정책을 제정하고 실시하며, 금융복무를 제공하며, 금융체계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이름은 “련방”이라 하지만, 기실은 사인 은행가와 사인 기업집단 총재들로 구성된 대 재벌들의 핵심조직으로서, 순수한 사적인 금융조직이며, 정부의 공제를 받지 않고, 그 어떤 법률의 예속도 받지 않는다.   2, 미국에는 국영은행이 없다. 우리들이 익히 알고있는 딸라는 모두 美联储에 의하여 발행되는 것이다. 미국정부는 화페발행 권한이 없고, 오직 국채를 발행할 권한만 있을 뿐이다.   3, 미국정부는 美联储로부터 딸라를 대출 받아서, 미국과 전세계 범위에서 유통시키며, 정부의 국채를 담보로 저당한다.   4, 미국국민들이 매년 바치는 세금중에서 가장 많은것이 개인소득세인데, 이 방대한 세금들은 정부의 재정수입으로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직접 美联储의 계자에 들어가며, 정부가 딸라를 대출받은 리식으로 계산된다.   二、참으로 괴상한 나라   1864년 4월 14일 저녁, 웨싱톤의 한 극장에서 연원차림의 한 사나이가 곧바로 링컨대통령의 관람석을 찾아갔다. 그는 신사답게 링컨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천천히 총을 꺼내여 링컨을 향하여 침착하게 여덟발을 발사하였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종용히 극장을 떠나가 버렸다. 이튿날 미국 력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링컨이 왜 죽었는가? 주요한 원인은 그가 중앙은행을 세우고, 정부의 이름으로 화페를 발행했기 때문이였다. 링컨이 죽자 중앙은행도 정부화페도 모주 페지되였다.   1963년 11월 22일, 요한 케네디 대통령이 상엄한 호위를 받으며 거리를 질주하던 자기의 차에서 총 세발을 맞고 당장에서 숨졌다.   케네디는 왜 죽었는가? 그는 대통령 11110호명령을 반포하여, 정부의 이름으로 백은권을 발행하였으며, 미국의 방대한 백은 저비량으로 사인 은행가들을 제압하려 시도했기 때문이였다. 컨니디가 죽자 11110명령도 백은권도 모두 페지되였다.   미국의 길지않은 200여년의 력사를 살펴 보면, 력대의 대통령들이 은행 금융거두들과 화페 발행권을 두고 판가리 싸움을 벌리여 왔으며, 선후하여 모두 일곱명의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이것은 미국병사들이 노만디 등륙작전에서 죽은 비례보다도 더 높다. 이 일곱명의 암살된 대통령들은 저마다 자기의 특수사연이 있었지만, 공통점이라면 모두가 미국의 기존 화페정책에 칼을 댔다는 점이다. 미국의 화페정책 혁명을 위하여 선후하여 일곱명의 위대한 대통령들이 자기의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하지만 미국의 화페정책 혁명은 오늘까지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매기의 미국정부에서는 여전히 자기로 화페를 발행하지 못하고, 모두 美联储한테서 빚을 내여 써야만 한다.   그리하여 미국은 결국 빚을 지어 살아가는 괴상한 나라로 되였다. 세계의 최강국이며 유일한 패권국으로서 얼마나 격에 맞지않는 일인가?   오늘, 미국의 국채중에서 외국에 빚진것이 약 3만억 딸러가 되는데, 중국에서 약 1.3만억 딸러의 채권을 사 들이여, 세계 제1의 딸러채권국으로 되였다. 그런데 이것이 대단한것이라고는 여기지 마라. 미국정부가 美联储에 빚진 채무는 무려 44만억딸러나 된다. 이 채무는 해마다 증가되는 추세이며, 그 어느날에 빚을 다 갚고, 쨍-하고 볓들날은 영원히 올수 없게 되였다.   미국에서는 정치, 외교, 군사, 경제가 완전히 美联储의 자본에 의하여 공제되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곰상곰상 美联储의 손자질을 해야한다. 대통령도 美联储의 동의를 거쳐야 될수있고, 대통령의 정책도 美联储의 동의가 있어야 실행될수 있다. 그런데 美联储는 필경은 정부가 아니고, 방대한 영리성 사인집단 조직으로서, 소유의 목적은 오직 더욱 큰 리윤을 얻기위한 것뿐이다.   미국정부에서 권리가 가장 큰 자리가 당연히 대통령 자리이다. 그런데 그들이 대통령이 되기전의 경력을 살펴보면 모두가 어떤 큰 경제실체에서 주요책임을 맡은적이 있으며, 그들이 대통령이 되여 실행하는 정책도 대체적으로 그들 배후의 리익을 위하여 복무하게 된다.   부쉬 부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애비 부쉬는 대통령이 되기전에 휴스톤 석유공사의 창시인이자, 총 대표로서 미국의 석유계 리익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대통령이 되자, 우선 자기의 석유리익에 방애가 되는 이라크를 길 들이게 된 것이다.   그 다음  아들 부쉬를 보자. 그는 미국 력대 대통령 중에서 학벌이 가장 높은 대통령인데, 그도 대통령이 되기전에 덱사스주에서 석유회사를 경영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부쉬 에네지회사를 포함하여, 여러 석유회사의 총재로 있었다. 그리하여 그도 대통령이 되자 황당한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자기의 말을 잘 듣지않는 이라크 싸담을 잡아 죽이게 된것이다.   현실적으로 지금의 미국 대통령은 결코 미국 국민들의 리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기실 미국 재벌들의 리익을 대표하며, 美联储의 리익증식을 보증해 주는 괴뢰이다. 미국은 세계를 몇십번 훼멸시킬수 있는 방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금 대단히 방자하여 졌다. 그들은 자기들의 리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나라를 서슴없이 무장침략 할수 있고, 그 어떤 국제표준도 제구미에 맞추어 규정한다. 동방사람들의 리념으로는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일도 그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일로 된다.   자기들의 계획이 순리롭게 실행되게 하기 위하여, 美联储에서는 우선 미국 국민들에게 많은 대출을 내주고, 많은 우대조건을 주어 그들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민으로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벌어서 소비하지만, 미국에서는 먼저 소비하고 벌어서 갚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일단 필요할땐 국민들을 전쟁으로 마구 내몰아 대포밥이 되게 한다. 누가 당신들더러 그렇게 많은 빚을 지라 하였는가? 대포밥이 되여도 너무 억울하진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 백성들이 가장 증오하는 것이 정부 관원과 상인이 결탁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정부의 관원이자 상인이고, 상인이자 정부의 관원이 될수있다. 대 기업집단의 총재가 마음만 먹으면, 선거자금을 내고 선거에 참가하여 의원으로 될수 있고, 주장으로 될수 있으며, 심지어 대통령까지 될수 있다. 일년에 30만 딸라의 봉금만 보고 대통령질 하려는 멍청이 대통령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들은 대통령의 특권을 리용하여 자기가 예속되여 있는 경제집단의 리익을 우선적으로 돌보아 줌으로써, 그로부터 차례지는 거대한 리익을 기본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나뽈레옹에게 한가지 명언이 있었다; “금전은 조국이 없다. 금융가는 애국이 무엇이고, 고상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리익을 얻는 것뿐이다.”   아도부 히틀러는 원래 반 유태주의자가 아니였다. 그런데 그가 독일의 정치무대에 오른후에, 경제위기속에서 90%이상의 백성들이 모두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데, 유독 유태인들만은 여전히 횡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투기모리하고 고래대을 놓고, 의원들과 관원들을 수매하여 자기들 집단을 위하여 복무하게 하면서, 전반 독일의 경제를 맘대로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히틀러의 야심실현을 크게 방해하였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우선 이 유태인들의 기득리익집단을 없애 버리려고 결심하였다. 후에 히틀러의 이 심리가 기형적으로 팽창되여 변태적인 종족 근멸주의자가 되였지만, 그로하여 그는 성공적으로 독일의 경제권리와 국가권리를 모두 자기손에 장악하게 되였다.   히틀러는 6년의 시간을 들여 모든 전쟁준비를 마쳤는데, 그 기간 그를 대폭 지원해 준 세력이 바로 스위스의 국제청산은행과 미국의 방대한 사인은행조직들이였다. 심지어 2차대전이 가장 치렬할때에도 대량의 미국의 자금들이 스위스의 국제청산은행을 통하여 흐르는 물처럼 독일의 계좌에 흘러 들어왔다. 당시의 형편에서 전쟁이 끝나면 가장 큰 리익을 차지할 준비가 아직 되여있지 않는데, 독일이 너무 일찍 동맹국에게 지게 할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을 방조하여 전쟁을 좀더 지연시키고, 그사이 가장 큰 떡을 차지할 준비를 충분히 하기 위하여 미국의 은행가들은 도리여 자기 정부의 적을 방조하여 주었던 것이다.   三、 세계를 략탈하는 수단   많은 미국사람들은 매우 이상해 하고 있다; 자기들은 예수를 신봉하면서 마음이 선량하고, 문명하고 남을 돕기를 즐기며, 또 세계의 가난한 나라를 많이 도와주고 있는데, 왜서 세계적으로 자기들을 증오하는 나라가 그렇게 많은가? 그들은 아마 진짜 몰랐을 수도 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美联储의 대리인이 되여 세계와 거래하게 되면서 세계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   미국의 막후는 방대한 美联储가 통치하고 있다. 지금 그들이 세계를 략탈하는 수단은 과거 짐승을 사냥하듯이 흑인노예들을 마구 잡아 들이던 때와는 다르며, 로 식민제국때와도 다르다. 21세기에 들어서서 그들이 세계를 략탈하는 수단도 많이 신사스러워 졌는데, 특히 세계 발전도상 나라들을 략탈하는 수단이 원래의 전함과 대포를 앞세우고 강박적으로 략탈하던 데로부터 지금은 먼저 도와주고 후에 받아가는 아주 문명한 수단을 쓰고 있다. 그들은 “국제화페기금조직”, “세계은행”, “아세아발전은행” 등 세개 금융기구를 활용하여 정채로운 현대 문명략탈 삼부곡을 연출한다;   제일부곡; 먼저 고급 경제자객(외교관, 정부대표단, 대통령…)을 파견하여 대방의 나라를 방문한다. 정부수뇌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나라를 방조하여 경제와 군사등 각 방면에서 대폭 발젼시켜 주겠다고 구슬린다. 대방나라 정부를 설복하여 그 나라가 발전하려면 여사여사한 큰 항목이 필요한데 자금은 자기들이 우혜조건으로 대출하여 주겠다고 담보한다.   제이부곡; 대방나라에서 대출을 받는데 동의하면, 진일보로 그 항묵의 공정을 자기네 상관 회사에서 맡겠다고 요구한다. 그러니 미국으로선 기실 이쪽 호주머니 돈을 저쪽 호주머니에 넘겨 넣은 셈이 된다.   제삼부곡; 몇년후 공정이 완공되여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공동으로 크게 경축한다. 그때로 부터 그 나라에서는 몇십년간의 국민수입을 몽땅 빚을 갚고, 리식을 무는데 써야한다. 만일 빚을 갚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미안하지만 저당했던 대형기업, 은행, 심지어 토지까지 몽땅 몰수한다.   이것은 미국이 빈손으로 승냥이를 옭아 잡는 고명한 방법인데, 때로는 이 방법도 막힐때가 있다. 바로 그들이 말하는 “망나니 국가”의 경우이다. 이런 나라에서는 작심하고 미국의 돈을 쓰지 않으며, 리식도 물지 않는다. 그러면 미국에서는 진일보의 내정간섭과 군사간섭을 고려하게 된다.   1, 미국중앙정보국에서 책임지고, 요언을 산포하여 반대파를 부추기면서 소위의 분홍색 혁명을 일으킨다. 군중을 사촉하여 강박적으로 소위의 망나니 지도자를 파직시키고, 자기말을 잘 듣는 대리인이 대통령으로 되게 한다. 그다음 그가 다시 미국의 원조를 받게 한다. (이집트, 우크란의 경우)   2, 첫번째 수단이 막히면 직접 반대파를 무장시켜 내부 군사충돌을 일으키여, 그 소위의 망나니 지도자를 없애 버린다. 이것으로 후임 지도자에게 한번 본때를 보여주는 셈이다. (리비야의 경우)   3, 두번째 수단까지 효험이 없으면, 직접 군사간섭을 감행한다. 강력한 미군의 공격앞에서 버텨내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 다음 그 망나니 지도자를 체포하여 “반인류죄”로 심판하여 죽이거나, 종신 감금한다. 그리고는 자기말을 잘 듣는 대리인을 내세워 대통령이 되게하고 많은 원조를 제공한다. (이라크와 유고슬라비야의 경우)   그 어느 나라가 일단 미국의 원조를 받아 들였다면 그때로 부터 어쩔수 없이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만 한다. 백여년간의 전쟁 피해로 거의 페헤가 되였던 중국에서, 1949년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제국주의 렬강들의 장기적인 봉쇄를 당했지만, 모택동 주석의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중국은 신속히 원기를 회복할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많은 발전도상의 나라들은 아무리 발전하여도 빈궁과 락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근본원인이 바로 그들에게는 자력갱생의 정신이 없고, 미국의 원조를 렴가 만찬으로 생각하고 받아 드렸기 때문이다.   2003년 태국의 총리 타신은 나라가 “국제화페기금조직”에서 대출받았던 120억 딸러를 몽땅 갚았다. 이 돈을 갚기 위하여 태국의 주가가 떨어지면서 입은 손실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컸다. 타신은 태국의 국기아래서 다시는 국제 은행가들의 원조를 받지 않겠다고 장엄하게 선서하였다. 심지어 태국의 기업들에서 국제은행에 빚진돈을 갚지 말것을 선동하였다. 2006년 미국은 태국의 군부를 사촉하여 정변을 일으키여, 타신을 쫓아 버렸다.   이 외에 미국이 남의 나라 재물을 략탈하는 최고급 수단으로는 또 경제포말을 일으키는 수단이 있다.   한때 일본의 경제가 신속히 발전하여 총 경제량이 방대하여 지면서 미국 딸러를 위협하게 되였다. 그러자 미국은 일본을 핍박하여 엔 가치를 올리게 하고는, 일본의 딸러 보유량을 줄였다. 그 다음 미국은 조치를 대여 엔의 포말을 일으키여 엔 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지게 하고는 자기들이 보유한 일본 채권을 몽땅 일본에 되넘겨 팔았다. 이렇게 되자 거의 배로 증가된 딸러의 지불량을 일본에서는 보장할수 없었다. 엔의 가치는 진일보 떨어져, 많은 일본 대기업들이 파산되였다. 일본의 경제가 붕괴되자 미국은 다시 딸러의 가장 낮은 가격으로 일본의 기둥산업들을 사들여서는 일본경제를 틀어 쥐였고, 양을 길러 털을 깎아내는 식으로 영구적으로 리윤을 보장받게 되였다.   그런데 미국의 이 최고급 수단도 한국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의 수단에 빠져, 한국돈이 페지처럼 되였을때, 한때 망국의 설음까지 겪었고, 나라의 보귀함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한국의 국민들은 비장한 결심을 내리고 전민이 동원하여 자기몸의 금은 장식품들을 서슴없이 나라에 바치여 외채를 물게 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딸러는 중국에서 지원하여 주어서 위기를 넘길수 있었지만, 한국인들의 그 애국정신만은 일본인들의 애국심보다 얼마나 더 고상하고 문명한지 모른다.   四、미국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   세계적인 정부를 건립하고, 세계적인 경제질서를 건립하는 것이 아마도 미국 금융집단이나 은행집단의 최종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공산주의 리론처럼 세계인민들이 모두 공동히 잘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그 어느나라의 재부도 마음대로 략탈하여 자기 주머니에 넣을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금융은 오직 한가지 목적밖에 없다; 바로 재물을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천적이 있었다. 바로 칼 맑스가 창시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다. 19세기 말엽, 독일의 철학가 칼 맑스는 자기의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고, 자본주의가 필연코 멸망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리론을 창시하였다.   그후 레닌에 의하여 칼 맑스의 리론이 실천에 옮겨 지면서, 세계에 처음으로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나라가 건립되였다. 그후 동유럽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세아에 사회주의 진영이 서게 되면서 근 한세기 동안 미국의 금융가들은 악몽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미국의 금융가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 리론의 가장 요해적인 부분이 바로 나라가 경제를 공제하고, 나라가 금융을 공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들의 세계금융제국의 꿈은 산산히 박산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에 사회주의 제도가 서게 되면서부터, 미국의 금융가들은 사회주의와 생사 판가리 싸움을 걸어 왔다. 오랜 겨름끝에 미국의 금융가들은 사회주의를 힘으로는 소멸할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평화연변의 전략을 취하였다. 끝내는 소련을 해체시키고, 동유럽의 사회주의 진영을 일거에 소멸해 버리는 휘황한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의 금융가들은 이로하여 얼마나 기뻐 했을가?   지금 미국과 세계 자본주의 금융가들의 목표는 일제히 중국에 집중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국은 참으로 침을 흘릴 정도로 욕심이 나는 비계덩이다. 그들은 중국에서도 소련에서처럼 공산당을 밀어내고 나라의 해체에 성공한다면 참으로 멋질텐데! 하고 꿈꾸고 있다.   미국의 금융가들은 중국에서 공산당을 밀어내고, 자본주의를 실행시키기 위하여 장시기 동안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공세를 들이 대여 왔다. 그리하여 그들이 중국에서도 이미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야 할것이다. 현재의 중국에서는 당년에 모택동 주석이 가장 두려워 했던 자본주의 복벽이 이미 기본상 현실로 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중국식 사회주의이고, 오직 이길만이 중국을 살리고, 공산당을 살리고, 자본주의 금융가들을 이길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모택동 주석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이름이야 사회주의던 자본주의던 무슨 상관이랴? 오직 이 나라에서 공산당이 계속 청렴하게 집정하고, 정부에서 시종 경제를 주도하고, 은행을 튼튼히 통제한다면, 의심할바 없이 장차 세계는 중국의 것이다.     현용수 작성 2015-09-20    
13    《천불지산》은 아름다운 전설 댓글:  조회:5570  추천:4  2015-08-17
《천불지산》은 아름다운 전설     현용수 작성 어제 초청을 받고 《천불지산술》 출시회에 참석하였다. 이술과 《어곡술》이 함께 출시되였는데, 《어곡술》은 결혼이나 회갑 등 희사잔치 전문용으로 만들었고, 《천불지산술》은 주로 장례나 제사 전문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형문화재《조선족 상례풍속》대표전수인으로서 감사의 마음을 표달하기 위하여, 말로나마 가장 아름다운 말들을 골라 진심으로 축하하여 드렸다. 그러면서 《천불지산》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몹시 긍금증이 생겼다. 돌아와서 인테넷을 뚜지며 찾던중, 길림신문 2015년7월2일자, 《지명은 》라는 문장을 보게 되였다. 이 문장에서는 당지에 이 산을 두고 《천불붙이》라는 토백이 지명이 있었다는 선색을 제공하였다. 보귀한 선색이 아닐수 없다. 그러면서 문장은 《일부 학자와 문인들은 리성계, 김종서, 무학대사, 지장보살 등 성인들의 설화까지 억지로 꾸며가며, 지명을 천불지산으로 왜곡하고있다》고 질타하였다. 나는 이 문장을 보고 《천불지산》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짐작하게 되였으며, 나의 경우에 이 지명에 대하여 력사적 료해보다는 문화적 료해가 더욱 의의가 깊겠다고 느껴졌다. 그러면서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몇가지 상식적인 문제를 반드시 명확히 구별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첫째: 력사와 전설의 구별 력사란 지난시기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력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엄격히 력사유물론을 준수한다. 즉 사서기록이나 력사자료 및 고고학적 발견에 의한 확실한 증거를 기초로 한다. 여기에서는 그무슨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든가, 《그리 하였을것이다》 등등의 추측이나 가설을 용납할 여지가 없다. 아무리 충분하고 당연한 도리로 해석할수 있는 사건이라 하여도 직접적인 실제증거가 확실하지 않다면 결코 력사로 취급할수 없다. 문장에서는 《천불붙이》에 대하여 전편을 통하여 많은 해석을 하고 있지만, 그 말이 어떻게 《천불지산》으로 되였는지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일찍 일제식민지 시대에 고유지명인 천불붙이 지명을 한자로 행정서류에 적는 과정에 천불지산 (天佛指山)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지여 옛 간도지도에 天佛指山으로 표기된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하였는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만 력사적 증거로 보기엔 아직 거리가 멀다. 전설이란 지난시기에 있었다고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을 말한다. 전설도 때로는 증거를 필요로 하지만 력사처럼 직접적인 증거가 크게 필요없으며, 사람들의 주관의사에 따라 과장된 성분이 많다. 그러면서도 전설은 력사의 보충역활을 한다. 즉 어떤 력사적 사물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를 찾을수 없을 경우, 왕왕 전설로 해석된다. 이를테면 자고로 중국인을 《룡의 전수인(龍的傳人)》, 혹은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고 하였는데, 후날 그 확실한 력사적 증거를 찾을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신화가 만들어져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오늘까지 《천불지산》지명의 유래가 력사적으로 확실하게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학자와 문인들이 리성계, 김종서, 무학대사, 지장보살 등 성인들의 아름다운 설화까지 꾸며가며, 이 산을 신비화하였는데,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크게 고마운 일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다만 그것이 력사가 아니라 아름다운 전설이라는 점만 명기하면서 말이다.   둘째: 과학과 전통문화의 구별 오늘에 와서 과학적 도리는 유일 정확한 도리로 오식되여 진리와 거의 동의어가 되여 있다만, 기실 과학이란 일종의 방법론일 뿐이며, 시기 제한성과 환경 제한성이 강하며, 결코 만능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도리라고 하여 반드시 真理인것은 아니다. 진리란 원래 종교에서 나온 추상적인 말인데, 절대적으로 정확한 도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기실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맑스주의가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미국에는 적합하지 않고, 미국에서는 민주주의가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에는 적합하지 않다. 백성들은 돈이 진리라고 주장하고, 관원들은 권리가 진리라고 주장하며, 불교에서는 욕심 버리는것이 진리라고 주장하고, 도교에서는 자연에 맡기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유교에서는 사람마다 책임 다 하는것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절대적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 근대 유럽의 산업혁명을 계기로, 뉴톤, 와트, 에디손 등 대 발명가들에 의하여 과학적 연구방법이 탄생하였다. 그러니 과학의 력사는 이제 근근히 몇백년밖에 되지 않는다. 과학적 연구방법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여러가지 사물에 대한 반복적인 실험과 증명을 통하여, 보편성 규률과 특수성 규률을 찾아내여, 定律, 定理 혹은 论文의 형식으로 체계화, 규범화, 리론화 시키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것이 가장 휼륭한 것이고,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는 것은 이미 몇백년의 세계적인 근대사와 현대사가 증명하였으며, 현실에서도 계속 증명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의 세계적 기술연구 령역에서 과학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결코 과학이 전부가 아니며, 과학을 유일표준으로 하는 단일세계가 아니다. 세계에는 과학으로 해석할수 없고, 또는 과학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많은 종교와 전통문화들이 존재한다. 과학으로는 종교를 해석할수 없다. 과학으로 전통문화를 해석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시대적 착오로 된 근본적 원인이 바로 소위의 과학적 의식형태로 모든 전통문화를 혁명하고 개조하려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력사연구는 사회과학의 범주에 속하며, 전설은 전통문화의 범주에 속한다. 어떤 한 가설이 그것이 초기에는 아무리 왜곡되고, 황당하고, 미신적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믿은 시간이 길고, 그것을 믿는 사람이 많다면 그것이 곧 전통문화가 되는 것이다. 전통문화는 전통문화로서의 존재의 리유가 있고, 자기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 전통문화연구가 반드시 력사연구에 기준해야 하는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력사연구와 전통문화연구를 서로 혼돈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마치도 《삼국지》와 《삼국연의》를 서로 혼돈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2015년8월17일
12    “德不配位,必有灾殃”에 관하여 댓글:  조회:2626  추천:2  2015-05-04
“德不配位,必有灾殃”에 관하여   요즘 중국 인터넷에서는 “德不配位,必有灾殃”란 말이 류행되고 있는데, 당면의 반부패중에서 잡혀나온 많은 관원들에 대한 적절한 평가인것 같다. 뿐만 아니라 현대 젊은이들의 절제없이 팽창되는 재부욕에 대한 적시적인 경고라고 할수도 있겠다.   어찌하여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쉽게 젊어서 죽는가? 어찌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름을 날리고는 까닭없이 죽는가? 어찌하여 많은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벌어놓고는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가? 어찌하여 많은 관원들은 금방 승급을 하고는 이상하게 중병에 걸려 죽는가? 어찌하여 많은 사람들이 금방 멋진양옥을 구매해 놓고는 사고를 당하여 죽는가? …… 이런것들은 도대체 무었때문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德不配位”, 즉 우리말로 해석하면 그의 福報가 그의 德性과 맞지않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재부, 정신적 재부, 사회적 재부를 통털어서 옛사람들은 “物”이라는 특수한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리하여 “厚德载物”란 말이 나오게 되였는데, 현재중국 청화대학의 校訓으로 추대받고 있다. 우리말로 “덕성이 두터워야 많은 지식과 재부를 가질수 있다”는 뜻이 된다.    “德不配位”란 말은 “厚德载物”와 상반되는 말인데, 여기에서 “位”란 사람들이 받는 대우와 보수를 말하는 것으로서 전업술어로는 福報라고 하며, 일부 사람들의 졸렬한 덕성이 그들이 받고있는 과분한 대우와 보수(福報)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어떤 한 사람이 종래로 큰 덕을 쌓은 적이 없고, 재부를 소유할 자격이나 용납할수 있는 심리그릇도 겨우 빈곤층 정도밖에 안 되였는데, 어찌하여대박이 터져 이 사람한테 천만원, 억만원의 재부가 생겼다.   또 이를테면 어떤 한 사람의 됨됨이가 기껏해야 제노릇이나 잘하는 소인물인데, 어찌하여 이 사람한테 벼슬운이 터져 승승장구로 엄청난 고위급 벼슬까지오르게 되였다.   이런것을 가리켜 “德不配位”라고 하며, 덕성을 쌓아 빨리 미봉하지 않는다면 필연코 재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업가는 숭고한 목표가 있고, 능력도 있으며, 그에 맞추어 상당한 노력도 투입하고 있지만 그가 기대하는 리상적인 결과는 심술을 부리는 듯 나타나지 않는다. 기실 이것 역시 “德不配位”의 현상이며, 즉 사업이 성공한 후에 차려질 福報에대비하여 아직 그가 바친 노력과 덕성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금전, 권리, 명성 등은 모두 자기의 福報이면서도, 또 자기몸을 내리 누르는 物이다. 자기를 충분히 크고 단단한 그릇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그 物을 제대로 담을수도 없고, 담당해 낼수도 없으며, 종당에는 그릇이 깨여지고 말것이다.   자기를 충분히 크고 단단한 그릇으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덕행을 많이 베풀어 덕성을 쌓는 것으로 사회의 인정을 얻는 것이다. 이 방법은 자기의 능력과 지혜를 힘써 제고하는 것보다 엄청 더 현명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또한 마윈의 성공을 꿈꾸고 있는 모든 젊은 창업자들에게도 반드시필요한 방법일 것이다.   중국에서 현재 가장 많이 남아도는 것이 능력과 지혜이고, 가장 부족한 것이 덕성과 사상이다. 능력과 지혜로는 재부를 얻을수는 있겠지만 지켜내기 어렵다. 고상한 덕성과 숭고한 사상이 있어야만이 보다 많은 재부를 얻을수 있을뿐만 아니라 또 효과적으로 지켜내면서 유익하게 사용할수 있다.   어떤 상인이나 기업인들은 사회도덕 같은 것은 념두에도 없으며, 돈을 벌기 위하여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법률마저 무시하며 경영하다가 결국은 필연코 모두 망해 버린다.   지금의 반부패에서 많은 관원들은 덕성과 사상경계가 없었기 때문에 직권을 리용하여, 회뢰를 받아서는 자기 팔자에도 없는 엄청난 재부를 모아놓고 흐믓해 하다가, 결국 쌍규를 당하고 사람과 재물을 모두 망치는 경우도 우리는 많이 보고있다.   이런것이 바로 "당신의 덕성이 당신의 福報에 부합되지 않아 결국 재앙을 당했다(德不配位,必有灾殃)”"는 경우이다. 바꾸어 말하면 “당신이 가진 재부나 권리가 당신이 쌓은 덕성에 부합되지 않게 엄청 많으면 기필코 재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많은 재부와 높은 권리를 가지고 안전하게 오래동안 향유하겠으면 거기에 맞게 먼저 고상한 덕성을 갖추라는 뜻이이리라.     연변례의 현용수 작성 2015-05-03    
11    죽음의 도리와 품위있는 죽음 댓글:  조회:4830  추천:3  2014-09-02
죽음의 도리와 품위있는 죽음 (이 글에서의 사람 죽음에 대한 토론은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비정상 죽음을 제외한, 순 평화시기 자연사에 준합니다.—편자주)   1/ 죽음에 관한 화제는 상당히 신중한 화제로서, 일반 사람들은 보통 불길하다고 여기여 몹시 꺼립니다. 그 누가 때와 장소에 틀리게 죽음 화제를 경솔히 꺼냈다가는,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핀잔을 받기가 십상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이 죽음을 이렇게 싫어하는 그 심리적 근원이 우리민족 전통 생사관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기실 그것은 지금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몰리해와, 그로부터 오는 공포감과 거부감, 그리고 문화적 빈곤에서 오는 우매하고 유치한 심리를 반영할 따름입니다. 인생의 도리가 천가지, 만가지 있지만 결국은 모두 죽음에 귀결됩니다.죽음이란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의 하나로서, 인생이란 것도 그 운행법칙을 놓고보면 기실 태여나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생로병사의 과정입니다. 죽음문제를 두려워 하고, 배척만 하면서 참답게 연구하지 않는다면, 정확한 죽음관을 수립할수 없고, 진정한 인생의 도리와 가치를 깨달을수 없으며, 참다운 가족관, 민족관에 대하여서는 더구나 운운조차 할수 없게 됩니다. 지금 죽음의 도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엄중히 추악화, 마귀화 되여 있습니다. 반드시 죽음에 대한 비뚤어진 태도를 바로잡고, 이 도리에 대담히 접근하고,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으로 심도있게 연구하여, 문명하고 인간성 있는 죽음관을 창도함으로써 그로부터 많은 적극적인 인소들을 발굴해 내야 할것입니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한번 죽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후대를 낳아 키워 자기를 계승시켜야 할 리유가 생겼고, 능력을 키우고, 재부를 창조하여 우월한 조건을 마련해야 할 리유가 생겼으며, 건강과 미를 확보하여 충분히 즐겨야 할 리유가 생겼습니다. 중국에는 《홍백희사》라는 설법이 있는데, 결혼하는것을 《홍희사》라고 하고, 사람이 죽은것을 《백희사》라고 합니다. 여기서 《희사》라는 말은 음식을 차리는 《연회》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기쁜 일》이라는 뜻에서도 완전히 틀리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은 마치도 공공뻐스와 같이 승객들이 부단히 교체됩니다. 먼저 뻐스에 오른분들이 자기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림으로써, 또 다른분들이 오를수 있게 됩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이 세상에 오신분들이 일정하게 생존하신후 기꺼히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여 생존하고 발전할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탄생과 죽음은 모두 사회가 발전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필연적인 조건들입니다. 만일 2천여년전의 공자나 진시황같은 분들이 자기들은 위대하다는 리유로 《장생 불로약》을 먹고는 오늘까지 죽지않고 살아 계실수 있었다면, 지구에는 언녕 대 재난이 폭팔하여, 인류는 지금쯤 거의 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되였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의 죽음은, 한방면으로는 기존 재부의 손실이면서도, 또 다른 한방면으로는 일종의 공간적인 공헌으로도 됩니다. 즉 일종의 《희사》이지요. 죽음이 있었으므로 하여, 인류는 한세대 한세대 계승되고 발전하여, 오늘의 고도로 발전한 문명세계에 까지 이를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원한 견지에서 볼때, 한사람의 죽음은 장구한 사회발전 행정에서 무수한 사회성원들의 부단한 교체과정의 한 순간입니다. 이런 교체과정이 부단히 지속되면서, 사회가 점차 보다 높은 경지에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견지에 서서, 사람의 죽음을 《생명의 종말》, 《사상의 정지》로만 인식하는 것은 소극적인 사유방식입니다. 이런 사유방식 때문에 몇천년을 내려오면서 사람의 죽음은 공포의 대상, 절망의 대상으로 밖에 될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관적인 견지에 서서, 사람의 죽음을 《인생의 완성》, 《사상의 승화》로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적극적인 사유방식입니다. 종교를 하지않는 사람일 지라도, 진정 이런 사유방식으로 죽음을 대할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기 인생의 원만한 완성을 위하여 열심히 생명을 빛내일 것이며, 자기 사상의 승화를 위하여 깨끗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것입니다.   2/ 사람들의 인생을 년령단으로 크게 세개 단계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태여나서 부터 시작하여, 30세 까지로 하였습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주로 발육 성장하고, 지식과 재능을 배우고, 학위를 따고, 직업을 얻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등등의 일들을 하는데, 주요하게 금후의 본격적인 인생을 위하여 준비하는 단계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31세부터 시작하여, 60세 까지로 하였습니다; 바로 인생의 주체를 이루는 본격적인 운영단계로서,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을 각자 자기 방식대로 운영하여, 자기가 지향하는 인생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고심하게 분투합니다. 마지막 세번째 단계는 61세부터 시작하여, 사망하기 까지로 하였니다; 이 단계는 인생의 고급 단계로서, 한편으로는 인생 마무리 단계라고도 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보통 젊어서부터 추진하여 오던 뜻과 사업을 정리하고, 그 기초상에서 새로운 고급적인 노년인생을 시작하게 되는데, 각자 장악하기에 따라서 그 의의가 많이 달라지며, 저 앞에 막연하게 보이는 인생 종착역과의 거리를 점점 좁히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회가 점차 노령화 되면서 지금 국제적으로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이란 말이 상당한 인기화제로 나서고 있습니다.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사전적 의미로는 정신적, 육체적인 건강과 행복, 복지와 안녕을 의미하고, 사회적 의미로는 물질적 부유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부유도 추구하면서, 진정으로 삶의 질을 강조하는 생활 방식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웰빙(well-being)이란 우리말로는 《훌륭한 삶》, 《참다운 삶》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웰다잉(well-dying)이란 말은 원래 서방 종교계에서 주장하는 《안락사》나 《호스피스》리념에서 출발하여 제출되였는데, 그 기본내용을 적극적인 견지에서 우리의 리념으로 리해하고, 해석한다면, 인생을 원만하게 마무리하고, 생명의 존엄을 잃지않는 《훌륭한 죽음》, 《품위있는 죽음》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천백년래 사람들은 모두 잘 살기 위하여 분투하여 왔으며, 행복하게 살기만 꿈꾸어 왔습니다. 이렇게 천년만년을 살것처럼 열심히 노력하며 살다가, 결국은 백년도 못 살고 어쩔수 없이 때가 되여 죽어야만 했는데, 보편적으로 상당히 피동적인 처지에 빠지여 슬프게 죽어야만 했습니다. 시대가 오늘에 이르러,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시대배경에서, 이제부터 사람들은 인생의 더 높은 차원의 질과 완미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죽음의 품위까지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진대, 삶의 도리뿐만이 아니라, 죽음의 도리도 명확히 하여야만 완정하게 인생의 도리를 터득할수 있습니다. 품위있는 죽음은 생명에 대한 최후의 존경이며,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성 있는 완성이며, 생명혜택에 대한 완미한 보답으로 됩니다. 한 사람이 젊어서는 아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었는데, 늙으막에 와서 어렵게 살다가 처량하게 죽는다면, 그런 인생은 완미한 인생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한 사람이 젊어서는 많은 고생을 하면서 파란많은 인생을 살았었는데, 늙으막에 와서 행복하게 살다가 품위있게 죽는다면, 그런 인생이야 말로 참으로 완미한 인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3/ 그럼 평화년대에 어떻게 죽는것이 품위있는 죽음이고, 어떻게 해야만 품위있게 죽을수 있겠습니까? 기실 이 문제에서는 절대적인 통일표준이란 있을수 없으므로, 문제 제기방식을 바꾸어, 어떻게 노년인생을 충실하게 사시다가,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하겠는가? 하는 식으로 해석하여 봅니다.   첫째; 삶의 열정을 계속 확보해야 하겠습니다. 노인들이 즐기는 노래에서는 《육십이 청춘》이요,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아.》…등등의 내용들이 많은데, 어찌보면 이런 내용들은 젊은인생의 미련을 못 버리고, 늙음을 긍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혐의가 있습니다. 늙은이가 어째서, 꼭 젊음을 빌어서 고무 받아야만 합니까? 기실 노년인생이 체질상에서 젊은이들만 조금 못하겠지만, 다른 각 방면에서는 보편적으로 젊은인생을 초월하는 고 효률적인 인생입니다. 퇴직을 하고는 무료하게 시간을 허송하면서, 막연히 죽음을 기다리는것이 노년인생이 아니라, 파란 많았고 유치했던 젊은시절의 중급인생에서, 보다 성숙된 고급인생에로 승급하는 것이 노년인생입니다. 노년기에 열정을 잃지 않고, 노년기의 특점에 맞게 계속 열심히 살아 간다면, 노년기에도 여전히 위대한 업적을 창조할수 있습니다. 력사상 강태공은 80세에 승상이 되여, 무왕을 도와 상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강태공이 우리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면, 최근에도 그런 근거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최근 세계 력사상의 불후 업적들을 통계한 자료에 근거하면; 35%는 60-70대 노인들이 창조하였고, 23%는 70-80대 노인들이 창조하였으며, 6%는 80대이상 노인들이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세계 력사상의 불후 업적의 64%가 60대 이상 노인들에 의하여 창조된 셈이죠. 사람의 수명이 점점 길어지면서, 앞으로는 세계 불후 업적의 70%이상을 60대 이상 노인들이 창조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둘째; 노년기에도 인생 목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출생하면서 세월과 《수명계약》이 체결되는데, 첫째; 유효기한내에 반드시 죽어야 하고, 둘째; 죽을 때 모든것을 깡그리 바쳐야 하고, 일푼도 갖고 가지 못하며, 셋째;… … 《수명계약》의 유효기한은 일반적으로 백년을 초과하지 못합니다. 이 기초상에서 자기 運의 발휘 정도에 따라 유효기한이 많이 앞당겨 질수도 있고, 또 조금 연장될수도 있습니다. 목표없이 살다보면 백년이라는 인생도 결국에는 최후 하루밤의 긴꿈에 불과 하겠지만,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살아 간다면 몇십년 사이에라도 천년업적 쌓을수 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의는 오래 살았다 하기보다, 자기가 죽은 후에라도 자기가 생전에 이룩해놓은 그 무엇들이(자식들을 포함하여) 계속 사회에 유익하게 리용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기실 대자연으로 되돌아 간다는것을 의미할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어쩌다가 한번밖에 다시 없는 인생인데, 자기 노년의 인생목표와 계획을 최소로 한 백살까지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짜로 백살까지 살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랑패 될것이 무엇입니까? 《수명계약》이 만기 되여 죽어야 할때 가서 선뜻이 죽으면 되니깐요. 한 장수노인은 환갑때에는 60성상 자기 인생 성과를 놓고, 하늘 높은줄 모르고 자랑을 늘여 놓았었는데, 90세 장수피로연에서는 허송한 지난 30년이 너무 아까워 비감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로년기에 들어서면, 젊은인생때의 목표와 계획이 기본상 완료된 형편에서, 노년인생으로 과도하는 새 목표와 새 계획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노년인생은 마치도 세월의 바다에 버려져서 정처없이 표류하는 단풍잎처럼, 하루하루 무료하게 허실됩니다. 기실 그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으로 밖에 되지 않으니, 슬픈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세째; 유언장을 미리 써 놓읍시다. 전통관념에서 유언장을 쓴다하면 이제 곧 죽기나 하는것 같은 느낌이 들겠지만, 기실 현대심리학의 연구에 근거하면, 노인들이 유언장을 미리 써 놓음으로써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더욱 유쾌하게 살수 있고, 더욱 오래 살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유언장을 쓸수 있다는 것은 당신이 이미 어느정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품위있는 죽음》을 죽을수 있는 선제 조건중의 하나입니다. 유언장을 쓴다는 것은 한 사람이 사회나 가정에 자기의 지혜를 공헌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이렇게 보귀한 기회를 대부분 사람들은 아쉬위 할줄 모르고 무책임 하게 버립니다. 유언장은 유산 상속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량전통을 전수하고, 자기의 인생경험을 전수함에 있어서도 아주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노인들마다 모두 자기 나름으로 터득한 인생의 철리가 있습니다. 이런것들은 인류의 공동한 정신재부에 속합니다. 이렇게 보귀한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죠. 그런것들을 유언장 형식으로 써서 사회에 남긴다면, 보귀한 정신유산으로 될수 있습니다. 아직 사유가 건전할때 자기로, 혹은 젊은이에게 위탁하여 책임성 있는 유언장을 한장 써서는, 살아 가면서 고치기도 하면서 완미화 시키여, 일단 죽을 때에 자기 인생의 종지부로 멋지게 턱 찍어 놓는다면, 그런 죽음이야말로 한결 더 품위가 돋보이는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만년에 들어서서 자기가 수시로 죽을수 있다는 점을 가볍게 받아 들이고, 죽음에 대비하여 적극적으로 필요한 준비를 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평소에 죽음에 대한 소극적인 심리를 극복하고, 하루하루를 마치도 세월이 주는 액외 혜택인양 소중하게 받아 들이며, 질량있는 만년을 충실하게 살아갈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결혼해서부터 수의를 만들기 시작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자손들이 어르신들의 장수축하 선물로 수의나 관재널을 드리는 풍속도 있었는데, 고급적인 효행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자기는 영원히 죽지않을 것처럼, 죽음문제라면 무조건 거부하고 회피한다 하여도, 그 어느날엔가 반갑지 않은 죽음의 영예는 불가피적으로 당신에게 차려지게 됩니다. 죽음에 대하여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아무런 대비조치도 없이 하루하루 허송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몸이 이상해지고, 급기야 죽음을 당한다면, 그런 죽음은 초라할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마다의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보노라면, 저마다 풍부하고 전기식적인 경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파란만장 헤치며 어렵게 살아온 자기인생을 한포기 마른풀처럼 초라하게 끝내 버린다는 것은, 자기에게 미안한 일일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미안한 일이며, 자손들에게도 미안한 일입니다. 죽음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삶을 점검해 본다는 것으로 되고, 삶을 충실히 이끌어 가는 원동력으로 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대답은 결국 어떻게 마지막 까지 잘 살아야 하는가로 귀착됩니다.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사유가 헝클어지기 전에 유언장을 미리 써 놓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며, 신체단련과 심리단련을 가강하여 삶의 속도를 늦추고, 미루었던 일은 즉시 시작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이란 못다한 계획을 실천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죠. 아침마다 깨여나서 눈을 뜨면서, 《오늘도 좋은 하루!—》, 신심에 차 웨치면서, 매일매일 새 아침 밝혀주는 하늘에 감사 드리며,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 갑시다. 저 멀리 막연하게 보이는 인생의 종착역, 거리는 하루하루 좁혀 지고 있지만도, 우린 일부러 세월과 장난을 치며, 한 삼백년 바라고 살다가 갑시다.   성원 씀 2014-09-02
10    《高丽棒子》와 《떼놈》의 유래 댓글:  조회:4809  추천:0  2013-05-13
《高丽棒子》와 《떼놈》의 유래 중국의 汉族과 반도의 고려안민족(우리민족을 통칭하여 조선민족이라 하자니 한국인이 분노하고, 韩민족이라 하자니 조선인이 분노하고 하니, 차라리 국제관습에 따라 한국, 조선 그리고 세계각지에 분포되여 있는 우리계례들을 통칭하여 ‘Koreans고려안’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하겠다--필자)은 지리적으로 서로 이웃하고 살면서, 력사상에 평화합작의 시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죽기 내기로 싸운적도 있었으며, 민간래왕에서는 서로 존경도 하고, 때로는 서로 욕질도 하면서 오늘까지 미운정, 고운정 키워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결코 우리에게 완전무결한 세계가 아닙니다. 많은 결점과 불편이 존재하죠. 그리하여 때로는 우리 본의 아니게 분노와 불평이 폭발합니다. 욕설은 분노와 불평을 해소시켜 줄수 있는 일종의 렬성 “항생소”입니다. 람용해선 안되죠. 우리는 욕설이라는 이 렬성 “항생소”를 공제성 있게 사용하여, 분노와 불평을 조기 처리함으로써 진일보의 폭력적 행위를 피면할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두말없이 폭력부터 들이 댄다거나, 욕설을 전주곡으로 폭력에 돌입한다면 그것은 작은 모병에 큰 수술을 들이대듯이 천부당 만부당 합니다. 그 누구를 욕설한다는 것은 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대방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문명하지 못한 인권침해 행위로서, 엄중하면 법률적 책임까지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쩔수 없이 욕설이 터져나올 경우, 욕설의 대상을 구체적인 그 누구로 하지말고, 될수록 모 사건, 혹은 모 사물을 대상하여 빙자하여 욕설하는것이 비교적 안전합니다. 욕설도 일종의 문화입니다. 좀 거치른 문화지요. 욕설에는 서술식, 은유식, 성어식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한 민족의 습관, 특성, 기질을 나타냅니다. 특히 성어식 욕설일 경우, 그런 욕설의 유래에는 그 민족의 문화적, 력사적 사연이 내포되여 있습니다. 이런 유래를 밝히므로써 구체적으로 어떤 적극적 의의가 있겠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장원한 견지에서 민족의 렬근성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강, 자존, 자애에 유익한 계시가 될수 있을것 같습니다.   1, “高丽棒子”의 유래 전번 한시기에 중국의 그 무슨“공정”으로 인하여 중한 민간에서 인테넷을 통하여 치렬한 쟁론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중국의 전통문화가 원래는 모두 자기들의 것이였다고 떼질을 쓰자, 중국의 누리꾼들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고 분통이 터져서 한국인들을 “高丽棒子”라고 욕합니다. 중국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조선인이나 한국인을 욕할때 “高丽棒子”라고 욕함으로써 가장 통쾌하게 욕했다고 여깁니다. 그럼 이 “高丽棒子”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며, 언제부터 어찌하여 중국인들이 조선인이나 한국인을 폄하하는 욕설이 되였는가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일설에서는 동북에서 “棒子“란 옥수수를 뜻하니, ”高丽棒子”란 바로 “고려 옥수수”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리유는 아주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력사상에 고려에서는 옥수수를 심지 않았고, 주로 벼와 조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또 일설에서는 “만주국” 왜정때 많은 조선인들에 일본군대에 편입되여 들어 왔는데, 그들은 왜놈들의 권세를 등에 업고 조선 녀인들의 빨래방치 비슷한 방망이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걸핏하면 중국인들은 두들겨 팼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특별히 미워하여 ”高丽棒子”라고 욕하게 되였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도 성립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高丽棒子” 의미를 가진말이 이미 “만주국”전의 청나라의 문헌에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청나라의 王一元이라는 사람이 康熙五十年(公元1711年)전후에 쓴것으로 짐작되는 《辽左见闻录》이라는 문헌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한단락의 기록을 볼수 있습니다: “朝鲜贡使从者之外,其奔走服役者,谓之’棒子’。其国妇女有淫行,即没入为官妓,所生之子曰’ 棒子’,不齿于齐民。鬓发蓬松,不得裹网巾;徒行万里,不得乘骑;藉草卧地,不得寝处火炕。盖国中之贱而劳者。” 우리말로 번역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조선에서 조공 바치려 온 사종자 외에, 뛰여 다니며 복역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방자’라고 부르더라. 그 나라에서는 여자가 음란한 행위를 하여, 즉 관기로 들어가지 않고 낳은 자식을 ‘방자’라고 부르는데 제민들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머리가 헝클어 져도 망건을 써선 안되고, 만리를 걸어 가도 수레나 말을 타선 안되며, 맨봉당에 짚을 깔고 자면서도 온돌에서 자선 안된다. 나라에서 비천하고 일만 하는 자들이다.” 여기에서 “방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고려안들은 이 “방자”라는 말이 너무나 익숙합니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의 시중군이 바로 “방자”가 아닙니까? 조선의 옛문헌에서는 “방자”를 한자로 “房子” “帮子”, “膀子”,등으로 표기가 되여 있으며, 한국 《두산백과》에서는 “방자”라는 관직은 고려시대에서는 “관청이나 관인에게 분급되여 잡직에 종사하는 말단의 이속”이였고, 조선시대에서는 “지방관아에서 심부름하던 남자 종, 또는 조선 초기 각사(各司)에 있던 비녀(婢女)중에서 뽑아 궁중의 작은 일을 보살피게 하던 시녀”라고 해석이 되여 있습니다. 이상에서 알수 있는바 “방자”는 일종 관직의 이름이였는데 관청, 혹은 관인의 심부름꾼 직급이였습니다. 王一元의 《辽左见闻录》에서 우리는 조공 바치려 중국에 온 조선 사절단 중에는 “棒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사절단 양반들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따라 온 “방자”들이란 것을 알수있습니다. 비록 “방자”에 대하여 조선 옛문헌과 한자 표기법이 서로 다르지만, 王一元의 문헌에 있는 “棒子”와 같은 뜻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辽左见闻录》은 오늘까지 중국에서 발견한 “朝鲜棒子”기록이 있는 가장 이른 문헌이며, 여기에서 나오는 “朝鲜棒子”가 곧바로 “高丽棒子”의 원형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朝鲜과 高丽는 종래로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동의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高丽棒子”가 조선인들을 욕하는 말로 되였는가? 이 문제의 답안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유관 력사문헌들을 찾아 그 당시 조선 사절단을 따라 중국에 들어온 “방자”들의 정황에 대하여 료해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조선 사절단의 청조 방문견문들로 수집된 《燕行录》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가장 대표적인 문헌으로는 《老稼斋燕行日记》이며 작자는 金昌业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일기에서 자기가 康熙五十一年(公元1712年)에 자제군관 신분으로 조선 조공 사절단에 편입되여 중국에 왔다간 견문들을 상세하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燕行录》에서 다음과 같은 정황들을 료해할수 있습니다: 1, 당시 조선에서는 중국에 한번 오는것을 큰 횡재의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량반들이나 ”방자”들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조공 사절단에 편입되여 들었갔다. 그리하여 金昌业의 그번에는 량반이 43명에, “방자”무리는 무려 498명이나 되였다. 이렇게 방대한 “방자”무리들을 몇십명의 량반들이 미처 관리해 낼수가 없을 정도였다. 2, 당시 청조 조정에서는 주변 번속국에서 사절단을 파견하여 조공 바치려 올때, 연도의 지방관청에서는 사절단에게 주숙과 식사 등 방면에서 여러모로 편리를 제공하라고 명을 내렸다. “조선방자”들은 이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량반들의 눈을 피해 민가와 여인숙, 술집, 점포 등에 들어가 도적질에 혈안이 되였다. 심지어 강탈하고 살인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3, 백성들이 피해를 보고 관청에 가서 고소하면 관청에서는 조정의 명이 있는지라 “조선방자”들을 처분하지 못하고 조선 사절단에 넘겨 주었다. 그러면 조선 사절단에서는 륭중한 의식을 열고 그 “방자”들을 처벌하는데, 많은 중국 백성들 앞에서 그 “방자”들을 형틀에 묶어놓고 엉덩이를 노출시킨후 특별한 조선식 방망이(棒子)로 엉덩이를 묵사발이 되게 때려준다. 이런일로 하여 중국의 백성들은 조선식 방망이(棒子)에 대하여 특별한 인상을 가지게 되였으며, 폄하의 뜻으로 시중꾼 “방자”들의 중국호칭을 방망이 “棒子”로 한것 같다. 4, 그런데 이런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면서, 조선 사절단이 지나가는 연도의 중국 백성들이 원래는 “조선방자”들만 미워하던 데로부터, 점차 조선 사절단 본신을 싫어하게 되였으며, 그 루명을 결국 전반 고리안민족이 쓰게 되였다. 이상의 자료에서 알수 있는바, 옛날 “조선방자”들의 그 문명하지 못했던 행실에 의하여 “朝鲜棒子”, 혹은 “高丽棒子”가 점차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가장 폄하하여 욕하는 말로 되여 버렸던 것입니다.     2, “떼놈”의 유래 중한 민간관계가 그리 우호롭지 못했던 전한 시기에 인테넷에서 중국 누리꾼들이 한국인을 “高丽棒子”라고 욕하면, 한국 누리꾼들은 중국인을 “떼놈새끼”, 혹은 “똥떼놈”이라고 욕합니다. 한국 인테넷에 들어가 두루 살펴 보니, 한국인들이 중국인을 “떼놈”이라고 욕하는 데는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ㄱ; 얼굴을 씻지 않고 때투성이로 다니는 놈 ㄴ; 떼를 지어 쓸어 다니는 놈 ㄷ; 똥같이 더러운 놈 ㄹ; 지저분한 놈 ㅁ; 미개한 놈 ㅂ; 망할 놈 … … … … … … 하여튼 이러루한 의미였습니다. “떼놈”의 유래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았더니 “위키백과”에 다음과 같은 해설이 나옵니다; 되놈은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한국어 명칭 중의 하나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떼놈이라는 변형된 표현도 쓰이나, 되놈이 공식 표준어이다. '되놈'에서 '되'라는 말은 본래 두만강 인근의 만주에 살던 민족(여진족)을 이르는 말이었다. 한국어원학회에서는 사람을 뜻하는 '돌'과 '이'가 결합되어 '돌이'라고 하던 것이 도리 → 도이 → 되로 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 이 말이 사람을 낮잡아 일컫는 '놈'과 결합되어 여진족을 비하하는 말로 쓰였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하여 명나라가 멸망하고 조선왕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굴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청나라를 비하하는 말로 널리 쓰이면서 중국인 전체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정착되었다. 사람이 많아 집단 행동을 잘 한다고 하여 "떼놈"에서 유래했다거나, 큰나라(大國) 사람이라고 해서 "대(大)놈"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는 민간 어원설에 해당한다. 이상의 해석은 “떼놈”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중에서 가장 정연하게 정리된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상의 해석에서도 이 해석을 증명할만한 확실한 근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근근히 “추정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직접근거가 없으면 간접 근거라도 찾아야 어느정도 설복력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계속 인테넷에서 바다 바늘찾기를 하다가 서울 북쪽에 “되너미고개”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검색하여 보았습니다. 한국《문화일보》에 게재일자가 “2010년 11월 22일”로 된 ”미아리고개, 왜 ‘되너미고개’라 불렸나?”하는 제목의 문화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고지도에 되너미고개(적유현·狄踰峴)라고 표기돼 있다. 여진족 또는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인 되놈이 이곳을 넘어 서울에 침입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돈암동(敦岩洞)은 순우리말 이름인 ‘되너미’를 한자 소리를 따서 표기한 것이다. 다행으로 “떼놈”의 유래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증명할만한 근거라도 찾은셈이 되였는데, 그 근거가 바로 “되너미고개”입니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분석한 기초에서 “떼놈”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1, “떼놈”이란 말은 전통적으로 여진족(만족의 전신) 또는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던 “되놈”이란 말에서 온 것이다. 2, 조선 고지도의 서울 “되너미고개”는 워낙 “되놈고개”를 문명한 어구로 다듬은 것이고, 그것이 한자로 “狄踰峴”으로 표기된것은 한자의 뜻글 공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한스러웠던 병자호란 력사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狄踰峴”을 뜻풀이 하면 “오랑캐가 넘어온 고개”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확실하게 알수 있는바, “되놈”에서의 “되”는 곧바로 한자”狄(di)”의 발음을 본딴 것이며, 북방 오랑캐란 뜻으로 력사상에서 주로 여진족을 가리켰었다. 3, “되놈”이란 말은 원래 여진족을 비하하는 말로 씌였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하여 조선의 종주국이였던 명나라가 망하고, 또 조선왕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에 굴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청나라 군대가 서울로 넘어 왔던 고개를 “되놈고개”라고 이름을 부치면서 청나라를 비하하는 말로 널리 쓰이다가 점차 중국의 전체를 비하하는 말로 확대되여 고착되었다. (끝)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정리 2013-05-12  
9    《장가들다》와 《시집가다》 댓글:  조회:4454  추천:0  2013-03-16
《장가들다》와 《시집가다》   전통적으로 혼인의 형식은 크게 취가혼(聚嫁婚)과 초서혼(招壻婚)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취가혼이란 남자집에서 여자를 맞아들이는 혼인인데, 처음부터 여자가 남자집에 들어가서 사는 경우이고, 초서혼은 솔서혼(率壻婚)이라고도 하는데, 여자집에서 데릴사위를 맞아들여,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서 사는 경우를 말합니다.   《朝鮮王朝實綠》에서 찾아보면, 우리민족 고유의 혼인풍속에는 “男歸女家”婚이라는 풍속이 있었는데, 초서혼에 해당되는 풍속이였습니다. 남자는 丈人, 丈母가 사는 丈家에 들어가서 그집딸과 혼인식을 치르고, 계속 장가에 눌러앉아 한시기 신혼생활을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장가를 든다”, 혹은 “장가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男歸女家” 혼인풍속은 고대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우리민족 고유의 혼인풍속이 였는데, 중국《三國志 魏書 乌丸鲜卑東夷傳》에 기록되여 있는, 고구려 서옥(壻屋)제라는 혼인풍속이 그 기원인것으로 짐작합니다. 서옥(壻屋)이란 서방(壻房)이란 말과도 통하는데 사위집이라는 뜻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남자집과 혼사말을 정하고, 여자의 부모는 자기집 뒤에 서방(壻房)이라는 작은 신혼방을 꾸며 놓습니다. 저녁녘에 사위 될 사람이 와서 신분을 밝히고, 이집딸과 하루밤 잘것을 청구합니다. 혼인 절차에 따라 두번 세번 청구하면 여자집 부모는 드디여 허락하고, 납채로 가져온 돈과 비단을 받아 놓습니다. 이것으로 혼인이 성사된 셈이죠. 그리하여 우리민족 고유어에서 남자들이 결혼하는 것을 "서방 간다"고도 하였으며, 여자들이 자기남편을 "서방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어느정도 성장한 다음에, 장가에서는 자기딸이 와-와- 재롱을 피우는 아이를 업고, 자기 신랑을 따라 시집에 가서 살도록 허락합니다. 지금과는 달리 丈家 주도의 혼인제도였지요.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중국 유가사상이 인입되여 숭상받고,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보급되면서, 유가의 엄격한 남존여비 관념에 의하여 “남귀여가” 혼인풍속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남귀여가” 혼인풍속은 얼마간 고집스레 지속되어 가다가, 조선조 제13대 왕인 명종(재위 1545∼1567) 때에 이르러 절충적인 혼인방법이 나오게 되였습니다. 즉 혼례는 예전과 같이 계속 신부집에서 치르되, 삼일만 신부집에 묵고, 삼일후 부터는 신랑집에 가서 사는, 반친영제(半親迎制), 또는 삼일신행제(三日新行制) 혼인방법이였습니다. 이 혼인방법이 실행되면서 후에 점차 관습으로 굳어졌습니다. 지금에는 이런 혼인풍습도 이미 없어졌지만, 요즘의 신혼부부가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갔다가 돌아와서는, 먼저 신부집에서 하루밤 자고, 다음날 시부모집으로 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습의 흔적이 아닐가고 생각합니다.   “시집가다”에서 “시집”이란 결혼한 남자의 집을 말합니다. 그곳은 바로 시부모가 사는 집이고, 신랑과 함께 사는 집입니다. 여자가 결혼하면 자기가 살던 친정집을 떠나서, 시부모가 사는 시집으로 가서, 신랑과 함께 시부모를 섬기며 산다는 의미에서, 여자가 혼인하는 것을 “시집간다”고 합니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싀집”이라는 어휘가 있는데 "싀집에 가 여러해 돌아오디 아니 더니"하는 구절이 있고, 또 옛 문헌 《五綸》에도 "싀어미 잘 섬기라(善事吾姑)"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때의 “싀”가 후에 와서 “시”로 발음되고, 표기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싀집”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시집”입니다. 이 “싀집”이란 말은 순수한 우리 말인데, 이말을 한자로 표기하게 되면서, 여인은 시집살이 하면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한다는 뜻을 살려, 마음思자를 붙여서 시집을 한자로는 “媤家”, 혹은 “媤宅”이라고 쓰게 되였습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혼인형식의 산생과 변화,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남자가 장가를 들었고, 후기에 여자가 시집을 가게 되였으며, 이런 양상에 의하여 우리 말에서 혼인에 관하여 “장가들다”와 ”시집가다”라는 어휘가 만들어 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던가? 요즘의 젊은이들은 결혼을 한다 하여도, 남자는 장가 들 필요가 없고, 여자는 시집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부모들이 거금을 내여 따로 마련해 준 신혼집에 가서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신혼생활을 합니다. 본질적 의미에서 우리민족 전통적인 시집장가 혼인제도는 이미 기본상 페지되였습니다. 민속학의 견지에서 지금의 결혼과 전통적인 시집장가 혼인제도는 엄격히 구별됩니다. 전통적인 시집장가 혼인제도는 효도에 기초한 혼인이 였지만 지금의 결혼은 완전히 그런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혼례는 우리민족 기본家禮중의 四禮인 관례·혼례·상례·제례의 하나로서, 남자와 여자가 혼인을 하여 부부가 되는 절차를 규정한 예식입니다. 혼례가 혼인의 절차를 규정한 예식이라면 한자로 응당 “婚禮”라고 표기가 되였어야 하는건데, 가례의 최초 원본인 《朱子家禮》를 포함한 옛문헌에서는 모두 어두울 “昏”자를 택하여, “昏禮”라고 표기가 되여 있습니다. 어두워 지는 황혼무렵에 올리는 예식이란 뜻이 되겠죠. 그럼 옛사람들은 무엇때문에 혼인예식을 어두워 지는 황혼무렵에 올리는 예식이라고 했을가요?   혼인이란 통속적으로 말하면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예식인데,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음(陰)과 양(陽)이 만나는 것이므로, 혼인예식을 올리는 시간도 낮과 밤이 교차되는 황혼무렵이 합당하다는 취지였습니다. 예서(禮書)에서 말한것처럼 "양이 가고, 음이 오는 까닭을 취한 것(取陽往陰來之義)"이지요.     하루중에 양과 음이 교차하는 시각은 아침과 자녁으로 두번이 있습니다. 혼례에서 저녁을 택하게 된 이유는, 고대에서는 혼인예식 장소가 바로 신랑과 신부가 직접 첫날밤을 지내는 장소였고, 혼인예식이 끝나면 곧바로 첫날밤을 차리는 합궁례(合宮禮)를 치루고 한자리에 들어야 하였으므로, 신부가 부끄럼을 타서 일을 그르칠가봐, 삼라만상이 모두 잠드는 안늑한 밤 환경을 마련해 준다는 취지였을 것입니다.   알다싶이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일을 한어로 婚姻이라고 하는데, 婚이 장가든다는 뜻이 되고, 姻이 시잡간다는 뜻이 됩니다.   婚이 장가든다는 뜻이 되는 까닭은, 한 여인(女)과 저녁때(昏)에 예식을 올리고, 한자리에 드는 것이 곧 장가드는 것이기 때문이고, 姻이 시집간다는 뜻이 되는 까닭은, 古禮에서는 여자의 집에서 신랑감을 구할때, 반드시 媒婆에 의거해야 했는데, 媒婆(女)의 중매에 인(因)하여 인연을 맺고, 한 남자를 따라 가는 것이 곧바로 시집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인은 음과 양이 화합하여, 삼라만상이 창조되는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일이며,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짝을 찾는 순수한 人情에 맞추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古禮에서는 "천지의 리치에 순응하고, 인정의 마땅함에 맞추는 것이 곧바로 혼인이니라!"고 했습니다.     현성원 글 2013년3월  
8    설의 어원에 대하여 댓글:  조회:3662  추천:1  2013-02-06
 설의 어원에 대하여 우리말 의 어원에 대하여 문의하는 사람은 많은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확실한 정설이 없습니다. 《東國歲時記》에서 고 한것이나, 고 한것은 모두 학술적 해석이라고 하기보다 오락적 묘사. 즉 설을 가지고 말장난 했다는 편이 더 적절할것 같습니다. 그외에도 나름대로 몇가지 설법들이 있기는 하나 모두 사람들을 설복시키기에는 무언가 부족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의 어원을 고증함에 있어서 한가지만은 확실한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그것은 즉 우리민족 전통 설문화는 기실 우리민족 고유의 문화가 아니라, 일찍 고대 중국으로 부터 받아들인 외래문화라는 점입니다. 설이 있자면 먼저 설을 확정하는 력법이 있었어야 하는건데, 우리민족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줄곧 중국의 력법과 중국의 력대 황제년호를 따라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의 어원도 우리의 고유어가 아니고 중국어를 그대로 본따 쓰다가 우리말로 고착된 외래어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사유로선에 근거하여 저는 방향을 바꾸어 우리말 의 어원을 설과 상관되는 중국어에서 두루 찾아 보았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기에 이미 고대력법에 의하여 새해를 상징하는 첫날을 명절로 정하고 경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을 일컬으는 명칭은 각 조대를 내려 오면서 변화가 많았습니다: 례를 들면 진나라까지는 새해 첫날을 대체로“上日”혹은 “元日”로 부르다가 한나라때에 와서는 “岁旦”、“正旦”、“正日”등으로 불렀으며, 唐宋元明때에는 “元旦”、“岁日”、“岁首”、“新元”등으로 불렀고, 清代에 와서는 줄곧 “元旦”혹은 “元日”로 불렀습니다. 公元1911년12월31일, 중화민국 성립을 앞두고 통보를 내여  서양력을 채용한다고 선포하고 서양력 1월1일을 "新年"이라고 칭하고, 전통음력 정월 초하루를 처음으로 “春节”이라고 개칭하였습니다. 公元1949년 9월27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앞두고 중앙정치협상회의 제1차회의에서는 公元纪年法을 채용한다고 결정하고, 公元력법 즉 양력의 1월1일을 “元旦”으로 정하고, 음력의 정월 초하루를  “春节”로 고정하여 그 이름으로 중국 명절법전에 올리고 오늘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력대로 새해 첫날을 일컬으는 이상의 “元旦”、“岁日”、“新元”、“春节”등 명칭에서, 우리말 과 어음이 가장 비슷한 명칭이 당나라때에 많이 사용된 이라는 명칭입니다. 우리말로 이라고 발음이 되죠.   중국에서는 唐宋詩詞가 상당히 유명한데, 에는 을 주제로 한 唐詩들만 하여도 20여편이 수록되여 있습니다. 이것은 당나라때에 설을 일컬어 이란 명칭이 상당히 보편적으로 사용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중에서 유명한 당나라 시인 元稹의 오언절구 를 례로 듭니다:   그당시 반도에서는 고구려말, 통일신라, 고려초 등 시기를 걸치면서, 당나라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민족 구전문학 규률에 대비할때, 이 이란 말이 습관화 되면 로 복합발음이 되였다가, 오랜세월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불리워 지는 과정에서 로 변이 되는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론리적 분석일 뿐이고, 아직 확실한 최후의 정설이 아니므로, 참고로 제공합니다.   우리민족의 특수한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우리말중의 많은 명칭들은 그 확실한 어원을 찾을수 없습니다. 그런 명칭들이 산생된 원인이 각기 다르고, 그 과정이 상당히 복잡하므로, 고정된 사유방식으로 정설만 추구한다면, 억지의 착오를 범할수 있습니다. 해석이 필요한 허다한 우리말 명칭들은 그 상관적 력사적 기록을 찾을수 없어, 여러가지 해석이 있게 되는데, 아주 정상적인 일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말의 신비성과 다양성이 아닐가 싶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작성 2013년2월  
7    고령화 시대와 로인, 그리고 … 댓글:  조회:4957  추천:1  2013-01-27
고령화 시대와 로인, 그리고 … 18세기 말엽에 《말사스》라고 하는 한 영국의 학자는 《인구원리》라는 자기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인류사회에서 농작물, 공업품 등 생활자료는 산수식(1,2,3,4…)으로 증장하고 인구 수량은 급수식(1,2,4,8…)으로 증장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의식적으로 인구의 증장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빈궁과 재난은 피면할수 없게 된다. 인구 증장을 억제하는 수단에는 주로 두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독신으로 살거나 결혼을 늦게 하는 등 도덕적 억제 수단이고, 또 다른 한가지는 전쟁, 질병, 온역, 재난, 등 적극적 억제 수단이다. 적극적 억제 수단이란 다시 말해서 전쟁이나 온역같은 잔혹하고 효과적인 수단을 적극 리용하여 과잉인구를 억제함으로써 지구상의 생활자료 형편에 따라서 인구 비례를 평형시키는 것이다.… …   말사스의 《인구원리》는 한때 히틀러 등 파쑈들의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태인 대학살을 감행하는 등 리론근거로 채납되여 왔으며 이미 력사적으로 많은 철학가들과 정치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말사스는 동식물에게나 적용될는지 하는 원리를 가지고 인류를 분석하였으며 인류의 문명과 사회제도의 적극적인 역활을 보아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진짜로 세계적 인구과잉 시대가 서서히 도래하고 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우리의 지구는 적도 둘레길이가 단지 4만키로, 지구의 대부분 면적은 바다에 잠겨 있으며 육지면적은 29%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육지면적의 80%이상은 또 고비사막이 아니면 빙설에 묻혀 있으며 단지 16%의 면적에만 인류가 상기 거주할수 있다. 지구인구가 계속 이렇게 무제한 증장되게 내버려 둔다면 그리 멀지않은 래일에 가서 인류에게 훼멸성 재난이 닥치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바 없다.   그럼 어떻게 인구의 증장을 효과적으로 공제하고 인류를 구할수 있겠는가? 기실 이런 문제는 우리 로백성 신분에서 해답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 제일의 인구대국인 우리 중국에서는 이미 40여년 동안 계회생육을 기본국책으로 지정하고 엄격히 실행하여 왔다. 중국의 백성으로서 세기적 난제에 한번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구상하여 볼 따름이다.   2011년의 유관 통계에 의하면 중국의 총인구는 이미 13억을 넘었는데 그 당해의 출생률이 1.2%였고 사망률이 0.7%였다. 그러니 중국의 그 당해 인구 자연 증장률은 약 0.5%가 되는 것이다. 이 속도로 계속 나간다면 이제 본세기 말에 가서 중국의 인구는 또 50%가 증가되여 20억좌우로 될 것이며 세계의 인구는 지금의 약 70여억으로 부터100억선을 넘어서게 될것이다. 지구가 용납할수 있는 인구총량의 극치에 접근한다.   지구 인구가 100억을 넘으면 어떻게 될가? 참 흥미로운 문제이다. 나는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한번 적극적인 방면으로 구상하여 본다:   그때에 가서는 중국의 GDP총량이 이미 미국을 훨씬 초월하여 세계는 패권이 없는 중국 주도의 다원화 질서로 다스려 질 것이다. 세계적으로 나라의 공능이 약화되고 유엔의 공능과 새로 건립된 국제 자유무역 기구의 역활이 강화될 것이다. 핵무기와 대량 살상무기같은 불길한 물건은 유엔의 감독하에 기를 나누어 계획적으로 없애버릴 것이며 세계의 영구한 평화가 보장될 것이다. 고신 과학기술 성과를 세계적으로 공동히 향수할 것이며 세계적 초요사회가 실현되여 나라지간의 빈부차이가 그리 크지않을 것이다. 인류의 육아교육과 양로복지는 완전히 사회에서 책임지게 될것이며 혼인은 가정에 예속되지 않은 자유적인 결합으로 될것이다. 즉 아이를 키우고 로인을 모시는 일에 젊은이들이 더는 근심할 필요가 없고 외도하고 들킬가봐 조마조마 조심할 필요도 없게 된다. 사람의 수명은 보편적으로 100살에 접근할 것이고 70세이상의 로인 비례가 20%이상을 차지하게 될것이며 처음으로 세계적 고령인구 고봉위기를 맞이하게 될것이다. 인류는 인구를 공제하기 위하여 세계적 범위에서 엄격히 생육을 절제할 것이며 또 로년복지 사회기제를 완벽화 하여 고령인구 고봉위기를 안전하게 넘기기 위하여 유력한 조치를 실시할 것이다. 고령인구 고봉위기를 안전하게 넘긴 후에는 인구수량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만일 고령인구 고봉위기가 쉽게 해결되지 않고 인구가 계속 불어 난다면 유엔 인구대회에서 일본대표가 《사망을 제도화 할데 관한 제안》을 제출할 것이다. 즉 장수로인들이 100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사망하는 제도이다. 지금의 규정년령이 된 사람들을 무조건 퇴직시키는 제도처럼 말이다. 그러나 일본대표의 정령사망 제안은 결국 통과되지 못할것이며 인류는 자기의 지혜를 충분히 발휘하여 끝내는 더욱 현명한 방법으로 고령인구 고봉위기를 아슬아슬 넘길것이다.… …   지금 세계에서 대체적으로 락후하고 빈궁한 나라일수록 인구 증장률이 높고 선진적이고 부유한 나라일수록 인구 증장률이 내려가는 추세이다. 독일과 같은 선진국가는 이미 몇년째 인구의 마이너스 증장률을 확보하고 있다. 즉 인구가 해마다 줄어 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구의 증장률을 효과적으로 공제한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또 다른 더욱 어려운 사회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구 고령화이다. 지금 사회적으로 60세 이상의 로인비례가 10%를 넘으면 고령화 사회라고 한다. 의학이 발전하고 생활환경이 개선되면서 사람들의 수명이 보편적으로 많이 연장되였는데 일본이나 독일처럼 부유한 나라에서는 60세 이상의 로인비례가 이미 20%를 넘어 섰으며 나라적으로 로년 복지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그리하여 지난 1월21일, 일본정부는 사회보장제도 개혁에 관한 국민대회를 열었는데 《말기 연명치료에 관한 건강보험제도 개혁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본 아소다로(麻生太郞) 부수상겸 재무상은 《연명치료를 받고 있는 불치병 말기 로인일 경우, 만약 본인들이 죽고 싶어하면 얼른 죽을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발언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현재 일본에서는 고령화로 인하여 로인 의료비가 엄청나게 불어난 탓에 건강보험제도가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아소다로의 본의는 나라의 재정부담을 줄이고 복지비용을 더욱 유용한 곳에 쓰자는 뜻이였으나 사회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자기의 관점이 아직 시기상조임을 의식하고 결국 사과하고 걷어 들이고 말았다.   기실 우리도 평소에 불치병 말기 로인들이 연명치료 과정에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연명치료란 완치의 가망이 전혀 없는 말기 환자로인을 약물로 죽음을 지연시키는 행위로서 기실 환자로인에게는 고통만 더해 줄 뿐이고 사회적으로 랑비를 조성하고 의료보험에 부담만 증가할 뿐이다. 그러나 병원의 립장에서는 환자로인이 아무리 고통스러워 할지라도 치료비만 보장되여 있다면 거의 끝나가는 희망없는 생명을 만구하기 위하여 끝까지 치료를 견지하는 것이 현대 인도주의의 기본 표준이고 병원 경영의 기본 방침이다. 한 리직간부 환자가 페암으로 8년을 시달리다가 인젠 연명치료가 너무나 지겨워 해탈되려고 몰래 많은 수면제를 삼켰다. 그런데 그만 인차 발각되여 의사들이 구급을 드리대는 바람에 다시 깨여나게 되였다. 그러자 그는 《좀 편히 죽자고 하였는데 나에겐 죽을 권리도 없구나!》하면서 한탄하였다. 중국의 법률상에서 자살과 안락사는 절때 용인되지 않기 때문에 사연이야 어찌 되였든 의사로서 환자가 자살로 안락사 하려는 것을 알면서도 제지시키지 않았거나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의사는 도덕의 질책을 받게 되며 심지어 법률의 추궁을 받을수도 있다.   인류사회에서 평화로운 환경이 지속되고 문명과 향락의 요소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욕망이 더욱 강해진것 같다. 기실 아무리 엄중한 불치병 말기 로인이라고 하여도 진정으로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한 불치병 말기 로인이 평소에 죽겠다는 말이 입에서 끊기지 않으니 그의 딸은 듣기가 민망스러워 사탕 한알을 로인의 손에 은근히 쥐여 주면서 《이것을 잡수시면 편안히 사망할수 있으니 얼른 잡수세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로인은 대뜸 사탕을 뿌려 던지며 대노하더라고 한다. 자기가 건강할 때에는 불치병 말기 로인들의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저 처지라면 방법을 대여 죽어 버려야지!》하고 생각할수 있지만 일단 정말로 자기가 불치병에 걸려 그 처지가 되고 보면 도리여 죽을 용기가 없어지고 무한히 살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사람은 태여나면서부터 자기 일생을 살만큼 살고 만년에 가서는 꼭 죽어야 한다고 세월과 어길수 없는 계약이 맺어진다.  그리하여 만년에 가서 불치병으로 죽지 않으면 죽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불치병이 오는 것이다. 지구는 마치도 공간과 좌석이 제한되여 있는 공공뻐스와도 같다. 먼저 뻐스에 오른분들은 일정한 구간을 려행한후에는 반드시 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또 다른분들이 이 뻐스에 오를수 있는 공간과 좌석이 생긴다. 만일 이 세상에 정말로 《장생불로약》이 있어서 2천여년전의 공자나 진시황같은 분들이 모두 떼질쓰고 죽지 않고 버티면서 오늘까지 살아 계신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가? 상상하기조차 무서운 일이다. 수명이 다 하여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서 로인들은 스스로 평온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로인들의 만년의 행복은 많은 정도에서 평온한 마음가짐에서 온다고 할수도 있다.   고령화 시대에 접어 들면서 로인들은 어쩔수 없이 본의가 아니게 사회와 가정의 부담으로 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로인들의 탓이 아니다. 자연규률과 사회규률에 의하여 인류가 자기의 발전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어려운 시련고비이다. 그렇다고 사회와 가정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로인들을 기시하고 홀대한다면 사회에서는 인도주의 대재난이 폭팔하여 고령화 시대보다 더욱 무서운 현대식 야만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 사회와 가정에서 로인문제가 점점 심각해 가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로인들의 건강과 장수는 여전히 사회와 가정의 응당한 존경과 축복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의 사회와 가정은 바로 그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창조되고 건설되였으며 그들의 처지가 곧바로 현대사회 문명수준의 직접적인 표징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와 가정에서 자체건설을 부단히 완벽화 하여 로인복지 수준을 보장하고 제고시키는 것이야 말로 고령화 시대난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도경의 하나이다.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환갑례》,《회혼례》등 부모들의 장수를 축하하는 례의가 있다. 《환갑례》는 탄생60주년 기념인데 기실 《로인례》에 해당하며, 《회혼례》는 결혼 60주년 기념인데 낳은 자식들을 하나라도 저승에 앞세웠다면 이 축수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근년에 와서는 《환갑을 쇠고 나면 빨리 늙는다.》는 관념이 성행하면서 환갑을 십년 미루어 일흔하나에 가서 쇠는것이 보통이다. 그만큼 지금 사람들은 너무 일찍 로인대접을 받는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장례에도 《호사》라는 것이 있었는데 《인생칠십 고래희》라 하여 70세이상 장수하시고 사망한 로인의 경우에만 적용되였다. 장례에서 《호사》의 경우에는 조문시에 상주와 주부에게 위안의 말을 하여 주는것이 아니라 축하와 치하의 말을 하여 주며, 출상시에는 상여를 메고 《상여가》를 높이 부르며 장난치면서 오락의 분위기가 농후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상여가》에는 《삼천갑자 동박삭》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동방삭이라는 신선이 삼천갑자를 살았다고 하였으니 삼육이 십팔하여 십팔만년을 산셈이다. 기실 동방삭(기원전154년~기원전93년)이라는 사람은 중국 한무제때에 실제로 존재한 수수한 문관이였는데 생평이 61년, 즉 한 갑자밖에 살지 못하였으며 가령 오늘까지 살아 계신다 하여도 2167세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는 워낙 자기 자랑에 특기가 있어 우리민족의 신선으로 탈바꿈 되여 오면서 자기 나이를 일약 3000배 올리 붙여서 십팔만세 장수신으로 되였으니 아마 우리민족이 예로부처 장수로인을 특별히 존경한다는 소문을 많이 들은것 같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현대 로인들의 가장 큰 변화는 자식들을 모두 내 보내고 혼자 사는 것이다. 반려가 함께 있는 로인들은 그런대로 서로 등이라도 긁어줄수 있지만 독거로인들은 감기에 걸려도 물 한컵 떠다줄 사람이 없으며 그리하여 집에서 고독사 하는 로인들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지금 시대에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니까 젊은이들이 부모를 옆에 모시고 있으면서 보살필 사이가 없다. 그리하여 자리가 어려운 로인들은 보통 경로원에 맡겨지는데 정부에서 꾸린 경로원은 그런대로 사람 사는곳 비슷하지만 개인적으로 꾸린 경로원은 그 정황이 상당히 복잡하다. 지금 사회적으로 로인 복지내용과 기제가 점차 풍부하여 지는데 단 한가지만은 여직까지 공백이다. 그것이 곧 로인들의 사망시 장례복무 기제이다.   《조선족 장례풍속》이 무형문화재로 되고 내가 대표 전승인이 되면서 그 동풍을 빌어 조선족 장례 어려움을 해결한다는 종지로 유관부문의 비준을 받고 《시대상조》를 설립하였다. 정작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내 혼자의 힘에는 엄청 부치는 일이여서 유관부문의 지지와 능력있는 분들의 리해와 도움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우리 조선족들은 죽을《死》자를 특별히 싫어한다. 특히 상업이나 무역을 하는 분들이 더욱 그렇다. 《死》와 상관되는 사람, 사연, 혹은 물건을 가까히 하면 크게 재수 없어진다고 믿는다. 오늘까지 나한테 과감히 접근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한 조선족 지명인은 한명도 없다. 힘이 모자라 힘을 합치려고 사회에 많은 초빙고시 내 보냈지만 감히 응하는 사람이 없다. 물론 아직까지 현명한 방안이 나오지 못한것이 그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한 젊은 조선족 사업가의 유치하고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고는 너무나 서글퍼서 며칠밤 잠을 설쳤다; 《산사람 사업을 하자해도 끝이 없는데 하필이면 죽은사람 사업입니까? 우리가 무슨 할일이 없어서 이런일에 손을 대겠습니까? 친구들의 웃음을 살 일입니다. 미안하지만 도움을 줄수가 없네요.》… …   하여튼 우리의 사업이 일시 지지부진하면서 당분간 우리 문화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밀리여 조선족 상가에 응당 주어야 할 도움을 줄수 없고 마감길 가는 조선족 로인들에게 우리 례의로 명복을 빌어줄수 없는것이 참으로 미안하고 가슴이 아플 뿐이다. 그러나 보증하건대 이제 몇달이 안가서 우리의 사업은 궤도에 오를 것이며 연변실정에 부합되는 조선족 상조가 참신한 모습으로 나타나 연변의 조선족들에게 실혜적인 봉사를 제공하여 줄수 있을것이다.   나도 로인이다. 나는 늦게나마 얻은 이 사업의 기회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긴다. 우리 《시대상조》에는 100년 대계가 있다. 그러니 나에게는 죽을때까지 분투하여도 완성할수 없는 임무가 있게 되였다. 참 잘된 일이다. 늙으막에도 계속 할일이 있다는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긴다. 비록 이런 일을 그누가 부러워 할 사람은 없겠지만도. 그런대로 나는 우리의 100년 대계 완성을 바라고 매일매일을 열심히 출근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그 어느날에 가서 염라왕님이 불시에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번에는 당신이 죽어야 할 차례요!》하고 통지를 보내오면 나는 흔쾌히 《예잇- 곧 갑니다.》하고는 이대로 두 사신을 따라 저승으로 떠나 갈것이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씀 2013-01-27  
6    《고려장》전설과 《고려장》현대판 댓글:  조회:4172  추천:2  2013-01-02
《고려장》전설과 《고려장》현대판 《高麗葬》이란 우리 전설에서 옛날 고려때에 있었다는 일종의 장사 악법이다. 자기 부모가 로쇠하여 더는 일할수 없게 되면 산속에 땅굴을 파서 그곳에 부모를 가두어 놓고 죽기를 기다리다가, 일단 죽으면 큰돌을 옮겨 땅굴을 봉해 버렸다고 한다. 이 《고려장》과 관련하여 두가지 전설이 기억난다; 한가지 전설에서는 고려때에 한 농부가 자기 부친이 인젠 늙어서 일할수 없고 밥만 축내게 되니 당시 풍속에 따라서 자기 부친을 지게에 담아 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땅굴을 파서 가두어 놓은후 지게마저 버리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함께 갔던 그 농부의 어린 아들이 그 버린 지게를 기어코 가지고 가자고 조른다. 왜서냐고 물었더니 그 어린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가 늙으면 역시 이 지게로 져서 버려야 하는것 아니냐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 농부는 크게 뉘우치고 늙으신 자기 부친을 다시 집으로 모셔 내려와 지성으로 봉양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전설에서는 한 선비가 당시의 풍습대로 늙으신 자기 어머니를 버리려고 산에 업어 같는데,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자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 갈때 길을 잃을까봐 걱정되여 나무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 두었다. 그 선비는 이렇게도 인자하신 어머니를 차마 버릴수가 없어서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러던 어느날, 당나라 사신이 똑같이 생긴 말 두필을 가져고 와서 고려의 대신들더러 어미와 새끼를 가려내라고 한다. 모두들 가려내지 못하는데 그 선비의 어머니가 그 말들을 하루 굶긴 뒤에 여물을 주어서 먼저 먹는 놈이 새끼이고 양보하는 놈이 어미라고 알려 주어 문제를 풀수 있었다. 그 뒤로 조정에서는 늙은이들에게는 젊은이들에게 있을수 없는 보귀한 경험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고 령을 내려 늙은 부모를 버리는 악습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상의 두 전설을 얼핏 듣기에는 효도를 선양한 전설인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기실 그것이 아니다. 위치를 바꾸어 생각해 보면 자고로 례의와 효도가 우리 민족의 우량전통이라고 세상에 소리높이 자랑하여 온 우리 민족의 력사에 《고려장》이라는 이런 악습이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잔혹한 일이다. 체면을 생명처럼 중히 여기는 우리 고국의 글꾼들은 언녕 이점을 감지한것 같다. 네이버 검색란에 《고려장》이라고 쳐 넣고 검색하여 보았더니 절대 대부분의 글들에서는 《고려장》이란 어디까지나 전설일 따름이지 실제로 있은 우리민족 력사사실은 아니라는 주장으로 일색이다. 《고려장》이 우리 민족의 형상에 크게 먹칠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세종 44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4월 4일(기묘)세번째 기사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사람의 자식으로 부모가 살았을 때는 효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슬픔을 다하는 것은 천성(天性)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고, 직분(職分)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것이다. 고려 말기에 외방(外方)의 무지(無知)한 백성들이 부모가 죽으면 도리어 간사한 마음으로 즉시 그 집을 무너뜨리고, 또 부모가 거의 죽어갈 때에, 숨이 아직 끓어지기도 전에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 비록 다시 살아날 이치가 있더라도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장사지내는 날에는 향도(香徒)들을 많이 모아서 술을 준비하고 풍악을 베풀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이 하니, 어찌 유속(遺俗)이 아직까지 없어지지 아니하였는가. 아아. 사람은 진실로 각기 상도(常道)를 지키는 천성(天性)이 있으니, 누가 그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리요마는, 다만 오래도록 습속(習俗)에 젖어 이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지금부터는 유사(攸司)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아 교조(敎條)를 명시(明示)하여, 가가(家家)로 하여금 구습(舊習)의 오점(汚點)을 환히 알도록 하여 자신(自新)해서 인효(仁孝)의 풍속을 이루게 할 것이다. 만약 혹시 고치지 않는다면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은 엄격히 금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민족의 《조선왕조실록》은 가장 진실하고 가장 완정한 흔치않은 력사문헌중의 하나이다. 이상의 기록에서 살펴보면 고려말기부터 외방의 무지한 백성들에게서는 부모의 죽음과 장사에 상관되는 간사한 악습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현명하신 조선조 세종대왕님께서 예조에 교지를 내리시여 금지시키는 것이다. 이로부터 추정컨대 《고려장》같은 장사 악습도 우리민족 력사의 어느 한시기에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기실 한개 민족이 력사에 이런저런 오점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세상의 그 어느민족의 력사에 오점이 없겠는가? 한개 민족의 력사상에 이런저런 오점이 있었으므로 하여 그 민족은 그 오점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더욱 성숙되는 것이다. 불행한것은 한개 민족의 력사상의 오점이 다시 현대판으로 바뀌여 재연되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고려장》악습은 조선조의 세종대왕님께서 예조에 교지를 내리시여 금지시킨후, 유교를 전면적으로 보급시키면서 례의를 중시하고 부모에 효성하는 규칙을 제정하시여 백성들이 지키게 함으로써 그 우량한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 내려올수 있게 하시였다. 그런데 현대 문명사에서 전례없는 최고의 성세를 맞이하고 있다는 최근에 와서 우리의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 보시라; 필생의 정력으로 자식들을 다 출세시켜 보내고 나니 세집에 덜렁 버려진 늙으신 아버님들, 외국에 돈벌이 간 자식들을 망연히 기다리며 빈집을 지키고 계시는  허약한 어머님들,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고독한 할아버지들, 치매에 걸린후 싸구려 경로원에 후사처리까지 이미 맡겨진 불쌍한 할머님들, 빈집에서 혼자 사망한후 며칠후에야 발견된 불행한 망령들… …, 현재 우리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수있는 이런 현상들이 그래 현대판《고려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대에서는 현명하신 세종대왕님이 계셨기에 예지에 교지를 내리시여 그 간사한 《고려장》악습을 금지시킬수 있었다면, 현재에 와서는 어떤 《성인》이 나타나시여 어떤 현명한 시책으로 곤혹스러운 이 현대판 《고려장》을 철저히 없앨수 있으리까? 성원 글 2013년1월2일
5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사회 댓글:  조회:5051  추천:4  2012-08-21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사회 우리민족의 로인절인 8.15가 금방 지나갔습니다. 살아서 별로 해놓은 일도 없는데 우리도 어느덧 늙어 버렸습니다. 세월이 하는 노릇이라 어쩌는 수 없지요. 그런데 시대가 바뀌였습니다. 지금도 전통 가정환경에 미련을 가지면서 자식손군들의 효성속에서 받들려 살다가 죽기를 원한다면 너무나 사치한 념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본의 로인들은 이미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는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답니다. 한국의 로인들도 이미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는것을 그리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바야흐로 로년에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시대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환경에서 우리 로인들이 정신상에 준비가 없고 구체 대책이 없다면 우리의 만년은 비참할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바야흐로 도래하는 고독의 로년시대를 평온한 마음으로 맞이하겠는가? 여기에 왕림하신 분들이 자기의 견해들을 아래에 댓글로 달아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련계전화:13894387438 메일주소:sy10088@163.com 2012년8월20일   [만물상] 노인 고독사(孤獨死) 일본에선 해마다 1만명 넘게 목욕탕에서 익사한다. 대부분 노인들이다. 홀로 살다 이렇게 죽으면 며칠씩 모른 채 지나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욕조 익사’를 막는 장치들이 등장했다. ‘오사카가스’라는 회사는 물을 감지하는 센서가 달린 목걸이를 내놓았다. 목걸이가 20초 이상 물에 잠겨 움직이지 않으면 경고음을 울린다. 가족 없는 노인이면 동사무소나 복지센터로 비상신호를 보낸다.   ▶일본 고베시는 가스 사용량으로 독거(獨居) 노인의 안부를 챙긴다. 노인이 아침에 가스레인지를 켜면 사용정보가 무선시스템을 통해 복지단체나 가족에게 전달된다. 사용량이 ‘0’이면 복지단체에서 집으로 전화를 건다. 벨이 30차례 울려도 받지 않으면 구조대가 달려간다. 고베엔 독거노인들의 가스 사용을 24시간 점검하는 복지센터가 75곳이나 된다. 1995년 대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노인이 유난히 많아서다.   ▶지켜보는 이 없이 홀로 죽는 ‘고독사(孤獨死)’가 일본에서 사회문제로 된 건 1970년대다. 고령화와 핵가족화로 도시 노인들의 쓸쓸한 죽음이 부쩍 언론을 탔다. 지난해 도쿄에서만 2714명이 그렇게 세상을 떴다. 주검이 발견되기까지 평균 일주일이 걸렸다. 6%는 한 달 넘어서야 발견됐다. 60~70세 자식이 80~90세 부모를 돌보는 ‘노노(老老) 개호(介護)’도 많아 늙은 자식이 먼저 가면 부모가 도리없이 뒤따른다.   ▶올해 초 폭설이 내린 충남 어느 마을에서 칠순 할머니가 장독대 눈을 치우려다 지붕에서 무너져내린 눈더미에 깔렸다. 할머니는 숨진 채 7일을 묻혀 있었다. 서울서 달려온 아들은 온 동네를 헤매다 뒷마당에 쌓인 눈 30㎝ 아래서 아끼던 털모자를 쓴 채 얼어버린 어머니를 발견했다. 도시에선 단칸방에서 홀로 죽어 한참 뒤 발견되는 노인들 얘기가 일본 못지않게 줄을 잇는다.   ▶우리나라 고령인구가 느는 속도는 총인구 증가속도보다 13배나 빠르다고 어제 통계청이 발표했다. 독거노인은 1998년 49만명에서 2005년 83만명으로 불어났다. 노인 다섯 명 중 한 명이 홀로 산다. 대부분 빈곤층이지만 그나마 기초생활보장 혜택을 받는 경우는 4분의 1밖에 안 된다. 자식에 짐 될까 혼자 고단한 삶을 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아직 사회안전망의 그물코가 성긴 우리에게 ‘방치된 죽음’은 일본보다 더 심각하고, 그래서 더 방치할 수 없는 문제다.     홀로 살다 홀로 죽는 일본인, 내일 우리들의 모습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일본' 특집은 독자를 으스스하게 만든다. 일본에선 사망 후 4일 이상 지나 발견되는 고독사가 한 해 1만5600명에 달하고, 죽어도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없는 무(無)연고 사망자가 3만2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도쿄에선 죽는 이 10명 가운데 3명은 이른바 직장(直葬), 장례식 없이 곧바로 화장터로 가고 있다. 현재 일본 30대 남성 10명 가운데 3명, 여성 10명 중 2명은 50대가 될 때까지 결혼을 못할 거라고도 한다. 결국 일본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가 돼가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가족 울타리'가 약해지고, 급속하게 진행된 저출산·고령화로 돌봐줄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있다 해도 20년 경기침체로 부모를 보살필 경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구 구성 비율은 일본을 10~15년 차이를 두고 뒤따라가고 있다. 오늘 일본의 스산한 모습이 내일의 우리 모습이라는 이야기다. 일본은 지난 20년 인구가 감소하면서 기업 매출이 떨어지고, 일자리가 줄고, 그것이 다시 소비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을 겪어왔다. 작년 일본의 226개 백화점 가운데 매출이 늘어난 건 3곳뿐이었다. 어린이 인구(0~14세)가 1990년 2248만명에서 작년엔 1648만명으로 줄면서 제과점 파산이 속출했다. 청년실업이 늘어나면서 1990년 780만대였던 신차 판매가 2009년 488만대로 감소했다. 금융자산의 75%(1125조엔·약 1경5000조원)를 가진 노인들은 여생이 불안하다며 갈수록 지갑을 닫고, 일자리를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다. 젊은이들 성격도 변했고 이에 따라 사회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직장도 학교도 안 다니면서 하릴 없이 시간을 죽이는 니트족, 뚜렷한 일자리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프리터족이 늘면서 자기 체념을 뜻하는 '하류지향(下流指向)'이란 말이 유행어가 돼버렸다. 30~34세의 직장인 가운데 결혼한 비율은 정규직 60%, 비정규직 30%, 프리터 17%다. 일자리가 불안한 젊은이들은 결혼을 기피하고 이것이 다시 저출산과 경기침체를 악화시키고 있다. 일본은 1996년부터 생산연령인구(15~64세)가, 2008년부터는 총인구 자체가 감소했다. 우리도 2017년 생산연령인구가 줄기 시작하고 2019년부터 총인구가 감소할 것이다. 일본의 65세 이상 노인이 1990년 1489만명에서 2010년 2941만명(전체 1억2800만명의 22.9%)으로 늘었다. 지난해 우리의 노인 인구는 535만명이었는데, 2030년엔 1180만명(전체 4860만명의 24.3%)이 된다. 일본의 경우 노인요양보험인 개호(介護)보험 지출액이 2000년 3조8000억엔에서 작년 7조9000억엔으로 2배 늘었다. 우리의 노인장기요양보험은 작년 지급액이 2조5000억원이었는데 2030년엔 15조6000억원으로 6배 늘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있다. 저출산·고령화가 이런 식으로 경제활력을 떨어뜨리면 잠재성장률은 현재 4.1%에서 2020년 1.9%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렇게 되면 작아진 파이를 서로 더 많이 먹겠다고 다투는 계층 간, 직업 간, 세대 간 갈등은 더 심해진다. 저출산·고령화는 한 번 추세가 형성되면 되돌려놓기가 힘들다. 일본도 온갖 몸부림을 쳤지만 실패했다. 저출산·고령화 추세가 고착(固着)되기 전에 흐름을 돌려놓아야 한다. 지금 하늘을 찌를 기세로 부풀어 오르는 중국의 미래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가장 큰 요인도 중국의 급속한 노령화다. 역사상 저출산·고령화의 흐름에 떠밀려가면서도 번영을 누렸던 나라는 한 나라도 없다. 우리 정부는 저출산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GDP의 0.7% 예산을 쓰고 있다. 저출산·고령화 시한폭탄의 뇌관(雷管)을 제거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예산이다. OECD 평균이 2.3%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장관들에게만 맡겨놓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문제다. 대통령이 10년 후, 20년 후 나라의 운명을 바로 보고 역사적 문제의식을 갖고 임해야 한다.   "서럽지만 이게 내 팔자…", 홀로 죽음을 맞는 노인들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70살 이상 1인 가구 79만 세대 소외계층으로 갈수록 고독…마지막 순간 지켜보는 건 'TV'   지난 2월 충남 아산의 한 아파트의 다른 집에서 시신 2구가 같은 날 발견됐다. 숨진 박모(여·65)씨와 이모(남·52)씨는 모두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살던 '1인 가구'였고, 고혈압 등의 지병을 앓고 있었다. 당시 출동했던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3일, 이씨는 7일 이상 숨진 채 방치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형적인 '고독사(孤獨死)'다. 한국에서도 1인 가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일본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외로운 죽음'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200~300 가구가 아파트나 오피스텔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지만 이 공간에선 전통적인 '이웃'의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다. 한국의 1인 가구 비율은 노인·청년·장년층을 가리지 않고 급격한 속도로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우리나라의 1인가구 수는 403만으로 전체 가구(1,733만 가구)의 23%에 달한다. 30년 전인 1980년에는 1인 가구의 비중이 4.8%에 불과했다. 1990년에는 9%, 2000년에는 15%로 늘었다. 30년 사이 5배로 늘어난 것이다. 1인가구 증가 속도는 정부의 예상치를 훨씬 넘는다. 2009년 말 통계청은 2030년이 돼야 1인 가구의 비율이 23%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정부의 예측보다 20년이나 빠르다. 김용학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부유층과 비교해 소외계층으로 갈수록 사회적 네트워크가 약해지는 '인맥의 양극화 현상'이 한국에서도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홀로 거주하는 독거노인은 106만 명을 넘어섰으며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독거노인의 발생은 이들의 사회적 교류 단절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실제 연구자료를 보면 독거노인의 24% 정도가 한 달에 한 번도 가족과 연락하거나 만나지 못하는 등 사회적 고립 정도가 매우 크고, 이 때문에 독거노인 10명 중 3명 정도가 우울증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서 홀로 사는 김유복(82) 할머니는 "자식이 6명이나 되지만 다들 벌어먹느라 바빠서 1년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을 때도 있다"며 "서운할 적도 많지만 다 내 팔자다. 이러다 혼자 죽는 건가 하는 걱정뿐이다"라며 눈물을 보였다. 정부는 전체 독거노인 중 약 18% 정도를 위험군에 속한 독거노인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2007년부터 '노인돌봄 기본사업'을 실시 중이다. 이 사업은 노인돌보미들이 일대일로 방문해 안전 확인하고 생활에 필요한 교육과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정부의 예산 부족 등으로 18% 중 14% 정도만 혜택을 누리고 있다. 나머지 4%는 지원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지자체가 직접 나선 예도 있다. 경기도는 이웃에 혼자 사는 노인을 새마을부녀회원이 돌보는 '생활밀착형 홀몸노인돌봄 사업'을 11월 한 달간 시범 추진했다. 자원봉사자인 새마을 부녀회원이 이웃의 홀몸노인과 결연을 맺고 수시로 가정을 방문해 노인돌보미의 역할을 수행한다. 왕명순 미산면 새마을부녀회장은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 고독사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며  "그런 일도 방지하면서 혼자 사는 노인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고자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경기도는 지난 10월 새마을부녀회원과 읍면동장을 대상으로 12차례 간담회를 개최해 사업내용을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했으며, 새마을부녀회원 1300여명에 대해 8차례 사전교육을 실시했다. 64개 읍면동 새마을부녀회에서는 지난 1일부터 밑반찬, 생필품 등을 홀몸노인에게 지원하고 있다. 고순자 도 복지여성실장은 "내 이웃에 홀로 사는 노인을 돌봄으로 인해 '우리'라는 의식을 회복하고자 사업을 시작했다"며 "소외계층에 대한 생활밀착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복지담당 공무원 모두가 온 힘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경기도는 남양주, 포천, 양주, 동두천, 가평, 연천 등 6개 시·군 홀몸노인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추진한 뒤 그 결과에 따라 지속적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4    중한 민간관계 비망록--용수작성 댓글:  조회:2930  추천:0  2012-07-30
중한 민간관계 비망록 현용수 작성 2009년 한국의 韩민족은 조선의 조선민족과 하나의 같은 겨례로서 韩(조선)반도에서 유구한 력사를 기록하여 왔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등 력사에 대하여 지금 중국학술계와 한국학술계에서 많은 쟁의점이 있기때문에 이 방면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확인된 반도내의 삼한의 력사부터 신라, 백제, 가락, 왕씨고려, 리씨조선을 경과하여 적어서 이미 20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다.   리씨조선 말기에 와서 조정은 일본, 청조, 로씨야등 주변 대국들의 싸움에 부대끼다가 1910년에 《경술국치》를 당하여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35년간 망국노의 슬픈력사를 겪기도 하였다. 이기간 많은 애국투사들이 중국에 망명하여 여러가지 투쟁형식으로 광복운동을 활발히 벌린 반면에 반도 본토에서는 또 많은 친일분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이 전패하게 되자 잃었던 땅은 되찾았지만 미국과 쏘련의 세력범위 쟁탈에 말려들어 반도는 그만 《한국》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한국과 조선은 같은 겨례이면서도 민족의 공동한 리익을 돌볼사이 없이 서로 자기의 상전국의 리익을 위하여 원쑤가 되여야만 하였다. 민족이 약소했기때문에 어쩔수 없이 당하게 된 또 하나의 치욕의 력사였다.   1950년, 반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그 전해에 금방 건립된 새중국 정부에서는 나라의 동북변경이 미국의 엄중한 위협을 느끼게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중국 정부에서는 한창 열기를 띤 대만수복 전역을 단연히 중단하고 군대를 돌려 조선에 파병하여 세계 초대강국인 미국과 정면대결하게 되였다. 그당시 한국의 리승만정권은 미국의 부축을 받아 건립된 정권이였기 때문에 미국의 동맹국 련합군에 편입되여 중국군과 대전하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한국과 중국은 서로 적대국가로 되였던 것이다.   1953년 휴전이후 한국 내부에서는 그칠새 없는 당파싸움으로 나라경제가 억망진창으로 붕괴의 변두리에 몰리게 되였으며 그렇다고 미국 어른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엄청난 희생을 낸 한국 국민들에게 별로 혜택을 주지도 않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당시 조선에서는 구소련과 중국의 지지에 힘입어 절대적 권위를 수립한 김일성 주석이 이미 안정된 나라환경에서 《천리마 운동》이라는 나라적 경제운동을 벌려 조선의 경제를 《세상에 부럼 없어라》하고 자랑할 정도까지 발전시켰다.    1962년 한국에서 쿠테타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비록 정치상에서는 군사적 독재통치를 실시하였지만 장기간의 간고한 모색을 통하여 한국의 경제를 살려내는 길을 찾아냈으며 《새마을 운동》과 같은 전민적 경제살리기 운동을 발기하고 대담한 경제개혁을 실행하여 한국의 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의 궤도에 올려 놓았다. 지난세기 70년대부터 한국의 경제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였는데 그때로부터 한국 국민들의 민족정서는 점차 열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80년 5.18광주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선후하여 전두환, 로태우를 대표로 하는 극단적인 군사적 독재정권이 련속 집정하면서 정치상에서 한시기 심한 진통을 겪기도 하였지만 1988년 성공적으로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한국의 경제는 일약 세계 선진국 행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한국 국민들은 세계에 대하여 진일보 인식하게 되였으며 이때로부터 한국 국민들에게서는 군사적 독재통치를 반대하고 전민적 참여정치를 제창하는 한국식 민주의식이 산생하기 시작하였다.    1991년 쏘련의 해체와 더불어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고 랭전이 끝나면서 세계의 자본체제의 나라들에서는 전례없는 정치, 경제의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이런 세계적 대 기후에 힘입어 한국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였으며 한국 국민들의 민주의식과 민족정서는 전례없는 고조를 맞이하게 되였다. 세계의식이 크게 제고된 한국국민들은 자기민족의 약소함을 통절히 느끼게 되였으며 1990년의 독일통일에서 희망을 보아내고 반도의 남북통일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이와 반면에 조선에서는 엄중한 국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장기간 조선의 번영발전의 보장이였던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면서 조선은 갑싼 에네르기와 생산자료 공급기지를 잃게 되였으며 조선산품을 수출할 국제 시장을 잃게 되였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서거를 계기로 조선에서는 암울하고 혹독한 《고난의 대행군》을 시작하게 되였다.   중국에서는 일찍 1966년부터 시작하여 10년을 지속된 문화 대혁명으로 하여 나라의 경제가 거의 붕괴의 변두리에 이르게 되였었다. 1976년 모택동 주석의 서거를 계기로 사인방이 잡혀 나오고 이미 타도되였던 등소평이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부터 1978년에는 정식으로 개혁개방 방침을 제출하고 나라의 대문을 세계에 향하여 서서히 열기에 이르렀다.   1989년에 천안문 학생사건이 일어나자 등소평은 중국 실정에 맞지않는 서방 민주사조를 과단하게 진압하면서 성공적으로 나라의 분렬을 방지하였고 성공적으로 세계적 사회주의 위기로부터 오는 거센 충격을 격퇴시켰다. 이리하여 이미 10년이나 탐색하여온 개혁개방의 대문을 더욱 자신있게 더욱 크게 열수있게 되였다. 효과적인 경제정책으로 10억 인구의 먹는 문제가 해결되자 중국에서는 더욱 대담하게 더욱 크게 경제개혁과 정치체제개혁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경제비약의 고속도로를 수건하기 시작하였다.   랭전시기 중국과 한국은 40년간이나 서로 적대국가로 지내오면서 래왕이란 거의 없다싶이 되였었다. 랭전이 끝나고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실시하게 되면서부터 중국에서는 경제가 단시기내에 기적적으로 발전한 한국을 아주 신비하게 생각하였으며 그 발전비결을 몹시 알고싶어 하였다. 한편 한국인들은 여태까지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던 중공이 옆에서 서서히 부상하여 일어나는것이 두렵기도 하고 또 호기심도 나서 여러 방면으로 시탐하던 끝에 1992년 정식 수교하기에 이르렀다.   한중수교가 이뤄지면서 대량의 한국인들이 중국에 건너와 기업을 꾸리고 장사하게 되면서 중국에서 선진국 우대를 받으면서 재록신으로 떠받들기우는것이 한없이 즐거웠고 중국의 너무나 값싼 인건비에 한없이 즐거웠으며 중국의 너무나 방대한 시장에 한없이 즐거웠다. 그시기의 한국인들의 심정은 마치도 매장량을 가늠키 어려운 대형 금광이라도 발견한 심정이였을 것이다.   중국에 와서 자기민족의 우월감을 한껏 맛본 한국인들은 자연히 구세주의 안광으로 중국조선족 겨례들을 살펴보게 되였다. 자기들의 표준으로 대비해 보니 중국조선족 겨례들의 생활이 너무나 비참하다고 느낀 그들은 갖은 방법을 대여 중국조선족 겨례들을 한국에 건너가서 돈벌이 할수있게 조건을 마련하였다. 그때는 아직 중국이 WTO에 가입전이였으니깐 미국돈 한딸라에 인민페 10원까지 바꿀수 있었으므로 한국에 가서 일하여 가장 낮은표준으로 로임을 받는다 하여도 중국에서의 거의 10배에 해당되는 수입으로 될수있였다. 그후 중국조선족 겨례들의 한국에 건너갈수있는 정책성 제한이 많이 풀리고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한국에 가서 일하는것이 중국조선족 겨례들의 가장 선호하는 치부도경의 하나로 되였다.   중국경제의 발전질량이 높아감에 따라 중국에서는 점차 외국 투자인들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으며 시장관리가 보다 엄격하여졌다. 그리하여 적은 투자로 또는 총명한 머리만 가지고 중국에 와서 크게 부자되여 보자던 많은 한국인들의 꿈은 박살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필경 한국이 아니니깐 한국인들은 중국에 와서 많은 제한을 받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꿈이 깨진 한국인들은 자기들에게는 이렇게 큰 나라가 없는것이 한없이 원통하였을 것이다.    전례없이 팽창되여가는 민족의 정서에 만족을 주기 위하여 한국의 일부 소장파 학자들은 민족의 력사에서 가장 강성했던 시대를 찾게되였다. 당연히 고구려가 지목되였다. 그들은 갖은 방법을 다하여 고구려의 력사를 위대하게 부각하고 신비하게 미화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민족에게도 일찍 이렇게 강성한 시대가 있었다.》하고 민족의 자부심을 가질수 있었으리라. 심지어 일부 극단적인 한국인들은 앞으로 방법을 대여 옛고구려 땅을 중국으로 부터 되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1999년 좌우, 원래 한국에 대하여 료해가 깊지못했던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한국의 급속히 팽창되여 가는 민족정서에 깜짝 놀라면서 부랴부랴 고구려사 연구를 시작하게 되였다. 이렇게되자 한국의 학자들은 더욱 긴장해 하면서 락후하던 중국이 놀라운 속도로 강대하게 부상해 일어나는데 대한 우려로부터 《중국이 이제 강대하게 되니까 자기의 전략적 수요에 의하여 동북아의 력사를 다시 쓰려 하는것이다.》라고 추측하게 되였던 것이다.   2002년, 한국학자들이 우려하던 일이 끝내 발생하였다. 그해 6월24일 중국 지식계의 주류신문인 《光明日报》에서는 《边众》이란 필명으로 《고구려 력사연구에서의 몇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이라는 제목의 문장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고구려 정권의 성질은 반드시 중원왕조의 제약과 지방정권의 관할을 받은 고대 변강민족 정권이라고 해야한다》. 그러면서 문장은 반도력사에서 왕씨고려의 국명은 전략적 목적으로 중국 고대 변강력사상의 고구려의 국명을 도용한것이며 그후의 리씨조선의 국명은 역시 전략적 목적으로 중국 고대 변강력사상의 기자조선의 국명을 도용한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관점은 즉시 한국 학술계의 드센 반발을 일으켰다. 서울대학의 이성규 교수는 강한 분개를 표시하면서 문장을 발표하여 제출하기를 《만약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발해등 력사가 모두 중국 소수민족 력사가 되여 력사의 일부분에 편입된다면 가능하게 한국사는 중국에 흡수되지 못한 한갈래의 지류에 불과하게 되며 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야만적이고 락후한 군체의 력사로밖에 될수없다》. 심지어 한양대학의 한 교수는 문장을 발표하여 중국의 행위는《력사 제국주의》행위라고 질책하기까지 하였다.   한국 학술계의 반발에 대하여 가장 먼저 성원을 보낸 매체는 한국의 《조선일보》였는데 그들은 사설을 발표하여 중국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를 《중국이 이렇게 하는 목적은 조선족이 거주하는 동북지구와의 관계를 다시 확정하고 거기에 근거하여 북한 지구에 들어갈 리유를 조작하려는 것으로서 고도의 전략의도가 숨겨져 있다》.   2003년 12월9일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고학회, 한국근현대사학회 등 17개의 학회에서는 서울 력사박물관에서 집회를 가지고 련합성명을 발표하여 중국에 엄정히 요구를 제출하였다; 《중국에서는 고구려사를 중국력사에 편입해 넣는 력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즉각 중지해야 한다》.   2003년12월12일 한국의 25명의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중국을 돈촉하여 력사의 왜곡을 정지시킬 결의안》을 제출하면서 한국정부는 반드시 중국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제출하여야 하며 조선과 손잡고 공동히 대응방안을 내와야 한다고 인정였다. 이 결의안은 기본상에서 한국 정부측의 긍정적 답복을 받았다.   2003년 12월13일 당시의 한국 국무총리 고건은 회의를 소집하고 중국이 동북지구의 고대사를 다시 연구하는 실정에 대처하여 한국에서도 《고구려사 연구센터》를 성립하여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공작을 가강할것을 결정지었다.   이기간 한국 각지의 여러계층에서도 여러가지 형식으로 집회를 가지고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성토하였으며 인테넷에서는 두나라 누리꾼들의 쟁론이 갈수록 치렬하고 거칠어만 갔다. 그리하여 2007년에 와서는 중국 창춘에서 열린 제6회 창춘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여자 5000m 계주 경기에서 은메달을 딴 한국팀이 시상대에 《백두산은 우리땅》이라는 문구를 들고 올라서기에 이른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한시기 한국인들을 엄중하게 자극했던 중국《동북공정》사건이다. 소위의 《동북공정》이란 중국의 한 학술연구 항목인 《동북 변강력사와 현상황에 대한 계렬연구 공정》의 간칭이였다. 《중국 사회과학원》과 동북 3성에서 공동으로 련합하여 진행하였는데  17명의 전문가들로 령도기구를 구성하고 2002년 2월에 시작하여 5년이 걸렸으며 연구자금이 인민페로 약 1500만원이 투입되였었다. 기본종지는 《중국 동북변강 력사상의 의심되는 문제와 리론상의 어려운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였었다.   중국의 동북지구는 그 지리적 위치가 특수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자고로 중요한 전략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지구였다. 1949년 새중국 성립 초기에 중국의 동북 지구는 중요한 공업기지로서 중국의 경제건설을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극히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된이래 전반 나라경제의 급속한 발전속에서 중국 동북지구에서는 새로운 문제들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례하면 광업도시의 자원고갈, 대량의 기업파산, 대량의 로동자실업, 경제장성속도 침체 … … 등이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중국정부에서는 《동북 로 공업기지 우대정책》을 제정하고 동북 로 공업기지를 신속히 부축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들을 전면적으로 연구하게 되였다.    《현실문제를 철저히 해결하려면 력사문제도 반드시 명확히 해야 한다.》는 많은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여 중국정부에서는 여러부문의 론증을 거쳐 방대한 계렬 연구항목인 《동북 변강력사와 현상황에 대한 계렬연구 공정》을 비준하였다. 그당시 동북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연구경비를 자체로 해결한다는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국무원의 비준을 받고 중앙재정에서 그 연구경비를 해결하여 주었던 것이다.     소위의 《동북공정》은 방대한 계렬 연구항목으로서 그의 연구범위는 중국 동북지구의 원시사회로 부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반 력사였다. 많은 한국학자들은 중국의 소위의 《동북공정》은 주요하게 고구려의 력사를 대상하는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실 고구려의 력사는 전반 《동북공정》의 한 부분일 따름이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 책임자의 한사람이며 《중국 사회과학원 중국 변강사지 연구중심》주임인 厉声은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일련의 관점을 발표하였다:   고구려는 대략 기원전 37년 좌우에 건국되였는데 초기의 수도가 지금의 중국 辽宁省桓仁县五女山城이였다. 고구려 본신은 원래 유목민족이였는데 싸움에 능하였으며 력대의 중원정권과 조선반도 남부의 정권과 싸움이 빈번하였다. 강성기에는 동쪽으로 료동까지, 남쪽으로 지금의 조선 평양까지 지역을 넓혔다. 기원427년에 수도를 평양 대성산으로 옮겼다.   기원 668년에 당조군대와 신라군대가 남북협공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그후 전체 고구려 민족은 점차 중원의 당인이나 지방의 다른 민족에 융합되여 버렸다. 이것이 중국 력사상 유명한 “薛仁贵东征” 이다. 당조에서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립하고 원래의 고구려 지역을 관리하게 되였다.   고구려의 옹근 700년 력사에서 400여년은 수도가 지금의 중국 경내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 중국의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고구려를 중국 고대 변강의 한 소수민족 정권으로 인정하는데 적어서 기원 427년에 수도를 평양에 옮기기 전까지는 론쟁할 나위도 없이 중국 변강력사의 일부분이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중국 송조때에 편찬된 《旧五代史·高丽传》이후의 많은 사서들 중에서는 고구려와 고려가 정확히 구분되여 있지 않으며 고구려와 200년후의 고려를 서로 혼돈한 경우가 많다. 비록 《明史》이후에 와서 다시 구분되여 있기는 하지만 근대에 와서 한국의 많은 학자들은 이런 혼돈된 중국사서의 기록들을 근거로 삼고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정권이라고 론증하면서 고구려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한국력사의 한부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의 학자들은 대량의 력사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연구 분석한 기초상에서 지리위치, 가족, 성씨, 혈연관계 등 그 어느방면으로부터 찾아 보아도 고려왕과 고구려왕과의 그 어떤 계승관계를 찾아 볼수 없으며 원래 조선반도 남부의 신라의 장군이였던 고려태조 왕씨가 200여년 전의 중국 동북지구의 고구려를 계승할수 있었다는 그 어떤 합리성도 찾아볼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지금 중국 학자들을 가장 피동에 빠지게 하는 문제는 새중국이 건립된 초기에 중조 두나라의 특수한 정치관계로부터 출발하여 필요한 학술연구도 없이 전통인식에 의하여 고구려가 당연히 조선의 력사라고 인정되여 왔으며 그후 곽말약이나 범문란과 같은 주류 력사학자들의 저서에서도 고구려의 력사가 줄곧 세계사의 일부분에 편입되여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정치인소가 일체를 결정하였으므로 그 어떤 다른관점이 있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지난세기 60년대에 중조 두나라가 공동히 중국 동북지역에서 련합 고고발굴을 두번이나 진행하였었는데 발굴된 고구려의 문물을 모두 조선측에 넘겨 주었던 것이다.   고구려사 문제에 들어가서 조선과 한국은 언제나 고도로 통일된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이번 고구려사 쟁론도 원래는 중국과 조선간의 력사문제로서 한국과는 나라적으로 아무런 상관도 없었지만 한국이 도리여 주인공으로 나서서 중국 학술계와 정면대결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력사상 고구려사 문제를 가지고 제일먼저 중국과 시비를 건 나라는 한국이 아니라 지난세기 20년대 전후의 일본이였다. 그당시 일본은 조선반도를 성공적으로 병탄하고는 진일보로 중국의 동북지역을 넘겨 보면서 고구려사 문제를 가지고 영구점령의 리유를 만들려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고구려사에 대한 관점은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 책임자의 한사람이며 《중국 사회과학원 중국 변강사지 연구중심》주임인 厉声이 중국 학자들의 고구려사에 대한 최신연구에 근거하여 발표한 관점이다.   고구려사에 대한 쟁론에 관하여 厉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그들(한국의 유관 학자들)과 쟁론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원래의 학술연구 부서에 따라 연구를 진행해 나갈것이다》. 그는 비교적 락관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이번 쟁론이 진일보 엄중해 지지는 않을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한방면으로 중국 학술계에서는 절때 주동적으로 쟁론을 일으키지 않기로 결정지었고 다른 한방면으로 한국의 대다수 학자들도 보편적으로 랭정을 지키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비교적 영향력 있는 몇개 주류 학술단체에서는 고구려사문제 항의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 《조선일보》의 한 기자는 한국측에서도 고구려사 문제에 대하여 반드시 랭정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중공 중앙당교의 张琏瑰교수는 이번에 고구려사 문제가 또다시 쟁론이 일게 된것은 주요하게 일부 한국학자들의 오해와 의심, 그리고 근거없는 추측때문이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张琏瑰교수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의 력사문제는 순수한 학술문제이며 력사문제이다. 그런데 만약 이 문제가 고대 중조 변경문제로 번지여 가면서 오늘의 변경문제로까지 발전한다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 지게된다》. 즉 고구려사 문제를 영원히 학술문제의 차원에 국한시키며 절대로 정치문제로 승급시키지 않는다는 립장이다.   张琏瑰교수의 관점에 의하면 고구려사 문제의 쟁론이 학술령역에서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만약 이 쟁론이 정치령역에까지 확대된다면 그때가서는 아주 위험하게 된다. 만약 지금 쌍방에서 모두 억제하지 못하여 일단 이 문제가 정치 층면에까지 올라가는 날에는 중한 량국관계에 극히 불리하게 된다. 그러면서 张琏瑰교수는 《동북아의 큰 국세에서 이미 조선의 핵문제,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징조 등 아주 불온정한 인소들이 존재하였지만 중한 량국관계에는 아직까지 원칙적인 큰 분기가 없었으므로 많은 문제상에서 능히 호상 리해하고 서로 합작할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한국과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고구려를 자기들의 옛조상의 나라로 숭배하여 왔으며 국제상에서도 이미 보편적으로 공인하고 있는 형편이였다. 력사의 진상이야 어떻던지간에 한국은 인젠 고구려와 절때 갈라질수 없는 존재로 되여 있었다. 만약 한국이 고구려를 잃는다면 그것은 세계에 향하여 자기는 조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야만민족이라는것을 승인하는 것으로 되기때문에 이미 세계의 선진민족으로 자부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이런 수치를 절때 받아들일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한국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중국의 신화가 깨여지고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인테넷에서 중한두나라 누리꾼들 사이에서부터 치렬한 쟁론이 벌어지게 되면서 한국사람들의 반중국 정서는 점차 전국의 범위에로 확대되여 나갔다. 사태의 엄중성을 느낀 중국의 학자들은 분분히 담화를 발표하여 중국이 고구려 력사를 다시 연구하게 된것은 순수한 학술문제로서 절때로 정치문제가 아니고 절때로 현실문제가 아니며 절때로 쟁론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재삼 천명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대한 모욕감을 느낀 한국사람들은 중국에 대한 혐오감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으며 중국이 력사가 길고 나라가 크다는 턱을 대고 한국을 업신본다고 인정하였다. 한국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대여 소위의 “중화문명”에 대하여 험담하기 시작하던 데로부터 점차“중화문명”의 뿌리가 원래는 한국이라고 억지부리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무슨 한국에서 연구해본결과 공자도 알고보니 원래는 한국혈통이였고 리시진도 한국혈통이였으며 천문의는 한국에서 발명하였으며 활판 인쇄술도 한국에서 먼저 발명하였으며 심지어 갑골문도 기실 한국혈통의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고 하면서 소위의 “중화문명”을 송두리채 몽땅 빼앗을 태세였다.   일이 이쯤 되자 장난치기 좋아하는 일부 중국 누리꾼들은 인테넷에 댓글을 발표하여 “한국에서 연구 고증한데 의하면 중국의 손중산도 원래는 한국혈통이였고 장개석도 원래는 한국혈통이였으며 모택동도 원래는 한국혈통이였다. 그리고 인류가 살고있는 이 지구도 알고보니 기실 한국에서 만든것이였다.” 하고 날조하면서 한국을 비꼬았다.   2008년3월14일 중국서장에서 분렬주의 폭도들을 진압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찍부터 중국을 곱지않은 눈으로 보아온 서방의 매체들에서는 또다시 인권무기를 들고나와 중국을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의식형태 방면에서 언제나 서방과 고도의 일치성을 확보하여온 한국이였기에 중국에 대하여 통쾌히 보복할수 있겠다고 인정한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힐 리유가 없었다. 한국의 여러 매체들에서는 일제히 중국에서 군대를 풀어 티벳 민주주의자들의 평화시위를 류혈진압했다고 보도하면서 여러가지 형식으로 중국의 소위의 독재주의 행위에 대하여 강력히 비난하였다.     2008년4월27일 북경 올림픽 성화봉송이 한국 서울구간을 지나는 기회를 타서 한국 각 계층에서는 제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심지어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번 기회에 중국에 대하여 한국의 일부 정치적 주장을 제출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한국 서울에서는 올림픽 성화봉송을 에워싸고 중국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2008년5월12일 중국사천문천에서는 8급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중국정부는 전국에 호소하여 전면 재해복구와 지원에 나섰으며 재해지구에 대한 채방과 보도에 대하여 세계에 완전개방을 실시하였다. 뒤이어 세계적으로 중국을 위문하고 중국을 지원하는 열조가 일게 되였다. 한국에서도 대통령을 포함하여 여러 지명인사들이 직접 지진피해지역을 찾아 위문하고 거금을 기부하였으며 한국의 지원봉사대도 지진피해지역에 파견되여 중국의 지진재해 구조를 돕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중국사람들은 국난속에서 한국의 선량함을 보아내고 한국에 대하여 아주 고맙게 생각하게 되였으며 한국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아지게 되였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을 고험하는 관건시각에 책임지지 못하는 일부 한국의 누리꾼들은 인테넷에 또 가증스러운 댓글을 올려 “중국이 서장문제로 하여 천벌을 받았다”고 절규함으로써 많은 중국사람들의 지대한 분노를 야기시켰다.   2008년8월 북경 올림픽 개막식을 앞두고 한국의 SBS텔레비 방송에서는 국제 규례를 어기고 올림픽 개막식에 있게될 성황들을 앞당겨 일부 공개함으로써 또 한차례 중국사람들의 분노를 야기시켰는데 중국사람들 중에서는 신의없는 한국매체의 올림픽대회 중계권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이렇게 되여 8월8일에 정식 개막된 북경 올림픽대회 기간에 중국의 관중들은 한국의 관중들이나 한국의 운동원들에 대하여 어느정도 혐오를 느끼게 된것이다. 중국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을 언제나 자고자대 할줄밖에 모르는 실속과 신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하였다.   한국이 중국 민심으로부터 랭대를 받게 되면서 중국의 광대한 시장을 대상하고 중국에 와서 자리잡은 한국의 적지않은 대형기업들까지 그 영향을 받게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 와서 기업하면서 중국의 실정에 대하여 비교적 료해하고 있는 한국의 기업인들은 분분히 국내에 여러가지 형식으로 멧세지를 보내여 한국에게 있어서 중국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설명하면서 한국의 민중들과 누리꾼들에게 좀 자제해 줄것을 간곡히 요구하였다.   2008년8월25일 중국의 국가주석 호금도는 북경올림픽을 결속짔자마자 한국을 방문하게 되였는데 두나라 정상들은 두나라 관계를 “전략적 협조동반자 관계”로 부상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로부터 볼수있는바 한중 두나라 정부차원에서는 관계가 여전히 아주 정상적으로 발전하고 있는것이다.   전략적 차원에서 중국은 한국에게 있어서 기실 미국과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이다. 한국도 중국에게 있어서 지구 안정을 유지하는데 아주 중요한 존재이다. 중한 민간에서 벌어진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인젠 막을 내렸으면 좋겠고 두나라의 정상관계에까지 영향주는 일은 절대로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3    중국 조선족 장례문화가 나라의 보호를 받기까지 댓글:  조회:4519  추천:1  2012-07-25
중국 조선족 장례문화가 나라의 보호를 받기까지 성원작성   1, 1966년에 시작된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 장례제도를 실행하였다. 마을마다 丧舆契와 같은 민간 상조 조직들이 있었으며, 집체로 자금을 내여 丧舆를 만들어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편벽한 곳에 상두막을 지어놓고 보관하였으며 도감을 한 사람 선발하여 마을의 장례행사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일단 마을에서 사람이 죽게되면 굴심을 할 사람과 상여, 그리고 상여를 멜 사람들까지 통일적으로 배치하였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은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문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도록 보증 하였다.   2,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조선족 전통문화에서 제일 먼저 재앙을 당한것이 상여이다. 1967년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하는 운동이 터지면서 연변각지의 상여는 거의 같은 시간에 각지의 반란파들에게 의하여 학교마당에 끌려나와 두들겨 부서지고 모조리 불타 버리고 말았으며 조선족 장례문화는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후에는 간단한 운구용 소수레로 상여를 대체하고, 장례제도를 최저한도로 간단하게 하였으며, 일체 소위의 봉건색채를 띤 장례 절차를 일률로 금지하였다. 그후로 부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점차 빛을 잃게 되였다.   3, 문화혁명이 결속된후, 80년대부터 시작하여 나라에서는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모두 유체를 화장 할것을 제창하였다. 초기에 대부분 조선족 주민들은 감정상에서 일시 이렇게 화장하는 장례제도를 접수하기 어려워 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1985년에 국무원 에서는 《빈장관리에 관한 잠행규정》을 내오고, 1997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빈장관리 조례》를 출범 시키면서,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유체를 화장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면서도 《조례》의 총칙 제6조에는 《소수민족의 장례풍속을 존중하며, 자원적으로 장례풍속을 개혁하려는 것을 타인은 간섭하지 못한다》고 특별히 규정하여 놓았다.   4, 지난세기 80년대부터 시작하여 연변에서도 정부의 엄격한 통제하에 연길부터 시작하여 장의관을 건설하고 화장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그당시 연변의 유관 책임자들은 장례풍속 개혁방안에만 중시를 돌리고 연변은 조선족 자치주로서 조선족 장례풍속중의 부분적인 건강한 내용은 반드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것을 제출하는 사람이 없었다. 국무원에서 《빈장관리 조례》를 출범시킨후 각 성,시,자치구로부터 각 지급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지역의 특수 실정에 따라 각기 자기 지역의《빈장관리 방법》을 제정하여 지역성 빈장관리 사업의 법률적 의거로 삼았다. 하지만 연변은 오늘까지도 자기의 《빈장관리 방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연변의 빈장관리 사업은 줄곧 조선족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는 《길림성 빈장관리 방법》에 기준하여 진행될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연변의 4대 장의관에서는 조선족들을 위하여 따로 설치한 장례시설이라곤 한가지도 없으며 장의관의 여러가지 복무항목중에도 조선족 장례풍속에 관한 내용은 한가지도 없다. 이것이 조선족 장례문화가 사회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오늘처럼 거의 근절의 위기에 처하게 된 근본원인이다.   5, 2005년에 국무원 반공청에서 무형문화재에 대한 보호공작을 가강할데 관한 의견을 반포하면서 중국의 무형문화재 등록 공정이 시작되였다. 2009년에 연변에서도 무형문화재 등록 공작이 시작되였는데 현성원 선생은 워낙 조선족 장례풍속중의 《銘旌》을 무형문화재로 신청하였었다. 그후 현성원 선생은 연변주 문화국의 제의에 근거하여 신청내용의 범위를 넓히여 전반 조선족 장례풍속을 취급하기로 하였으며 천수산 등 로일대 민속학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중의 가장 주요한 부분들을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정리하여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라는 이름으로 나라에 무형문화재로 신청하였다. 그리하여 당년 6월에 《조선족 장례풍속》이라는 이름으로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로 비준되여 잃어 버렸던 우리민족의 보귀한 장례문화를 다시 찾아 올수 있었으며 현성원 선생이 창립한 연변조선족 례의연구회가 보호책임단위로 지정되였다.   6, 연변조선족 례의연구회는 2009년10월16일에 성립된 이래 아래와 같은 중대한 행사들을 진행하였다. 첫째;  2009년에 《조선족 장례풍속》을 정부에 신청하여 주급과 성급의 무형문화재 자격을 쟁취하였으며, 길림성 정부로부터 《조선족 장례풍속》 보호단위로 지정되였다. 둘째;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발굴하고 연구한 기초상에서 현재 실행되고 있는 조선족의 장례 형식과 결부시켜 《조선족 장례, 제사 지도서》(시행본)를 편찬하였으며 지금 진일보 완미시키는 과정에 있다. 세째; 2010년 12월 14일, 연변주 문화국의 지도하에 《조선족 장례풍속》세미나를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주민정국, 주위생국, 주교육국, 연변대학, 연변병원, 연길장의관, 등 20여개 부문과 단위에서 참석 하였으며, 지명도 높은 민속학자들과 유관부문의 공작인원들이 참석하여 여덟편의 론문을 발표하여 《조선족 장례풍속》을 보호하는 적극적인 의의와 그 합리성을 론증하였다. 네째; 신문, 방송, 텔레비, 인테넷 등 매체를 리용하여 정기적으로 조선족 민속문화 강연을 진행하고 있으며, 연길시 문화부문과 여러 가두판사처의 요청에 의하여 각 사회구역에 내려가 조선족 민속문화 순회강연을 이미 10여차례 진행하였다. 다섯째; 《조선족 장례풍속》을 보호하는 사업에서 효과적인 경험을 모색하기 위하여, 2010년3월29일 주공상국에 《백화상조 (장례) 복무중심》을 등기하여 설립하였으며, 무릇 조선족 장례와 상관되는 모든 행사에서 시험적으로 여러가지 형식으로 봉사를 제공하여 드리고 있으며 부단히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있다. 여섯째; 《조선족 장례풍속》을 보호하는 사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시키고 조선족 장례복무 사회기제를 건립하기 위하여 연변주 민정국에 《비기업단위》의 성질을 띤 《연변조선족 장례복무중심(연변조선족 빈의복무소)》설립을 신청하여 추진시키고 있다. 그 기본종지는 장례사무가 줄곧 가정을 단위로 하여 진행되던 락후한 사회현상을 타파하고 현대식 장례복무 사회기제를 건립함으로써 가정에 상사가 나면 전화 한통으로 전반 장례사무가 경제적이고도 민속적으로 원만한 해결을 보도록 하며, 조선족 장례문화를 책임성 있는 영구성 사회 복무기제에 맡겨 건강하게 집행되게 함으로써 조선족 장례문화가 이땅에서 세세대대로 존재하여 나가도록 보증하는 것이다. 일곱째; 2012년 6월, 현성원 선생은 연변조선족자치주문화국으로부터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의 代表性 傳承人 자격을 수여받았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반공실 제공 2012월 7월 5일
2    중국 조선족은 동화되는가? 댓글:  조회:5333  추천:2  2012-07-18
중국조선족 동화문제 중국조선족의 동화문제를 두고 맹목적으로 락관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리유는 제법 당당하다. 첫째, 구쏘련이나 일본 등의 나라에서는 강압적인 민족동화정책을 실시하나 중국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정책이 있다. 둘째, 중국조선족의 집거구는 대개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반도와 잇대여있으므로 본토와의 래왕이 잦고, 정치, 경제, 문화, 풍속 등 제분야의 영향을 끊임없이 흡수하게 된다. 셋째, 아세아지구에서 발달국의 하나인 한국과 중국과의 수교는 특히 중국조선족한테 주는 충격이 크다. 한국의 발전된 경제와 문화의 영향은 중국조선족을 승화시킬수 있는 중요한 외적 요인의 하나이다. 이상의 관점은 전연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기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며 현상만 보고 실속을 못보는‘아Q’식 자아도취의 사유에 가깝다고 하겠다. 중국조선족의 동화는 시간문제일따름이다. 력사가 이런 대답을 주고있는것이며 오늘날 중국조선족이 처한 환경, 즉 중국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제요소가 그것을 제시해주고있다. 1. 중국조선족은 누구인가? 13억을 헤아리는 중화민족이라는 망망한 대해속에서 한방울의 물이나 다름없는 조선족은 구경 누구인가? 1986년 중국조선족 력사학계의 권위인사들이 공동집필한『조선족략사』에서는 조선족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있다. 우리 나라의 조선족은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다정한 이웃나라 인 조선으로부터 이주해온 위대한 민족이다. ……1845년 이후에 두 나라 정부의 봉금정책이 완화되면서 강을 건너와 사사로이 땅을 개 간하는 사람이 급속히 증가되였으며 따라서 조선변강의 백성들이 대량적으로 우리 나라 동북에 이주하여 정착하게되였다. 중국의 조선족을 19세기 중엽부터의 순이주민으로 간주하고있는 이 론법은 력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맞지 않는다. 조선족의 월강이주력사는 19세기 중엽부터인것이 아니라 시간을 훨씬 소급하여 내려갈수 있다. 리조시기 동지중추원사 양성지(同知中樞院事 梁城之)가 1464년에 국왕한테 올린 상소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신이『료동지(遼東志)』를 보니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고려인 은 홍무년간(洪武年間)에 3만여인이요. 영락(永樂)때 미쳐서는 4만 여인이다. 오늘 료동에서 사는 고려인은 열에 셋이며 서로는 료양 (遼陽), 동으로는 개주(開州), 남으로는 해개제주(海盖諸州)에 이르 기까지 분포되여있다.(朝鮮李朝世祖實錄 卷 34) 『료동지』는 영락 16년(1418) 명성조(明成祖)의 “천하의 군현지서를 만들어 올리라”는 어명을 받들어 한것이니 조선인은 적어도 영락10년(1412) 이전에 벌써 료동인구의 중요한 구성부분이였음을 말해준다. 당시 조선인의 이같은 인구의 래원은 원, 명의 폭력강제수단에 의해 잡혀온 포로와 리조의 부패통치, 편벽한 서북변강의 환경에 의해 생계를 유지할수 없게 된 변민들이 스스로 살길을 찾아 이주한것이다. 이같은 력사의 이주흔적을 오늘 우리는 료녕성 개현 박가구, 본계현 박보촌, 봉성현 북산촌과 서가보, 길림성 서란현 박가툰 등지에서 찾아볼수 있다. 오늘의 중국조선족은 이러한 시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여야 할 줄로 안다. 중국의 조선족은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온 이주민으로서 선조의 정기를 발굴하고 창발하여 력사의 맥을 이어가는 위대한 민족이다. 비록 본토에 남은 유민들은 벌써 다른 민족으로 동화되였지만 조선반도로 넘아간 고구려, 발해민들은 순수한 우리의 민족으로 대를 이어왔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견지에서 오늘날 중국조선족의 선조의 피와 정기를 받지 않았다고 부정할 리유는 추호도 없다. 고조선으로부터 부여, 고구려, 발해에 이르는 장장 2천여년동안 조선족 선조들은 광활한 동북땅을 개척하고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부여의 고조선 유적, 환인, 집안 등의 고구려유적, 녕안현의 발해촌, 돈화, 화룡, 훈춘의 발해유적들에서는 력사의 거창한 맥박이 박동치고있다. 따라서 1895년 조•중간의 봉금정책 이후를 조선족의 순이민기로 잡고있는 『조선족략사』는 중국조선족의 성질을 규명함에 있어서 력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기를 도외시하고있는것이다. 민족의 력사는 우리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창조하는 거울이며 민족정기는 민족자부심과 민족의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의 주요한 원천이다. 그 어떤 민족이든지 민족의 객관적 요소보다도 더욱 중요한것은 민족자부심과 자각이다. 만약 그것을 잃는다면 민족의 단합과 발전은 운운할 나위가 없다. 2. 중국조선족은 동화되는가? 민족구성요소중 가장 중요한것은 국토와 주권이다. 만일 국토와 주권을 잃게 되면 기타의 경제, 문화, 언어, 문자가 유린당하고 민족정기를 발동할수 없게 된다. 반대로 국토와 주권을 얻게 된다면 잇따라 경제, 문화와 언어문자가 수립될수 있어서 민족정기를 떨치게 되는것이다.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2천년간 우리의 선조들은 광활한 국토와 주권을 가졌으므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하지만 667년 라당련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망하고 926년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된 이후 국토와 주권을 잃은 백제, 고구려의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포로로 잡혀갔다. 인신의 자유를 잃은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청나라시기 조선의 포로를 매매하던 정경으로 미루어 가히 추측할수 있다. 이같이 인신의 자유가 없는 노예로 된 포로들은 부득불 동화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당서•고려전(舊唐書•高麗傳)』에 의하면 광활지로 강제 이주당한 고구려의 포로중 일부는 그후 료동으로 도로 나왔지만 절대 다수는 중원과 서북일대에서 분산되여 한족(漢族) 또는 기타 민족과 잡거하고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다른 민족으로 동화되였다고 씌여있다. 발해는 문화수준이 높고 민족의식이 강했는바 멸망된 이후에는 여전히 한개 민족으로서 그후의 금, 료에서 활동하였으며, 원조에 가서야 비로소 력사상에서 흔적을 감추었다. 그들은 동화되지 않기 위하여 발해인 내부의 대가들사이에서 통혼하는 습속을 보존하여 발해인 내부혼인을 견지하는것으로써 타민족의 속성침투를 방지하였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를 꽃피울수 있는 국토가 없고 그것을 담보하는 주권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방법이든지 통할 수가 없다. 명청시기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온 조선민족 후예들도 오늘날 호적엔 조선족이라고 적혀있지만 실질상으로는 동화된것이나 다를바 없다. 어떤 학자들은 개현 박가구, 본계현 박보촌, 서란현 박가툰 등지의 박씨들을 동화되지 않은것으로 보는 폐단도 있지만 그것은 그릇된 관점이다. 아래서 간단히 분석해보자. 혼인례의 방면; 이 세 박씨촌 한족 녀인들은 모두 종발이였으나 박씨 녀인들은 종래로 천족이었다. 서란현 박씨집에 시집온 70세의 한족 할머니는 박씨집에서 동지날에 오그랑팥죽을 먹었다고 했다. 이 세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개고기도 즐겨 먹는다. 그런데 지금 박씨들은 오그랑팥죽이 아니라 교즈를 먹고있다. 그리고 한족들도 개고기를 먹지 않는것이 아니며 지금 박씨들이 개고기를 먹는 방법도 우리 조선족과 틀리다. 또한 박보촌의 박씨들은 삼일장을 고수하고있다. 해방전까지 장례축문의 첫 구절이“당나라 백만인마가 침입하매 개소문이 그것을 격퇴하매……”로 되여있다. 하지만 오늘의 박씨들은 복장이 한족과 다름 없고 “당나라 백만대군이 입침하여 개소문이 이를 격퇴하여……”도 쓰지를 않는다. 그런데 왜 한족으로 되여있던 호적을 조선족으로 고쳤는가? 1989년 7월 개현 박가구에 가서 취재하던 중 필자는 그들의 의식속에서 한가닥 민족의 정기를 보았다. 그들은 해방전부터 줄곧 한족이나 만족으로 호적을 올렸는데 개혁개방이 되면서 자기들의 원 모습을 찾을 욕망이 일어났던것이다. 조상의 피도 속이지 않고 또 소수민족으로서 우대도 받게 되니 그야말로 일거량등이였던것이다. 이미 동화된 고대의 조선족과 현실의 박씨 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아래와 같은 동화법칙을 도출할수가 있다. 첫째, 국토와 자주권이 없는 민족은 필연코 동화된다. 둘째, 민족의 구성요소중 경제, 문화의 동화보다 언어와 풍속습관의 동화가 늦다. 셋째, 민족동화에서 최후의 보루는 관념동화이다. 박씨, 문씨, 서씨들은 이미 언어, 문자, 경제, 문화 등에서 완전히 동화되였고 풍속습관도 거의 몽땅 동화되였지만 관념상에선 아직도 동화되지 않고있다. 관념이란 곧바로 민족정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중화민국시기 개현의 박가구에서 사는 한족 형씨(邢氏)들이 마을 이름을‘형가구’로 고치려고 했을 때, 박씨들은 한결같이 일어나 관부에까지 찾아가서 고발하여 끝내 마을이름을 지켜왔던것이다. 이미 완전히 동화된것이나 다름없는 박, 문, 서씨들이 10여년 전에 갑자기 조선족으로 등록한 사실도 관념동화의 어려움을 말해주고있다. 관념상 그들은 미처 동화가 되지 않고있다고는 해도 조선족으로서의 갖추어야 할 구성요소를 잃었으므로 사실상 온전한 민족이 아니다. “비록 민족이라는 껍질과 생명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한무더기의 시체나 고기덩어리에 지나지 않는것이다.”(박성수,『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16∼17쪽) 3. 동화와 반동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까지 수천년간 력대 중국정부는 약소민족에 대하여 무지하고 강압적인 동화정책을 실시해왔다. 조선민족도 례외가 아니였던바 백제와 고구려, 발해가 멸망된 후의 민족사는 피눈물로 얼룩져있다. 『구상서•고려전』에 보면 당나라가 료동을‘정복’한 후 관내 한족이 동북으로 천입한 것이 아니라 료동의 원주민들을 중원지구로 강제로 이주시켰던것이다. 포로된 임금과 왕자 등 귀족들은 중원으로 끌려간 후 외계와 단절된 련금생활을 해야 했고 기타는 마소같이 노예로 팔려갔다. 그들은 뿌리뽑힌 나무가 사막에 던져진 격으로 원래의 자기모습을 점차 빼앗기고 한족으로 변화되여갔다. 이같이 폭력에 의한 야만적인 강제동화는 온화한 문화적 동화정책에 비해서 동화시간을 대폭 줄일 수는 있을망정 더욱 거세찬 반항의 물결을 일으킬뿐이였다. 고구려와 발해민들은 반동화책략을 써왔던바 적극적인 방책과 소극적인 방책으로 갈라볼수 있다. 적극적인 반동화책략이란 잃었던 강토를 되찾아 다시 주권을 세움으로써 민족 자체발전의 원 토대를 수복하는것이다. 소극적인 반동화책략은 민족발전의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혈연연장으로 자기를 보존해가는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멸망된 발해인들이 발해인 내부의 통혼으로 타민족 속성의 침투를 방지하려고 시도했던것을 례로 들수 있다. 근대로부터 오늘까지 동화와 반동화투쟁은 세단계로 크게 나누어볼수가 있다. 첫째 단계; 청정부의 강압적 동화이다. 19세기 말엽 두만강, 압록강 이북지대로 조선민족들이 대량 월강하게 되자 청정부는 토지소유권 박탈로 강제동화를 시도했다. 그 구체적 수단은 치발역복(稚髮易服)이다. 당시 조선족들은 치발역복에 대하여 두가지 자세를 취하였다. 한부류는 민족의 절개를 지키고 끝까지 반항한 사람들로서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런 연고로 피땀으로 개간한 땅을 점산호한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되여 우마와 같은 생활을 해오지 않을수 없었다. 다른 부류는 솔선수범하여 치발역복하고 귀화입적하였다. 이부류는 또 다른 성질의 두가지 인물로 나뉜다. 화룡현 리영춘(李永春)은 치발역복 귀화입적하고 한족의 양아들이 됨으로써 대지주가 되여 같은 민족의 피를 짜먹는것을 락으로 삼았다. 이부류는 민족 반역자로서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헌 발싸개처럼 집어던진 자들이다. 하지만 양정학당의 창시자인 리동춘(李東春)과 같은 민족계몽운동의 선구자들은 반일구국의 책략으로 치발역복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조선민족이 귀화입적하여 토지를 소유하고 생업을 유지하는것으로써 간도땅을 반일독립운동의 기지로 만들려고 했던것이다. 당시 일제의 침략마수가 조선에 뻗쳤고 또 만주로 뻗쳐오는 시급한 상황에서 리동춘 등 계몽의사들의 귀화입적 방침은 적극적인 의의가 있다. 둘째 단계; 일제의 강압적 노화교육이다. 1932년 일제는 만주국을 세우고 식민지노화정책을 실시하였다. 1935년 9월 일제는『만주국교육방안』에서“재만조선인은 국제적 훈련이 결핍되고 도덕수양이 부족하다. 새로운 국가를 건립한 후 일본과 우리 국민지간의 융합은 상당히 어렵다. 조선민족은 새 국가를 건립한 후 일본과 우리 국민지간의 융합은 상당히 어렵다. 조선민족은 새 국가의 우환이 될것이다.”“조선인의 교육에 대해서는 동화의 방침을 실시해야 하는데 이를 만주국에서 담임하는것이 상책이다.”“간도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학교들은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의 어용도구였고 치안에 혼란을 조성하였으므로 엄격히 취제 또는 폐교시켜야 한다.”(『만주국교육방안』,재만조선인 교육개선안, 141∼166쪽)라고 하였다. 일제는 이같은 식민지노화교육 방침에 좇아 조선인 반일사립학교를 강제로 합병, 개편, 폐교시켰으며 반일애국사상이 있는 조선인 사립학교의 교직원과 학생에 대하여 엄격한 심사와 면직, 체포, 감금, 학살 등 야만적인 진압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전 동북에 조선인 학교가 도합 710개나 있던것이 1932년에 이르러서는 377개로 감소되였다. 길림성 조선인 사립학교도 308개(종교단체에서 꾸린 사립학교도 포함)였던데에서 1935년에는 231개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보통학교는 많이 늘어났는바 길림성에서 일제가 경영한 조선인 보통학교는 만주사변 전 45개로부터 1936년에는 76개였다.그리고 조선인 학교에서 조선력사교수를 폐지하고, 태극기를 걸지 못했고 조선애국가를 부르지 못했으며 일본어를 국어로 삼게 했다. 세번째 단계; 문화혁명시기 민족말살정책이다. 이시기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강압적 민족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사회주의나라에 무슨 민족의 불평등이 있는가”라고 하면서 민족문제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민족문제의 실질은 계급투쟁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시기는 민족이 융합되는 시기라는 관점을 내들고 소수민족한테 인위적이고 강박적인 융합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족은 기타 다른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 민족의 언어, 문자, 교육, 문화, 풍속, 습관 등 제분야에서 독립성과 특수성이 무시당하고 한족과 똑같은 통일성, 공통성만 강조하게 하였다. 일단 누가 상대적 독립성을 이야기하면 ‘지방민족주의분자’라는 감투를 쓰게 되였다. (1) 정치방면; 1966년 주신(모택동의 조카 모원신의 가명)이 오면서부터 연변은 대혼란에 빠졌다. 그는 권력쟁탈을 위해 조선족의 대표인물 주덕해를 ‘대반역자’,‘간첩’등으로 잡았고 층층에서“크고 작은 주덕해”를 타도했으며 무장소동이라는 억울한 사건을 조작하여 연변에서 전면적인 내전을 도발하였다. 당시 조선족은 국외와 사회관계가 있다면 무조건 ‘간첩’으로 잡혔는데 연변에서만도 수천명 간부와 군중이 생명을 잃었고 불구자로 되였으며, 수만명이 련루되여 심사를 당했다. (2) 경제 방면; 1967년과 1968년은 문화대혁명중 내란이 가장 심한 시기였고 전국적으로 국민경제가 가장 큰 파괴를 당한 시기였다. 조선민족경제도 이 두해사이에 아주 심한 파괴를 당했다. 공•농업생산 총액은 1966년에 비해 1967년에는 6.3%, 1968년에는 그 전해보다 9.4%내려가고, 재정수입은 14.6%, 10.5%내려갔다. 종업원 평균로임은 감소되였는바 1968년이 1967년보다 3.9% 내려갔다. (3) 언어 방면; 그들은 소수민족언어는 “쓸데없는것”이며 “까마귀소리 같다”라고 하면서‘조선어무용론’을 극력 고취하였다. 그 결과 사회상에서 조선어의 지위가 여지없이 떨어졌고, 연변의 통용어가 되지 못한것은 물론이고 회의에서도 통역이 없었고 문건을 내려보내도 역문이 없었다. 번역기구가 취소되고 조선어문연구기구도 없어졌다. 조선문 잡지는 거의 다 폐간되였으며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원고를 한문(漢文)으로 심의, 결정한다는 규정을 지은 다음부터는 원래의 조선말 신문과 방송이 번역신문, 번역방송으로 되였다. 심지어 도서관에서는 조선문도서를 없애려고까지 했다. 조선어를 혁명해야 한다는 구호밑에 한어는 조선어를 발전시키는 주요한 원천이므로 조선어를 한어와 같게 하는 방향에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조선어의 력사적 계승성을 무시하고 조선어발전의 내재적 합법칙성을 위반하면서 한어단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이 엄중했다. 동시에 한어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다. 도시와 향진(鄕鎭) 등 조건이 허락되는 곳에서는 될수록 자식들을 한족학교에 보냈다. (4) 교육 방면; 그들은 민족교육체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조선민족의 고급인재를 양성하는것을 취지로 하는 연변대학에 으뜸가는 목표를 두었다. 그들은“민족분렬주의를 실시하는 검은 거점”이라고 하면서 연변대학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교원과 학생의 민족비례를 뜯어고쳤다. 문화대혁명 전 연변대학 학생의 민족비례는 조선족이 80%이고 한족과 기타 민족이 20% 좌우였으나 문화대혁명기간에는 정반대로 되였다. 그리고 민족대학의 특성을 보여주는 학과목을 취소하였다. 문화대혁명 전 연변대학 력사학부에서는‘중국조선족력사’,‘조선근대사’등 학과목이 설치되였으나 이때는 취소되였다. 그리고 조선어 전공학과의 주요한 취지는 조선족 중학교의 어문교원을 양성하는것이였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 조선어 전공학과의 28명 입학생 중 조선족이 11명이였고 한족이 17명이였다. 한족이 조선어 전공학과에 들어오는것은 양성취지에도 맞지 않거니와, 조선어를 모르는 한족이 조선어전공학과에 와서 근근히 몇해 조선어를 배우고 조선족 중학교에 가서 조선어를 가르칠수 없다는것은 명백한 사실이였다. 한족학생이 부쩍 늘어나는 바람에 조선어 전공학과에서는 부득불 교수를 한어로 하였으며 심지어 현대조선어도 한어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반면에 한어 전공학과를 중지시키는 통에 조선족 중학교의 한어교원의 원천이 거의 근절되였다. 문화대혁명 전 전국 조선족교육에서는 단일민족학교 형식을 보통교육학교 운영의 중요한 형식으로 삼았으며 민족이 잡거하고 학생수가 적어서 단일민족학교를 꾸릴수 없는 곳에서만 민족련합학교를 꾸렸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단일민족학교 형식이 ‘지방민족주의’를 조장시키는 형식이라고 했다. 그 대신 민족련합학교 형식을 민족의 ‘융합’을 추진하는것으로 보았다. 1965년 훈춘에는 민족련합학교가 6개소였으나 1975년에는 17개소였고, 돈화는 조선족중•소학교 45%가 한족학교에 병합되였으며, 23%의 조선족 소학교가 없어졌다. 기타 지구도 이와 같은 상황이였다. 한편 학교에서는 조선어문교육이 여지없이 파괴되였다. 교수시간도 줄어들었다. 10년제 학교의 과정안에 보면 중•소학교의 조선어 교수시간이 소학교는 1,060교시, 중학교 540교시로서 문화대혁명 전보다 1,000여시간 적어졌다. 교수내용과 교수방법으로 보면 조선어 교수요강은 한족학교 교수요강을 수정하여 리용한것이였고 조선어교과서는 한어작품 번역교재였다. 조선족학교의 간부와 교원대오는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파괴당했다. , , 등으로 비판투쟁을 받은 사람은 부지기수인데, 연변대학에서 으로 된 사람은 29명이나 되며 그에 련루된 사람은 무려 80여명이다. 연길현 제5중학교(현재 조양천 제1중학교)의 교원과 종업원은 76명이였는데 여러가지 루명을 쓰고 투쟁을 받은 사람은 연인수로 무려 45명이였다. 그들은 라는 사상의식을 극구 선양하면서 , 를 배양했다. 그러한 수요에 따라 어문(조선어도 포함)에서 모주석 저작을 기본교과서로 하였다. 고급중학교에서는 『모택동저작선』, 소학교에서는 『모주석어록』을 기본교과서로 하였다. 물리교과서는 뜨락또르, 디젤유발동기, 양수기 등이 주요한 내용이였고 , 화학은 농업화학, 토양개량, 수학에는 부기와 측량, 조선어는 대비판문장, 소평론, 사상총화 등이였다. (5) 풍속•습관방면; 문화대혁명시기 모든 전통관념과 결렬하고 사회주의의 새로운 풍속•습관을 수립한다는 기치아래 모든것을 파괴하였다. 문화대혁명전 조선족마을에선 예전의 조선풍속에 따라 관혼상제를 지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의관으로부터 결혼, 생일, 회갑, 장례 지어는 상두막까지 불을 맞아 죽어서까지도 전통을 지킬 수 없었다. 한복이나 치마저고리는 반동적인것으로 되였고 누런 군복이여야 혁명적인것이였다. 결혼 때는 례단으로 『모태동선집』과 호미나 곡괭이가 오갔고, 혁명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였으므로 결혼날 아침까지도 일밭에 나갔다 왔다. 족보를 불사르고 혈육관계까지도 계급관계로 대체되였다. 총적으로 이시기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풍속습관 등 제분야는 뿌리뽑히다시피 되였다. 그런데 가슴 아픈것은 조선족자신이 자각적으로 이런 악과를 빚어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국제주의 혁명자의 자태로 자기의 민족적인것을 버리고 자각적으로 동화되였던것이다. 이시기에 투쟁비판을 받은 조선족간부와 군중들은 적지 않게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갔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민족절개를 굽히지 않고 자살로써 절개를 지켰다. 4. 중국조선족의 찌든 모습 오랜 력사의 비바람속에서 오늘까지 간신히 지쳐온 중국조선족은 찌든 모습으로 양상되고있다. 첫째 인구문제; 조선족 인구는 1964년의 133만 9,569명으로부터 1990년의 192만 574명에 이르게 된 사실로 보아 중국의 기타 민족의 인구장성속도보다 훨씬 굼뜨다. 1982년 제3차 전국인구보편조사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1964년부터 조선족인구 발전속도는 겨우 31.77%로서 전국인구의 평균장성속도(45.24%)에 비해 13.47%가 적고, 한족(43.82%), 전국 각 소수민족인구의 평균장성속도(68.24%)에 비해 각각 12.05%, 36.47%가 적다. 조선족 인구의 년평균 장성속도도 전국에서 제일 낮다. 1964년부터 1982년까지 매년 평균증장속도는 겨우 1.5%로서 전국인구의 년평균 증장속도(2.1%)에 비해 0.6% 낮고 전국 소수민족인구의 년평균 증장속도(2.9%)에 비해 1.4%, 한족(2.0%)보다 0.5%낮다. 앞으로 조선족 인구의 증장은 계속 하강선을 그을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조선족의 년령구조에서 중위수가 비교적 높고 소년아동계수(1982년 조선족인구의 28.36%)가 낮으며 로년계수가 높은데다 조선족 인구의 문화구성이 비교적 높기때문이다. 년평균 증장속도를 1.5%로 계산한다면 2000년에는 조선족 인구가 230만 7천여명으로서 겨우 30.7% 증장될것이다. (이 론문을 쓸 당시보다 10년이 지난 오늘 오히려 조선족인구는 증장폭을 보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마이너스 증장을 보여서 2백만을 초과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1982년 전국 각 민족 의 2000년의 인구예측은 다음 도표와 같다. 전국 각 민족 2000년도 인구 예측표 년도 1964 1982 1990 2000 비례(%) -------------------------------------------------------- 전국 691.220,104 100,391,400 112.3799,513 145.934,900 145.9 -------------------------------------------------------- 한족 651.296,000 936.675,000 1042.482,187 1337,806,000 142.8 -------------------------------------------------------- 조선족 1.340,000 1.765,000 1.920,597 2.307,000 130.7 ------------------------------------------------------- 좡족 8.386,000 13.383,000 14.593,330 21.243,000 159.9 -------------------------------------------------------- 회족 4.473,000 7.228,000 8.602,978 11.676,000 161.5 ------------------------------------------------------- 투쟈족 525,000 2.837,000 5.704,223 15.265,000 538.1 ------------------------------------------------------- 몽골족 1.966,000 3.411,000 4.806,849 5.909,000 173.2 ------------------------------------------------------- 묘족 2.782,000 5.021,000 7.398,035 9.007,000 199.4 -------------------------------------------------------- 인구과잉으로 세계가 아우성치고있는 오늘날 조선족 인구의 장성속도가 더딘것은 물론 좋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소수민족으로서의 자체발전에는 아주 불리한 인소이다. 연변의 2000년의 총인구는 287만, 1,874명으로 예산되는데, 그중 조선족 인구는 107만 3,673명 정도이고 한족과 기타 민족은 180만 8,200명이다. 이제 8년 후에는 조선족의 비례가 39.5%에서 37.4%로 하강될 것이다. 이런 속도로 줄어든다면 조만간에 연변의 조선족도 기타 잡거지구의 조선족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것임을 자명한 일이다. 둘째 경제문제; 경제문제는 민족발전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가 된다. 요 몇년래 연변과 기타 지구의 조선족경제는 발전을 가져왔다. 그런데 통계사업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래에 부득불 1982년의 통계자료를 따를 수밖에 없다. ①조선족의 재업(在業)인구는 91만 8,673명으로서 총인구의 52.07%인데 이는 전국의 재업인구(51.94%)와 전국 각 소수민족재업인구(49.21%)에 비하면 0.10%, 2.83% 높으며 한족의 평균수평(52.14%)과는 0.10%낮다. 조선족의 부재업(不在業)인구는 34만 5,846명으로서 총인구의 19.6%이고 그중 재학생이 8만 3,937명, 가무종사가 15만 1,375명, 승학대기 학생수가 4,027명, 국가통일배치를 기다리는 수가 564명, 취업대기인원이 1만 2,908명, 리직•퇴직인원이 3만 259명, 기타가 6만 2,777명이다. 재학생이 점하는 비중(24.27%)은 전국(18.16%), 각 소수민족(18.84%)과 비교할 때 각각 6.11%, 5.43% 높다. 가무종사인원(43.77%)은 전국(55.21%), 각 소수민족(55.65%)에 비하면 각각 11.44%, 11.88%가 낮다. 승학을 기다리는 수(1.16%)는 전국(0.10%), 각 소수민족(1.14%)에 비해 각각 1.06%, 0.02%가 높다. 국가배치를 기다리는 수(0.16%)는 전국(0..08%), 각 소수민족(0.11%)과 비교하면 각각 0.08%, 0.05가 높다. 취업대기인원(3.73%)은 전국(2.34%), 각 소수민족 (2.03%)에 비해 각각 1.39, 1.70% 높다. 퇴직인원(8.75%)은 전국 (7.92%), 각 소수민족(4.37%)에 비해 각각 0.83%, 4.38% 높다. ②조선족이 각 항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조선족 총인구와의 비례)은 전국,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의 평균수평보다 높다. 농업, 림업, 목축업,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54만 8,340명(59.69%)으로서, 전국(73.66%), 한족(72.89%), 소수민족(85.13%)과 비기면 각각 13.97%, 13.20%, 25.44% 낮다. 이는 조선족 집거구에서의 농업로동생산력이 제고되여 농촌의 일부 잉여로동력이 제2산업, 제3산업으로 전이하였음을 의미한다. 전력, 석탄가스, 수도물생산과 공급에 종사하는 사람이 4,334명(0.47%)이고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5만 8,744명(17.28%), 지질탐사 등에 1,841명(0.20%), 건축업에 1만 8,032명(1.96%), 교통운수•우전통신업에 1만 9,108명(2.08%) 상업•음식업•물질판매 등에 4만 7,841명(5.21%), 주택관리•공용사업관리와 복무업에 6,048명(0.66%), 체육과 사회복리사업에 1만 5,744명(1.71%), 교육•문화•예술업에 종사하는 인원이 4만 3,048명(4.69%), 과학연구와 종합기술복무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3,589명(0.39%), 금융보험에 3,882명(0.42%), 국가기관•정당과 군중단체에 2만 2,637명(2.50%), 기타 행업에 546명(0.06%)이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조선족 재업인구의 비중은 17.78%로서 전국(11.83%), 한족(12.30%), 소수민족(4.80%)의 평균수평에 대면 각각 5.95%, 5.48%, 12.98% 높다. 이는 연변의 민족공업에 일정한 발전이 있다는것을 말해준다. 전국과 한족, 소수민족의 평균수평과 비교할 때 조선족은 물질생산부문에의 종사보다 비물질생산령역의 인구비중이 비교적 높다. 물질생산부문의 조선족의 재업인구 비중(84.36%)은 전국(94.36%), 소수민족(95.16%)의 평균수평에 비해 각각 10%, 10.80% 낮다. 비물질생산부문 종사인원 (15.64%)은 전국 (5.64%), 소수민족(4.84%) 평균수평보다 각각 10%, 10.80% 높다. 셋째 언어문제; 와 에는 조선어와 조선문이 연변지역에서 위주로 되는 언어문자라고 규정하고있다. 하지만 연변의 조선족은 를 좇을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지금 연변의 농촌, 조선족 중•소학교, 신문사, 출판사, 잡지사, 방송국, 텔레비죤방송국, 문학예술단체, 조선학연구실체 등 분야에서는 조선족이 다수를 차지하고있는 까닭에 조선어와 조선문을 널리 쓰고있지만 조선족과 한족이 섞여있거나 조선족이 얼마되지 않는 국가기관, 공장, 광산, 상점, 림업 등 분야에서는 조선어와 조선문을 쓸 상황이 못된다. 연변지역의 많은 공장, 기업소의 사무용어와 일상대화는 일반적으로 한어로 되여있다. 그 까닭은 각 업종의 사무용어, 기술전문용어, 기계와 도구 이름 등이 거의 다 한어로 통용되기때문이며 같이 일하는 타민족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편리하기때문이다. 그리고 회의, 연설, 공문전달을 할 때면 한문으로 되여있어서 그것을 일일이 조선말로 번역하자면 많은 인력과 물력 그리고 시간을 들여야 하기에 시끄러움을 느끼기가 십상이다. 또 대부분 사람들이 한어를 알아들을수 있으므로 한어를 쓰는것을 오히려 간편하다고 느낀다. 그래서는 한켠에 밀어놓고 한어를 쓰는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언어사용에서의 동화현상은 날따라 짙어가고있다. 길림성 반석현 반석진 조선족의 언어사용실태를 례로 들어보자. 104명의 중학생을 조사했는데 그중 한어와 조선어를 겸용하는 학생이 88명, 조선어를 모르는 학생이 16명이다. 소학생 426명 중 193명이 언어를 겸용하고 223명이 조선어를 모른다. 26∼35세까지의 34명 중 33명이 겸용하고 1명이 조선어를 모르며 18∼25세의 70명 중 53명이 겸용하고 17명이 조선어를 모른다. 이상의 조사결과로부터 언어동화현상은 나이가 어릴수록 심화되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런 젊은 세대들은 연변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수 있다. 조선말을 아는 사람일지라도 한어의 충격을 받아 조선어사용에 혼란이 조성되여있다. 그런데다가 연변지방 사투리, 방언, 오역된 한자어휘 등 그외 한자어휘까지 뒤섞여있으므로 이 생겨났다. 조선족의 조선어 사용실태를 아래의 몇가지로 나누어볼수가 있다. ① 구두어에서의 한자어휘 람용:, , 등의 한어어휘들은 구두어에서 기본어휘처럼 쓰이므로 , , 등 우리의 말을 쓸 경우 어색한 기분을 주거나 의사소통이 안된다. ② 제멋대로의 한어어휘 직역: 공장장을 , 로동자를 , 랭동기를 따위로 쓰고있는데 벌써 일반화되여있다. ③ 조선말 문장구조에 한어어휘 차용: 출근을 , 퇴근을 , 휴식을 하는 등등 수두룩하다. 연변의 조선말은 한어화경향으로 번져서 범벅말이 된데다가 방언(주로 함경도 방언)에 지방사투리까지 욱실거려서 말이 아니다. 그 오염정도는 대학교의 교수, 문인들 입에서도 가끔 튀여나올 정도이다. 구두어에서의 한어와 방언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의 서사어와 탈절현상이 심하게 빚어져 조선어규범화표준이 그네타듯 뒤흔들리고 있다. 넷째 교육문제; 중국 조선족교육은 초보적으로 비교적 완정한 보통교육으로부터 대학교육, 기초교육으로부터 전업교육, 학교교육으로부터 업여교육에 이르기까지 민족교육체계가 형성되여있다. 현재 동3성과 내몽골자치구, 하북성의 조선족 잡거지구에 조선족의 중•소학교가 131개소이다. 학생수는 소학생이 10만 5,700명, 중학생이 5만 9,300명으로서 합계 16만 5천여명이며, 교직공은 소학교에 6,345명, 중학교에 5,136명 합계 1만 1,481명이다. 연변지구의 조선족 중•소학교는 도합 547개소로서 소학교가 435개소, 중학교가 112개소이다. 학생수는 소학교에 7만 3,247명이고 중학교에 4만 7,175명 도합 12만 432명이다. 교직공 수는 소학교에 4,691명, 중학교에 4,580명 도합 9,271명이며 승학률은 소학교가 96.4%, 중학교가 56.6%이다. 중국 조선족교육은 비교적 완정한 체계를 갖추었다고 하지만 교육발전이 경제발전에 적응되지 못하고있으며 사회발전 및 민족자체발전의 수요에도 적응되지 못하고있다. ① 교육구조 및 학교구성이 불합리하다. 몇년래 중등교육구조의 개혁에 따라 조선족의 직업기술교육은 일정한 발전을 가져왔으나 내지의 선진지구나 같은 지구의 한족 직업기술교육과 대비하면 발전속도가 늦고 기복이 크며 학교질량이 높지 못하다. 동3성 조선족 산재지구에 3개소(각 성에 한개소씩)의 직업학교가 있고 연변지구에 33개소(한족도 포함)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규모가 크지 않고 학생래원이 적으며 어떤 학교는 해산해야 할 상황이다. ② 농촌에서 조선족학교는 지나치게 분산되여있으며 구성이 불합리하고 학교규모가 갈수록 적어 학생래원이 결핍하고 학생들은 제대로 배울수 없다. 이는 인력, 재력, 물력의 과중한 랑비를 조성할뿐만 아니라 조선족교육의 질 제고에 직접 영향을 주고있는데, 조선족 교육위기의 주요한 한방면이다. ③ 소학교와 초급중학교의 교육질량이 하강되고 초급중학교에서의 량극분화와 학생류실 상황이 엄중하다. 1982∼1986년 심양시 조선족학교와 한족학교 학생의 급격률을 보면 한족 소학생이 97.4%, 조선족 소학생이 93.3%이고 한족 초급중학생은 77%, 조선족 초급중학생은 64%이다. 1985년 료녕성 조선족 소학교의 졸업생 승학시험의 평균점수는 78.87점으로서 전성 평균점수보다 2.83점이 낮다. 초급중학교 단계의 량극분화는 날따라 엄중해져 상당한 부분의 학생들이 초급중학교에 올라와서는 학습에 따라가지 못해 중도에서 퇴학한다. 초급중학교생이 만 3년 재교공고률은 적지 않은 농촌이 60%좌우이고 개별적 학교가 50%밖에 안된다. 이는 조선족지구에서 9년제 의무교육을 진정으로 실현하는데 직접 영향을 준다. ④ 조선족 초급, 고급중학생들이 졸업 후 더욱 높은 학교에 가서 계속 학습하거나 학교를 나와 사회활동에 참가하는 적응성이 낮다. 조선족학생, 특히 연변지구의 조선족학생들은 한어수평이 낮고 읽고 쓰는 능력이 차하므로 중등전문학교나 대학으로 간 후 한어말교수를 받아들이는데 직접 영향을 받는다. 사회로 나간 학생들은 한어수평이 낮은데다 로동기술능력이 결핍하고 취업에서 일련의 제한을 받고있으므로 취업 후에라도 능력을 발휘할수 없다. ⑤ 대학입학률이 날따라 떨어지는 추세이고 각 과목 평균 시험점수가 낮다. 1985년 료녕성 대학입학시험 각 과목성적에서 조선족학생의 평균성적과 급격률은 외국어와 조선어문을 내놓고 기타 과목에서 한족학생보다 평균성적과 급격률이 낮다. 연변지구 조선족학생의 중점대학과 보통대학의 록취률은 몇해째 뚜렷한 하강선을 긋고있는 추세이다. 연변학생의 문과와 리과의 시험과목 평균성적과 급격률도 전성의 평균보다 낮다. 다섯째 풍속•습관문제; 조선족은 아마 모방의 인 듯싶다. 해방 후 40여년간에 조선족들은 남의 것을 과대숭상하고 자기를 천시해왔으므로 민족의 참모습을 스스로 잃었거니와 빼앗겼다. 복장은 물론 집구조, 생활방식, 음식에 이르기까지 민족적인것을 상실해갔다. 이미 한복은 무대우에서나 볼수 있고 녀성들의 치마저고리는 명절이나 그 어떤 경축행사 때만 볼수 있을뿐이다. 또한 능가선무(能歌善舞)라는 조선족은 오늘날 춤과 노래에서조차 전통을 잃어가고있다. 최봉득씨가 연길시의 중학교 학생(초급중학생 172명. 고급중학생 115명)과 모 대학의 37명 학생과 51명 현임교원, 그리고 농촌학교 민영교원 37명을 대상으로 민의측험을 하였다. 그 결과 는 물음에 초급중학생 73%, 고급학생 73%, 대학생 54%, 현임교원 26%, 민영고원 54%가 고 대답했다. 또 라는 물음에는 초급생의 56%, 현임교원 20%, 민영교원 56%가 고 했다. 이상의 통계에서 보다싶이 중국조선족의 문화수용자세가 바르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감지할수 있다. 이는 민족정신의 곤핍과 무지를 설명해주고있다. 중국의 조선족은 민족적 음식문화의 영향보다는 한족 음식문화의 영향을 더 깊게 받고있다. 우선 한국의 음식문화 영향과 자연환경에 제약으로 말미암아 해어보다 육류를 많이 먹고있다. 돼지고기 소모량이 1950년대에는 매인 년평균 4.2kg이였는데, 1984년에 오면 16.24kg으로 증가된것이 그 실례이다. 료리로는 한족료리의 수법을 받아들여 볶음채를 먹기 시작하였고 밀가루음식이 많이 식탁에 오르게 되였다. 명절, 제사 때는 두부전, 콩나물, 도라지, 고사리 등으로 만든 우리 료리가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지만, 총적으로 식생활에서 우리의 음식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있는 추세이다. 볶음채가 김치, 국 등과 함께 부식의 기본으로 되였으며 물만두, 기름튀기 만두 등이 일상음식으로 되면서 젊은 세대들속에서 설기나 증편은 할줄 몰라도 물만두는 누구나 다 빚을수 있을만큼 익숙한것으로 되였다. 조미료도 이전의 생강, 소금, 간장, 후추 등 단순한 몇가지로부터 팔각, 산초, 부추꽃, 고수풀 등 다른 민족이 즐기는 조미료를 도입하여 10여가지로 늘어났다. 이상에서 보다싶이 조선족은 갈수록 인구가 줄어들어 한족과 기타 민족의 대해속에서 자기를 잃어가고있다. 순수한 자기의 언어, 자기의 교육체계가 흔들리고있으며 아울러 풍속습관과 음식까지도 동화되여가고있다. 오늘날 조선족의 모습은 동방례의지국, 백의민족의 모습과 멀리 떨어진 찌든 얼굴, 병색이 완연한 살결이다. 5. 중국조선족의 출로 찌든 모습, 병색이 낀 살결을 아름답고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시키는것은 우리앞에 나선 급선무이다. 그렇다면 중국조선족의 출로는 무엇인가? 이것을 알려면 병근을 짚어내야 할것이다. 13억 인구를 수용하고있는 중국이라는 대국에서, 쉼없이 가해지는 동화의 충격속에서 조선족이 민족공동체로서의 립체적 자세를 정립하고 참된 삶을 펴나간다는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첩첩한 산, 겹겹한 물을 헤쳐가야만 버드나무 우거지고 백화가 만발한 무릉도원을 볼수 있듯이 피나는 노력의 대가가 없이는 조만간에 자기의 민족적 주체성과 동질성을 잃어버리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조류를 직시하고 문제점들을 사정없이 파헤치고 갖은 방도를 대여 나아갈 길을 타개해야 할것이다. 우선 타향의식을 버리고 본토의식을 세워야 한다. 중국조선족은 월강이민으로서 조선반도에 대한 사념을 버리지 못하고있다. 이는 동방민족의 사향의식의 표현이다. 연변자치주내의 한 백화점 통계에 의하면 1991년에만 해도 3천원을 넘기는 양복이 매대에 내놓기 바쁘게 20여벌이나 팔렸고 천원좌우의 양복이 55벌이나 팔렸다고 한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연길시의 소비수준은 성내 8개 도시의 앞자리를 차지하고있는데 전성 소비지출의 23%의 자리를 차지하고있다고 한다. 오늘날 연길시에 촘촘히 늘어선 가라오케, 나이트클럽, 무도청 등 오락시설앞에서 아연해지는 해내외 관광객들의 소행에 동감이다. 고 소문이 나있다. 그러나 조선민족이 돈이 많다는데 비해 그럴듯한 기업소나 상업실체같은 것을 일떠세운것은 많지 못하다. 먹고 입고 노는 데는 남보다 앞서지만 통이 크게 사업을 벌리는 데는 아주 등한하다. 타향의식은 중국조선족으로 하여금 주인공자태로 삶의 터전을 굳히지 못하게 방해하고있다. 흑룡강성 수화현 조선족들이 근 몇년째 한국 등 외국에서 벌어온 돈은 인민폐로 무려 1억원이 되였는데 실업체 하나 세우지 못하고 거의 다 탕진한 상황이다. 그리고 연변의 돈은 관내 사람들이 벌어간다고 말하면서도 그 어떤 위험의식도 느끼지 못하고있다. 위험의식이 없고 새 생활에 대한 개척의식이 없는 민족으로 번지고 보면 앞날의 운명은 불보듯 번연한것이 아니겠는가! 력사에 대한 무지와 자기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의 결핍으로부터 생겨나는 지비심이 지어 조선민족의 음식문화에 대한 거부까지도 낳고있다.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중 열에 아홉은 한국음식에 실망하고있다. 중국료리처럼 기름지지 못하다는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발달되여가고있는 오늘의 한국음식문화가 중국 음식문화에 침투되고있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있다. 1980년대로부터 민족식료품공업이 회복 발전하고, 재래식 음식이 사회화•상품화하면서 전통음식이 울타리를 벗어나 관내에도 진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음식은 짠지, 김치, 국수, 불고기 등이다. 특히 짠지는 연해지구로부터 서북변강에 이르기까지 그 맛과 깨끗함으로 한족음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있다. 오늘 중국조선족의 자세를 바로잡고 주체성을 세우고 조선반도의 민족과 동질성을 영원히 보장하려면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것이 가장 중요하다. 조선족의 각급 학교 특히 중학교와 소학교는 조선족의 주체적 위상과 동질성을 살려감에 있어서, 또는 그것이 후세에까지 면면히 이어져가게 함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일으키는 분야이다. 하북성 진황도시에는 2백여호밖에 안되는 조선족 마을이 있다. 그들은 완전히 한족의 사면포위에 들어있으면서도 자기의 민족학교를 갖고있어서, 동화되지 않고 조선족으로 떳떳이 삶을 빛내고있다. 보다싶이 자기의 글과 말을 가르쳐주는 민족학교가 없다면 미래 중국에서의 조선족은 얼마나 가련한 처지에 떨어지겠는가. 그리고 교육내용에서 반드시 조선력사와 중국 조선족력사에 대한 교육을 중요한 위치에 놓아야 한다. 지금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중 태반이 력사에 대해 문외한이다(연변대학 력사학부에서만 가르치고있다). 중국조선족의 동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선말과 글로 된 방송, 털레비죤, 신문, 문학예술 등 언어광장을 보다 폭넓고 보다 훌륭하게 가꾸어야 할것이며 이미 있는 언어지도기관과 언어연구실체를 발전시킬수 있는 보완작업을 추진해야 한다. 그래야만 조선어문사용과 조선어문교육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인상시킬수 있다. 이상의 사업을 잘할수 있는 담보는 경제적 뒷받침이다. 중국조선족의 교육과 모든 신문, 방송, 출판 등 사업은 모두 중국정부의 재정지출로 운영되고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발전중에 있는 나라로서의 국가경제상황은 우리의 요구를 절대 만족시켜줄수 없다. 1980년대 초에만 하더라도 필자가 몸담고있는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에서는 매년 20여종의 문예서적을 출판했는데, 지금은 10여종도 어렵게 되였다. 민족도서 출판량이 대폭 주는 형편에서 중국조선족은 정신적 식량에 굶주리고있다. 경제면에서 조선반도의 지원을 바라지 않을수 없다. 벌써 한국의 경제적 부홍은 중국조선족한테 민족적 자부심을 불러일으켰고 아울러 중국내 기타 민족(한족을 포함)의 안목속에서 조선민족의 위치도 훨씬 높여주었다. 대련시 조선족 유치원에는 36명의 어린이가 있는데 그중 한족이 6명이나 된다. 이는 조선민족의 오늘 중국땅에서의 위치를 설명해주고있는것이다. 중국의 조선족과 조선반도의 겨레들은 한 핏줄을 타고난 동질민족이다. 그리고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 있는 조선민족 역시 그러하다. 오늘날 시간이 갈수록 좁아지고있는 지구우에서 우리 민족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면서 공동으로 발전해나가는 길이 민족부흥의 길일것이다. 특히 중국조선족으로 보면 이 길만이 유일한 희망의 출로이다.
1    우리민족의 전통장례문화를 이어가자--주청룡 평론원 댓글:  조회:3733  추천:0  2012-07-16
우리민족의 전통장례문화를 이어가자 (중앙인민방송국 조선말방송 오늘의 화제)   길림성인민정부발전연구중심 길림성인민정부조사연구실 중앙인민방송국조선말방송특약평론원 주청룡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우리민족의 전통장례문화를 이어가자”라는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사람은 태여나면서 그 어느때에 가서는 꼭 죽어야 한다고 세월과 어길수 없는 계약이 맺어져 있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모두 자기민족 장례문화가 있는데 사람이 죽게 되면 자기민족 장례풍속으로 장사를 지내는것으로써 자기민족 전통문화를 전수하고 있습니다. 하여 국무원에서도 장의관리조례 제 6조에는 “소수민족의 상장습속을 존중하여야 하며 자원적으로 상장습속을 개혁하는것을 다른 사람들이 간섭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족장례풍속》은 2009년 6월에 길림성정부의 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되여 나라 법률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무형문화유산 “조선족장례풍속”의 전승인이며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의 회장인 현룡수 회장을 찾아 조선족의 장례풍속이 길림성 무형문화유산에 들어간 형편에서 이것을 어떻게 전승하고 보호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 보았습니다.   현회장은 조선족 장례문화의 핵심은 “효도”이며 주체는 “례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많은 세월을 내려 오면서 찬란한 우리민족 장례문화를 창조하였는데 그 내용이 아주 많고 복잡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현시대에 와서 이러한 장례문화들이 많이 소실되였지만 고복(皐復: 혼을 부르는것), 렴습(殮襲: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 옷을 입히고 염포로 싸는 일), 명정[銘旌: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성명(姓名) 따위를 적은 조기(弔旗)], 안신제(安神祭), 소상(小祥: 돌제), 대상(大祥: 3년제), 청명제(淸明祭), 추석제(秋夕祭) 등 몇가지 기본적인 풍속들은 아직 보존되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회장은 또 조선족장례풍속이 길림성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것만큼 법적보호를 받고 실시되여야 하는데 연변 각 지방의 장의관에 모두 우리민족 장례문화에 맞춘 시설과 복무항목이 없어 조선족들이 자기 풍속에 맞추어 장례를 치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안타까운 점도 이야기 하면서 연변은 조선족자치주인것만큼 의례 조선족 장례문화에 맞는 시설과 복무항목이 있어야 하므로 지금 유관부문과 교섭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족의 장례풍속을 보면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로운데 이런 것을 모두 다 그대로 회복하기는 불가능 하며 또 절주가 빠른 현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전통장례의 기본정신을 계속하여 전승하여야 하지만 이미 간소하여진 우리민족의 현재 장례방법을 견지하면서 거기에 전통민족특색을 첨부하는것이 바람직 하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족의 장례풍속에는 조상의 무덤을 옮겨서 다시 장사를 지내는 면례(緬禮)도 포함되여 있습니다. 면례는 원래 조상들의 묘를 써서 십여년이 지난 후 길일을 택하여 낡은 묘를 파 헤치여 해골을 점검해 보아 깨끗하고 노란색이면 그 자리가 풍수가 좋다고 인정되여 해골을 잘 정리한 후 다시 그 자리에 묻는다던가 혹은 다른 좋은 자리로 옮길수도 있고 만일 해골이 깨끗하지 못하고 검은 색이면 그 자리가 풍수가 나쁘다고 인정되여 다른 곳을 선택하여 묻는것을 말하는데 일종의 효행이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지금은 면례가 개장(改葬) 혹은 이장(移葬)과 동의어로 되고 있습니다. “가난하면 이사하고 부유하면 묘를 옮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으면 조상의 묘소를 마음에 드는 명당이나 릉원에 옮겨 모시는것도 일종의 미덕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나라와 사회의 기본건설의 수요로 묘지를 옮기게 되면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면례가 많습니다. 현회장의 현지조사에 의하면 한번은 사회의 기본건설 수요에 의하여 연변 모 지방의 낡은 공동묘지의 묘들을 몽땅 옮기게 되였는데 많은 유가족에서는 조상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껏 우리민족 장례문화 례의를 지키면서 허용범위에서 새로운 장지(葬地) 에 옮겨 묻거나 화장터에 가서 화장한 다음 납골당이나 릉원에 모시지 않으면 하천이나 적당한 곳을 선택하여 살포(撒布)하고 있지만 일부 유가족들은 아예 파묘부터 우리의 장례문화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낮은 비용으로 맏기고는 해골을 화장하는 것을 지겨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해골을 맡은 사람들은 여러구의 해골을 한데 무져놓고 디젤유를 뿌리고 쓰레기 처리하듯이 대강 태워서 여기저기 뿌려 던지여 보기가 민망다고 하였습니다.   하여 현룡수 회장은 “조상의 해골을 쓰레기처럼 처리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문명과 인륜도덕의 차원에서 참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이며 반드시 정규적인 화장터에 위탁하여 문화적으로, 위생적으로, 존엄이 있게 화장하여 처리하는 것을 제창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개혁개방을 하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외국으로 나가고 성시로 들어갔는데 집에 남은 늙은 부모들이 사망하면 후사처리가 문제로 나서고 있으며 또 많은 조선족 젊은이들은 자기의 전통장례규범을 몰라 일단 상사가 나면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해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장례를 치러 남들을 웃기는 일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현회장은 현시대에 와서 조선족 장례복무 사회기제를 건립하는것이 아주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정부차원에서 하기 곤난하면 민간차원에서라도 조선족 장례복무 전업대를 조직하여 일단 조선족 가문에 상사가 나면 전화 한통으로 전반 장례사무가 원만하게 해결을 보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시 조선족 장례문화를 장기적으로 이어 나갈수 있는 보증으로 되므로 지금 여러방면으로 준비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6월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